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태도 소작쟁의
1. 개요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1] 에 위치한 암태도[2] 에서 농민들이 지주에 대항하여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파업 및 농성한 사건.
2. 전개 과정
192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농민과 노동자들의 소작쟁의, 노동쟁의가 불붙었는데, 암태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암태도에는 문재철[3] , 나카시마 세이타로, 천후빈[4] 3명의 지주가 있었다. 이 중 문재철은 대지주로서 논 29만 평과 밭 11만 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문재철은 가혹하게 소작료를 징수했는데, 당시 일제시대의 소작료는 추수한 곡식의 절반인 것에 비해 그는 무려 '''6할~8할'''이나 가져갔다. 이때문에 소작인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나중에는 분노하여 서태석[5] , 서창석 등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1923년 8월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했다. 암태소작인회는 그 해 9월 문재철을 비롯한 암태도의 지주들에게 "소작료는 논 40%, 밭 30%로 하고 소작료로 내는 농작물 운반도 1리 이내로 해달라"고 요구하며 이에 불응하면 소작료를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우리들의 부르짖음 하늘이 안다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마음껏 굳세게 뭉치어라
'''이 뼈가 닳게 일하여도 살 수 없거늘 놀고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그들의 몸에 빛난 옷은 우리의 땀이요 그들이 입에 맞는 음식은 우리의 피로다
봄 동산에 좋은 꽃 지주의 물건 가을밤에 밝은 달도 우리는 싫다
소작쟁의 당시 농민들이 부른 <소작인의 노래>
이러한 요구조건에 다른 지주들은 농민들과 충돌을 일으키고 싶지않아 다들 수긍하고 암태소작인회와 합의했으나, 문재철만은 격분하여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암태소작인회도 반발하며 문재철한테 소작료를 납부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러자 분노한 문재철은 깡패들을 고용하여 소작인들을 마구 폭행하며 체납한 소작료를 낼 것을 강요했다. 소작인들은 크게 분개했고, 소작료 납부를 계속 거부하며 1924년 3월 27일 암태면 동와촌리에서 '지주 규탄 면민대회'를 열어 문재철의 이런 만행을 성토했다. 4월 22일에는 '''분노한 소작인들이 문재철의 부친을 위해 세워진 송덕비를 무너뜨리고 문재철이 고용한 폭력배들과 충돌하였는데 폭력배들이 소작인들한테 역으로 두들겨 맞는다.''' 이 일로 50여 명의 소작인이 문재철의 신고를 받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그 중 서태석을 포함한 13명이 목포로 이송되었다. 그러자 암태도에 있던 농민들과 그 가족들은 경찰들의 행동에 분노를 금치 못했고, 농민은 물론이고 암태도 주민 전체가 봉기했다.
1924년 6월 4일과 5일, 400여 명의 암태도 주민들이 배 수십 척을 나눠타고 목포항에 모였다. 그들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법 앞에서 6월 8일까지 농성을 벌였다. 그럼에도 일본 경찰은 구금한 13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자 농성은 더욱 격화되어,7월 8일 600여 명의 주민들이 법원 앞에서 ''''아사동맹(餓死同盟)'을 결성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6] 11일에는 문재철의 집 앞에서도 시위가 발생해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수십 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그래도 암태도 주민들은 처절하게 투쟁했고, 이런 투쟁 소식은 점차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며 큰 반향을 낳았다. 여기저기에서 암태도 주민들을 위한 지원이 이어졌고, 한국인 변호사들도 13명의 구금자들을 위한 무료 변호에 나섰다. 사건의 파장이 커져가자 일본 경찰과 문재철은 당황했다.
이때문에 사태가 커지기를 원하지 않던 일본 경찰은 8월 30일, 목포경찰서장실에서 전라남도경찰국 고등과장 고가(古賀)가 지주 문재철과 농민대표 박복영을 불러서 중재를 진행했다. 마침내 문재철은 일본 경찰의 권고에 따라 암태도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했고, 이로써 소작쟁의는 '''농민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날 합의된 타협은 ① 소작료는 4할로 지정, ② 지주는 암태소작인회에 2,000원 기부, ③ 체납된 소작료는 향후 3년 간 분할상환, ④ 구금 중인 쌍방 인사들은 서로가 고소를 취하, ⑤ 부서진 비석은 암태소작인회 부담으로 복구 등이었다. 이후 잡혀간 13명의 사람들은 집행유예와 벌금형만 받고 풀려났다.
3. 의의
이 사건은 1920년대 일어난 소작쟁의 중에서 가장 큰 승리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남 신안군 지역의 다른 섬들도 소작쟁의를 벌였고, 이후 전국적으로도 소작쟁의가 퍼지게 되었다.[7]
[1] 당시에는 신안군이 없었고 무안군의 일부였다. 신안군이 설치된 건 45년 뒤인 1969년이었다.[2] 압해도와는 천사대교로 연결되어 있다.[3] 문재철은 암태도 출신으로 해양 사업에 나서서 많은 돈을 벌었고, 중추원에서 직책을 맡으며 토지를 불려나갔다. 그래서 1920년대 후반에는 300만 평, 1940년대에는 50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이후 여러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1941년에는 자신의 자금으로 학교를 세우기도 하는데 그것이 지금의 문태고등학교이다. 헌데 그는 암태도 소작쟁의 이후 농민활동가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일 때문인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다가 나중에 빠졌다.[4] 천정배의 큰할아버지뻘이라고 한다.(정확한 관계는 불확실)[5] 그는 1885년에 태어나 3.1 운동에 참여하여 태극기와 격문을 붙이다가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8년 동안 암태면장으로 활동하며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이후 농민운동에 참여하고 조선공산당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여러 번 감옥살이를 했다. 결국 계속된 투옥으로 인해 건강이 약해졌고 투옥된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분열증에 걸려 고생하다가 1943년 사망했고, 60년이 지난 2003년에서야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었다.[6] 단식농성은 6박 7일 동안 이어졌다.[7] 사실 이전부터 현재 신안군의 하의삼도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