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원(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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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권태원(權泰源)
생몰
1891년 10월 10일 ~ 1966년 9월 14일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
사망지
경상북도 영덕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권태원은 1891년 10월 10일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구세군 참위(參尉)였다. 그해 3월 12일, 낙평동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이 서울에서 벌어진 3.1 운동에 참여한 뒤 그를 찾아와서 서울에서 들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서울, 평양, 대구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만세시위에 대해 전했다. 이에 그는 영덕군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3월 15일 병곡면 송천동 장로교회 장로 정규하를 찾아갔는데, 이곳에서 남효직, 남계병 등과 만나 김세영으로부터 들은 국내외의 정세를 상세히 전한 후 영덕군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송천동에 거주하는 권유동(權有東)의 집에서 박희락(朴熙洛)에게도 이같은 거사 계획을 말하여 찬성을 얻었다. 그리고 영덕군내의 토착 향반(鄕班)인 권(權)·남(南)·박(朴)·이(李)·백(白) 등 5성을 중심으로 동지포섭에 주력했다.
그는 당초에 영해면에서 단독으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지만, 정규하가 영해시장이 열리는 날에 시위를 벌이자는 건의를 받아들여 3월 18일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리고 영해면, 병곡면, 축산면, 창수면의 기독교도 및 농민을 광범위하게 규합하면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윽고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권태원은 정규하, 남효직, 남계병 등과 함께 3천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성내동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가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스즈키 츠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그는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교사들을 규탄하고,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로 시위행진하며 건물 등을 파괴한 후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 앞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이때 주재소의 응원요청을 받고 영덕 경찰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황급히 출동하여 시위를 제지하려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했다. 이에 그는 군중과 함께 이들을 추격하여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세례를 가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여관에 감금하였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이날 밤과 이튿날까지 계속되어, 오전 11시경 포항(浦項)헌병대에서 나온 일본 헌병분대장과 6명의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그들도 이 엄청난 군중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후 5시경 대구에 있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 이하 17명의 군대가 증원되어 헌병들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강제로 시위군중은 해산당하였다. 하지만 권태원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3월 25일 오후 2시경에 청송군 진보면 장터에서 기독교도 50여명을 이끌고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6년 9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권태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