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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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救仁寺 / 로마자 : Guinsa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소백산 기슭에 있는 절이며 대한불교천태종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절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계곡 하나를 모두 차지하여 건물이 빼곡이 늘어섰고, 계곡을 안은 영주봉(수리봉) 정상에 있는 적멸궁[1] 까지 포함하면, 산자락에 소백산 구인사라고 씐 큰 바윗돌에서부터 계곡 전체와 산 정상까지가 모두 경내와 규모가 어마어마하지만 설법보전과 대조사전, 관음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기도실 내지 대중생활실이라 전각을 주로 불공 드리는 기능으로 사용하는 조계종 사찰과 구조가 다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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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사의 역사는 한국 천태종의 중창조인 상월원각대조사[3] 로부터 시작된다. 상월 대조사는 1911년[4] 강원도 삼척군에서 밀양 박씨 가문으로 태어났다. 1930년에는 중국과 티베트 등지에서 곤륜산, 오대산의 문수도량(문수보살)과 아미산의 보현성지(보현보살) 등을 순례한 뒤 1936년에 귀국하여 1945년 초 소백산에 들어가 초가집 형태로 지었고[5] , 그 뒤 1966년에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하여 큰 절로 발전하였다.[6]
상월 대조사는 특정한 스승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기존 불교종단의 풍토를 비판하였다. 수행을 하지 않고 재물에 관심을 두며 축재의 수단으로서 불공과 보시에 골몰하는 기존 종단을 비판하고, 참된 불교는 무엇보다 수행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수행하지 않는 불자는 불자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수행풍토 진작에 노력하였다.
천태종이 구인사를 중창하였다고는 하나, 덕산 스님 등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몇몇 승려들이 천태종의 법의를 제대로 갖추려 노력하여 이루어졌으며, 처음부터 천태종 교의를 제대로 갖추고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천태종이나 불교와 거리가 먼 궁궁을을강강 주송 등 동학이 연상되는 방식으로 기도한 적도 있다.[7]
당시 구인사는 지금과 달리 거대하지 않았다. 1974년에 상월 대조사가 열반한 뒤 남대충 스님[8] 이 종정으로 추대되고 구인사가 크게 번창하면서 그 동력은 소문이었다. 구인사에 가서 3일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이곳에서 기도한 덕에 소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구인사의 교세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커졌고, 같은 맥락으로 치병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또 큰스님의 증명을 받았다며 아주까리 기름을 병에 담아 팔고, 몸이 아픈 사람들은 이 기름병을 사서 복용하는 등, 구인사가 치병에 효험 있는 절이라고 소문 나자 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다. 일반 사람들에게 구인사는 소원을 이루어고 병을 낫게 해 주는 부처님의 기도처였던 것. 스님들은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을 스스로 굳게 믿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하면서 교세를 더욱 확장하였다.
오늘날 구인사에서 이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굳이 구인사에서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과거에 구인사를 찾아온 숱한 사람들이 체험한 역사이기 때문에, 구인사와 대한불교천태종의 이러한 출발 모습은 단순히 언급하지 않는다 하여 잊힐 바가 아니다.
현 천태종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종단 스스로는 작복종교를 지향하며 마음을 닦는 관음정진과 부처님 계율을 지킴으로써 선업을 쌓아 스스로 복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설법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깊은 체계를 제대로 소화하는 법사 스님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90년대만 하여도 구인사 승려들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기도수행을 하느라 피골이 상접할 만큼 항상 수행에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구인사에서 기도하는 일반 신도들에게도 그에 준하는 수행을 요구하여 새벽마다 골을 가득 울리는 관음정진 소리가 쩌렁쩌렁하였다. 그러나 지금 구인사의 대부분 스님들 모습은 보기 좋지 않고, 삼보당 근처에서나 기도 소리가 들릴 뿐 다른 곳은 조용하다. 스님들의 수행열이 이전 같지 않으며, 덩달아 신도들의 기도열도 상당히 감소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요즘 천태종에서는 불공 중심으로 변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전통불교의례를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겉으로 보이는 의례에 치중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지은 구인사 박물관이 지나치게 크고, 작위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대충대종사의 지도 아래 건축된 건물과 최근 지어진 건물의 양식만 비교해보아도 구인사 스님들의 마음자리가 상월 스님이 강조한 마음과 거리가 멀어졌다고 하겠다.[9]
26년간 총무원장을 지낸 운덕 스님은 처음 종단등록을 할 적에 종단명을 천태종이 아니라 미륵종이라 하려 했다고 밝혔다. 왜냐하면 상월 스님이 미륵 부처님이라서. 천태종이 상월 스님을 정각자로서 조사의 위치에 놓으려 노력함이야 근거가 있다. 그러나 그 정도를 넘어, 지금도 구인사에서는 무턱대고 영험이라든가 기적이라든가 이적을 행하였다든가 하는 이유로 상월 스님을 미륵 부처님으로 신격화하려는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이러한 모습이 과연 불교의 가르침에 얼마나 합치하는가. 천태종 이단 논의가 이미 정리된 현재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경내 건물로는 설법보전, 광명당(강당), 광명전, 역대조사전, 삼보당, 판도암, 설선당 등이 있다. 사천왕문에는 국내 최대의 청동 사천왕상이 안치되었다. 2013년, 구인사 입구에 거대한 천태중앙박물관(성보박물관)을 완공하였다.[10] 구인사에서는 여러 부처님과 더불어 천태종의 역대 법사들도 모신다는 차이점이 있다. 경내에 불전보다는 강당과 요사채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경내에 우체국이 따로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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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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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보전. 일반 사찰의 대웅전 격으로 중앙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대세지·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구인사의 주법당으로 5층에 법당이 있고 나머지 1~4층은 승려, 일반 신도들을 위한 수행처, 기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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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전. 사찰 전각 주제에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원래 엘리베이터가 없었지만 높은 곳을 노약자들이 오르내리기 불편해서 설치하였다. 대법회나 행사들을 이곳에서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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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전 옥상에 있는 대조사전, 참고로 저거 다 금박 단청을 입힌 거라고.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에 완공하였다.
대조사전이 완공되자 불교계 언론만이 아니라 일반 언론에서도 나름대로 지면을 할애하여 소식을 보도하였다. 구인사 측이 돈도 많으면서 콘크리트 공구리질로 만든 건물만 올리고 제대로 문화재다운 건물을 만들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자, "우리도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 건물을 만들면 될 거 아냐!" 하고 작정하였다. 안은 통층이지만 겉으로는 3층이라 법주사 팔상전과 구조가 비슷하다. 문화재 복원에도 여러 번 참가하여 유명한 신응수 대목장[11] 이 도편수가 되고 오세필 기와장이 참가하는 등 전통건축의 장인들을 불러모아 만들었다. 완공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오세필 기와장이 특별히 개발한, 금빛 나는 기와를 사용했다고 한다. 도금이나 단청이 아니라 유약을 발라 구우면 금빛이 나는 기와라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라지 않는다고... 확실히 세월이 흐르면 문화재로 가치를 인정받을 만하다. 물론 단청도 옻칠에 금가루를 섞어 칠했다고 한다. #
불상보다는 사천왕상이나 코끼리 탑 등의 조각품이 주로 있다. 그 때문에 산 한 쪽면을 통째로 차지하는 거대한 절 경내에서 법당을 제외하면 불상을 보기 힘들고, 역사 깊은 절이 아니라 고즈넉한 풍경을 기대하기는 무리이다. 법당 계단 벽면에 지옥도 그림이 있어 묘사가 조금 잔인하여 그림을 보고 어린 아이들이 충격을 받기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부모들이 밥 남기는 버릇, 거짓말하는 버릇에 대해 훈육할 때 이 그림을 상기시키면 즉각 개선된다. 이따금씩 큰 행사가 있을 때 본전에 가면 바라춤을 추는 스님들도 볼 수 있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외부에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다. 이는 웅장하고 화려한 대형 개신교 교회들을 보는 비판적 시각과 일치한다. 부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자성이 필요한 부분.
구인사 전각은 단순히 불공 드리는 용도가 아니라 수행과 기도를 목적으로 하는 건물이 90% 이상이란 점에서 바람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이다. 지금 구인사는 승려와 재가신도 모두 수행/기도의 열기가 불과 1990년대와 비교하여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구인사 재가신도 기도실의 중심인 설법보전의 3층과 4층이 과거라면 주말마다 가득 차 발 디딜 틈 하나 없었으나, 지금은 대자로 누워 몇백 바퀴를 굴러도 부딪히지 않을 만큼 텅 비었다.
2대 종정 남대충 대종사의 지도 아래에서는 구인사 전각 또한 한국적인 풍토와 전통, 감성에 맞게 지어졌다. 1980년대 지어진 건물들이 이러하다. 사실 이때 지은 건물들도 지나치게 크단 비판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그라들었다. 왜냐하면 최근 지어진 판도암, 광명당, 역사박물관 등 건물들은 구인사의 계곡 크기와 주경야선이라는 수행풍토에 도무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상월원각대조사와 대충대종사는 구인사를 안고 있는 산의 바위를 깎아내지 말라고 말씀하였다. 그리하여 대충 스님 지도 아래 만든 전각은 계곡의 거친 바위를 깎는 등 훼손을 하지 않고 그 위에 살포시 앉았지만, 지금 지어지는 전각들은 바위를 두부 자르듯이 아무렇지 않게 성큼성큼 훼손한다. 과거 전각들은 북향에 좁고 깊은 계곡 속에 위치한 한계를 최대한 활용하여 습기 문제를 효율적으로 방지하도록 지었으나, 최근 전각들은 기술의 힘을 믿고 자연환경을 훼손하면서 건축되었으면서도 습기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했다. 수백억 원을 들여 지은 광명당조차 벽 곳곳이 갈라지고 곰팡이가 껴 환풍하려고 곳곳에 선풍기를 틀어 놓았을 정도. 구인사 측이 이렇게 시주재산을 무책임하기 사용하기 때문에, 구인사를 우호적이고 긍정적으로 여기던 인식이 알게 모르게 크게 손상되었다.
2017년 들어서는 대광사에 또 이런 것을 지었다... 기사
대한민국에서는 참 드물게도 이 절에서는 휴대폰이 드럽게 터지지 않는다. 아주 외딴 곳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도 몇몇 터지는 장소가 있긴 하다.[12] 공중전화가 있긴 하지만,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산을 따라 올라가며 절을 지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대학보다도 크고 아름답다. 다만, 바닥은 전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라 산을 오르는 느낌은 전혀 없고 경사와 계단만 계속하여 등장한다. 눈앞에 보이는 큰 건물이 끝이라고 생각하며 올라가면 그 뒤로 또다시 건물이 등장하여 관광객을 좌절시킨다. 과연 국내 최대 사찰이다.[13]
공양의 맛은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다. 심지어 고추장마저도 꿀맛이다[14] . 아래 식당까지 왕복 30분 가량 걸리고 경사도 어마어마하니 조용히 공양을 먹을 수밖에... 보통 맛없다고 하는 급식, 구내식당들보다 못하고, 군대 훈련소 식당이나 병원 환자식 정도가 비견할 만할... 까?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저것들보다도 더 맛없을지도 모른다. 된장국이 생각날 수 있는데, 절 사정상 국에 다진 마늘이 안 들어가서 말이 된다. [15] 그저 수행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참고 먹는 것이 번뇌를 떨쳐내는 길. 여기서 신도들은 비빔밥처럼 밥에 나물과 고추장을 비벼 먹는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각 테이블마다 고추장이 담긴 통이 있어서 비비면 먹을 만 하다.
절을 올라가다 보면 장독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신도들의 공양에 쓰일 된장, 고추장독이다. 다 먹을까 싶을 정도로 많아 보이지만, 기도하는 신도들 숫자를 생각하면 그리 많지도 않다. 공양 재료 대부분은 스님들이 손수 농사 지어 얻은 소출로 충당하며, 고추장, 된장으로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인다.
인근에 시외버스 정류소가 위치하여 버스를 타고 단양시외버스공영터미널, 동서울터미널 등 일부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구인사공용정류장 문서 참조. 자가용으로는 595번 지방도를 타는데, 보통 영춘면 소재지 지역 방향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반대쪽인 보발재 고갯길은 헤어핀 구간이 여럿 있어 험하기 때문.
가수 웅산이 비구니 시절 이 사찰에 머물렀으며, 그때 받았던 법명을 가수 활동을 하면서 그대로 예명으로 사용하였다.
생활불교를 강조하는 천태종 특성상 오계를 수지하기 위해서는 구인사 안거와 지역 말사 안거를 8년 이상 성만해야만 한다.
한자 : 救仁寺 / 로마자 : Guinsa
1. 개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소백산 기슭에 있는 절이며 대한불교천태종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절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계곡 하나를 모두 차지하여 건물이 빼곡이 늘어섰고, 계곡을 안은 영주봉(수리봉) 정상에 있는 적멸궁[1] 까지 포함하면, 산자락에 소백산 구인사라고 씐 큰 바윗돌에서부터 계곡 전체와 산 정상까지가 모두 경내와 규모가 어마어마하지만 설법보전과 대조사전, 관음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기도실 내지 대중생활실이라 전각을 주로 불공 드리는 기능으로 사용하는 조계종 사찰과 구조가 다르다.[2]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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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사의 역사는 한국 천태종의 중창조인 상월원각대조사[3] 로부터 시작된다. 상월 대조사는 1911년[4] 강원도 삼척군에서 밀양 박씨 가문으로 태어났다. 1930년에는 중국과 티베트 등지에서 곤륜산, 오대산의 문수도량(문수보살)과 아미산의 보현성지(보현보살) 등을 순례한 뒤 1936년에 귀국하여 1945년 초 소백산에 들어가 초가집 형태로 지었고[5] , 그 뒤 1966년에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하여 큰 절로 발전하였다.[6]
상월 대조사는 특정한 스승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기존 불교종단의 풍토를 비판하였다. 수행을 하지 않고 재물에 관심을 두며 축재의 수단으로서 불공과 보시에 골몰하는 기존 종단을 비판하고, 참된 불교는 무엇보다 수행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수행하지 않는 불자는 불자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수행풍토 진작에 노력하였다.
천태종이 구인사를 중창하였다고는 하나, 덕산 스님 등 불교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몇몇 승려들이 천태종의 법의를 제대로 갖추려 노력하여 이루어졌으며, 처음부터 천태종 교의를 제대로 갖추고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천태종이나 불교와 거리가 먼 궁궁을을강강 주송 등 동학이 연상되는 방식으로 기도한 적도 있다.[7]
당시 구인사는 지금과 달리 거대하지 않았다. 1974년에 상월 대조사가 열반한 뒤 남대충 스님[8] 이 종정으로 추대되고 구인사가 크게 번창하면서 그 동력은 소문이었다. 구인사에 가서 3일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이곳에서 기도한 덕에 소원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아지자 구인사의 교세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커졌고, 같은 맥락으로 치병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또 큰스님의 증명을 받았다며 아주까리 기름을 병에 담아 팔고, 몸이 아픈 사람들은 이 기름병을 사서 복용하는 등, 구인사가 치병에 효험 있는 절이라고 소문 나자 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다. 일반 사람들에게 구인사는 소원을 이루어고 병을 낫게 해 주는 부처님의 기도처였던 것. 스님들은 사람들의 이러한 인식을 스스로 굳게 믿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하면서 교세를 더욱 확장하였다.
오늘날 구인사에서 이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굳이 구인사에서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과거에 구인사를 찾아온 숱한 사람들이 체험한 역사이기 때문에, 구인사와 대한불교천태종의 이러한 출발 모습은 단순히 언급하지 않는다 하여 잊힐 바가 아니다.
현 천태종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종단 스스로는 작복종교를 지향하며 마음을 닦는 관음정진과 부처님 계율을 지킴으로써 선업을 쌓아 스스로 복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설법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자리에서부터 시작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깊은 체계를 제대로 소화하는 법사 스님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90년대만 하여도 구인사 승려들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기도수행을 하느라 피골이 상접할 만큼 항상 수행에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구인사에서 기도하는 일반 신도들에게도 그에 준하는 수행을 요구하여 새벽마다 골을 가득 울리는 관음정진 소리가 쩌렁쩌렁하였다. 그러나 지금 구인사의 대부분 스님들 모습은 보기 좋지 않고, 삼보당 근처에서나 기도 소리가 들릴 뿐 다른 곳은 조용하다. 스님들의 수행열이 이전 같지 않으며, 덩달아 신도들의 기도열도 상당히 감소했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요즘 천태종에서는 불공 중심으로 변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전통불교의례를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겉으로 보이는 의례에 치중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지은 구인사 박물관이 지나치게 크고, 작위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대충대종사의 지도 아래 건축된 건물과 최근 지어진 건물의 양식만 비교해보아도 구인사 스님들의 마음자리가 상월 스님이 강조한 마음과 거리가 멀어졌다고 하겠다.[9]
26년간 총무원장을 지낸 운덕 스님은 처음 종단등록을 할 적에 종단명을 천태종이 아니라 미륵종이라 하려 했다고 밝혔다. 왜냐하면 상월 스님이 미륵 부처님이라서. 천태종이 상월 스님을 정각자로서 조사의 위치에 놓으려 노력함이야 근거가 있다. 그러나 그 정도를 넘어, 지금도 구인사에서는 무턱대고 영험이라든가 기적이라든가 이적을 행하였다든가 하는 이유로 상월 스님을 미륵 부처님으로 신격화하려는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이러한 모습이 과연 불교의 가르침에 얼마나 합치하는가. 천태종 이단 논의가 이미 정리된 현재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3. 전각
경내 건물로는 설법보전, 광명당(강당), 광명전, 역대조사전, 삼보당, 판도암, 설선당 등이 있다. 사천왕문에는 국내 최대의 청동 사천왕상이 안치되었다. 2013년, 구인사 입구에 거대한 천태중앙박물관(성보박물관)을 완공하였다.[10] 구인사에서는 여러 부처님과 더불어 천태종의 역대 법사들도 모신다는 차이점이 있다. 경내에 불전보다는 강당과 요사채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경내에 우체국이 따로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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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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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보전. 일반 사찰의 대웅전 격으로 중앙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대세지·관세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구인사의 주법당으로 5층에 법당이 있고 나머지 1~4층은 승려, 일반 신도들을 위한 수행처, 기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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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전. 사찰 전각 주제에 내부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원래 엘리베이터가 없었지만 높은 곳을 노약자들이 오르내리기 불편해서 설치하였다. 대법회나 행사들을 이곳에서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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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전 옥상에 있는 대조사전, 참고로 저거 다 금박 단청을 입힌 거라고.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0년에 완공하였다.
대조사전이 완공되자 불교계 언론만이 아니라 일반 언론에서도 나름대로 지면을 할애하여 소식을 보도하였다. 구인사 측이 돈도 많으면서 콘크리트 공구리질로 만든 건물만 올리고 제대로 문화재다운 건물을 만들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자, "우리도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 건물을 만들면 될 거 아냐!" 하고 작정하였다. 안은 통층이지만 겉으로는 3층이라 법주사 팔상전과 구조가 비슷하다. 문화재 복원에도 여러 번 참가하여 유명한 신응수 대목장[11] 이 도편수가 되고 오세필 기와장이 참가하는 등 전통건축의 장인들을 불러모아 만들었다. 완공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오세필 기와장이 특별히 개발한, 금빛 나는 기와를 사용했다고 한다. 도금이나 단청이 아니라 유약을 발라 구우면 금빛이 나는 기와라 시간이 지나도 빛이 바라지 않는다고... 확실히 세월이 흐르면 문화재로 가치를 인정받을 만하다. 물론 단청도 옻칠에 금가루를 섞어 칠했다고 한다. #
불상보다는 사천왕상이나 코끼리 탑 등의 조각품이 주로 있다. 그 때문에 산 한 쪽면을 통째로 차지하는 거대한 절 경내에서 법당을 제외하면 불상을 보기 힘들고, 역사 깊은 절이 아니라 고즈넉한 풍경을 기대하기는 무리이다. 법당 계단 벽면에 지옥도 그림이 있어 묘사가 조금 잔인하여 그림을 보고 어린 아이들이 충격을 받기도 하는데 그래서인지 부모들이 밥 남기는 버릇, 거짓말하는 버릇에 대해 훈육할 때 이 그림을 상기시키면 즉각 개선된다. 이따금씩 큰 행사가 있을 때 본전에 가면 바라춤을 추는 스님들도 볼 수 있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외부에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다. 이는 웅장하고 화려한 대형 개신교 교회들을 보는 비판적 시각과 일치한다. 부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자성이 필요한 부분.
3.1. 비판
구인사 전각은 단순히 불공 드리는 용도가 아니라 수행과 기도를 목적으로 하는 건물이 90% 이상이란 점에서 바람직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이다. 지금 구인사는 승려와 재가신도 모두 수행/기도의 열기가 불과 1990년대와 비교하여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구인사 재가신도 기도실의 중심인 설법보전의 3층과 4층이 과거라면 주말마다 가득 차 발 디딜 틈 하나 없었으나, 지금은 대자로 누워 몇백 바퀴를 굴러도 부딪히지 않을 만큼 텅 비었다.
2대 종정 남대충 대종사의 지도 아래에서는 구인사 전각 또한 한국적인 풍토와 전통, 감성에 맞게 지어졌다. 1980년대 지어진 건물들이 이러하다. 사실 이때 지은 건물들도 지나치게 크단 비판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그라들었다. 왜냐하면 최근 지어진 판도암, 광명당, 역사박물관 등 건물들은 구인사의 계곡 크기와 주경야선이라는 수행풍토에 도무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상월원각대조사와 대충대종사는 구인사를 안고 있는 산의 바위를 깎아내지 말라고 말씀하였다. 그리하여 대충 스님 지도 아래 만든 전각은 계곡의 거친 바위를 깎는 등 훼손을 하지 않고 그 위에 살포시 앉았지만, 지금 지어지는 전각들은 바위를 두부 자르듯이 아무렇지 않게 성큼성큼 훼손한다. 과거 전각들은 북향에 좁고 깊은 계곡 속에 위치한 한계를 최대한 활용하여 습기 문제를 효율적으로 방지하도록 지었으나, 최근 전각들은 기술의 힘을 믿고 자연환경을 훼손하면서 건축되었으면서도 습기 문제조차도 해결하지 못했다. 수백억 원을 들여 지은 광명당조차 벽 곳곳이 갈라지고 곰팡이가 껴 환풍하려고 곳곳에 선풍기를 틀어 놓았을 정도. 구인사 측이 이렇게 시주재산을 무책임하기 사용하기 때문에, 구인사를 우호적이고 긍정적으로 여기던 인식이 알게 모르게 크게 손상되었다.
2017년 들어서는 대광사에 또 이런 것을 지었다... 기사
4. 기타
대한민국에서는 참 드물게도 이 절에서는 휴대폰이 드럽게 터지지 않는다. 아주 외딴 곳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도 몇몇 터지는 장소가 있긴 하다.[12] 공중전화가 있긴 하지만, 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산을 따라 올라가며 절을 지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대학보다도 크고 아름답다. 다만, 바닥은 전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라 산을 오르는 느낌은 전혀 없고 경사와 계단만 계속하여 등장한다. 눈앞에 보이는 큰 건물이 끝이라고 생각하며 올라가면 그 뒤로 또다시 건물이 등장하여 관광객을 좌절시킨다. 과연 국내 최대 사찰이다.[13]
공양의 맛은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다. 심지어 고추장마저도 꿀맛이다[14] . 아래 식당까지 왕복 30분 가량 걸리고 경사도 어마어마하니 조용히 공양을 먹을 수밖에... 보통 맛없다고 하는 급식, 구내식당들보다 못하고, 군대 훈련소 식당이나 병원 환자식 정도가 비견할 만할... 까?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저것들보다도 더 맛없을지도 모른다. 된장국이 생각날 수 있는데, 절 사정상 국에 다진 마늘이 안 들어가서 말이 된다. [15] 그저 수행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참고 먹는 것이 번뇌를 떨쳐내는 길. 여기서 신도들은 비빔밥처럼 밥에 나물과 고추장을 비벼 먹는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각 테이블마다 고추장이 담긴 통이 있어서 비비면 먹을 만 하다.
절을 올라가다 보면 장독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신도들의 공양에 쓰일 된장, 고추장독이다. 다 먹을까 싶을 정도로 많아 보이지만, 기도하는 신도들 숫자를 생각하면 그리 많지도 않다. 공양 재료 대부분은 스님들이 손수 농사 지어 얻은 소출로 충당하며, 고추장, 된장으로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인다.
인근에 시외버스 정류소가 위치하여 버스를 타고 단양시외버스공영터미널, 동서울터미널 등 일부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구인사공용정류장 문서 참조. 자가용으로는 595번 지방도를 타는데, 보통 영춘면 소재지 지역 방향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반대쪽인 보발재 고갯길은 헤어핀 구간이 여럿 있어 험하기 때문.
가수 웅산이 비구니 시절 이 사찰에 머물렀으며, 그때 받았던 법명을 가수 활동을 하면서 그대로 예명으로 사용하였다.
생활불교를 강조하는 천태종 특성상 오계를 수지하기 위해서는 구인사 안거와 지역 말사 안거를 8년 이상 성만해야만 한다.
[1] 한국 천태종을 중창한 상월 대조사의 묘역이다.[2] 조계종과 다른 이러한 모습은 일반 사찰의 대웅전에 해당하는 설법보전에서 행하는 새벽 예불에 참관하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사찰 내 모든 승려들이 참례하지는 않고, 단지 당번 돌듯 불공 의식을 담당한 승려들이 돌아가며 새벽 예불을 본다. 다른 승려들은 농사나 자기 업무를 준비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는데, 저녁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이어지는 기도와 참선시간이 있지만, 모든 승려들이 기도 시간을 엄수하지는 않는다.[3] 上月圓覺大祖師. 법명이 상월(上月)이고 법호가 원각(圓覺)이다. 속명은 교단에서는 박준동(朴準東)이었다고 설명하지만 동국대 최동순 교수가 고증한 바에 따르면 박준각(朴準角)이다.[4] 통상적으로 1911년생이라고 하는데, 동국대 최동순 교수는 1922년생이라고 주장한다.[5] 최동순 교수는 1951년에 상월이 소백산 밑으로 들어와 구인사를 지었다고 주장한다.[6] 참고로 규모가 두 번째인 천태종 사찰은 부산광역시에 있는 삼광사. 삼광사도 상당히 큰 절이지만 구인사의 규모에 비하면 암자에 불과하다.[7] 원래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는 말은 정감록에서 나왔기 때문에, 최제우 등 구한말-일제시대 종교가들이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였다. 상월 스님도 정감록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8] 1925년 음력 12월 5일 영춘면 소백산 구봉팔문 아래 여의생에서 영양 남씨 가문의 독자로 태어났다. 속명은 남익순(南益淳). 1993년 9월 3일 세수 69세, 법랍 48세에 입적하였다.[9] 건물을 한 번 지으면 허물 수도 없는데, 이렇게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판도암, 광명당, 역사박물관 등에서 계속 저질렀다.[10] 2003년에 첫 삽을 떴는데 10년만에 완공하였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운영하는 성보박물관 중에서도 최대규모라고...[11] 2008년 광화문 복원작업 중 문화재청이 제공한 금강송 4그루를 빼돌린 혐의로 기소되어, 2017년에 1심과 항소심에서 벌금 7백만 원을 선고받은 그 사람이다.[12] 식당 아래 자판기 쪽과 상월대조사 적멸궁이 위치한 산 중턱에서는 통화가 가능할 정도로만 터진다.[13] 방문 후기를 보면 최상단부까지 오르는게 엄청나게 힘들다는 사람도 많은데, 높이나 포장상태를 감안하면 실제로는 동네 뒷산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70대 노인 정도의 체력이 아닌 이상 과장이다.[14] 물론 이 꿀맛이라는 것도 당연히 맛있다는 의미가 아니다.[15] 정 먹기 힘들면 덜어달라 하면 되니 걱정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