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배 의문사 사건
1. 개요
1997년, 광주광역시에서 일어난 의문사 사건.
2. 김준배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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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배는 1970년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태어났고 1989년 광주대학교 금융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운동권 활동에 투신해서 율동패 "거멀뭇"을 만든뒤 본격적으로 운동권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후 광주대를 졸업하고 남총련 투쟁국장을 거쳐 한총련의 투쟁국장이 되었다. 그러나 1996년 연세대 사태로 이듬해인 1997년 한총련이 대법원으로부터 이적단체 규정을 받으면서 한총련 간부 대부분이 지명수배자가 되었고 김준배도 수배자로서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3. 의문의 죽음
1997년 9월 16일, 경찰은 김준배가 광주광역시 오치동에 있는 후배의 아파트에 은신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를 검거하러 나섰다. 김준배는 경찰이 자신을 잡으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건물 전체를 경찰이 포위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자 김준배는 최후의 수단으로 13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케이블선을 잡고 내려가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다. 경찰은 김준배가 도망치던 중 떨어져 죽은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국과수의 부검과 감정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김준배 사건을 지휘하던 검사는 김준배의 사망원인을 '''추락사'''라고 '''내사종결'''해버렸다. 게다가 유족들은 시신의 상태를 보고 경찰이 김준배를 구타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이 의혹에 대해서 당시 검찰은 수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김준배의 죽음은 의문사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4. 의문사위의 조사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을 재조사했다. 그 결과는 당시 경찰과 검찰의 추락사 발표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의문사위는 김준배가 아파트 외벽의 케이블선을 타고 도망친건 맞지만 3층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거나 혹은 뛰어내렸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김준배는 '''부상을 입었을지라도 살아있었을 가능성은 커지게 된다.''' 실제로 김준배의 죽음이후 김준배가 붙잡아서 손상된 케이블선을 복구하러 온 케이블 회사 직원은 아파트 3층정도 높이의 벽면에 사람 발자국이 있었고 그 밑으로는 보지 못했다는 증언을 했다.
또한 김준배의 시신에 '''신발자국'''으로 보이는 상흔이 있었고 직접적 사인인 우심방 파열이 추락으로도 구타로도 생길수 있다라는 법의학적 감정 소견도 나왔기 때문에 의문사위는 김준배가 3층정도 높이에서 화단으로 떨어졌거나 뛰어내린뒤에 경찰에게 붙들려서 구타를 당해 죽음을 맞은게 아닌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김준배의 은신처를 알아내게된 과정도 밝혀졌는데 김준배의 은신처를 알려준 사람은 바로 그의 후배였던걸로 드러났다. 경찰의 프락치로 학교 생활을 하던 그 후배는 단란주점에서 담당형사에게 두차례의 향응을 제공받았고 은신처를 알려주면 3500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에 자신도 이득을 보고 김준배도 새 인생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 제안에 응했다고 양심고백을 한것.
의문사위는 김준배의 죽음의 원인에는 당시 경찰의 한총련 검거령에 내건 '''특진 포상'''이 한 몫을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1997년에 경찰 수백명이 특진되었는데 모두 '''한총련 수배자를 검거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의문사위는 김준배씨를 구타해 사망에 이르게 한걸로 보이는 당시 경찰을 고발했으나, 광주고법은 그 경찰이 구타를 해서 사망하게 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판결을 내렸다. 의문사위가 재정신청을 했으나 재정신청도 기각된 상황. 의문사로선 거의 최근의 일이라 공소시효가 성립해 고발결과에 귀추가 주목되었지만, 한총련 자체에 대한 인식이 일반 국민들에게 안 좋게 보인 터라 결국 처벌은 없이 그대로 사건은 묻히고 말았다.
5. 이후
김준배는 사망 7년만인 2004년 2월 17일, 생전에 했던 독재정권 반대투쟁, 5.18 진상규명 투쟁 등의 공을 인정받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