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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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공화국과 미국을 상대로 싸운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이다.
흔히 '''베트콩'''이라고 하는데, 베트콩은 "베트남 공산주의자(Việt Nam Cộng-sản, 越南共産)"의 '''비하적인 명칭'''이다. 말하자면 "월남 빨갱이" 정도의 의미가 된다. 당연히 비칭이기 때문에 베트콩 스스로는 "해방군(Quân Giải phóng, 軍解放: 꾸언자이퐁)"이라고 자신들을 일컬었다. 베트콩은 스스로는 남베트남의 자생적 조직이라고 주장했으나, 미국과 남베트남은 이들은 북베트남의 지령을 받는 괴뢰 조직이자 하부 조직으로 인식했다.[1]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60년 12월 캄보디아 국경 근처 마을인 탄랍이라는 곳에서 남부 혁명가 집단 대표들이 모여 응오딘지엠 독재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실제로도 해방전선에는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비공산주의자들도 참여하고 있었으나, 북베트남에서 내려오는 지령을 그대로 수행했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산하 조직임은 틀림없었다. 참고로 북베트남군의 정식 명칭은 "베트남 인민군"이었고, 베트콩 군대의 정식 명칭은 "남베트남 해방군"이었다. 현재 베트남 공식 역사서에서는 "남베트남 해방군은 베트남 인민군의 일부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는 베트콩이 북베트남의 산하 조직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민족해방전선의 중추라 할만한 조직과 기원은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의 관할 아래 노동당원들이 주축으로 구성된 하노이 정권 산하 조직이었지만, 이런 상부에서의 관점이 아니라 개개인 구성원들이나 산하 조직원들은 북베트남과 전혀 연고도 없고, 굳이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사람들도 대거 참가했으며[2] , 이들은 대부분 공식적으로는 다른 이런저런 시민운동가 조직이나 학생회, 농민 자치회 등의 간판을 걸어서 활동했다.
당시 베트콩이 내세웠던 강령은 다음과 같다.
게다가 대미 항전과[3] 게릴라 투쟁의 분수령이었던 1960년대 초반에서 테트 공세까지는 해방전선의 지휘체계 자체도 최상부의 직접적으로 하노이에 있는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과 연결이 와닿는 인민혁명당 남베트남 행정위원회[4] 정도나 직접적으로 하노이의 지령을 받지, 혁명위원회 산하의 해방전선 조직 자체는 북베트남 하노이 정부와 맞닿을 접점이 적었으며, 하노이 정권 측에서도 현실적으로 남베트남의 무장투쟁 모두를 총괄적으로 세세하게 지휘하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있어,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독일군의 임무형 지휘체계 같이 전략적 목표만 달성할 수 있으면 그 과정은 현지 조직에게 많은 걸 넘겼기 때문에 적대하는 미국 측에서는 물론이고, 실제로 해방전선 대원들도 1970년대 들어서 하노이 정부가 전면에 나설 때까지는 북베트남 정권을 '우방 세력'으로 인식하지 '지령을 하달 받는' 상하 관계라고는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전후 통일 베트남 당국에서 "우리 산하 세력이었던 거 맞다"라고 인정하기 전까지는 그 관계가 상당히 애매모호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응오딘지엠 정권 타도, 민족민주연합정부의 수립.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경제의 건설.
소작료 경감과 점진적 토지개혁.
민족문화의 건설.
인민의 군대 건설
남녀동권, 민족평등, 재베트남 외인과 재외베트남인의 권리보장
평화적 중립적 외교정책
남북 베트남의 관계정상화와 평화적 통일
세계평화 옹호
전환시대의 논리 p.415
이들은 게릴라와 정규군으로 이루어졌으며, 다수의 구성원들이 남베트남 출신이나, 북베트남 정규군도 파견되어 현지 자생 조직으로 위장 합류해 싸웠다. 통킹만 사건 이후 북베트남과 미국간에 공식적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군의 반격 때문에 베트콩이 궤멸 상태에 이르자, 베트콩 지휘부는 북베트남에서 내려온 이들이 맡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농촌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전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테러를 적절히 배합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맞서 싸웠다.
1969년 8월에는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Chính Phủ Cách Mạng Lâm Thời Cộng Hòa Miền Nam Việt Nam)라는 지하 정부를 세웠고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쿠바, 북한, 알제리 등과 대사급 외교관계까지 맺었다.
결과적으로 1973년 파리 평화회담 휴전을 맺어 휴전을 빌미로 미군의 철수까지 이끌어냈으며, 휴전 당사자는 북베트남, 베트콩(북베트남의 괴뢰조직이지만), 남베트남, 미국의 4자로서 휴전 협상의 한 자리를 당당히 꿰어찼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군했고, 많은 장비들을 남베트남에 물려주고 떠났다. 남베트남군의 공군력은 당시 세계 4위를 자랑했다. 그러나 오일 쇼크 이후 돈에 쪼들리던 남베트남은 1400대에 이르는 작전기를 굴릴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움에 처했다. 게다가 미국 정계는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1974년 8월 닉슨이 사임했고, 뒤를 이은 제럴드 포드는 부통령에서 계승한 대통령이라 취약한 리더십 때문에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의회는 포드의 남베트남 지원안을 계속 부결시켜 버렸다.
그리고 북베트남은 국경충돌을 일으키면서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고, 1975년 3월 시범적인 공세에서 남베트남군이 무력하게 무너지자, 휴전 협정을 파기하고 바로 대공세를 시작했다. 결국 1달의 공세만에 남베트남군의 방어지는 모조리 무너지고 사이공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군에게 포위되었다.
이후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과 베트콩군에게 사이공이 함락되고, 남베트남의 대통령 즈엉반민은 무조건 항복했다.[5] 베트남 공화국은 멸망하고 베트콩이 주관하는 "남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다. 남베트남 공화국은 북베트남의 사실상의 괴뢰정부였다. 주석은 응우옌흐우토(Nguyễn Hữu Thọ, 阮友壽)[6] 이들은 1976년 7월 정식으로 통일하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베트콩은 공식적으로 1977년 해산되었고, 이후 통일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공산당이 주도하는 "베트남 조국전선"[7] 에 참여하고 있다.
2.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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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베트콩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제대로 된 군복도 없이 베트남 농민들의 일상복인 검은 파자마에 정글모 내지는 농라(nón lá)라고 불리는 삿갓, 거기에 맨발에 신은 폐타이어 샌들 차림에 AK-47[8] 소총, SKS 등을 들고 다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게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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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 베트콩은 사진처럼 북베트남 정규군으로부터 피복, 무기 등의 물자나 교육 훈련 등 각종 지원을 받아 정규군에 준하는 차림새를 한 경우도 많았고, 아예 베트콩으로 위장하고 남파된 북베트남 정규군들 같은 경우는 자신들의 군복에서 계급장 등만 제거하고 다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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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지역에서는 캐주얼한 일상복이나 드문드문 정장 차림을 하며 활동한 베트콩들도 존재했다. '사이공식 처형'으로 유명한 사진에서도 오른쪽의 체포된 베트콩은 그저 평범한 일상복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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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의 보급은 호치민 루트를 이용한 보급이나 땅굴을 이용해 충당되었다. 호치민 루트는 첩첩산중이었기 때문에 미군이 이를 정확히 식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그렇기에 미군은 호치민 루트로 의심될 만한 곳이라면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마구잡이로 폭격해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선 미군의 불발탄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베트콩은 북한군이 침투를 위해 파놓은 어설픈 땅굴 수준이 아니라 위 사진 처럼 아예 내부에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할 수 있을 수준의 대규모의 땅굴 네트워크를 파놓았고 마을 곳곳으로 연결되어 있어 미군은 이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거기다가 곳곳에 함정이 설치되어 미군에게 출혈을 강요했다.[9] 땅굴 입구 규모도 작아서 큰 체구의 미군은 출입하기 어려웠는데 그래서 미군은 일부러 외소한 체구를 지닌 자원자들을 선발해 M1911 권총과 플래시를 쥐어주고 땅굴 네트워크를 수색하게 했다. 이들은 땅굴 쥐(Tunnel Rats)로 불렸다.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을 정규 미군을 베트콩 게릴라들이 격퇴한 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을 상대로 빈약한 무장의 베트콩이 '''악바리 근성'''과 '''애국심'''으로 싸워 이겼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는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전투력이 그렇게 높은 집단은 아니었다. 민간인과 평소에 구분이 안 가 색출이 힘들다는 것 정도가 골칫거리였으나, 실제 교전시엔 미군에게 밀려버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심지어는 미군은 고사하고 빈약한 무장과 장비를 지닌 '''남베트남 지방군'''에게 격멸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10] 미군 참전자들도 대개 베트콩은 시원찮았으나 북베트남 정규군들은 무섭게 싸운 편이라고 회고하는 게 대세다.[11] 그리고 게릴라 집단이 세계 최강의 정규군과 대등한 화력을 지니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12][13] COSVN의 전술 지침은 항상 허접한 남베트남 정규군을 집중 공격하여 전선에 구멍을 내고 물자를 탈취하며, 미군 등 화력도 빠방하고 훈련도 강하게 된 타겟을 상대로는 테러, 저격, 사보타쥬 등을 통한 '부드러운 전술'을 강조했지,[14][15] 전면전에 나서는 건 미리 계획해 놓았던 기습 루트에 뻔하게 걸어 들어간 것처럼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빼고는 교전을 피할 것을 지침으로 삼았다.
그러나 미군의 전면적 개입 이전인 1965년 즈음에는 남베트남군[16] 상대로 몇 차례의 전면 공세에 나서기도 했다.빈 지아(Binh Gia) 전투, 동 쏘아이 (Dong Xoai), 바 지아(Ba Gia) 전투가 대표적인데 세 전투 모두 대낮에 남베트남군이 축성한 전략촌이나 군사기지들을 점령한 다음 미군 건쉽과 수송기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정규 보병사단, 정예 레인저, 정예 해병대, 정예 공수부대까지 투입된 마을 탈환 시도를 격파하고 목표 달성 후 유유히 철수했다. 훗날인 1968년 구정 공세 당시 남베트남군 레인저와 해병대가 후에시에 난입한 베트콩을 압도적인 교환비로 물리쳤기에 비교적 고평가되지만 3년 전에는 오히려 베트콩이 남베트남이 보유한 최고의 부대들을 교환비에서도 처참하게 갈아버렸다.
미군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였기에 이는 상식적으로 당연한 지침이었다. 서부전선,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그레나다 침공, 코소보 전쟁, 걸프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리비아 내전, 파나마 침공, 마약과의 전쟁 등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미국은 물량과 첨단무기로 적군을 압도했다.
그리고 그 당시 중국군은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미군은 무인기와 벙커버스터가 거의 활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베트콩에게는 운이 좋았다. 후대에 보코 하람, 이라크[17] , 알샤바브, 알 카에다, 탈레반, ISIL 등 몇몇 반미국가 및 단체들이 우리도 베트콩처럼 할 수 있다며 겁없이 미국과 짱뜨려 하다가 모조리 박살났다(...).[18] 다만 탈레반은 전쟁 초기에 미군과 자국내 반탈레반 연합세력에게 털리긴 했으나 다시 부활해 아프가니스탄의 현 상황과 산악지대가 많은 지리적 요인, 인근 국가인 파키스탄의 비호와 아라비아 반도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의 자금 지원을 고려하면 미국에 의해 박살나기 했지만 권토중래할 가능성이 있고 알 샤바브 역시 소말리아 내전이 지속되는 데다가 소말리아가 활동하기 가장 위험한 지역임을 고려하면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에 의해 근절되고 있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결국 2020년, 미군이 아프가니스칸에서 완전히 철수 하는 것으로 합의 되었다. 비록 오사마 빈 라덴 도 사살했고, 과거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탈레반이 위축 되었으나, ISIL 처럼 세력을 거의 완전히 와해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19]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이 베트남 전쟁 다룬 매체 중에서 국적 불문하고 잘 조명 되지 않은 도시 내 정치, 경제적 공작을 담당했던 도심 게릴라를 심도있게 조명한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3. 전쟁 범죄
남베트남 정부의 관리이거나 공무원 가족, 경찰 가족이나 미군에 협조적인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이 포함됐을 법한) 정규교육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이유만으로 베트남 양민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다수 처단(학살)한 흑역사가 있다. 최대 양민학살 지역인 후에의 경우 2500명에서 최대 6000명이 베트콩의 학살로 사망했다.[20] 후에 전투시기 분명 공산측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었고,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될수 없는 민간인 학살인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학교에 대한 베트콩의 탄압은 가관인데, 남베트남의 교육률이 높아지는 걸 막으려는 의도로 다수의 선생들을 납치하거나 죽이고, 고문했으며 심지어 아이들조차 만행의 타겟이 되어 한 아이는 통학 도중에 본보기로 손가락들을 베트콩에 의해 잘리기도 했다!).[21] 이는 모두 통합국제교원단체가 파견한 진상조사위원회가 밝혀낸 것이다.
한국전쟁당시 지리산 빨치산이 벌였던 군경가족 학살이나 비 협조적인 농민 학살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이러한 베트콩의 일반인 학살에 분개한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을 잡는 즉시 즉결 처형하거나 고문 등 보복을 자행했다.
베트콩은 1960년대 초반(미군 개입 이전이다)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양민을 학살했었다.[22] 베트남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월남전 당시 일부 주월한국군의 잔학 행위를 사과하며 진상조사가 필요할 경우 이에 협조하겠다고 했을 때, 베트남 측이 영 떨떠름해하며 "어차피 우리가 승전국이므로 별로 개의치 않으며, 경제협력 얘기나 하자"고 한 것은 외국군 못지않게 베트콩의 잔학 행위도 상당했기 때문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있다. 만일 과거사에 대한 진상 조사가 이뤄질 경우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한국군에 의한 학살보다 훨씬 대규모로 자행된 베트콩에 의한 자국민 학살이 더 금방 수면위로 떠오르고 거론될 것이 분명하므로 베트남 정부에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지이다. 이런 식으로 현 독재정권의 과거 만행이 자꾸 드러날 경우 달가워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서 정권의 존립 자체에도 위협이 갈 수 있다.
또한, 붙잡은 미군 포로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된 사례에 의하면 '아파치'라는 코드네임이 부여된 여성 저격수는 '''미군 포로를 칼로 잔인하게 회떴다고 하며'''[23] 미군들은 그녀를 생각할 때 마다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결국 카를로스 해스콕의 저격에 의해 사살당했다.
4. 숙청설
이들(베트콩이나 괴뢰 남베트남 공산정부 출신들)이 이후 통일 베트남에서 숙청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근거 없는 루머이다. 일단 구정 공세 이후에는 베트콩 주력은 남베트남인이 아니라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이들이었다. 그 이후 베트콩들은 원래부터 북베트남 출신인데 그들을 숙청할 리가 없었다. 북부출신이 아니더라도 괴뢰정부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각료들은 주로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던 친공산계 명사들이었는데, 위의 응우옌흐우토는 통일 베트남에서 국가주석(1981~1982)까지 지냈고(실권은 없었지만), 부주석도 지내고 1990년대에 사망하는 등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베트콩 정부의 군대는 북에서 내려온 북베트남군 계열과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자생적 민족주의 계열로 나뉘는데, 68년 구정 공세로 베트콩 군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에도 민족주의 계열 부대는 상당한 규모로 존재했었다. 이들 "민족주의" 계열의 군대와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활동가"로 베트콩 정부에 몸 담았던 이들은 실제로 남베트남 패전 전후 숙청되었다. 그런데 저렇게 북에서 남파된 인원들도 순수하게 남베트남 현지와는 상관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힘든 게, 애초에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남북 베트남의 분단까지 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은 호찌민을 비롯한 무수한 혁명가들의 고향이며, 1930년 응에안 소비에트 봉기로 민족 혁명의 성지로 추앙 받았던 베트남 중부의 응에안, 하띤 성 다음으로 사이공 소비에트를 비롯한 남베트남의 산업 도시들이 가장 크고 강했다. 이들 중 다수는 남북베트남이 분단되자 북베트남으로 월북하였다가 60년대 초 북베트남측에서 대남 전쟁 개전 이후 다시 하노이에서 재월남 시킨 경우이다. 즉 원래 뿌리나 출신도 남베트남인데, 50년대~60년대를 북베트남에서 보내다가 전황이 게릴라전에서 정규전으로 변하면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 경우가 다수인지라 "원래 남베트남인들의 자생적 조직이었던 해방전선이 북베트남 정권에게 집어 먹혔다"라는 식으로 서술하는 건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원래 좌익 성향이 강했던 영남 지방 출신의 남로당원들이 한 번 북쪽으로 올라가 정권 내에서 자리를 굳히다가 다시 남파된 경우란 의미다.
남북베트남 사이에 오래된 역사적, 문화적, 기질적 차이가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20세기 들어서 서로를 아예 이질적인 '''다른 나라,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고 '''통일 전쟁'''이 아닌 서로에 대한 분리를 주장했던 주요 정치 세력은 소수민족들 제외하고 하노이측이든, 사이공측이든 베트남 전쟁 기간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 피상적인 군사적 분석을 넘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심도 있는 정치적, 역사적 분석과 이해를 위해서는 이렇게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 중심의 관점 뿐만 아니라 베트남 현지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감안하면 1920년대 대불 독립 운동가들의 세대 교체 시절부터 유기적으로 현지 사정에 맞추어 발전해 온 베트남 민족주의, 사회주의 세력과 이들이 설립한 월맹 정부의 성격이 딱 이렇다 규정 짓기에는 복잡한 게 너무 많다.
민족해방전선에서 수립한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법무장관을 지낸 쯔엉니으탕(Trương Như Tảng) 등 민족해방전선 조직원 중에서 실제로 숙청당한 사람도 있고 즈엉꾸인호아(Dương Quỳnh Hoa)처럼 숙청은 당하지 않았지만 통일 베트남 체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한 사람도 있다.
일부가 숙청되긴 했지만 대다수의 민족해방전선 구성원들은 통일 이후에도 큰 불이익이나 큰 문제를 겪지 않고 통일 베트남에서 살았다. 민족해방전선 말단 회원 대다수는 숙청당하지 않았다. 북부 출신에 비해 통일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옛 민족해방전선의 간부 중에서도 90년대나 심지어 2000년대까지 통일 베트남의 고위 공무원을 지낸 사람들이 있다. 69년부터 76년까지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수반을 지낸 응우옌흐우토(Nguyễn Hữu Thọ)[24] 는 통일 이후에도 92년까지 통일 베트남의 부주석을 지냈다. 같은 정부에서 외무장관을 지낸 응우옌티빈(Nguyễn Thị Bình)도 통일 베트남에서 92년부터 2002년까지 부주석을 지냈다. 이외에도 민족해방전선 간부 중에서 통일 베트남의 고위 공무원을 지낸 사람은 여럿이다. 심지어 베트콩 고위간부이면서 간첩 노릇을 하였던 ' 남베트남 불교도 위기사태'의 주동자 중 한명인 틱티엔하오(Thich Thien Hao)스님은 종교인임에도 통일 베트남에서 숙청은 커녕 공산주의 정권이 유일하게 승인한 ‘베트남불교승가협회’의 부의장을 지내며 이후 1997년에 86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입적했다.
사실이 이런만큼, 76년 베트남 통일 이후 민족해방전선 출신들이 북한의 남조선로동당 출신들처럼 토사구팽식으로 대다수가 숙청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1] 월맹(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점에서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멸칭:베트콩)과 달리, 6.25전쟁 당시의 남로당과 산하 단체는 명목상으로 북한 소속이었지만 실제로 북한 당국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다가 토사구팽 및 숙청을 당했다.[2] 아나키스트, 사회 민주주의자, 사회 보수주의자, 파시스트인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상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 있었다고 보면 된다.[3] 첨언으로 베트남 현지에서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적은 중간에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지만, 둘 다 이어진 하나의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서방과 우리나라에서 자주 사용하는 '베트남 전쟁'보다 '대불항전', '대미항전'으로 일컬는 게 더 일반적이다. 현지 베트남 인민들 입장에서야 사실 소강상태 없는 전시 상황이 1945년 8월 혁명 이후로 1950년대 후반의 5년 정도밖에 안되는 짦은 공백기를 제외하고 주욱 계속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긴 전쟁으로 받아들이는 게 더 자연스럽기도 하다.[4] 서방 측에서는 그냥 남베트남 중앙위원회, 즉 COSVN으로 불린다.[5] 80년대 한국 도덕교과서에는 그가 베트콩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기술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주다가 프랑스 망명을 허가해줬다.[6]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변호사 출신이며, 주로 독립운동가를 변호해서 명성을 얻었다.[7] 통일전선 조직으로 우당(友黨)과는 좀 다른 개념이다.[8] 혹은 중국제 AK 소총인 56식 자동소총일 수 있다.[9] 베트콩은 미군 병사들이 공산주의 깃발을 노획품으로 삼는 것을 간파해 일부러 공산주의 깃발을 설치한 뒤 거기에 부비트랩을 설치해 두어 미군 사상자가 발생하게 했다.[10] 이들은 비록 빈약한 장비와 월급을 받고 있었지만 '''평상시에 고향의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전시에는 자신의 고향과 가족들을 지킬 수 있어''' 전투 의지가 남달랐고 거기다가 자신의 고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특성상 마을에 침투하는 베트콩도 색출할 수 있어서 베트콩 입장에선 가장 큰 위협 중 하나였다.[11] 실제로 케산 전투 당시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죽어나가면서도 악으로 '''미군 기지 바로 근처까지''' 진격해오기도 했다.[12] 애초에 게릴라의 전술적 특징은 시간을 끌고 혼란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것도 지형지물에 익숙해야 하고, 만만치 않은 기량을 요구한다. 때문에 게릴라들은 이런 지형지물을 능숙하게 극복 할 수 있도록 현지인들 위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수차례의 실전경험으로 전투에 능숙해질 경우엔 상대하기 까다롭거나 꽤나 위협적인 존재로 거듭나기도 한다.[13] 베트콩 같은 게릴라들은 북베트남군 처럼 정규군 수준의 화력과 조직력을 가지고 있어서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정면대결은 피하되 적의 약점만을 최대한 파고들기 때문에 까다로운 것이다. (미군과 같은 압도적인 적을 상대 하는데에는 기본적으로 약점은 숨기고 강점은 극대화 하는 전략 전술이 기본이 될 수밖에 없다.) 베트남 전쟁 외에 이런 종류의 게릴라가 활약한 대표적인 예로는 탈레반(그 중에 특히 레드그룹)정도가 있다.[14] 그래서 어떤 베트콩은 볶음밥만 먹으며 땅굴을 파는 기질을 발휘해 미군 레이더 기지를 폭파시키고 도망가기도 했다. 이 에피소드는 다낭 군사박물관에 '''한국어로도''' 친절히 소개되어 있다.[15] 특히 미군 기지에 노무자로 위장한 베트콩들이 잠입해 사보타주나 정보 수집 활동을 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16] 월남군[17] 사담 후세인 한정[18] 특히 ISIL은 미국뿐만 아니라, 러시아까지 적대했다가 처참하게 털렸다.[19] 자세한 내용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조.[20] 히스토리 채널에서 만든 구정 공세 관련 다큐를 보면 일가족 전체가 몰살당할 뻔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나온다.[21] https://gall.dcinside.com/m/war/1310756 [22] 이 내용은 pbs에서 제작한 베트남 전쟁 다큐에서도 균형있게 다룬다.[23] 심지어 포로의 성기까지 자르며 이를 즐겼다고 한다.[24] 베트남 남부 코친차이나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