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토 전투
1. 개요
닥토 전투는 1967년 11월 3일 부터 11월 23일 까지 약 20일간 콘툼성과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서 미군과 북베트남군, 그리고 베트콩과의 교전이 벌어졌던 전투다. 이는 이아드랑 전투 이후 최대 규모의 전투였고, 구정 공세가 있기 2달 전에 일어났다.
2. 배경
구정 공세가 일어나기 몇 달 전인 1967년 가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원숭이 해에 있을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면서 남베트남 국경 근처 지대에서 남베트남군과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이어나갔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거리가 멀지 않던 남베트남군 기지 록닌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합동공격으로 5일 만에 점령당했고, 1967년 11월 초 북베트남군 5개 연대와 베트콩 1개 대대로 이루어진 7천 명 이상의 병력은 미군부대가 주둔하던 닥토를 중심으로 한 중부고원지대로 결집했다.
북베트남군이 병력을 결집시키자 당시 베트남 주둔 미군 총 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 모얼랜드도 닥토에 173 공수연대를 비롯한 부대를 보냈다.
3. 시작
1967년 11월 2일, 북베트남군 소속 ‘부홍’ 병장이 귀순하여 북베트남군의 위치와 목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요충지인 닥토가 포함된 공세목표가 확인되자 중부고원을 담당하는 고위 군사고문인 제임스 존슨은 정보에 따라 신속히 부대를 투입했고, 다음날인 3일부터는 선공방침에 따라 제4보병사단 예하 4개 중대 규모의 병력이 월맹군 32연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지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하며 닥토 전투가 시작됐다. 수일간의 수색작전은 초반 몇 일간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나 11월 6일 아침 대규모 벙커군이 발견되면서 전투가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한편 인근 지역에서 월맹군 66연대를 찾아 산을 뒤지던 173공수여단예하 503공수연대 4대대는 11월 7일 823고지에 전진기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823고지는 북베트남군 66연대가 역시 포병 40연대와 함께 진지를 설치한 곳이었다. 결국 이 두 부대는 823고지 인근에서 맞붙었다. 치열한 격전 끝에 주둔 중이던 북베트남군 66연대는 심각한 타격을 입어 캄보디아로 철수를 결정했고, 이미 미군 제4사단과의 전투로 손실이 큰 북베트남군 32보병연대와 함께 캄보디아 접경인 875고지로 이동했다.
4. 875 고지 전투
Hill 875“우리 사령부의 전략은 미군을 유인하여 중부고원 지방에서 섬멸해 버리는 거였습니다.”
참전용사 응우옌 탄 손의 증언
윌리엄 웨스트 모얼랜드가 닥토에 병력을 보내는 것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원하던 것이었다. 북베트남군 제174연대는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미군이 닥토 근처에 있는 ‘875고지’를 차지하러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1967년 11월 19일 일요일 아침 알파, 찰리, 델타 중대는 875고지를 차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 그들이 도착하기 이전 중 포대와 F-100 전투기가 먼저 875 고지에 폭격을 퍼부었다. 폭격이 끝난 뒤, 알파, 찰리 델타 중대는 산 비탈길을 올랐고, 아침 퍼부은 포격으로 쓰러진 나무들이 놓여있는 빈터로 들어섰다. 이는 산 정상에서 270m 남짓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은 참호에서 미군들이 5m 정도 떨어진 거리까지 왔을 때 미군들의 얼굴을 보았고, AK-47을 든 베트콩들은 미군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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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의 공격을 받자 미군들은 아침 당시 폭격으로 쓰러진 나무 뒤로 엄폐할 곳을 찾아다녔다. 그 공격으로 찰리와 델타 중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북베트남 군대가 뒤에서 알파 중대를 기습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으로부터 공격받은 세 개 중대는 사실상 거의 전멸 상태에 놓였다. 전투에 참여한 중대장들을 비롯하여 장교와 사관 대부분이 사망했다. 세 개 중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공터에 모여 최선을 다해 방어 원을 만들어 방어에 나섰다.
이에 미 공군은 폭탄과 네이팜 폭탄을 퍼부으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진지를 폭격했고, 이 과정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뿐만 아니라 수십명의 미군도 사망했다. 이틀 뒤 헬기를 통해 현장에 도착한 멧 해리슨이라는 병사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그곳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병사들은 나무 뒤에 땅을 파고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틀 동안 무더위 속에서 물 없이 견뎌야 했습니다. 거의 모든 병사가 상처를 입었죠. 그리고 주변엔 여기저기 총탄에 맞거나 폭탄에 맞아 사망한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지옥 같았죠.”
PBS 베트남 전쟁 다큐 5화에 나온 멧 해리슨의 인터뷰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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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산비탈에서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1967년 11월 23일 제 173 공수여단의 2개 대대가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한 875 고지의 정상에 도달하면서 닥토 전투는 끝난다. 그러나 그 전날 남은 북베트남 병사들은 고지 반대편으로 내려가서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달아났다.
닥토 전투는 분명 미군이 875 고지를 점령하면서 끝났지만 큰 의미가 없는 미군의 승리였다. 20일 간의 닥토 전투에서 미군은 총 361명이 사망했고 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40대 이상의 미군 헬기가 파괴됐고, 미군의 최신식 항공기 록히드 C-130 허큘리스 두 대도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 107명의 미군은 875 고지 전투에서 사망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20일 간의 전투에서 총 1600명 이상이 전사했다.
6. 참고 자료
- PBS 베트남 전쟁 다큐
- 미군, 닥토 875고지 점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