김규식
'''독립 운동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성명을 해야 했다.
그래서 자기 본명을 자기도 잊곤 했다.'''
- 1945년 귀국 직후 인사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의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겠다.
남의 장단에 춤을 출 것이 아니다.'''
- 1948년 4월 남북 연석 회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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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독립운동가 중 누구보다 현실을 냉정히 통찰했던 당대의 엘리트로 손꼽힌다. 무려 9개 국어를 유창하게 회화할 수 있었던 '어학의 천재'로도 알려져 있다.[1] 광복 이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불렸으나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2]
2. 생애
1881년[3] 경상남도 동래부(현재 부산광역시)에서 동래부사 종사관 김지성(金智性)과 경주 이씨[4] 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지성은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였으나 민씨 정권의 대청과 대일 의존 정책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갔고 어머니 경주 이씨마저도 사망하여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됐다. 이 때 냉담한 어른들과 짓궂은 청소년들의 시달림 때문에 개인적으로 냉정한 성격이 됐다고 한다.
삼촌들은 형편이 안 되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에다가 그를 데려다 주었지만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은 8세 미만의 어린아이는 양육하기 어렵다 하여 다시 되돌려보낸다. 어린 김규식은 삼촌들에게 양육되었지만 가난한 형편의 삼촌들은 그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며 그는 굶주림으로 영양 실조와 열병에 걸려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고 이에 삼촌들은 그를 뒷방에 눕히고 병풍을 쳐놓았다 한다. 그 뒤 언더우드 목사는 아이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강원도까지 찾아간다.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딱한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당시 언더우드 역시 몸이 성치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분유와 약을 들고 직접 아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언더우드 목사 발견 당시 너무 굶주렸던 어린 김규식은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 삼키고 있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아이가 너무 딱하고 불쌍해 고아원에서 어린 아이를 돌보는 것이 어려움에도 결국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언더우드 목사의 주변 사람들은 아이가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고 하며 말렸고 아이가 죽게 되면 언더우드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덤터기를 쓸 수 있다고 경고했다.[5]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를 데려가 치료하고 극진히 간호했는데 어린 김규식은 건강을 회복한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교)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 이후 경신학교에서 영어,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그러나 고아인데다가 친척도 아닌 목사의 집에 산다는 것이 학교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었고 참을 수 없었던 김규식은 가출을 단행하여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한성 시내를 떠돌다가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 다시 강원도 홍천으로 되돌아갔으나 아버지도 곧 병으로 사망하였고 1884년 할아버지 김동선과 큰 형이 연이어 사망하면서 김규식은 의지할 곳 없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으며 이 시기 서재필의 독립신문 기자로 잠시 있기도 했다. 189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데 당시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1897년 버지니아 주에 있는 루터교회 계열 인문대학 로노크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웅변부 활동을 하면서 연설 경연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1900년 로노크대학으로 진학하여 문학 동호회 데모스테니언 문학회의 회장이자 1903년 전체 3등으로 학사를 취득했으며 재학 중 고종의 서자 의친왕(義親王)과 만나 교우 관계를 형성하였다. 훗날 3.1 운동 직후 김가진을 일제의 감시에서 빼돌려 망명시킨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919년 11월 대동단[6] 을 통해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는데 김규식이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였다는 점과 이 시절 모종의 교류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흥미로운 일이다. 1903년 대학 졸업 직후 미국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해 1905년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7] 프린스턴 대학원에서는 김규식이 박사 학위 과정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조국의 앞날이 염려된다"는 한마디를 남긴채 귀국했다.[8] 귀국 직후 YMCA학교 학생부 담당 겸 간사(학관의 학감)를 지낸다.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장학금과 도쿄외국어대학 영어 교수직을 제의받으나 거절한다. 조선총독부는 다시 사람을 보내 도쿄제국대학 동양학과의 장학금을 제의하였으나 김규식은 모두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사학교 설립과 독립군단 창설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1916년 앤더슨&마이어 회사(Anderson & Meyer Company)에 입사하여 장자커우 지사 등에서 근무했다. 1918년 상하이로 건너와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설하였고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회의 주최국인 프랑스 외무성 측으로부터 정부 자격이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을 듣자 그는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알렸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은 만세 운동을 준비하여 실행에 옮겼고 3.1 운동을 기회로 각지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된다.[9] 1919년 4월 그는 현지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지난 세월 나는 미국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지만, 지금부터는 조선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겠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 김규식은 신채호와 함께 창조파의 입장에 섰다.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실망감을 느껴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시정부를 떠나 1920년대 초 고려공산당 후보 당원으로 가입하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동방 노력자 대회(극동 피압박자 민족 대회)에 한국 대표 의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영국, 프랑스, 미국을 강도높게 비난했다.[10]본래 우리의 독립은 평화 회의나 모종의 유력한 단체로부터 승인을 받던지, 첩지(帖紙)를 내어 주듯 할 것이 아니오. '''우리의 최고 기관으로부터 각 단체 또는 전 민족의 합심과 준비 여하에 달렸나니, 이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독립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파멸이 있을 따름이오.''' 고로 금일 우리 민족은 그 멸취(滅取)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오.
- 1921년 1월 상해 환영회 석상에서의 연설
이후 1924년~1926년 초까지는 독립운동 일선에서 잠시 떠났다가[11] 1927년 2월 난징에서 유자명, 이광제(李光濟), 안재환(安載煥), 중국인 무광루(睦光錄), 인도인 간다싱, 인도인 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해 유자명은 중국 국민당 중앙본부에게 적극 후원을 약속받은 뒤 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동방피압박민족대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을 창간하고 1927년 톈진(天津)으로 옮겨가 북양대학(北洋大學)의 영문학 교수로 초빙되어 1929년까지 교수 생활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나 교수 생활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한계가 있었고 이조차 일본 영사관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느라 일정하지도 못하여 생계는 어려웠다. 1927년 차녀 김민애, 1930년 장녀 김한애를 병으로 잃었다.한민족은 홀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고 있다. 이웃 어느 나라도 한민족의 독립 투쟁을 돕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결국 아시아 이웃 나라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그때는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 한국이 힘을 합쳐 일제와 싸워야 한다.'''
- 1922년 7월 모스크바의 『공산평론』 中
1930년 8월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입각하여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학무장에 선임되고 1930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재선됐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김원봉이 남경중앙정치학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자 김규식은 남경중앙정치학원 한인 특별반의 군사 교관이 되었으며 1933년 남경중앙정치학원 영어 강사가 되었다. 1933년 4월 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500여 명이 모인 구류노류대학교에서 열린 한국 독립에 관한 연설에 강사로 참석했으며 7월 '중한 민중 대동맹' 대표 자격으로 다시 출국해 미국을 방문했다. 귀국 후 김규식은 7월 21일 하와이 한인 교포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김규식이 중국으로 떠난 뒤 동맹의 비밀 요원인 이용직과 한길수를 개인적으로 미주 대표로 임명하여 동맹과 정보 교신을 담당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12]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의 송병조, 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32년 겨울 중한 민중 대동맹, 대일 전선 통일 연맹, 한국 광복 동지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였으며 이후 항일 독립을 위해 민족 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다. 1935년 10월 12일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의 이유필, 송병조, 김두봉, 조선혁명당의 최동오, 한국혁명당의 윤기섭, 신익희, 의열단의 한일래, 박건웅 등과 함께 민족 유일당 창당 회담을 가졌다. 이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민족혁명당 주석 직에 올랐다. 1940년 민족 유일당 운동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구 등을 만나 회담을 하였으나 의견 차이로 유일당은 실패하고 대신 항일 공동 연합 전선 설립을 결정하여 민족혁명당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입각을 결정한다. 1940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해나갔는데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오철성 등, 임시정부의 엄항섭과 안원생 등을 설득해 재중 동포 중 기독교인의 우호 단체인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1945년 3월 임시정부는 김규식, 조소앙, 정환범, 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파견하려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승인과 군자금까지 결재를 받았으나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8.15 광복 후에는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귀국 제1진의 한 사람으로 김포 비행장으로 입국했으며 이후 거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의 삼청장으로 정했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과 한반도 신탁 통치안이 보도되자 김규식은 처음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다가 모스크바 3상 외상회의 전문을 입수하면서 부분적 찬탁을 동의했다.[13] 김규식은 국제적 합의를 무시할 수 없고 일단 통일된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임시 정부가 신탁 통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그는 반탁 세력에 의한 테러 위협에 시달려 수시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김규식을 암살하려던 자객들이 김규식의 자택인 삼청장의 담을 넘다가 걸려서 도주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미군정이 만든 최고 자문 기관인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에서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김구와 김규식이 올랐다. 1946년 3월 이승만이 '광산 스캔들'[14] 로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 의원 의장직에서 사임하자 의장 대리가 됐다. 미군정은 강경 우익 반탁 세력인 이승만 대신 온건한 중도파인 김규식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김규식은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추앙받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했다.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한 손으로는 '''하나님'''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민중'''을 붙들자.
- 1945년 11월 28일 연설
1946년 10월 남조선 과도입법 의원(입법 의원)이 구성되자 관선의원에 선임되고 12월 의장에 취임했다. 김규식은 입법 의원 명의로 북조선 인민 위원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입법 의원을 중심으로 민족 통일 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동시에 김규식은 여러 개혁을 통해 입법 의원을 민족의 자치 기구로 격상시키려 했다. 특히 친일파 청산과 토지 개혁에 관심을 쏟았는데 친일파 청산은 극우파의 경제적 기반, 토지 개혁은 극좌파의 정치적 기반을 흔들 수 있는 묘수였다. 김규식은 공식 석상에서 친일파 청산 문제에 적극적인 주장들을 여러차례 했었는데 1947년 새해 아침에 발표한 신년사#에서 김규식은 "특히 남북에 있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족 반역분자, 악질 모리배 등의 발호는 심하여 민생은 극도의 도탄에 빠지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는 비애국자의 진영으로서 계획적으로 남한에 있어서 공전의 소요 사건을 양출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1947년 5월 12일 열린 입법 의원에서는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에 대한 처단이 '민족적 명제'라고 밝히고 토지 개혁 법안과 함께 '부일 협력자 - 민족 반역자 - 전범 - 간상배에 관한 특별 입법 조례' 등을 조속히 통과시켜 줄 것을 주장하기도 했었다. 김규식은 친일반민족행위자야말로 자주적 통일 민족 국가 수립을 반대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극우파는 물론 미군정까지 이들 법안에 부정적이었지만 김규식은 미군정이 갈구하던 보통 선거법과 연계해 부일 협력자 - 민족 반역자 - 전범 - 간상배에 관한 특별 입법 조례를 통과시키지만 미군정은 이를 시행하지 않고 무시했다. 한편 입법 의원을 장악한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세력은 입법 의원을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들은 반탁 결의안을 통과시켜 중간파의 입지를 축소시켰으며 행정 조직법, 남조선 과도 약헌 등 단독 정부 수립을 암시하는 법안이 잇따라 제출됐다. 우익 세력이 통제를 벗어나는 행동을 여럿 하자 미군정은 다시 김규식을 찾는데 1947년 2월 미군정은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며 김규식과 중간파에 힘을 실어준다. 실효성 문제와 본인의 거부로 무산되기는 하지만 김규식을 미군정하의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할 계획이 세워지기도 한다. 다만 미군정은 김규식을 미군정의 얼굴마담으로 이용했을 뿐 김규식의 개혁 구상에는 소극적이었으며 김규식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미군정에 의존만 하기보다는 좌우합작운동에 힘을 쏟았다.(나) 보도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 도당은 장차 수립될 정부에서 권력의 완전한 장악을 기대하고 있다. 이승만은 자신은 대통령이 되고, 김규식은 부통령이, 김구는 국무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적대 행위를 추구할 것이다. 이승만과 김구는 괴뢰 정부와 신탁 통치 실시에 대한 항의 표시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이후 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이들의 죽음에 격분한 인민들은 조선 전역에서 민족해방 운동을 일으킨다. 이 운동의 선두에는 친일분자들, 민족 반역자들, 토지 개혁에 화가 난 지주들 및 반공주의자들이 나설 것이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남북분단 위기가 고조되자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했는데 처음에 김규식은 여운형에 비해 좌우 합작에 소극적이었으며 김규식은 좌우 합작으로 인한 우익의 분열을 걱정했다. 미군정의 지지는 김규식이 태도를 바꾼 전환점이었는데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 한국민주당에게 좌우 합작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도 지지를 선언했다. 덕분에 좌우합작운동은 급진전되어 1946년 7월 좌우 합작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김규식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북한의 소련군정 및 좌익 세력과의 통일 협상을 담당하는 대표 기구로 성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의 비타협적 태도로 좌우합작운동은 어려움을 맞고 좌익 3당 통합 문제로 여운형이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미군정이 나선다. 미군정은 박헌영 등 강경 좌파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좌우합작운동 지지를 재천명한다. 미군정은 미군정을 대신 해서 좌우 합작 위원회가 과도 입법 기구 수립을 제안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김규식은 과도 입법 기구 내 좌우 합작 위원회의 주도권 보장, 개혁 여건 마련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과도 입법 기구 설립에 소극적이었던 여운형을 설득하는 일도 김규식의 몫이었는데 좌익 대부분이 과도 입법 기구 설립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일은 여운형의 정치적 기반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15] 김규식의 설득과 여운형의 결단으로 좌우 합작 위원회는 과도 입법 기구 설치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한다. 한국민주당은 토지 개혁 조항을 문제삼으며 좌우 합작 위원회를 공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세훈#s-1, 김약수 등 한국민주당에서 좌우 합작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탈당했다.[16] 이들은 '민중 동맹'을 결성하고 이후 김규식의 정치 활동을 지원했으며 이후 민중 동맹은 중간파의 거점이 됐다.좌우 합작은 독립을 위한 제1단계요. 이 단계를 밟지 않으면 둘째 단계인 독립을 얻을 수 없다면 내가 희생하겠소. 당신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도 알고 있소. 또 떨어뜨린 후에는 나를 짓밟을 것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 내가 희생된 다음에 당신이 올라서시오.
좌우 합작 위원회의 지원에 힘입어 미군정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입법 의원) 설치를 공포하고 10월부터 선거 절차에 돌입한다.[17] 그러나 미군정의 기대와 달리 민선의원 선거 결과는 한국민주당과 이승만 세력의 압승으로 끝났다.[18] 김규식은 일부 선거구에서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재선거와 과거 미군정이 약속한 합의 이행 등을 요구했다. 선거 결과가 자신들이 바랐던 것과 다르자 미군정은 재선거 요구를 받아들이고 관선의원 대부분을 좌우 합작 위원회 인물들로 채워넣었다.[19] 그러나 좌우 합작 위원회의 지분과 개혁 지원 요구는 거부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운형 등 중도 좌익 세력은 입법 의원 참여를 거부했으며 입법 의원이 개원되자마자 미군정은 좌우 합작 위원회 해체를 요구했다. 김규식은 미군정의 요구를 거부하고 좌우 합작 위원회의 조직을 강화하여 독자적인 정치 조직으로 삼으려 했는데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김규식은 중간파를 결집하는데 애쓴다. 이 무렵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소식에 정계에 복귀한 여운형도 좌우 합작을 다시 함께 하는데 김규식과 여운형의 정치적 위상은 날로 높아졌으며 이들을 향한 극우파의 공격도 거세졌다.[20] 동아일보는 김규식을 사기 사건의 공범으로 매도했고 김규식의 자택에 괴한이 난입하려다 제지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우익을 협상에서 배제하려는 소련의 주장으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1947년 7월 결렬되었고 얼마 후 여운형마저 암살[21] 되며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했다.[22]내가 알기에는 공산주의라는 것은 천하에 몹쓸 것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내가 만주나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보았는데, '''러시아 사람들은 원래 대단히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레닌이 일어나서 공산 혁명을 일으킨 후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대단히 잔인해 졌다.''' 이것은 왜냐하면 결국 공산당이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한민족은 내가 알기에는 상당히 잔인한 민족이다. 그러니 공산주의만 되면 러시아 정도가 아닐 것이고 더욱 더 잔인해 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안 된다.
이후 김규식은 중도파를 결속해 1947년 12월 '민족 자주 연맹'을 만들어 총재가 되었으며 1948년 4월 남한 지역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정계를 떠났다. 남북 협상 이후 김규식은 좌파로 몰렸는데 그는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빨갱이로 몰리는 것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출마를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남북 회담이 성공하리라고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북한 쪽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조건을 내놓기가 쉽다. '''그러므로 북행하는 사람들은 희생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 1948년 4월 3일 북행을 발표하면서
1950년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납북되어 1950년 12월 평안북도 만포진이라는 곳에서 뇌출혈, 천식, 동상 등 이런저런 병으로 병사했다.[23] 남한 땅에서 총에 맞아 수백만 명이 슬퍼한 김구의 죽음이나 여운형의 죽음에 비교하면 그의 죽음은 한참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 정부와 이후의 군사 정권에서는 외면받아 오다가 1989년에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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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의 묘소. 평양 신미리의 애국열사릉. 뒤에 조소앙의 묘도 보인다.
3. 기타
- 임시 정부 소속이었는데도 좌우 합작과 남북 협상에 둘 다 참여한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는 점에서[24] 독특한 입지를 지녔다고 볼 수 있으며, 러일전쟁을 예견하거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성격을 이해하는 등 외교적 식견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정치를 할 만큼 통이 크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 몸이 약해서 항상 아팠다고 한다. 간질 증세가 수시로 일어났고 뇌종양 수술도 받고 신경통,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미군정 쪽에서 그에게 붙인 별명은 sickly(약골)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Kim Kiusic이라고 썼는데 미묘하게 비슷하다(...) 광복 후 어느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하는데 어디가 편찮으신 것이냐고 물었더니 김규식은 "차라리 안 아픈 곳이 어디냐고 묻는 게 더 빠를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장죽 담배 피우기를 즐겼다. 남북 연석 회의 차 북한에 가서 장죽 담배를 물고 문서에 서명한 일도 있었다.
- 처음에는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북 분단과 좌 - 우 정치적 지형이 극단화되어갈수록 이대로 있어서 안된다는 생각에 총대를 메고 나서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하나로 1946년 어느날, 이승만이 김규식에게 찾아와 좌우 합작을 권하면서 당시로는 큰돈인 50만원인가를 내놓자, 애연가인 김규식은 2자나 되는 긴 담뱃대를 집으면서 "형님은 대통령이나 하시오. 나는 대통(장죽 담배)이나 즐기겠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승만에게 "형님은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 댈 것임을 알고있소. 그러나 나는 독립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라고 발언했다고 한다.[25]#
- 어학의 천재로 다국어에 능했고 영어를 매우 잘하여서 미군이 놀랄 정도였으며, 임시 정부 활동 시절에 임정 요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신채호도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김규식이 발음이 틀렸다고 자꾸 지적하자 신채호는 단어 뜻만 알면 되지 발음은 뭣 하러 공부해야 하느냐고 서로 싸웠고, 신채호는 이광수한테 영어를 배웠다. (...)[26]
- 임정 시절부터 여운형과 형님 아우님 하는 매우 친한 사이였다고 하며,(여운형이 5살 아래로 동생이다.) 여운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 의외지만 1946년 4월 25일에 칼로 자살을 기도했다. 실패 이유는 이웃 사람이 방으로 뛰어들어 칼을 빼앗았기 때문. 사실 4월에는 김구나 이승만도 좋게 말하면 민족적 각성을 위해 자결을 고려한 바가 있었다.
- 성격이 매우 차갑고 냉소적인 편이라 인간적으로는 친해지기 어려웠다고 한다. 전형적인 학자풍의 성격으로 정치인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당대 인물들의 주된 평. 후일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 대행 겸 총리를 지낸 우양 허정은 그를 두고 '매우 냉정한 분' 이라는 짧은 평을 남겼다. 또 매우 현실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일평생 정치 생명을 담보로 모험하지 않았다. 여운형과 좌우 합작을 주도한 탓에 원조 통일 정부 론을 주장한 대표 격 인사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실제론 제의를 받고도 매우 망설였다고 한다. 실제로 남북 협상 당시에도 맹동 적이었던 김구와 달리 일찌감치 북한 정권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성격이었던 셈이다.
- 기본적으로는 깐깐한 원칙주의자였으나 의외의 면도 존재한다. 그 일화로 허정의 증언을 들 수 있다. 다른 임정 요인들과 함께 경교장을 방문한 허정은 김규식이 아들 김진동과 맞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공깽에 빠졌었다고. 이에 대해선 아마 그의 투철한 자유주의 사상 관에 입각한 평등 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추측만 이어질 뿐이다.
- 한편 민족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매우 부정적이었다. 민족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수도 있겠지만 사실 민족 그 자체에 예찬적인 태도를 견지할 의무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 하나 첨언하자면 최남선은 한국의 민족의 품성을 착하다고 규정하면서 친일 행각을 일삼았다. 또한,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한 반공주의자라고 알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속으로 드러난 입장이지, 적어도 공식적인 담화나 발표 글에서는 좀처럼 '반공주의'적인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27] 이는 광복 이후, 당시 좌익으로부터 각종 비난과 비판이 쏟아질 때도 김규식이 정면으로 좌익을 비난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가장 중요시했던 원칙은 '민족 통일 전선과 좌우 합작'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 허례허식을 매우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을 지지하던 청년 하나가 찾아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자 "왜놈들이나 하던 짓 쓸데없이 무엇 하러 하시는가?"라며 일축했다고.
- 프랑스 파리에서 임시 정부 외무 총장이자 파리 위원부 대표로 활동을 할 당시에 호찌민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호찌민이 김규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내용의 문건들이 프랑스 정부 자료에 자세히 담겨있을 정도다. 구체적으로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당시 프랑스 파리의 정보 경찰은 1920년 2월 메모에서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기고한 모든 글이 번역돼 중국에서 간행됐는데, 모두 호찌민이 김규식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김규식은 중국 신문의 미국 특파원을 호찌민에게 연결해줘 인터뷰를 주선하기까지 했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에는 호찌민과 김규식이 서로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친밀했다는 정황이 묘사되어있기도 하다. 호찌민 감시 佛 경찰 문건 대거 발굴… 한국 임시 정부 활약상 생생
4. 대중매체에서
- 1973년작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선 배우 추봉이 연기했다.
- 1979년작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 편에선 배우 윤덕용이 연기했다.
- 1981년작 MBC 제1공화국에서는 강부자의 남편으로 유명한 배우 이묵원이 캐스팅되었고, 1982년 8.15 특집드라마 <한: 단재 신채호 일대기>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 1985년작 KBS 대하드라마 <새벽>과 1991년작 <여명의 그날>에서는 동명이인인 성우가 김규식 역을 맡았고, 1990년작 8.15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선 배우 백준기가 연기했다.
- 1994년 2월 KBS1 <다큐멘터리극장> '정치암살의 희생자들' 2탄에선 성우 최흘이, 3탄에선 배우 맹호림이 각각 연기했다.
-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문회원이 연기했다. 좌우 합작을 방해한 김두한의 이런 과격한 행보에 매우 실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나 그럼에도 과거 김좌진과의 인연 탓인지 미군의 조사에서는 김두한을 애써 감싸는 모습도 보여준다.
- 2006년작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배우 이대로가 연기하였으며, 좌우 합작 설명 내레이션 때 대사 한 마디없이 말 그대로 그냥 지나가는 수준으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