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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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김규식(金奎植)
이명
김서도(金瑞道)
별명
호장군(虎將軍)

노은(蘆隱)
본관
김해 김씨
생몰
1882년 1월 15일 ~ 1931년 4월 12일
출생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
(현재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사망지
만주 주하현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와 의병 활동
2.2.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무장투쟁
2.3. 무장투쟁의 명맥을 유지하려 노력하다
2.4. 최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와 의병 활동


김규식은 1882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에서 부친 김영선(金永先)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궁내부 또는 궁중 소속의 낮은 관직에 종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규식의 집안은 조상들이 물러준 재산이 꽤 있었고, 훌륭한 기와집도 있었다고 하니 대체로 중농 이상의 비교적 넉넉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의 박해를 받으며 어렵게 지냈다고 한다.
김규식의 외동딸 현태가 1990년에 증언한 내용에 따르면, 김규식은 15세의 나이에 같은 마을에 사는 16세의 처자 주명수(朱明洙)와 서울에서 혼인했으며,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또한 현태는 부친이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그의 집은 제삿날 같이 사람이 조금만 많이 모이거나 부친이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일본 형사가 찾아와 괴롭혔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부친은 만주로 망명헀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난 후 경찰서로 끌려가서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다 1925년경 북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규식의 연락을 받고 온 가족이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야반도주하듯 국내를 빠져나와 하얼빈에 도착했다고 한다. [1]
김규식이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1907년경으로 여겨진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재판기록[2]에 따르면, 김규식은 의병에 가담할 당시 연령은 26세로 서울 돈암동에 거주했으며, 1906년 10월에 대한제국 육군 보병 부교(副校)로 육군연성학교에서 봉직하던 중 퇴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가 기록한 <요시찰인명부>에 따르면 김규식이 ‘명치(明治) 37년(1904년) 12월 구한국 시위대에 입대하여 명치 39년(1906년)까지 육군 보병 부교로 승진해 명치 40년(1907년) 해산칙령에 의해 제대'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1907년 6월에 육군 정위(正尉)였던 현덕호(玄德鎬)가 주관하는 이현기독신흥학교(梨峴基督新興學校)의 교무(校務)에 관계하던 중 7월 중에 현덕호와 함께 양주군 동두천에 가서 의병장 허위의 휘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김규식은 50~60명, 혹은 80여 명의 부하를 휘하에 두었으 며, 총검을 휴대하고 병사들의 훈련을 위해 힘쓰는 한편, 마전, 삭녕, 연천, 양주, 철원 등지에서 4~5차례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동료 의병 김창순이 사망하자, 그는 장례비용과 군자금에 충당하기 위해 양주 불암동에서 송인식 등에게 1,800냥을 거두었다.
또한 허위와 함께 이인영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1907년 12월 양주군에서 결성된 13도 창의군에 합류하였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는 사령장(使令將)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는 "평안도 의병은 황해도 의병장 박기섭과 연락하고, 황해도 의병은 장단 의장 김수민과 상련하고, 김수민은 철원 의장 전 참위 김규식과 연통하고 김규식은 적성, 마전 의장 허위와 상통하고, 허위는 지평, 가평 등지의 이인영과 통섭하고 이인영은 제천, 영동 등지의 이강년과 상통하고, 이강년은 원주 등지의 의장 민긍호와 연접되어 호상 통첩하다"라고 보도했다.[3]
김규식은 허위의 지휘를 받으며 1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선두에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연기우와 함께 총을 맞고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허위의 소재를 밝히려는 일본군에 의해 강원도로 끌려가다가 밧줄을 끊고 탈출했다.[4] 그러나 1908년 4월을 전후하여 일본군에게 다시 체포되었고, 경성공소원에서 재판을 받은 뒤 내란죄 혐의로 1908년 8월 25일 유배형 15년을 선고받고 2년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1910년 9월 5일 사면되었다.

2.2. 만주와 연해주에서의 무장투쟁


김규식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어렵게 지내다 1912년 즈음에 만주로 망명했다. 망명 후에는 북로군정서에 가담하여 사단장이 되었으며, 청산리 전투가 발발하기 직전에는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이범석의 회고록 '자전(自傳)'은 김규식을 건장한 체구의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한말에 의병장 민긍호와 함께 활약했던 ‘휼륭한’ 인물이라고 기록되었다. 또한 김규식은 청산리 전투 때 김좌진의 직속 보병대를 이끌어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는 러시아의 연해주로 들어가 새로운 항일투쟁의 전략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은 통일된 독립군단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이때 김규식은 군대의 지휘를 책임지는 총사령의 중책에 임명되었다. 이후 연해주로 이동한 그는 고려혁명군 사령관에 취임하여 소련의 적군과 함께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백군을 지원하고 있던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동아일보 1921년 4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청산리 전투 이후 연해주로 들어간 독립군과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군은 약 3,000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들은 불라고베시첸스크를 중심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 벌어진 뒤, 연해주에 잔류한 한인 독립군 내부에서 통합 논의가 일었다. 그 결과 1922년 9월 1일 연해주 지역 한인빨치산부대가 주축이 된 혁명소비에트가 조직되었다. 이때 김규식은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고, 최호림, 안동백, 한창걸 및 러시아 빨치산부대의 혁명소비에트군 의장 파벨스탄코프가 의원에 선임되었다. 김규식과 한창걸은 수이푼(綏芬河)지역과 수찬지역 한인 빨지산대표의 자격으로 위원이 되었다.
이후 김규식이 총사령을 맡은 고려혁명군은 1922년 10월에는 연해주지역 백계러시아 세력을 축출하는 마지막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22년 11월 20일 당시 총사령부의 편제는 사령부, 무기부, 경무부, 위생부, 향무국, 재무국. 피복국, 재무국 등의 부서와 총병력 667명으로 구성되었다. 사령부 간부로는 총사령관 김규식, 군정위원장 최호림, 사령부관 강남일, 제1대대장 최준형, 기병대장 이범석, 기관총대장 나만규, 치중대장 이철, 무기부장 서용욱, 경무부장 정통, 경리부장 최춘선, 위생부장 박성철, 군위관 유치얼, 정치부장 여인빈이었다. 동아일보 1922년 11월 22일자 기사는 이들의 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총사령 김규식 부하의 활동

이번 서백리아에서 일본군대의 철퇴를 기회로 하여 대한독립군은 도처에서 활동을 하는데 蘇王營을 점령할 때에도 대한독립군이 수 천명이 되었고 韓我 총사령은 金奎植이요 騎兵隊長은 李範奭인데 김규식은 구한국시대부터 군인으로 여러 해 동안 북간도에서 의병으로 종사하던 사람이요 이범석은 중국 운남군관학교 기병과를 졸업하고 작년 3월 운동이 일어난 후에 즉시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그동안 여러 번 실전에 경험이 많은 당년 22세의 용감한 청년 사관이라고 아라사 사람들 사이에까지 명성이 자자하다더라.

그러나 10월 25일 불라디보스토크이 해방되고 러시아 내전이 소련 적군의 승리로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규식과 고려혁명군은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철병하는 일본군이 한인무장부대의 해산을 철병 협상 조건의 하나로 강력하게 제시했다. 소련 역시 한인들이 무장단체를 유지하는 것을 경계해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소련군의 무장해제 조치를 거부하고 보병과 기병 대원들을 이끌고 중국령으로 탈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한인독립군의 개별부대와 소련군 사이에서는 교전이 벌어졌다. 김규면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규식은 탈출 과정에서 러시아 농민 4명을 총살하면서 "우리는 붉은 주권을 반대한다. 그래서 너희들을 총살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군대를 이끌고 중국령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2.3. 무장투쟁의 명맥을 유지하려 노력하다


1922년 말 연해주를 탈출해 만주로 진입한 김규식은 안동현 방면으로 이동하던 중 김좌진의 부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 부대는 1922년 12월 목릉현 팔점자에서 중국군에 의해 강제 무장해제를 당하면서 결국 해산되었다. 중국군에서는 오직 보위단에 편입하여 국경 경비에 종사하는 경우에만 특별히 채용할 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무력으로 무장을 해제한다고 했다. 그러나 독립군 가운데 보위단 입단을 희망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무장 해제를 당하고 소지한 무기 전부를 압수당한 것으로 보인다.
김규식은 이런 상황에서도 병력을 추스린 뒤 1923년 5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고려혁명군을 재건했다. 그는 국민개병제를 체택하여 일반 한인들의 교육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독립군이라 하더라도 땀을 흘려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는 병농일치제의 원칙을 체택했다. 또한 독립군의 군사훈련도 비밀리에 실시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선량한 농민으로 위장해 봉천군벌의 감시를 피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봉천군벌이 갈수록 독립운동을 억압하자, 김규식은 북만주로 이동해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도모했다. 동아일보 1923년 2월 19일자 기사에 따르면, 김규식이 흑룡강에서 무장 군인들을 모집하던 중 신병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1923년 4월 하순, 영고탑에 있는 대종교당에서 연합총회를 개최한 대한독립군정서는 본부를 동빈현에 두고 지부를 영안현에 두고 하얼빈, 오길밀(烏吉密) 강, 목단강, 목릉, 동녕에 연락기관을 두기로 결의했다. 또한 흑룡강성 오운현에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총재는 현천묵, 군사부장에 조성환, 서무부장에 나중소, 재무부장에 계화가 맡았고, 김규식은 김혁(金赫), 이장녕, 김필(金弼), 권영준(權寧濬) 등과 함게 참모로 활동했다. 이후 북만주 일대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1925년 3월 10일 신민부가 결성되었을 때, 김규식은 직접적으로 참여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적어도 신민부와 상당한 연계를 맺으며 활동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926년 4월 중국 길림성 길림시의 영남반점(嶺南飯店)에서 결성된 고려혁명당에 김좌진과 함께 위원으로 참가했다. 이 당은 만주지역 민족 진영의 원로격 인사들이 좌, 우익을 망라하여 독립운동의 역량을 통일적으로 강화하는 한편,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고자 했던 정당으로, 강령과 당략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강령

1. 우리들의 인간 실생활의 당면한 적인 모든 계급적 기성제도 및 현재 조직을 일체 파괴하고 물질계와 정신계를 통해 자유 평등의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하자.

1. 제국주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항에서 우리와 공명하는 각 피압박 민족을 결합해서 동일전선에서의 일치된 보조를 취하자.

당략

1. 대국의 성세에 향응하고 지리의 관계를 이용해서 만주를 최선의 전지(戰地)로 삼는다.

1. 최고 간부는 상해에 두고 동양의 피압박 민족과 연락을 취하고 만주 전책상(戰策上) 필요가 있을 때에는 임시로 적당한 지대로 전치(轉置)한다.

1. 동양운동의 필요상 제3국공산당과 합치는 전략을 취한다.

이후 그는 가족을 만주로 불러들인 뒤 자신이 터를 잡고 살던 연수현 태평촌 농장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한인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면서 민족진영과 공산주의 진영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그는 그해 7월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황학수, 이장녕, 이진산 등과 함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민족진영의 단결을 촉구했다. 한국독립당의 창립대회는 신숙의 사회 하에 민무가 임시 서기로 지명되어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는 "백의동포는 소련공산당에 속지 말것과 일치 협력하여 조국광복을 도모할 것"을 선언하였다.

2.4. 최후


1931년 5월 10일, 김규식은 한인 자제들을 가르칠 교사가 부족하자 주하현 하동 3계 마을에 살고 있던 황포군관학교 출신 이붕해를 초빙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서 최악(崔岳)· 홍진·신숙 등을 만났다. 그러나 얼마 전에 공산주의로 전향한 최악의 사주를 받은 공산당원이 태평촌으로 돌아가던 그를 습격해 살해했다. 피살 직후 김규식의 시신은 마의하(螞蟻河)에 유기되었다가 한인 동포들에 의해 거두어져 마의하 옆 남흥촌(南興村)에서 화장된 후 마의하 강가에 뿌려졌다고 한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만주로 이주했던 유족들은 오랫동안 무국적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해 오래도록 고초를 겪었다. 큰아들은 광복 후에 거리에서 일본인의 총에 맞아 죽었고, 둘째 아들도 동북 삼성의 정치범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다 2009년에서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비로소 대한민국 국적을 수여받았다.
[1] 강용권,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p.96~99, 1996[2] <김규식 판결문>, 경성공소원, 1908년 8월 25일[3]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28일자 기사[4] 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 10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