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대몽골국'''
'''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ᠤᠶᠯᠤᠰ'''[1] | '''Их Монгол улс'''[2]
[image]
'''국기'''
<colcolor=black> [image]
,몽골 제국이 남송을 복속시킨 1279년 전성기 때의 영토[3],
'''존속 기간'''
<colcolor=black>1206년 ~ 1388년 (182년)[4]
'''위치'''
몽골, 내몽골, 중국 대륙, 한반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 북부, 동유럽
'''수도'''
오논 강카라코룸대도 / 상도[5]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대칸(大汗) / 황제(皇帝)[6]
'''언어'''
중세 몽골어
'''민족'''
몽골인, 점령지의 피지배 민족들
'''종교'''
텡그리, 불교, 이슬람, 경교
'''주요 사건'''
1206년 건국
1294년 실질적인 제국 분열
1368년 대도 상실
1388년 북원 왕조 멸망. '''쿠빌라이 칸 직계 황실의 멸망.'''
'''통화'''
교초
'''성립 이전'''
나이만 | 타타르 | 케레이트 | 메르키트 | 카마그 몽골
'''분열 이후'''
| 차가타이 칸국 | 킵차크 칸국 | 오고타이 칸국 | 일 칸국
1. 개요
2. 각국에서의 이미지
3. 역사
3.1. 칭기즈 칸 이전
3.2. 칭기즈 칸 시대
3.3. 전성기
3.4. 몽골 제국을 물리친 국가들
3.6. 몽골 제국의 분열과 계승 제국들
4. 영토 크기 논쟁
5. 몽골 제국 소년병
6. 몽골 제국 특유의 울루스 체제
7. 칭기즈 칸계 계승 제국
8. 기타 관련 민족 및 제국
9. 역대 황제
10. 국가 제도
11. 관련 저서
12.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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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세기 몽골족이 세운 제국.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제국, 가장 큰 유목 제국, 가장 큰 황제국으로 이는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중세 몽골어 또는 몽골 문자로는 '예케 몽골 울루스(Yeke Mongɣol Ulus)'라고 했으며 "대몽골국"이라는 뜻이다. 현대 몽골어로는 이흐 몽골 올스(Их Монгол улс / Ih Mongol Uls) 라고 한다. 수도는 칭기즈 칸 때는 오논, 2대 ~ 4대 칸 때는 카라코룸, 5대 쿠빌라이 칸 이후부터는 대도(베이징). '''몽골 역사상 전무후무한 황금기이자 최전성기이다.''' 동서양 교류의 새로운 장을 연 역사적으로 중요한 국가로써 몽골이란 이름을 전 세계가 기억하도록 만든 국가이다.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잃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어린 소년이 '''세계의 공포 칭기즈 칸'''으로 자리잡아 동아시아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을 갈아마시며,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전쟁사를 갈아치운다. 당시 '''서쪽 끝으로 오스트리아에서부터 동쪽 끝으로 일본후쿠오카, 남쪽 끝으로는 인도네시아자바 섬까지'''[7] 몽골 제국군의 말발굽에 짓밟히지 않은 유라시아 국가는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의 몇몇 국가 정도뿐이다.[8] 구대륙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전 세계는 유럽아시아, 아프리카밖에 없었던 시절에서 진정한 의미의 세계를 경험한 국가는 몽골 제국이 유일하다. 단기간에 정복으로 세워진 거대 제국이라는 점에서 나폴레옹 제국,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흔히 비교되기도 하지만, 한 세대 만에 붕괴한 이들에 비해 훨씬 더 큰 규모로 백 년 이상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몽골 중심의 패권을 구대륙에서 유지하기도 했다.
지금의 러시아의 면적은 약 1,710만 km²로 몽골 제국[9]보다 훨씬 작다. 소련의 면적은 2,240만 km²였다. 러시아, 소련의 면적이 몽골 제국에 비해 그리 작지 않거나 더 크지 않는가 하는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만들어진 지도가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것의 영향이다. 이런 지도에서는 지구의 구형에서 북쪽과 남쪽이 모여지는 부분이 구현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지도에서 북쪽과 남쪽 땅들은 실제 면적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다고 보면 된다. 일례로 그린란드미국보다 크게 나온다.
몽골로이드(Mongoloid)에 '몽골'이 들어가게 된 이유는 몽골 제국 때문이다. (몽골로이드라는 용어 자체는 근대에 만들어졌다.) 만약 몽골 제국이 없었다면, 혹은 다른 동북아 국가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면, 몽골이 아닌 다른 용어(차이나, 재팬, 코리아 등)였을 것이다. 다만 몽골로이드는 황인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인 분류가 아니었고, 비하의 의미가 있던 용어였기 때문에 현대 학계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현재는 동아시아인(East Asian) 혹은 동북아시아인(Northeast Asia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지역적인 개념을 사용해도 좋을 만큼 단일민족 경향이 매우 강한 곳이기 때문이다.

2. 각국에서의 이미지


몽골 제국의 위세가 워낙 컸기에 아직도 유럽이슬람교 문화권에서는 칭기즈 칸을 학살자나 위대한 정복자로 보는 등 시선이 갈린다. 몽골 자국에서는 당연히 자랑스러운 세계 제국의 건국자로 다룬다.
정작 심하게 피해를 입은 국가였던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인식이 유럽에 비해 관대한 편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잘 나가던 남송이 싸그리 갈린 것도 그렇고 고려여몽전쟁 때 옛날부터 내려오는 문화재[10]가 싸그리 파괴되고 몽골 간섭기를 거치는 동안 사회가 개판이 되는데 크게 일조한 것도 그렇고 좋게 볼 이유는 적어 보인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일제강점기처럼 가까운 시대가 아니라 그런지 실감이 나지 않아 감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적은 편이고[11], 정부가 항복하고 가혹한 통치를 했음에는 분명하나 이전처럼 시간이 갈수록 몽골 세력도 유순해졌고, 결정적으로 '''지금의 몽골은 과거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약화된 데다[12] 미국, 중국, 일본과는 달리 한국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엮이는 일이 크게 적어진게 주 원인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엮이는 게 많으면 친해지기도 쉬우나 그만큼 상대방의 행동에 감정적으로 상하기도 쉬운 반면, 엮이는 게 적으면 관심이 줄어서 덜해지기 때문.[13][14] 현재 한국과 몽골 간의 교류 수준을 보면, 가까운 동아시아 국가이다 보니 그럭저럭 교류가 있긴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유럽 선진국에 비해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더불어 '백인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준 동양인'이라는 이미지로 감정 투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몽골에게 당했던 역사는 이미 감정이 덜어진 과거의 역사일 뿐이기에 몽골 제국 자체에 같은 동양으로서의 자부심을 쉽게 투영하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원 간섭기의 고려의 위치를 과대 평가하거나 하는 인식이 뒤따르기도 한다.
임팩트가 여러모로 커서 그런지, 몽골군을 지나치게 과대평가 하는 경우도 있다. 제대로 된 근거 없이 몽골군이 이겼다고 하거나, 몽골군이 상대한 적의 수를 과하게 부풀린다거나 하는 것. 그 당시 몽골군이 최강이긴 했으나, 당연히 무적은 아니었다. 상대하는 국가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대비를 철저하게 하고 잘 막아낸 경우도 많았다. 당장에 남송만 봐도 몽골 본진 바로 근처에서 수십 년간 몽골의 침입을 잘 막아냈다. 초기에 쪼개지지 않았던 몽골 제국은 파죽지세로 확장을 거듭했으나, 여러 개의 칸국으로 쪼개진 후에는 물 먹은 적도 많았다.
반대로 필요 이상으로 몽골군에 대한 과소평가를 하는 의견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어디까지나 몽골 제국의 'IF'를 말할 때는 '여러 개의 칸국으로 쪼개지지 않고, 강력한 추진력과 파괴력을 가졌던 상태의 몽골군이 오고타이 칸의 사망이 아니어서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디까지 갔을까?' 라는 것이다. 그런데 몽골군이 재침공 했을 당시에는 이미 여러 개의 칸국으로 쪼개지고 병력도 현지화가 많이 진행되어, 초기의 추진력과 파괴력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 상태의 몽골군을 초기의 몽골군과 동일시 하며 깍아내리는 것이 많이 보인다.[15] 애초에 쪼개진 칸국들이 서로 사이가 좋아 의기투합 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대놓고 서로 전쟁까지 하는 판국이었다. 더군다나 재침공의 경우에는 당하는 입장에서 이미 경험을 했고 준비를 더욱 철저히 하기 때문에 방어가 더 수월한 건 당연한 것이다. 일본만 해도 몽골(원나라)의 1차 침입 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다 태풍 덕에 기사회생 했지만, 2차 침공 때는 철저하게 대비한 결과 몽골군의 침략을 상당히 잘 저지하다가 태풍이 불어 결정타를 먹여서 막아낸 거다. 일본만 해도 그런데 몽골이 재침공을 했을 때 죽 쒔다고 저평가를 하는 건 과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중국은 정부의 입장 및 공정 외에 별개로 일반적인 한족들과 몽골인들의 감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특히 남부 지역 한족들의 몽골에 대한 감정과 외몽골의 몽골인들의 한족에 대한 감정은 불구대천의 원수이다.[16] 바이두나 해외 아시아인 포럼에서 몽골인중국인의 댓글을 봐도 무지 살벌하다. 한족주의자들에게는 한족에게 가혹한 통치를 펼친 대원제국은 야만적이라는 평가가 일반적. 그런데 어쨌든 넓고 강했으니까 원나라를 최고로 치는 한족들도 꽤 된다.[17]
일본도 피해를 약간 입긴 했지만 현대인들은 몽골 제국에 우호적인 편이다.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대륙으로 건너가 칭기즈 칸이 되었다는 설도 그렇고, 대원제국있던 일에 대해서는 침략으로 기억하지만 카미카제일본인들에게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만 후에 엄청난 혼란을 거쳐 가마쿠라 막부가 망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된다.
티베트의 경우에도 징하게 항전하고 버텨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지금은 호의적이다. 아무래도 청나라나 현대 중국에 정복당한 것에 비해서는 훨씬 옛날 이야기에, 티베트인의 정체성인 티베트 불교몽골에서는 어느 정도 지분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몽골 제국 중에 원나라의 경우에는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였다. 티베트 불교(후기 탄트라 좌도 밀교)는 한국, 중국, 일본에는 전파되지 않았고 원나라에 전파되었는데 원나라의 경우 중국에 세워진 몽골인 국가였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가 없던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였을 때는 원나라 때이다. 원나라가 사라지고 중국에서도 티베트 불교가 사라진다. 중국에서 다시 티베트 불교 세가 강해진 건 청나라 이후의 일이다.
베트남은 코 앞에 붙어 있었는데도 3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뒤 이를 이끌었던 쩐흥다오가 민족 영웅으로 자리한 덕분인지 이런 취급은 안 받는다.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밀림과 바다, 그리고 베트남이라는 방벽이 있어 접점이 크게 없었기에 관심이 크지 않다.[18]
서아시아에서는 직접 갈려나갔기 때문에 현재에도 평가가 나쁜 걸 넘어서서 증오의 대상이다.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의 역사서에는 칭기즈 칸이 아예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몽골군이 싸그리 밟아버려서 페르시아의 여러 옛 도시들이 지금도 유적지에 불과한 유령 도시로 남아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 이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19]에서는 칭기즈 칸이 알렉산드로스 대왕[20]과 함께 최악의 침략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특히 몽골 제국의 서아시아 침공 선봉장이었던 튀르크인에 대해선 그야말로 극악의 증오심을 갖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튀르크계 종족인 하자라족의 경우가 바로 이 튀르크 군인들의 후손들인데, 아프간을 박살낸 몽골 제국의 후예라는 것과 소수인 시아파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어렵게 산다. 이는 다른 튀르크계인 우즈벡이나 키르기즈, 투르크멘 등도 마찬가지라 이 셋이 연합해 북부 동맹을 구성해 탈레반과 싸우기도 했다. 이란 역시 몽골 - 튀르크와 관련된 것들은 본능적으로 증오해 이웃 나라인 터키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국가들을 되게 고깝게 본다.[21] 서아시아의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훗날 허를러깅 처이발상에 의해 칭기즈 칸의 후손들이 몰살당한 것에 대해 몽골 제국의 서아시아 침략의 업보로 여긴다.
인도의 경우는 수십 년에 걸쳐서 여러 번 침략이 있었지만, '''시대별로 인도에 있던 왕조들이 모조리 몽골 제국과 차가타이 칸국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몽골 제국에 대한 이미지는 그냥 아시아의 자존심 정도에 그친다. 그리고 무굴 제국은 방계 혈통으로 몽골 제국의 후손을 자처하는 페르시아화된 투르크계 국가였다. 인도네루도 칭기즈 칸에 호의를 표한 걸 보면 19세기 ~ 20세기 동안 유럽의 지배를 받은 아시아의 자존심을 세워주기에 우호적으로 여겨진 듯 하다.
이렇듯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몽골 제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서구에서는 야만성을 강조하는 느낌이 큰 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로 직접 갈려나갔던 폴란드러시아[22]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이미지가 안 좋고, 접점이 별로 없이 강 건너 불구경이었던 서유럽 쪽에서는 그냥 이전의 훈족과 더불어 야만적인 유목인의 이미지 정도만 갖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는 직접 갈려나가고 정복당한 데다 지역 특색 상 털어먹을 게 없어서 제대로 통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몽골에 대한 여론이 더 안 좋다. 러시아 속담 중에 초토화당했다는 뜻을 가진 속담이 있는데, 그 속담이 '''"몽골 제국군의 말발굽이 지나간 곳은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시뻘건 땅이었다."'''이다. 그런데 사실 몽골 제국에게서 벗어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점이다. 몽골 제국이 러시아 지역의 정치를 모스크바 공국에 전임하였고, 후에 이반 대제가 몽골 제국을 몰아낸다.

폴란드의 경우는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당시 수도인 크라쿠프가 불타고 제2도시인 바르샤바초토화됐다. 때문에 몽골 제국군에 대해 안 좋게 여기지만, 또 칭기즈 칸에 대해서는 "폴란드 역사에 매우 큰 도움을 줬다"(...)며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폴란드의 도시들이 불에 타긴 했지만, 결국 폴란드는 몽골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몽골군을 폴란드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몽골 제국이 폴란드 침공에 지쳐 마지막으로 폴란드를 침공하고 난 1360년대부터, 몽골은 급격히 동유럽의 패권을 상실했다. 그 사이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몽골 제국의 위축으로 생긴 동유럽 힘의 공백을 비집고 10년도 안 돼 세력을 팽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385년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동군연합을 세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만들어 400년간 동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결론적으로 '''몽골이 동유럽 애들을 마구 죽여준 덕분에 폴란드는 별로 힘 안 들이고 동유럽 땅을 처묵처묵한 셈.(...)'''
캅카스 지역의 일부 국가들은 정복당했지만 일부는 침공에 저항하여 땅을 지켜냈다. 이 지역은 여러 산맥이 얽혀 있어 지세나 그에 따른 세력관계가 매우 복잡하지만 '''전략적 요충지'''[23]라 몽골 제국이나 몽골 계열 국가들이 자주 공격하는 지역이었다. 칭기즈 칸 때 제베와 수부타이가 조지아아르메니아를 크게 이겼고 이후 일 칸국 때 본격적으로 침공해 속국이 된다. 체첸 같은 북부 지방은 2차례 침공을 이겨냈으나 긴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터키는 몽골 제국의 장군들의 대부분이 튀르크계로서 유럽이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원정에 참가하였고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 차가타이 칸국, 우구데이 칸국 등이 전부 몽골-튀르크 제국이었다는 이유로 몽골 제국에 호의적이다. 애초에 훌라구의 바그다드 원정 때 사령관이었던 키트 부카[24]부터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는 튀르크인이다. 칭기즈 칸 역시 아랍이나 이란과 달리 같은 알타이인으로서 영웅으로 보고 관련 학회도 많이 있다. 사실 튀르크인 자체가 원래 몽골계 종족이었고[25] 몽골 통일 이전에는 외몽골에 키르기즈나 나이만, 메르키트, 케레이트 등 여러 튀르크 부족이 섞여 살았다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둘은 형제나 다름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몽골로 인해 셀주크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26] 별 신경쓰지 않고 좋게 보며 이는 티무르 제국[27]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냥 같은 튀르크계 부족끼리의 알력 다툼 정도로 보는 듯. 물론 남쪽의 아랍인들에게 있어선 몽골이나 튀르크나 둘 다 죽일 놈 취급을 할 뿐이며 특히 몽골 제국의 앞잡이였고 이후 오스만 제국 당시 아랍인을 차별한 투르크인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다른다.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 황제가 썼던 칭호 중에는 몽골족이나 튀르크족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 '칸'이 어원인 '한'도 있었으니 아랍인들의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은 몽골 제국 시즌2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이라크시리아 같은 나라에서 터키 이야기는 민감하다.
서구 학계에서는 원래 야만적인 파괴의 제국이라는 평가가 강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동서양 교류의 촉진을 통해 세계사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는 재평가도 힘을 얻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도 이전까지는 몽골과 유목민족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자체가 부정적이었지만, 현재는 정체된 한족의 중화 문명에 유목 민족이 끊임없이 일종의 문화적, 인적 수혈을 해주었다는 긍정적인 견해 또한 제시되고 있다. 그래도 몽골 제국이 죽인 인구[28]와 소실시킨 지적 유산[29]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가지고 온 파괴와 학살과는 별개로 몽골 제국과 그 후계 중앙아시아 유목 제국들이 유라시아 동서 문명간 교류 역사에 거대한 새로운 장을 쓴 것만큼은 확실하다. 몽골에서 비롯한 이란 호칭은 훗날 만주족에서 페르시아, 심지어 제정 러시아의 차르들[30]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국가들에게 '''무적의 군사력을 가진, 절대적인 권위의 지배자'''로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했으며, 이뿐만 아니라 중세 후기의 티무르 제국과 후대의 오스만 제국마저도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권위를 빌려 정복 제국으로서의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했을 만큼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문명사에 남긴 영향은 몹시 크다. 마르코 폴로의 중국 답사는 실크로드가 몽골의 통치 아래 마지막으로 안정적인 번영을 누렸던 때였고, 13세기 당시 아프리카 사하라 횡단 무역도 몽골제국과의 교역에서 성행했다.
이러한 몽골 제국의 영향력으로 인해 대항해 시대와 같은 근대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칭기즈 칸의 영토 확장과 몽골 제국의 성립'''이라는 사건은 단순히 역사상 최대 크기의 황제국 출현이란 점을 넘어 세계 역사적 측면에서의 분수령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3. 역사



3.1. 칭기즈 칸 이전


몽골이 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당나라 때로서, '''몽올실위(蒙兀室韋)'''라는 명칭으로 사서에 등장한다. 이때는 북만주 초원 지대에 있었던 군소 부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31] 중국으로 치면 북송 대 이후에 제법 강성해지는데, 이후에는 '''몽고(蒙古)'''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며, 원나라 시절 한문으로 써야 할 대외 문서 등에서 몽골인들도 언제나 이 '몽고'라는 표기를 썼다. 오늘날 중국에서도 몽골을 이렇게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기는 '어리석고 낡았다'로 해석될 수도 있는지라 몽골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단순한 음차에 불과하지만, 단순 음차로 치기에는 좋은 의미의 한자를 갖다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랑캐라고 깔보는 면도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32]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런 지적이 있어 2007년부터 표기가 '몽고'에서 '몽골'로 수정되었다.
몽골인들은 초기 거란이나 여진족 같은 메이저 유목 민족들에게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중소 유목 민족에 불과했다. 게다가 각 부족 간의 분열이 워낙에 잦았기 때문에 타 유목 민족에 비해 세력도 턱없이 적었다. 이들은 바이칼 호수 ~ 북만주에 이르는 넓은 구역을 유랑했고 딱히 정해진 거처는 없었다. 칭기즈 칸 역시 출생지는 외몽골이었다만 그의 일족은 대흥안령부터 바이칼, 알타이까지를 고루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대적인 부족에게 아버지가 독살당하는 가하면 아내를 납치당하는 등 엄청난 고난을 겪기도 했다.

3.2. 칭기즈 칸 시대


1189년, 보르지긴 씨족 출신의 테무진이 몽골계 주변 부족들을 통합한 후, 튀르크계 민족들을 제압하면서 1206년 드디어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의 자리에 올라, 이후부터 칭기즈 칸으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몽골의 성장을 본 남송금나라를 요격하기 위해서 몽골에게 지원 요청을 했고, 이것은 몽골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약탈로 인해 우수한 군사 기술력과 재원을 확보하게 된 몽골은 곧 서진하기 시작해 호라즘 왕조를 비롯해 중앙 아시아의 부유한 오아시스 국가들을 연거푸 박살내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33] 호라즘 왕조를 격파한 후 칭기즈 칸이 이끄는 본군은 본국으로 돌아왓으나 제베수부타이가 이끄는 부대는 서진을 멈추지 않아 조지아 왕국을 격파한 뒤 캅카스 산맥에 도달했다. 캅카스 산맥에서 토착 산악 민족과 쿠만족에게 포위당하는 위험을 겪기도 했지만 쿠만족에게 뇌물을 줘 포위 상태를 극복한 후 토착 산악민족과 쿠만족을 각개격파했다. 칭기즈 칸의 명령에 따라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귀환을 시작하나 그 과정에서 쿠만족의 구원 요청을 받고 진격한 러시아 공국 연합군과 격돌, 칼가강 전투에서 적 세력을 일소시킨 후 본국으로 귀환했다.[34] 한편 칭기스칸이 이끄는 본군은 칭기즈 칸이 주력을 끌고 나간 사이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서하금나라에게 맹공을 퍼부었으나, 서하 정벌 도중 일어난 낙마 사건을 계기로 고령의 칭기즈 칸은 건강을 크게 해치고 결국 두 나라에 대한 정벌은 칭기즈 칸이 세상을 떠난 후 종료되었다.
참고로 중국 정벌 초기에는 정주 민족에 대한 개념이 약했기에 모든 농토를 쓸어버리고 전부 유목을 위한 목초지로 만들려는 후덜덜한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걸 요나라 출신의 명참모 야율초재가 막아서 무산되었지, 안 그랬다면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 듯.[35] 수많은 중앙아시아의 도시들도 피해를 입고 고려경주황룡사를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와 도시가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이 겨우 몽골의 침입 직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을 보면 얼마나 파괴가 극심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모습들 때문에 현재 여러 가지 대중 매체(특히 서구권)에서는 단순무식한 야만인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3.3. 전성기


몽케 칸의 사후 그의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간의 대칸 자리를 두고 내전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제국은 일 칸국, 우구데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 그리고 원나라로 찢어진다. 원래 몽골족의 전통 상속 제도는 자식들에게 모든 걸 평등하게 분배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라도 평등하게 분봉받았는데, 자손들이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계속해서 갈라지게 된 것.
다만 이를 제국의 분열로 바라보는 것에 이견을 표하는 학자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중앙아시아 국가들 역사 분야의 권위자인 김호동 교수. 몽골 제국이 몇 개의 칸 국으로 분열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제국적 틀이 유지된 상태에서 대칸이 각 울루스의 칸들에게 정주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위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칸의 제국 장악력에 한계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단일제국이란 관념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원나라 정확히는 대원(大元)[36] 이라는 명칭은 대몽골 울루스를 나타내던 다양한 한자식 명칭을 폐기하고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즉 당시 몽골인들에게 대몽골 울루스는 대칸이 직접 지배하는 울루스를 중심으로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다른 칸들의 여러 울루스로 구성된 느슨한 통합체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원은 카라코룸에서 대도(오늘날의 베이징)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중국화되기 시작했지만, 하필이면 원의 전성기에 정복에 목마른 쿠빌라이 칸이 등장하면서 주변국들은 졸지에 대재앙을 맞고야 말았다. 고려는 복속 이후 일본 정벌할 배를 만들고 무리한 공물을 바치느라 크게 고생해야 했고, 남송, 미얀마의 파간 왕조, 참파 등이 망했으며, 베트남일본, 자바 섬 등도 간접적으로나마 된서리를 맞았다.
한편 중앙아시아로 진출한 몽골인들은 당대의 선진 문명권이던 중동으로 진출해 셀주크 튀르크아바스 왕조 이슬람 제국과 전쟁을 치루면서 끝내 '''바그다드'''[37]를 무너뜨렸다. 또 다른 한편으론 유럽으로 진출한 몽골인들은 러시아의 크고 작은 공국들을 무너뜨리고 폴란드까지 레그니차 전투 등 3 ~ 4번의 침공 끝에 무너뜨리고, 헝가리에서는 치열한 공방을 주고 받았으며,[38] 불가리아와도 전쟁을 치뤘다. 그런데 이 시기에 우구데이 칸의 사망으로 인한 국내 정세가 혼란해지자 정복 활동을 중단하고 귀환해 버렸다.
정복 이후 몽골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무역로를 단일 세력권으로 통합하면서 동서 무역로는 본격적으로 가동될 수 있었다.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몽골 제국이 동방 무역로를 완전히 통제하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다. 유럽과 아시아는 서로 붙어있었음에도 그동안 상호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지만 이후 '''역참제'''가 중앙 아시아까지 확장되고, 13세기 말에는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해상로와 연계되어 전례없는 원거리 무역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 이외에도 기욤 드 루브룩 등의 선교사나 '''이븐 바투타'''와 같은 여행가들, 아르메니아 국왕 헤톰 1세와 같은 사절단도 이 역참로를 이용하였다. 이슬람 역사가 아불 가지는 당시 상황을 가리켜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창 잘 나갔을 적엔 국제적인 위상과 위엄이 거의 전세계에 뻗칠 정도라 칸이 중대한 쿠릴타이를 소집할 때에는 몽골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부터, 중동의 무슬림, 그리고 유럽인 사절단이 찾아오기까지 하였다.
한편으로 유럽에서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나 여러 이유로 몽골을 나름 좋게 봤던 듯하며, 프레스터 존 따위 환상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에도 몽골 군주들이 선교만 받으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리라 믿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뤼브뤼키, 교황은 카르피니 등의 사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39] 그래도 몬테 코르비노의 전도 활동은 제법 성공적이어서, 대도에 성당을 세우기도 했다.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사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이들 선교사의 여행기가 중요한 사료로 인용된다. 특히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사자 카르피니는 '''쿠릴타이'''와 '''대칸 구유크의 즉위식'''까지 참가하여 몽골인들의 쿠릴타이를 직접 묘사한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몽골 제국은 개인 역량에만 의존하던 이전 유목민 제국과 달리 칭기즈 칸의 칙령에 기반하여 성문화한 '''야삭(Yassa, Yasaq)'''을 통해 어느 정도 일체성을 유지할수 있었으며 이 야삭은 몽골 제국이 정복한 영토 내에 수세기 동안 통용되었다. 특히 중앙 아시아에서의 몽골 영향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청했던 티무르 역시 이슬람 율법 샤리아와 함께 칭기스칸의 야삭을 통치 규범으로 삼고, 동차가타이로 칸국의 야삭에 정통한 학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18세기 마지막 칸국이 사라질 때까지 칭기즈칸 보르지긴의 혈족을 잇는 '''칸'''이라는 칭호가 계속 사용되었다.

3.4. 몽골 제국을 물리친 국가들


사할린아이누족: 몽골군은 타타르 해협을 건너 1264년, 1284년, 1285년, 1286년에 침공하기도 했다. 거점을 확보하고 정복하기 직전에, 하필 1287년 본국에서 큰 군사 반란이 일어나기도 해서 지배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사실상 몽골군이 이겨서 식민지로 뒀으나 독립한 경우.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상기한 일본 큐슈 침공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기 쉽지만, 원나라와 명나라 시대의 지도를 보면 사할린과 홋카이도, 일본이 쭉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가마쿠라 막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유명하다. 몽골 제국은 당시 서아시아, 중원의 송나라 등 여러 곳에서 전쟁을 벌이느라 주력군이 일본 원정에 참전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고려 해군들을 군함대에 실어서 일본 원정에 투입시켰다. 당시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큐슈 하카타에서 2차례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침공을 받았지만, 해상전에 정박 중인 여몽 연합군 함대에 불어닥친 '''태풍의 도움에 힘입어''' 극적으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다만 몽골 제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군비를 무리하게 증강시킨 반대급부격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을 부추기게 되었다.


베트남 쩐 왕조: 1차 침공 시에는 정송가도를 내세워 3만의 군사로 침공, 수도인 탕롱까지 점령했지만 전염병으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쿠빌라이 시기인 2차 침공시에는 참파, 운남, 광둥 세 방향으로 공격, 하지만 쩐흥다오의 베트남군의 저항, 전염병과 게릴라전으로 5만 명이 포로로 잡히며 패배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3차 침공까지 가하지만 바익당 강에서 또 졌다. 그런데도 포기 못한 쿠빌라이 칸이 4차 침공을 계획했는데 그만 죽어버려서 중지되었다.

인도네시아 싱고사리 왕국: 몽골군은 자바 섬도 침략했었는데, 당시 자바에는 싱고사리(Singosari) 왕국이 있었다. 침공 이유는 당시 싱고사리 왕국의 왕 케르타나가라(Kertanagara)가 1289년에 원나라에서 보낸 사절의 조공 요구를 거부하고 사신의 코(!)를 잘라 돌려보냈기 때문. 하지만 1292년에 자바로 원정을 왔더니 케르타나가라는 케디리(Kediri) 지역의 유력자의 반란으로 이미 살해당한 뒤였고, 원제국 군대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 때 케르타나가라의 후계자였던 비자야(Vijaya) 왕자가 접근해서 원제국 군대와 협력하여 케디리 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했는데, 비자야 왕자가 현 수마트라 지역에 있던 멜라유(현 수마트라에 있는 지역)로 원정가있던 군대가 다시 돌아오자 바로 원나라 군대를 공격해서 패퇴시켰다. 비자야 왕자는 훗날 인도네시아를 최초로 통합한 왕조로 여겨지는 마자파히트 제국의 시조가 된다.

인도: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도 분열제국인 차가타이 칸국의 공격을 받았으나 치열하게 싸운 끝에 견뎌냈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 바이바르스의 활약으로 중동으로 발을 뻗치던 몽골 제국을 격퇴했다. 바이바르스는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있었던 몽골군을 1277년 전투에서 패퇴시키고,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 사령관인 키트부가를 전사시키는 성과를 거둔다. 몽골제국의 훌라구가 이집트를 정복할 총사령관으로 내정됐으나 이집트 침공 직전에 몽케 칸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이 본국으로부터 날아왔다. 훌라구는 심복이자 베테랑 장수인 키트부카에게 병력을 남겨두고[40] 맘루크 정복을 완수하고 돌아오라고 명령하고 가버린다. 그 후에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키트부카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훌라구는 화가 나서 자신이 직접 이집트를 쓸어버릴 계획을 가지고 전쟁 준비를 하다가 병에 걸려 죽는다. 이후 훌라구의 후예들은 수차례 맘루크를 침략했으니 그때마다 번번히 격퇴당했다.

헝가리 왕국: 1241년 1차 침공 때 모히 전투에서 몽골이 고전했으나 결국은 승전하였다. 이후 헝가리 왕 벨라 4세는 군제개혁을 단행하여 종래의 목재 성채를 버리고 서유럽식 석조 성채를 도입과 동시에 중장기병의 비중을 대폭 높였다. 이후 1285년 노가이의 11만 대군이 2차 침공을 거행하였으나 헝가리군은 불과 3만 명으로 몽골군로부터 수성을 성공한 것을 넘어 몽골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투루스코 성 전투 등) 라디슬라우스 4세가 이끄는 중장기병 부대는 탈리부가의 몽골기병대와 서부 트란실바니아 언덕에서 정면대결하였고 이때 헝가리군은 중장기병의 돌격을 통하여 몽골군의 궁기병을 가볍게 압살하였다. 이 당시 몽골군의 전과는 마을 몇개, 작은 요새 몇 개를 약탈한 것뿐 제대로 된 공성전은 전부 실패하였고 야전에서도 벨라크, 보이스키블리스의 헝가리군에게 거듭 패퇴하였고 잔존병마저 현지 주민들에게 학살당하게 된다.몽골의 헝가리 2차 침공

폴란드 공국들: 1241년 및 1259년 침공에서는 몽골군이 승리하였으며 특히 1241년의 레그니차 전투는 일반인들에게도 유럽 vs 몽골 이미지를 크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1287년에 있었던 3차 침공 시에는 이미 폴란드 역시 헝가리군처럼 석조성채와 중장기병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역으로 몽골군을 궤멸시켰다. 특히 와고프(Łagów)와 스타리송치(Stary Sącz)에서의 패전 이후 몽골군은 폴란드 침공을 포기하게 된다.

체코 보헤미아 왕국: 올로모츠 전투에서 몽골군을 패퇴시키며 국체를 온존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오스만에게 정복당했던 것과 달리 몽골의 경우 몽골군을 역으로 포위하여 궤멸 직전까지 간 경우도 있었다.

3.5. 고려와의 관계


여몽 관계원 간섭기 문서 참고.

3.6. 몽골 제국의 분열과 계승 제국들


사실상 몽골 제국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원나라는 강남에서 명나라를 건국하고 파죽지세로 북쪽으로 올라오던 주원장의 세력에 밀려 1368년 대도를 버리고 내몽골의 후룬부이르 초원으로 튀어서(중국 사관 기준의 원 멸망) 북원으로나마 잔존하였으나 1388년 쿠빌라이 칸 가문의 마지막 황제 평종 토구스 테무르가 암살당하고 대칸을 이은 조리그투 칸도 몽골의 대칸 자리만 이었으며 원나라 황제라는 중국식 칭호는 포기하면서 이때부터 중국 왕조로서의 원은 사실상 끝났고, 몽골 대칸의 지위는 실질적인 권위를 많이 잃었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붕 뜨게 되었다. 이후에도 부족 단위로 쪼개진 몽골족은 명나라영락제에게 토벌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외몽골의 오이라트에센 타이시 등이 허구한 날 북원과 그 후예 차하르부를 사막을 건너와 레이드를 뛰곤 했으나, 다얀 칸, 알탄 칸 등의 시대에 다시 부흥하면서 명나라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1634년 만주족 청태종이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스스로 몽골의 대칸을 겸하게 되었고 역대 청나라 황제가 대대로 몽골의 대칸 자리를 겸하는 식으로 칭호는 유지하게 된다.[41]
이후 내몽골의 차하르부는 청나라의 속국으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청과 남하하는 러시아의 중간에서 두 세력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분쟁은 강희제, 옹정제 시기 네르친스크 조약(만주내몽골 동부)과 캬흐타 조약(외몽골) 등으로 국경선이 정해지면서 일단락되었으나, 세계 열강의 각축이 본격화한 이후 신해혁명으로 청이 붕괴하자 몽골에서는 유력자들이 회의를 열어 복드 칸을 휴브트 요스 칸(청나라 선통제)을 잇는 대칸으로 추대하고 독립했다.
러시아러시아 혁명적백내전을 겪던 혼란을 틈타 외몽골에 침투한 러시아의 미치광이 남작 운게른 슈테른베르크에 의해 1921년 몽골이 강제 점령되었고, 마지막 칸인 복드 칸은 1924년 죽었다. 이로서 이름뿐이라도 칭기즈 칸부터 계속 이어져온 몽골의 대칸위의 계보는 끊기게 된다. 한편 내몽골은 운게른의 사이비 교주급 통치가 비켜가고 중화민국의 일부 영토로 남아 차하르, 열하, 흥안성의 3성이 주어졌으나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 육군만주국을 세우면서 동몽골(내몽골 동부) 흥안성은 만주국이 되 버리고 남몽골(내몽골 중부 및 서부)은 몽강자치연합정부라는 또 다른 일본 괴뢰국으로 전락한다. 이 몽강국은 "몽골판 만주국"으로 사실상 몽골을 일본이 식민지배했으며 국가 주석이었던 데므치그돈로브는 꼭두각시였다. 동몽골의 몽골인은 "만주인"으로 한족조선인과 같이 분류되어 2등 국민으로 차별받았다.
한편 원나라 이외의 '칸국'은 4칸국 이후에도 많은 국가들이 그 이름을 따와 러시아와 중앙 아시아 지역에 난립하였으나 점차 소형화되어 다른 국가들에 병합되거나 흡수되었다. 칭기즈 칸 다음 대에 형성된 4칸국만 들자면 킵차크 칸국은 1502년 타타르족에게 멸망하였으며, 우구데이 칸국은 14세기 초 내부 분열 이후 원과 차가타이 칸국에게 그 세력을 흡수당했고, 차가타이 칸국일 칸국은 14세기 중후반 소국으로 분열하였고 후에 티무르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에게 병합당했다.
이후 티무르 제국이나 무굴 제국도 방계 혈통을 들어 이들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어떻게 본다면 모계 쪽으로 후손이라 볼 수는 있지만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몽골과는 별 유사성은 없었다.''' 몽골 제국은 당시 여러 나라와 혼인 관계를 맺어서 몽골 제국의 인척이 되는 왕실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므로 당시에 몽골 황실의 후손이라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42]
엄청난 판도를 자랑했지만 몽골 제국은 내전을 치르면서 각 지역별로 분열하게 되었고, 피 지배 민족을 동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문화적 역량도 없었기 때문에,[43] 원이나 여타 다른 나라에서 피 지배 민족에 동화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쇠락하였다.
흔히 몽골이 쇠퇴한 것은 원과 4칸국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집중적 권력의 약화로 알려져 있지만, 그 정도 규모의 거대 제국이 일원적 통치 하에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감안하면 분할 통치도 일리 있는 조치였다. 하지만 종주권의 계승을 놓고 4칸국이 서로 물어뜯은 것은 몽골 제국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단 쿠빌라이 즉위 시의 아리크부카(아릭 부케)와 같은 반란 세력이 나타났으며, 쿠빌라이 칸의 재위기에 쿠빌라이의 제위 계승에 반발한 우구데이 칸국카이두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원과 4칸국이 본격적인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쿠빌라이의 대에서는 이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고, 다음 대에서야 카이두의 영역이었던 우구데이 칸국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는 원의 종주권을 확인하기보다는 원과 다른 칸국이 완전히 별도의 노선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친선사절이 오갈 경우 동양사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종번 관계보다는 훨씬 밀착된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일 칸국의 칸들이 원나라 대칸의 정식 책봉을 받기도 하고 킵차크 칸국의 왕족 일부가 원나라의 대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후 원은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혜종 토곤 테무르[44]의 시대에 그 하락세가 정점에 달했다. 당시 원의 화폐 정책이 철저히 실패로 돌아가면서 교초의 유통량이 폭증해 경제 구조가 뒤흔들렸고,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초의 남발이 가속화되면서 민중에게서 직접적인 반발을 부르게 된다.
이미 몽골인들은 지배층의 특권과 중국식 문화에 상당히 젖어 있어 정복기의 활력을 잃은 뒤였다. 게다가 유목민 출신이던 몽골인들은 정착기에 익숙하지 않은 화폐 문화를 사용하게 되면서 빚더미에 올라서 심지어는 자기 자식들을 노예로 판 사람도 꽤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몽골 귀족들은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은 보물로 잘 살고 있어 빈부격차가 심했다.
결국 홍건적과 같은 반원 한족 세력이 크게 대두되는 중 주원장이 득세하였고, 원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1368년 만리장성 북쪽인 내몽골의 후룬부이르(응창)로 도망가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이 일대에 잔존했다. 그러나 1388년 이마저도 멸망당했으며, 이후 한동안은 아리크부카 계가 대칸을 이었으나 오이라트 계열의 에센 타이시가 즉위하면서 칭기즈 칸계 왕통은 15세기 후반 다얀 칸 시대까지 끊겼다.
한편 3개의 잔존 칸국도 혼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차가타이 칸국과 일 칸국은 14세기 초까지는 그럭저럭 국가를 유지했으나 이후 분열의 시대를 맞았고, 이 사이 티무르가 득세해 두 칸국을 병합하였다. 차가타이 칸국은 이후 모굴리스탄 칸국으로 부활했으나 이전과 같은 활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킵차크 칸국은 이에 비해 장기간 존속했으나, 14세기 중반 일련의 정권 다툼과 흑사병[45]의 발병으로 삐끗되기 시작하더니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러시아인에게 최초의 패배를 당했다. 그 2년 후 토크타미쉬 칸러시아 세력을 다시 한번 억누르는 데 성공하였으나, 15세기 후반이 되면 결국 러시아의 독립을 인정할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어 3개의 칸국에 의해 영토가 분할되었다. 이 세 나라는 다시 러시아와 격전을 벌여, 16세기 후반이 되면 오스만 투르크의 부용국이 된 크림 칸국을 제외한 두 개 나라는 러시아에 흡수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다얀 칸이 등장해 오이라트를 몰아내고 몽골 제국의 부흥을 선언한다(그의 왕호인 '다얀'도, '대원'을 뜻하는 것이다.). 이후 16세기 중엽 알탄 칸의 시대에 베이징을 포위하는 등(경술의 변) 한동안 몽골 제국은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오히려 대칸이 아니었던 알탄 칸의 명성과 세력때문에 대칸의 권력이 쇠퇴해서 실질적으로 차하르부에만 미치게 돠고 몽골은 6부족으로 분열되고 만다.결국 1634년에는 릭단 칸이 청에 의해 정복되어 쫓겨나면서, 칸의 직위를 청에게 빼앗기고 몽골은 한동안 청의 아래에 복속된다. 하지만 숭덕제가 원나라의 옥새를 획득하고 칸의 직위를 받은 이후에 칭제한 것을 생각하면 이전의 이민족 국가들에 비해 우월한 대우인 셈이었다. 숭덕제는 내몽골을 평정 후 만주-몽골 연합 제국으로서 청 제국을 선언했으며 이후 정통 동몽골 황족인 보르지긴 씨족은 청의 외척이 된다. 청나라 황제의 절반은 징기스칸 일족인 셈이다.
사실 몽골 제국이 잠시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급속도로 와해돼 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몽골 제국의 분열의 이유 중 가장 크게 꼽는 것이 바로 몽골의 상속 풍습이다. 몽골은 장자 상속제가 아닌 분할 상속제를 시행했는데.[46] 장자 상속제였다면 분배를 크게 받지 못한 자도 물론 불만이야 있겠지만 "그래 뭐... 그게 원칙이니까" 하고 넘길 수 있었겠으나, 몽골은 모두 정확히 분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네가 더 많이 가졌잖아!!"하며 내부 갈등이 심하였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많이 발견되어 15세기에 상속법을 고치기는 하였으나 풍습은 쉽게 바꿀 수 있는것이 아니라 몽골 제국의 부흥에 큰 지장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몽골 제국이 위대한 지도자 아래에서는 급성장할 수 있지만 그 지도자 사후 급속도로 분열과 내부 갈등으로 약화되어 버린 큰 이유이다.

4. 영토 크기 논쟁


2000년대까지만 해도 대영제국과 몽골제국 중에서 어느 나라가 더 큰 영토를 가졌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대영제국은 약 3550만km²(1920년 기준), 몽골제국은 약 2400만km²'''이니 영토 크기만 놓고 보면 대영제국이 훨씬 더 큰 국가였다.
그러나 단일국가, 황제국 등 다른 관점을 대입하면 반대로 몽골 제국이 앞선다. 이는 대영제국이 영국 본토를 중심으로 한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면서 식민제국의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항은 식민제국 항목 참조.[47][48]
대영제국이 영토 자체의 잠재력이나 자원 이외에 실질적으로 복속시킨 나라들 중 가장 국가로서 의미있는 나라는 '''인도'''뿐이었다. 영토 대부분이 당시 세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유럽과 아시아가 아닌 미개척지거나 국력이 미미하던 아프리카 남쪽 / 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해있던 대영제국과,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들을 전부 정복하고 동유럽까지 진출한 몽골제국을 비교하긴 힘들다. 영토가 아닌, 두 제국이 몇 개의 왕조, 정부를 복속시켰는지 비교해보자.
흔히 몽골제국 최대 영토가 3300만km² 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3300만km²가 나오려면 시베리아 면적을 전부 포함한 수치인데, 몽골제국의 지도를 보면 알다시피 당시 몽골은 북부 시베리아를 점령한 적이 없다.
1279년 전성기 시절의 영토를 하나하나 계산해 보았을 때 다음과 같다.
  • 몽골 본토 약 150만km²
  • 중국 약 950만km²
  • 중앙아시아 전체 약 403만km²
  • 이란 약 164만km²
  • 연해주와 하바롭스크 지방 약 55만km²
  • 우크라이나 약 60만km²
  • 터키 약 39만km²[49]
  • 벨라루스 약 20만km²
  • 아프가니스탄 약 65만km²
  • 파키스탄 약 80만km²
지금까지의 면적을 합하면 약 1986만km²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 지역의 면적을 얼마만큼 포함 시키느냐에 따라 영토 크기 수치가 달라진다.
현 러시아 연방이 약 1700만km²이고, 우랄산맥 기준으로 서부지역은 약 330만km²이다. 그러나 몽골이 러시아 서부를 50% 정도만 지배했으므로 약 165만km²가 나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남부 시베리아의 면적은 학자들 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약 200-250만km² 로 보고있다. 그러면 총 2300만km²이다. 설사 한반도 22만km²를 합한다 해도 러시아 제국 또는 소련보다 조금 더 큰 2300만km²에 불과하다. 물론 엄청난 영토인 건 분명하나 3300만km²로 알려진 수치에 비하면 과장이 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이 캐나다 북부와 호주 내륙을 포함하는 식으로 몽골 또한 시베리아북부를 포함한다면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타낼수있다. 영국이 이누이트들을 딱히 정복한것도 아니고 그냥 북극과 사막에 깃발꽂고 타국이 못들어가게 했을뿐이다. 13세기 당시에도 시베리아 중북부를 몽골외의 타국가는 들어갈수 없는 지역이었으므로 같은 방식을 적용해서 몽골제국의 영토에 시베리아를 포함한다면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온다. 단, 이 내용에 대해 반박을 하자면 당시 영국은 북극으로 진출한 적이 없거니와 사막 역시 수십년에 걸쳐서 정복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북동부 시베리아도 17세기 러시아의 코사크부대가 강줄기를 따라 일일이 정복하였다. 이보다 한참 후인 영국이 단순히 황무지에 깃발만 꽂았을까?
  • 소련 약 2240만km²
  • 중국 약 964만km²
  • 몽골[50] 약 156만km²
  • 일칸국 약 375만km²
이를 모두 더한것이 시베리아를 포함한 대략적인 몽골제국의 영토가 되고 이는 3735만km²이 된다. 단,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몽골이 북동부 시베리아 그러니까 지금의 사하 공화국, 마가단 주, 캄차카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 하였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는 없다. 만약 시베리아 면적을 포함할 것 이라면 저 지역들의 면적을 제외 시키는 것이 맞다.
여기서 일칸국과 소련이 겹치는 부분과 몽골제국이 지배하지 못했던 소련 동서부 영토를 제하여 오차를 수정하면 된다.
  • 카프카스 18만
  • 투르크메니스탄 상당수 40만 km²
  • 발트삼국17만km²
  • 콜라반도 14만km²
  • 카렐리야 공화국 18만km²
  • 사할린 7만km² [51]
이렇게 오차를 수정하면 '''몽골의 면적은 3630만km²''' [52]가 되므로 같은 방식을 적용한 ''' 영국의 3550만km² ''' 보다 큰 영토를 가진것이 된다.

5. 몽골 제국 소년병


몽골 제국에서는 어린 소년병들이 전쟁터를 따라다니면서 직접 참전은 하지 않고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몽골 제국의 군인은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전리품을 얻고 그걸 택배처럼 역참을 통해 집으로 보냈는데 전쟁성과가 클수록 자신의 집이 부유해지는 걸 어린 소년들이 보면서 몽골 제국을 위해 싸우는 영광스런 군인이 되가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6. 몽골 제국 특유의 울루스 체제


씨족과 부족이라는 개념은 국가에 선행하는 단계에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서 규정되고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흔히들 씨족과 부족이라고 부르는 집단은 어느 특정한 혈족血族과 종족宗族(동성동본의 겨레붙이)이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단위일 뿐 결코 친족 조직이 아니었다. 이는 부여의 사부四部, 고구려의 오부五部, 신라의 육부六部로도 드러난다. 어느 씨족의 지배 혈족은 그 씨족 내 다른 사람들과 혈연적으로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지배가문에 속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성姓(원시사회의 혈통을 구별하는 단위)조차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씨족, 부족은 귀족제의 원리가 관철되는 조직이었고 중앙집권 국가의 부재 상황에서도 국가와 유사한 정치관계에 의해 작동되는 조직이었다. 이를 “머리 없는 국가”라고 부르고 가문家門이라고도 부른다. 가문은 가족 외에 다른 객식구도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칭기즈 칸 이전 몽골 초원의 ‘오복’과 ‘울루스(부민部民)’도 실은 가문사회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규모에 차이가 있을 뿐 “머리 없는 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체제는 고대 서양의 귀족정과 일맥상통한다.
칭기즈 칸이 속한 보르지긴 씨氏도 일반적인 씨족은 아니었다. 칭기즈 칸이 속한 가족과 그 지배를 받는 혈연적으로 무관한 다종다양한 유목민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그것이 ‘보르지긴 오복’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가문의 지배그룹이 보르지긴이라는 이름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복들 여럿이 모여 하나의 부민을 형성하였기에 울루스는 친족과 무관한 집단이었다. 오복이 그러하듯이 울루스도 일종의 “머리 없는 국가”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상호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쟁하기도 하면서 일정 지역 안에 공존하는 오복들의 집합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몽골 제국의 공식 명칭은 예케 몽골 울루스로, 大 몽골 부민部民이라는 뜻이다. 1206년 몽골 제국의 시조인 칭기즈 칸은 몽골 초원을 통일한 뒤 몽골을 구성하는 95개의 천호千戶를 조직하고 그것을 지휘할 88명의 장長을 임명하였다. 각각의 천호는 다시 백호百戶로, 백호는 다시 십호十戶로 나누어 각각의 장長을 임명하였다.
오늘날의 군대 조직과 비교하면 백호는 중대(약 100명) 규모이고, 천호는 대대(약 450명)보다는 크고 연대(약 2천 명 미만)보다는 작은 규모이다. 95개의 천호에서 9만 5천의 병력이 차출된다고 가정할 시 1개 사단이 1만 5천 정도이므로 대략 6 ~ 10개의 사단 규모가 된다. 즉 당대 기마병으로만 구성된 6 ~ 10개 사단이 출현한 것이다. 이들 95개의 천호는 좌익, 중군, 우익 3개의 만호萬戶에 배속되어 몽골 전역에 배치되었다. 칭기즈 칸의 아시아 정복을 뒷받침한 군사력은 백호 천호로 그것은 여진족 대금大金의 맹안모극猛安謀克의 경우와 똑같이 몽골의 부족을 10진법적인 군사행정조직으로 편성한 것이었고 천호백호 장은 칭기즈 칸에게 충성을 서약하여 그 신임을 얻은 장령이 임명되었다. 이 장령들의 지위는 세습되어 칭기즈 칸의 일족과 함께 몽골 제국의 귀족을 형성하고 칭기즈 칸 일족과 군신관계를 형성하였다.
칭기즈 칸 사후 몽골족의 전쟁은 단순한 응징이나 약탈이 아닌 정복을 통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으로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정권에 대해서는 일단 명맥을 보존시키되 일련의 의무조항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대체적으로 육사라고 불리나 꼭 여섯 가지의 특정한 항목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① 국왕 친조 ② 질자 파견 ③ 호적 제출 ④ 역참 설치 ⑤ 병력 파견 ⑥ 물자 공출 ⑦ 다루가치(당시에는 지방 정권을 장악한 군대의 사령관을 뜻했다) 주재 등으로 구성되었다. 물론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이었고 그 전쟁은 정복을 통한 몽골 제국 영역의 확대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던 몽골 제국의 정복전이 아프리카 –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펼쳐진 것이었다. 이후 근대 식민제국의 출현 이전까지 몽골 제국의 강역을 넘어서는 나라는 나타나지 않는다.
칭기즈 칸은 1219년부터 1225년까지 남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에, 서로는 카스피 해를 넘어 러시아 남부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전역을 거의 지배하에 두고 1227년 서하를 정복하였다. 서하는 중국사 오호五胡 중 하나로 티베트의 전신인 강족(羌族)의 또 다른 분파가 중국과 중앙아시아 사이에 세운 대하(大夏)라는 나라였다. 제2대 오고타이 칸은 1239년 숙원이었던 대금(大金) 완전 멸망을 성공시키고 하河를 석권하였으며 그 원정군은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뻗어나갔다. 제4대 몽케 칸은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켜 그 영역은 동으로는 동해부터 서로는 러시아 남부까지 이르렀다. 몽케 사후 뒤를 이은 쿠빌라이 칸은 1276년 중국 남송南宋을 멸망시켜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다. 이 광활한 영토는 몽골족 관습에 따라 여러 자제들에게 나누어졌다. 몽골 초원과 금나라가 있던 중국 북부는 황제의 직할령이 되었고 러시아 남부에서는 장남 주치의 아들 바투가 세운 킵차크 칸 국(훗날 투르크 동화), 서아시아에는 막내 툴루이의 아들 훌라구의 일 칸 국(훗날 이란 동화), 西 투르키스탄에는 차남 차가타이의 차가타이 칸 국, 東 투르키스탄에는 오고타이 칸 국의 네 칸 국이 들어섰고 그 밖의 지역도 칭기즈 칸의 일족과 귀족들에게 배분되었다. 그렇게 황제를 주축으로 하는 대제국 몽골 제국이 출현하였다.
사적으로 북방 유목민족은 독자적인 군주 호칭이 있었다. 흉노, 선비족, 저족猪足, 강족羌族은 기원전부터 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아내는 연지閼氏였으며 후계자는 좌도기왕左屠耆王이라고 불렀다. 탱리고도선우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몽골어 ‘텡그린 후후두 초노(하늘의 자손인 늑대)’를 음차를 했다는 추측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선우라는 왕명은 늑대를 뜻하는 ‘초노’에서 왔다는 뜻이 되는데, 늑대는 몽골 문화권에서 ‘하늘의 개(텡그린 노호이)’ 등의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신성시되어 돌궐突厥의 깃발에도 그려질 정도로 숭배되었다.
하지만 흉노의 분열 이후 탱리고도선우를 자칭하는 자들이 난립하자 새로운 호칭이 필요해졌는데, 그때 가한可汗이라는 호칭이 나타난다. 그 이름은 ‘하늘의 지명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고대 제정일치 사회의 잔재를 보여준다. 비공식적으로 3세기 선비족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공식적으로는 5세기 독립한 유연柔然이 사용한 것이 시초였다. 3 ~ 5세기 한반도 삼한지배자의 명칭에 주로 사용된 간干과 유사하여 고구려를 통해 만주로 수출되었다는 추측이 있다.
유연을 멸망시킨 돌궐을 통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돌궐은 군주는 大가한이라 불렀고 군주의 아들이나 친족을 小가한이라고 하였으며, 유목민족들은 당태종에게 天가한이라는 칭호를 바치기도 하였다. 동돌궐을 멸망시킨 위구르 제국, 동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설연타(薛延陀), 서돌궐이 사라진 뒤 흑해와 카스피 사이의 산맥을 주름잡은 하자르도 사용하였다. 하지만 840년 위구르 제국이 키르기스스탄의 침공으로 패망한 뒤 키르기스스탄은 몽골 고원 통치를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이후 몽골 고원은 공백이 되어 유목민을 통일해 가한이라고 불릴 만한 특출한 지배세력이 등장하지 않았다. 요나라금나라는 동부에만 통치권을 행사하였고 그조차 간접통치였다. 몽골 부족의 전신인 만주의 실위室韋는 위구르와 당나라에 눌려있다 거란족에게 패퇴한 뒤 만주에서 몽골 고원으로 도망쳤으며 부족장이 가한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칭기즈 칸 사후 칸이 되었던 오고타이 칸이 가한의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본래 가한은 만주나 시베리아에서 사용되었던 호칭이었기에 칭기즈 칸이 활동할 때까지도 몽골 초원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명칭이었다. 당시에는 이름 뒤에 칸이라고 부르거나 새로운 칭호와 칸을 부르는 방식이었다. 즉 오고타이 칸이 가한의 호칭을 사용한 것은 기존의 형식과 다른 새로운 방식이었으며, 이는 몽골 제국의 최고 군주가 다른 유목국가의 군주와는 다르다는 관념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또 칭기즈 칸 사후 여러 칸이 난립하였기에 황제와 같은 지위가 된 몽골 최고 지도자에게는 새로운 호칭이 필요하였고, 여기서 채택한 것이 가한이었던 것이다.
몽골 제국에서 가한은 오고타이 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지만 사후 일반명사가 되었다. 카이사르가 본래 인명이었지만 사후 황제를 뜻하는 일반명사가 된 것과 같은 것이다. 칸과 가한은 유목민족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로 동일한 의미였으나 이후 가한은 수많은 칸을 거느리는 지도자가 되면서 중국의 황제와 같은 의미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몽골의 최고 지도자를 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칸이 몽골 전체의 지배자를 뜻하는 의미로도 사용된 것이 맞다.
이러한 명칭변화는 몽골 제국의 군주가 표방하는 정치적 이념의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가한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절대군주이며 그가 지배하고 통치하는 지역적 범위는 초원과 농경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12 ~ 14세기 몽골 제국의 시대에 사용된 가한과 6 ~ 9세기 돌궐, 위구르 제국 시대에 사용되었던 가한은 동일한 어원이고 의미상으로도 유사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처음의 가한은 칸과 같이 단순한 지배자의 호칭이었기에 복수의 가한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몽골 제국 이후 복수의 가한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가한이 지상의 최고군주라는 의미의 용례는 교황이 파견한 사신이 돌아갈 때 귀위크 칸(오고타이 칸 국 제2대 칸이자 몽골 제국 제3대 칸)이 보낸 서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위대한 백성들을 지배하는 사해四海의 군주”라고 부르면서 칭기즈 칸과 가한(오고타이)과 자신은 영원한 하늘의 신이 내린 명령을 집행하는 대리인이기에 교황은 유럽의 여러 왕들을 데리고 직접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고 복속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칭기즈 칸이 건국한 예케 몽골 울루스가 초원지대를 의미하는 유목국가를 벗어나 정주민이 거주하는 농경지대까지 정복지배하는 세계제국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눈에 세상은 칭기즈 칸 일족의 지배를 받아들인 속민과 反민으로 구별되었고 反민에 대한 정복전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칭기즈 칸 사후 몽골족이 수행한 전쟁은 과거와 같은 약탈이 아닌 정복을 통해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던 의지의 표명이었다.
후에 대청(大淸)을 세운 만주족도 초기에는 지도자를 칸에 해당하는 한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홍타이지 때부터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고 몽골 제국의 옥새를 차지한 뒤에는 가한의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만주족의 한, 몽골족의 가한, 중국의 천자, 티베트의 전륜성왕, 무슬림토후의 이슬람의 지배자를 병행한 동아시아에서 유례없는 동군연합 제국이 등장하였다.
칭기즈 칸이 건설한 몽골 제국은 처음부터 여러 울루스로 이루어진 복합체였으며, 각각의 울루스는 칭기즈 칸이 나누어준 유목민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지배자는 칭기즈 칸의 후손과 동생 일족들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농경을 정복하고 주민들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 뒤 전쟁이 확대되고 정주지대가 제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자 가한은 칭기즈 칸의 일족에게 정복의 성과를 나누어서 공동으로 향유한다는 정신에 따라 이를 피정복 정주민들과 일족들에게 분배하였다. 하지만 정주지대의 주민들을 관활하고 그들에게 징세하는 건 가한의 독점적인 권한이었다. 정주민들은 제왕諸王의 관할권 밖에 있었던 것이며 제왕들은 가한의 재정수입 가운데 자신의 몫을 건네받았다.
이를 통해 유목민들은 칭기즈 칸 일족이 지배하는 여러 울루스로 나누어졌지만 농경민족들은 가한의 일원적인 지배하에 놓였다. 그것은 다수의 울루스라는 분권적 측면과 농경지대에 대한 단일지배라는 중앙집권이 공존하는 지배형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농경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가한과 각 울루스 지배자 사이에서 갈등을 빚었다. 울루스 지배자들은 직접 농경지대를 관활하기를 바랐고 이런 경향은 시대가 지날수록 강해졌다. 몽케 칸 사후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를 두고 벌어진 갈등은 그런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쿠데타로 집권한 쿠빌라이 칸은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에 자신의지지 세력을 확보하고자 가한의 고유권한이었던 정주지대에 대한 관할권 위임을 약속했다. 이를 통해 몽골 제국은 유목민과 농경민을 동시에 장악하고 지배하는 여러 울루스로 나누어졌다. 아울러 가한에 대한 정치적인 독자성도 강화되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의 통치 이후에도 大 몽골 울루스는 변함없이 여러 울루스의 복합체였고 4대 울루스 이외에도 다른 울루스들이 다소 분포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칸의 직할령인 대원大元 울루스보다 동쪽에 있던 칭기즈 칸 동생 일족인 동방 3왕가는 1287년 반란을 겪기 전까지 직할령이 아니었다. 또한 유라시아 서부 초원에는 주치의 여러 후손들이 지배하던 울루스가 있었고 킵차크 칸 국은 그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중앙아시아에도 차가타이와 오고타이의 후손이 지배하는 여러 울루스가 있었다. 따라서 단일 제국이 1260년을 기점으로 4개로 분열되었다는 것은 실제 사실과 전혀 다르다.
시대가 지나면서 알아서 해당 울루스의 칸을 추대하는 등 통합이 약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은 연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한은 여전히 하나뿐이었고 칸들은 명목상일지라도 그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가한이 즉위하면 여러 울루스에 사신들을 파견하여 그 사실을 알렸고 칸들도 즉위하면 가한에게 사신을 보냈다. 가한은 중국에서 거두어지는 재정의 일부를 여전히 칸에게 보냈고 칸 또한 울루스에서 거두는 수입의 일부를 가한에게 보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국의 통치자들이 모두 ‘칭기즈 칸의 일족’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몽골 제국은 느슨한 울루스 간의 연맹으로서 제국의 연대감과 일체성을 보존하고 있었다. 이 일체성이 이들 간의 활발한 교류를 가능케 하였고 수 세기 동안 명맥이 끊어진 실크로드가 다시금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칭기즈 칸은 1206년 몽골 초원을 통일한 뒤부터 대외원정을 시작했지만 그는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칭기즈 칸 시대 몽골군은 1214년 대금과 화친을 맺은 뒤 바로 철군하였고 1225년 호라즘 원정이 끝난 뒤에도 즉각 초원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군사적 위협을 통해 상대로부터 안정적으로 약탈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으로 그의 전략은 흉놀 이래 유목국가의 군주들이 흔히들 사용한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칭기즈 칸이 중국 일부와 중앙아시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과정에서 그 지역에 제국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금의 경우에는 황실이 수도를 개봉으로 천도하면서 河 북부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었고 호라즘은 왕의 도주와 피사롤 나라가 망했다.
반면에 칭기즈 칸 사후 후손들이 추진한 대외원정은 정치적 응징이나 군사적 위협이 아닌 상대국가의 영토에 대한 영구적 내지는 정치적 복속을 목적으로 하는 쪽으로 방향이 크게 변하였다. 칭기즈 칸의 3남 오고타이가 가한의 칭호를 받은 1231년 무렵 고려로 보낸 국서에 이런 방침변화가 드러난다. 몽골 제국이 “‘영원한 하늘의 가호’를 받아 정복전쟁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에 저항하는 사람이나 국가는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언사와 함께 고려국왕이 직접 자신에게 찾아와 항복하라는 의사를 표시하라는 요구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후일 가한으로 즉위한 귀위크 칸이나 몽케 칸이 교황과 프랑스 국왕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완전히 똑같은 요구가 확인된다. 칭기즈 칸 사후의 몽골제국은 문자 그대로 세계정복을 목적으로 한 전쟁을 벌인 것이다.
그리하여 몽골 제국의 소위 ‘세계정복’ 전쟁은 2대 오고타이 칸이 즉위한 1229년부터 5대 쿠빌라이 칸이 남송을 멸망시킨 1279년까지 반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특이한 점은 여러 세력 및 지역에 대한 동시다발적인 공략을 감행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오고타이 칸은 금과 전쟁하면서도 주치의 아들 바투와 자신의 아들 귀위크 칸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서방으로 보내 불가리아 칸 국(러시아 타타르족의 전신)과 킵차크를 복속시키고 러시아와 동유럽을 공격하였다. 그는 동시에 서남아시아와 고려에도 전쟁을 하였다. 희대의 명장 수부타이가 이끄는 러시아 동유럽 공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군대 특징의 상성 상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며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하기 위해 돌아가면서 취소되었다.
귀위크 칸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즉위하였고 유럽원정을 완수하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병사하였다. 이에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장남 몽케 칸이 바투의 지원을 받아 몽골 제국의 4대 칸이 되었는데 그는 서남아시아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와 아사신(암살자)으로 악명이 높았던 시아파 세력을 제거하고자 동생 훌라구로 하여금 정복전쟁을 수행하게 하였고, 쿠빌라이에게는 회수 이남에서 몽골과 맞서던 남송 정복을 하게 하였다.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면서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지만 1260년 맘루크에게 패퇴하여 지중해 진출은 막혔다.
남송을 맡은 쿠빌라이 칸이 세력을 가지는 것을 경계한 몽케 칸이 직접 江으로 남하하는 원정에 참가하였지만 1259년 급사하였고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를 제압하고 몽골 제국 5대 칸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1276년 애산 전투崖山戰鬪를 승전으로 이끌어 남송을 멸망시키고 몽골 제국의 가한이자 동시에 중국의 천자가 되었다. 현대 원나라는 몽골 제국의 울루스 중 가한 직할령인 울루스의 명칭은 대원大元으로 삼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영토의 확장 이후부터는 울루스 간의 대립과 병합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오고타이 칸 국은 쿠빌라이 칸 치세에 몰락하여 흡수되었으며 여러 울루스들의 분열과 통합을 거쳐 1310년 무렵 우리들이 아는 4개의 대형 울루스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변함없이 소형 울루스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몽골 제국의 울루스 연합체라는 측면은 변화하지 않았다. 쿠빌라이 칸이 대원大元의 황제라서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대원大元이라는 명칭은 중국 왕조로 동화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大 몽골 울루스에서 가한 울루스를 상징하던 울루스의 명칭을 구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일 뿐이다. 쿠빌라이 칸은 결코 새로운 왕조를 세우지 않았으며 쿠빌라이 칸과 그 계승자들은 자신들이 대원이라는 중국 왕조가 아니라 大 몽골 울루스의 최고 지배자인 가한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몽골 제국이 출연한 13세기 초부터 울루스들이 붕괴하는 1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울루스 내부와 그들 사이에는 혼란이 있었을지언정 유라시아를 무대로 한 교류는 몽골 제국 시대에 이르러 어느 때보다 거대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제국의 지배층이 그런 교류를 적극 후원했다는 점에서 팍스 로마나와 같은 팍스 몽골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거대한 교류를 가능하게 한 기반은 역참驛站제도였다. 본래 참站의 기원이 된 몽골어 ‘잠’은 초원을 지나다 잠시 쉬어가는 여관을 말하는데, 오고타이 칸 시절부터 이것이 제국의 교통 네트워크로 채택되어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카라코룸은 도읍으로 정하고 서쪽의 주치 울루스, 차가타이 울루스와 연락을 하기 위해 역참 제도를 실시하였다. 또한 몽골 초원과 중국 북부에 ‘나린’ ‘모린’ ‘차도車道’의 세 역로를 설치하였다. 이후 제국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역참도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부분을 연결하는 교통망으로 발전하여 울루스가 된 외국인 고려와 같은 나라에도 역참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쿠빌라이 시대에 이르면 가한 울루스 내부에만 1400여 개의 역참이 설치되었고 역참을 관리하는 참호站戶 또한 35 ~ 70만 호 저도가 배정되고 있었다. 배정되는 사람은 마필 선박 수레 등의 교통수단과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를 책임졌으며 식량과 사료를 항시 준비했다. 또 역참을 사용하는 자들에게도 규정이 있어 역참 사용자는 신분증인 패자와 포마차찰이라는 문건을 소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일반 사무와 별개로 군사적인 긴급 사무를 신속하게 수행하기 위해 급체포라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 몽골 제국이 운영한 역참제도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경탄어린 어조로 상세히 묘사된 바 있다.
이런 네트워크는 유라시아 내륙교통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이 격화된 1280년대 말부터 10여 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원만하게 운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사신의 왕래 이외에 군인 종교인 학자 기술자 등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원에서 훌라구 울루스로 파견되어 라시드 앗 딘의 집사 편찬을 도왔던 사람이나 훌라구 울루스에서 대원으로 파견되어 쿠빌라이 칸 휘하에서 중용되었던 자말 앗 딘 이사 등은 그런 울루스 간 다양한 교류의 구체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제정관리를 맡아 자본을 운영하던 오르톡 상인들의 존재 또한 팍스 몽골과 관련되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이들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원거리 무역을 수행하였는데 그들의 임무는 자신들에게 자본을 제공한 지배층에게 최대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에서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여 고액의 이자를 요구하는 알탈전을 운용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다른 한편으로 대륙 차원의 경제교류를 활성화시키고자 은 본위 제도를 시행하고 각 지역 간의 교환단위를 통일하기도 하였다. 은괴 2kg이 통일성을 가지는 하나의 경제단위로 통용되었다. 은 4g 40kg 단위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존재는 세계사라는 개념의 창출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세계지도와 세계지리 세계사 관련서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이 시기부터였는데 15세기 초 조선에서 만든 세계지도에서는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까지 등장하는데 이는 과거 몽골 제국에게 전해들은 세계지식에서 기반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원제인 세계의 서술에서 웅변하듯이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자신의 여행을 통해 얻은 견문을 토대로 다른 자료를 참조하여 찬술한 세계지리지이자 박물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쿠빌라이 칸을 만났는지, 그가 실존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이 책을 단순한 여행기나 견문록으로만 인식하였기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질적인 의미의 세계사 관념이 이 때 나타난 것에는 의미가 있는데, 훌라구 울루스의 라시드 앗 딘이 편찬한 집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훌라구 울루스의 7대 칸이 카잔 칸의 명령에 따라 몽골 제국의 역사를 편찬하였는데 그의 뒤를 이운 올제이투 칸으로부터 3부로 구성된 집사를 만들었다. 1부에서는 몽골과 몽골 제국의 역사, 2부는 아랍 인도 유다 중국 프랑크 투르크 등 몽골 제국 등장 이전까지의 유라시아 세계사, 3부는 세계 각지의 지리적 특징과 도시 및 산천을 각각 설명하고 있다. 3부는 소실되어 알 수 없으나 1부와 2부는 지금도 남아서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세계사라는 새로운 개념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게 있어서 몽골 제국의 치세는 중국의 경제를 극도로 악화시켰고, 대명大明이 중국에서 몽골을 몰아낸 이후에도 이들은 북원과 6부 체제로 존속하면서 지속적으로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중국에게 있어 깊은 상처를 안겨 세계제국 하에서 최첨단 통상무역경제의 폐해를 접한 이들의 역설적인 구호를 통해 스스로 고립주의를 자초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였으며 팍스 몽골을 통해 득을 본 것은 어이없게도 서유럽이었다.
결론은 알려진 것과 달리 몽골 제국은 원나라가한을 정점으로 한 느슨한 상호연대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몽골 제국이 봉건제를 유지한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학계 연구에 따르면 고려의 원간섭기 또한 가한 직속의 예케 몽골 울루스 중에 하나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몽골 황족은 남녀공통으로 자신의 지분(울루스)으로 생활을 영위했는데, 기존 고려의 왕실과 고려로 시집간 공주가 울루스의 지분을 나누어 가진 것이라고 한다. 단 고려는 어디까지나 고려 왕실의 것이었기에 공주는 자신의 지분을 별도로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사후 높여진 것이 제국대장공주노국대장공주의 명칭의 실체였던 것이다. 여담으로 몽골 제국의 울루스 중에서 가한의 직계와 통혼한 외국 왕실은 고려 왕실뿐인데, 나머지 통혼은 칸의 후손으로 이루어졌으며, 청나라의 몽군기 보르지기트 씨족은 엄밀히 말해 칭기즈 칸의 동생인 동방 3왕가의 후손이다. 괜히 고려 왕실이 쿠릴타이에 참가하고 심왕 자리까지 받은 거 아니다.[53]

7. 칭기즈 칸계 계승 제국


  • 대원제국 - 칭기즈 칸의 후예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원(元)으로 정하면서 시작된다. 중국만주, 내몽골, 외몽골, 부랴티아, 투바, 알타이 지역을 지배했다. 몽골 제국의 종주권과 중국의 황제로서의 권위를 주장했으나, 실질적으로 다른 4칸국은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다른 분열된 몽골제국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서쪽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동쪽에서만 정복전쟁을 벌인다.
  • 북원제국 - 한족 제국인 명나라에 기습공격에 당해서 내몽골 고원으로 후퇴한 뒤의 원제국. 지금의 후룬부이르인 응창에서 항거했다. 그러나 북원의 마지막 황제였던 천원제가 살해당하면서 곧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외몽골에는 또 다른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 인이 자리잡았고 이들이 몽골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며 최초의 오이라트 계통 대칸인 에센 칸이 나오지만 그 역시 금방 암살당한다. 북원의 영역은 현재 내몽골자치구만주 북부인 헤이룽장 성 그리고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이며 전성기엔 산시 성허베이 성까지 내려와 한족 거주지가 다수 포섭되기도 하였다.
  • 티무르 제국 - '티무르'라는 튀르크-몽골 + 페르시아계 인물이 세운 제국. 모계 쪽이 칭기즈 칸의 혈통인 것을 위시하여 정치적인 이유로 스스로를 칭기스칸의 후예라고 자청했다. 티무르는 전쟁에도 능했고 몽골 제국의 전술을 항상 공부했기에 상당히 강력한 제국을 세웠다. 나중에는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여 술탄 바예지트 1세를 앙카라 전투에서 포로로 삼는 등의 강력함을 자랑하지만, 티무르의 사망 이후 빠르게 분열되었다.
  • 무굴 제국 -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가 인도를 정복하고 세운 제국이다. 하지만 무굴이란 단어 역시 무굴 제국의 공용어였던 페르시아어로 '몽골'이란 뜻임을 보면 무굴 제국 역시 세계를 정복했던 강력한 몽골 제국의 계승제국이 되고 싶었던 모양. 여담으로 무굴 제국의 군영에서 사용하던 언어인 우르두어의 명칭은 몽골어로 거대 천막을 의미하는 "오르도"에서 기원했다. 다만 바부르 본인은 부계의 모계 조상이 몽골인이란 것 빼면 사실상 튀르크인이고 바부르 사후의 황제들은 인도인에 동화되었다.
  • 킵차크 칸국 - 한자로는 금장칸국(金帳汗國), 골든 호드(Golden Horde)라고도 불린다. 칭기즈 칸의 계승자 주치의 아들인 바투러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건국했다. 주 지배층이 몽골인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투르크계 국가로 변화하였다. 지금의 러시아 남부 지역을 지배. 티무르 제국에게 패배한 뒤, 15세기에 크림, 카잔, 아스트라한 칸국 등으로 쪼개지고 크림 칸국과 러시아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현재 러시아타타르스탄 공화국 및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전신이다.
  • 우구데이 칸국 - 외몽골 서부와 신강 동부 등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얼마 안 가 같은 알타이계 유목민이며 오랫동안 섞여 살아 온 튀르크계 문화에 물들어졌다. 카이두가 킵차크 칸국과 손잡고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켜 원의 쿠빌라이와 한바탕 정통성 분쟁을 벌였으나, 카이두 사후 거꾸로 차가타이 칸국에 먹혀서 멸망했다. 우구데이 칸국을 인정하지 않는 학설에서는 이것을 쿠빌라이에 대한 반란 세력으로 본다.
  • 차가타이 칸국 - 지금의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동·서로 쪼개진 후, 티무르가 서차가타이 칸국을 장악하고 동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켜 망했으나, 티무르 사후 모굴리스탄 칸국(동차가타이 칸국)으로 부활했다. 1706년에 호자 가문에 칸이 쫓겨나 멸망했다.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전신으로 이 모굴리스탄 칸국의 후손 아파크 호자는 마지막까지 준가르대청제국에 저항했다.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필란드, 인도 및 동유럽을 계속 지배하고 서유럽까지 침공할 계획을 한 제국이다.
  • 일 칸국 - 지금의 서남 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지역이 지역인 만큼 이란계 문화가 자리잡았고 거진 페르시아계 나라였다고 봐도 된다. 아부 사이드 사후 사실상 소멸했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나 인도 등을 정복하는 데 혈안이 되었던 제국.
한국어 위키 백과의 '몽골 제국의 파편화'라는 틀에 아주 보기 쉽게 정리가 되어있다.

8. 기타 관련 민족 및 제국


칭기즈 칸 이전에 등장했던 '몽골계'로 꼽히는 민족들이나, 칭기즈 칸의 제국 혹은 아예 칭기즈 칸 혈족 외 몽골계나 몽골족이 건국한 제국들을 수록. 다만 그들의 후예가 건국했어도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큰변화를 맞은 제국들이 다수다. 애초에 몽골 제국 이후의 유목민족들 중에서는 몽골제국과의 큰 연계성이 없어도 '''칭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하거나 '옛 몽골제국의 영광을 되찾는다'면서 그 명목으로 여기저기 공격하고 다닌 경우가 많았다.
  • 동호-오환, 선비, 거란, , 실위 - 대략 대흥안령 산맥까지를 경계로 이른바 '동호계'로 형성되어 있던 여러 제국들이며, 앞서 서술했듯이 실위의 한 분파인 몽올실위가 추적할 수 있는 몽골제국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단 실위는 이들 중에서도 제일 서북쪽에 있던 세력이며 그 중에서도 끝에 있던 것이 몽올실위이기 때문에, 몽골제국이 이들 전체와 직접적인 계승 관계에 있다고 보기는 애매하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 시점에서 직계 후계 세력을 남기지는 못한 데다가 유목 문명권에 속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몽골에서는 이들을 전쟁사를 설명할 때 다루기도 하며, 그들의 언어나 문자, 문명이 몽골어파인지 퉁구스어파인지 아니면 그 중간적인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술적으로 여러 논의가 오가고 있다.
  • 오이라트 제국 - 북원멸망 후에는 전 몽골 지역을 장악했으나 칭기즈 칸계 혈족은 아니었다. 에센 타이시의 시대에 토목보의 변을 일으키는 등 전성기를 맞았으나, 얼마 안 가 칭기즈칸계 칸인 다얀 칸이 동몽골을 장악하면서 서몽골로 후퇴, 후에 준가르 제국으로 계승된다.
  • 티무르 제국 -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칭한 티무르가 차가타이 칸국 일대를 기반으로 건국.
사실 티무르는 튀르크인이여도 혈족상 몽골 계 피도 있기에 칭기즈 칸의 후손을 내세우는 것도 불가능한 건 사실 아니었다.
단지 부계만 인정되어 칸으로는 인정 못받을 뿐이다.
  • 무굴 제국 -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북인도를 침공하여 건국. 지금의 인도 지역을 악바르 황제가 점령하고 샤 자한 황제가 다져가면서 점차적으로 지배하였고 이 당시가 흔히 알고 있는 전성기 시절의 지배기였고 그 외 시기에는 마라타 제국, 두라니 제국, 하이데라바드 왕국 등에게 밀려서 북인도에서 잔류했던 기간이 길었다. 다만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몽골과의 유사성은 없었다. 바부르악바르 같은 무굴 황제들의 기록이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의 사진만 봐도 몽골제국 계통과는 유사성이 없다. 지배층은 튀르크 계통에서 기원했지만 이미 바부르의 대에 가면 페르시아인과 많이 섞여서 그냥 페르시아인이라고 봐도 된다. 애초 이름인 구르카니 자체가 페르시아어이다.
  • 대청제국 - 황제들은 물론 만주족이지만, 몽골족들과 북방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전쟁할 때는 칭기즈 칸으로부터 이어지는 몽골 제국 카간의 계승자임을 칭했다. 중원 입성 당시 만몽 연합 정부의 형태를 갖기도 했으며, 역대 청제국의 황제들은 몽골 제국의 황성인 보르지긴(孛兒只斤)씨를 계승했었다는 보르지기트(博爾濟吉特)씨와 친분을 맺기도 했다.
  • 모굴리스탄 칸국
  • 준가르제국 - 외몽골(서몽골) 지역에서 후퇴한 오이라트계가 결집해 세워진 제국이었으나 4개 부족의 연합 제국으로 통일 제국은 형성하지 못했다.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이고 티베트달라이 라마에 영향력을 미치려 하였으나, 역시나 티베트 불교를 유목 민족을 장악하는 이념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청제국과 군사적으로 충돌한다. 또한 정통성 문제도 있는데, 청제국이 몽골 제국의 계승을 자처하고 동몽골(내몽골)은 그것을 지지했지만 준가르제국은 청제국을 몽골 제국의 계승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하필 청제국은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의 3대 세계관 최강자 시절... 결국 건륭제 시대에 완전히 분쇄되어 멸절되었다. 건륭제는 일종의 제노사이드를 실행했다...
  • - 종속국이냐 내정 간섭을 많이하는 독립국이냐 입장차가 갈리는 편이지만 원종 이후와 훗날 공민왕 이전까지의 왕들은 대원 제국에 충성을 바치는 의미에서 '충'(忠)자가 들어갔다.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몽골 제국의 괴뢰국으로 치는 편. 국가수반이 독자적인 외교권과 군권을 행사할 수 없고, 후계를 정함에 있어서도 간섭당했던 점에서 그러하다.
  • -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었으며 크림칸국의 칸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자리가 비었을 경우 술탄에 즉위하게 되어 있었다. 러시아 제국에게 크림 칸국이 멸망할 때까지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번국으로서 특히 타타르 기병대는 유럽 원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언제 이 항목이 삭제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오스만 제국은 셀주크 제국에서 룸 셀주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룸 셀주크가 몽골제국의 침공으로 멸망한 뒤 룸 셀주크에서 독립한 투르크 부족이 기원이긴 하지만 간접적이나마 몽골 제국과 엮여 있다.

9. 역대 황제


통일 몽골 제국의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칭기즈 칸부터 몽케 칸까지의 시호 및 묘호는 원나라 건국 후 쿠빌라이 칸이 올린 것이다. 대수는 몽골 제국 대칸의 대수이면서 원나라 황제의 대수이다.
대수
묘호
시호
칸호/휘
재위 기간
비고
1대
태조
법천계운성무황제
(法天啓運聖武皇帝)
칭기즈 칸
1206년 ~ 1227년

임시
예종
인성경양황제
(仁聖景襄皇帝)
툴루이
1227년 ~ 1229년

2대
태종
영문황제
(英文皇帝)
오고타이 칸
1229년 ~ 1241년

3대
정종
간평황제
(簡平皇帝)
귀위크 칸
1241년 ~ 1248년

4대
헌종
환숙황제
(桓肅皇帝)
몽케 칸
1248년 ~ 1259년

5대
세조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쿠빌라이 칸
1260년 ~ 1271년
5대 대칸
원나라의 초대 황제
몽골 제국 분열
-
-
-
아리크부카
1260년 ~ 1264년
대립 대칸. 1264년 항복
정식 칸으로 보지 않음
  • 몽골 제국의 분열 후 직계로 이어진 원나라북원의 역대 군주들에 관한 정보는 해당 문서 참고.

10. 국가 제도



11. 관련 저서


몽골족만이 아닌 거란, 여진족과 같은 유목 민족이 세운 왕조를 '''정복 왕조'''라 하는데, 한국 출판계에는 이 정복 왕조들에 관해 시중에 출판된 책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괜찮은 책들을 몇가지나마 소개해 보고자 하니 몽골 제국의 역사에 관심있는 위키러들은 참고하기 바란다. 유목 민족사의 권위자인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의 저서가 많다. 그는 Michal Biran 교수와 함께 <케임브리지 몽골제국사(Cambridge History of Mongol Empire)>(근간)의 편집자이다. 최근에는 고려대에서 카안 울루스(원제국)의 중후기 권신 정치 연구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권용철 박사가 열정적으로 몽골 제국사에 대한 외국의 훌륭한 서적들을 번역하고 있다. 그가 번역한 몽골제국 관련 서적은 모건, 핼퍼린, 티모시 메이까지 2020년 6월 현재 3권에 달하며 모두 학계의 권위자이며 뛰어난 평가를 받은 저작들이다.
  • 김호동, 『몽골제국과 고려』, 서울대학교출판부, 2015.
몽골 제곡의 4대 대칸인 뭉케 칸이 사망하고 그 동생들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대칸의 지위를 두고 싸운 사건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러한 몽골 제국의 상황이 고려의 정치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실크로드와 유목제국',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찾아온 평화의 시기였던 '팍스 몽골리카' 등 몽골제국이 세계사에 끼친 다양한 영향들에 관한 논문들을 인문 교양서 수준에 맞게 재편집한 책이다. 역사 전공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읽기에도 무난하다.
  • 라시드 앗 딘, 김호동 역, 『집사#s-4(集史) 시리즈 1~4』, 사계절, 2018.
일 칸국에서 관리로 일했던 색목인 라시드 앗 딘이 쓴 몽골의 역사서이자 또한, 당시 최초의 세계사 역사서였다. 김호동 교수는 1편은 몽골 제국 성립 이전 몽골족들의 역사를 기록한 "부족지", 2편은 "칭기스 칸 기", 3편은 우구데이 칸부터 쿠빌라이 칸의 손자였던 원나라의 성종 테무르 칸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칸의 후예들", 4편은 2018년에 출판된 일 칸국의 칸들의 역사를 기록한 "일 칸들의 역사"로 나누어 번역하였다. 내용도 방대하고 명칭들도 생소한 것이 많기 때문에, 역사 비전공자들이 교양으로 읽기에는 어렵다. 총 5권으로 완결될 예정이다. 참고로 이 부분은 집사 중 제1부 몽골사 부분만 번역한 것이며(총 5권 예정), 제2부인 세계사는 2017년 현재까지 이란 학자 무함마드 로샨의 교감본(2013 11권 13책으로 완간)만이 전체를 다룬 유일한 현대의 판본이다.
  • 유원수 역, 『몽골비사(元朝秘史)』, 사계절, 2004.
『집사』와 더불어 몽골 제국의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칭기스 칸을 가까이에서 모신 신하로 추정된다. 읽어보면 역사서의 서술 방식보다는 서사시같다. 몽골족의 조상 이야기부터 시작하며 칭기스 칸의 원정에 대다수의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 잭 웨더포드, 정영목 역,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사계절, 2005.
칭기스 칸의 원정이 당시 유럽 국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 지를 서술한 책이다. 칭기스 칸이 활용했던 다양한 군사전략들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어떻게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관찰한 책이다.
  • 윤은숙, 『몽골제국의 만주 지배사』, 소나무, 2010.
저자가 썼던 논문을 책의 형식으로 출판한 것이다. 칭기스 칸은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해서 자신의 친족들에게 분봉을 실시했는데, 아들들에게 분봉한 곳이 흔히 말하는 4칸국(킵챠크, 우구데이, 차가타이, 일 칸국)이며 이들은 서방 왕가로 불렸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에게는 중국의 동쪽 지방을 분봉하였는데 이들은 동방 3왕가로 불렸다. 이 책은 만주 지방을 다스렸던 칭기스 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긴 왕가와 조선의 건국 세력인 이성계 가문과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각주 설명이 자세하여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도 읽어볼 만한 수준이다.
  • 데이비드 O. 모건, 권용철 역, 『몽골족의 역사』, 모노그래프, 2012.
1986년에 초판이 출간된 후 영미권에서 몽골제국 뿐 아니라 제국 성립 전후의 몽골족의 역사까지 다룬 통사로 쇄를 거듭하여 출판된 명저로, 2012년에서야 번역 출간되었다. 초판 출간이 30년이 넘은 만큼 다소 구 학설을 담고 있지만 2007년까지의 최신 연구성과물을 새 챕터로 추가한 2007년 개정판을 번역하였으며 몽골족에 대한 통사적 지식을 얻기에 적합한 저서이다.
  •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사계절, 2016
스키타이부터 근대 중앙아시아 공산주의 혁명기까지 지도를 중심으로 서술한 통사이며, 한국인에 의해 한국어로 출간된 최초의 중앙유라시아(내륙아시아) 통사이다. 몽골제국만을 다루진 않으나, 몽골제국이 유목국가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고, 저자가 몽골제국사의 권위자인 만큼 한 챕터를 몽골제국사에 할애하고 있다. 지도와 함께 간단하게 몽골제국사를 알아보기에 적절하다.
  • 오타기 마쓰오, 윤은숙. 임대희 역, 『대원제국』, 혜안, 2013
몽골제국의 전사부터 제국 성립 이후 남송 정벌, 그리고 그 이후 원 제국(카안 울루스)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현재 한국에 번역된 몽골제국사 관련 일본 서적은 두 권인데, 이 책과 바로 아래 서적이다. 이 책은 원래 고단샤라는 출판사의 “중국의 역사” 시리즈로 기획되었고 그 시리즈 중 하나인 『몽골과 대명제국(モンゴルと大明帝國)』로 출간된 것인데, 이 중 원 제국 파트만을 번역한 것이다. 전체 몽골 제국 중 몽골 지배하 중국(=원 제국=카안 울루스)만을 다루지만, 전통적인 관점인 중국왕조로서의 시각 대신 다원주의적 국가로서의 제국이라는 성격으로 이 시기 몽골제국을 바라보며 몽골 지배가 중국사에 끼친 영향을 탐구하고 있다.
  • 스기야마 마사아키, 임대희 외 역, 『몽골 세계제국』, 신서원, 1999
일본의 대표적인 몽골제국사 연구자인 스기야마 마사아키의 몽골제국사 관련 개설서. 출간된지 꽤 시간이 지난 책이기는 하지만, 1987년 이후 몽골제국사 연구의 새로운 동향인 전체적 관점(a holistic perspective)으로, 몽골제국을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는 입장에서 쓰인 제국사 전체에 대한 개설서이다. 특히 동아시아, 이란을 중심으로 한 서아시아, 러시아, 중앙아시아 등을 분절적으로 이해해 왔던 그 이전(그리고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일반적인 몽골제국사 인식)까지의 역사 인식은 여러 언어로 된 사료의 종합적인 이해를 통해 극복되고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관점에서 쓰였다. 다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4칸국의 분할 독립으로 인한 제국의 해체 시기라고 표현되는 1260년을 기점으로 그 이후는 아무래도 동아시아 중심으로 몽골제국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나, 현재까지도 그 부분을 명확히 전체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통사는 아쉽게도 없는 실정이다. 다만 최근 학계의 최신 연구 동향은 1260년 제국 해체라는 사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 이후에도 몽골 제국의 대칸(카안qa’an, 즉 원 제국의 황제)의 권위가 유지되었으며 제국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통합성을 유지하였다는 시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입장을 견지한 학계의 연구 성과를 모아 낸 종합적인 연구서가 바로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 및 미할 비란 헤브루대 교수를 편집자로 하여 출간 예정인 케임브리지 몽골제국사(근간, 2021년 출간 예정)이다.
  • 라츠네프스키, 김호동 역, 『칭기스칸』, 지식산업사, 1992
유목제국사의 권위자인 김호동 교수가 번역한, 칭기즈 칸에 대한 사실상 최초로 번역된 학술서이다. 원조비사, 원사, 집사 등을 참고하여 칭기즈 칸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저서라고 역자는 평가하고 있다. 12-13세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칭기즈 칸의 업적과 생애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983년에 러시아어로 초판이 출간되었으며, 91년 영역본, 92년 국역본이 출간되었다. 출간된지 28년째인 2020년 현재에도 절판되지 않아 시중에서 구할 수 있으며 2017년에 초판 7쇄를 찍은 책으로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 모리스 로사비, 강창훈 역, 『수성의 전략가 쿠빌라이 칸』, 사회평론, 2015 (이전 판: 『쿠빌라이 칸 그의 삶과 시대』, 천지인, 2008)
미국의 중앙아시아사 전문가인 모리스 로사비 교수의 저서 번역본. 원본 초판은 1994년이며, 2008년에 처음 번역 출간되었으나 출판사와 제목을 바꾸어 2015년 재출간되었다. 쿠빌라이 칸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최초의 번역 학술서이며, 교양서로 읽기에 손색이 없다. 정복자였던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뒤를 이어 100여년간 이어간 대제국의 체계를 완성한 수성가로서의 쿠빌라이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 찰스 핼퍼린, 권용철 역, 『킵차크 칸국』, 글항아리, 2020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를 다룬 첫 번역 학술서이다. 핼퍼린은 구미 학계에서 주치 울루스 내지는 킵차크 칸국이라 불리는 몽골 제국기 중앙아시아 연구에 대한 중요한 연구들을 냈는데,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이 책에서 몽골 지배기가 러시아의 연대기 기록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분석하여 러시아 지식인들이 몽골 지배기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회피함으로써 러시아인 자신들의 종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일련의 정체성 지키기를 핼퍼린은 ‘침묵의 이데올로기(ideology of silence)’라고 불렀다.
  • 티모시 메이, 권용철 역, 『칭기스의 교환: 몽골제국과 세계화의 시작』, 사계절, 2020
6월 23일 출간 예정인 가장 따끈한 신작이다. 티모시 메이 역시 미국에서 활동 중인 몽골제국사의 중견 학자이며, 몽골제국의 정복으로 진정한 세계화가 시작되었음을 전쟁, 전염병, 종교, 교역, 인구 변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하고 있다. 저자 메이는 이러한 변화를 ‘칭기스의 교환(Chinggisid Exchange)’이라는 용어로 정의내리고 있다.
그 밖에 한국사학계의 이명미(『13~14세기 고려•몽골 관계 연구』, 혜안, 2016), 이강한(『고려와 원제국의 교역의 역사』, 창비, 2013), 동양사학계의 이개석(『고려-대원 관계 연구』, 지식산업사, 2013), 고명수(『몽골-고려 관계 연구』, 혜안, 2019) 등은 고려-몽골 관계사에 대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연구서를 저술하였으며, 여원관계사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틀인 세조구제(世祖舊制)론(이 세조구제론을 집대성한 연구가 이익주의 연구(「고려•원 관계의 구조와 고려후기정치체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이다.)에서 벗어나 몽골 제국 속의 고려라는 틀에서 여원관계사를 바라보고 있다. 관심이 있으면 참고하여도 좋다.
그외에도 각 대학에서 신진 연구자들이 몽골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그 박사 논문들도 공개되고 있는데, 역시 관심있는 사람들은 참고하면 유용할 것이다. 권용철의 고려대 박사 논문은 『원대 중후기 정치사 연구』(온샘, 2019)로 출간되었으며 설배환 박사의 「몽•원제국 쿠릴타이(Quriltai) 연구」(서울대 박사논문, 2016), 김호동 교수의 뒤를 이어 서울대 동양사학과 몽골제국사 전공 교수로 임용된 김석환 교수의 「13~14세기 몽골제국 칙령제도 연구」 등이 있다.
김호동 교수가 최근 30년(1986~2017)의 몽골제국사 연구사를 정리하는 논문을 학술지 『중앙아시아연구』에 실은 바 있는데, 이 논문에서는 몽골제국사 핵심사료의 정리, 번역, 신 사료의 발굴부터 최근 30년간의 중요한 몽골제국사 연구를 구미, 서아시아, 중화권, 몽골, 한국, 일본 등 전세계에 걸쳐 망라하고 있으니 몽골제국사에 보다 관심이 생긴 위키러들은 이 연구사 정리 논문을 일독하면 중요한 연구논저 목록 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김호동, 「最近 30年(1986-2017) 몽골帝國史 硏究: 省察과 提言」, 『중앙아시아연구』22-2, 2017, pp. 1-71)

12. 같이보기


[1] Yeke Mongɣol Ulus[2] Ikh Mongol Uls(이흐 몽골 울르스). 단 현대 몽골에서는 그냥 몽골 제국이라는 뜻의 Монголын Эзэнт Гүрэн를 쓰기도 한다.[3] 당시에는 측량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몽골 제국의 최대 영역, 특히 유럽 북방 경계는 지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또 한반도의 경우, 속국으로 파악하여 포함시키지 않거나, 속령으로 파악하여 포함시키기도 한다.[4] 쿠빌라이 직계 북원 왕조 멸망 기준[5] 정확히는 제국이 분열된 이후의 원나라 한정이다. 의외로 원나라가 두 개의 수도를 운영 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겨울 수도는 대도(大都), 여름 수도는 그보다 좀 더 위쪽에 위치했던 상도(上都)였다.[6] 원나라 한정. 그러나 이미 칭기즈 칸을 포함한 전대 몽골 제국 대칸들이 원나라 황제로 추존되었다.[7] 참고로 북쪽으로는 어디까지 진출했는지 명확하지 않다.[8] 델리 술탄국을 비롯한 인도 북부와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일대는 수차례의 침입을 받았다.[9] 영문 위키피디아 기준으로는 1위 대영 제국: 20세기 초 기준 약 3,550만 km², 몽골 제국은 전성기를 기준으로 약 2,400만 km²로 2위. 문서 참고. 그러나 몽골 제국은 북쪽 시베리아 쪽 국경선이 어디까지인지가 모호하기 때문에 시베리아 극동지역 영토를 얼마나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그 수치가 변동될 수 있다. 실제로 몽골 현지는 물론,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선 중화민족 드립 등이 섞여 몽골 제국을 더 쳐주는 경향이 있다.[10] 금성, 개성[11] 한반도가 몽골의 지배를 받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이다. 동시기의 서양은 '''아직 동로마 제국이 존속하고 있었다.'''[12] 2020년 현재 몽골의 GDP는 대한민국 '''전주시'''보다 낮은 수준이다.[13] 사실 일본, 중국과는 비교가 어려운게, 두 나라와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을 싫어하는 이유를 단순히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었고 한국보다 잘 살아서"라고 단순화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본은 한국과 관련된 역사를 왜곡하고, 영토분쟁이 있는데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서 외교적 갈등까지 있는 나라이다. 게다가 똑같이 "과거의 일"라고 해도 차원이 다른게 일본에 직접적 피해를 입은 분들 (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이 적은 수나마 '''생존해있다.''' 우리 할머니, 증조할머니대에 해당하는 분들이 살아서 그 당시의 고통에 대해 생생히 증언하는 것에 공감하는 건 당연히 가능해도 거의 천 년 전에 알지도 못하는 조상들을 괴롭힌 것에 감정이입이 가능할까? 몽골 침략자들이 아무리 악독했어도 역사책으로 보는 것과 전쟁범죄, 인권유린을 생생한 증언, 사진 등으로 보는 건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과거에 한반도를 지배해서 싫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북공정으로 인한 갈등과 미국과 중국간의 힘싸움으로 인한 외줄타기 외교, 이에 따른 여러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14] 사실 몽골제국에 대해 "학살자로 본다"는 서구권의 인식도 과장이 있는 편이다. 현대 서구인 대부분은 몽골에 대해 "무서운 학살자"로 보는게 아니라 그냥 '''별 관심이 없다'''. 그냥 동양인으로 볼 뿐 몽골인과 한족을 구분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나 징기스 칸은 워낙 유명한데 자세히는 모르고, 유럽 쪽에 문화 사회적으로 뭔가 공헌한 것도 아니다보니 그냥 정복전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즉, 서구권에서 몽골제국/징기즈 칸을 무서운 학살자로 본다는 건 역사계의 얘기, 그리고 이로 인한 대중들의 인식이지, 한국에서 반일감정이나 반중감정과는 차원이 다르다. "옛날에 무지 강하고 무시무시한 정복민족이었대" 수준의 인식이고, 사실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그마저도 잘 모른다. 한국에서건 유럽에서건 '''수백 년 전에 일어나고 지금세대는 그 피해를 체감할 수 없는''' 일들로 안티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몽골 제국을 학살자로 보는 지역은 서구권이 아니라 동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남아시아다.[15] 특히 일 칸국과 맘루크를 예로 많이 든다.[16] 전체적으로 중국 내에서 북방구과 남방구의 사이가 안 좋기도 하다. 이런 중국의 지역 감정은 둥베이(만주) vs 광저우(광동)로 대표된다. 일명 경상도vs전라도의 대륙판. 사실 신해혁명 발발 시에도 위안스카이의 적절한 조치로 어정쩡하게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광동을 중심으로 한 혁명 세력인 남군과 북양군으로 남북이 갈릴 뻔 했다.[17] 물론 이런 반감은 만주족에게도 마찬가지라서 대청제국 역시 야만족이라고 폄하하고 한족 명나라를 마지막 중국 왕조로 보는 입장도 많다. 이 입장에서 대청 제국은 그냥 만주의 식민 지배였을 뿐이다.[18] 동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미얀마파간 왕조는 멸망하였다.[19]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가 몽골군에게 파괴되었다.[20]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란에서도 영웅이라고 인정하는편인데 칭기즈 칸은 얄짤없이 악마로 분류된다.[21] 튀르크 계를 미워하는 것은 몽골의 영향도 있지만, 셀주크 제국오스만 제국의 영향이 더 크다.[22] 몽골에게 점령당했던 기간을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다.[23] 후에 다른 제국들도 이 지역을 서로 탐하려고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에는 러시아 제국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점령된 적이 없다.[24]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진격했다가 맘루크 왕조 이집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25] 정확히 말하면, 튀르크인을 몽골'''계'''라고 정의하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 튀르크계와 몽골계 모두 유라시아 북부 스텝지방의 유목민에 속한 계열의 민족집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 즉, 유라시아 북부의 유목민들 중에는 튀르크계와 몽골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튀르크계가 몽골계보다 좀 더 먼저 등장한 유목 민족 집단인 것. 튀르크계나 거란계등이 유목제국화하여 스텝 외부의 풍요로운 지역을 정복하면서 스텝 지역에 세력의 공백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이전까지 스텝 북족의 타이가에서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몽골계가 남하하여 유목민족화한 것이라고 보면 적절하다. 물론 유목 부족 전통을 공유하여 강한 문화적 동질감을 가지고 있던 투르크계와 몽골계는 정확히 구별할 수도 없고, 사실은 딱히 구별할 필요도 별로 없긴 하지만, 튀르크계를 '몽골계 종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라시아 북부 스텝의 유목민은 곧 몽골인'이라고 착각하는 전형적인 오류이다.[26] 셀주크 튀르크가 망한 이유는 내분 때문이다. 이 내분에 몽골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몽골족이 몽골고원을 통합하여 유목제국화 하기 한참(한 세기 반 이상)전인 서기 1100년 전후에 셀주크 제국은 이미 심각하게 파편화 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셀주크 제국의 핵심부였던 이란-페르시아 지역만 보더라도 몽고가 이 지역을 공격한 1200년대 초반에는 이미 호라즘 왕조가 (범 셀주크계 세력의 종가격이었던) 셀주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차지한 상태였다. 셀주크 제국의 심장부였던 이란 지역이 이 정도니 다른 지역은 더 말할 나위도 없어서, 중동-서아시아 지역의 경우 각 도시마다 그 영주가 술탄을 칭할 정도로 격심한 분열상태였기에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 즉, 몽골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시점에 셀주크 제국은 이미 극도로 파편화되어 사실상 붕괴수순을 밟고 있었고, 셀주크 제국이 몽골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것은 그냥 이미 제국이라고 부르긴 어려운 규모로 분열된 범 셀주크계 세력들을 일소한 것이 몽골이라는 의미 정도밖에 없다. 반면 아바스 왕조는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했다.[27] 티무르 제국을 세운 티무르는 스스로 자신이 모계를 통해 칭기즈 칸의 혈통을 이었다고 주장했다.[28] 각종 분야에서 영향을 끼치던 학자들도 행방불명이 되거나 사망[29] 도시나 도서관에 대한 파괴나 방화를 해서 여러분야의 서적도 많이 사라졌다.[30] 정복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상대로 '''백인 칸'''이란 타이틀을 내세웠다.[31] 고구려로부터 철을 수입했다고 하며, 인근에 위치한 황두실위의 경우 고구려 휘하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부여의 후신인 두막루가 실위와 인근해 있었다.[32] 단, 한자는 원래 의미가 고정된 게 아니고 한 글자를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몽자나 고자나 꼭 위에서 말한 나쁜 뜻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 실제 해당 한자들은 사람의 이름에도 쓰이는 한자다.[33] 이 과정에서 워낙 많은 정예병이 서방 원정에 동원된 탓에 금나라의 반격을 받아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대 금나라 방면 최고 사령관 무칼리는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34] 귀환 도중 제베는 병사했다.[35] 물론 이건 야율초재가 그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가정하에 성립하는 이야기. 하지만 야율초재 항목에 적힌 것처럼 실제로 야율초재가 몽골 제국의 중요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36] 大가 수식어가 아니라 정식 국호다[37] 당시만 해도 세계적인 도시였다.[38] 가장 유명한 것이 모히 전투다. 병력수 추정은 학자에 따라 유동적이며 몽골군이 많다는 의견과 헝가리군이 많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전투 초기에는 바투가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몽골군이 밀렸으나, 당대 최강의 군대답게 수부타이의 화려한 옆치기 기동으로 헝가리를 털어버린다. 이후 바투는 우구데이 칸의 사망으로 군대를 물린다. 바투의 원정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이후에도 몽골과 헝가리는 여러 차례 공방을 주고 받았다. 모히 전투 이후, 몽골은 서유럽식으로 군제를 개혁하고 방어 태세를 갖춘 헝가리를 상대로 별 재미를 못보다, 결국 헝가리 정복을 포기했다. 하지만 이 때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데 헝가리는 매우 오랜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39] 당시 몽골인들 가운데에는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유럽인들이 믿는 그리스도교와는 그 개념이나 교리가 상당이 달랐다. 이들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네스토리우스교'''를 신봉하였다. 게다가 몽골인들은 대체로 종교나 신앙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한 몽골인 사절은 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의 살과 피'라 부르는 성체성사 광경을 보고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먹고 마시다니 역겨운 풍습이다.'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40] 몽골제국은 칸이 죽으면 차기 칸을 선출하는 군사회의인 쿠릴타이를 열어야하는데, 이 회의는 모든 장군들이 전부 참가를 해야했다.[41] 예를 들면 건륭제는 '''텡게린 테트게센 칸'''이라는 몽골식 칸호를 고종 건륭제라는 중국식 황제호와 같이 사용했다.[42] 대표적으로 고려 왕실과 청나라 황실에도 보르지긴 씨족의 피가 섞였다. 그렇다고 고려나 청나라가 방계 혈통의 몽골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참고로 청나라의 보르지기트씨 황후들은 칭기즈 칸의 동생 카사르의 후손들이지만 원 간섭기 고려의 왕비들은 칭기즈칸 직계 혈통인 원나라 황실의 공주들이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몽골 황실의 피가 흘러들어간 왕실 중 가장 칭기즈 칸 직계와 가까운 혈통이 고려의 왕실이었다.[43] 거기다가 세금도 엄청 물렸다고 한다. 아마 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해서 무역과 세금에 집착한 듯하다. 또 약탈도 심했다고 하니.[44] 토곤 테무르의 아내 중 한 명이 바로 기황후이다. 이로 인해 고려에서는 기씨가 권문세족으로 득세했지만, 정작 토곤 테무르 대에 원은 멸망한다.[45] 서유럽뿐만 아니라 러시아 스텝 초원의 흑사병도 엄청났다. 몽골인, 러시아인 가리지 않고 발병하였으며 모스크바의 경우 대공이 흑사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46] 중세 당시에는 동아시아를 제외하면 장자 상속이 보편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분할 상속이 대세였다. 중세의 게르만 관습법에 의한 국가들의 빈번한 분열, 특히 프랑크 왕국의 서, 동, 중 프랑크의 분열이 대표제인 예라 하겠다. 크루세이더 킹즈에서 유목 민족으로 장자 상속제를 만들기를 체험해보자. 답답하다.[47] 게다가 대영제국의 영토도 과장됐다 볼 수 있는데, 전성기 시절 영토의 대부분이 거대한 캐나다와 호주이다. 그런데 대영제국은 캐나다와 호주 곳곳에 영향력을 미친 적이 없으며 대부분은 '''미개척지'''였다. 애초에 호주는 호주 대륙에 나라 하나 있어 모든 영토를 차지하는거지, 호주는 해안가만 사람이 살고 중앙의 거대한 영토 대부분은 사람이 미거주 지역이다. 즉, 당시 이 나라들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 않던 북미대륙과 호주의 거대한 미개척지를 깃발만 꽂는 식으로 포함시킨게 대영제국이다.[48] 사실 몽골제국은 잘못 포함된 시베리아 지역 영토가 그나마 문명지역이라 빼는 거지만, 대영제국은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한 지역까지도 "여기를 지배한 다른 나라도 없다"는 이유만으로 전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어느 나라나 미개척지와 명목상으로만의 영토가 존재하나, 대영제국은 영토가 당시 국력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한 호주와 캐나다가 포함되어 유독 뻥튀기가 심하다. 같은 방식으로 몽골제국도 시베리아 중북부를(미개척지지만 몽골 외의 타국가가 들어갈 수없는 지역이었으므로) 포함하면 대영제국보다 넓어질 수 있다.[49] 원래는 약 78만km² 이지만 당시 몽골은 터키의 면적 절반만 지배하였다.[50] 현대의 몽골 공화국[51] 총합은 115만km² 정도지만 차가타이칸국에 포함되면서 소련에 포함되지않은 아프가니스탄 일부 10만 km²을 다시 더해야한다. 즉, 총 105만km²[52] 이는 논란이 있는 한반도는 제외한 수치[53] 다만 이는 쿠빌라이 칸 시절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진 동방 3왕가에 대한 견제의미가 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