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영랑'''
'''金永郞'''

[image]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김윤식(金允植)
'''아호'''
영랑(永郞)
'''본관'''
김해 김씨#
'''출생'''
1903년[1] 1월 16일[2]
전라남도 강진군 군내면 남성리
(현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3]
'''사망'''
1950년 9월 29일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3. 작품
4. 여담
5. 선거 이력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독립운동가이다.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김영랑은 1903년 1월 16일 전라남도 강진군 군내면(현 강진읍) 남성리에서 아버지 김종호(金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 사이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혼인하였으나 1년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에서 영어를 수학하다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
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경성부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들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서는 김현상(金炫庠)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김성수(金晟洙) 등과 함께 현재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우리도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며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그 자리에서 각자 2원씩을 거두고 곧바로 태극기 500개를 제작하기로 하였으며, 다음날인 24일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김안식(金安植)을 만나 함께 25일 강진 장날에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등을 준비했으나 25일 전까지 목표한 태극기 개수를 다 만들지 못하고[4] 등사판 입수도 어려워져서 결국 다음 장날인 3월 30일로 거사 계획을 연기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영랑은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아# 이에 불복, 공소를 제기하였다. 4월 29일 공소 제기로 인해 대구복심법원으로 이송되었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등 불온한 언동을 한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만세시위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무죄를 언도받아 출옥하였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6월 9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되어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20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거쳐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영문학과에서 수학했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유학 중에는 아나키스트 혁명가인 박열과 교류했고, 괴테, 키츠 등의 외국 문학에 깊이 심취했다.
1930년 정지용과 함께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30년대 「독(毒)을 차고」,「가야금」, 「달마지」,「춘향」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저항의식을 표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시를 많이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지조있는 시인으로서 창씨개명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보수파 정치인으로서 정계에 입문하여 1945년 고향 강진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대동청년단 지단장에 취임하였지만 활동하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성향에 질려 금방 그만두었다. 그 후 이승만 정권의 공보수석비서관이던 시인 김광섭의 권유로 출판국장을 맡았지만 친일파들 천지인 중앙청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무질서한 당대 시국과 이승만의 독재,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억압을 일삼는 '간판만 바꾼' 친일파와 일제 부역자들의 행태에 환멸을 느낀 김영랑은 출판국장직 역시 6개월을 겨우 넘기고 그만두었는데 이것이 그의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 #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강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차경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래도 강진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던 덕분에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살다가 서울특별시 수복 다음날이었던 1950년 9월 29일,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5]
사후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3. 작품


대표적 작품으로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을 아실 이>, <꿈 밭에 봄 마음> 등이 있다. 주로 언어의 조탁을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발굴하고 세련된 시형과 율격으로 섬세하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고운 어조로 표현했다.
초중반기까지는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운율이 살아있는 서정적이고 세련된 시를 여럿 발표했지만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고 폭압적인 체제하에 놓이면서 후기 영랑의 시는 1940년대까지 저항적이고 날선 느낌으로 변한다. 회유와 협박이 거세지면서 1940년 절필을 선언한 김영랑은 해방이 오기까지 일본어로 된 단 한줄의 글조차 적지 않은 저항시인이기도 하다. 초기의 서정시가 워낙 유명해서인지 비해 후기의 저항적인 면모는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지만 2008년 금관문화훈장, 2018년에야 건국포장을 받으며 뒤늦게 인정을 받았다.
의외로 김영랑은 발표한 시에 제목을 한 번도 붙인 적 없다. 즉 위의 제목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모두 가제. 직접 시집을 보면 제목 자리에 번호만 붙어 있는 게 보인다. 보통은 첫 줄의 구절이 제목으로 뽑혀 쓰이는 편이다. 물론 마지막 줄이 쓰인 <꿈 밭에 봄 마음> 같은 예외도 있다.
펴낸 시집은 《영랑시집》(1935), 《영랑시선》(1949) 두 권이다.

4. 여담


  • 관동 대지진으로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던 김영랑은 1923년 자주 서울과 강진을 오가며 작가 최승일(崔承一)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여동생인 최승희를 알게 되어 그해 11월경부터 1925년까지 연애를 했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마침내 혼담까지 오갔다고 하는데, 부친의 반대 등으로 결국 이별하였다. 이때 김영랑은 자살까지 기도할 만큼 마음의 상처가 컸다고.#
  • 슬하에 7남 3녀를 두었지만[6], 대부분 해외로 이민을 가고 현재 자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단국대학교 어문학부 프랑스어전공의 김현태 교수만 대한민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현태 교수도 2004년 2월 22일 별세하여# 현재 자제들은 모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막내딸인 김애란씨와 손녀인 김헤경씨가 국내에 거주중으로 2018년 건국훈장 수여당시 해외에 있는 다른 자제들을 대신해 아버지의 훈장을 수여받았고 건국훈장을 부친의 고향인 강진군에 기증했다.
  • "피아노"로 유명한 시인 전봉건이 그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필적 확인 문구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가 바로 김영랑 시인의 시 「바다로 가자」 속 시구의 일부이다.
  • 2020학년도 6월 모의평가의 필적 확인 문구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이 「수풀 아래 작은 샘에서」속 시구의 일부이다.
  • 생전 교우관계가 굉장히 방대했는데 3.1 운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적이 있었지만 서정주이광수가 친일로 돌아서고도 '생계때문에 돌아설 수도 있다'며 크게 나무라지 않고 친분을 어느정도 유지했고, 결혼식 주례는 여운형이 서줬을 정도였다. 정지용이나 카프계열 문인들하고도 교우가 있었고 공보수석비서관을 지낸 김광섭과도 정말 친해서 김광섭의 도움으로 중앙청까지 들어갔었지만 의견이 맞지 않아 상을 엎을 정도로 크게 싸우고 나서도 친하게 지냈다. 잠시 중앙청이나 대동청년단에 몸담은 경력으로 인해 보수주의자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김영랑은 생전 보수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이름만 바꾼 토착왜구와 친일 부역자들의 행태에 출판국장이라는 멀쩡한 직장도 걷어차고 나온 사람이다. 정작 김영랑의 셋째아들인 김현철씨는 생전 아버지에 대해 자주통일과 평화통일을 선호한 진보 민족주의자로 평가했다.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남 제17선거구(강진군))
한국민주당
7,405표 (17.46%)
낙선 (4위)


6. 관련 문서




[1]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는 1901년생으로 기재하여 출마하였다.[2] 음력 1902년 12월 18일.[3] 남성리 211-1번지에 김영랑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영랑생가[4] 총 93개를 제작하였다.[5] 이 과정이 안습한데, 평범하게 적군의 눈에 띄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북한군이 후퇴할 때 뒤를 돌아보면서 아무나 맞으라고 쏜 눈 먼 유탄이 하필이면 집 문을 여는 김영랑 시인에게 제대로 맞은 것. 결국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망하고 말았다.[6] 김영랑은 '배만 곯는 문학 예술따위 하지마라'며 자식들에게 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김영랑의 자식들 대부분은 불문학, 영문학 교수가 되거나 언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