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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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남응하는 그의 사촌 동생이며, 남진두는 그의 5촌 조카, 즉 종질(從姪)이다.
2. 생애
남효직은 1875년 3월 17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읍내면 괴시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서 해촌(海村) 남극만(南極萬)의 넷째 현손인 아버지 남조순(南朝淳)과 어머니 안동 권씨 권도만(權度萬)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3년(고종 40) 11월 2일 통신사(通信司) 전화과(電話課) 주사(主事)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이튿날인 11월 3일 사직하였다.#
그는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救世軍 參尉) 권태원 등이 주동한 1919년 3월 18일 영해읍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남진두, 남계병, 남교문, 정규하 등과 함께 3천명의 군중을 이끌고 성내동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해 그들도 부르게 했다.
이후 장터로 가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후 주재소로 다시 향했을 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이에 격분한 남효직은 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 행진해 평소 일제의 정책을 극찬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일본인 소학교, 우편소, 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후 군중은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리고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했다. 이때 영덕경찰서에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했다. 그러자 남효직은 군중과 함께 그들을 포위해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 세례를 가하면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미즈모토(水本) 여관에 감금했다.
만세시위는 이튿날에도 지속되다가 오후 5시경 대구에 있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이 출동해 헌병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자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이후 일제가 대대적인 검속을 펼치자 피신했고,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 궐석 재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몇년 후 체포된 그는 1922년 8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4년 4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남효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