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1. 개요
2. 유래와 성향
3. 운동권과 뉴라이트
4. 비판
4.1. 학벌에 따른 차별
4.2. 시위 및 집회에서의 비판
4.3. 권위주의 문화와 폭력적 성향
4.4. 반미 성향
4.5. 친중 사대주의
4.6. 편협성
4.7. 비뚤어진 역사관
4.8. 무책임함
4.9. 종북주의와 주사파
4.10. 성범죄의 온상
5. 총학생회
6. 2000년대 이후
7. 현재 분파
7.1. NL 계열
7.2. PD 계열
7.3. IS
7.4. PTR
7.5. 옛 CA 계열
7.5.1. 21C 계열(다수파)
7.5.2. 사회당 계열(소수파)
7.6. 환경운동
7.7. 인권운동
7.8. 아나키즘(?)
8. 참고/관련 문헌
9.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에서 정치/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진보좌파 성향의 대학생, 교수, 재야인사들 혹은 그들이 속한 단체를 통칭하는 말. 특히 교수나 재야인사보단 대학생 관련해서 많이 쓰인다. 원래는 독재정권 당시 친정부 언론에서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만든 표현이었는데, 딱히 대체할 만한 표현이 없기 때문인지 계속해서 쓰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스포츠, 천문학과는 전혀 관련없는 용어다'''.[1][2][3]
이에 대비시켜 정치색 없는 비운동권, 혹은 반대되는 반운동권이란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만, 후술되어 있듯 민주화 이후 동력이 대폭 떨어진 현재는 사실 운동권이니 비운동권이니 비권이니 반권이니 하는 표현 자체가 대학가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 요즘은 비운동권 학생회가 다수다보니, 어쩌다 운동권 학생회가 세워지면 '아직도 운동권이 남아 있었어?'라는 시선을 받기도 한다. 물론 학교별로 상황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성향에 관계없이 학생회라는 조직 자체가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보니,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한 운동권 대 조직화된 비운동권간의 대립 같은 것도 이젠 다 옛말이 되어버렸다.
2020년 현재는 대학 내에 이 문서가 서술하는 운동권은 본인이 운동권이 되기 위하여 억지로 찾아나서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이 없다. 대학이 취업 사관학교화 되고, 계속되는 취업난으로 인하여 '취업에 도움되는' 동아리가 아닌 이상 새내기들이 가입하지 않기에 신규 유입자체가 없다시피하다. 상부조직들은 00년대 학번들이 명맥을 잇고 있지만[4] 하부조직은 궤멸 수준인데, 일부 조직의 경우 생존을 위해 과거라면 비판의 대상이었을 민주당계 리버럴들을 받아들이다가 이들에게 밀려나 자신들의 조직을 잃고 쫒겨나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다.

2. 유래와 성향


운동권이란 표현이 널리 사용된 것은 80년대부터이다. 학생운동이 학내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점하면서부터 상술했듯 친정부 언론에서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이 표현을 즐겨 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대중들에게도 이 표현이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자타공인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핵심세력이었다. 하지만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노선논쟁이 본격화되는데, 다시 말해 '''"민주화가 되었으니 앞으로 무슨 운동을 할 것이냐?"'''란 논쟁이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분파가 형성'''되고 이는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5] 당시엔 정말 무협지처럼 다양한 노선 논쟁이 있었는데(김영하 작 무협학생운동), 이 중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것은 NL-PD 논쟁이다.[6] 이는 사구체 논쟁에서 촉발된 것으로, NL-PD와 관련 된 내용은 따로 항목이 있으니 서술 생략. 물론 이 당시 NL이 지금과 같지도 않고, 이 당시 PD가 지금과 같지도 않지만 이 흐름은 아직까지도 한국사회 운동세력 내에 커다란 구분선 중 하나이다. 현재 NL-PD 구분은 거의 통일운동 vs 노동운동 대립구도를 대신하는 단어로 쓰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NL 계열은 학생운동권내 최강 조직이자 NL의 심장[7]이던 한총련이 유명무실화되고 한총련의 뒤를 이은 한대련의 경우 적어도 겉으로는 한총련과 같은 기조를 유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2010년대를 전후해 수도권 일대의 NL계열(구 노선대. 소위 경기동부연합계)이 조직력을 이용해 주류가 되면서 다시 한총련화가 진행되었다. 물론 전투력은 한총련 시절에 비할바는 못되지만...) 아무튼 현재 NL계 학생운동계 최대 정파는 한대련이며, 현재 학생운동 내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다.
PD 계열(소위 좌파)은 소련의 붕괴 이후 엄청나게 분화하게 된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전국학생연대회의(구 대장정 / 현 행진) - 전국학생대표자협의회(구 전국학생연대 / 이후 대학생 사람연대, 청년좌파로 이어짐)의 이분구도였으나 전학협이 해체하고 PD-NL을 아우르는 정파였던 21세기 진보학생연합 역시 해체하면서 그 숫자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PD 경향 정파는 연대회의를 계승하는 전국학생행진, 다함께를 계승하는 노동자연대 학생그룹[8], 전학협을 계승하는 청년좌파, 그리고 사노위,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를 계승하는 사회변혁노동자당 학생위원회, 옛 진보신당의 잔존세력인 노동당 학생 지부들과, 현재 운동권의 유일한 원내정당인 정의당 학생위원회 정도만이 남아있다.[9]
80년대 시위의 꽃이기도 했다. 시위 당시 시위대와 전경방패부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으면, 양 측면에서 백골단으로 대표되는 군사독재 정권의 시위진압부대가 '''"야! 살(殺)!!"''' 이란 구호와 함께 덮쳐오는 진압전술이 자주 등장했는데, 이때 양측에서 '''사수대'''라 불리는 학생들이 백골단과 방패부대의 압박을 저지했다. 그리고 나머지 대오가 플랜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팜플렛을 길거리에 살포하거나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식의 집회가 전개되었다. 결국 후자를 위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던 것.[10]
80년대에는 집회 대오 중 가장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유한게 학생대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당시 선도적으로 이슈파이팅을 하던 사실상의 유일한 집단이 학생운동권이었고, 당연히도 집회에서 앞장서는 역할을 맡았다. 심지어 학생들의 면학분위기 형성과 건전한 대학생활 홍보에 일임해야 할 대학신문, 대학방송국 역시 운동권의 나팔수로 만들게끔 했다.

3. 운동권과 뉴라이트


의외라고 느낄지 어떨지 모르지만, 뉴라이트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은 사실 '''운동권 출신들이 많다'''.# 애초 국내에서 뉴라이트를 주도한 세력 자체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주사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국내 정치 분파들이다 보니 이들을 포괄적으로 뜻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즉, 젊었을 때 운동권에 몸담아 열심히 좌향좌하던 사람들이 세월이 지나 방향을 180도 돌려 열심히 우향우한 결과물이 바로 뉴라이트.
다만 이들을 대안 우파까지는 볼 수 있어도 극우라고 단정짓기엔 좀 애매한 것이, 독재자에 대해선 남북 모두 열렬히 까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쪽 독재자에 대해선 애매한 태도로 조용한 사람, 심지어 찬양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 보수라고 확 정의내리기도 좀 애매하고... 이 내에서도 분파가 좀 다양한듯. 지만원 같은 극단적 발언에서 호응을 얻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자폭을 당하는 안습한 처지지만(...). 독재시절 고문을 받았음에도 우익으로 전향하여 대외 이미지가 피해자로써 완전히 상반된 경우도 있다. 그래서인지 2010년대엔 여기에서도 나와 따로 활동하는 소위 운동권-뉴라이트 출신인 사람들도 많다. 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중에서도 김완섭이라는 친일파가 존재한다. 파벌중심의 풍토를 보여주듯 그는 경상도 혐오 감정이 강하다.
운동권이었던 그들이 이런 전향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냉전의 붕괴 과정에서 겪은 소위 멘붕 때문이었다. 흔히 운동권 소속 청년들은 좌익 운동권 선배들의 영향으로 당시 한국 사회와 미국 등에 대해선 대단히 부정적이었던 반면, 북한이라든지(NL의 경우), 소련 공산주의(PD의 경우) 등에 대해서는 이상적인 부분만을 취사적으로 받아들여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운동권이 최극성을 이루던 80년대 말 압도적 화력을 선보였던 이들이었으나, 1990년대가 시작되면서 소련의 붕괴, 독일의 통일, 동유럽의 몰락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 일제히 몰락하고, 90년대 중반들어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탈북자 등을 통해 그 실상이 밝혀짐에 따라 상당수가 그제서야 '''"우리가 속았다!!"'''는 충격을 받아 멘탈붕괴했던 것이다.[11]
이 와중에 기존에 있던 한총련(한국대학생총연합회)은 시대에 제대로 변화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96년 한총련 사태1997년 프락치 오인 살해 사건, 1999년 민혁당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90년대 운동권 내부에서는 통렬한 반성의식이 소용돌이쳤고 이 때 운동권 인사들 중 상당수가 우익으로 전향하는 사례도 나왔다.[12] 그러나 사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전투종족적인 강경성은 어디 가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권 특유의 저돌성을 고수하는 상태에서 방향만 180도 튼 꼴이 되어버렸고, 그것이 바로 지금의 뉴라이트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뉴라이트 주요 인사로 불리는 인물들의 프로필을 보면 의외로 젊은 시절 운동권 이력이 있거나 운동권과 관련이 있었던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실제 운동권 경험을 해 보았던 이들이기 때문에 과거 운동권에 대해 누구보다 그 생리를 빠삭하게 꿰고 있으며, "운동권 활동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고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등, 운동권에 매우 적대적이 되어서 극단적인 좌향좌에서 극단적인 우향우로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다만 우향우가 되어서도 군사정권 관련해선 적대적인 기질을 드러내, 우파 내에서도 비주류로 노는 경우도 많다(...).[13] 물론 애초에 이런 전향은 좌우 가리지 않고 동서고금 이래 꾸준히 있어 온 일이긴 하다.

4. 비판


과연 그들의 투쟁은 대한민국 정부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었나? 그게 아니거든요 본질은...

전 CA소속 권영신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386운동권들은 조선시대 사대부들과 똑같은 사고를 갖고 있어요. 저는 이들이 조선시대의 망령들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도덕적으로 옳다, 정의롭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이런저런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리스크와 싸우면서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옳다, 우리가 과거에 정의를 위해 투쟁했다’고 하는 당위만 가지고서 도덕을 얘기합니다. 자기들의 정치권력,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그 기득권을 쭉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조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면서 기업과 상인, 과학기술자, 의사 같은 전문가 집단을 공격하고 있죠. 자기들은 사대부, 위 집단들은 상민이나 중인으로 생각하는 거죠.”

가장 큰 문제는 자기들이 아직도 젊은이인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철들지 않았다는 걸 너무 공개적으로, 또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요. 젊은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 사람들은 ‘꼰대’들입니다. 그런데 꼰대가 되기 전에 한 번은 철이 들어야 하거든요. 어르신들 말씀대로 어렸을 때는 아이다운 모습이 있어야 하는 거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단계마다 해야 할 일과 모습이 있는 겁니다. 나이 먹어서 꼰대가 되는 건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철도 안 든 꼰대는 곤란합니다.”

동양철학자 임건순#

운동권이 80년대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 과정에 '''공헌한 바가 크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중국 등 민주주의 의식이 약한 여타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대한민국에 민주주의 의식이 뿌리깊게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불의에 항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권이라는 이름만 빌려온 채 독재세력과 별 다를 바 없는 폭력성과 악습을 새로이 개발해 사회에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자신들을 선과 정의로 포장하면서 반대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회운동가들이 아직도 일부 존재하는데다, 거기에 더해 소위 진보좌파를 표방한다는 자들이 그들의 정치관, 민족주의관, 사고방식은 여전히 그 시절에 정지해있는 상태라는 문제가 있다. 당장 광화문에서 나타나는 대오 전방의 일련의 무리들, 머리띠 맨 사람들이 무기나 흉기를 들고 보여주는 폭력, 정치극단주의 등을 보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전무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강하게 든다.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은 선악의 대결이 아니라 그냥 그들의 적들과 같이 권력을 잡으려고 애쓰는 놈들이라고도 한다.
즉,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무력을 써서 찍어누르려는 행동, 자신이 원하는 사람만 대통령으로 인정하겠다는 태도는 그들이 적으로 간주하는 수구꼴통 세력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을 비롯한 몇몇 사건의 당사자들 주장을 보면 수구를 넘어서 '''고문으로 거짓자백을 받아내던 독재정권'''이랑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이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같이 운동 과정에서 무고한 인명이 희생됐는데도 대다수 운동권은 반성조차 하질 않았다.[14] 비판적으로 대하는 입장에서는 필요할 때만 민주주의, 인권을 들먹이고 적대세력에는 적용하지 않는 이들은 절대 민주주의세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운동권들이 당시엔 안그랬는데 후에 시간이 흐르며 변질됐다고만 보기도 어렵다. 김대중조차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가장 대화가 힘든 상대는 운동권 학생이나 노동자 대표들입니다. (중략) 상당수는 자기 주장만이 옳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타락했고 반동이라는 식으로 단정하곤 하여 참 어이가 없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중략) 민주주의를 위해서 독재와 싸운다는 사람들이 남에게 말할 권리를 주지 않고, 내 주장만 한다는 것은 하나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대중의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다만 어쨌건간에 운동권이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당하며 자기가 생각하는 기존 사회의 악습에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강렬하게 저항하는 즉, 방향성에서 상대적 정의나 사회적 약자쪽에 위치해 있다는 포지션이 컸고, 또한 한국사회에서 경찰이 걸핏하면 악역 위치에 강제당하는 덕택에 이들이 선역에 위치되고 심지어 대중들에게 지지받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실상은 저 경찰들 역시 본인 사상에 상관없이 '''징병제 혹은 가정을 위해''' 그 자리에서 있던 것뿐이지만. 사실 연세대 사태 등 한총련이 욕을 처먹은 이유도 본인 사상 상관없이 자리만 지키던 경찰을 죽였던 이유가 크다. 후에 '그 경찰을 거기에 세운 독재정권 잘못이다!' 라고 변명했지만 한총련이 병크를 일으키던 때는 최소한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시절로 '''독재정권 시절이 아니었다.'''
하지만 민주화를 이뤄낸 후의 한국에선 예전만큼 대중의 큰 호응을 받지 못한다는 게 문제. 강경하면 폭력과 배타성으로 욕먹고, 온건하면 존재감이 잘 드러나질 않으니(...). 이것은 사회상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운동권과 같은 세력은 필요가 없어져 자연스럽게 도태된 것에 가깝긴 하다.
특히 현재는 운동권 부모에게 시달려온 자녀들이 인터넷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비판이 두드러지는 것도 있다. 이들이 신흥 우파로 나아가는 경우도 많다.[15] 엄마/아빠가 집안은 내팽개치고 시위를 다니거나 혹은 반미/반일 시위에 자식을 끌고 가려고 하는 등, 허구헌날 민중가요를 틀어놓거나 아직도 80년대를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무엇보다도 자유와 인권을 외치고 진보정당을 찍으라고 강요하면서도 평소 생활상은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을 보이는 등의 모습을 보면 그 자식들은 운동권이고 뭐고 꿀빠니즘으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도 정치적으로는 진보이면서 문화 의식은 수구(?)라는 예일수도 있다.[16] 사실 부모세대와 정치성향이 반대가 되는 현상은 그리 드문 것도 아니다. 당장 운동권도 그 윗세대 기득권에 대한 반발로 좌파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운동권 출신들이 자리를 많이 잡은 현 정부에서, 인사 문제같은편 봐주기, 권위주의적 모습과 '''내로남불''' 같은 운동권의 특성에 의하여 상당한 잡음이 일어나고 있는지라 비판이 점점 커지고 있다.
한마디로 그놈이 그놈인 것으로, 이런 성향이 그대로 굳어져서 시대가 바뀌어도 적응하지 못하고 사방에 똥물을 튀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에 대한 비판은 임지현(역사학자)외 10인[17] 2000년에 출판한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이책은 단순히 운동권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해부하는 책이지만, 학계와 언론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다.

자신만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좌파들의 도덕적 폭력은 극우 반공주의의 매카시즘적 폭력과 결을 같이한다. 상대방에게 이러저러한 딱지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권력 지향적 글쓰기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좌파들의 논쟁 또한 권력 지향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안의 파시즘> 본문 중에서


4.1. 학벌에 따른 차별


운동권의 주축 중 대부분은 소위 명문대학교 재학생, 혹은 그 출신들이 독점하였다. 운동권 세력판도가 NL, PD 계파로 분류되기 이전에 이미 출신 대학에 따라 서열이 갈려지는 셈이었는데, 명문대 출신과 3류대 출신이 똑같이 운동권 활동을 벌일 경우 3류대 운동권은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는 비웃음을 사고, 해당 학교 학생들의 호응도 이끌어내기 어려워서 적극적으로 운동권에 개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심한 경우에는 명문대가 주축이 된 운동권 조직이 3류대 학생회에 개입해 학내분규를 조장 혹은 학생회 자금만 유용해 버리고 발을 빼는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 학벌과 학력 덕분에 명문대 출신들은 사회에서 한 자리씩 하는 선배들의 도움을 받거나, 사상적 전향 이후에도 국가고시든 어디든 먹고 살 길과 능력이 있었지만[18], 3류대가 운동권 전력을 가질 경우 앞날이 심하게 암담했다(...). 운동권 활동한다고 성적도 좋지 못할 경우 구직에 직접적으로 지장이 가다보니, 평판도 나빠지고 낙인이 제대로 찍혀서, 따로 먹고 살 만한 능력이 없는 이상 정말 미래가 답답해지는 것.[19][20]
게다가 3류는커녕 아예 대학조차 나오지 못한 일부 노동자 출신 운동가들은, 위장취업했다 전향하거나 위장취업을 포기하는 등의 여러 이유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 운동권들을 보며 '돌아갈 집이 있다는 말이 저런 것이었구나'라며 더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애초 386은 학생만 조명했지 노동자들은 들러리일 뿐이었다는 것.(참고영상)[21]
여담으로 이런 운동권 출신들의 악습적인 학벌 차별[22]을 줄곧 당한 인사 중엔 고졸 출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있었다. 그래서 유시민 전 장관의 경우 "일부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힌 운동권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싶었다"며 서울대 출신인 자신이 고졸인 노무현을 공개지지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영상.
이런 경향은 그 뒤에도 여전하다. 2006년 인천 5.3 운동 20주년을 맞이해서 다양한 기념행사들이 열렸는데,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명문대 학생운동권들, 당시 지역공장에 위장취업했던 학생운동가들(일명 학출) 일색이었고, 당시 시위대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평범한 노동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노동자들이 가두정치투쟁에 나섰던 최초의 투쟁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노동자는 빼버리는 코메디를 연출한 것이다.관련기사

4.2. 시위 및 집회에서의 비판


과거의 시위대 하면 흔히 '''꽃병과 파이(화염병과 쇠파이프)''', 그리고 '''바리케이트와 짱돌'''로 대표되는 폭력시위를 연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1980년대에는 부미방 사건이나 5.3 동의대 사건처럼 시위 도중 진압경찰이나 민간인이 죽고 다치는 경우도 있었고, 90년대 들어서는 폭력시위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게 극단적으로 폭발된 게 1996년 연대 한총련 사건이였다. 이 때를 계기로 내부적으로 "필요 이상의 폭력시위는 자제하자"는 비판이 돌았고, 2000년대를 기점으로 학생운동권의 전투력은 급격하게 감소했다. 2006년 평택 미군기지 반대 시위 정도가 학생운동권이 마지막 전투력(?)을 보여준 때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론 무기가 등장할 정도의 굵직굵직한 충돌은 대부분 노동조합 대오와 전경들 사이에 벌어졌다. 오히려 학생대오가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전투력이 하락해, 집회 때 전경 밀고 들어오는데 등돌려 도망가기 등으로 되려 시위대에게 위험한 상황을 만든다는 비판이 나올 지경이라나(...).[23] 고대 전투던 현재 전투던 이런 식의 퇴각은 최악의 전술이다. 이럴 경우 뒤에 있는 대오랑 엉켜 우르르 넘어져 부상자가 나오기 일쑤다. 지도부나 경험이 많은 참가자는 이쯤 되면 상황이 안 좋아지면 알아서 도망가지만, 뒤에 있던 일반 참가자는 그게 아니니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는다.

4.3. 권위주의 문화와 폭력적 성향


일단 들어가기 전에 오해하지 말아야할 점은,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반의어가 아니다.''' 권위주의의 반의어는 자유주의다. 오히려 권위주의의 형태로 민주주의가 돌아가는 '''권위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있을 정도.
내부적으로 지나치게 엄격한 생활계율[24]을 적용해 내외로 비판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노자 교수가 과거 운동권의 문화를 비판한 적도 있다. 특히 NL 계열의 경우 주체사상의 수령론 및 품성론 영향으로 인해 이러한 권위주의 문화가 매우 심했다.[25]
80년대에는 선후배 간의 체벌도 꽤 많았다고 하며, 몇몇 학교들은 2010년대 중반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가령 새내기에게 똥군기 잡는다고 한 학번 위의 학생들을 집합시켜서 기합을 준다든가... 놀랍겠지만, 사실 80년대에 대학문화 자체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당히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다. 특히 NL 진영의 구호인 '''"미제와 청와대 독재 아래 신음하는 우리의 딸들..."''' 운운이 있다. '''왜 굳이 독재 아래 신음하는 민중을 꼭 '여성'으로, 성적 표현으로 환원시켜야 했을까?''' 이 때문에 NL운동권들과 여학생회는 늘 대립을 하기 일쑤였다.[26]
이런 문제는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학생단체에서 여대, 여학생의 비중이 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긴 했다. 하지만 아직도 좌파 운동에선 이런 성차별적인 윗대가리들이 꽤 남아 있어 진보마초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20세기 당시에도 권위주의적인 학생운동에 대한 비판이 PD계열로부터 제기되어 꾸준히 담론화되었다.
즉, '''권위주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자는 이들이 도리어 권위주의 노선을 들여오는''' 이중성이 문제. 단, 문제가 되는 수직적 구조는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많이 개선되어, 타 학생 동아리에 비해 두드러질 만큼 존재하진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이 사실상 권위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흘러 오히려 이상한 물을 들여 놓았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가령 집회 때 줄 맞추어 앉게 한다고 파시즘이라고 한다거나...(집회 때 줄 맞추어 앉는 것은 통행에도 좋고, 여러 명이 앉기에도 좋다.)
이러한 성향이 나타난 데에는 운동권이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만 있었지[27]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형적 자유민주주의자였던 김영삼-김대중[28]을 지나 운동권이 장악한 한국 정치가 지속적으로 권위민주주의로 흐르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꽉 막힌 운동권의 위계질서는 폭력적 성향과 맞물려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끔찍한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운동권의 폭력적 성향은 90년대에 정점을 찍었으며, 결국 이종권 치사 사건이석 치사 사건을 초래하였다.

4.4. 반미 성향


이들은 명분상 제국주의나 비뚤어진 부르주아 문화 조장을 내걸기도 했으며, 일부 과격 단체들은 "영어를 사용하지 말아라"[29], "프로야구를 보지 말아라"[30] 등의 터무니 없는 계율도 있었다고 한다.
정파나 학교에 따라 다른지라 특정 노래나 책[31]을 못보게 하는 계율이 존재하는 곳도 있었다. 실제로 과거 신입생들은 멋 모르고 불렀다가 선배들한테 괜히 혼났다는 일화가 전해져오기도 하는데, 80년대 후반에는 과 학생회실에서 통기타를 치면서 존 레논의 'Imagine'을 불렀다는 이유로 선배한테 혼나는 경우도 있었으며[32], 서울대 96학번이 신입생일 무렵엔 마이클 잭슨의 춤을 장기자랑 때 췄다가 "다 좋은데 양키 노래라 좀 싫다"는 말을 들은 일도 있었다고 하며, 국산 대중가요조차 '상업성 조장'이라며 아예 금지됐다.[33][34] 물론 2000년대 들어서는 이런 극단적인 계율들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대학마다 선-후배로 이어지며 이런 구태스런 운동권 동아리가 남아 있어, 아직도 여기저기에 '미제타도' 벽보를 붙인다거나 마이크 들고 반미를 외치기도 한다.
이들은 북한의 대남 도발에는 입을 꾹 다물거나 옹호하면서도, 미군의 범죄나 사건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으로 대응한다.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가 대표적인데, 유가족들의 자제까지 묵살하는 행태를 보인바 있다. 이 뿐만 아니라 패트리어트 미사일이나 사드 배치, 용산 기지 이전 등의 문제에도 언제나 미군 철수를 종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의 미국에 대한 반감은 나이를 먹은 후에도 변함이 없다. 과거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미국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도 서방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중국 공산당의 민주집중제이다. 운동권이 학창 시절 학습했던 민주주의론에는 자유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법의 지배,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 등은 운동권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2004년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7월 23일 향후 당 운영계획과 관련, “당을 `민주집중제’로 운영해 `108 번뇌’라는 말이 다시는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2016년에는 더불어 민주당의 이목희[35] 정책위의장이 당 기본원칙으로 민주집중제를 주장한 바 있다#. 진중권은 과거 운동권의 민주집중제가 현재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민희 : 우리는 이미 4400만분 확보 했구요, 여론조사를 보면 바로 백신 접종 받겠다고 하는 비율이 굉장히 낮아요. 안정성이 확보되면 맞겠다는거죠..

이준석 : 그 논리라면 안정성이 가장 높은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을 구해야지, 왜 3상도 안끝난 백신을 구합니까?

최민희 : 뭘 잘 모르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구요, 영국에서 만든 백신이 안정성이 없는게 아니라, 미국에서 허가를 안내주는겁니다.

이준석 : 그런걸 보통 안전하지 않다고 합니다.

최민희 : 미국이 허가 안해주면 안전하지 않은겁니까?

이준석 : FDA가 최고 권위 기관입니다.

최민희 : 아우 친미 수준이 너무 높으세요

- 시사본부 코로나 백신토론 中

심지어 일부는 저렇게 국민의 목숨이 달린 백신 문제에 대해서도 반미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36]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이러한 반미 행각을 보이면서도 제 자식들은 미국 이민을 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비난을 받는다. 아울러 특목고에 반대하면서도 자신들의 자식은 명문 특목고에 입학시키는 가식적인 운동권 인사들 또한 심심찮게 폭로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미국이 제공하는 이익은 아무 소리없이 받아먹으며, 도리여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북한중국의 위협에 대해서는 쉬쉬하거나 외면하는 행동을 보인다.

4.5. 친중 사대주의


미국이라면 발끈하고 자주를 외치면서 반대로 중국은 두둔하고 옹호하는 경우가 있다. 진보진영 일각의 사고방식은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10억인의 나라 중국 백서> 등을 쓸 때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 지적받는다. 리영희가 저작 할 때는 시대적 한계도 있었고, 리영희 본인도 그 점을 훗날 인정하기도 했으나[37] 리영희는 이미 세상을 떠난 데다, 책의 업데이트가 안 되다 보니, 그 책을 읽은 독자들도 거기서 업데이트가 안 된다는 것이다.[38] 때문에 적잖은 진보 매체나 정당에서 친중적인 논조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2000년 이후 여러 사건들을 계기로 반중 감정이 드세진 사람들에게 반발을 사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운동권들이 비판하는 우리나라 독재정권의 범죄보다 더한 악행을 현재진행형으로 저지르고 있는 정권이다. 먼저 독재의 경우 우리나라의 박정희 정권은 야당이라도 있었지만 중국 공산당의 독재는 야당도 없는 1당 독재 체제로, 한국의 독재를 타도한 운동권이라면 박정희의 독재정권보다 더 심하게 비판해야 할 대상이다.[39]
미국의 패권주의도 중국에 비하면 약과다. 중국은 일대일로로 파키스탄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만들었다. 중국과 파키스탄의 사이는 미국과 파이브 아이즈의 사이와 비슷하다고 봐도 될 정도로 친한데, 이런 나라까지 등쳐먹어서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만드는 나라가 다른 나라를 어떻게 대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또한 중국은 티베트 독립 시위를 탄압하고 위구르인들을 수용소에 넣고 고문하는데 이것은 3.1 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한 일제나 홀로코스트 등의 나치의 인권 침해와 다른 게 없는 행위이다. 경제시스템도 사실상 자본주의로 바뀐 지 오래됐고, 또 자주 타령도 민족주의가 기반 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보수가 주장할 문제지, 탈민족주의를 내세워야 할 진보 진영과는 어울리지가 않는 주제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발발하자, 평소에 민주주의를 그렇게 부르짖던 이 세대는 보수 성향이나 우파로 전환한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논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을 두둔하는 인간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들은 경제 문제 때문에 중국과 마찰을 벌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떠벌리는 놈들이 정작 90년대 우루과이 라운드 때는 혼신을 다해 반미를 외쳤다.
이런 졸렬한 태도에 대해서 반미친중 성향의 한겨레에서도 논평으로 비판할 정도다.# 오히려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쪽에서 홍콩 지지 의사를 펼쳤는데, 민주화 운동에 도리어 더불어민주당이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신세대 운동권중에서는 국제연대와 인권운동을 중시하며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 민주화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분파도 있다. 정의당에서는 청년조직인 모멘텀이나 청년의원인 류호정이 홍콩 민주화 운동에 공식적으로 지지를 표했다. 그리고 리버럴 성향을 가진 배우 김의성 또한 홍콩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40] 이런 분파에서는 민주당을 비롯한 구민주화 세력의 현재에 대해서 비판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

4.6. 편협성


자칭 진보좌파라고 하지만 앞서 언급된 대로 일부는 조선시대 수준으로 보수적인 면이 있다.[41] 전향이나 사상전환을 용납하지 않는 옹졸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다. 그 때문에 "남들이 21세기를 사는데 운동권만 70~8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자 문부식도 저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비슷한 비판을 했다.
무엇보다 이 집단은 용서나 이해, 옹호라는 단어와도 거리가 멀다. 한번 자기네와 등지면 끝까지 적대적인 마인드를 취한다. 윤석양 씨만 해도 단지 입대 후 프락치를 강요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황인오 역시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검거당시 안기부에서 진술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배신자 운운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이런 독선적이고 편협한 사고방식을 인터넷 선전선동에 이용하면서 이에 물드는 네티즌들이 많다.[42] 그리고 모든 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려 든다.
2008년 이후로 깨시민 등지로부터 흔히 문화나 서브컬처 탄압을 보수세력만 주장한다는 소문이 돌지만, 본질적으로 '''운동권 및 그들이 주축이 된 진보세력도 신세대 문화에 대해서 꽉 막힌 건 마찬가지다'''. 마초, 권위주의 성향 그대로 운동권 경험이 있는 어른들이 자식들을 굉장히 보수적으로 키우거나, 자식들이 여가문화를 즐기는 것에 대해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은 정말 흔하다.
흔히 보수정당이 신세대 문화에 부정적인 스탠스가 있으니 진보정당은 안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실제로 그들도 그렇게 주장하나, 현실은 선거를 위한 네거티브 공세일 뿐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사이트에서 동성애자나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를 대할 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 보면 극우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4.7. 비뚤어진 역사관


반미 성향을 가진 자들은 대한민국을 '''미제의 식민지'''로 인식한다. 또한 한국의 건국은 미국을 등에 업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주도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주축이 된 정부 수립 진영이 분단을 주도했다고 생각하며, 한국전쟁도 북한이 아닌 친일파와 미국이 만든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일부 NL계열 운동권 출신 중에는 종북이 아니라면서도 남북간의 문제에 대해서 북한을 두둔하는 이들이 많은데, 북한이 친일파를 청산하고 미제 문화에 오염된 한국과 달리 전통적인 언어나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운동권 일각에선 북한이 더 민족적인 정통성이 있는 국가로 보고 있는 것.''' 그러나 이들의 믿음과 달리 실제론 북한 정권에 수많은 친일파들이 참여했다. 설령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더라도 온국민을 굶기는 실패국가는 정통성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을 애써 외면한다. 운동권 일부가 이런 성향을 갖게 된 것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나 <다시쓰는 한국현대사>가 도화선이다.
또 이들 중에선 박정희 정권의 이순신 성역화에 반발해 원균을 옹호하는 뻘짓을 저질렀으며, 굴곡진 근현대사에 혐오감을 갖고 환빠적인 역사관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이들에게 있어 기존의 강단사학자들은 친일 식민사관을 가진 반동에 불과하다.

4.8. 무책임함


연세대 사태에서 보듯이, 지휘부가 학생들 버리고 튀었다. 이런 무책임한 모습은 이전에 있었던 시위에서도 종종 일어났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불려나온 후배들을 실컷 고기방패로 써먹고 내다 버렸다. 거기다 시위나 운동권 회합을 한다고 통보도 없이 특정 대학이나 장소에 우르르 몰려가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수습도 안해 놓는다. 거기다 시위 도구나 현수막 만든다고 화학공학과미대생들 부려먹는 건 덤이고, 학과 강의 중에 대뜸 밀고 들어와서 멋대로 중지시키고, 선동을 일삼거나 순진한 애들을 운동권으로 꼬드긴다.
이렇게 실컷 부려먹고 어지럽혀 놓고 윗대가리들은 정치한답시고 나가 버리고, 내부에서 밥그릇 싸움하다 패배한 일부 상층부와 투쟁이란 단어밖에 모르는 골통들은 방치되었다가 뉴라이트로 전환하거나, 김기종같은 적색테러분자로 흑화했다.
그렇게 데모하던 운동권 인사들이 주축이 된 노무현 정부의 시위 진압은 역설적으로 아주 강경했다. 이 시기 구속당한 노동자 수가 김영삼 정부의 2배였으며 2005년 여의도 농민집회에선 경찰의 강제해산 과정에서 과잉진압으로 농민 2명이 방패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 허준영 경찰청장이 경질당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기까지 하였다. 이듬해 2006년 평택 대추리에서는 토지보상이 완료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행정대집행을 실행하면서 경찰력에 군병력까지 투입하였고 이에 반발한 시위대 및 남아 있던 주민들과 충돌을 빚었다. 군병력 투입 전 작전수립 과정에서 총기를 휴대할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많은 논란이 일기도 했다. 행정대집행이 벌어진 5월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이 있는 달임을 생각하면 실제 작전에 반영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크게 비판받지 않을수 없다. 대추리 사태가 소강상태에 들어선 그해 여름, 포스코에서 시위 중 노동자 1명이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는 일이 또다시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시위가 과격하게 변하자 전년도에 부산 APEC에서 처음 등장했던 무현산성이 다시 세워지기도 했다.

4.9. 종북주의와 주사파


독재정권 치하에서 누명을 썼다는 인식도 있고 실제 누명을 쓴 사람도 많긴 했지만, 주사파 문제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당시의 사안들이 당시 정권의 공안조작 등으로 이미지가 희석되어서 그렇지, '''주사파는 소수나마 분명히 실재했다.''' 기본적으로 운동권에 친사회주의 성향의 인물들이 많다 보니[43], 북한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44] 그저 사회주의 국가라고 생각한데서 오는 호의적인 착각도 이런 주사파들을 양산하는데 한 몫 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런 흐름 속에 탄생한 주사파들은 한국 운동권의 이미지에 적잖은 타격을 주었다.
여담으로 사실 해방 이후에는 오히려 사회주의가 인기가 많았다. 심지어 당시 지식인들은 정치 체제는 자유주의 내지는 시민민주주의로 가야 하지만, 경제 체제는 사회주의식 계획경제로 가는게 옳다고 보는 경우도 많았다.[45][46] 그러나 신탁통치 오보사건과 수년 뒤 벌어진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이후 남한은 완전히 반공으로 돌아선다. 이 시기 이후 한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지하에서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 부분은 사구체 논쟁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60~70년대에 종북주의자들이 없던 것은 아니다. 조총련과의 커넥션이 있던[47] 일부 소수의 그룹과 한국전쟁 후 지하에 숨어있던 김일성주의자들은[48] 어떻게든 당국의 눈을 피해 조직을 만들거나 민주화 운동으로 위장한 그룹을 만들어 다른 민주화 운동 단체와 연합을 하거나 꼽사리를 껴서 움직였다. 그만큼 김일성주의(이하 주체사상)은 금기였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조직을 만들었다가 '''연대한 다른 그룹까지 간첩 혐의로 줄줄이 딸려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통일혁명당 사건이 있고, 유신 체제가 끝날 때까지 북한 노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거의 활동을 못하고 천천히 늙어갔다. 아니, 북한 노선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와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도 활동을 못했다고 보는게 맞다. 유신 시대에 적발된 "최대규모의 맑스주의자 그룹"인 김정강 그룹 사건[49]의 리더 김정강도 1960년대부터 10년 넘는 세월을 그냥 공장 숙련공으로 '''잠입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80년대가 되고 나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이 지식인과 학생 사회를 강타한다. 그 이전까지는 미국을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바라보는 지식인들도 많았고, 운동권 중에는 순수 민족주의자들이나 반공주의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분단과 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시각[50]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즉 미국이 통수를 쳤다는 배신감이 생기면서 그 전까지는 없었던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51]
1986년 김영환이 팜플렛 <강철서신> 배포 후 자생적 주체사상파가 생겨나기 시작한다.[52] 이들은 남북통일민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학생사회와 운동권 사이에서 세력을 불려나갔다. 특히 이들은 노동문제와 사회 구조문제에 포커스를 맞춘 PD계열과 다르게, 민족주의적 가치를 내세웠기 때문에 대중적 반향을 얻을 수 있었다.[53]
물론 이들은 민주화가 되기 전까지 공개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와 민족, 애국을 내세웠다. 그래서 80년대에는 "한참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데모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NL이 되어 있더라"는 사례가 꽤 많이 있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반공개적으로 주체사상을 논하기 시작한 것은 89년 이후부터다.[54] 그리고 주체사상을 논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점점 일반 대중과 멀어져갔다.
요약하자면, '''1986년까지 주체사상파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당시 6월 항쟁이라는 시민혁명을 견인한 것은 분명 운동권들이지만, 여기에는 시민사회 및 종교단체, 재야 정치권, NL부터 CA까지 다양한 정파들이 섞여 연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NL보다 훨씬 강력한 공개 대중조직이었던 신한민주당 당원들과 지지자들 및 이들의 일부가 결성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55]
하지만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마치 민주화를 자신들의 공산주의 사상 실현의 시대로 보며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기들만의 우물안 개구리식 아전인수격 인식을 하던 주사파 그룹들은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타 정파들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반 시민들이 이들을 인간쓰레기로 간주한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고.

4.10. 성범죄의 온상


"진보 진영의 오래된 습관 성희롱 고발한다"
잇단 '성추문' 지자체장들 왜? "견제없는 권력"·"운동권 속성"
최영미 시인 "내 시집 속 '돼지'는 2005년 당시 문화예술계 권력자"
운동사회 성폭력, 그 식상함과 새로움의 사이에서
운동권 세력이 낳은 ‘권력형 나르시시즘’의 단상
운동권과 여성 성범죄에 대한 사례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특히 86세대의 사회운동을 하던 이들이 국회나 정당등의 정치 활동을 하면서 미투 문제와 성추행에 대한 사고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부정하고, 성범죄 피해자를 피해호소인, 성추행에 대해 '''성접촉사고'''등으로 신조어를 만들면서 눈가리고 아웅한다.

5. 총학생회


학생회의 태생자체가 당시 군사독재정권의 어용기구였던 학도호국단에 반대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연히도 90년대 초반까지 학생회는 학생운동을 위한 기구였다. 하지만 학생운동이 쇠퇴하면서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비운동권, 더 나아가 운동권을 반대하는 반운동권 세력들이 수권한 총학생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거보단 덜하지만 현재도 꽤 많은 학교에서 총학선거가 이루어지면 운동권 vs 비운동권 or 반운동권의 구도가 이루어지는듯.
아무리 대학생들이라지만 정치판은 정치판인 것인지(...) 다양한 말들이 많다. 일부 지방사립대의 경우 조폭학생회에 관여하는 경우도 존재하며, 이처럼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항상 1년에 몇 곳에서는 금권선거나 부정선거 얘기가 나오기도 하며 네거티브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심지어 몇 년간 선거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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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000년대 이후


총학생회 항목에서 보듯이 연세대 사태 이후 입지가 많이 줄었다. 여기에 대해선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보는 쪽이 맞을 듯하다. 운동권이 주로 목적으로 삼는건 정권교체와 비판이었는데 한총련 사태 이후 운동권에 대한 인식이 크게 나빠졌고[56] IMF 외환위기 이후 정권교체가 되면서도 한동안 고리타분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작 학내 문제에 대해 별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게 가장 큰 원인이다. (물론 21세기 진보학생연합 처럼 이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한 단체도 있었지만 크게 성과를 내진 못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학생들의 생각이 변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암울했던 70~80년대에는 학생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었으나 글쎄, 지금 정부 정책을 운운하며 어디서 모이자고 하면 모일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즉 학생들이 운동권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데다가 등록금과 관련된 학교의 횡포가 심해지면서 학생들이 학생회에게 원하는 건 '''"정부 말고 학교와 맞서 싸워줄 학생의 대표인 학생회가 되어 달라"는 쪽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에서 대학생의 입지가 많이 줄어들고 정부를 비판하는 시민사회, 시민단체가 성장하면서 굳이 학생이 저항의 주축이 될 필요가 없어졌다. 무엇보다 경제현실이 암울하다 보니 고리타분하고 추상적인 정부 비판보다는 일단 자기 앞가림부터 하려는 사람이 늘기도 했고. 실제로 옛날에는 운동권 하다 잘 안 돼도 취직이 쉬워서 잃을 게 없었는데 요즘은...
또한 덧붙이자면 학생 동원의 방식 또한 많이 바뀌었다. 8~90년대는 워낙 엄혹한 시절이어서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고, 어느 과의 어느 선배 밑에 들어가면 그대로 정파가 결정되는 방식이었다. 과거 운동권 출신 배우 안내상씨가 NL이었다는 이야기에 '''"그때는 그냥 선배들 따라서 그대로 정파가 결정되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57] 실제로 NL들 중에는 자신들이 NL이 된 줄도 모르고 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구호가 자주통일, 민족단결이다 보니 워낙 어릴 때부터 민족은 소중한 것이라고 학습받아 온 것도 있고,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뭔가 급진적인 구호가 나오더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 문부식도 부미방 사건 당시 사망한 학생에 대해 두고두고 반성하는가 하면 '우리 안의 폭력'부터 성찰해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게다가, 군부독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정파와 상관없이 반독재 학생운동이 상식이자 정의였던 시절이다. 그 시절에는 종북좌파란 개념도 없었고, 학생운동 세력이 정치권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종북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행적을 무조건 종북좌파 프레임으로 낙인 찍는 종북몰이의 행태는 그 시대에 대한 고찰이 빠진 것이다.#
반면 CA(훗날 PD)는 운동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이론적으로 공부하다가 운동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경우는 없지만, 워낙 노선 가지고 서로 논쟁을 하는 통에[58] 의장이 수시로 바뀌고 조직이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90년대까지는 대학 자체도 상술했듯 굉장히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여서 선배가 하자고 하면 대충 따라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대규모 집회에서 일반 학생들을 대충 동원할 수 있었다. 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에는 이게 안 통하자, 선배들이 "시내에 놀러 가자"고 '''후배들을 속여서 동원하는 사례도 있었다'''. 선배가 술이라도 한잔 줄 줄 알고 따라갔는데, 막상 나가보니까 마스크와 장갑을 나눠주더라는 경험담도 있다(...).
결국 현재 들어서는 NL이건 PD건 계열별 정파를 분류하는게 큰 의미가 없기도 하다. 일단 운동권 자체가 극소수로 전락했고, NL은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사회운동과 생활운동의 의제를 꽤 많이 받아들이고 있고, PD는 예전 같았으면 수정주의라고 욕 먹을(...) 수준의 사회민주주의적 방식이나 협동조합 운동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설렁 재건했다 해도 옛 운동권과는 연결고리 없이 자생적으로 생겼다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운동권이 쇠했다고 하는 것은 현재 '운동권'으로 불리는 세력이 줄었다는 것이지, 과거 운동권의 전성기 시절 '운동권'이었던 사람 (386운동권)들이 쇠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직 '운동권'이 유명무실화되면서 '운동권'이라는 말은 '전직 운동권'을 지칭하게 되었고, 이들은 정계 곳곳에 진출해 요직을 점하고 있다. 특히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 9년이후 들어선 문재인의 진보 정권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이들은 청와대, 당, 국회를 넘나들며 명실상부 주 세력이 되었다.
한편, 보수층도 이들의 인재풀에 영감을 받았는지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를 거치며 트루스포럼을 위시로 한 보수성향의 학생단체를 키워나갔고, 박근혜 탄핵 집회를 기점으로 이들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언론이나 정치권에선 이들을 운동권이란 표현보단 학생의 의견으로 뭉뚱그려서 표현하고 있으나, 이들이 일정한 단체를 구성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면서 활동하는 것을 보면 성향만 다를 뿐 사실상의 새로운 성향을 지닌 운동권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7. 현재 분파




7.1. NL 계열


NLPDR은 크게 소위 자주계열(주체사상파)과 자민통(국민파) 계열로 나눠지는데, 후자와 달리 전자는 이들은 대부분 진보정당운동 및 통일운동을 제외한 생활혁신운동에 무관심하다. 그 이유는 한반도의 당은 하나이기 때문에(...) 민중민주당의 경우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과 이적판결을 받은 코리아연대와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사상파의 순도가 높은편. 실제로 공약들도 대부분 실생활과는 별로 관련이 없어보이고...
한때는 한총련 주류를 차지할 정도로 세력이 컸지만 최근에는 거의 활동이 미미하다.
  • 민주주의자주통일대학생대표자협의회(민대협)
한총련 몰락후 한대련이 등록금 문제 등에 집중하는 것에 반발('조합주의'라고 비판)하며 한총련의 전통(?)을 지키려는 서울지역 대학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다. 이들의 구호가 "공동선언[59] 이행투쟁! 반미투쟁!"인 것에도 한총련 강경파(소위 자주대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을 알 수 있다. (구 애국학생연대(애학련)[60]을 비롯한 서총련 자주계열)
전형적인 통일운동 단체. 북한과의 교류, 협력 확대를 목표로 한다.
과거 NL 운동권의 본류(위에 서술된 범민련, 한총련 자주계열)는 반미반파쇼 운동으로 남한 정부를 전복하고 북한과 통일하여 자주적 민주정부와 연방국가를 세우자는 노선이었다.90년대 시작한 학생운동의 퇴조와 함께 2000년대 등록금 문제 등 학생들의 이슈를 중심에 놓는 분위기로 바뀌면서 한총련 혁신계열이 주도하는 한대련으로 NL운동의 주도권이 넘어간다. 한대련의 2011년 반값등록금 운동은 인상적이었지만 그때가 마지막 불꽃이 아니었나 싶다. 한대련 출신들은 대부분 통합진보당 학생위원회를 통해 사회운동으로 진출하였으나,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2016년 20대 총선을 즈음해서 새로 창당된 민중연합당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진보당에 있다.
  • 한국청년연대 #
민청련(1983~1988)-전청대협(1988~1992)-한청협(1992~1998/2001~2009)의 후신으로 과거 한총련, 한대련에서 활동하던 졸업생들이 지역 활동을 위해 조직한 청년회들의 연합체. 간부 대부분 20대 총선에 민중연합당으로 출마
  • 평화나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 동아리 네트워크. # 집행위원장이 통진당 학생위원회 출신으로 현재 민중연합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건을 쉴드치던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
  • 청년하다
대표가 전 전 통합진보당 구청장 후보, 민중연합당 국회의원 후보였던 사람이다. 페이스북 페이지
  • 대학희망
2000년대 들어 학생회 운동이 퇴조하자 다양한 관심사별로 그룹이 조직된다. 위의 연합 동아리들의 활동은 다양한 부분에 걸쳐 있어 회원들 중에는 단순히 학술, 봉사목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단체 자체를 NL 운동권 단체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각 조직의 운영진이나 이들을 지도하는 선배 라인은 대부분 NL(중에서도 경기동부연합 계열) 출신으로 통합진보당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대표가 통합진보당 활동가 출신으로 이번에 20대 총선에 민중연합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함.
  • 한국대학생문화연대
문화운동, 계열별 학술모임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부 조직에서 비민주적인 운영방식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2016년 현재 한의계 진료모임 길벗, 약대동아리 늘픔, 스무살의 자격, 에코로드, 사실 위의 진실 IMFACT, 교양공동체 쿰(CUM), 인권더하기법률, 이공계 지식공동체 CUBE가 소속되어 있다. 2011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61] 를 받았던 '자본주의 연구회'도 이곳에 소속되어 있었다.
광주대단지사건으로 촉발된 주거권운동은 NL혁신파, 즉 현재의 경기동부연합이 도래하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그동안 정의당 내 인천연합은 노유진의 정치카페등을 듣고 자발적으로 가입한 리버럴-사민주의 당원들이나 지속적으로 대학생위원회나 생활도서관과 같은 진보성향의 동아리, 전국학생행진내 인맥을 통해 세력을 포섭해왔던 PD들과는 달리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이후 후배 조직원들을 포섭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이후 인적자원부족을 타계하기 위해 권중도 서울시 청학위장을 중심으로 청년둥지사업단이라는 신 인천연합 재건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으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꿈꾸는 고래라는 정의당 밖의 신 인천연합 외곽조직을 조직하는데 성공하였다.

7.2. PD 계열


아마도 이 문서를 읽는 위키러 중에서는 다른 운동권 계파와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여기도 사정이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정권 친화적이고 코포라티즘적인 한국노총부터, 보다 강성한 노동계급 운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민주노총도 있으며 그 외의 자잘한 지역노조, 일반노조 등 여기도 다양한 정파들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은 다른 운동권들과 상당히 차이가 있는 편이다. 태생적으로나 운용면에 있어서나 노동조합의 사회운동화를 꾀하는 쪽이라 보면 된다. 민주노총 안에서도 국민파(NLPDR), 현장파(제파PD), 중앙파(제독PD) 등 다양한 정파가 존재한다.
하위 항목은 노학연대 과정에서 노동자로부터 지도를 받아 생성된 운동권 정파이다.

7.2.1. 제독PD(중앙파)


84년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촉발되어 87년 민주화 이후에 NLPDRPD가 본격적으로 분리된다. 행진 계열은 지속적으로 학생운동내 PD 진영에서 최대 정파로 활동해왔다. 전성기에는 수도권 웬만한 대학 문과대학(또는 인문대학) 학생회는 다 행진에서 수권할 정도였다. 대학 내 페미니즘 학회 중 다수가 이쪽 계열이기도 하다. 또한 NL 제외하고는 지방대학에 의미있는 활동회원 수를 보유한 유일한 정파다. 서울대 성폭력 대책위 사건의 가해자 여성(통칭 담배녀) 편에 서서 흡연을 성폭력이라고 주장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입장을 철회했다. 이 사건 직후에 서울대 행진은 박살이 났다고 한다.
현재 정의당의 3분의 1 이상이 PD계열 운동을 해온 경력이 있는 당원들이고, 대표진과 당 중앙도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노심조) 등 PD 좌장들로 포진해 있다. 정의당의 정식 학생위원회에는 사회민주주의 계열과 온건 NL계인 인천연합도 대거 존재하기 때문에 정통 PD계라고 보기에는 살짝 애매한 감이 있지만, 모멘텀은 당 중앙과 중도화된 지도부에 대한 비판으로 사회주의 강령을 내세우기에 PD계로 취급된다.

7.2.2. 제파PD(현장파)


  • 사회변혁노동자당 학생위원회(구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 사노위 학생모임, 학생변혁모임)
극좌파 사회주의 정당이자 마르크스주의를 당 이념에 채택한 유일한 정당. 이름에는 당이라고 하지만 선관위에 등록된 정당은 아니다. 강령상 노선 자체가 전위정당이기 때문에 정당 등록을 일부러 안 하는 것. 민주노총 한상균 집행부가 이쪽 계열이라 알려져 있기도 한데, 정확히는 민주노총 내 좌파 활동가 모임인 노동전선 계열이다.
이곳이 진정한 8-90년대 PD 이론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본인들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향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이곳에서 출판한 책들을 보면 이런 책이나 이런 책 등 소련을 변호한 책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읽는 책들 역시 구소련의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서 나온 철학사나 자본론 등으로 친소 성향이 강하다. 다른 PD 운동가들은 서구식 신좌파로 선회하든 현실사회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하든 노선수정이 있었는데 여기는 그런 거 없이 냉전기의 제2세계 그 자체다(...). 여담으로 흑석동에 있는 연구소에 마르크스엥겔스 사진이 걸려 있다.

7.3. IS


  • 노동자연대 학생모임(구 민주노동당 학생그룹, 다함께 학생모임)
흔히 트로츠키주의로 분류하지만 정통 트로츠키주의와는 약간 거리가 있고 굳이 따지자면 영국의 사회주의운동가 토니 클리프를 따르는 '클리프주의'라 할 수 있다. 학술행사로 맑시즘을 매년 개최한다. 엄밀히는 PD와는 전혀 다른 IST라는 독립적 정파이다. 90년대 초반 소련 및 동구권 붕괴로 소련식 모델을 이상향으로 하던 PD운동이 퇴조에 접어들었을 때, IS(International Socialists)라는 조직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느슨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념적으로는 프로페셔널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능동적이지 못해서 학생운동권 내에서도 소외된 이념적 엘리트 운동권들이었다. 대학가 서점에 그들만의 팸플릿을 만들어 파는 정도의 활동을 하다가, 문민정부 때 전원 검거당했다.# 이후 꾸준한 신문 판매와 2003년 이라크 전쟁 파병반대운동 등을 통해 다시 성장하여 현재는 '노동자연대'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고 있다. 2011년의 다함께 대학문화 성폭력 사건 이후로 페미니즘 운동 측으로부터 욕을 많이 먹고 있다고.

7.4. PTR


PTR은 무산계급혁명(Proletarian Revolution)의 약자이다. 이승만 정부 시기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원칙의 토지 분배 시행과 한국 전쟁의 여파로 인해 남한 사회는 봉건적 유제는 남아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자본주의 단계라고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자본 축적 수준이 독점자본주의단계로 들어서게 되면서 남한 사회가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렀기에 곧바로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계급모순을 중시하였으나, 그렇다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특수성에 해당하는 민족 통일 및 반미주의라는 가치를 경시하지는 않으며, 변혁주도세력은 노동자와 빈농, 혁명적 지식인으로 정하였다. 학생운동계파에서는 좌경적인 노선으로 인식되었으며, 극소수였기에 이렇다 할 단체를 구성한 적이 없는 계파이다. 이념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반수정주의를 중시하고 있다. 현재 언론 단체로는 전국노동자정치협회가 있다.

7.5. 옛 CA 계열



7.5.1. 21C 계열(다수파)


  • 민달팽이 유니온[62](구 21세기 진보학생연합[63])/청년유니온
1994년 CA에서 NL로 합류한 흐름이 다시 분리되어 등장했다. 전통적 운동권은 민족주의사회주의건 좌파적 사회주의건 이념적으로 사회주의를 뿌리로 해서 출발하였으나 이들은 복지국가를 추구하기 때문에 거시적인 사회 변혁을 얘기하지 않는다. 전체 운동 하에서 청년학생운동을 위치 짓는게 아니라 당사자로서 청년운동을 하기에 청년수당, 주거환경개선 등 세세한 정책들에 집중하는 편. 복지국가 수립이 목표인 정의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유에서 활동하던 유명인 조성주 소장이 대표적. 청년유니온 출신의 진보 인사들이 정의당으로 정치에 입문하는 것은 덤. 현재는 우리미래와 자주 연대를 하고 있다. 일단 위에 나온 21세기 진보학생연합과 계통적으로 연결되어있다.
  • 전쟁 없는 세상#
90년대까지 한국의 평화운동은 NLPDR이 주도해 오며 주한미군철수라는 의제가 중심이 되어, 보편적인 평화운동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독립된 평화주의/반군사주의 운동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휴전국가로 징병제 중인 한국에서는 여러모로 현실은 시궁창안습한 처지지만, 그래도 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병역거부 수감자들을 지원하고, 비폭력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대량살상무기 거래 반대운동을 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인상깊은 문구가 존 F 케네디미국 대통령의 "전쟁은 오늘날 전사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명성과 특권을 병역거부자가 누릴 수 있을 때 끝나게 될 것이다."라는 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엠네스티랑 여러모로 방향성이 닿기도 한다. 국내에서 유명한 병역거부자인 오태양의 존재로 인해 21C 성향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7.5.2. 사회당 계열(소수파)


전국학생행진과 더불어 PD의 양대 정파라고 하면 꼽히는게 청년좌파이다. 실제로 이들은 사회당 시절 02, 07 대선운동을 치룬 적이 있으며 12년 무소속 김순자 후보캠프를 뛰었다. 전통적 사회주의가 노동자계급(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을 중시하는 반면 이들은 기성 노동조합에 포함되지 않는 기간제, 알바 등 불안정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프레카리아트)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가만히 있으라 운동 등으로 최근 가장 확장세를 보이는 조직이라고 한다. 최근엔 기본소득과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해결, 알바노동자 계급 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퀴어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세력 중 하나다.

7.6. 환경운동


90년대 이후 운동권의 분화로, 기존 운동권에서 다른 노선을 모색하던 부류나 운동권과 거리가 있던 단체들이 결집한 케이스. 일일히 열거하기는 힘들지만 상기한 두 계열과는 확연히 다른 편인데 주로 CDR의 그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때에 따라서 PD랑 연합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NLPDR농활에 맞서 PD 진영에서 환활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7.7. 인권운동



7.8. 아나키즘(?)


한국에서는 아나키스트 단체라고 자칭하는 곳은 민족주의 할배들이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을 단지 외세 민족의 지배에 저항한 민족의 수호자로서,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숭배하는 이들일뿐 진짜 아나키즘과는 전혀 관련 없는 곳이다. 이쪽 인간들 하는 말들 보면 아나키스트 애국자, 순국자같은 미친소리를 많이 하는 걸 볼수 있을 것이다. 이덕일 같은 국수주의 사이비 학자가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을 맡은 적도 있는데 더 무슨말이 필요할까?[64] 결국 이들에게 아키즘이란 외세에 지배당한 원한서린 역사를 위안하기 위해 반제국 투쟁을 반외세 투쟁이라는 이미지로 왜곡하여 자위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들의 자위용 아나키즘엔 자유, 국제주의, 노동운동, 청년층의 반항심을 자극하는 전위적인 투쟁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다. 사실상 이들의 행위는 반외세 순교자를 기리는 시체숭배에 불과하며, 실제로 하는 짓이라곤 수십년째 변함없이 "애국적" 아나키스트 "순교자들"을 기리는 행사 뿐이다. 이런 것 외에 외부적으로 알려진 진짜 아나키즘 단체라고 할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국민문화연구소#
생각보다 오래된 사회단체다. 1945년 해방 이후 서울에 모인 아나키스트들이 모여서 "자유사회 건설자 연맹"을 조직하였고, 여기서 분화되어 1947년 국민문화 연구소가 조직되었다. 혁명이나 급격한 변혁노선 보다는 생활 개선, 지역 자치를 통한 자유사회운동을 해 왔기 때문에 군사정권 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다.[65]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나키즘 서적 출판 및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 기념사업 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 아나클랜#
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결집된 조직. 조약골이란 사람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현재는 거의 활동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 한국 자주인 연맹#
스스로 근원을 해방 이후 아나키즘/조합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독립노동당에 두고 있지만, 정작 둘간의 연속성이 불분명하다(...). 일단은 독립노농당 해산 후 결집한 아나키스트들의 모임인 '조선무정부주의 운동사 편찬위원회'가 발전한 것은 맞는데, 그 사이에 이합집산이 워낙 많았고, 단체로서 활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계승한다고 보기는 좀 뭣하다. 일단 해방 후 가장 활발히 활동한 아나키스트 하기락[66] 선생이 관여하긴 했으나, 사회운동 단체라기보다는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의 성격이 강했고, 현재는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의 성격을 띄고 있다. 심지어 명색이 아나키즘인데 의장이라는 사람이 수꼴스러운 글을 게시판에 자주 올리곤 한다(...).

8. 참고/관련 문헌


  • 문부식, 잃어버린 시대를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 삼인출판사, 2002.
  • 이재오[67], 해방 후 한국학생 운동사, 형성사, 1984
  • 이명준,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바오출판사, 2012
  • 김재엽,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연극과 인간, 2013
  • 박찬수, NL현대사: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인물과사상사, 2017
  • 한용 외, 80년대 한국사회와 학생운동, 청년, 1989.

9. 관련 문서




[1] 농담삼아 운동하는 사람들이라고 체대생들을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sports와 '''MOVEMENT'''의 차이이다. 반대로 인터넷 커뮤니티 DC인사이드의 헬스갤러리 등에서는 운동권을 헬스권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일상다반사에서도 이 일화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2] 참고로 체대는 오히려 반운동권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반운동권 참고[3] 천문학(블랙홀 관련) 용어 작용권(ergosphere)을 처음에는 운동권으로 번역하기도 했다.[4] 이 상부조직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싫어하던 노무현을 팔아먹으며 정치권에 기웃대려 하고 있다. 하지만 00년대 쯤부터는 대학 내에 민주당계 직속 조직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민주당이 운동권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5] 그 이전까지는 노선논쟁이 있었어도, 일단 민주화 운동이란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표면화되진 않았다. 다만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론이니 반봉건매판자본이니 하는 정말 어려운 용어들로 노선논쟁이 이어졌다고(...). 대부분 국제정세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며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맑스주의, 자유주의, 마오주의를 연구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6] 물론 후술되어 있듯 이들 외에도 다양한 분파가 존재한다.[7] 초창기엔 PD파도 참여했지만, 96년 이후 점차 떨어져나갔다. 그 이후에도 남아있는 곳도 있었긴 했다. (대표적으로 서울대. 다만 이쪽은 90년대 이후 NL이 한 번도 석권한 적은 없다.) 물론 지금은 극단적인 NL들 빼고 '''다 떨어져 나갔지만'''. [8] 정확히 말하면 PD는 아니고 IS라는 별개의 정파이나, NL과 대비하여 범좌파로 분류한다.[9] 다만 정의당 학생위원회는 사실 사회민주주의자도 다수 존재하고, NL들도 일부 포진해있어 완벽한 정통 PD는 아니다.[10] 다만 무력 사용에 맞선 방위라는 측면에서 '무력을 사용했으니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11] 당시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또 이 점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비판하는 입장이 그들 내부에서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1980년대에 학생운동권이 떠들던 주장은 정작 서구권에서는 1970년대에 논파되었고, 1980년대에는 소련, 혹은 적어도 냉전이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이 팽배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국가보안법이 정보를 너무 차단한 결과 소련북한이 붕괴해가고, 그 이론이 틀렸다는 정보까지 죄다 틀어막아 버린 것이다. 이런 정보만 들어왔을 수 있다고? 그러면 선동용 거짓정보로 몰려서 부정당하게 된다.[12] 이 때 한총련 산하단체였던 전북총련이 한총련을 탈퇴하고 나중에 수천 명이 집단전향했다는 얘기가 있다.[13] 대표적인 예가 과거새누리당 비주류계이자 현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이다. 2016년엔 "임을 위한 행진곡김일성과 무관하니 종북 딱지 그만 붙이라"는 말을 하기도. [14] 부미방 사건 당사자 문부식도 2002년 저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등지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15] 이 경우 자식은 처음에는 진보좌파 성향에 가까웠다가, 부모로부터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성장기 이후 서서히 우파로 전향하는 케이스가 많다. 특히 학교에서 전교조 교육 영향을 많이 받았다가 전향하는 경우.[16] 애초에 정치성향과 사회·문화적 성향이 반드시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17] 권혁범(대전대 정치학과 교수), 김기중(변호사), 박노자(교수), 김은실(이대대학원 여성학과 교수), 권인숙(명지대 여성학 교수), 유명기(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김근(서강대 중국문화학과 교수), 김진호(제3시대 그리스도연구소 상임대표), 전진삼(월간 '건축인 포아' 편집인), 문부식(당대비평 편집위원).[18] 운동권 시절 사상학습 과정에서 배운 논파력으로, 이후 대학입시에서 논술이 강조될 때 논술강사로 많이 갔다고도 한다. 스타 강사들 중에서도 운동권 출신이 제법 많다.[19] 이 경우 강인한 정신력이 없는 이상 전향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다가, 전향한 이후 운동권에 대한 적대감도 높아진다. 운동권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건 기본이고, 운동권을 타도할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참여하는 등, 운동권에 엄청나게 잔인하게 대응한다. 욕 먹는 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자신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때려잡는 쾌감과 복수심 충족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출세를 포기하면서까지 맞서 싸웠더니,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중으로 버림받는 현실 속에서 제대로 빡친 셈.[20] 2010년대 들어서 386운동권 출신들이 '또다른 기득권 세력으로 타락했다', '부패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자 지방대 운동권 출신들이 '''우리들에겐 타락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면서 울분을 토하는 기사가 한겨레21에 실리기도 했다. 뉴라이트로 넘어간 지방대 출신들을 이런 관점에서 생계형 전향이었다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현장에서 투쟁에 헌신하느라 변변한 학력도, 뚜렷한 사회경력도 만들지 못했는데, 정작 지도부 역할만 하던 명문대 엘리트들은 지들끼리만 어울리고 자신들은 내팽개쳤다는 것이다.[21] 386의 8이 '''80년대 학번'''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386은 당시의 대학생, 넓게 잡아도 대학 중퇴자에 한정된 용어라는 비판이 존재한다.[22] 같은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배격하였다.[23] 특유의 전투력으로 전경 여럿 전역시킨 대규모 노동조합은 안 그럴 것 같지만, 의외로 이런 경향이 있다. 대규모 시위 참여시 앞에 노동조합이나 학생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24] 국풍81이 열리던 때는 군복무 중이던 학생들이 강제로 공연을 했는데, 그 행동도 변절자라고 취급해 학생사회에서 제명시켰던 흑역사가 존재한다.[25] 특히 지잡대라고 불리우는 대학의 운동권은 똥군기가 군대를 뺨치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26] 이와 별개로 민주화 이후 일부 남성의 비뚤어진 권위적 측면을 대표하는 일화로, 80년대 후반인가 90년대 초반인가쯤 대학가에서 여학생이 담배 핀다고 남학생이 싸대기 날린(...) 사건이 유명한데, 이때도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정작 그 민주운동의 핵심보루였던 대학가의 권위주의(혹은 남녀차별)는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사설이 있기도 했다. [27] 이해를 잘 했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운동권 특유의 친북주의와 결합해 퇴행적인 인민민주주의가 이식되는 경향까지 보였으며, 이것은 두고두고 종북 꼬리표가 되어 민주당계 정당을 괴롭히고 있다.[28] 김영삼과 김대중은 운동권과 연계했을 뿐이지 엄연한 기성 정치인들이다.[29] 다만 국내 운동권 말고도 이러한 주장이 발견할 수 있는데, 에스페란토 운동에 참여한 인물 중에도 영어, 불어제국주의 국가들의 언어를 쓰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30] 프로야구를 만든 전두환의 목적이 국민들이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근거한다.[31] 높은 확률로 미국 음악 또는 책.[32] 아이러니하게도 존 레논의 "Imagine"은 아나키즘 사상을 표현한 대표곡으로 반전시위 때 자주 불렸던 애창곡이다.[33] 19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 때 경찰도 그 심리를 이용하기 위해 가스차 확성기로 국산 인기가요를 틀어 심리전을 폈다.[34] 정작 마이클 잭슨이 전체적으로 미국 사회에서 가해자 위치에 있기보다 줄곧 피해자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운동권은 애먼 흑인 뮤지션을 준범죄자 취급하는 병크를 터뜨릴 만큼 대국적인 시야가 좁았다는 것을 인증한 것이기도 하다.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생각했다면 마이클 잭슨을 이해하고 지지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35] SBS를 탄압해야 한다고 했던 인간이다.[36] 해당 발언은 '''2020년 12월 17일'''의 토론으로, 최민희 의원은 "FDA가 (백신에 대해)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다"라는 발언에 "너무 친미적이다"라고 발언한 것이다.[37] 대표적으로 문화대혁명 부분이 있다.[38] 이는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저자 박세길도 마찬가지였다.[39] 전두환 때는 한국에도 관제야당밖에 없었다.[40] 이런 의미에서 김의성을 진짜 운동권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김의성은 386 세대에 서울대라는 높은 학벌을 자랑하는 인물이기에 운동권이 되기 쉬운 환경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김의성이 홍콩 민주화 운동에 참여 여부와 상관 없이 본인이 친문 성향을 보인 적이 많아서 여전히 보수 세력보다는 진보 세력에서 지지받는 연예인들 중 하나이다.[41] 당연한 말이지만 운동권별로 다르긴 하다. 여성운동(페미니즘)도 운동권이고, 성소수자 운동도 운동권이니. 이주노동자 운동도 운동권.[42] 그런데 사실 인터넷 토론 중에 안 그런 데가 별로 없다. 운동권이 인터넷 영향을 받은 건지, 인터넷이 운동권 영향을 받은 건지...[43] 실제 당시 운동권 일각에서 냉전시대에 사회주의 혁명을 말하기도 했다. 참고영상 [44] 왜 깨닫지 못했냐면, 68운동을 생각하면 된다. 당시 유럽 대학생들이 중국이 선전하는 것들만 접하고 모택동을 위대한 혁명가로 착각했듯 당시 운동권들도 북한에 대한 정보 통제 때문에 어둠의 경로로 들어오는 북한 찬양 또는 선전 정보들만 접하다 보니 이를 바로잡을 방법이 전무했다. [45] 제헌국회에는 이익균점권이, 제헌헌법에는 통제경제조항이 명시되어 있었고, 친일파 중의 친일파 윤치호도 해방 직후에 "경제는 사회주의식 개발이 적합할 것"이라고 일기에 쓴 바가 있을 정도. 심지어 당시 헌법을 만들어서 미군정에게 갖다줬더니 '''"너무 사회주의적이다"'''라고 뺀찌를 먹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46] 이런 풍조는 군사정권 시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경제개발 5개년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 자체가 죄다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식 계획개발 정책이다. 빨갱이 때려잡던 시대에 빨갱이 경제정책을 펼쳤으니 참으로 아이러니.[47] 여담으로 60~70년대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한 공안 사건들 중에는 조총련일본 공산당을 대충 뭉뚱그려서 "일본에서 한국으로 마수를 뻗치는 공산무리"로 조직도를 꾸며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 공산당은 북한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 오히려 일본사회당이 북한과 사이가 좋았다.[48] 주체사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50년대 중반이다. 그 전까지 김일성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냥 김일성주의자라고 불렸다. 티토를 따르는 사람들을 티토주의라고 불렀고 트로츠키를 따르는 사람들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논리.[49] 그래봤자 20명도 안 되었다고 한다[50] 물론 이런 민족주의적 편향성에 입각한, 한국전쟁 및 분단의 원인이 미국이라는 주장은 1990년대에 완전히 논파당했다. 하지만 2021년 현재에도 분단의 원인을 미국으로 지목하는 운동권 출신과 전교조 세력이 상당히 많다.[51] 근데 이건 사실 미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한국에서 5.18 학살이 터졌을 때 저 멀리 중동에서는 전운이 돌고 있었고, 4개월 뒤에는 8년간 치러진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게 된다. 그러다보니 미국 입장에서는 정당성 운운하며 군부정권 갈아치운다고 한국에 혼란을 키우고 내부분열을 시키는 것보다는 이미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대충 인정해주고 넘어가는 것이 한국의 정치적 안정성 입장에서 유리하다고 보았다. 게다가 당시 미국은 한창 대선 시기로 지미 카터 정부의 재임이 걸려있는 중대한 상황이어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세세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즉, 이 당시 미국은 내부에서는 국내 대선이, 외부에서는 아예 전쟁이 터져버리는 등 한국보다 더 신경 써야 할 중대한 일들이 너무 많았다.[52] 사실 한국에서는 종북주의자와 주사파를 뭉뚱그려 한데 묶어 이야기하는데, 70년대까지 북한과 직간접적(또는 조총련과의) 연계가 있던 집단과 80년대의 자생적 주사파와는 세대도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달랐다.[53] 여담으로 신해철의 자서전에 따르면, NL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서 데모하다가 최루탄만 터지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기 바빴는데, CA(PD의 전신)는 좀 더 조직화된 강인한 투사들이었기 때문에 최루가스를 헤치고 짱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전투력이 있었다고 한다. 신해철은 그쪽이 더 괜찮아보여서 CA 그룹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54] 이 시기에 NL에 대항하여 "현실과 과학"이라는 무크지를 만들어서 PD그룹의 이론적 원천이 되고, 주체사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회주의 그룹이 바로 서울 사회과학 연구소다. 이들 중에는 지금도 유명한 조국, 진중권, 이진경 등이 있었다.[55] 이들은 기성 정당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만큼,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고 자주 반목했다. 1986년 4월 29일, 김대중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은 "소수 학생들의 과격한 주장은 지지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이는 결국 5.3 인천사태를 낳는다. 해당 항목 참조.[56] 물론 이전에도 운동권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선은 많이 있었지만 지지세력도 꽤 있다보니 유지가 되었다.[57] 기자 : 엔엘(NL·민족해방 계열) 쪽 정파였던 거 같다.
안내상 : "그렇다. 근데 그게 그때 당시에 어떤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선배 밑에 가면 어떤 정파고, 어떤 선배 밑이면 어떤 정파로 결정되는 구조였다. 4학년 때 한 친구를 만났는데 대화가 안 되는 거다. 그 친구가 "너 왜 거기 가 있냐?"면서 이상한 눈빛으로 보더라. 그런 눈빛은 처음 봤다. 서로 대판 논쟁을 벌이고 그 이후로 안 보는 사이가 됐는데, 그때부터가 이미 마지막을 걷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내가 뭐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58] 이것을 "사상투쟁", 줄여서 사투라고 부른다.[59] 6.15 남북공동선언[60]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한총련 내 강경파.[61] 수사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맨 마지막 리플에 당시 사건 관련자가 달아놓은 리플이 있다.[62] 연세대학교 제47대 총학생회(이 계파를 전면에 내세우며 수권한 총학생회로는 최초라고 알려져 있다) 내 TFT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규모에 이르게 되었다.[63] 2004년 공식적으로 해소하여 지금은 없어진 정파. NL은 주체사상 노선을 버리고, PD는 혁명노선을 버리고 합리적인 운동권 세력과 손잡아 대중진보정당을 건설하려는 운동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 함께한 것이 PD계열 노동운동 최대정파였던 인민노련을 계승한 노회찬의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이다. 학생회 수권을 버리고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활동에 집중하고자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조직 약화의 결과로 귀결되었다, 그래도 비주사NL과 개량 PD세력의 합작의 결과 민주노동당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지만, 이후 민주노동당의 분당, 통합진보당의 난리 등을 거쳐 현재는 정의당에 일부 남아 있으며 일부는 박주민, 강병원 의원들 같이 더불어민주당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현역 당시에도 서울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90년대에 격년에 한번 총학생회를 수권하였으나 전국 캠퍼스에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64] 당연히 고만고만한 인간들만 있어서 문제의식이 없는것이다. 2001년도 쯤에 김성국이라는 인물의 주도로 결성된 단체인데, 이 사람은 자본주의가 아나키즘의 미래라는 북미, 중남미 그리고 유럽등 본토 아나키스트들이 들으면 뚝배기 깨버릴 소릴 자랑스럽게 하고 다닌다. 심지어 아나코 캐피타리즘도 아닌 뇌피셜을 지꺼리고 다니는 것이다. 아래 소개된 단체들도 이 사람들 보다 나은 점이 없는 몽매주의적 행보를 보이는데, 결국 이 단체들은 늦게온 중2병에 시달리는 아재들의 정신승리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족속들일 뿐이다.[65] 사실상 해방 후 친정부 노선을 견지했고, 창립자인 우관 이정규의 동생 이을규(역시 아나키스트)는 이승만 노선에 합류하여 독립촉성 국민회 중앙위원, 이승만 정권 하의 감찰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사실 여기서부터 아나키즘을 버리고 한국의 내셔널리즘에 동화됐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우익 아나키스트라고 자칭한다고 해도, 아나코 캐피탈리스트도 저런 멍청한 소리는 안한다. 4.19 혁명 이후 혁신동지 총연맹에 참여한 아나키스트들도 더러 있었으나 이들은 사실상 5,60년대에 전향한다.[66] 해방 후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저작을 번역했으며, 칸트 철학에 관한 권위자 중 한명이었다. 단주 유림의 측근이었고 아나키즘 운동을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작고할 당시까지 고군분투 했던 분이다.[67] 우리가 잘 아는 새누리당 출신 정치인 그 이재오가 맞다. YS가 있던 당시 신한국당으로 가면서 전향했지만, 원래는 원조 거물급 운동권 출신으로 매우 유명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