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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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50년 9월 3일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스코틀랜드군이 맞붙은 전투. 잉글랜드군이 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고, 크롬웰은 이 전투를 발판삼아 자신에게 대항하던 스코틀랜드 정복을 완수한다.
2. 배경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의회는 본래 제1차 잉글랜드 내전 당시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에 대항하는 동맹이었다. 그러나 왕당파가 패배하고 찰스 1세가 포로 신세가 된 뒤, 양측은 종교를 둘러싼 격렬한 대립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군부를 장악한 올리버 크롬웰과 그의 추종자들은 청교도 정신에 입각하여 억압적인 통제 정책을 펼쳤다. 이에 위협을 느낀 스코틀랜드 장로회는 1648년 왕당파 잔존 세력과 연합하여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레스턴 전투에서 크롬웰의 신모범군에게 완패하고 쫓겨났다. 이후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잉글랜드 의회가 스코틀랜드까지 청교도 정신을 강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스코틀랜드 장로회는 이에 맞서 찰스 1세의 후계자인 찰스 2세를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1650년 6월 23일 찰스 2세는 스코틀랜드에 도착했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그를 국왕으로 옹립했다.
스코틀랜드가 찰스 2세를 국왕으로 추대하자, 잉글랜드에서 한창 독재 정권의 기반을 닦고 있던 올리버 크롬웰은 스코틀랜드 정벌을 단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원정에 반대한 토마스 페어팩스 경을 육군 사령관 직에서 해임시키고 자신이 육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으며 존 램버트 중장을 기병대 지휘관에, 조지 몽크를 보병대 지휘관으로 삼았다. 크롬웰은 요크, 더럼, 뉴캐슬을 거쳐 북쪽으로 진군하다가 버윅 온트위드에 병력을 배치했다. 스코틀랜드로 전령을 보내 선전포고문을 적에게 전달하게 한 뒤 1650년 7월 22일 국경을 넘어 스코틀랜드를 전격 침공했다. 또한 잉글랜드 해군이 리차드 데인 제독의 지휘하에 해안가를 따라 진군하며 크롬웰의 군대에게 보급 물자를 지원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의회는 1650년 6월 25일 약 1만 명의 보병과 3천 명의 기병을 새로 편성했으며 7월 3일에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세금을 부과했다. 레븐 백작 알렉산더 레슬리는 스코틀랜드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수많은 전쟁 경험을 쌓은 베테랑 군인이었지만 70세 전후의 나이였기 때문에 자신이 고령의 나이인데다 병약하다는 이유로 총사령관직을 맡는 걸 거부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의회는 그만이 잉글랜드군을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해 총사령관직을 맡아줄 것을 강력히 권고했고, 결국 그는 받아들였다. 다만 육군 작전에 대한 전반적인 지휘는 아들 데이비드 레슬리가 맡았고, 레븐 백작은 전략 지휘만을 맡았다. 이때 스코틀랜드 의회는 워리스턴의 아치발드 존스턴 경이 이끄는 위원회를 구성해 장군들을 감독하게 했다. 이 위원회에 소속된 위원들은 안식일에 어떠한 훈련이나 군사 작전도 행해질 수 없다고 주장했고 종교적 신념이 결여된 이들을 군대에서 축출했다. 또한 그들은 전략과 전술에 관한 군사적인 결정에도 간섭했다. 이후 양측은 1650년 8월부터 던바 일대에서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
3.1. 스코틀랜드군
- 총사령관: 레븐 백작 알렉산더 레슬리
- 부사령관: 데이비드 레슬리
- 병력: 보병 16,500명, 기병 5,500명, 대포 9문
3.2. 잉글랜드군
- 총사령관: 올리버 크롬웰
- 기병대 지휘관: 존 램버트
- 보병대 지휘관: 조지 몽크
- 병력 구성: 기병대 7개 연대, 보병대 9개 연대, 용기병 6개 중대
- 총병력: 15,000명
4. 전투 경과
4.1. 던바 전역
잉글랜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한 레븐 백작은 시간을 끌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와 리스 사이의 험준한 지형에 튼튼한 진지를 설치하고 스코틀랜드군이 그곳에서 난공불락의 방어 태세를 취하게 했다. 레븐 백작은 전투력이 막강한 적과 전면 대결을 하는 건 바보같은 짓이라고 판단하고 농성을 벌이면서 보급 조건이 나쁜 적을 고사시키려 했다. 이에 그는 크롬웰의 군대가 현지 조달을 하지 못하도록 에든버러와 국경 사이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가축들을 없애버리라고 명령했다.
한편, 크롬웰은 해군의 보급을 받기 위해서는 던바 항구를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곳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7월 29일 현장에 도착한 크롬웰은 적의 방어선이 너무 강력해서 전면 공격은 무의미한 희생만 양산할 거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이에 그는 영국 군함들이 리스를 포격하게 한 뒤 적을 개활지로 끌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도발했다. 그러나 레븐 경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7월 30일부터 폭우가 내려 보급로 상태가 엉망이 되어버리자 잉글랜드군은 곤경에 처했다. 결국 크롬웰은 철수를 결정했다. 잉글랜드군이 철수하자,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에든버러에서 출격해 적의 후위대를 추격했다. 잉글랜드군은 적의 추격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존 램버트 중장은 전투 중 팔과 몸통이 적의 창에게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고 쓰러져 적의 포로가 될 뻔하다가 기병대가 제때에 달려와 구출하면서 간신히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 기병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격해 적의 후위를 공략했고, 잉글랜드군은 추운 날씨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질병으로 죽거나 아사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크롬웰은 8월 초에 스코틀랜드 의회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믿는 프로테스탄트 교리와 스코틀랜드 장로회의 교리의 차이는 크지 않다며 찰스 2세가 과연 경건한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왕인지 생각해보라고 요청했다. 많은 의원들은 크롬웰의 서신에 흔들렸고, 찰스 2세가 에든버러 주변의 군선을 시찰했을 때 병사들에게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은 것을 보고 경계심을 품었다. .
한편, 크롬웰은 레븐 백작을 전투에 끌어들이기 위한 2번째 시도를 하기로 결심했고 8월 11일 던바에서 진군했다. 그는 에든버러 남쪽을 훑고 지나가서 에든버러 서쪽의 퀸스퍼리 항구에 있는 영국 보급함대와 다시 연락을 취할 계획이었다. 그는 이 기동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주요 요충지인 스털링과 스코틀랜드 서부와의 도로를 차단해 스코틀랜드군이 어쩔 수 없이 전면전을 선택하게 만들려 했다. 8월 13일, 잉글랜드구은 에든버러 남쪽의 브레이드힐스를 점령했다. 캠프를 세운 크롬웰은 찰스 2세를 불신하는 스코틀랜드 장로들과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찰스 2세는 8월 16일 장로회 교리를 보장해줄 것임을 맹세하는 선언서에 서명했고, 이 선언은 장로회 성직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몇몇 독실한 스코틀랜드 장로들은 여전히 찰스의 성실성을 의심했지만, 스코틀랜드 의회는 끝내 찰스 2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이후 크롬웰은 8월 하반기에 퀸스퍼리 항구로 향했으나 레븐 백작이 길목을 차단해버린 후 주요 요충지에 강력한 진지를 세운 뒤 농성하는 바람에 더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잉글랜드군에서 전염병이 나돌자, 크롬웰은 8월 28일 철수길에 올랐다. 잉글랜드군이 철수하는 걸 목격한 스코틀랜드군은 즉각 추격에 나섰다. 레슬리 중장이 크롬웰의 움직임을 미행하고 유리한 공격 기회를 엿보기 위해 육군과 함께 진군하는 동안, 레븐백작은 에딘버러에 남아 있었다. 스코틀랜드 기병대가 영국 후위대를 괴롭히는 동안 보병여단은 주변을 돌며 던바에서 버윅으로 가는 도로를 봉쇄하여 크롬웰의 육로로 탈출로를 차단하고 영국으로부터 증원군이 도착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이윽고 던바에 가까스로 도착한 크롬웰이 병력을 모아보니 남은 이는 보병 7,500명, 기병 3,500명 뿐이었다. 즉, 크롬웰은 철수 과정에서 4,000명을 잃었는데, 이는 전체 병력의 26%에 달하는 수치였다.
4.2. 스코틀랜드군, 전면전을 선택하다
던바로 돌아온 잉글랜드군은 각종 질병에 고통받고 있었고 북해와 스코틀랜드군 사이에서 사실상 포위되었다. 스코틀랜드군은 던바 인근의 둔힐의 고지대에 굳건히 자리잡고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제 크롬웰로서는 이곳에서 굶어죽던가 과감하게 뚫고 나가려 했다가 궤멸당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스코틀랜드군이 갑자기 개활지로 내려와 회전을 벌이려 했다. 그들이 왜 갑자기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종교적 열기에 빠진 장교들이 높은 지대를 버리고 정면승부를 벌여 영광스런 승리를 거두자고 주장했고, 이를 받아들인 레븐 백작이 회전을 벌이기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레븐 백작같이 노련한 지휘관이 정말 그랬겠냐며, 당시 스코틀랜드군도 잉글랜드군처럼 추위와 장대비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고 중포가 부족해 언덕 아래의 잉글랜드군이 뚫고 나가는 걸 저지할 방법이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언덕을 내려와 잉글랜드군을 막아야 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스코틀랜드군은 전면전을 선택했고, 양군은 던바의 평원 지대에서 격돌한다.
4.3. 던바 전투
스코틀랜드군은 9월 2일 아침과 오후 동안 언덕에서 내려와 브록스번 호수 인근에 군대를 배치했다. 그들의 최좌익에는 브록스번 호수가 위치했고, 우익에는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중앙에 보병대를 두고 좌익에 일부 기병대를 뒀으며 우익에 대부분의 기병대를 편성했다. 한편 크롬웰은 9월 2일 늦은 오후 군대를 브록스번 북쪽에 배치한 뒤 적의 진형을 살펴봤다. 그리고는 브록스번과 던힐의 경사지 사이에 적의 라인이 제대로 배치되어 있지 않아 중앙과 좌측면의 적군이 기동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크롬웰은 그날 밤 전쟁 평의회를 연 뒤 장교들에게 스코틀랜드 우익을 돌파한 뒤 적의 중앙 측면을 요격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적의 좌익은 신속한 이동이 불가능하므로 우익의 위기를 재빨리 구원할 수 없다고 장담했다.
9월 3일 아침, 크롬웰은 군대를 평원 지대에 배치했다. 그는 우익엔 일부 기병대를 배치해 적의 좌익 기병대를 견제하게 한 뒤, 우익엔 그가 신뢰하는 조지 램버트 소장이 지휘하는 기병대와 크롬웰 본인이 지휘하는 철기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중앙에는 보병대를 배치했으며, 포병대는 근처 언덕에 올라서 스코틀랜드군 좌익을 포격하게 했다. 또한 용기병대는 포병대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는 임무를 맡았다. 그렇게 군대 배치가 완료된 잉글랜드군은 그날 새벽 4시에 전투를 개시했다. 잉글랜드 선봉대는 플릿우드 중장의 지휘 아래 스코틀랜드의 우익 측면으로 진격했다. 뒤이어 조지 몽크가 지휘하는 보병대가 적의 중앙을 공격했고 포병대는 적의 우익을 포격했다.
당시 많은 스코틀랜드 고위 장교들은 밤중에 폭우로부터 대피하기 위해 부대를 떠나 있었다. 그들은 비가 그칠 때까지 부대로 복귀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군은 적의 공세에 맞서 신속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 결과 램버트가 이끄는 기병대가 스코틀랜드의 우익에 위치한 몽고메리의 제1선 기병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램버트의 부대가 재편성하는 동안, 스트라칸 대령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제2선 기병대가 역습을 가해 적 기병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편 몽크는 보병의 선봉을 이끌고 스코틀랜드 보병대의 맨 우측에 위치한 제임스 롬스든 경의 보병 여단을 공격했다. 이 부대는 약 2천 명이었는데 대부분 신병들이었다. 결국 그들은 몽크의 공격에 얼마 안가 무너져버렸고, 롬스든 자신은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몽크는 곧 제임스 캠벨경이 지휘하는 로어스 여단의 반격으로 주춤했다.
크롬웰은 몽크의 부대가 주춤하는 것을 보고 프라이드 대령의 보병 여단에게 몽크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프라이드 대령의 여단은 우측으로 진군하여 몽크를 지원하고 로어스 여단을 파이크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편, 램버트 중장은 2열 기병대에 배속된 릴번 대령의 기병 여단을 파견해 스트라칸 대령의 스코틀랜드 기병대를 정면으로 돌격하게 했다. 여기에 크롬웰이 직접 지휘하는 철기대가 스트라칸 대령의 기병대 우측면을 공격했다. 결국 스트라칸 대령이 이끄는 기병대는 전면과 측면의 이중 공격에 직면한 끝에 패주하고 말았다. 크롬웰과 램버트는 패주하는 적 기병대를 추격하지 않고 기병대를 재집결시킨 뒤 적 보병대의 측면을 공격했다. 이 공세는 그때까지 잘 버티고 있던 스코틀랜드 보병대에게 치명타를 안겼고, 그들은 곧 패주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군은 전투 개시 8시간 만에 적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5. 결과
크롬웰은 이 전투에서 3천명의 스코틀랜드인이 전사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스코틀랜드군 상급 장교 제임스 발포어경은 800, 또는 9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얼마나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스코틀랜드인의 숫자가 5천 명 가량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남쪽으로 더럼까지 끌려갔다가 많은 이들이 행군 도중에 죽거나 더럼 성당에서 투옥되는 기간 동안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뉴잉글랜드나 바베이도스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영국군의 손실은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렇듯 큰 승리를 거둔 크롬웰은 본국으로 돌아가 전력을 재정비한 뒤 1651년 9월 3일 우스터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결정적으로 섬멸하고 스코틀랜드 정복을 완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