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현균은 1900년 2월 29일 전라남도 강진군 군내면(현 강진읍) 서성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경성부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영랑은 귀향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숨겨들고 왔다. 이에 김현균은 김영랑과 김현상(金炫庠) 등과 왕래하며 시국 문제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3월 23일 밤 김성수(金晟洙)·김만철(金萬哲)·양경천(梁京千)·김계명(金鷄鳴)·양병우(梁炳宇)·김영호(金永浩) 등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현재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사상자가 나고 있다. 오늘날 조선인으로서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동일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동참을 권유하였고, 동의를 얻어 곧바로 태극기 500개를 제작하기로 하고 당일 모인 9명이서 2원씩 거두어 공금에 사용하고자 했다.
다음날인 24일 김안식(金安植)을 만나 25일 강진면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으며, 김안식은 그와 김영랑, 김성수, 김현상 등에게 태극기 제작 및 동지 규합의 임무를 맡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날 밤 태극기를 겨우 93개를 제작했을 뿐이어서 목표치인 500개에 채 도달하지도 못했고, 또 독립선언서 작성을 위한 등사판을 빌리는 것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음날인 25일 장날에 만세운동을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기에 결국 다음 장날로 연기하기로 한 것인데, 때마침 태극기를 제작하는 정황이 강진경찰서에 발각되었고, 그들은 곧 체포되었다.
그는 그해 4월 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곧 공소하여 4월 29일 대구에 이송되었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 취소와 함께 무죄를 언도받았다.# 이에 검사 측은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6월 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상고 기각되어 무죄 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62년 2월 14일 별세하였다.
201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