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얀 칸
1. 개요
몽골 제국의 제33대 대칸. 휘는 바투몽케. 칸호는 다얀 칸.
2. 생애
2.1. 즉위 이전
그의 아버지는 쿠빌라이 칸의 후예인 바얀 뭉케였고[1] 어머니는 우리양하이라는 평민 가문의 시케르였다. 그의 아버지인 바얀 뭉케는 아들이 없던 만둘 칸에게 후계자로 인정받았고[2] 볼후 지농[3] 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궁정의 세력 다툼 끝에 그의 아버지인 바얀 뭉케는 오이라트의 수장 이스마일 타이시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이스마일의 새 아내가 되었으며 바투 뭉케는 버림받았다. 만둘 칸의 젊은 왕비였던 만두하이는 이리저리 떠돌던 바투 뭉케를 데려와 어떤 가정에 입양을 보내 간호를 받게 했고 건강을 회복하자 6살이 되는 해인 1470년 몽골의 전설적 존재인 칭기스 칸의 가묘가 있는 성지 나이만 차강게르 앞에서 성대한 취임식이 열렸는데 여기서 바투몽케가 칸위에 올랐다고 한다. 칸위에 오른 바투몽케는 다얀 칸이라고 불리게 된다.[4][5]
2.2. 즉위 이후
1480년부터 중국에 대한 약탈은 사실상 끊임없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다얀 칸은 약탈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다얀 칸은 ‘조공’ 사절을 1488년부터 1498년까지 중국에 보내었으나, 이 완숙한 군주는 명의 조공 체제에 참가할 의도가 없었다. 다얀 칸은 오르도스(Ordos)의 몽골진(Monggoljin) 씨족의 수령, 툴루우겐(Tölöögen)과 그의 아들 호오샤이(Khooshai)와 동맹을 맺었다. 1500년, 다얀 칸과 만도하이는 오르도스 지역의 여덟 개의 흰 색 게르, 즉, 칭기스 칸의 의장총으로 이동하여 영하(寧夏) 지역에 대한 대규모 약탈을 행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예상치 못한 중국의 격렬한 반격에서 겨우 탈출하여, 다얀 칸은 케를렌 강 인근으로 다시 이동하였다. 그러나 변경 지역을 향한 전방위적인 대규모 원정은 1507년까지 계속되었다.
다얀 칸이 오르도스의 몽골진 씨족의 지지를 계속 받는 동안, 우이구르 사람으로 추측되는 이부라이 타이시(Iburai Taishi)와 만둘라이(Mandulai: 오르도스의 장로)는 그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1508년, 내몽골의 우익 3투멘[6] 의 사절단이 이부라이의 권력에 불만을 표하며, 다얀 칸을 지배자로 초빙하였다. 다얀 칸은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 울루스바이후(Ulus-Baikhu)[7] 와 바르수볼로드 사인알라그(Barsu-Bolod Sain-Alag : 1521년 죽음)을 보냈다. 울루스바이후는 지농으로 등극하였으나, 폭동의 와중에 말 위에서 죽임을 당했다. 바르수볼로드는 탈출하였고, 다얀 칸은 그의 좌익 3투멘[8] 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다얀 칸은 처음에는 투르겐(Türgen : 아마도 당시 투메드 영토) 강에서 패배하였으나, 1510년, 다얀 칸의 군대는 달란테리군(Dalan-Terigün : 지금의 인산산맥) 우익 3투멘을 격파했다. 만돌라이는 죽임을 당했고, 이부라이는 쿠케누우르(Kökenuur : 청해)로 도주하여 1533년까지 활동하였다. 다얀 칸은 우익 3투멘을 노예로 만들라는 조언을 거부하고, 1513년에 바르수볼로드를 지농으로 임명했다. 다얀 칸은 달란테리군 전투에 참여한 모든 군대를 타르칸(Darqan : 세금 면제자)으로 임명했다.
1513년부터 중국에 대한 원정이 다시 시작되었다. 다얀 칸은 명의 영토인 선화(宣化)와 대동(大同)에 성채를 짓고, 15,000명의 기병을 주둔시켰다. 1514년과 1517년의 침략에는 70,000명 이상의 기병이 참여했다.
처음에는 이전의 많은, 다른 칸들과 마찬가지로 꼭두각시 칭기스조 칸으로 시작하였으나, 다얀 칸은 몽골 고원에서 가장 중요한 지배자의 반열에 올랐다. 다얀 칸은 오이라트 권력을 파괴하고, 타이시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다얀 칸은 그 스스로를 그 세기 들어서 실질적인 통치자의 역할을 겸하는 첫번째 지배자로 만들어냈다. 달란테리군의 승리는 몽골 사람들의 재연합을 이끌어내고, 몽골 사람들 안에서 칭기즈조의 신민이라는 공동의 자아를 단단하게 만들어 오이라트 사람들과 구분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우익 3투멘을 노예로 만들지 않은 대신 아들들의 영지로 6투멘으로 분할한 것은, 보르지긴씨족(Borjigid clan)[9] 지배의 분산체제를 형성하였으며, 내부의 평화와 외부로 향하는 확장을 이루어내는데 기여했다.
3. 아내와 자손들
다얀 칸은 19세가 되던 1483년, 그를 키운 만두하이와 결혼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15살 차였다. 만두하이는 다얀 칸과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다(세 쌍둥이 포함). 다얀 칸은 만두하이가 낳은 이 여덟 명과 다얀 칸의 후비가 낳은 네 명의 아들을 도합 열두 명의 자식을 보았다.
만두하이는 다얀 칸을 대신해 섭정을 하고 어린 칸을 대신해 외적의 침입을 막고 몽골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오이라트를 무너뜨리고, 장성한 다얀 칸에게 몽골의 통치권을 넘겼다.
자손 중 유명한 인물로는 다얀 칸의 손자이며 경술의 변을 일으킨 알탄 칸이 있다.
[1] 바얀 뭉케는 에센 타이시의 외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였던 타이순 칸이 에센에 반항하다 암살당한 후 에센 타이시는 자신에게 대항할 칭기즈 칸의 후예들을 숙청했는데 이때 에센의 할머니이자 칭기즈 칸의 자손이었던 사무르가 에센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 빼돌린 것.[2] 만둘 칸은 타이순 칸의 이복 동생이었다.[3] 황금 황태자라는 뜻이다.[4] 다얀이란 바로 '大元'을 의미했는데 명나라는 원나라를 의미하는 원이라는 칭호에 못마땅해 하며 소왕자(小王子)라 불렀다.[5] 1483년 만두하이는 다얀 칸과 결혼을 했는데 만두하이의 나이 34세, 다얀 칸의 나이 19세 때이다.[6] 오르도스, 투메드(Tümed), 융시예부(Yüngshiyebü)[7] 대개 울루스볼로드(Ulus-Bolod)라 표기.[8] 차하르, 할하(Khalkha), 우량한(Uriyangkhan).[9] Borjigid는 Borjigin의 복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