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충
1. 개요
대한민국의 승려. 대한불교천태종 제2대 종정에 취임해 1993년에 입적할 때까지 종단의 비약적인 발전과 중생교화에 힘쓴 한국 불교의 큰 선지식인이었다. 속명은 익순(益淳). 천태종단에서는 남대충 대종사 혹은 대충 대종사라고 칭한다.
2. 생애와 업적
남대충은 1926년 1월 18일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구봉팔문 아래 여의생에서 아버지 남명진(南明鎭)[4] 거사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병선(金炳善) 사이의 무녀독남, 3대 독자로 태어났다. 7세 되던 1933년 한 스님이 찾아와 그가 부처와 인연을 맺었다며 절에 데려가서 가르치고자 했지만 조부 남만요(南萬堯)는 이를 거절하고 내보내지 않았다. 11세 되던 1937년에는 부친이 남대충을 선비로 길러야 한다며 벼룻돌 3개를 구해 종이가 닳을 때까지 글씨를 쓰라고 시켰지만 며칠 뒤 숨을 거두면서 학문을 쌓을 기회를 잃어버렸다.[5]
19세 되던 1945년 계곡 입구에서 상월을 만나 길을 안내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구인사에 출가해 수십 년 동안 가르침을 받으며 오랫동안 수행에 전념[6] 하다가, 34세 되던 1960년에 대각의 깨달음을 얻고 인증을 받았다.[7] 이후 1967년 2월부터 1970년 1월까지 포교사를, 1973년 8월 8일부터 1974년 7월 1일까지 금강 전등회 부회장을 각각 역임했고, 1973년 12월 22일에는 1급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1974년 6월 17일, 입적한 상월의 법통을 이어받아 대한불교천태종 제2대 종정에 취임해 종단의 사명감과 대중의 교화를 몸소 실천하며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인고한 정신력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일생을 바쳤다. 특히 구인사 중창불사를 비롯해 부산 삼광사, 대구 대성사 등 전국에 많은 천태종 사찰을 건립하였고, 한때 70만명이었던 신도 수를 250만명 이상으로 급성장시키며 종단의 교세는 날로 번영해 나가게 되었다. 또한 늘 엄격했지만 부처님처럼 따뜻하고 자상했으며 대중들에게 인생의 고달픔과 어려운 문제도 해결해 주면서 사람들은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의지를 가졌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외에도 교육, 문화, 사회복지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후원한 활동을 인정받으며 대통령 표창(1978), 국민포장(1980), 새마을훈장 자조장(1987)을 수상했다.
1980년대에는 인도와 네팔의 성지를 각각 순례하였고, 일본-중국-미얀마 등 많은 불교 국가 사찰을 방문해 활발한 교류를 전개하였는데, 그 중 중국 천태종 총본산인 국청사(國淸寺)에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을 건립하여 대각국사 의천과 상월 조사의 존상을 모시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상월원각대조사오도기략≫(1987)을 출판하는 과정에서도 상월의 고향을 답사하고 관련 증언을 구술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91년에는 대한불교천태종 이사장을 역임했다가 이후 2년 뒤인 1993년 10월 17일 새벽 4시 30분, 구인사 조실에서 법좌에 앉은 채 세수 67세, 법랍 48세로 조용히 입적하였다.
남대충 대종사의 적멸보궁은 단양군 영춘면 하리 강 건너에 있다.
煩惱盡處 急槃涌(번뇌진처 급반용)
苦海際時 蓮華生(고해제시 연화생)
軀殼一末 似浮嘔(구각일말 사부구)
靈光不滅 滿虛空(영광불멸 만허공)
번뇌 다 한곳에 열반으로 통하네
고해 끝날 때 연꽃 피었구나
이 몸 한갓 물 위에 뜬 물거품과 같지만
영혼의 빛 불멸하여 허공에 가득하도다
대한불교천태종 제2대 종정 남대충 대종사 열반게
3. 기타
남대충 대종사를 추모하는 연화대에 오르소서는 1993년 천태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이다. 당시 영결식에는 전 총무부장이자 현재 종회의 의장인 도원 스님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삼귀의례→반야심경 독경→기성 스님의 상월원각대조사 법어 봉독→감사원장을 지냈던 원로위원 정산 스님의 약력 소개→종회의 의장을 지냈던 덕산 대종사의 열반게송 낭독→헌화, 헌향, 헌다식→ 총무원장을 지냈던 원로원장 운덕 대종사의 영결사→한국불교 종단 협의회 회장을 지낸 의현 스님의 조사→일본 천태종 다니 겐쇼 스님의 대독→정희천 당시 문화체육부 종무실장의 대독→ 권익현 당시 민주자유당 국회의원의 조사→김덕영 27대 충청북도지사의 조사→우때보 당시 주한 미얀마 대사관 일등서기관의 대독→조박초 중국불교협회장의 조사에 의한 도원 스님의 한중불교 교류에 관한 대독→나무아미타불 정근→사홍서원 순으로 진행되었다.
성우는 동물의 왕국에서 나레이션을 맡았던 유강진이 맡았다.
[1] 회령공파(會寧公派)-안동 문중 17대손 순(淳) 항렬. 영양 남씨 25세. 아버지 남명진(南明鎭)은 24세손 진(鎭) 항렬.[2] 음력 1925년 12월 5일.[3] 영양 남씨 족보에서는 남대충을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으로 보는데, 원적지가 경상북도 안동이었던 듯 하다.[4] 족보명 남세진(南世鎭).[5] 그러나 남씨대동보 5권 밀직공파(영양 본관)-회령공파 177쪽에는 남명진이 1935년 10월 11일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6] 당시 상월 대조사는 종이에 적힌 천수경을 염송하라고 가르쳤는데 그걸 2일만에 다 외우면서 주위를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7]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최동순 교수의 주장대로 상월이 1922년생이고 1951년에 여의생 마을로 가서 구인사를 창건했다면, 상월과 남대충이 처음 만난 해도 당연히 1951년, 남대충이 27세 되던 해였을 것이다. 더구나 상월이 1922년생이라면, 제자 남대충보다 겨우 4세 연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