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왕묘
1. 개요
서울 동관왕묘(서울 東關王廟) 또는 동묘(東廟)는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 즉 관왕를 모신 관왕묘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줄임말을 써 '동묘'[1] 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역사
2.1. 건축
헌부가 아뢰기를, "동관왕묘(東關王廟)를 건립하는 일은 중국의 분부에서 나왔으니, 이는 부득이한 거조였습니다. 역사를 기해년125) 8월에 시작하여 지금 20개월이 되었는데, 한 달 동안의 역군(役軍)이 2백여 명에 달합니다. 그 동안에 약간명이 미처 도착하지 않은 적도 있지만 매월의 역군을 합하면 그 숫자가 과연 얼마이겠습니까. 목재와 철물 등 소용되는 잡물(雜物)을 분정(分定)한 숫자가 한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지은 간수가 많지 않고 역사가 한창이어서 아직도 준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군들이 철수한 후에도 백성들이 쉬지 못하니, 소동과 원망이 이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전후 감독관이 군인들을 부리고 재료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외람되고 추잡한 일이 많았는데 항상 중국 장수를 핑계하면서 일부러 지연시켜 세월만 끌고 있으므로 공사가 끝날 기일이 전혀 없는 채 사람들의 말만 많으니, 뜻 있는 사람들이 분통해 한 지 오래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힘이 탕갈된 때에 군사 하나를 내고 돌 하나, 나무 하나를 운반하는 것이 모두 백성들의 고혈에서 나오는 것인데, 관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에만 힘을 쓰고 공(公)은 돌보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속이고 백성을 해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 직임에서 체직되었다 하여 벌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뒷사람들을 경계하고 장래를 경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금년 이후에 맡은 사람은 날짜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경자년 이전의 낭청(郞廳)과 감역관(監役官)은 파직을 명하소서. 도청 당상(都廳堂上) 역시 검칙을 잘못한 과실이 없지 않으니, 아울러 추고를 명하소서. 시전(市廛)의 백성들이 난후에 겨우 모였는데 첫째로는 중국 장수들의 가렴주구에 곤란을 겪었고 두 번째로는 국휼(國恤)의 수요에 응하느라 곤란을 겪었는데, 심지어는 저포(苧布)를 바치고 일체 공무역(公貿易)의 일까지 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재력이 탕갈되어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 평시서(平市署)의 관원은 사리상 무마하여 너그럽게 돌보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는데도 감히 각색(各色) 시전에서 매달 명목없는 쌀을 거두어 사적으로 쓰기 때문에 원성이 자자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장무관(掌務官) 직장(直長) 송희성(宋希聖)은 파직시키고 영(令) 윤기정(尹起禎)은 추고하소서.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 양성해(梁成海)는 인물이 용렬하고 글을 몰라 양곡을 관리하는 직임에 맞지 않으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동관왕묘의 일은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당 파직해야 할 인원은 서계(書啓)하고 나머지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38권, 선조 34년 6월 19일 을유 2번째기사
그리고 대한제국 땐 고종이 관왕을 관제(關帝)로 숭상하여 관제묘라고도 하였다
3. 구조와 크기
벽은 돌과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9,315m²로 되어 있다.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정(丁)' 자 모양과 '일(一)'자 모양이 합쳐진 '공(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