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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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잉글랜드의 왕. 1630년 찰스 1세와 앙리 4세의 딸 프랑스의 공주 앙리에타 마리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장남이었다. 동생으로는 제임스 2세, 여동생으로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 공 빌렘 2세의 아내가 되는 메리 헨리에타와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아내가 되는 헨리에타 앤이 있다.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 잉글랜드 국내가 위험해지자 어머니, 동생과 함께 1646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1648년에는 네덜란드로 가서 매제인 빌럼 2세의 지원을 받아 함대를 출항시켰으나 별다른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도로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1649년 아버지 찰스 1세가 의회군에 붙잡혀서 처형당하자 네덜란드 의회의 압력으로 프랑스로 옮겨갔다.
2. 통치
1649년 2월 5일, 혁명에 반대하던 스코틀랜드가 찰스 2세를 왕으로 추대하자 6월 스코틀랜드에 상륙, 1651년 1월 1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받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올리버 크롬웰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던바 전투, 우스터 전투에서 연이어 참패하자 다시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크롬웰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호국경이 된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잉글랜드 내부의 반크롬웰파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해 크롬웰의 잉글랜드 연방 공화정 정부가 몰락하여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왕위에 올랐다. 크롬웰 독재 정권에 질릴대로 질린 잉글랜드의 백성들이 찰스 2세가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말을 타고 들어오자 그를 보고 남녀노소 모두 환호하며 교회의 종까지 댕댕 쳐대고 "국왕 폐하 만세,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라고 소리치며 그의 귀국을 환호했다.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는 1661년 찰스 1세 처형 12주년을 맞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올리버 크롬웰을 부관참시했다. 머리를 참수하고 몸통을 네 조각내어 시가지에 걸어놓아 온갖 수치를 당하게 했다. 크롬웰은 사망 당시 왕실이나 귀족 또는 명사들이 별세했을 때 쓰인 장례 예법대로 장기와 뇌를 꺼내고 약품에 절여 방부처리 되어 관에 봉안되었다고 하는데[3] 이 방부처리가 쓸데없이 잘 되어 있어 이후 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효수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데 30번이나 내리쳐야 했다고 한다. 뒤이어 크롬웰의 추종자들 중 찰스 1세의 사형을 주도한 자 26명에게 줄줄이 교수형을 내렸다. 그래도 역할이 미미했거나 당, 여론에 휩쓸려서 찰스 1세의 사형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찬성한 정치인들의 경우 처벌하지 않았거나 사형이 아닌 징역형 등 낮은 수준의 처벌을 내렸는데, 새 왕이 당연히 아버지의 원수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벌벌 떨던 사람들 상당수는 숨통이 트였고 찰스 2세의 지지자가 되었다.
한편 왕이 된 찰스 2세는 의회와 대립하여 청교도 혁명을 초래하여 목이 날아가버린 전왕이자 아버지 찰스 1세와 달리 귀족층과 의회와 협의를 하며 통치를 했다. 그러나 당시 잉글랜드 의회의 위세가 크롬웰의 독재 정치를 겪으면서 크게 실추되어 있었기에 찰스 2세 역시 의회를 압박하거나 해산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버지이자 부왕이던 찰스 1세와 달리 의회 세력들을 완전히 적대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왕실-의회와의 협력 체계를 유지했다. 1679년에 의회는 자유에 관한 중요한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인신 보호 영장'이 그것이었다. 한국어로 번역되기 전 원제는 Habeas Corpus Act이며, '몸을 가지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따온 것. 판사가 고소당했음을 명시하기 전에 죄수들이 영장을 구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재판이 있기 전에는 죄수를 무기한으로 억류할 수 없게 하는 법안이었는데, 이로 인해 영국의 군주들은 단순히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간단히 감옥에 넣거나 사형시키는 등의 처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재위중 두 차례의 영란전쟁을 벌였으나 기습한 2차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었던 3차까지 모두 대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정책에서는 크롬웰 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 아버지이자 전 국왕인 찰스 1세와는 다르게 귀족과 협력하며 안정된 국정 운영을 하는 등 잉글랜드 백성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수 없다.
또한 표면상으로는 잉글랜드 성공회 신자였으나 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가톨릭 신앙을 몰래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기 직전에 가톨릭 신부[4] 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죽기를 원해서 몰래 신부가 궁정에 들어와서 임종을 지켰다. 당시 비밀이었던 왕의 진짜 신앙을 알고 있었던 프랑스 출신의 애첩[5] 이 제임스 2세를 통해 중개했다고 한다.
3. 기타
사적으로는 대단한 호색한이어서 보통은 한두 명 두는 로얄 미스트리스[6] 를 14명이나 둬서 궁중에서 정부들끼리 신경전이 벌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수많은 사생아를 두어 '국민의 아버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크롬웰이 펼친 청교도적인 엄숙함에 짓눌려 있던 당시 잉글랜드 국민들은 오히려 이러한 호색적인 행각을 한편으로는 반겼다고 한다(...). 찰스 2세 본인도 꽤 유쾌한 성격에 근본적으로는 선량한 성격이라 인기는 있었다.
찰스 2세의 정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클리블랜드 공작부인 바바라 팔머인데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현장을 왕에게 몇 번이나 들키고도 무사했다.[7] 심지어 그 와중에 태어난 아이를 왕이 자식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화이트 홀에서 아이의 머리를 박살내 죽이겠다고 협박해 찰스 2세의 인정과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총애를 받으면서도 돈을 받고 몸을 팔겠다고 나서는 등[8] 제멋대로라 신하들은 품위 있는 마담 케루알 쪽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다만 마담 케루알은 프랑스 귀족 출신이라 국민들에게는 나라 팔아먹는 거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고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국민들은 서민 출신에 성격이 솔직하고 화통한 넬 그윈을 더 좋아했다고.
포르투갈 브라간사 왕조의 공주 카타리나와[9] 결혼하여 왕비로 맞이했으나 왕비 카타리나와는 자식이 없었고[10] , 서자[11] 만 스무 명 넘게 아주 많았다. 사생아 아들들 중 6명은 공작위를 받았고 그 중 4명의 가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공작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식들은 모두 서자인터라 잉글랜드 왕실의 엄격한 왕위 계승법으로 인해 결코 왕세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유언에 따른 후계자는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였고 찰스 2세 사후 제임스 2세로 왕위를 물려받는다. 그러나 찰스 2세의 사생아 중 장남인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은 이에 불만을 품고는 왕위를 요구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고 처형되기도 했다. 찰스 2세는 천수를 누리고 1685년 5월 29일,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카타리나가 잉글랜드에 올 때 시동생되는 제임스 2세가 맞이하러 나갔는데 이때 그녀가 "차 한 잔 주시겠어요?"라는 말을 건넸다. 당시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의 부로 왕실이 부유했고 사치품인 차를 넉넉하게 마실 수 있었던 것을 보여준 사례. 한편 당시 잉글랜드는 차 문화가 널리 퍼지기 전이었고 또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아 왕립학회를 왕명으로 공인하였으며, 이후에도 계속 후원했다. 연금술에 관심이 많아 이 때문에 사망했다는 이야기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수은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아이작 뉴턴과 동시대 사람이다.
제임스는 가톨릭교도였는데, 토리당은 그를 지지했고 장로파였던 휘그당은 반대했는데 사실 휘그당이 생기게 된 계기가 바로 제임스 2세를 반대하기 위해 모인 일이었다. 전자는 영국 보수당의, 후자는 영국 자유민주당의 조상 격 되는 당파들이다.
재임 기간 중에는 1678년 가톨릭 교도 음모 날조 사건도 있었다. 전직 예수회 사제였던 타이터스 오츠(Titus Oates)란 자는 가톨릭 교도들이 찰스 2세를 암살한 뒤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를 즉위시키고 이후 장로파 등 개신교 신자들을 학살한다는 음모를 알아냈다고 주장했다. 이를 당시에는 '교황의 음모(Popish Plot)'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매카시즘 수준의 광풍이 불어서 곳곳에서 가톨릭 교도에 대한 린치가 발생했고, 제임스 본인도 3년간 스코틀랜드로 쫒겨나[12]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후 오츠의 주장은 날조되었음이 밝혀졌고, 오츠는 내란 선동 및 허위사실유포죄로 거액의 벌금과 종신형이 내려졌다.
[1] Catarina de Bragança,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참고로 캐서린은 영어 발음이다.[2] 모두 사생아이다.[3] 실제로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많이 행해진 장례법이라 한다.[4] 존 허들스턴(John Huddleston, 1608~1698)이라는 신부로 우스터 전투(1651)의 패배 이후 의회파에게 쫓기던 찰스 2세를 도와주었다.[5] 포츠머스 여공작 루이즈 드 케루알. 이 사람의 아들인 찰스 레녹스는 초대 리치먼드 공작이다.[6] 표현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당시 유럽 궁정 사회에서는 왕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애첩 한두 명은 거느리는 것이 관례였다. 가부장적인 전근대 사회에서는 남성은 당연히 호색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러지 않는 남성은 성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폄하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에서도 애첩 하나 없는 왕은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해서 설령 애정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한 명은 두는 경우가 많았다. 루이 16세 같은 경우 애첩 없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 충실했는데, 도리어 성불구라는 악성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왕이 애첩을 두지 않은 원인이라 하여 비난을 샀다(...).[7] 그중에는 훗날 말버러 공작이 되는 존 처칠도 있었다.[8] 실제로는 하녀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뜯어낸 하룻밤 화대가 1만 파운드였는데 그 돈으로 존 처칠을 스폰해 줬다고.... 그리고는 정말로 자기랑 자고 싶으면 한 번 더 1만 파운드를 내라는 말에 이번에는 상대가 거절했다고 한다.[9] 주앙 4세의 딸로 결혼하면서 잉글랜드가 포르투갈에 무역 혜택을 주는 조건으로 주앙 4세가 결혼을 승낙했다.[10] 이는 카타리나가 찰스 2세의 아이를 유산한 이후에 몸이 크게 상해서 더이상 임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잉글랜드의 신하들이 찰스 2세에게 카타리나를 폐위하고 새 왕비를 맞이하라고 간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왕비를 신뢰하는터라 신하들의 요구를 모두 거부했고 카타리나는 왕의 총애를 받지못해도 찰스 2세가 죽을 때까지 왕비 자리를 유지할수 있었다. 찰스 2세 사후에도 카타리나는 잉글랜드에서 왕족으로 대우받았으나 종교 문제로 윌리엄 3세와의 관계가 좋지 못하여 푸대접을 받자 견디지 못하고 모국인 포르투갈로 돌아가야 했다. 카타리나는 포르투갈에서 왕족으로 대우받으며 살다가 1705년에 리스본의 베모스타 궁전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11] 대표적으로 클리블랜드 공작부인 바바라 팔머 사이에서 낳은 그래프턴 공작 헨리 피츠로이(헨리 8세의 서자와 동명이인)가 있는데 그의 후손으로는 다이애나 스펜서가 있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장남이자 현 영국 왕세손인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가 왕위에 오르면 이후로는 영국 왕실이 찰스 2세의 혈통도 이어받게 되겠지만, 애초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왕실(왕위 요구자 가문 포함)들은 귀천상혼제나 살리카법은 포기할지언정 사생아에게 왕위 계승권이 없는 것만큼은 계속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에,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이후의 영국 국왕들에겐 찰스 2세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 자체가 결코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12] 이 때 존 처칠(윈스턴 처칠의 먼 조상)도 제임스를 따라 스코틀랜드로 갔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제임스를 보필한 공을 인정받아 남작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존 처칠은 명예 혁명 때 윌리엄 3세&메리를 지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