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진흥운동
農村振興運動
1. 개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지휘아래 1932년부터 1940년까지 8년에 걸쳐 진행된 관제 농민운동. 소작농 위주 농촌사회의 불만[1] 을 억누르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이 주된 것이었지만, 이어지는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시선을 연장하면 황국신민화 정책의 첫 출발점이기도 하다.
2. 내용
안 그래도 일제의 일본 위주 식량정책과 모순적인 지주 제도로 인해 흔들리던 당시 한국 농촌사회는 1930년대가 시작하자마자 들이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더욱 가파르게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2]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의 분노는 갈수록 커져가고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20년대부터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였다. 이에 따라 30년대 초 농촌 곳곳에서는 암태도 소작쟁의로 대표되는 각종 소작쟁의와 사회주의 계열 농민조합의 결성이 하루가 파다하고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일제가 시작한 것이 바로 농촌진흥운동. 이 운동의 출범 당시 총독부는 농민의 생활개선 및 정신계몽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이런 기치를 실행하고 농촌 사회의 모순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전근대적 지주제 및 식민지 정책을 대폭 뜯어고쳐야 했으니 뾰족한 수가 있을리가... 결국 총독부는 1933년 초가 되면 기존의 목표를 포기하고 농가갱생이라는 기치를 새롭게 내거는데 이 농가갱생 운동이라는 것이 말만 거창하지, 따지고보면 '''"근면성실 및 검소함을 추구해야 조선 농촌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뭐 이 정도 얘기에 불과한 것이었다.[3] 즉 농촌진흥운동은 정작 가장 큰 문제였던 일본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수탈에는 눈을 감은 채로,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면 잘 살 게 된다고 농민들을 세뇌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한편 1935년으로 접어들면 총독부는 새로이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는데, 심전개발이란 신앙심[4] · 국가의식 · 공동체의식의 함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자면 ‘충성스런 황국신민이 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에 따라 각종 농촌 진흥운동은 전시동원을 위한 농촌사회의 재편성 및 농민층에 대한 황국신민화 작업으로 변모하게 되면서 사실상 종결되고,[5] 1940년 전쟁이 격화되면서 총독부가 새로 시작한 국민총력운동으로 농촌진흥운동이 자연스럽게 대체되면서 완전히 끝난다.
3. 관련 문서
[1] 초창기 소작쟁의 형태는 생존권을 위한 투쟁 성격이 강했으나, 1930년대로 가서는 점차 적색 소작쟁의가 증가하였고, 성격이 점차 정치적 및 항일적 성격이 강해진 무렵이다. [2] 미농산물 가격의 크게 떨어지면서 농민들의 부채가 급증하면서 애초에 소수이던 자영농들까지도 몰락하게 된다.[3] 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총독부도 처음엔 허울좋은 구호 말고 뭘 실제로 해보려고는 했단다. 근데 돈이 없어서 망했다고.. 사실 돈이 풍족해도 뭐 얼마나 지원해줬을까 하긴 하지만...[4] 당연히 신토가 대상이다. 기독교나 불교의 신앙같은 걸 추구했다간 쳐맞았다.[5] 공식적으로는 개요에 적었듯이 1940년까지 농촌진흥운동을 내걸었지만 실질적으로 1935년과 1936년쯤에 끝난 걸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