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드랑 전투
1. 개요
이아드랑 전투는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미군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정규군(이하 월맹군)이 벌인 첫 정규 전투다.
2. 상세
월맹군 B3 전선군 사령부가 플레이미 서쪽에 있는 베트남 공화국 중부 고원지대의 남베트남군 제3군단 지역 격오지 군사캠프를 기습 점령하여, 이에 대한 구조 및 추격섬멸, 소탕 작전인 월미연합 은빛 총검 작전이 실시되었는데, 이아드랑 전투는 은빛 총검 작전의 3단계 중 두 번째 단계였다. 첫 번째 단계(1965년 10월 19일-26일)는 북베트남군 제33연대의 급작스런 공격으로 점령당한 아군 캠프에 대한 남베트남 제3군단 기갑기동부대와 남베트남-미군 연합 특수부대 2개 중대의 구조작전이었고, 두번째 단계(10월 27일-11월 17일)는 미합중국 육군 제1기병사단의 추격 섬멸작전, 그리고 세 번째 단계(11월 18일-26일)는 남베트남 육군 공수여단의 잔존병력 소탕작전이었다.
이 전투의 이름은 플레이미 계곡의 서쪽에 흐르던, 교전이 주로 벌어졌던 드랑 강에서 따왔다. '이아'라는 말이 현지 산악 소수 민족의 말로 강이라는 뜻이므로, 직역하면 드랑 강 전투가 된다. 월맹군의 기습에 대한 구조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자, 남베트남 제3군단은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미군에게 월맹군을 추격 섬멸하도록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미 육군 제1기병사단 3여단[1] , 2여단[2] 이 공중 투입되었다. 전투는 미 공군의 B-52 폭격기와 전투기의 근접항공지원으로 시작되었다.
제1기병사단이 투입되자 월맹군은 강습 1파인 할 무어 육군 기병중령의 1대대에 공격을 집중했고, LZ X-Ray에 착륙한 미 육군 제7기병연대 1대대는 15일 밤 월맹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큰 손실을 봐야했다. 이어 17일에는 기습 공격이 이어졌으며, 월맹군이 2대대를 포위해 버렸다. 월맹군은 전선의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미군을 향해 돌진해왔는데 밀리던 미군은 하다 못해 '''브로큰 애로우를 선포했고 미군의 전폭기들은 피아 구분 없이 무차별적으로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월맹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 과정에서 미군 화기 중대도 오인 폭격을 당해 중대원 대다수가 전사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 기세를 모아 미해병대가 역공을 가했는데 무어 중령까지 '''직접 착검한 채로 전 병력이 돌진했다.''' 당황한 북베트남군은 가용 가능 병력들을 모아 방어에 돌입하려 했지만 오히려 UH-1 건쉽이 날아와 북베트남군의 재수습된 병력들 마저 일망타진해버렸다. 양측 모두 심각한 손실을 입었는데, 미 육군은 250~300여명이 전사하고 1,000~1,700여명의 북베트남 육군 병력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 전과는 오로지 적군의 시신으로만 집계한 결과이므로 공습과 포격 지원으로 훼손되거나 원거리에 있어 수습되지 않은 시신의 숫자를 감안하면 북베트남 육군 사상자는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투의 공로로 무어 중령은 2계급 특진해 준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에 따르면 이아드랑 전투 이후 미군 내의 평가 분석회의에서 중견 장교들은 하나같이 M16 소총을 치켜들며 "이번 승리는 용감한 병사들과 M16 소총이 원동력이었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였지만[3] , 당시에는 M16 소총이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이 휴대했던 AK-47에 비해 성능이 떨어진다는 믿음이 미군 내에 있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구형 자동 소총인 M14 소총을 개인 화기로 휴대했었다고 한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M16의 효용성이 점차 입증되면서 1967년이 되면 미해병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미군 병력들이 M16을 휴대하게 된다. 특히 정글 어딘가에서 갑자기 근거리에서 튀어나와 총을 갈겨대는 베트콩을 상대할 때 자동사격으로 처치할 수 있는데다가 휴대성도 간편하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 이후 미군의 베트남전 작전은 헬리본이 기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베트남의 전장은 정글과 늪, 강이 많아 차량의 기동이 제한되었는데 헬리곱터는 이를 완벽히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던 것. 그래서 미군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 병력들을 포착하면 일단 압도적인 화력으로 타격을 가하면서 밀어내다가 후방에 헬리본으로 병력들이 강습해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일망타진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베트콩들은 이러한 미군의 초현대전 수준의 작전에도 쉽게 섬멸되지 않았고 결국 전쟁 내내 미군을 괴롭혔다.
한편, 북베트남군과 처음으로 직접 맞닥뜨린 무어 중령(앞에서 말했듯이 준장으로 2계급 특진된다.)은 '''북베트남군이 예사롭지 않은 군대라고 평가한다.''' 화력과 장비면에서 미군에 비해 일방적으로 밀리는데도 악착같이 미군을 향해 돌진해오는 북베트남군의 전의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무어 중령의 판단처럼 북베트남군은 오합지졸의 군대가 아니었고 북베트남군을 얕본 미군 지휘관이나 남베트남군 지휘관들은 방심했다가 제대로 당하게 된다.
3. 대중 매체
멜 깁슨이 출연한 영화인 위 워 솔저스가 이 전투를 소재로 하였다. 전반적으로는 실제 이아드랑 전투의 흐름을 그대로 묘사하지만, 극화 과정에서 일부 각색 및 창작한 부분은 있다. 해당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