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탄 칸

 

알탄 칸(1507년 ~ 1582년)은 몽골 튀메드부의 군주이다. 몽골 제국의 33대 대칸인 다얀 칸의 손자이며, 34대 바르스볼드 조논 칸의 차남이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기록에서는 엄답(俺答) 또는 엄답아불해(俺答阿不孩)로 쓰여져 있다.[1]
오르도스 지방의 튀메드부에 분봉된 알탄 칸은 16세기 중기부터 빈번하게 중국에 침입하여 군사적으로 명나라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1529년, 1530년, 1542년에 명나라로 원정을 단행하여 전리품을 약탈해 돌아왔다. 1550년에는 만리장성을 넘어서 북경을 포위하고 교외에 불을 지르는 경술의 변을 일으켰다. '''북로남왜의 화''' 중 '''북로의 화'''가 바로 알탄 칸에 의한 명나라 침략을 말한다. 한편 1552년에는 오이라트를 격파하고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지배에 두었다.
사실 알탄 칸은 몽골의 대칸이 아니라 몽골 6부족 연맹체중 하나인 튀메드부의 칸일 뿐이다. 하지만 알탄 칸의 명성과 세력이 몽골 전체에 퍼지자 1551년 몽골의 36대 대칸인 구덴 칸은 알탄 칸에게 게게엔 칸이라는 직위를 주어 타협하였다. 결과적으로 구덴 칸은 차하르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으며, 대칸의 권력은 점차 쇠퇴해 실질적으로 차하르부에만 대칸의 권력이 미치게 되고, 다얀 칸에 의해 재통일된 몽골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손자인 알탄 칸에 의해 다시 분열되고 만다.
1570년 손자인 바간나기가 자신의 약혼녀[2]를 알탄 칸이 빼앗아간 것에 격분해 명에 투항한 것을 계기로 1571년에 바간나기와 9명의 명나라 출신 투항자를 교환하는 평화조약을 명나라와 체결하는데, 바한나기는 몽골로 귀환하여 소용장군의 칭호를 받아 명예를 회복했으며 알탄 칸은 순의왕에 봉해져서 자신의 거성을 귀화성[3]이라 부르고 명과 교역했다. 말과 비단 등이 무역의 대상으로, 이후 이로 인해 튀메드부는 경제적으로 크게 신장된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오이라트와 키르기스 등의 지역에 수차례 원정을 진행해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1578년에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교주 소남갸쵸가 알탄 칸을 방문했는데, 알탄 칸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겔룩파 불교를 국교로 선포했으며 교주를 달라이 라마로 선포했다.[4] 이는 몽골 지역의 종교가 티베트 불교가 되는 계기이며 최초의 달라이 라마 등장이었다. 소남갸초는 자신의 선대 교주들을 각각 1, 2대 달라이 라마로 칭하고 알탄 칸에 감사하는 마음 및 알탄 칸 계의 정통성 확보, 몽골을 통한 티베트 내에서의 겔룩파 세력 강화를 위해 알탄 칸의 증손자를 4대 달라이 라마로 삼았다. 4대 달라이 라마는 유일한 몽골인 달라이 라마이다.
알탄 칸은 1582년 죽었다. 장자인 셍게 뒤렝이 그의 뒤를 이었다.

[1] 출처. 해당 이름들로도 이 문서에 들어올 수 있다.[2] 이 약혼녀가 삼낭자로 불리우는 사람이다. 유목민족의 풍습에 따라 알탄 사후 알탄의 아들과 결혼하면서 세 번 결혼하였다 하여 삼낭자라 불리운다.[3] 현 내몽골 후흐호트[4]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소남 갸초는 이 만남을 쿠빌라이 칸과 파스파 간의 만남에 빗대어 알탄 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파스파는 파스파 문자를 만든 그 승려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