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묵

 


성명
김진묵(金溱默)
이명
김택(金澤), 김용묵(金容默)
생몰
? ~ ?
출생지
평안북도 창성군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김진묵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소략하며 단지 평북 창성 출신이라는 것만 전해진다.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고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이에 분노하여 왕회종의 부장으로서 5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평강, 신계를 점령했다. 이후 유격전을 전개하여 금성, 토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으며, 경기도 삭령(朔寧) 일대에 진을 치고 정미 경기연합 의진을 기획, 총대장으로 당대에 명망높은 선비였던 허위를 추대했다.
허위가 추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명망을 익히 전해들은 김규식, 연기우(延基羽), 황순일(黃淳一), 황재호(黃在浩), 박종한(朴宗漢), 김준수(金俊洙), 이종협(李鍾協), 이홍응(李弘應) 등이 합세했다. 김진묵은 9월 중순에 왕희종과 함께 적성, 삭령, 안협, 토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고 주변 주민들을 모아 400여 며의 병력을 확보했다. 또한 김진묵은 일본 보병 제52연대 1중대와 적성 일대에서 맞붙어 적병 십여 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즈음 이은찬(李殷瓚), 이구재(李九載) 등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13도 연합 의병부대'를 구성하여 전국적인 연합작전을 기획했다. 이에 허위 등은 여기에 합세해 진동유진소로 재편하였고 허위는 진동창의대장을 맡아 군사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연합의진의 서울 진격의 선봉에 선 허위 부대는 1908년 1월 일본군에게 저지되었고, 1월 28일엔 총대장 이인영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3년상을 지내야 한다는 이유로 지휘권을 허위에게 넘기고 이탈하면서 지휘 통제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결국 서울 진공작전이 좌절된 후 허위가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지만, 김진묵은 포기하지 않고 1908년 말까지 인천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더이상 의병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의병을 자진해산한 뒤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만주에서 국민부 별동대원을 맡아 군자금을 모으고 일본군과 교전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그가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진묵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