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

 





'''명나라의 추존 황제
청나라의 추존 황제
촉한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미염공(美髥公)
關羽
관우
'''
'''시호'''
'''촉한'''
장목후 (壯繆侯)
'''명'''
협천호국충의대제 (協天護國忠義大帝)
'''청'''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
(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
'''민간
신앙'''

삼계복마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
(三界伏魔大帝神位 願天尊關聖帝君)[1]
'''작위'''
한수정후 (漢壽亭侯)
'''최종직위'''
전장군(前將軍) 겸 가절월(假節鉞) 겸 동독형주사(董督荊州事)
'''성씨'''
(關)
'''이름'''
(羽)
''''''
운장 (雲長)[2]
'''생몰 기간'''
?[3] ~ 219년
'''고향'''
하동군 해현[4]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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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유비)
별부사마(別部司馬)
행하비태수사(行下邳太守事)
양양태수(襄陽太守) 겸 탕구장군(盪寇將軍)
양양태수(襄陽太守) 겸 동독형주사(董督荊州事) 겸 탕구장군(盪寇將軍)
전장군(前將軍) 겸 가절월(假節鉞) 겸 동독형주사(董督荊州事)

후한
편장군(偏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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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2. 서주에서
2.2.1. 만인지적 = 기병대장?
2.4. 삼고초려부터 남군공방전까지
2.5. 청니 대치부터 유비 입촉까지
2.7.1. 번성 공방전 초기의 승리
2.7.2. 위나라의 반격
2.7.3. 최후
2.8. 사후
2.8.1. 시호 논란
3. 연의
4. 가족 관계
5. 평가
5.1. 위인
5.2. 통솔
5.2.1. 전적
5.2.2. 전술적 평가
5.2.3. 당대의 평
5.2.4. 평가
5.3. 무력
5.4. 지력
5.5. 정치
5.6. 충의
5.6.1. 유비와 관우와의 관계
5.7. 성품
5.7.1. 손권 관련 옹호
5.7.2. 미방 관련 옹호
6. 말말말
7. 인기
7.1. 중국
7.2. 한국
7.2.1. 역사
7.2.2. 현황
7.3. 일본
8. 미디어 믹스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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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유비 휘하의 무장. 는 운장(雲長), 본래 자는 장생(長生). 하동군 해현 사람.
삼국지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지금도 역대 왕조를 비롯하여 민간에서도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무(武)와 충(忠), 의리(義理)와 재물(財物)의 화신(化神)으로 인지되며 오늘날까지도 신으로서 숭앙을 받는다. 말 그대로 '''사람으로 태어나 신이 된 남자'''. 그의 명성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남다른 무용, 충의와 의리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그의 장례는 일개 적군의 무장임에도 제후의 예로서 삼국시대의 주역인 조조, 손권에 의해 치러졌다. 또한 역대 후대 왕조의 제왕들이 공자의 문묘와 함께 그의 무덤인 무묘에 그의 신위를 세워 제사를 지내고 기렸으며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될 정도로 깊은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세간에는 삼계해마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三界解魔大帝神位 願天尊關聖帝君), 통칭 관성제군(關聖帝君)로 추존되었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정사에 서술된 관우의 초창기 행적은 매우 부실한 편이다. 일설에는 출사를 하기 이전에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을 했었다고 한다.
정사 관우전에 따르면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고 한다.[5]
유비가 향리에서 사람의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는 거병 이전 탁군에서 무리를 형성해 협객으로 지냈는데, 동네에서 알고 지내며 형, 동생하는 사이이던 장비와 간옹이야 유비와 쉽게 어울리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어떤 연유로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관우는 본인의 자존심도 강하며, 타향 출신의 낯선 이에 대해 경계하는 일이 많은 고대에 유비 무리와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자연스럽게 유비의 거병동지가 된 점을 보아 금방 의기투합할만큼 죽이 잘 맞았던 걸로 보인다.
황건적의 난 평정 후 횡포를 부리던 독우를 폭행한 혐의로 관직을 버린 후 달아나는 유비를 장비와 함께 따라간다. 이후 대장군 하진이 모병에 응하는 자는 모두 사면해주겠다는 공표를 하자 함께 모병에 자원한 후 공을 세워 유비가 평원상이 된다. 이에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정사 장비전에 따르면 젊어서부터 관우와 장비는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상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고 한다.
관우의 초창기 군사적인 기록 역시 부실하긴 마찬가지이다. 조조가 그를 얻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였고[6], 유비가 기반없이 방랑하던 시절과 동탁토벌전 그리고 공손찬 휘하 마지막으로 서주에 있었을 때부터 주변 군벌들로부터 유비 휘하의 장수들에 대한 높은 평가를 들었던 만큼 관우에게는 무척이나 화려한 전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촉한의 개국공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들의 초창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확인이 불가하다.

주상의 좌우를 지키며, 전쟁터로 번개처럼 달려나가 격투하여 주상의 곤란함을 구하고 대업을 도왔다.

이는 계한보신찬의 찬에서 어느 정도 이유를 짐작 할 수 있는데 관우는 언제나 열세에 놓여 있으면서도 우위에 선 적을 상대로 선전했고, 때로는 심지어 그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하기도 했을 공산이 있다. 유비는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오며 실로 무수한 패배를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대신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었던 건 그 패배가 치명적인 것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우의 능력이 여기서 빛을 발한 게 아닐까. 소수 패잔병을 이끌어 기세등등한 적을 막아내고 때로는 반격하며, 어떻게든 병사들을 다시 그러모아 기적같이 부활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관우의 명성이 쌓였다는 것이다.
또 사서상으로 몇 가지 짐작가는 사항들이 있다. 유비의 초창기 행적을 따라가면 관우는 다음과 같은 공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선주전, 화양국지)
  • 추정의 군에 합류해 황건적의 난 진압.
  • 하진이 보낸 관구의와 함께 하비의 적을 물리치는 데 일조.
  • 유비가 공손찬에게 의탁한 후, 원소와 대적할 때 일조.
이런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면 동탁 토벌전에서 조조군이 서영군에게 궤멸당했을 때 소수의 병사들만 조조 휘하에 남았는데, 서영이 하루종일 싸워서 있는 힘껏 싸운 잔존 조조군을 끝내 절멸시키지 못하고 산조를 공격하기 어려우리라 여겨 군사를 물린 행적이 있다. 이때 조조군 휘하에는 유비 일행이 들어가서 종군하고 있었는데, 유비 일파는 끝까지 여기서 살아남았고 이후 공손찬에게 달아나 유비공손찬의 별부사마를 거쳐 평원상이 되었다. 또 공손찬군에서도 유비 일행이 수차례 공을 세운 것이 확인되며, 유비가 원술과 싸울 때에 장비는 남았으니 관우는 유비를 따라 원술과 싸웠을 가능성도 있다. 이때 이기고 짐을 되풀이 했다고 하니 관우도 종군했다면 승리도 했을 것이고 패배도 했을것이다. 또,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했다가 다시 소패성으로 돌아가 흩어진 병사를 모으고 있을 때, 여포군의 명장장료, 고순이 유비군을 공격하여 유비군이 3월부터 9월까지 반년간 소수의 병력으로 버틴 행적이 있다.
당시 유비 휘하에 있던 장수는 관우, 장비와 더불어 간옹이 있었고, 공손찬유비에게 증원으로 보냈던 부장 조운, 그리고 전예가 있었다. 여기서 전예는 노모를 모시기 위해 나갔으며 조운은 본격적으로 유비 휘하가 된 시기에 대해 해석이 갈리지만 대체적으로는 유비가 예주, 허도, 서주에 있을땐 유비 측 기록에서 조운의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없었다고 보는 쪽이 많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유비, 관우, 장비 삼인방이 이렇게 각지를 돌아다니는 상황에서도 인상 깊은 활약을 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산시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관우는 본래 고우[7]였으며 폭리를 탐한 소금 상인을 죽여 관리에 의해 쫓겨나 유주로 달아났다고 한다.
  • 관우가 어떤 마을에서 숨어있던 가운데 성문을 지키던 보초병들에게 들킬 위험에 처했다.
    • 그러자 어떤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서는 관우에게 옆에 있는 연못에서 세수를 하라고 권했다. 관우가 노인의 권고에 응했더니 그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그러자 어떤 할머니가 갑자기 관우의 얼굴에 흰 천을 씌우더니 이를 냅다 두들겼다(!) 관우는 코피가 터져 그 피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이때 경비병들이 관우의 얼굴을 보더니 "이 사람은 우리가 찾는 인물이 아니네~"라고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어 관우라는 이름을 자칭했다.
  • 관우가 어느 도성의 관문을 지나가야 할 때였다. 그때 관문의 경비병들은 위의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고우라는 사람을 찾기 위해 검문하는 사람마다 일일이 이름을 묻고 있었는데. 경비병들이 관우의 체격을 보고 의심하여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때 관우는 급한 김에 자신이 지나려고 하는 관문을 보고 "성은 관(關)이오."라고 대답했다. 이후 시간을 끌던 가운데 관문 위를 날던 새에서 깃털이 떨어지기에 "이름은 우(羽)요."라고 둘러댔다. 그가 하늘을 보자 긴 구름이 둥둥 떠다니기에 "자는 운장(雲長)이오."라고 대답했다.
관우가 고향을 떠난 뒤 호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중조산에 올라 약초를 캐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호씨는 마을에서 이름난 명의가 되었고, 장성한 두 아들이 고향을 떠나 관우와 재회할 때도 호씨는 중조산에 남았다.
산시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당시 소금의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소금은 주요 수입원이자 세금원이었기 때문에, 염호는 마을 제일의 재산이었다. 탐관오리의 횡포를 막고 소금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결과 의리가 중요했고, 이러한 환경이 관우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 19세의 관우가 악덕 지주를 죽이자 관리들은 본보기로 삼기 위해 관씨 성을 가진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관씨 성 사람들은 살기위해 하나 둘 마을을 떠났지만 힘든 피난길을 가기에 관우의 부모는 너무 연로했다. 결국 아들에게 짐이 될까 두려운 노부부는 집 앞마당에 있던 우물에 몸을 던졌다. 이후 관우 사당이 조성되어 사람들의 관우를 향한 마음은 그의 부모에게까지 닿았고, 그 우물이 있던 자리에는 탑이 세워져서 현존하고 있다.
송락의 균량우필에 관우 할아버지의 묘비에 대한 기문인 관후조묘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한다.

강희제 17년(1678년)에 관우의 고향 해주 상평촌의 선비 우창(于昌)이란 사람이 탑묘(塔廟)에서 글을 읽었는데 그 묘는 관후(관우)가 살던 옛집이었다. 그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관후가 비석을 바꿔 세우라(易碑)라고 쓴 커다란 글자 2개를 주었다. 놀라서 깨어보니 우물을 파단 사람이 커다란 벽돌을 주워 깨뜨렸는데 벽돌 위에 글자가 있었다. 우창이 급히 주워 모아 판독하니 바로 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양대의 이름과 자, 생몰년의 간지(干支)가 대충 씌어 있었기에 산을 두루 헤매어 무덤을 찾아냈다. 그래서 급히 해주 태수 왕주단(王朱旦)에게 알리자 주단이 관후의 조부 묘비기를 지었는데, 기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후(관우)의 조부는 석반공(石磐公)으로 이름은 심(審), 자는 문지(問之)이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2년(90년) 경인생(庚寅生)이고 해주 상평촌 보지리(寶池里)에 살았다. 공은 충목(沖穆, 온화하고 씩씩함)하고 도(道)를 좋아하였다. 《주역(周易)》과 《춘추(春秋)》로 아들을 가르쳤다. 환제(桓帝) 영수(永壽) 3년 정유(157년)에 죽으니 향년은 68세이다. 아들의 이름은 의(毅), 자는 도원(道遠)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상복을 벗고 환제 연희(延熹) 3년 경자(160년) 6월 24일에 후(侯, 관우)를 낳았다.[8]

후는 커서 호씨(胡氏)에게 장가들고 영제(靈帝) 광화(光和) 원년 무오(178년) 5월 13일에 아들 관평을 낳았다.[9]


2.2. 서주에서


초기기록이나 계한보신찬 등에서 나오듯 유비를 따라 기세가 호랑이같이 장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던 관우와 장비는 어느새 주변으로부터 만인지적의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유비는 서주를 여포에게 빼앗기고 조조에 의탁해 예주목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정욱전에 보면 정욱으로 나온다.)이 유비는 영웅이므로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곽가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곽가는 유비를 도모하면 현명한 이를 해쳤다 할 것이므로 죽이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뒤 이은 곽가전 부자에 따르면 곽가는 유비 일행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말한다. "유비는 웅재(雄才)가 있고 뭇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그를 위하여 사력을 다합니다. 저 곽가가 보건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며 그가 꾀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길 ‘하루에 적을 놓아주었다가 수세(數世)에 걸쳐 우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의당 일찍이 조치하셔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배송지는 위서와 부자가 다르다 하였는데 아마도 곽가가 유비를 몇번 응대하여 생각이 바뀐 것일 수 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 일찍부터 관우와 장비는 만인지적으로 불리었다.
이후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소패로 돌아가 여포의 장수 장료, 고순과의 전쟁을 열세인 상황에서 반년쯤 진행하다가 조조의 도움을 받아 서주에서 여포를 잡아 죽일 수 있었다. 관우도 이 전쟁에서 이들을 상대로 싸웠는데 이때 일화로 명제기 주석 헌제전, 관우전 주석 촉기&위씨춘추에 두씨 일화가 있다. 여포의 휘하 장수 진의록이 여포의 사자로 원술에게 갔을 때, 한나라 종실의 여자를 배필로 얻었다. 진의록의 전처 두씨는 하비에 남았다. 조조가 유비와 함께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하면서 관우도 종군했다. 관우가 조조에게 여쭈길, 여포가 진의록을 시켜 구원을 청했다며 그의 처를 취하여 아내로 맞겠다고 하니 조조가 이를 허락했다. 여포가 포위되었을 때, 관우는 두씨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조조에게 여러 차례 청하자, 조조는 두씨가 얼마나 미인인지 관심이 생겼다. 여포가 막 격파되려 할 때 또 여러 번 청하자 조조는 그녀가 남다른 미색이리라 의심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맞아들여 확인했다. 여포 토벌 후, 두씨가 미인임을 알게 된 조조는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녀를 머물게 하니 관우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화양국지의 기록에서는 관우가 두씨를 청하면서 자기 처가 자식이 없다고 덧붙인다. 즉 당시 관우는 아내가 있으면서 자식을 얻으려고 두씨를 원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화양국지 기록은 여포가 포위된 곳이 복양이고 여포가 진의록을 보내 구원을 요청한 사람도 장양이라고 잘못 적었고 다른 기록에서는 다 아내로 원한다고 적어 배송지가 아예 인용하지 않았다. 이해 대해 삼국지집해 관우전에서 청나라 학자 반미(潘眉)가 '화양국지에선 관우가 처가 자식이 없다고 하는 게 다르다'라고 언급한 것이 나오나 이는 위에 나온 관우조묘호기와 모순되는데 거기에는 관평은 178년생이므로 이미 관우에겐 자식이 있었던 게 된다. 애시당초 배송지도 주석을 추가하면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집어넣지 않은 듯하다.[10][11]
촉기에 따르면 당초 유비가 허도에 있을 때 조조와 함께 사냥한 적이 있는데, 사냥 중에 무리가 흩어지자 관우는 유비에게 조조를 죽이도록 권했으나 유비가 따르지 않았다. 이때 유비동승과 함께 헌제의 밀조를 받아 조조를 암살하려 하고 있었는데 관우의 발언은 이 계획이 배경이 되었던 것 같다. 이후 원술을 토벌하러 동쪽으로 떠난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갔다. 200년, 조조가 동쪽을 치자 유비는 대패해 처자와 관우도 놔둔채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한편 유비의 주력이 격파되고 관우는 하비에 고립되어 있었는데 조조는 이전부터 관우를 매우 인상깊게 보았는지 곧 하비를 쳐서 그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12]
한편으로는 원래는 관우보다는 장비를 최우선적 포섭 대상으로 여겼다가 실패하자 차선책으로 관우를 골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관우를 사로잡아 편장군에 올린 관도대전 무렵부터야 조조가 관우에게 콩깍지가 씌인 건 맞지만 기본적으로 높으신 분들과 사이가 안 좋은 관우에 대해서는 첫인상이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장비는 높으신 분들에게 예의를 갖췄다고 하니 하후연의 조카딸 하후씨까지 시집보내 인척 삼으려고 했을 것이나 결과는 장비의 먹튀였으니 유비에게 보복하려면 나도 유비에게서 뭔가 먹튀를 할 것이 필요한데 마침 유비가 장비와 더불어 최측근으로 대한 관우가 홀로 남겨졌다는 걸 알자 눈길을 돌렸다고 하면 정황은 맞게 된다.
물론 조조도 첫인상은 안 좋았을진 모르지만, 사실은 그를 높게 보았기 때문에 지극히 대우했을 가능성도 높다. 관우전에 따르면 조조는 당초부터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다고 하고, 관도대전 이전 관우를 사로잡자마자 바로 편장군으로 삼았으며 실제로 언제나 원래 주군에게 돌아갈 작정을 하고 있는걸 눈치챘는데도 지극정성으로 예우했다.
당장 조조의 오자양장인 장악우장서만 봐도 장료의 경우 항복했을땐 중랑장으로 삼았고 관도대전에서 여러차례 공을 세운 후에야 비장군에 올랐다, 서황관도대전에서 문추를 깨뜨린 후에야 편장군이 되었고, 오랫동안 조조를 섬긴 우금 역시 교위직에 머물다가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한 후에야 편장군이 되었다. 역시 조조를 오래 섬기면서 교위직에 올랐다가 관도대전 후에야 장군이 된 건 악진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항복하자마자 편장군이 된 케이스가 장합인데 장합은 관도대전 당시 아군이었던 원소군을 공격해 원소군을 붕괴시키고 총사령관 원소를 행방불명으로 만든 어마어마한 공로를 세우고 항복한 것이다.
그런데 관우는 싸우다 사로 잡히자마자 편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예우의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유비에게 배신감이 들어서라고 해도 방금전까지 적대하던 장수를 싸워서 사로잡고 이만한 벼슬을 내린 것은 관우에 대해서 높게 평가하지 않고서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우에 대한 예우는 조조의 유비에 대한 복잡한 심경과 관우에 대해 높이 본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2.1. 만인지적 = 기병대장?


유비는 제외하고 관우와 장비만인지적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로는 이들이 유비의 마궁수(기병대장)였기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보병 중심의 청주병을 운용한 조조 입장에선 오환 기병을 이끌고 조조와 맞싸운 유비는 껄끄러운 존재였고 유비의 기병대장으로서 양익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것이 바로 이 만인지적 칭호를 받게 만든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유비는 오랜기간 강력한 기병을 보유한 공손찬 밑에서 싸워온 전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기병 전술을 습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공손찬 밑에서 조조와 싸웠고 서주로 올 때도 천여기의 기병을 가지고 남하해 왔다. 그렇다면 관우와 장비의 초기 커리어에서 이들이 기병대장으로서 빼어난 활약을 하여 조조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것이 초창기 그들이 만인지적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라고 보는 설이 있다.[13]
물론 어디까지나 유비의 초창기 커리어에 제한적으로 적용해 볼 수 있는 가설이다. 우선 '관우와 장비의 활용에 있어서 기병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양익에 국한하지 않고 기병의 활용처를 폭넓게 해석해서 분견대로서의 활용, 양익을 둘 경우의 전기 함기 유기로서의 역할 부여 등 다양성을 넣어서 해석해도 무리가 없지 않는가 하는 부분도 있고 더 넓게 보아 양익에 둘 수 있다면 기병에 한정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조조군 외에 다른 진영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전부 관장을 높게 평가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사유의 범위를 제시할 수는 있다. 즉, 관우와 장비는 기병뿐만 아니라 보병 역시 잘 부렸을 거라는 것이다.
일단 보병기병의 비율은 몇 가지 요소가 나눠지긴 하는데 말의 수급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그 외의 요소들을 살펴보자면 첫 번째로 육성과 관리(유지비를 포함하여)가 쉽지 않은 기병을 활용할 전장인가? 하는 부분이 있다. 서고동저인 중국의 지형을 고려해볼 때 보병 대비 기병의 비율이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은 지역별로 기병을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다름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이 설명은 '만인지적'이 최초 언급 유포되던 시점까지다. 그 이후부터는 평은 평대로 날았을거고 사람은 또 다른 사정이 있었겠을 터. 서주로 끌고 간 군마가 상하면 보충이 안 될 환경이니 사람보다 말이 픽픽 죽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전 중국을 떠돌아 다니는 유비군에서 항상 기병 비율이 일정 이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마디로 커리어 내내 기병의 비율이 분명 적었으리라 추측되는 상황에서도 관우와 장비는 만인지적으로 불렸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관장을 만인지적이라고 칭한 곽가가 이 평가를 내린 시점은 조조의 2차 서주침공 후 한참 지나서 조조의 협천자 이후 허도에 도읍하고 곽가가 순욱의 추천을 받아 조조의 휘하에 들어온 196년 9월 경 이후이다.
또 하나 관우와 장비는 유비가 평원상으로 있을 무렵부터 별부사마로 임명하여 부곡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으므로(先主為平原相, 以羽, 飛為別部司馬, 分統部曲), 공손찬이 유비를 별부사마로 임명하여 전해와 함께 원소를 막게 한 것처럼(瓚表為別部司馬, 使與青州刺史田楷以拒冀州牧袁紹.) 유비가 자신에게 관우와 장비를 온존히 종속시켜 부장처럼 활용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별부사마는 그 병력의 많고 적음을 떠나 별영에 두는 관직이므로(其別營領屬爲別部司馬, 其兵多少各隨時宜 - 후한서 백관지) 관우와 장비의 경우 그 나름의 지휘권이 보장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분견대라는 의미다.
별동대(분견대)는 작전 수행을 위해 부대를 나눠 운영하는 형태지만 양익은 큰 틀에서는 주공(主攻)과 조공(助攻)에 있어서 조공의 역할을 수행할 때 표현되는 형태인지라 다르게 말하자면 본대를 돕는 군대다. 이곳에서 활약한 관우와 장비가 만인지적이란 표현을 얻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가 되는가? 기병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그 역할을 집중해서 관우와 장비를 이해할 때 그들이 별부사마로서 부여받은 지위와 함께 고려하면 기병의 운영에 대한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양익지휘에 있어서 큰 공을 세웠을 수도 있고 따로 떨어진 적을 요격하는 요격부대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14]
또 삼군 체제하에 양익의 운영은 기병보다는 보병에 더 적합한 부분이 있다. 기병의 활용은 대체로 축구에서 좌우에 윙 포워드로 배치된 플레이어가 수비수들을 해집으며 그들의 수비 진형을 교란시키듯 짜여진 진영을 흐트러트려 보다 쉽게 공격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주요 임무다. 다만 별동대로서 기병을 운영할 경우 꼭 양익일 필요는 없고, 양익으로 기병을 운영할 경우(포위를 제외한 경우에 한해서) 기병의 기동력을 적극적으로 살려 교란 작전에 집중하진 않는다는 것.
어쨌거나 만인지적이라는 평가는 항우본기에서 언급된 '書足以記名姓而已. 劍一人敵, 不足學, 學萬人敵.'라고 하여, 병법에 대응되는 비유다. 용맹스러움에 보다 방점이 찍혀 있는 관우와 장비만인지적에 대한 칭호에는 분명 그들의 군사 운용에 대한 칭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정말 기병만으로 그런 칭호를 들었다면 기병을 잘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고 실제로 굵직한 실적도 올렸던 여포 또한 만인지적이라 불렸겠지만 그런 기록은 없다.[15] 또 만년의 관우는 수군을 잘 다루기도 했는데 이는 관우가 기병만이 아니라 여러 방식의 전투에 능숙한 지휘관이었음을 뜻한다.
조조가 서주를 친지 20여년이 지나 유비익주로 들어갔을때 조정에 초빙된 선비 부간의 평에서도 '劉備寬仁有度,能得人死力。諸葛亮達治知變,正而有謀,而為之相;張飛、關羽勇而有義,皆萬人之敵,而為之將:此三人者,皆人傑也' 이라 하여 유비에게 관인유도(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다), 제갈량에게 달치지변(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안다), 정이유모(바르면서도 모략이 있다), 이위지상(재상으로 삼을 만하다), 그리고 관우와 장비에게 여전히 '만인지적'이라고 한 부분은 이와 같은 맥락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는 곽가의 평에 있어서 유비와 관우 장비를 비유하는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부간의 평과 곽가의 평을 살펴볼 때 유비에게 만인지적의 칭호가 가지 않은 것은 유비에게 기대하는 혹은 유비를 평가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곽가유비가 웅재가 있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얻는다고 하였고 부간은 유비가 관인유도하여 사람을 얻는 데 사력을 다한다고 하였다. 관우와 장비를 만인지적을 말한 곽가와 부간 모두 유비를 평하는 기준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 이에 반하여 관우와 장비를 호신이라 평가한 진수의 평까지 아울러서 볼 때, '''관우와 장비는 장수이고 장수로서 요구되는 용맹함이나 의리나 군사부림 등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2.3. 관도대전


관우는 조조 휘하에 있을 때 장료, 서황 등과 친했는데 처음에 조조는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다고 생각해 장료에게 의중을 묻게 했다.

경이 시험 삼아 그의 뜻을 물어보시오.

그 뒤 장료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조공(조조)께서 후히 대우 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 장군(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16]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니 조조가 이를 의롭게 여겼다.
부자에 따르면 장료는 조조에게 고하려니 조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웠고, 고하지 않으려니 주군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므로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공(조조)은 군부(君夫)이고 관우는 형제로다!

결국 조조에게 이를 고했다. 조조가 말했다.

주인을 섬김에 그 근본을 잃지 않았으니 천하의 의사(義士)로다. 언제 떠날 것 같소?

장료가 말했다.

관우가 공의 은혜를 입었으니, 필시 공을 세워 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입니다.

관우는 관도대전에서 선봉장의 역할을 맡는다. 무제기에 따르면 200년 2월, 곽도, 순우경, 안량이 동군태수 유연을 백마에서 공격했으며 원소 자신은 군을 이끌고 여양(黎陽)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려 했다. 조조는 어떠한 군사적 조치도 취하지 못하다가 2개월 후에야 백마 포위망 공격에 나선다.[17] 순유전에 따르면 순유의 견해를 받아들인 조조는 백마를 포기하고 회군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가 연진에서 황하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노리는 척했다. 순유는 치중대를 이끌고 황하를 돌아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원소가 군사를 나누어 연진으로 출격시키자 조조경기병을 파견하여 백마를 습격하고 안량을 죽였다.
무제기에 따르면 순유는 지금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으므로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백마를 기습해 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공격하면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을거라고 했다. 조조가 이끄는 군사가 10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안량은 크게 놀랐으며 군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조조장료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한 마디로 이 기록은 개전이 기습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기록이지 관우가 안량한테 기습을 건게 아니다. 오히려 이 기록에 따르면 안량은 놀랐기는 했지만 정상적으로 군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관우전에 따르면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18]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들 중 관우를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조가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19] 즉, 정사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관우는 안량의 위치를 멀리서 정확히 포착하고 돌격했고 안량 주위에 그를 호위하고 있던 많은 장수들과 군사를 뚫어내며 안량을 찔러 여유롭게 수급까지 챙겨 다시 수많은 병력을 뚫고 돌아온 것이며 따라서 난전중에 어쩌다 마주친게 아니다.
백마전투에서 관우의 공적이 결코 작지 않다. 그때 관우는 '조조군' 에 소속되어 있었고 당연히 기록도 조조측에서 집필했을 것이다. 개개인의 공적과 그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열전에 주로 거론된되고, 이는 기전체의 상식이다.

위서 무제기

...그러자 공은 군을 이끌고 급히 진군하여 백마로 나아갔다. 10여 리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지 않았을 때 안량이 크게 놀라 (군을 이끌고)와서 크게 싸웠다. 장료, 관우를 선봉에 세워 이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 백성을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옮겼다.

총사령관인 조조입장에서야 전체 전투의 진행이 중요하지, 휘하장수의 개별 공적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위서 원소전

원소는 군사를 여양으로 나가게 했고 안량을 보내 백마에 있는 유연을 공격했다.

...조조는 유연을 구하기 위해 안량과 싸워 그를 격파시키고 안량을 죽였다.

마찬가지로 상대 측 총사령관인 원소 역시 그런 개인 공적을 기록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 개별 공적이 중요해지는 참전 지휘관&참모들 기록을 보자.

위서 순유전

...백마에서 유연을 구했고 순유는 계책을 내어 안량을 참수했다.

이게 전부다. 이 공적으로 포상을 받지도 않았다.

위서 서황전

태조를 수행해 안량을 격파하고...

끝이다. 역시 포상이나 공 같은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위서 장료전

(기록 없음)

무제기에서는 선봉으로 나섰다던 장료가 자신의 본전에선 정작 관련 기록은 전무. 세운 공적은 당연히 없다.
그럼, 관우는?

촉서 관우전

...조공은 장료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수급을 베어 돌아오니, 원소의 제장들 중 당해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공이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로 봉했다.

정사에 몇 안 되는 일기토, 그것도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 상장의 목을 배어온 것으로는 유일무이한 기록인데, 관우가 적진 한복판에 있다가 귀환하니, 수많은 원소의 장수들 가운데 누구 하나도 당해낼 수 있는 이가 없어, 마침내 (두달간 지속된) 백마의 대한 포위를 풀었다. 관우는 무사히 돌아왔으며 이에 조조가 표를 황제에게 올려 한수정후에 봉할 정도로 압도적인 무공을 보여준다.[20]
안량은 이미지는 안 좋아도 원소 휘하의 맹장이고 경험도 있으며 용맹하고 사서에서 원소명장이라 칭할 정도로 실력은 있는 장수였다. 게다가 백마전투 당시 관우를 당해내지 못한 장수에는 안량은 혼자 보내기에 부적합하다는 저수의 진언 때문에 그의 부족한 면을 보완해주기 위해서인지 같이 선봉으로 파견된 곽도순우경도 포함되어 있다. 즉, 당시 전장에는 안량 말고도 백마 포위망을 지킬 수 있는 안량과 같은 위치의 장군이 두명이나 있었는데도 관우를 당해낼 수가 없어 포위가 풀렸다. 곽도야 뭐 그렇다 치고(...) 순우경후한의 중앙 정예군 서원팔교위 출신에 오소 전투 당시 조조가 직접 이끄는 군대조차도 뒤에서 접근하는 기병을 아예 무시하고 오로지 순우경에게만 집중해서,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이겼을 정도로 만만한 장수가 아니었다. 그런 장수가 인솔하는 군대조차 관우를 당해낼 이가 없었으니, 당시 관우의 활약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또 한수정후로 봉해진 것은 조조가 한 황실에(이땐 아직 명목상으론 후한이니까) 표를 올린 것이며, 당연히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 이 전투로 관직이 올라간 장수는 관우가 유일무이하다. 기록을 아무리 뒤져봐도 백마전투 승리의 공은 거의 관우가 독점하고 있다.
관우가 안량을 죽이게 되자 조조는 관우가 큰 공로를 세워 필시 떠날 것임을 알고 포상을 더욱 무겁게 베풀었다. 관우는 하사받은 것을 모두 봉해 놓고 작별을 고하는 서신을 올린 후 원소군에 있던 유비에게로 달아났다. 좌우(左右)에서 이를 추격하려 하자 조조가 말했다.

그는 각기 자신의 주인을 위한 것이니 뒤쫓지 말라.

배송지가 이를 논평하길 "조공은 관우가 머물지 않을 것을 알고도 마음으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떠나는 관우를 추격하지 않아 그의 의(義)가 이루어지게 했다. 스스로 왕패의 도량(王覇之度)을 품지 않고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실로 조공의 훌륭한 행동이다."라며 관우의 의와 조조의 도량을 칭찬하였다.
사실 여기서 관우가 유비에게 버림받은 만큼[21] 관우가 다른 주군을 찾았어도 그렇게 욕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관우는 한날 한시에 죽을 약조를 했다면서 끝내 옛 주군을 찾아서 다시 길을 떠난다. 조조는 관우에게 은상과 벼슬을 무겁게 베풀었으나 관우는 단순히 옛 주군을 찾아 떠난 것뿐만 아니라 지금 아낌을 주고 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갚고 그가 주는 보물과 포상을 모두 거부하고 떠난다. 만약 관우가 두씨 일로 조조에게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관우는 굳이 그렇게 하고 떠났다. 애시당초 관우는 조조에게 받은 은혜를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안량 참살과 백마포위 해제라는 큰 공으로 갚았다. 조조에게 앙심이 있었다면 목숨을 걸고 은혜를 갚으려 하진 않았을 터이다. 배송지가 굳이 촉기등을 인용해서 두씨 일화를 소개 했음에도 조조와 관우의 관계를 고금의 아름다운 상례라고 한 것도 바로 이 점을 파악하고 말한 듯하다. 물론 관우가 조조를 원망하는지야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조조를 끝까지 섬기지 않은 건 유비와의 신의가 주요 원인이지만, 그렇다고 두씨의 건이 조조에게 완전히 귀순하지 않는 관우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기도 힘들다. 두씨라고 하는 절세미인이 아깝고 어떻고를 떠나서 사람간의 신의를 중요시 여기는 관우 성격상 '''직접 확약을 얻고 여러 번 다시 확인까지 했던 약속을 쉽게 어기는 일'''은 조조라고 하는 인물에 대한 큰 실망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해당 건과 관련해 개인적인 원한은 어떨지 모르지만 관우에게 조조라고 하는 인물의 평가를 크게 깎아먹는 작용을 했을 것이라 추측하기는 쉽다.

2.4. 삼고초려부터 남군공방전까지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와 재회한 관우는 유비를 따라 유표에게로 나아갔다. 조조를 견제하려는 의도한 유표에 의해 유비가 신야에 배치되고, 박망파 전투 등으로 꾸준히 조조를 견제하는 나날을 보낸다. 이후 서서의 추천에 따라 유비가 제갈량과의 삼고초려 이후 그를 영입하고 좌장군부의 업무를 총괄하는 군사장군 관직을 주거나 관우, 장비, 조운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갈량과도 같이 잠이 들 만큼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장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

이에 관우, 장비가 불평을 멈추었다.[22]
208년, 형주의 지배자인 유표가 죽고 조조와 친분이 있는 채모를 비롯한 채씨 일족이 유종을 후계자로 추대한 후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순식간에 형주를 삼킨다. 갑작스럽게 조조의 칼날을 가까이에서 접하게 될 상황에 놓은 유비는 강릉을 차지하여 조조에게 농성하려고 번성으로부터 장차 남쪽으로 가 장강을 건너려 하며, 관우에게는 수백 척의 배를 주고 강을 통해 이동하여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 선주전에 따르면 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여만에 이르고 치중(輜重, 짐수레)이 수천 량(兩)으로 하루에 10여 리밖에 가지 못했고, 별도로 관우를 파견해 배 수백 척에 타게 하여, 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조조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병대를 직접 인솔해 추격하여 당양 장판에 이르자 유비는 큰 피해를 입고 간신히 도주해 한진으로 비스듬히 나아가다 때마침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구에 도착했다.
이렇게 관우가 처음으로 수군을 운용한 시점을 사서는 장판 퇴각전으로 기록한다. 10만의 형주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퇴각 속도가 느려지자, 유비는 배 수백 척을 따로 편성해 정예 병력과 피난민 일부를 싣고 군사 거점이었던 강릉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 선단의 책임자가 바로 관우였다. 즉, 장판 퇴각전은 어느 시점부턴 육로의 유비 본대, 수로의 관우 분대가 하나의 도착지를 향해 도망하는 2개의 국면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후 상상을 초월한 조조군의 추격 속도 때문에 유비 본인부터가 처자를 버리고 빤스런했고, 핵심 장수진이었던 장비, 조운은 제각기 흩어져 후방을 맡거나 유비가 버린 처자를 구하러 역주행하는 등, 전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강릉으로 향한다는 초기 목표는 철저히 분쇄되고, 유비는 간신히 요인들만 추슬러 강릉과도 제법 떨어져 있는 나루터 '한진'으로 퇴각해야했다.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인데, 이처럼 전황이 예측불허로 흘러갔음에도, 수로에서 강릉을 향하던 관우는 유비가 그를 필요로 하던 매우 정확한 시점에 한진에 도착했고, 생존한 유비와 무리들을 무사히 선박에 태워 피난 작전에 성공적인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제 시각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유비군이 고립무원의 나루터에서 어떤 최후를 맞았을지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장판 퇴각전을 성공으로 이끈 1등 공신은 장비도, 조운도 아닌 관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관우가 형남 평정 이후의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봉작을 수여받은 것은 이 당시의 공로가 컸다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제아무리 서로 연락을 취했다한들, 전화는 물론 선박용 수신기조차 없던 그 시절, 퇴각전이라는 불리한 조건과 더불어 초기 목표가 긴급 수정되는 돌발 상황에서 육로와 수로의 보조를 맞추며 아군의 무사 퇴각에 성공한 역량. 이것이 사서에 기록된 관우의 첫 번째 수군 운용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 이후 관우는 커리어 후반기의 거의 모든 전투에서 수군을 대동하게 된다.
촉기에 따르면 이때 하구(夏口)에 있으며 강가를 전전함에 이르자 관우가 분개하며 말했다.

지난날 사냥 중에 만약 저 관우의 말을 따랐다면 가히 오늘의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23]

유비가 말했다.

그때는 또한 국가를 위해 그를 아꼈을 뿐이다. 만약 천도(天道)가 보정된다면 이것이 복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느냐!

적벽대전 당시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비는 번구에 주둔하며 주유를 혼자 만나게 되었는데 주유는 자신의 일이 바쁘다며 유비가 자기네 진영으로 알아서 오라고 통보해버린다. 이에 유비는 관우와 장비에게 동맹으로서 가봐야 동맹의 뜻이 맞는다고 말하고 주유의 진형으로 떠났다. 아마도 이 둘에게 이런 대접에 납득이 필요했다는 간접증거일 것이다. 주유에게 겨우 3만 명밖에 없다는 얘기를 듣고 실망한 유비는 이후 주유의 태도에 심히 부끄러움과 기쁨을 느꼈다. 강표전에선 여기에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의 계책으로 삼았다는 말을 집어넣었으나 손성은 유비가 이미 도주했는데 훗날의 계책을 품을 마음이 없을 것이라며 이가 오인들이 아름답게 꾸미는 말이라고 하였는데 배송지는 손성의 이 말을 덧붙였다. 자치통감 역시 유비가 주유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과 관망했다는 내용은 제외하였다. 산양공재기 등에는 이후 유비가 조조의 군세를 격파하면서 진군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관우 역시 유비 휘하에서 참전했을 것이다.
이후 선주전을 보면 유비군과 주유군은 조조를 뭍으로 이어가며 추격하였고 마침내 조인이 지키는 남군을 포위하였다. 이를 남군 공방전이라고 하는데 이통전에 따르면 유비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놓았다. 조인이 도주하면 그냥 유비군과 주유군은 남군을 접수하면 그만이니 굳이 조인의 퇴각로를 끊어놓을 목적은 아니었을 테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조인의 구원군을 막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관우가 거느린 병력이 얼마였는지 나오지 않지만 오서 주유전에서 주유가 유비의 요청을 받아 1천 명을 거느린 장비와 교환해 유비에게 2천 명을 빌려줬다는 언급을 보면 관우도 장비와 비슷하거나 많더라도 몇 천 정도만 거느렸을 가능성이 높다. 관우를 상대한 서황, 만총, 악진과 문빙이 각각 거느렸던 병사가 구체적으로 안 나왔지만 관우보다 적은 군세였을 리 없고, 서로 연계해서 관우를 상대했을 것이다.
이는 다른 위나라 장수들의 전에 보인다. 서황전, 문빙전, 악진전 등 각각의 전에 따르면 서황은 또한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쳤다.[여기서] 문빙은 악진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를 격퇴하고 전공을 올려 연수정후에 올랐고, 봉역장군의 관위가 더하여졌고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수에서 공격, 그 배를 형성에서 불태웠다. 악진은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남군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 두보, 정양장 양대를 모두 대파했다. 기록을 보면 이들 장수들은 관우뿐만 아니라 유비와 주유의 포위망 자체를 공격하여 와해시키려는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관우는 애초에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닌 버티기를 목적으로 이들에게 얻어맞아가면서 북쪽에서 이들의 본디 목적인 남군포위망 와해를 막은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육지인 강릉과 해안인 형성의 양 전선을 동시에 관리하며 적을 상대한 경험은 관우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형주를 관우가 맡게된 이유 역시, 단순히 그가 유비군의 2인자라서라기보단, 한수를 끼고 있는 형주 전역에서 중요한 수륙양용의 역량을 어느 정도 증명했기에 이뤄진 인선이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 강릉전투는 관우의 미래를 앞서 보여준 점도 있는데, 조위의 내로라하는 장수진을 상대로 홀로 분전한 모습이 그렇다. 특히 관우가 맡은 퇴로 차단 임무는, 적의 후방 지원이 있을 경우 차단하는 아군이 도리어 샌드위치처럼 짓눌려 몰살 당할 위험 부담도 큰 양날의 검이다. 이 위험한 임무에서도 관우는 설령 적장의 목을 베진 못했을지언정 벌떼처럼 밀려든 조위 지원군의 협공을 격퇴하며 무사 귀환했다. 현장에서 이를 목격한 주유와 여몽이 모두 그 용맹에 대한 남다른 평을 남길 만큼, 이날의 관우는 소위 졌지만 잘 싸웠던 것이다. 형주 뒷치기 때 여몽이 관우를 매우 경계하고 힘든 상대라 인정한 점은 이때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러기를 1년, 결국 조인이통의 구원을 받아 도주한다. 이통전에는 이통이 관우를 공격해서 조인을 구출했다고 나오는데 이건 국내 인터넷상에 퍼진 사서 번역본의 오류이다. 원문에서는 이통이 공격한 것을 그것(之)라고 말할 뿐, 이게 관우라고 직접 적어놓지는 않았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이통이 공격한 것을 관우가 아니라 포위(圍)라고 적혀있다.# 어쨌거나 이통 역시 조인을 구출했을 뿐 포위망을 와해시키는 데는 실패했고 마침내 남군공방전은 유비-주유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유비는 강남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하니 관우를 양양태수 탕구장군으로 삼아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전 주석 헌제춘추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는 손유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

2.5. 청니 대치부터 유비 입촉까지


선주전에 따르면 212년, 유비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조가 오를 정벌하니 오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진이 청니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선주전에서만 언급되는 것이 청니 대치인데, 여기서는 단지 유비가 관우의 대치 상황, 승패의 결과 예측만 말했을 뿐, 직접적으로 청니에서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악진전, 문빙전에서는 악진(+문빙)이 관우를 격파한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의 시기가 209년 남군 공방전 때 기록인지, 아니면 212년 청니 대치 때 기록인지 정확하게 적혀있지 않아서 혼란을 준다. 노필의 삼국지집해에서는 이를 청니 대치 시기로 보았고, 중국어 위키백과 등지에선 남군공방전의 시기로 보는 듯 하며 본 위키도 이쪽 기록에 따른다.
왜냐하면 청니대치 때 정말 싸워서 악진전에 기록될 만큼의 상황이 나왔다면 유비는 언플이 아니라 진짜로 관우를 도우러 귀환했어야 하며, 이 무렵이면 조조도 군세를 회복했으니 재남진을 해 악진과 문빙을 지원했어야 하지만 그런 움직임도 없었으며, 유비의 태도도 어딘가 여유로웠다. 더불어 악진은 불과 3년 뒤 합비 공방전에 참전했다. 즉, 관우 vs 악진+문빙은 조조가 형남 지배권을 상실해 중원으로 물러난 남군 공방전 때고, 청니대치는 그냥 단순히 서로 눈치싸움만 하다가 지금은 싸워봤자 소용없다고 여긴 악진이 철수해 합비로 갔다고 해야 정황상 들어맞는다.
한편 이때 관우는 의외의 인물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바로 양의. 그는 부군(傅群)을 저버리고 양양태수였던 관우에게 나아갔는데 관우가 명하여 공조(功曹)로 삼고 그를 유비에게 가게 했다는 기록이 양의전에 있다.
유비의 입촉당시 유비가 서쪽으로 익주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로 임명했다. 이때 계한보신찬 주석에 따르면 유비는 촉으로 들어올 때, 반준을 형주치중(荊州治中)으로 임명하여 남아 지키면서 주의 행정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역시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게 중요한데 한자단어 상으로 반준의 경우에는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단지 둘 사이가 친하지 않은 것으로 정리된다. 공무상으로 일을 같이 할 뿐이다. 때문에 후일 반준의 경우 항복에 있어서도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 이후 선주전에 따르면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 강주, 강양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당시 유비가 줄 수 있는 권한으로 만들어서 준게 동독형주사라고 할 수 있다. 시대가 혼란스러웠고, 유비가 아직 새로이 정부를 조직하기 전이었으며, 동독형주사에 양양태수, 가절월을 붙여줬다는 것은 관우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라 봐도 될 듯 싶다. 생각해볼 부분은, 당시 유비는 뭣도 아니라는 것이다. 유비가 황제, 왕이 아닌 이상 절월도 줄수 없다. 본인이 황제의 명을 맘대로 이용해서 준 것이다. 이러다 보니, 관우가 가진 동독형주사 라는 의미는 다른 어떤 권한과 비교하기 어렵다. 단순하게 요약하면 유비가 좌장군으로부터 줄수 있는 최고를 준거다라고 볼 수 있다. 즉, 형주의 업무를 모두 아울러 알아서 하라는 것이고 여기에 관우를 양양태수로 해놓은 것도 동일한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적국의 땅에 임명하는 행위는 전쟁 전에 하는 행위다. 제갈량의 북벌위연의 양주자사 임명이나 장완의 북벌 계획 전 강유의 양주자사 임명과 같은 것이다. 즉 양양에 대한 공략도 모두 관우에게 알아서 하라고 일임한 것이다.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승심이 강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응당 익덕(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 그대의 절륜 일군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사실 얼굴도 어느 정도 받쳐줘야 수염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기 때문에 이 일화는 관우의 얼굴이 괜찮은 축에 속했다는걸 암시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
배송지는 당시 관우는 형주에 있었는데 왜 유비, 장비랑 같이 익주에 있냐고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였다. 다만 여기서 임저는 형주 남군 임저현을 말하는 것으로 관우의 관할 구역이었고 마초가 잠시 형주로 왔을 공산은 있다. 거기에 유비는 익양대치 때 형주에 온적이 있었다. 따라서 유비, 관우, 마초가 만났을 가능성도 높고 잠시나마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파서태수로서 조조가 공격한 한중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방어해야 하는 장비가 형주로 갔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진 않다.

2.6. 익양대치부터 한중공방전까지


강표전에 따르면 관우는 좌씨전(춘추좌씨전)을 좋아하여, 이를 암송하면 거의 모든 구절이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여몽전에 따르면 노숙이 맡은바 임지에 떠나니 여몽이 노숙에게 충고하면서 일렀다. "지금 동서(유비와 손권)가 비록이 한 집안이 되었으나, 관우는 실로 곰과 범 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 했다. 이로 인해서 노숙을 위해 5가지 계책을 짜 주었다. 강표전에 따르면 해당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형께서 지금 공근을 대신해, 힘든 임무를 맡으셨는데, 또한 관우와는 이웃입니다. 이 사람은 워낙 출중하기도 하거니와 학문을 좋아해, 좌전을 읽으면 대략 모두 매끄럽고, 강직하고 공명정대하며 씩씩한 기상이 있으나, 천성이 자부심이 상당하고,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 더불어 마주하고 있으니, 응당 단복(單複)[24]

을 가지고 그를 대접해야 합니다.”

여몽은 은밀하게 노숙을 위해서 세 개의 책략을 말했고, 노숙은 공손하게 그것을 경청해, 비밀로 삼아 발설하지 않았다.
214년,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선주전과 오주전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취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상여하겠습니다.

이에 손권이 격분하여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 반장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여대전에 따르면 안성현의 장(長) 오탕과 중랑장 원룡 등이 관우와 결탁하여 또 반란을 일으켰다. 오탕은 유현을 점거하고 있었고, 원룡은 예릉에 있었다. 손권은 횡강장군 노숙을 파견하여 유현을 공격하도록 했다. 오탕은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여대는 예릉을 공격하여 마침내 원룡을 붙잡아 참수시켰다.
감녕전에 따르면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을 진무시키고 관우에게 대항했다. 관우는 3만 명이라 칭하고, 직접 정예 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한다고 말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 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 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 수경 역주에서 이르길 현에 관우뢰(關羽濑)가 있으니, 소위 관후탄(關侯灘)으로, 남으로 감녕(甘甯)의 옛 보루와 마주했다. 관우가 밤에 감녕이 배치하는 소리를 듣고 이르길 "(이것은) 흥패(興霸)의 소리구나."라고 한 이후 마침내 건너지 못했다.[25]
노숙전에 따르면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여 각각 병마를 백보 밖으로 주둔시키고, 단지 장군들만이 단도를 갖고 함께 만났는데 주석 오서에 따르면 노숙이 관우와 회담하려고 하던 때, 제장은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주의를 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노숙이 답해 말했다.

오늘과 같은 사태에 있어서는 서로 뱃속을 드러내 보이고 대화치 않으면 아니 되오. 유비는 국사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시비를 바로 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또한 관우가 더불어 명령에 거스를 수 있겠소!

그리고는 관우를 만나러 나갔다.
노숙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관우는 주군인 유비가 오림에서 갑옷을 벗지 않으며 열심히 싸워 얻은 땅을 왜 강탈하느냐는 관우의 항의에 그 자리에서 자기 주장을 늘어놓아 관우가 대답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즉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인데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고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라는 요지였다. 그러나 이는 관우의 질문인 "우리도 형주에서 같이 위군이랑 싸웠는데 형주에 지분이 있는거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피땀 흘려 얻은 땅(특히 유비네가 먹은 형남 4군)은 왜 침범한 것인데?"의 대답은 되지 못하며 오히려 '형주는 모두 오나라땅'이라는 억지 주장에 가까웠다. 이는 노숙 문서 익양대치 부분에 잘 나와있다.
노숙이 이렇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한 사람이 말했다.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 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노숙은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 질타했는데 언사와 안색이 매우 절절했다. 관우는 칼을 잡고 일어나서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관우는 이 사람을 눈빛으로 떠나가도록 했다.
선주전에 따르면 마침 조조가 한중으로 들어갔다. 이 해, 조공이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유비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오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이후 217년 노숙이 죽고 여몽이 이 지역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는데 여몽전에 따르면 당초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되어 처음으로 육구에 이르러서,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관우는 병마를 조련시키면서 때를 엿보고 있었으며 그 동안 오나라는 익양대치 후에도 계속해서 형주를 노리고 있었다. 양국의 결속을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노숙이 죽자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듣고 서주#s-2를 공격하는것은 도박에 가까운 일이라고 판단[26]하여, 상대적으로 형주를 공략하기 쉬울거라 여기고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고 관우는 이를 방비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 병력을 다수 배치해놓았으며 강릉성을 새로 수축하고 둔영과 관측소를 준비해 놓는 등 준비를 철저히 한다. 이렇게 관우가 대비를 철저히 하니 당초 예상과 달리 여몽은 관우의 방비를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어 고심하게 된다.
이때 손권은 관우에게 관우의 딸[27]과 자신의 아들[28]의 혼담을 주선하지만 관우는 유비와 손부인과의 일과 익양대치로 감정이 상해있는 상태라 사신을 상대로 모욕적인 언사를 날리고 단박에 거절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한 일이 있었다. 이전부터 계속 형주를 노리던 오나라였기에 익양대치로 종결시킨 노숙도 없는 마당에 오나라 내부에서도 관우를 공격하자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218년, 경기, 위황, 김의가 허도에서 난을 일으켜 전자와 조정을 장악하고 마침내 유비를 불러 조조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그를 치려고 했다. 이때 관우가 강성했으므로 조조는 업에 머물게 왕필에게 허도를 지키게 하였는데 이들이 왕필을 죽이고 관우를 부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219년, 유비가 한중공방전의 승리로 한중왕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 가절월로 삼았다.
황충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 마초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이제 곧바로 동렬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장비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들으면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내가 직접 이해시키겠소.

그리고는 마침내 관우 등과 더불어 나란한 지위에 두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비시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비시를 보내 관우를 전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관우는 황충이 후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해서 말했다.

“대장부는 평생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제수되었던 관직을 거부하였다.

비시가 말했다.

"왕업을 세우는 자가 임용하는 인물에게 하나의 기준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전한의 고조와 어릴 적부터 친한 교분이 있었고, 진평(陳平)과 한신(韓信)은 초나라에서 도망쳐 뒤에 한나라에 도착했지만, 관직의 순서를 정하는 논의에서는 한신을 가장 높은 지위에 있게 하였고, 이 때문에 소하와 조참이 원한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왕(漢王)은 일시적인 공로에 근거하여 한승(漢升: 황충)을 높은 신분이 되게 했지만, 마음속의 평가가 어찌 군후(君候)와 동등하겠습니까!

게다가 한중왕과 당신을 비유컨대 주군과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생각해 보면, 관호(官號)의 높고 낮음이나 작위와 봉록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그를 마음으로써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일개의 관리로써 명령을 받아 이를 시행하는 사람이지만, 만일 당신이 임명을 받지 않아 곧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 때문에 이와 같은 거동을 애석해 할 것이며, 아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는 크게 깨닫고 즉시 임명을 받았다.


2.7. 번성 공방전



2.7.1. 번성 공방전 초기의 승리


한편, 219년 촉군의 연승으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무제기에 따르면 당초 조인은 관우를 토벌할 목적으로 형주 번성에 진수하고 있었으며 조인전에 따르면 마초를 조조가 공격할때 소백(蘇伯), 전은(田銀)의 모반을 행(行)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서 7군(七軍)을 지휘해 토벌하고 이를 격파한 후 조인을 행(行) 정남장군으로서 번성에 주둔하게 했으니[29] 오래전부터 관우를 토벌하기 위해 준비했다고 봐야 한다. 이후 218년 10월 남양인들이 요역에 고통스러워하자 후음이 태수 동리곤을 붙잡고 관원, 백성들과 더불어 모반하고 관우와 연합했다. 이후 219년 봄 정월,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한 후 다시 정남장군으로서 번성에 주둔한다. 이는 무제기와 조인전의 기록인데 이에 관우는 후음의 반란 이후 북진을 하여 이 일은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30]
손오와의 동맹이 수복되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며 촉의 기세가 치솟는 가운데, 조조 최후의 대규모 원정이었던 한중전 패배로 위왕 조조는 그 권위가 추락했다. 각지에서 손랑#s-2, 허유[31] 등의 반란이 일어나 중원에 혼란이 일자 관우는 그 틈에 형주의 군세를 이끌고 양양, 번성을 차지하기 위해 북진한다. 이에 대해선 조인이 먼저 관우를 치기 위해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조위의 선제공격을 막기 위해 북진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절월 역시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라는 것. 관우가 봉수대를 쌓고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런 예방전쟁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32]
만총전에 따르면 우선 관우가 양양을 포위하였기에, 만총은 조인과 함께 번성으로 가서 주둔하여 관우군을 막았다. 즉 관우의 본영이자 포위망의 시작은 면수 남쪽인 양양부터였다. 이후 서황, 우금 등의 기전을 보면 관우를 토벌하러 간다. 즉, 조인만총은 관우를 (번성에서) 막고 있으므로, 그 이후 군세들은 관우를 토벌하러 오는 것이다. 7월, 조조는 오대장 중 한 명인 우금에게 최정예의 7군을 주어 조인을 도와 관우를 공격하게(遣于禁助曹仁擊關羽) 하고[33] 서황을 완에 주둔시켰다.
자치통감온회전에는 아예 이전부터 온회가 관우를 경계하면서[34] (자치통감에 따르면 큰비, 장맛비(潦)에 따라) 지금 강물은 불어나는데 조자효(조인)가 현군(적지 깊숙이 들어가 고립되어 있는 군사)로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으며 관우는 용맹하여 예리하므로(자치통감에 따르면 용맹하고 교활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위험하다며 이 기세를 타고 들어오면 근심이 될 것이라고 홍수에 대해 걱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관우가 홍수를 이용해 적을 격파하는 것을 계획하고 치고 올라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35]
자치통감에 따르면 7월에 관우 스스로는 무리를 인솔해 조인을 번에서(於樊)[36] 공격하였고 조인은 좌장군 우금과 입의장군 방덕 등에게 번성의 북쪽에 주둔하게 했다.[37] 조인이 이렇게 우금과 방덕을 북쪽에 주둔하게 한 것은 조인 역시 자신의 군대가 외떨어진 현군임을 인식하고 번성을 둘러싸고 있는 면수를 통해 관우가 번성을 포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북쪽을 보완한 포진으로 보인다. 성에 남아 있던 조인이나 만총이 방덕처럼 따로 성을 나서서 번성 인근 면수 물가를 방어했다는 말은 없으므로 면수를 장악한 관우의 선봉이 도착해 육지에 내려 번에서 공성전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은 성에 의지해 번에서 공격하는 관우를 상대하고 북쪽은 방덕, 우금에게 맡겨 수비하게 한 것이며 그래서 번을 완전히 포위하려는 관우와 그를 막으려는 방덕의 치열한 교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방덕은 번성에 주둔하며, 관우를 토벌했는데 번 아래의 여러 장수는 방덕의 형이 한중에 있어, 자못 그를 의심했는데 방덕이 항상 말했다.

나는 국은을 입은 몸이니, 죽음으로 의를 다하겠소. 내가 직접 나서서 관우를 치고자 생각하고 있소. 올해 안에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관우의 손에 죽겠소.

후에, 그 말대로 전투에서 방덕은 관우와 맞섰으며 직접 관우와 더불어 교전하며, 관우를 쏴 이마를 적중시켰으나 관우는 죽지 않았다. 방덕은 항상 백마에 타, 관우군은 그를 백마장군이라 이르며, 모두 그를 꺼렸다.
무제기에 따르면 관우를 공격하러 7군을 보낸지 한달이 지난 가을 8월, 번성에 홍수가 났다. 때마침 하늘에서 장마가 10여 일 계속돼, 한수가 갑자기 넘쳐, 번성의 평지 5, 6장이 잠겨, 방덕과 여러 장수는 물을 피해 둑에 올랐다. 우금전에 따르면 한수(漢水)가 범람해 우금 등의 칠군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다. 칠군이 수몰된 수엄칠군고지 자체는 평지에 가까운데 여기서 북쪽으로 몇km 이동하면 물을 피할수 있는 해발 100m가 넘는 구릉지 언덕이 나온다, 아마도 갑자기 올라온 물길에 그곳으로 피신하지 못한것 같다.[38] 이때 이미 배로 대기하던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궁지에 몰린 우금은 투항한다. 수해를 피한[39] 관우는 배에 타고 공격해와 허우적대거나 제방으로 올라간 위군을 모조리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때 형주자사 호수와 남향태수 부방도 관우에게 항복하였다. 살아남은 3만 군사[40]도 모조리 포로가 되었다. 여기서 남향군은 본디 형주 남양군의 일부인데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접수하면서 남양의 서쪽을 갈라 새로 만든 군이다. 서쪽으로는 무관, 상용이 있고 동쪽으로는 얼마전 후음이 진압된 이 있다. 남향태수가 잡혔다는 것은 이 지역을 이끌던 행정관과 그 휘하 병력들이 관우에게 사로잡혀 해당 지역이 공백상태에 빠졌다는 얘기가 된다. 즉 조조 치하 형주는 얼마전에 있던 반란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남쪽의 관우 말고도 서쪽의 상용에서의 공격을 대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셈이다. 후일 육손에게 격파된 남향태수로 곽목이 나타는 걸 보면 관우는 따로 남향태수를 임명해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괜시리 관우가 유봉맹달에게 번성으로 지원을 오라고 한 것이 아닌것이다.[41]
방덕전 기록에 따르면 관우는 물을 피해 제방에 올라간 방덕을 비롯한 여러 위군들[42]을 사방에서 큰배로 화살을 쏘아 모조리 쏴 공격하고 일출때부터 아침을 넘어 정오가 지날때까지 온종일 격렬하고 치열하게 방덕의 군세와 싸웠다. 방덕은 갑주를 몸에 두르고 활을 잡고 나섰으니, 쏘는 화살마다 빚나가는 것이 없었다할 정도로 손수 활을 쏘아 분전했지만 결국 방덕이 가진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도검을 쥐고 단병접전을 벌였으며 항복하려는 동형, 동초 등의 목을 베고 분전했으나 결국 장수 한명과 오장 두명을 거느리고 조인에게 돌아갈 목적으로 탄 작은 배가 뒤집혀 그를 사로잡았다고 한다.[43]
관우는 방덕의 형제가 한중에 있다며 자신의 장수가 될 것을 정중하게 권유했지만, 방덕은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는다.

경의 형은 한중에 있소. 나는 경을 장수로 세우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찌 빨리 항복하지 않았소?

관우

위왕께는 정병 백만이 있으며, 위의를 천하에 떨치고 계신다. 네 유비 따위는 범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대적이나 가능할 줄 아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귀신이 될 생각이니, 적의 장수 따위가 되지는 않을 셈이다!

방덕

방덕은 이렇게 욕을 퍼부었고 투항을 거부하다 처형된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7군이 주둔한(훗날 수엄칠군고지라고 불린다) 번성 북쪽은 면수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 남양군 등현 북서쪽 인근이다.자치통감 등을 살펴 전투 과정을 상고해 보면 7월, 관우는 번에서 공격했고 방덕과 지원군으로 온 우금은 번성 북쪽에 진을 쳤으며 방덕은 친히 나서 관우와 더불어 교전했다. 8월, 관우는 홍수가 나자 배가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북쪽 육지가 물에 잠긴 타이밍에 면수에 있던 수군을 보내 홍수를 피하지 못한 위군에게 재차 공격을 가했다. 당장 수로를 장악한 관우 입장에서 본진에서 진군 시간 줄이고 효율적으로 전투하고자 한다면 위군은 수군이 없다고 추정되는 상황에서 관우가 평지에 적과 대치하며 진을 쳤다가 큰 비가 오자 적을 붙잡아 둔 상태에서 진을 슬그머니 물렸다고 볼 가능성도 충분하다. 간단히 말해서 양측에 똑같이 적용되는 자연재해인데 치열하게 싸운 한쪽은 열흘이란 시간 동안 대비를 못한 채 수몰되고 한쪽은 은근슬쩍 안전한 곳으로 군세를 이동시킨 다음 기세등등하게 배타고 와서 화살을 쏘아대며 닥치는데로 죽이고 사로잡았다. 전술적 운용에서 관우가 천시를 이용해 조인, 우금, 방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지만, 관우 인생 최고의 전성기는 바로 번성 전투였다. 번성 공방전 관련 기록에는 이상하게 촉 수군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번성에 주둔했을 법한 위 수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어떤일로 없었거나 관우의 수군에 격파되었거나 중 하나일 것이다. 번성방어에 있어 수군의 존재는 필수불가결, 조인이 바보가 아닌이상 수군의 존재가 중요하다는걸 알고 있었을터, 그럼에도 관우의 수군만이 번성에 존재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청니 대치의 사례를 보더라도 관우와 조인이 강릉과 양양 사이의 어디에서쯤엔가 한판 붙었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그 때 조인의 수군이 함께 박살났다고 가정한다면 이해가 가는 일. 병력이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겠지만 배들은 그럴 수도 없으니까. 수군이 괴멸되었거나 혹은 처음부터 없었다면 번성과 양양은 관우의 수군이 장악한 면수에 둘러싸인 꼴이 되므로 조자효가 대비하지 못하고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 현군이 되었다는 온회의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위 수군의 질이나 양이 애초부터 관우의 수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거나 하는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관우는 장판 전투 전까지 수군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이후 유기의 수군과 합쳐 수가 불어났을 것이다, 이후 관우는 10여 년간 강릉에 주둔했는데 장강에 있는 강릉의 특성상 수군을 더 증원했을 것므로 조조군의 수군보다 물량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있다. 다만 무제기에는 애당초 조인이 번성에 주둔한 것 이유가 조조가 조인을 시켜 관우를 먼저 선제공격 해 토벌[44]하려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런 대대적인 원정으로 강릉이나 이릉을 점령하기 위해선 훗날 조비의 남정[45]에서 보이듯이 수군을 증원하는게 필수적이긴 하다. 게다가 조조군에도 10년의 시간이 있었는데 번성을 지원할 수군이 없다는건 이해가 어렵다. 당장 후대 형주에 주둔한 왕창과 왕기도 형주 북부 위군에 수군이 있음을 증언해 보이고 있다.
무제기에 언급되듯이 조인은 당초 관우를 먼저 토벌하기 위해 번성에 주둔했으므로 관우가 주둔한 강릉을 치기 위해선 수군이 필요하다는 걸 위나라 상층부에서 모를리도 없었다. 조인전과 다른 기전을 살피면 조조가 마초를 처음 토벌할때 조인이 소백(蘇伯), 전은(田銀)을 행(行) 효기장군으로서 토벌한 다음에 조인이 행(行) 정남장군으로 임명되어 후음의 반란을 진압하기 전까지 번성에 지속적으로 주둔했고 후음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정남장군으로서 번성에 주둔했으므로 조인이 효기장군이었던 213년(조조 위공 즉위)이후 어느시점부터 219년까지 계속 번성에 주둔하면서 관우를 토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인 것이다. 후일의 조비의 남정처럼 강릉을 토벌하기 위해 수군을 준비하지 않을리는 없을것이다.[46]
어쨌거나 관우 그가 이룩한 커리어 하이인 우금 7군 포획, 방덕 참수의 원동력 역시 다름 아닌 수군이었다. 성이 물에 잠기는 역대급 장마 속에서, 우금을 비롯한 7군은 그대로 수몰된 반면, 10여년간 형주 일원에서 복무한 경험을 살려 수백척의 전선을 준비한 관우는 승리했다. 그는 이 선박만으로 양양을 포위했고, 불어난 물의 흐름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등, 그야말로 수전 스페셜리스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물에 익숙지 않은' 북방 위군을 농락했다.
어쨌거나 양양성과 번성은 천혜의 요새라 할 만했다. 일단 어느 한쪽이 포위되더라도 반대쪽이 도와줄 수 있다. 한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배를 이용하여 서로에게 물자를 공급해 줄 수도 있다. 강을 끼고 있었기에 수비에 유리했고, 설령 양쪽이 모두 포위되더라도 수군을 통해 강을 장악한다면 멀리서도 물자를 운송받을 수 있었다. 이 두 성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육군을 동원하여 두 성을 한꺼번에 포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수군을 운용하여 한수를 장악함으로써 상대의 수로 이용을 막아야 한다. 정말 까다로운 조건인 것이다.[47] 그리고 관우는 이걸 해내어 조인은 번성에 고립된다.
관우에게 있어선 드디어 공격전에서도 자신의 수전 능력을 입증한 최초의 순간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설령 상대가 수전의 강자들이 아니라한들, 조인, 우금, 방덕은 모두 천하의 내로라하는 장수들이었다. 그 중 방덕을 베고 우금을 생포하며 조인을 포위했다, 이미 이 시점에선 관우 아빠가 아니라 할배가 와도 그를 자제시키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 이에 맞추어 허도 인근 예주 양국, 예주 영천군 겹현[48], 낙양 인근 사례 홍농군 육혼현의 군도, 반 조조세력들이 혹은 멀리서 관우의 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다.[49] 또 이 틈을 타 조조의 본거지인 성에선 위풍이 많은 사람이 연루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비에게 진압되었다. 위풍의 난은 사료가 없어서 어떤 성격의 반란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관우 진격 이후 혼란한 틈을 탄 공격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또 금석문인 위광해장군여군비(魏橫海將軍呂君碑)에서 이르길 관우가 변방을 흔들며, 유씨의 백성을 공경하였고, 홍수가 퍼지고 넘쳐 번성을 띄우고 가라앉게 해, 평원의 모든 병사는 겉으론 깔보나 몰래 내통했고, 맹장의 날랜 기병들은 물에 빠져 잠기거나 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재앙을 일으켜, 악한 이들이 들끓어, 어떤 이는 성을 유지하며 배반했고, 어떤 이는 무리를 거느리고 깃발을 등에 지며, 스스로 곧 문에 대적했다. 중인(中人) 이하는, 모두 다른 마음이 생겼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관우는 면수인근에서 여상이 지키는 양양과 조인, 만총이 지키는 번성을 수륙양면으로 모두 포위하였다. 조엄전에 따르면 조엄이 서황을 따라,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다. 수몰과 관우의 공격 이후 번성에는 인마 수천 정도만 남았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후일 오나라가 양양까지 당도조차 못하고 후퇴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완벽한 적기로 인식했을지도. 번성은 5,6장 가량 수몰되었는데 이건 무려 15미터에 가까운 높이다. 위나라 최고사령관은 포위당해 위험에 빠졌고, 구원을 보낸 최정예 병력은 폭우로 인해 수몰되었고, 구원군 총사령관은 사로잡혔다. 당시 관우의 이름은 온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었다.[50] 관우가 불러 일으킨 추종자 무리들은 수도 근방을 위협했다. 당시 조조의 영토인 예주 일대에서 관우 추종 세력들이 들고 일어난것만 봐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유비가 관우에게 형주를 맡긴것도 다 이점 때문일 것이다.
관우에게는 방덕에서 이마를 화살에 적중당한 일화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일찍이 관우는 화살에 맞아 왼팔을 관통 당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비록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몹시 흐리며 비오는 날이면 늘 뼈가 아팠다. 의원이 말했다.

화살촉에 독이 있어 이 독이 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응당 팔을 갈라 상처를 내고 뼈를 깎아 내 독을 제거해야 하니 그 연후에야 이 통증이 없어질 것입니다.

관우는 이내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르게 했다. 이때 관우는 때마침 제장들을 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함께 하고 있었는데, 팔에서 피가 흘러 대야에 가득 찼으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잔을 끌어당겨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2.7.2. 위나라의 반격


당시 조조가 받던 압박감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번성 등이 함락되면 허창과 너무 가까운 위치인걸 생각해 도읍을 옮기는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물론 한창 북쪽 업에 있던 조조가 본인의 신병 걱정으로 압박받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51] 여기 있던 헌제가 관우에 호응해 들고 일어난 반란군들에 의해 사로잡힐까 걱정해서였다. 이때 사마의와 호군 장제는 조조의 의견에 반대하며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필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사람을 보내 손권이 그 배후를 치도록 권할 만합니다. 강남을 떼어내어 손권을 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번(樊)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라며 손권을 이용하여 이 어려움을 해결하자고 한다. 유비와 손권의 사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말에 조조는 용기를 얻고 손권에게 연락을 취하자 장제전에 의하면 손권은 '즉시' 움직였다고 한다. 동맹의 실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조조는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宛)에 주둔했다. 8월, 조조는 서황을 2차 구원병으로 파견시켰으나 환계전에 따르면 서황은 조인을 구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조엄전에 따르면 번성에 도착한 후, 관우는 조인을 더욱 견고하게 포위했고, 남아 있던 구원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서황이 이끄는 병사로는 포위망을 뚫기에 역부족이었지만, 장수들은 서황이 급히 구조하지 않고 있다고 질책했다. 서황전에 의하면 이 때 마침 한수가 크게 범람하여 관우가 번(樊)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또한 양양에서 장군 여상을 포위했으나 서황이 이끌던 병사들은 다수가 신병이었기에 관우와 쟁봉(爭鋒)하기 어렵다고 여겨 양릉피로 나아가 주둔했다. 오주전 기록으로는 이때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218년 김의, 경기, 위황, 길본의 난이 일어났을때 그들이 호응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관우라는 점에서[52]조조 입장에선 도저히 편안히 잘 수가 없는 것이었다. 번성이 뚫리면 그 다음은 완까지 일사천리고 만약 한중에서 숨을 가다듬고 있던 유비까지 가세한다면? 그렇게 될 경우 어떤 꼴이 날지 모골이 섬뜩했을 것이다.
급박한 것은 번성의 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인은 군기를 다독였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여전히 성내에 물이 가득차 빠지지 않고 있었다. 번성은 완전히 물에 잠겨서 도저히 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53] 군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지원군 역시 수몰되었으므로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에 번성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자도 있었으나 어떻게든 이곳을 사수하여야 된다는 만총의 말에 조인은 제장들을 다시 모아 결사의 각오를 말하니 모두가 감격하여 다시 군사들의 사기가 올랐다. 그리고 실제로 조인의 이런 끈질긴 항전, 오군의 침공으로 뒤가 끊길까 하는 염려에 관우는 섣부른 북진을 하지 못하였다. 번성에 발이 묶여 당시 한중공방전과 7군의 패배, 그리고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던 조조에게 대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되고 만다. 만총의 판단이 적절했던 셈.
이렇게 번성 전투의 국면은 자연히 육전의 기량과 세력의 우열로 접어들었다. 우금을 대신해 투입된 서황은 앞뒤로 12영에 달하는 지원 병력이 가세하면서 세력의 우위를 점했고, 이 병력의 지휘관인 은서, 주개 역시 모두 관중과 하북에서 잔뼈가 굵은 부장들이라는 점에서 기량 또한 앞서나갔다. 조조가 거병한 이래 30년간 단련되어 천하 최강으로 성장한 위군이 서황을 철벽처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관우는 상용에 있는 유봉맹달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으나[54] 유봉과 맹달[55]은 아직 점령하지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보낼 여지가 없다면서 유봉이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아[56] 싸우고 있는 형국이었고[57] 미방#s-1사인이 병량보급에 전력을 다하지 않아 관우는 3만 포로의 식량까지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물러나지 않고 영릉군의 상관에 있던 병량고의 군량을 사용해 포위망을 유지시켜 점령의 의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58]
한편 촉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우가 처음 출군해 번성을 포위했을 때 크기가 소만큼 한 검은 돼지가 그의 발을 깨무는 꿈을 꾸고는 아들 관평에게 말했다. "내가 올해 쇠약해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59][60] 이 돼지 꿈 내용은 연의에서도 나오지만 부하들이 길몽이라고 해석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전략에서 이르길 관우가 번을 포위하여, 손권이 사신을 보내 그를 도움을 청하며, 사신이 급히 나아가지 말도록 권하고, 다시 주부를 파견해 먼저 이르러 관우에게 알리게 했다. 관우는 그가 느린 것에 성냈고, 또한 스스로 이미 우금 등을 잡았기에, 곧 욕하면서

담비새끼(옥편玉篇, 여우와 담비)가 감히 이와 같은데, 만약 번성이 함락되면, 내가 너를 멸할 수 없겠는가!

손권이 이를 듣고, 그가 자신을 가벼이 여김을 알아, 거짓으로 손수 편지를 써 관우에게 사과하며, 몸소 가는 것을 허락했다.
배송지는 '이미 형주와 양주는 서로 겉으로는 가깝지만 속으로는 사이가 나빠서 손권이 관우를 습격하며, 군대를 숨겨 몰래 출발했습니다. 여몽전(呂蒙傳)을 살피면 정예병을 배 안에 숨겨, 범인에게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옷을 만들게 했다고 이르니, 이를 근거로 말하자면, 관우는 손권에게 구원을 청하지 않았고, 손권도 필시 관우에게 마땅히 간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서로 도와주는 것을 허락했다면, 무슨 까닭에 그들의 거동을 숨겼겠습니까?'라고 이 기록을 비판하였다. 자치통감의 경우 관우의 손권에 대한 외교적 모욕에 대해선 혼인사자 모욕만을 기록하였다.
10월, 손권은 조조에게 칭번(번국을 칭함)하고 관우를 치겠다고 편지를 보낸다. 이에 조조는 동남방면에 있던 장료를 형주로 소환한다. 장료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서황이 번성의 포위를 풀어내고 조조가 마피에 주둔하는데 장료가 마피에 있을때 양주 26군의 사령관 하후돈도 그대로 마피에 있었다. 이는 당시 회남전선의 군대가 형주로 이동한 것을 뜻한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당시 219년 당시 손권이 합비를 잠시 공격했다. 회남에는 여러 주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온회전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양주자사였던 온회는 연주자사 배잠에게 적(손권)은 걱정할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오히려 장료마저 소집될 것을 확신하였다. 이후 조서가 내렸고 배잠과 예주자사 여공을 불렀다. 온회는 지금 긴급하게 회합을 하지 않는건 먼 곳의 백성들을 동요하지 않게 하려는 것일뿐 곧 (소집) 밀서가 당도할 것이라고 했으며 느긋하게 있던 배잠에게 서두르라고 말했고 과연 그 말대로 과연 재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온회는 아예 서둘러 가지 않으면 죄를 받을것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물론 오와 밀약을 맺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 오군이 합비로 올 일은 절대 없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면 이 조치는 대들보 빼서 기둥으로 쓰는 모양밖에는 안된다. 심지어는 자신마저 서황의 뒤를 이어 남하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조의 이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였다.
이때 마피에 주둔한 조조의 군대가 관우의 군대와 싸웠다는 설도 존재한다. 하후돈전에서 '건안 24년 태조의 군이 여포의 군을 마피에서 격파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때는 이미 여포가 죽은지 20년 후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이를 관우의 오기라고 보는 쪽이 많은데 조익은 관우의 군대를 서황이 격파하고 마피에 주둔했기에 관우의 오기로 보았다. 또, 조조는 마피에 주둔했지 관우와 직접 마피에서 전투가 있었던 적은 없어서 잘못 삽입된 문구라고도 본다. 다만 학자들이 관우의 오기라고 보는 것도 이유가 있는데 이 기록을 관우 본인이 아니라 '관우의 군대'의 오기로 본다면 조조와 관우가 직접 싸운게 아니라 '관우가 파견한 군대'와 '조조의 군대'가 마피에서 싸웠다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종영은 증거는 없지만 이것은 '관우가 파견한 별장(別將)이 겹(郏)현 아래에 있던 것'으로 관우가 파견한 별장 가운데 동명이인 여포가 있던게 아닌가 보기도 했다.
동소전에 따르면 관우가 조인을 번성에서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파견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군대를 보내어 몰래 관우를 습격하려고 합니다. 이 일은 비밀을 구하니 장군께서는 누설하여 관우가 방비를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조조가 이 말을 듣고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동소는 말했다.

마땅히 손권에게는 비밀로써 호응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누설해야 합니다. 관우가 손권이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돌려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면, 번성의 포위는 속히 제거 될 것이므로, 오나라와 촉나라 두 적이 서로 대치하게 하여 앉아서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조조가 좋다고 말했다. 즉시 칙령을 내려 번성을 구할 장수 서황에게 손권의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가 주둔해 있는 가운데로 쏘게 하였다. 포위된 조조군은 이 소식을 듣고는 사기가 백배가 되었다. 관우는 과연 마음속으로 주저주저하면서 퇴각하지 않았다. 손권의 군대가 도착하여 그 두 성을 취해 버리자, 관우는 곧 산산이 무너졌다.
서황#s-1이 이끄는 지원군은 다시 조인의 구원을 꾀한다. 서황은 최악에 상황에 처한 조인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용의주도하게 관우를 살피며 전투를 피하고 지원을 기다렸다. 이에 대한 제장들의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그때 의랑 조엄이 그들을 잘 다독여 내분은 피할 수 있었다. 조엄은 당장 싸우자는 서황 휘하의 장수들을 설득하고 곧 땅속으로 길을 파고, 화살을 날려 조인에게 편지를 보내서 몇 차례 소식을 연락하였다. 북쪽의 지원군 또한 도착하여 힘을 합쳐 크게 싸웠다고 조엄전에 전한다.
촉기에 따르면 서황은 관우와 싸움 도중 사사로이 만나 평상시같이 이야기했다. 이때 서황이 외치길

관운장의 목을 얻는자는 천금을 내리리라!

관우가 놀라고 당황하여 물었다.

대형(大兄), 이 무슨 말이오!

서황이 말했다.

이는 나라의 일이오.

앞서 말했듯 서황이 지원을 기다린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서황의 병사들이 대부분 신병이라 관우의 강병을 베겨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서황전에 따르면 이후 서황은 참호를 파며 언성의 배후를 끊으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고 촉군은 둔영을 불사르고 후퇴했으며 서황은 언성을 점령하면서 영을 연결시키면서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곳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조조는 회남의 장료, 하후돈, 회남 등지에 주둔하면서 각주의 군사를 이끄는 서상, 여건, 배잠, 여공, 서주의 장패 등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직접 서황을 지원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환계의 조언에 따라 하북에서 잔뼈가 굵은 은서주개를 서황에게 파견했다, 때 마침 12영(營)의 군사들이 서황에게 지원군으로 도착해 전투가 시작되자 서황은 그간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무색하리만치 어마어마한 싸움을 보여주었다. 서황전에 따르면 이때 관우의 군대는 위두에 둔(屯)이 있고 또한 별도로 사총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널리 소문을 퍼뜨리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급히 스스로 보기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沔水)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여기에 항복했던 호수와 부방도 죽었다.[61]
동시에 만총은 백마(白馬)를 물속 깊숙이 잠기게 하여 제품으로 삼고는 군사들과 함께 맹세했다. 마침 서황(徐晃) 등의 구원병이 도착했으므로[62] 만총은 (이들과 함께) 전력을 다해 싸워서 공을 세웠으며 만총은 승진하여 안창정후(安昌亭侯)로 봉해졌다. 이렇게 밖에서는 서황, 번성 안에서는 만총이 안팎으로 공격하여 관우는 결국 번성포위망을 걷어낼 수밖에 없었다. 관우는 어느정도 피해를 보곤 이대로는 양번 포위망 유지는 어렵고 양양에 집중하는게 맞다고 판단해서 병력을 후퇴시킨것으로 보인다. 사서에서의 묘사를 보면 분명 가볍게 여길 수 없는 피해를 입었지만 모든 병사들이 모랄빵에 걸려 자살했을 리 없고, 5천 보기 중 생존자들과 다른 둔영을 지키던 병사들과 공성에 집중하던 병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번성 포위를 푸는 희생을 하더라도 최대한 결집해 항전하는 한편 퇴로를 확보하는데 집중했을 거다. 당연히 관우의 본대를 소탕하여 형주 일대에서 관우, 더 나아가서는 촉의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겠다는 생각을 하는 위군이 역으로 공세를 퍼부었을 텐데 완전히 면수를 장악한 수군이 연계해서 육군을 지원한 덕분에 위군도 퇴각하는 촉군을 소탕하는 것은 하지 못하면서 관우가 아직 싸울 수 있는 규모의 병력을 보존하여 퇴각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위나라 원군과 번성에서 버티던 위군이 앞뒤에서 반격을 가하여 번성의 포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해졌으니 관우가 이끄는 촉군은 번성에서 물러났지만 그것이 완전히 싸움이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관우의 수군은 위에서 언급했지만 번성의 포위가 풀렸음에도 여전히 면수를 독차지한 상태였고, 관우가 번성에서 퇴각시킨 육군은 양양을 포위한 아군과 합류해 아예 양양을 외부와 고립시켜 연락을 끊어버렸다. 비록 격전을 펼치며 지원도 오지 않고 지쳐가던 촉군이었지만 관우는 물론 그가 이끄는 촉군은 여전히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이 상황에서 위군이 정면에서 관우를 격파하려면 3가지의 단계를 겨쳐야만 했다. 우선 1차적으로 면수의 수군을 격파해야 하며 그 후에는 성공적인 도강 작전을 펼쳐 군사를 반대편에 주둔시켜야 하고 그 다음 양양을 포위하고 있는 관우군 주력을 격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군사작전이 상당히 어렵다면 점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는 가만 놔두었을시 양양이 관우의 손아귀에 들어갈 공산이 커지는 것이다.[63] 그렇기 때문에 조조는 군대를 퇴각시키지 않고 군대를 양번에 규합하고 있었다.
만약 손권의 공격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관우는 형주를 위나라의 블랙홀로 만들어버리며 위의 대다수의 전력을 형주지방에 묶어놨을 것이다. 1차 목표인 번성을 점령해 남양/허창방면으로 진군하는 건 힘들어졌지만 최소한 전선을 고착화시킬 수는 있었을 것이고 그 상태로 시간이 조금만 흘렀더라면 한중 공방전 이후 다시 재정비를 마친 유비가 직접 한중으로 북진할 테고, 위군의 상당수가 형주에서 관우를 상대하느라 발목이 붙잡혀있을 때 유비까지 관중을 친다면 당연히 관중은 풍전등화가 될 것이며[64], 촉의 손에 넘어간 관중에 있는 장안도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그 다음은 당연히 낙양과 허창이 바로 촉의 코앞에 닿기에 위의 입장에서 관우에게 시달리던 때 이상으로 천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유력한 도시는 조조의 본거지인 업성이 될테고.[65]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팀을 노리고 있던 손권이 곧장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고 남군을 친다는 소식이 들렸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2.7.3. 최후


이렇게 서황과 만총이 관우의 번성 포위망을 풀어내고 있을 무렵, 후방에선 동오의 대도독 여몽이 거미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몽전에 이르길 이때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병을 많이 남겼는데 관우가 자신의 뒷치기를 두려워 한다고 알아챈 여몽은 계책으로 병 치료를 명목으로 건업으로 돌아갔다. 관우가 이를 믿고 점차 병사를 번성으로 보냈다. 당초 여몽을 대신하여 육구에 도착한 육손이 관우에게 관우를 치켜 세우는 편지를 보내자 오만해진 관우는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편지에서 육손이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 적극적으로 협력을 약속하였는데 관우는 이 말을 듣고 오판한 것으로 보인다.[66]
이때 위에서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삼국지집해 여몽전에 수록된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여기서 상관은 익양대치 시 서쪽 촉한이 취한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청릉현 옆이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하야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다라고 했으니 해당관은 양측의 경계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 상관과 번성은 수백리가 넘으니 관우가 직접 취하진 않았을것이며 관우 휘하의 관리들이 이를 취했을것이다.
애초에 관우를 칠 생각이던 손권은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여몽이 심양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상인의 복장을 입히고 노를 젓게 하여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과 미방이 모두 항복했다. 호삼성은 이를 보고 미방과 사인의 투항이 없었다면 관우가 오의 기습을 일찍 알아차렸을 거라 평가했다.
당시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고 장군 부사인이 공안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여몽전 오록에 따르면 사인은 본디 항복할 마음이 없었고 오군의 항복사자인 우번을 내치기까지 했으나 우번이 편지를 보내 내응이 있었으니 이렇게 대응하지 못할 지경으로 포위된 것이며 이대로 있어봐야 살길은 없고 죽도록 싸워봤자 당신의 일족만 멸살될 것이며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협박하니 눈물을 흘리며 항복하였고 우번이 이는 속이는 병사이니 사인을 응당 끌고 가야한다고 주장하여 남군으로 끌고갔다고 한다. 여몽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고 하며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자 소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저항없이 항복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만 항복한것이고 다른 남군 사람들에게 항복은 너무나도 의외였기 때문에 여몽을 치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번은 한참 미방에게 받은 기물로 주변사람들과 성밖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여몽에게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뿐인데 성안의 사람들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는가?'라고 진언했고 여몽은 그제서야 남군으로 들어가 마침 반격을 준비하던 성안의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관우가 양양의 포위를 풀고 퇴각하자 조인을 비롯한 위군은 그런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추격을 반대하였고 조조 역시 관우를 장수들이 추격할까 걱정하여 추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추격을 포기했다며 조엄전에 전한다. 한편 오나라의 장수 장흠은 함대를 이끌고 면수로 들어갔다. 단 장흠전에는 면수로 들어갔다가 나온 기록만 있어 실제 관우의 수군과 교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동시에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손에 넣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고 오주전에 전한다. 관우는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중을 두루 다니게 하며, 집집마다 묻게 하고, 혹은 손수 글월을 써서 신의를 보였다. 관우의 사람이 돌아오자, 사적으로 서로 참여하여 묻고는,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평시보다 과하게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관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거기에 관우군의 처자들이 일종의 인질이 되었는지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67]
수경주에 이르길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에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중국의 학자 전부생(田福生)은 자신의 저서 《관우전關羽傳》[68]에서 맥성은 수백 가지고는 수만의 오군에 한달간 대항할 수 없다며 맥성에 2만명이 주둔했을거라 여겼다. 어쨌거나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급기야 관우는 거짓항복까지 시도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맥성과 임저의 위치를 보건대 관우는 이미 장악당한 영안 방면이 아니라 상용 방면으로 어떻게든 돌파할 작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69]
관우는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때는 12월,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반장의 사마 마충[70]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사로잡아 더 이상 도망 못가도록 붙잡았으며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형주 남군 임저현에서 참했다.[71]
이때 손권은 장군을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을 붙잡아 손권이 관우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려 하자 좌우에서 말했다.

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이에 관우를 참수했다. 이는 촉기의 기록인데 배송지는 이 기록에 대해 손권이 있는 강릉과 관우가 죽임을 당한 임저는 200~300여리나 거리가 된다며 그르다 평가했다. 그렇다면 관우는 난전중 전사를 했거나, 현장에서 지휘하던 여몽이나 관우를 사로잡은 반장 등의 최종적인 판단으로 인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손권 앞에 관우가 붙잡혀 온 것은 오서 오범전에서도 교차검증이 되는 부분이므로, 애초에 손권이 임저 부근까지 직접 주둔해 있었을 수도 있다. 정사 속 배송지의 주석이 모두 타당한 것만은 아니기도 하고.

2.8. 사후


오력에 따르면 이후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다, 제후의 예로 그 시신을 장사지냈다.(權送羽首於曹公,以諸侯禮葬其屍骸。) 이 구절은 조조와 손권이 둘 다 관우의 시신을 제후의 예로 장사 지냈다는 뜻으로 중국에선 보고 있다, 촉한 정권은 성도에 관우를 위한 의관총(衣冠冢), 즉 청두 관우묘를 지어 혼을 불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관우의 고향 해주에서도 관우묘가 세워지는데 이로서 '머리는 낙양, 몸은 당양, 혼은 고향(해주)에 있다' 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당양에 있는 관릉은 당양대왕총이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유비가 동정동오 할 때 대왕총을 찾아 관우를 제사지내고 옥천산에 관우사를 세웠다고 한다.[72]
장남 관평관우와 같이 죽었기 때문에 차남 관흥관우의 후사를 이어 작위를 계승했고 약관의 나이에 시중, 군감군이 되었지만 일찍 죽었다. 관흥의 적자 관통이 후사를 이었지만 또 요절하고 관통이 후사가 없어서 관흥의 서자 관이가 후사를 이었다.
촉기에 따르면 방덕의 아들 방회종회, 등애를 따라 촉을 정벌했고, 촉이 격파되자 관씨 일가를 모두 멸족시켰다.
청나라 시대의 지리지 강릉현지에 따르면 관평의 아내는 조운의 딸 조씨로 관월을 낳았다. 조씨와 관월은 형주가 함락되자 익주로 피신하지 못했지만 여몽이 배려해준 덕분에 오나라에서 관(關)씨에서 문(門)씨로 성을 바꾸고 평민이 되어 공안에 숨어 살았다. 이후 서진의 사마염이 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자 칙서로 관씨로 복권하여 이어져왔다. 다만 강릉현지는 위의 관후조묘호기와 같이 너무 후대의 기록이라는 문제가 있으며 그나마 금석문 기록인 관후조묘호기보다도 신뢰성이 높다고는 볼 수 없다.
당나라 시대의 익주명화록에 따르면 촉왕이 조충의에게 명하여 관장군이 옥천사를 세우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2001년, 관우의 67대손 관중진이 나타났다. 그가 가지고 있는 족보에 따르면 관중진은 관우의 장남 관평의 후손이다. 익주에 있던 차남 관흥의 자손들은 방회에 의해서 몰살되었지만 형주에 남아있던 관평의 자손들은 계속 대를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호북성 공안현에 관우의 후손들이 사는 집성촌이 있다. 이 족보는 내용이 충실해서 중국 당국에서는 조작된 흔적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현대 중국에서 관씨는 전체인구의 0.09%인 140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2.8.1. 시호 논란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관우의 시호는 壯繆侯라고 했다. 그런데 시법에서 장(壯)은 장(莊)의 통가자로 쓰일수 있고 실제로 비슷하게 쓰이는 문자로 둘 다 '무로서 이름을 떨친것'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여러차례 전장에 나가 정벌한다', '들판에서 싸우다 죽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관우의 최후와도 일치한다. 그런데 繆의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이 글자는 유(謬)와도 목(穆)과도 상통하는데, 유와 목은 상통하지 않으며 의미도 어마어마하게 다르다. 유는 이름과 실질이 어긋난다는 나쁜 의미고, 목은 덕을 펴고 의로움을 지켰다는 좋은 의미다. 그리고 穆이 시호일 경우 주로 穆으로 쓰고 繆으로도 자주 쓰지만, 謬가 시호일 경우에는 본자인 謬보다는 통자인 繆를 많이 썼다. 고문헌에서 繆를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고 穆의 통자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실제로는 繆를 謬의 통자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 명나라 학자 정민정은 穆으로, 양장거는 繆(=謬)로 봤는데, 삼국지집해의 저자 노필은 정민정의 설이 지극히 합당하다 하였다. 정민정의 설을 인용해 보자

선주 때에는 오직 법정만이 시호를 받았고 후주 때에는 제갈량이 공과 덕으로 세상을 덮었으므로 (시호를 받았고) 장완과 비의 역시 시호를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 조운이 모두 시호를 추서 받았다.

생각건대, '繆(목)'와 '穆(목)'자는 옛적에 서로 통용하여 썼으니 마치 진목공[73]

노목공맹자에서, 한나라 목생(穆生)과 진나라 목동(穆彤)을 역사서에서 모두 '繆'자로 쓴 것과 같다. 송나라 악비의 시호는 무목(武穆)이니 이것과 뜻이 같다. 지금 사람들이 악시로 여기는 것은 시법에 "무공을 이루지 못한 것을 ‘莊(장)’이라 한다" 한 것과, 채옹의 독단(獨斷)에 “이름과 실제가 어긋난 것을 '류(謬)'라 한다" 한 것 때문이니 어찌 (이러한 해석이) 이치에 맞는다 하겠는가? 만약에 과연 악시였다면 사서에 시호를 추서 받은 것을 당시 사람들이 영예로 여겼다고 쓰지 못하였을 것이다.

시법을 살펴보면 "덕을 베풀고 의로움을 집행한 것을 ‘穆(목)’이라 한다" 하였고 "충성스러움이(忠-中은 忠의 통용자) 모습에 드러난 것을 '穆(목)'이라 한다” 하였다. 예기(禮記) 대전(大傳)편에 "소목(昭穆)으로 순서를 정한다" 하였는데 고본(古本)에는 '穆(목)'이 '繆(목)'으로 되어있으며 춘추좌씨전에는 '穆(목)'을 대부분 '繆(목)'으로 썼다. 이 '穆(목)'자와 '繆(목)'자는 옛적에 모두 통용하여 썼던 것이다.

즉, 壯繆은 통가자로서 장(壯)은 실제 시법에 있는 장(莊)의 통가자로 쓰였으므로 곧 장목이며(莊穆) 미시로 쓰였고 삼국지 판본과 화양국지를 살펴보면 오래전부터 장목(壯繆)을 장목(莊穆)으로 통가하여 썼으며 진수는 이 시호가 내려지자 당시 사람들이 명예로 여겼음을 기록하여 악시가 아님을 명시했다는 것이다. 이 ‘莊穆’이라는 시호는 위서에도 나온다. 위서 원자옹열전을 살펴보면 원자옹은 패전하여 죽은 뒤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겼고 ‘莊穆’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이는 관우의 예와 일치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穆(목)'과 '繆(목)'은 서로 통용하여 쓰던 글자이다.
  • '장목(壯繆)'은 '장목(莊穆)'으로 읽어야 하며 미시(美諡)이다.
  • 정사 삼국지 판본과 화양국지를 살펴보면 오래 전부터, 어쩌면 진수 당시부터, '장목(莊穆)'을 '장목(壯繆)'으로 통가하여 기록했고 후대의 판본들도 그대로 썼음을 알 수 있다.
  • 진수는 이 시호가 내려지자 당시 사람들이 영예로 여겼음을 기록하여 악시가 아님을 명시했다.
  • 통가자와 시호에 무지한 사람들이 이를 악시로 여겼을 뿐, 이에 대한 논박은 오래 전에 있었다.
  • 우연에 가깝지만 건륭제가 관우에게 내린 충의후(忠義侯)라는 시호 또한 장목후와 의미가 비슷하다.
후주 유선은 부곡의 손에 비명횡사한 장비에게도 그 공로를 기려 '환[74]'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촉한에서는 시호를 추서한 예가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악시를 추서한 예가 전무하거니와 관우에게만 유독 악시를 내렸는데 당시 여론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을리 만무하고 또한 시호를 선시(善諡)와 악시(惡諡)를 뒤섞어 내리는 경우도 예에 어긋난다. 따라서 관우의 시호는 '장목후'로 읽어야 하며 선시라는 것이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무예와 충의를 표현하는 장면이 여럿 추가되어 활약은 더욱 화려해졌지만, 이를 위해 정사에 나왔던 실책은 대부분 변경 내지 삭제되었다. 외모상으론 신장 9척에 수염 길이가 2자였으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슬,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외모로 묘사된다. 보다시피 붉은색을 굉장히 강조하는데, 이는 경극에서 충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을 사용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
자신이 살던 해현에서 악덕 지주를 살해하는 바람에 추방당해 탁군으로 왔다가, 격문을 보고 의기투합한 유비 및 장비와 우연히 술집에서 마주쳐[75] 도원결의를 맺고 의형제가 된다. 다만 162년에 태어나 유비보다 나이가 적어 자연스럽게 둘째가 되었다는 판본이 있는가 하면, 관우가 유비보다 1살이 더 많지만(관후조묘비기) 유비의 혈통과 인덕을 더 중히 여겨 맏형 자리를 양보했다는 판본 등 표현이 갈린다. 일반적으론 후자가 관우와 유비의 캐릭터성을 더 부각해서인지 더 널리 알려진 편. 이후 동네 대장장이를 불러 유비의 쌍고검과 장비의 장팔사모와 함께 본인은 무게 82근의 청룡언월도를 주문해서 전용 무기로 사용한다.[76]
이후 황건적의 난 당시엔 정원지를 베면서 장수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하고 장각 삼형제에 대한 협공이나 맏형 유비의 은사인 노식동탁의 대립, 조조와의 대면, 독우의 갑질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며 형제간의 우애를 다진다. 이후 동탁이 황건적의 난을 발판삼아 조정을 유린하여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유비 삼형제는 별개 세력으로 참여하려 했으나 인지도가 밀릴지도 모른다는 공손찬의 제안에 따라 그의 부장 격으로 합류한다. 과연 그의 생각대로 동탁의 선봉장 화웅에게 포충이 썰리고 손견도 원술의 속좁은 농간에 휘말려 패퇴하자 관우가 나서는데, 정작 손견을 궁지로 몰아넣은 원술[77]이 '마궁수 주제에 깝치지 말고 꺼져'라며 막았으나 조조가 변호해 준 덕분에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연의를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기억하듯이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을 베고 돌아온다.'''[78] 참고로 이 장면 직후 그것 보라며 장비가 어서 계속 쳐들어가자며 신나자 원술이 쩨쩨하게 '너는 또 뭔데 깝치냐'라며 나서기도 한다.
그렇게 연합군을 도우다가 호뢰관에서 연합군의 여러 장수들을 쓰러트린 여포와 맞서는데, 먼저 동생 장비가 나갔으나 여포가 적토마를 탄 데 비해 장비의 말은 평범한 군마인지라 밀리기 시작하자 도우러 뛰쳐나간다. 이후 유비까지 덩달아 참여한 덕분에 여포는 퇴각했으나 유비 삼형제도 위험하다 느껴 말머리를 돌린다. 흔히 이 장면은 삼영전여포라 불리면서 최초로 세상 사람들에게 유비 삼형제의 명성을 떨치는 계기가 되며, 비록 연의의 창작이라고는 하나 굉장히 임팩트가 큰 장면으로 손꼽힌다. 이후 공융이 황건적 관해에게 성이 포위되자 태사자가 직접 유비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관우와 관해가 90여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죽이고 공융을 구출한다.
시간이 흘러 동탁을 죽이고 방랑군이 된 여포를 잡기 위해 조조군과 협동하여 하비성을 공격하는데, 다른 장수들은 몰라도 장료만큼은 덕을 아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서로 이해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덕분에 장료는 목숨을 구걸하다 썰린 여포와 달리 죽음을 택했지만 유비와 관우가 변호해 준 덕분에 목숨을 구해 조조군에 들어가고, 이후 유비군이 독립해 조조군과 적이 된 상황에서도 관우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정사에서는 관우가 진의록의 처 두씨를 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나관중은 이를 윤리적으로나 이미지 형성으로나 좋지 못하다고 판단했는지 삭제한다.[79]
이후 여포가 죽고 잠시 평화가 찾아오자 유비는 황궁으로 복귀한 헌제에게 인정받아 황숙이라 불리게 되고, 이에 조조는 헌제와 유비를 견제하기 위해 헌제에게 반강제로 권유해 사냥 대회를 열고 헌제에게 갈 환호를 대신 받는 무례[80]를 저지른다. 이에 관우는 조조의 의중을 눈치채고 격분해 칼을 뽑아 조조를 베려 했지만, 유비가 말리는 바람에 실패한다. 이게 어지간히도 통탄스러웠는지, 관우는 나중에 조조에게 분노를 표할 때[81]마다 '그 때 조조를 베어버렸으면 이럴 일이 없었다'며 언급한다.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한 후 서주를 장악하고 관우는 하비성을 지켰는데 조조군에 관우의 하비성이 포위되자 조조는 장료를 보내 관우에게 항복을 권유시킨다. 장료는 관우에게 항복하지 않고 죽기를 고집한다면 이는 세 가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설득한다.[82] 그러자 관우는 장료에게 세 가지 조건을 걸고 항복을 약속한다.[83] 조조는 관우가 항복하겠다면서 군사를 물리라고 청하자 조조는 그 조건들을 모두 들어주겠다며 정말로 군사를 물렸는데, 이에 조조의 부하들이 이틈을 타 관우가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반발하자, 조조는 "그럴 사람이라면 도망가라고 해라, 붙잡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관우는 두 부인의 안전을 위해 일시적으로 조조군에 투항하고, 조조는 그간 관우의 명성과 충성 및 무공을 봐왔기에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돌리고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모종강본에 의하면 조조가 투항한 관우와 함께 하비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의형제간의 의리도 깨기 위해 관우와 감부인&미부인을 한 방에서 재우려고 했으나, 관우가 그저 촛불을 들고 문 밖에 나가 서서 한 숨도 자지 않고 아침까지 경계를 섰다는 말을 듣자 감탄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허도로 들어오자 '무장이 말을 타면 금을 하사하고 말에서 내리면 은을 하사한다'는 말처럼 금은보화와 10여명의 미인을 보냈으나 관우는 모두 받지 않는다. 조조가 관우의 해진 전포를 보고 새 전포를 주니 관우가 '형님께 받은 옷이라 버릴 순 없었다'며 새 전포는 안에 입고 해진 건 밖에 입는 장면이나, 적토마를 줬더니 '나중에 형님을 빨리 만나러 갈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는 장면은 관우의 충성을 표현하는 단적인 장면으로 손꼽힌다. 그나마 관우와 친하던 장료를 보내 설득하게 했지만 좋은 건지 슬픈 건지 자신을 향한 장료의 충성심만 확인하고 끝났다.[84]
그런가 하면 두 부인의 거처에 비가 새서 지붕을 고쳐달라고 관우가 부탁하러 오자 조조가 술을 권하며 달랬으나, 조조를 면전에 두고도 '형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여 팍팍하다'란 말만 했다. 조조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관우의 수염을 언급하며 화제를 돌렸는데, 관우도 그건 싫지 않았는지 자신의 수염을 자랑하자 조조가 '마침 겨울이니 수염 주머니를 두고 보존하는 게 좋겠다'면서 수염 주머니를 선물한다. 이후 조조가 헌제에게 보고할 것이 있어 입궐하면서 관우를 데리고 가자, 헌제도 황숙 유비의 의형제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기뻐한다. 이 때 수염 주머니가 뭔지 몰라 그게 뭐냐고 묻자 관우가 주머니를 풀어 수염을 보여주고, 그 아름다운 수염을 보고 감탄하여 미염공(美髥公)이라고 칭한다.[85]
그렇게 조조군에 머무르긴 했지만, 공을 세우면 그것을 빌미삼아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것 같다는 이유로 반쯤 가택연금(?)을 당한다. 그러다 관도대전이 벌어지면서 조조군이 안량에게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가자 구원투수로 등판하는데, 조조는 예전처럼 떠나갈 구실을 준다며 망설였으나 정욱이 '유비가 의탁할 곳은 원소군밖에 없으니 관우가 안량을 죽이면 화난 원소가 유비를 죽일 것이다'라며 간언하여 받아들인다. 그렇게 안량은 관우에게 단 1합에 죽고,[86] 예상대로 원소는 좌우로부터 '관우가 안량을 베었다'는 소문을 듣고 유비를 배신자로 몰아 죽이려 했으나 유비의 반론[87]과 우유부단이 발목을 잡아 어물쩍 넘어간다.
이에 원소 측에서도 구원투수로 문추를 내보내고, 유비는 유비대로 '안량을 벤 자가 관우인지 확인하겠다'는 핑계로 함께 참전하지만 문추의 반대와 원소의 우유부단 때문에 후방에 배치된다. 그렇게 문추가 나타나자 조조는 다시 관우를 내보내고, 문추도 안량과 달리 제법 버텼지만 얼마 못 가 목이 달아난다. 이 때 유비는 관우의 깃발을 보고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지만 원소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다시 배신자로 몰려 죽을 뻔했다가, 이번엔 '그럼 내가 그 관우를 원소군으로 영입하겠다'고 말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당연히 원소는 우유부단과 더 큰 이득 때문에 좌우의 참소를 물리치고 유비를 용서한다.
한편 관우가 공을 세우자 조조는 어떻게든 관우의 발을 묶어두기 위해 조정에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에 봉한다. 이 때 원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판본에서는 처음에 수정후(壽亭侯)에 봉한 것을 관우가 '조조의 부하가 될 순 없다'는 생각에 거절했으나, 조조가 꾀를 내어 한(漢)+수정후(壽亭侯)로 명칭을 바꾸자 그제서야 한나라에 충성할 수 있겠다며 받아들이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사실 정사에서 관우가 받은 직위인 한수정후는 한수(漢壽)+정후(亭侯)로, 한수는 그냥 지금의 호남성 상덕현 지방을 가리키는 지명(地名)이고[88] 정후는 관내후 가운데 최하 등급이다.[89] 조선의 선비 이덕무도 삼국연의를 논하면서 '예전에 내가 한수는 지명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한 것으로 보아 이런 얘기는 조선에서도 잘 알려진 이야기였던 듯하다. 하지만 한나라를 위한 충성심이 부각되어서 그런지 대다수의 독자들은 '한+수정후' 쪽을 더더욱 좋아하는 듯하다.
그러나 원소 쪽에서도 멍하니 있지 않고 진진을 보내 하북에 유비가 있다는 소식을 알리자 관우는 투항할 때의 세 가지 약속대로 조조에게 정식으로 작별을 선언하고 떠나려 하지만,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던 조조가 피객패를 내걸고 손님을 피하는 바람에 번번이 만나지 못하고[90] 장료 역시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관우도 조조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속셈임을 깨닫고 조조에게서 받은 물건과 시녀를 모두 집에 두고는 투항하기 전부터 지니고 있던 물건만 챙겨 두 부인과 함께 하북을 향해 출발한다. 조조는 순라대원의 보고를 받고 뒤늦게 사실을 깨달았고 부하 장수들은 모두들 관우가 배은망덕하다며 쫓아가 죽여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으나,[91] 조조는 '약속은 약속이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못내 아쉬웠는지 그를 배웅하러 군사를 이끌고 쫓아간다. 관우가 이를 눈치채고 두 부인의 가마를 먼저 보낸 후 포위당할 일이 없는 다리 위에 혼자 서 있자,[92] 조조는 오해라며 군사를 물리고는 혼자 관우에게 나아가 간곡히 투항을 권유하지만 역시 완곡히 거절당한다. 이에 조조는 노자로 쓰라며 황금을 선물했으나 관우는 거절했고, 조조가 다시 정 안 된다면 비단 전포라도 받아달라고 하자 관우는 혹시라도 모를 습격에 대비해 말 위에서 청룡언월도로 전포를 들어 받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에 조조군의 장수들이 은혜로운 전포를 칼 끝으로 받다니 무례하다며 비난하지만 조조는 '우리는 다수이고 저 쪽은 혼자이니 경계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라며 일축하고, "참된 장수로다. 저런 사람과 알고 지낸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하리라."라며 아쉬움이 가득한 평가를 내리곤 자신도 허도로 완전히 발길을 돌린다. 그 와중에 이렇게 발목이 잡힌 관우는 먼저 간 수레가 사라지자 당황했으나 산적인 요화가 엄호해 줬다는 것을 알고 안도하지만, 유비의 명예를 위해 그의 합류를 나중으로 미룬다.
이렇게 뒤늦게나마 조조의 허가를 받고 떠나긴 했지만, 통행증도 못 받고 조조군 전군에 통보하지도 않은지라 가는 길마다 방해를 받게 된다. 대놓고 막기도 하고 계략을 꾸며 함정을 파기도 했지만, 결국 필사적인 관우에게 모두 목이 베이고 만다. 이를 '다섯 관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베었다' 하여 오관육참장(五關六斬將)이나 오관돌파(五關突破), 혹은 관우에게만 초점을 맞춰 천리독행(千里獨行) 혹은 천리행(千里行)이라고 한다. 자세한 사정은 다음과 같다.
명예로운(?) 첫 피해자. 통행증이 없는 관우에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정 갈 거면 혼자 가되 나머지 인원은 인질로 남기라고 하다가 관우에게 끔살당했다.
공수의 죽음 소식을 듣고 한복이 시선을 끄는 동안 맹탄이 습격하는 연계 작전을 펼친다. 하지만 적토마가 너무 빨라서 맹탄은 금세 목이 베이고, 그 틈을 노려 한복이 활을 쐈지만 머리가 아닌 팔을 맞추는 바람에 역시 목이 달아난다.
전면전은 힘들겠다고 생각해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겠다며 잔치판을 벌이고 무사들을 숨긴다. 하지만 관우와 동향인 보정 스님이 눈짓으로 알려주는 바람에 계획이 들통나 죽는다.
변희와 비슷하게 전면전을 피하고 일단 쉬라며 역관으로 인도한 후 잠든 사이 밖에서 불을 질러 죽이려 했다. 하지만 관우는 그 명령을 받은 장수 호반의 아버지 호화로부터 편지를 받았고, 애초에 호반 본인이 관우에게 감탄하다 들키는 바람에 호반의 도움을 받아 몰래 탈출하면서 뒤쫓아온 왕식을 죽인다.
관도대전 당시 안량문추가 쳐들어 왔을 때 관우에게 구원받은 적이 있었기에 관우가 이를 근거삼아 설득하자 순순히 지나가게 해준다. 다만 나중에 하후돈에게 추궁당할 게 무섭다는 이유로 황하를 건너갈 배는 주지 않았다.
하후돈의 부장이자 채양의 조카로 황하 나루터를 지키고 있었다. 상관과 삼촌의 영향인지 패기 있게 관우를 막아섰지만 한 칼에 목이 달아난다.
일종의 히든 보스이지만 죽지 않았으므로 오관육참장엔 포함되지 않는다. 조조의 허가를 받지 않은 죄와 부장 진기를 죽인 죄를 묻고자 쫓아와서 관우에게 덤비는데, 특사들이 뒤늦게 따라와 조조가 통행 허가를 내줬다며 싸움을 말리지만 장수들을 죽인 건 아직 모른다는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 치고받는다. 하지만 세 번째로 싸우려는 찰나, 장료가 따라와 '여섯 장수들을 죽인 것도 소식을 들었으니 더 피를 보지 않도록 아예 말리지 마라'는 조조의 말을 전한다. 이에 하후돈은 억울하게 부하를 잃은 나와 조카를 잃은 채양의 입장은 뭐가 되냐며 항변하지만, 장료가 채양에게는 내가 잘 얘기해 보겠다고 달래는 바람에 싸움을 포기하고 장료와 함께 돌아간다.
다만 이 오관육참장 장면은 정사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허구이다. 민담 등 연의 이전의 삼국지 문화에서부터 등장한 창작 장면이라지만 이야기를 지어내려다 보니 이동 경로가 필요 이상으로 구불구불하거나 멀리 돌아가는 편이고, 관우에게 죽은 장수들도 모두 가상인물이다. 또한 정사에서는 유비의 처자가 관우와 함께 잡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미부인은 이후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다만 감부인은 형주까지 유비를 따라왔으니 감부인만은 데려왔을 수도 있다. 사실 조조가 서주에서 유비의 처자를 모두 잡아들였는데 감씨가 여인 혼자의 몸으로 유비가 있는 하북으로 갔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게 하북의 경계까지 도착한 관우 일행은 쉴 곳을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인근의 여남 부근에 장비가 성을 뺏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먼저 손건을 보내 소식을 전하지만, 장비는 전후 사실을 몰랐던 탓에 관우가 의리를 저버리고 조조를 섬겼다며 손건과 두 부인의 설명도 무시하고 관우를 죽이려 든다. 더더군다나 장료의 설명을 듣고도 개인적인 불만과 진기의 원수를 갚고자 군사를 몰고 쫓아온 채양 때문에 상황은 더더욱 꼬이고 만다. 이에 관우가 채양을 베서 오해를 풀겠다고 하자 장비는 북을 세 번 치기 전에 그의 목을 베라며 엄포를 놓는다.[93] 그러자 관우는 북을 한 번 칠 때 채양과 맞서고, 두 번 칠 때 목을 베고, 세 번 칠 때 돌아오는 식으로 가볍게 해내고 장비의 오해를 푼다. 그 직후 미방&미축 형제가 소식을 듣고 오면서 유비가 없긴 하지만 그들은 오랜만에 화합을 즐긴다.
마지막으로 유비를 데려오기로 하지만 자신이 안량과 문추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한지라, 하북엔 들어가지 못하고 손건을 보내 모든 소식을 전하고 자신은 유비를 흠모하던 변방 세력인 유벽&공도의 배려를 받아 여남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유비와 손건이 간옹의 도움을 받아[94] 몸을 빼내는 동안 관우는 인근에 있는 관정#s-2의 집에 머무르다 그의 차남 관평을 관우의 양자[95]로 삼기로 하고, 황건적의 잔당이지만 자신을 경모하던 주창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하북에서 빠져나온 유비의 마중을 나갔다 돌아온 사이 주창이 누군가에게 패배하자 상황을 파악하러 갔다가, 공손찬 휘하에서 인연을 맺었던 조운과도 재회하게 된다. 이렇게 유비 삼형제와 식솔이 모두 모이고 유벽&공도가 아예 여남을 내주면서 관우는 잠시나마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나중에 사마휘가 지적한 대로 전군을 다스릴 참모가 없었기에 그들은 원소를 가볍게 제압한 조조군에게 쫓겨 여남을 뺏기고 유표가 있는 형주로 피신을 가지만, 그마저도 채모 일당이 형주를 갖다 바치는 바람에 방랑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서서와 사마휘의 귀띔을 받은 유비가 세 번에 걸쳐 '''제갈량'''을 만난 덕분에 그들은 처음으로 기반을 다지고 대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관우는 의제 장비와 함께 제갈량을 백면서생이라며 얕보고 맏형 유비의 물 만난 물고기 이야기도 가볍게 무시했지만, 박망파에서 제갈량의 책략을 시큰둥하게 여기며 따랐다가 대승을 거두자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때부터 진심으로 충성한다.
적벽대전에서는 동오와 협력하기 위해 유비가 주유를 만나야 하자 장비 대신 유비의 경호원으로 대동했고, 덕분에 자기 때문에 암살을 망설이던 주유의 수상한 태도를 먼저 눈치채고 아무것도 모르던 유비에게 자리를 피하자고 권하여 목숨을 건진다. 이후 동오가 조조군을 대대적으로 박살내자 제갈량이 패퇴한 조조군을 습격하기 위해 조운과 장비를 내보내면서도 정작 자기는 과거에 조조와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제외하자, 명령을 어길 시 죽음으로 보상하겠다는 군령장을 써가면서까지 출진한다. 이후 조운과 장비에 이어 조조를 세 번째로 급습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목불인견의 꼴이 되어가며 쫓겨온 조조군의 몰골도 몰골이거니와 조조가 오관육참장 당시 순순히 보내준 것을 언급하며 인정에 호소하자 결국 길게 탄식하며 못 본 척 보내주고 만다.[96] 당연히 돌아오자마자 제갈량의 추궁을 받고 죽을 뻔했으나, 유비와 장비가 무릎을 꿇고 비는데다 제갈량도 애초에 조조를 살려보낼 것이라 예상하고 보냈으므로 크게 꾸짖기만 하고 넘어가는 선에 그친다.
비록 정사에는 1도 나오지 않는 허구라고는 하지만, 루쉰이 중국소설사략에서 루쉰은 이 부분을 매우 칭찬했고 중국 고전 소설을 철저하게 평가한 학자 왕궈웨이도 "삼국지연의는 순문학이 될 수 없지만 화용도의 구절만은 대문학자가 아니고는 쓸 수 없다"라며 극찬했다. 작중의 조조가 언급했듯이 오관육참장 당시의 떡밥을 멋지게 회수하면서도 관우와 조조 사이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잘 풀어낸 명장면이라 하겠다. 자세한 것은 화용도 참고. 또한 정사에서는 남군 공방전이 주유군과 유비군이 연합하여 함께 싸워 남군을 점령한 뒤에 주유가 유비에게 땅을 빌려줬다고 기록됐지만,[97] 연의에서는 주유군이 고생고생해서 조조군을 물리친 틈을 타 유비군이 낼름 먹은 것으로 각색되면서 아예 참전하지 않았다.
이후 형주 남쪽의 4군을 흡수하는 과정은 정사에서는 조운과 제갈량이 주로 담당했으나, 연의에서는 관우가 장사 공략을 자청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 때 제갈량이 앞서 얘기한 화용도 건을 들먹이며 '의도는 알겠지만 황충을 얕보지 마라'라고 충고하자 화가 나서 도부수 5백명만 데리고 장사로 출진하고 양령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잡장이 나서대자 단숨에 베어버린다. 이후 장사의 기둥 황충이 출진하자 일기토를 벌이는데 황충의 말이 무릎이 꺾이면서 틈이 생겼으나, 관우는 '비겁하게 벨 생각은 없으니 말을 바꿔 타고 오라'며 보낸다. 다음 날 황충은 한현의 조언대로 활을 쏴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차마 자신을 살려준 관우에게 속임수를 쓸 순 없었기에 일부러 화살 없이 시위를 당겨 활을 쏘는 시늉만 두어번 했다. 이에 관우가 이상히 여기면서도 말을 달려오자 이번엔 진짜로 화살을 날리는데 일부러 관우의 투구 장식 끝에 맞췄기에 관우가 감탄한다. 그리고 장사로 돌아간 황충은 배신자로 몰려 한현에게 죽을 뻔했으나 위연이 한현을 죽이고 투항하면서 목숨을 건지고, 관우도 위연의 뜻에 따라 장사를 접수한 후 유비에게 그 소식을 알린다. 그 뒤에 칩거하던 황충도 반골의 상이라며 죽을 뻔한 위연도 모두 유비의 휘하로 들어오면서 알고 지내게 된다.
다만 정사에서 훗날 입촉 즈음에 오호대장군에 제수될 때 '마초는 몰라도 황충이 나랑 같은 급이라니 이게 뭐냐'라며 항변하던 장면이 그대로 삽입되는 바람에, 남자답게 싸워놓고 나중에 트집잡는 것처럼 보이는 모순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몇몇 판본에서는 마초가 의탁하고 나서 한 게 뭐가 있느냐며 마초를 까는 것으로 바꾸기도 한다.[98] 이 각색은 정사-연의 모두 관우가 위와 같이 불만을 표하자 제갈량이 "암요, 황충이 장비나 마초와 앞을 다투면 다퉜지 감히 염(미염공의 약칭)에게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라며 편지를 보내 달래는 부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입촉 이후로 관우는 형주에 진수하는데, 정사에서는 반준과 불화했으나 연의에선 그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고 나중에 형주 공방전에서 성실한 조루가 아닌 반준에게 군량 관리를 맡겼다가 배신당했다는 식으로 언급된다. 다만 반준 문서를 보다시피 정사의 반준은 관우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안 좋을 뿐 공사의 구분이 명확했고 형주가 함락돼도 칩거하다가 투항했는데, 연의에서는 처음엔 믿음직했으나 나중에 배신자가 되는 등 전후관계가 바뀌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손권의 관솔을 내쫒은것은 동일하지만 익양대치 사건 자체가 아예 등장하질 않는다. 따라서 이 당시 관우가 감녕의 별동대가 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도강을 단념한 일화 역시 연의에서 보이질 않는다. 단도회는 형주를 탈환하고 관우에 이에 응하지 않을시 관우를 죽이려는 노숙의 책략으로 각색된다. 실제 정사에서도 단도회 자체는 일단 노숙쪽이 먼저 제의하고 관우가 이에 응해 참여한게 맞고 나눈 대화 자체도 의외로 연의에서도 비슷하다. 관우가 "오림의 전쟁은 좌장군께서 친히 시석을 무릅쓰시고 협력하여 적병을 깨부수었거늘 어찌 헛수고만 하고 한 척의 땅도 가질 수 없겠소? 이제 족하께서 다시 땅을 찾으러 오신 것이오?"라고 하자 노숙이 그에 대해서 정사와 비슷하게 "우리 주군께서 장판에서 격파된 유황숙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 아닙니까? 어찌 그런식으로 말씀하십니까?"이라는 논리로 반박하자 관우가 화답하지 못하는 사이 주창(정사에선 이름없는 장수)가 정사와 같은 논리로 반박하자 관우가 호통을 쳐 물러나게 하는것까지는 거의 같다.
다만 여기에서부터 나관중이 관우에서 버프를 거는 각색이 나오는데 원래 노숙이 연회장에 복병을 숨겨두었는데 회담 도중 끼어든 주창을 관우가 참견한다며 쫓아버리자 주창은 기회를 틈 타 연회장을 빠져나와 미리 대기시킨 관평 등에게 연락하여 배를 접응토록 한다. 관우는 술주정을 빙자, 노숙을 붙잡고 인질극으로 빠져나오고 복병들은 노숙이 다칠까봐 감히 움직이지 못하여 계략은 실패하는데 이에 노숙과 여몽은 관우를 칠 것을 결의하고 손권 역시 격노하여 관우를 치려다가 조조의 침공으로 그만둔다. 이후 조조가 장로를 처 한중을 점령하자 유비측이 이를 두려워해 강하, 장사, 계양을 양도한다는 큰 줄기 자체는 정사와 같다.
손권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키자며 사자를 보내오자 관우의 대답은 "호랑이의 새끼를 의 새끼에게 줄 수 있겠느냐."였다. [99] 이는 관우빠인 모종강조차도 "손권이 개라면 관우와 의형제를 맺은 유비는 손부인과 혼인을 했으니 호랑이 형과 개 누이가 혼인을 맺은 것이고, 호랑이 시동생에 개 형수가 있는 셈이다."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의외로 이 장면은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정사에선 그저 관우가 손권의 혼인사자를 모욕했다는 것으로만 나올 뿐, 손권이 거짓으로 지원을 해준다고 해놓고 안 왔다면서 담비 새끼라고 욕한 기록은 있으나 이것도 배송지가 '그랬다면 지원명목으로 들가면 되지 기습을 할 필요가?'라고 의문을 표한 기록이다.
번성 공방전에서는 양성을 공격하다가 방덕이 날린 독화살이 오른쪽 어깨에 맞아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된다. 관평을 비롯한 장수들은 걱정했으나 명의 화타가 스스로 찾아와서 관우를 치료하는데, 관우는 바둑을 두며 담소하는 가운데 화타에게 자신의 팔을 맡긴다. 관우는 살을 절개하며 피가 흐르는 상황에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바둑에만 열중했다. 이 장면은 정사에도 등장하는 사실이긴 하나 양성을 공격하다 화살에 맞은 상처를 치료한 것이 아니라 예전에 맞은 화살 때문에 통증이 가시질 않아 치료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의원 역시 화타가 아니였으며 관우는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에 부상을 입었다.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는 데는 주로 오른팔을 사용하므로 관우를 부각시키기 위해 변경한 것으로 여겨진다.[100]
결국엔 장마로 인해 불어난 강물을 이용해 우금과 방덕을 사로잡는다. 사실 이 장면은 정사에서는 관우의 수공이 아니라 그냥 수재(水災)였지만, 정사 방덕전에 관우가 배를 타고 공격했다는 문구가 있으므로 관우가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당장 온회는 수해에 조인이 대비하지 못하는 사이 관우가 이 기세를 타고 조인을 공격할 것을 우려했으며 방덕전, 우금전, 조엄전 등에는 관우가 수군을 준비해 면수를 장악하고 위군을 공격한 정황이 있다. 그 결과 연의에서는 관우가 홍수가 날 거라 예상하고 배를 만들라고 하자 관평이 기이하게 여겨 물어봤다가 뒤늦게 깨닫고 감탄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조조군에도 바보만 있는 것은 아니라 성하가 이를 정확히 예측했으나 총사령관 우금은 씹어버리고, 그나마 부장인 방덕이 귀담아듣고 둘이서 나름대로 대비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우금은 신나게 워터파크(…)를 즐기다가 꼴사납게 관우에게 살려달라며 투항하고, 방덕은 항복을 권유하는 동형동초를 베어버리고 성하와 함께 마지막까지 저항한다. 하지만 성하마저 전사하자 배를 뺏어 조인에게 도망가다가, 어느새 쫓아온 주창이 배를 들이받는 바람에 물에 빠져 그대로 주창에게 잡힌다. 원래 물질에 익숙하여(=수영을 잘 하여) 손쉽게 방덕을 잡았다고 설명이 나온다.
정사에서는 관우가 손권이 고의로 자신에게 지원을 늦게 보내자 이에 격분하여 손권을 오소리라고 모욕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연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관우가 우금과 포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촉과 오의 상수 경계 영릉에 있던 상관 군량고의 쌀을 마음대로 가져갔다는 기록도 연의에서는 삭제되어 나오지 않는다.
오나라측에서 배신을 때리고 관우도 서황에게 패퇴하자 관우 등은 맥성에 고립된다. 유비의 양아들 유봉에게 요화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지만 맹달의 간언에 넘어가는 바람에 거절당한다. 결국 관우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유비에게 돌아가기 위해 맥성을 빠져나와 조루의 목숨을 바친 도움을 받으며 도주하지만, 여범이 점을 쳐서 복병을 매복시킨 바람에 관평과 함께 사로잡힌다. 이것은 연의에서 살짝 편집한 것으로 정사에서는 오주전, 오범전을 종합하면 이때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도주했다, 당초 손권은 오범에게 그가 정말 항복하려는 것이냐고 질문했는데 오범은 관우가 도주할 기미가 있으며 투항한다는 말은 거짓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에 손권은 반장을 시켜 관우의 길을 끊도록 했으며 정찰하는 자가 돌아와 관우가 이미 떠났다고 보고했다. 오범이 이에 관우는 사로잡힐것이라는 예측을 했고 과연 그리되었다. 우번전에 따르면 우번 역시 이때 관우의 운명을 점쳤다고 한다.
나관중본에서는 맥성에서 도주하다가 궁지에 몰린 관우와 관평이 이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고 하늘이 부르는 소리에 맞춰 승천한다. 해당부분은 다음과 같다.

관우는 아들 관평 등과 더불어 맥성 북문으로 탈출한다. 이르는 곳마다 오나라 복병들과 맞닥뜨리면서 결석(決石) 땅에 도달한다. 때는 5경에 가까운 시각인데도 순간 함성소리가 들리면서 다시 복병들이 공격해 왔다. 돌아보니 뒤쪽에는 주연과 반장의 정병이 기습한다. 관우는 반장의 부하인 마충과 맞닥뜨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린다.

"운장은 인간 세상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옥황상제의 조칙이 있으니 범부와 승부를 겨루지 말라."

관우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깨닫는다. 마침내 싸움을 하지 않고 무기와 말을 버린 채 관우와 관평 부자(父子)가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가정본)

이는 관우 신앙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모종강본부터는 관우 부자가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정상적인 장면으로 변경되었다. 정사에서 손권에게 관우를 살려주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데, 연의에서는 좌함이라는 가공인물이 관우 부자 참수를 권유한다. 관우의 적토마는 마충에게 하사되었으나 풀과 물을 먹지 않고 스스로 굶어서 죽었다. 당연하지만 정사에서 관우는 적토마를 타지 않았으니 그냥 문학적 연출이다.
연의에서는 관우의 유령이 유비의 꿈에 나오는 등 죽고도 유령으로 계속 등장하는데 당연하지만 모두 허구다. 일단 자신의 죽음에 한을 품고 돌아다니다 예전에 오관육참장 때 사수관에서 변희로부터 목숨을 구해준 보정 선사와 우연히 만나는데, "그렇게 치면 당신에게 죽은 안량과 문추와 오관의 여섯 장수는 어떡하란 말인가"라는 가르침을 듣고 성불(?)한다. 이 부분은 익주명화록에서 관장군이 옥천사를 세우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는 기록을 보고 창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오나라로 돌아가 관우를 죽인 공으로 손권에게 축하주를 받던 여몽에게 빙의하더니 손권을 꾸짖는다. 이에 손권이 놀라 다른 장수들과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렸으나 여몽은 칠공분혈로 죽어버린다. 사실 정사에서 여몽은 번성 공방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한데다, 이 장면은 의리의 화신으로 불리는 관우가 쪼잔하게(…) 복수하는 인상을 주는지라 삭제하는 판본도 많다. 어쨌든 타이밍이 타이밍인데다 관우의 인기가 엄청났으니,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입소문이 퍼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무튼 손권도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눈을 감으면 관우의 얼굴이 아른거리자, 좌우의 조언을 받아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내 책임을 떠넘기기로 한다. 조조는 관우가 죽었다는 말에 기뻐했으나[101] 사마의는 그것이 손권이 책임을 떠넘긴 것임을 깨우쳐 준다. 이에 조조는 관우의 목을 가져오라 했는데 살아 있을 때와 변함이 없자 장난삼아 "그 동안 잘 지냈소?"라고 말을 걸었는데, 갑자기 죽은 관우의 목이 입을 열고 눈을 움직이며 수염과 머리카락을 모두 곤두세우자 기절초풍한다. 조조는 한참 뒤에야 깨어나서는 "역시 운장은 천신이구나."라며 읊조리고, 이후 여몽이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문까지 듣자 관우를 형왕(荊王)으로 추봉하고 손권이 보내준 목에 나무를 깎아 직접 몸을 만들어 붙여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102] 물론 이것은 손권이 떠넘긴 책임을 다시 손권에게 돌리는 계책이기도 했다. 과연 유비는 분노의 칼끝을 손권에게 돌린다.
이후 요절한 정사와 달리 장포와 함께 이릉대전에 참전한 친아들 관흥을 도와준다. 관흥은 아버지의 원수들 중 하나인 반장을 보고 뒤쫓았으나 숲 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한 산장을 발견하자 염치불구하고 쉬어가기를 청한다. 이에 집주인이 응하자 집 안에 들어가다 아버지의 화상(畵像)이 사당에 모셔진 걸 보고 울음을 터트린다. 사정을 알게 된 집주인은 자신은 물론 동네 사람들 모두가 관우를 신으로 모신다며 말하고는 관흥을 정중히 모신다. 이 때 우연찮게 반장도 길을 헤매다 그 산장에 도착하자, 관흥은 집주인의 도움을 받아 반장을 급습한다. 반장은 날쌔게 도망가려고 했지만 관우의 혼령이 문간에 떡 서서 노려보자 식겁하고, 그 사이 쫓아온 관흥에게 목이 베여 죽는다. 관흥은 청룡언월도를 되찾아 돌아가고, 집주인은 반장의 목 없는 시신을 태워버린다(…).
장비가 유비가 죽고 꽤 시간이 흐른 제갈량의 북벌에서도 등장한다. 장포, 마대와 함께 조조의 사주를 받은 북방의 서강군을 상대하다 혼자가 되는데, 이 때 대장인 월길과 마주쳤으나 월길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철퇴를 피한다는 게 강물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월길도 어느새 강물로 떨어지고 있었고, 저 위에선 누군가가 혼자서 서강군을 박살내고 있었다. 관흥이 감사를 표하기 위해 다가가보니 그 사람은 아버지 관우였고, 관흥이 놀란 사이 관우는 한 방향을 가리키며 '이 길로 도망가라. 내가 계속 지켜주겠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진다. 관흥이 그 길로 도망가다 장포를 만나는데, 장포도 관우의 혼령이 나타나 '너는 이 길로 가서 내 아들을 구해주라'라고 말했다며 놀라워한다. 이후 관우가 연의에서 등장하는 일은 없다.

4. 가족 관계


  • 정사에 기록된 인물
    • 관평 - 관우의 장남.
    • 관흥 - 관우의 차남.
    • 관우의 딸 - 실존인물이나 민간 전승에서는 관은병, 관삼소저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 관통 - 관우의 손자, 관흥의 적자.
    • 관이 - 관우의 손자, 관흥의 서자.
  • 야사나 민간전승에 기록된 인물

5. 평가



5.1. 위인


관우關羽:떠돌이 무사에서 신이 되기까지
어느나라 못지 않게 중국 역시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고전 역사들에 바탕한 민족주의가 있고, 그 속에는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관우는 신격화될 만큼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유명한 위인이다. 물론 여기서의 민족 개념은 근대 이후 창안되어 통용되는 서양식의 민족 개념이라기보다는 진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전한 때 정립되었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중국인들의 중화사상 또는 한족의 개념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다.
중국인들은 관우를 관공이라고 높히며 매우 존경한다. 사후 약 2천 년인 오늘날에도 관우는 수많은 팬들이 있으며,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각종 게임, 영화, 드라마, 그리고 만화 등 여러 창작물에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들은 관우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종교적으로 신봉할 정도다. 더불어 관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들도 상당히 많다.
물론 이는 중국에만 한정된 것이며, 한국과 일본에서는 삼국지 속 잘 알려진 영웅으로 취급하거나 무속의 경우 일종의 신령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평생에 걸쳐 고난을 겪은 끝에 마침내 천하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믿었던 아군과 동맹에게 배신당해 허망하게 죽고 만 관우의 이름은 오히려 이천 년이 넘도록 생생히 살아남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추앙은 높아져 후대에는 공(公)에서 왕(王)을 넘어 주군 유비와 동급인 황제(帝)까지 추숭되었고[103] 급기야 신으로 모셔지기까지 했다. 그것은 단지 충(忠)을 강요하고자 하는 정치적 프로파간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우는 애당초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었다. 출생년도와 출신성분부터가 불명확했고, 전장에서는 종종 패했으며, 적에게 항복하기도 했었고, 협잡에 가까운 속임수도 썼다. 남의 아내를 탐한 적도 있었으며 주위 사람들과는 화목하지 못했고 오만한 성품으로 인해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모든 결점을 뛰어넘을 영웅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주군 유비에 대한 그 끝 모를 의리. 이미 손아귀에 넣은 부귀영화를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내던지고 적수공권인 유비에게 돌아가는 관우의 모습은 실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유비가 모든 인재와 병력을 뽑아간 이후에도 얼마 안 되는 남은 병력만으로 죽을힘을 다해 형주를 지켜내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이었으며, 신념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자였다.
관우는 결코 백전불패의 명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범한 대중이나 소시민들이 이상(理想)으로 생각한 삶의 태도를 그는 현실세계에서 끝까지 지켜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끝내 굴복하지는 않았다. 강자에게는 도도했지만 약자에게는 너그러웠다. 하여 그의 비극적인 삶이 마침내 종막을 고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관우는 영원불멸의 이름을 얻었다.

5.2. 통솔



5.2.1. 전적


  •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유비가 위급에 처할때마다 장비와 함께 격투하여 위급을 구하고 유비 세력 초기부터 그의 대업을 도왔다고 한다.
  • 조조가 유비를 쳤을 때, 하비의 수비를 맡았다. 유비는 패해 원소에게 달아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한다.
  • 백마전투에서 조조 휘하로 출진하여 장료와 선봉을 맡았다.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의 수급을 베어 돌아왔으며, 원소의 제장들이 아무도 당해내지 못하여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이 공으로 조조에 의해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해진다.
  • 당양 장판파에서 추격당하던 유비를 수군을 이끌고 구원했다.
  • 유비와 주유가 남군을 공격할 때 관우를 별도로 보내 북쪽 길을 끊어놓았다.
  • 번성 전투에서 조인을 궁지에 몰아넣고 번성에서 수해에 빠진 7군을 궤멸시키고 우금, 방덕을 사로잡았다.
  • 결과적으로 서황과 번성 내부의 협공에 밀려 번성 공략에 실패하고, 조조군과 손잡은 오의 공격에 형주를 점령당한다. 근거지와 퇴로를 잃은 채 군대가 와해되어 맥성에 고립되었다가 달아나지만, 결국 오군에 사로잡혀 참수된다.

5.2.2. 전술적 평가


강릉 전투를 보자면 소수의 병력으로 여러개의 길목을 나누어 지키는데 휘하 병력을 합친 것보다 몇배는 많은 대군이 한쪽길을 뚫겠다고 죽기살기로 달려든 거라면 버틸 재간이 있을까? 강릉 전투에서 손유 연합군의 주력은 조인의 군세와 싸우고 있었고 손권의 본군 역시 따라 합비를 공격하고 있었다. 강릉 전투만 해도 1년 가까운 장기간의 전투였다.(이 과정에서 주유가 부상을 입기까지 했다.) 게다가 유비나 손권이나 강릉 함락 이후에 관해서는 각자 다른 속내를 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쪽 방면의 통로를 차단할 뿐인 임무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할당할 수 있을까. 압도적인 병력이 있다면 조인의 군세를 상대로 그렇게 애를 먹을 이유가 없고 여유 병력이 있다면 조인군을 신속하게 섬멸하는 게 우선이다.
청니 대치에 경우 유비가 대병력을 이끌고 촉에 가 있는 시점에서 잔류한 군을 모조리 출동시켜 각개격파라도 당하는 날이면 유비 세력은 그대로 끝장이다. 유비쪽에 만일의 일이 생길 때 대응할 병력과 강릉을 계속 지킬 병력을 온존한 상태에서 출동시킬 수 있는 병력이 관우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의 상한선이고 그나마도 아낄 수 있으면 아껴야 하는 처지다.
번성 전투의 경우 번성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상황이니 버티는데까지 버텨보자고 생각하는 거야 누구라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얘기다. 거기서 버티느냐 버티지 않느냐의 선택지 중 정답이란 건 없다. 또한 서황과의 전투도 자세히 보면 관우의 전투 스타일을 확인 할 수 있다. 관우가 조인과 싸운 지 몇개월만이었을까? 조인, 우금의 군세와 장기간 전투를 벌인 피로와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는데 병력이 나뉘었다는 점. 그리고 위와 오가 작정하고 대병력을 움직이고 있었고 서황에게 2만 4천의 대규모 지원이 있어 이끄는 군대의 숫자가 적지 않았을 거라는 점을 고려하면 병력은 서황쪽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거기에 곧 장료 등 후속 병력이 몰려올테니 병력 손실과 피로를 돌보지 않고 전력을 다할 수 있다는 이점을 생각하면 당시 서황이 지는 게 이상할 정도다. 오히려 번성과 양양 전투 막바지를 보면 관우는 번번히 소수의 지친 군세로 원기넘치는 대군의 공격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도 충분히 싸울만큼 싸운 후 치명적인 피해만은 받지 않고 물러나는 능력이 적군에게 크게 어필해서 그렇게 명성을 떨친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관우는 경계 중이던 군세와 직속의 예비병력을 합쳐 서황의 군세와 싸우는 동안 자신의 군대가 강력한 적의 야전군과 요새 사이에 끼어버린 위기 상황에서 어느 정도 피해를 보긴 했지만 번성을 포위한 군세와 주변에 전개한 군세를 휘하 군의 전투능력을 유지한 채 강 너머로 무사히 철수시키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전술적으로 꽤나 고난이도에 속하는 군대 운영이다. 그리고 전략적 목표를 조조의 대군에 맞서면서 면수의 완전 봉쇄와 양양의 함락으로 변경하고 양양을 물셀틈 없이 포위해 양양과 외부의 연락을 완전히 막았다. 이렇게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에 과감하게 공세를 취하다 전술적으로 몰려도 주력을 온존시켜 예비 계획으로 다시 압박을 가하는 것이 관우 본연의 전투 스타일이었다면 관우가 국지전에서 졌다는 기록이 많으면서도 압도적인 명성을 날리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상대 입장에서는 귀찮고 괴롭기 짝이 없는 타입이니까.[104]

5.2.3. 당대의 평


(전략)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후략) - 주유전

(전략)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유전

관우와 땅을 나눠 접경하고 있었는데, 관우가 매섭고 빼어난데다 (후략) - 여몽전

관우는 날래고 예리하니(驍銳)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반드시 근심이 될 것입니다.

관우는 용맹하고 교활하니(驍猾), 다만 정남(조인)에게 변고가 있을까 두려울 뿐이오.

- 온회, 위는 온회전, 아래는 자치통감에서의 발언

(전략) 관우와 장비는 삼군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후략) - 유엽전

촉나라는 작은 나라일 뿐이며, 명장으로는 오직 관우만 있었습니다. - 유엽전[105]

장비와 관우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유비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웁니다. - 곽가전

유비는 영웅의 명성이 있고,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인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 정욱전

유비는 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으며 사람을 얻는데 사력을 다합니다. 제갈량은 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알고 바르면서도 모략이 있으니 재상으로 삼을 만합니다.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으니 모두 만인지적으로 장수로 삼을 만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로, 유비의 지략에다 세 인걸이 그를 보좌하니 무엇을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 선주전 주석 부자

(전략) 관우가 자신의 용맹함과 명성에 기대어 병사를 인솔하는 정확한 법칙이 없었으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돌발적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앞뒤로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병사들을 잃게 된 것입니다. 관우도 상랑과 문공(文恭)처럼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 요립전[106]

폐하(손권)께서는 신무의 자태로써 하늘의 안배를 받아 오림에서 조조를 무찌르고, 서릉에서 유비를 패배시켰으며, 형주에서 관우를 붙잡았는데, 이 세 명의 적은 당대의 영웅호걸이었지만 모두 그 예봉을 부러뜨렸습니다. - 육손전


5.2.4. 평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이라고 꼽히는 장수들 중에서 전적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는 많다. 관우 역시 마찬가지다. 관우의 명성에 비해 정사에서는 패배한 기록이 많다는 점 때문에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이 관우에 대해 남긴 평가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용맹스럽고 무서운 장수라는 이야기''' 뿐이다. 그것도 조조, 정욱, 곽가, 주유, 여몽 같이 당대의 걸출한 인물들이 인정했다는게 특이점으로, 사후 수백년간 용맹한 장수들이 관장지용이라고 불리며 관우와 장비에 버금간다는 소릴 들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가 받은 만인지적이라는 칭호는 그저 무예가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용맹과 병법이 뛰어난 장수에게 주는 것이다. 이는 그가 보여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또, 위에 언급된 관우의 능력을 평가한 이들이 대부분 '''그를 직접 써봤거나 적대해 본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용병술과 군략에 뛰어났던 인물들이므로 관우라는 인물의 역량을 과대평가했을 가능성이 낮으며, 딱히 관우와의 다른 이해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요즘 말로 립서비스를 해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관우를 만만하게 여긴 이들이 없고 오히려 관우를 이용해야 한다든가 경계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만 가득하다.
특히 주유와 조조의 평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일단 주유의 경우, 관우와 장비를 직접 써봤으며 본인의 군사적 능력도 출중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내가 관우와 장비를 부리면 서촉을 평정하고, 조조 역시 도모해볼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당시 오의 군사적 1인자였던 주유가 저런 평가를 내릴 정도의 장수였고, 주유뿐만이 아니라 여몽 또한 손권에게 "관우는 '''용맹하고 군사를 부리는게 보통이 아니라 대적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적어도 오에서는 주유와 여몽같은 총사령관급 인사들이 관우의 군사적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동시에 경계하고 있었음이 명확하다. 조조 또한 관우를 직접 써 본 사람인데, 그는 관우에게 한수정후라는 높은 직위를 주면서까지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만드려고 노력했었다. 게다가 번성 공방전 당시 조조가 관우에게 대응한 양상을 보면 조조가 그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두려워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조인이 수세에 몰리자 1차적으로 '''우금'''과 방덕을 파견해서 구원을 시도했으며, 이들이 격파당하자 '''서황'''을 추가로 투입했고, 서황마저 실패하자 서황에게 12영의 지원병력을 추가적으로 더 보태어 결국엔 번성포위를 무너뜨렸으며 본인이 친정을 계획하는 한편 '''오와 밀약을 맺어가면서'''까지 합비 방향에 있던 '''장료'''와 양주 26군의 사령관 하후돈을 관우쪽으로 소환했으며 손권이 그렇게 신뢰할만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손권이 회남으로 혹시나 처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예 안했는지 온회전에 나오듯이 회남에 주둔하고 있던 여러 주의 군사들까지 각기 소집하며 회남전선을 텅 비우면서 박박 긁어모아 형주로 보내고 있었다. 당시 형주군과 위군의 역량 자체는 누가 봐도 위군이 훨씬 정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국 조조는 오직 관우 한 사람을 경계하여 '''당시 쓸 수 있었던 모든 오자양장들'''[107]'''을 동원했고 회남을 텅 비웠다'''는 결론이 된다. 앞서 소개된 주유의 관우에 대한 평가를 고려해보면, 당연히 조조가 겁쟁이거나 관우를 과대평가했을 가능성보다는 관우가 '그 조조쯤 되는 인물도 저렇게 경계할만큼' 뛰어난 장수였을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이 외에 유엽도 "촉나라는 소국이고, '''장수는 관우뿐이다'''"라고 했는데, 유엽은 조조가 한중을 정벌한 직후에 여세를 몰아 익주의 유비를 치지 않으면 후환이 우려된다고 간언했을 정도로 전략적 식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에게도 용력이 아닌 장수로서 높게 평가받았다. 단순히 연의의 여포같은 맹장 타입이었으면 저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 또한 유비군 내에서도 관우는 주로 비상시에 최고 사령관인 유비의 별동대 및 대체재로 여겨졌던 정황이 있다. 실제로 유비는 자신이 병력을 이끌지 않을 때에는 대부분 별도의 군을 관우에게 통솔하게 했다. 서주에선 하비에 진수하게 했고 형주에선 별도의 수군을 이끌게 하고 이후에도 형주에 진수시키면서 독자적인 군권을 주었다. 유비가 용인술이 굉장히 뛰어났으며, '''한중에서는 한중태수 자리를 장비가 아닌 위연한테 줬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순히 관우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서 형주를 맡긴 게 아니라, 관우가 충분히 단독으로 형주를 지켜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관우는 탁군에서 의용군을 일으킨 유비의 거병에 함께한 거병동지다. 유비는 황실의 후예라지만 사실상 밑바닥 평민이었고, 관우와 장비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을 받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관우의 용병술은 조조나 주유 같은 부유한 엘리트들도 인정할만큼 우수했다는 점에서 그가 실전에서 구르고 살아남으며 터득한 통솔력이 결코 폄하될 이유가 없음을 파악 가능하다.
많이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관우는 전성기 형주의 1/3도 안 되는 강릉, 무릉, 영릉 삼군의 병력으로서만 천하를 진동시켰다. 북쪽에선 위가 있고 동쪽엔 오가 있고 전선이 2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오에서는 여몽이 기회를 엿보았고 위도 조인이 지키고 언제든 서황, 장료 등이 치고 내려올지 모르는데다 주요 참모, 장수진은 익주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물론 관우가 손권과 외교를 잘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그 동맹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방어하기 유리한 양번에 집착했다.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다면 강릉보다는 막기 쉬울 것이라 판단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관우가 전장에서 보여준 능력을 생각하면 정치와 외교 문제만 없었다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실제로 번성까지 위협하고 면수를 장악해 양양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단계까진 성공하기도 했고.
삼국의 형세가 정립된 이후 한 지역을 진수하는 일개 장수 가운데 세력의 2인자로서 제후급, 준군벌급으로 세력을 갖추고 한 지역을 진수한 장수는 거의 관우 정도이다. 비율로 봤을때 위나라의 수춘에 주둔한 사령관들 역시 만만치 않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력상의 비율이나 세력내에서의 위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관우는 여기서 홀로 유비의 익주 진공 이후 상대적으로 역량이 떨어지는 2선급 장수들을 수습해서 홀로 뭐든지 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물론 유비 역시 이걸 모르지 않아서 상용을 점거하고 행여나 있을 원군요청에 대비케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관우의 역량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형주에 누가 오던지 관우라면 막을 수 있다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여몽은 관우가 진수하고 있는 형주지역을 정면으로 뚫어낼 생각을 하지도 못했으며 육손을 이용해서 관우를 안심시키고 진수된 병력들을 북쪽으로 실어오르게 하고, 위나라와 손을 잡고, 배신할 마음을 품은 미방을 몰래 회유하여 방어선을 약하게 하고 나서야 간신히 형주를 뒷치기 할 수 있었고 그나마 남군을 점령하고도 내부적인 저항에 직면에야 했다. 분명 이런 여몽의 계략은 대단한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이 정도의 사전준비와 내부에서의 배신 계획 없이는 관우가 원정나간 형주도 정면에서 함부로 치지 못했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다.
형주 세력은 사실상 유비와 주력 세력이 입촉을 하고 안정화 시키는 과정에서 독립적인 군벌로 남게 되는 거나 다름없는데 이 때 아무리 고려해봐도 관우 말고 그러한 역할로서 형주를 맡을 인물이 없다. 현실의 조직에서는 게임처럼 그냥 능력치 높은 애 맡기면 되는 게 아니라 세력 내 서열이나 정치적인 균형이나 입지 등 여러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동오와의 동맹 균열은 유비 쪽에도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워서 오직 관우 혼자 깽판쳐서 동맹이 깨진 게 아니다. 누가 간다고 오나라랑 친할 수 있을까? 관우가 손권을 개라고 한 것은 연의에 나오는 내용일뿐이고 오나라에게 직접적으로 문제 일으킨건 상관에서 쌀 가져간건데 정작 상관이 있던 영릉은 유비 영역이었고 상이때 이미 오나라는 뒤통수 칠 준비하고 있었다.[108] 관우가 양양정복 직전까지 갈 때 관우도 외교적인 결함을 보였지만 손권이 유비 관할 형주도 내놓으라고 우기기 해서 어차피 터질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선 가장 중요한 건 능력보다 신의라고 할 수 있다. 마냥 손권과 친하게 지낼만한 인사를 형주에 박아넣으면, 유비 배신하고 손권에게 붙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촉과 형주는 지형적으로 동 떨어진 곳이고 그런면에서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박아 넣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런 면에서 관우에게 맡긴것이다.
당시 상황에선 관우보다 잘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애초에 조인의 북형주군이 남하 준비 중이었고 북형주군 털리자마자 지체없이 우금의 7군을 모아 내려보내는 거 보면 대대적으로 조위가 형주 공격준비 중이었는데 여기에서 북형주군+우금 7군 족히 10만은 넘을 위군을 제압할 만한 인물이 촉에 또 누가 있었을까? 실상 관우는 오나라에 뒤통수 맞기 직전까지 내내 승전보만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번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서황에게 패해서 포위가 풀렸다고 해도 치명적인 타격이나 이런 건 아니라서 그냥 적당히 물러나서 대치 전선만 세워도 위나라에 엄청난 압박이 가는 상황이었던 것. 이렇게 잘 나가던 상황에서 오나라의 공격으로 형세가 급변하고 성도에 있는 촉 입장에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이기기만 한다고 보고 보내오던 장수가 하루아침에 멸망 직전의 상황으로 몰려버린 것이다. 고대 시대의 통신력을 생각해보면 대처할 틈도 없이 지나치게 상황이 급변해 버린 것. 입촉과 한중 공략을 위해서 유비의 주력군이 전부 다 서천 쪽으로 떠난 상황에서 관우는 형주에서 새로이 손수 키워낸 병력들만 가지고서 익양대치 등 오나라의 압박과 조조의 7군을 모은 대규모 공격을 상대로 형주를 방어해내고 되려 7군 수몰 후 번성을 포위하면서 역공을 가하는 상황까지 밀어붙인다. 거기서 오나라의 공격으로 상황이 바뀌어버린 거라 군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로 몰락한 것이라는게 더 맞는 설명이다.
나관중의 소설이 원말 명초의 시대적 관점이 많이 들어가서 사람들이 착각하기 쉬운데 저 시대는 중앙집권 성격이 상당히 약했던 시절이다. 당시의 형주가 그냥 땅도 아니고 3국의 주요 전장무대였는데 지역 군벌, 호족 단속도 해야하고 군사적 성과도 내야 하고 참 어려운 지역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독립하거나 조조에게 붙어버리기 쉬운 지역이기도 했고, 충성도나 짬밥 생각하면 유비 세력 중에선 관우 밖에 적임자가 없었을 것. 그럴듯한 모사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당시로서 인선 자체는 적합했다. 상황 자체도 좋지 않았다. 지원군들은 뭔 군악대로 싸운다고 오질 않고 다른쪽에선 군량을 태워먹고 있고 위군만 후발대까지 합치면 적벽이래 최대군이 남하하고 있고 오나라까지 뒤통수 날리려 오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리고 강릉 주위만 쥐고 있는 촉군이 아무나 강하게 공격한다고 형주의 절반인구를 쥐고 있는 조인을 줘패고 완편시 7군을 괴멸시키는게 가능하겠는가. 애초에 지원군만 제대로 왔거나 최소한 오의 뒤통수만 없어도 양번 중 양양은 취하거나 아니면 후퇴는 가능했다.
또 정치적인 문제가 오로지 관우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남군 영토 대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어물쩍 뭉개고 넘기려고 해서 오나라의 반발을 산 유비, 애초에 대여해준 남군도 아니고 유비가 자력으로 차지한 지역까지 내놓으라고 강짜 부리고 어쨌든간 익양대치로 합의해서 북진을 위한 군사거점만 빼고 다 반환받은 상태에서도 뒤치기를 감행한 손권도 촉오 동맹 균열에 큰 잘못이 있다. 형주를 지원하기 위한 최중요 거점이었던 상용에서 유봉과 맹달의 갈등으로 인해 지원군이 출전하지 못함, 익양대치로 이미 합의 끝난 상황에서 끝내 뒤치기를 감행한 오나라, 애초에 동맹에 균열이 가는 단초를 남긴 유비까지 형주 상실은 관우 혼자서 책임을 뒤집어쓰기에는 억울한 상황인것이다.
초반 공격을 강하게 하면 어느 정도 점령이 된다고 한다지만 관우의 형주군이 우금의 7군 격파 이후 사망 및 탈주 빼고 포로로 잡은 병력만 3만이다. 우금의 전체 군 규모가 관우의 형주군보다 훨씬 컸을 거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을것이다. 우금이면 조조군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급의 명장이었는데 병력의 열세에서도 그걸 상대로 그렇게 완파하고 도리어 조인을 번성에 가둬놓고 두들기는 상황까지 몰아넣었는데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여하튼 세력 내 서열, 정치적 관계, 형주 호족 세력에 대한 제어, 군사적 명성까지 포함해서 유비가 아닌 조조든, 손권이든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관우를 인선했을 것이다.
관우는 결국 조인을 격파하지 못하나 이것은 전적으로 당시 관우가 지니고 있던 형주군의 역량미달 때문의 문제도 만만치 않다. 관우의 후방에 있던 미방과 부사인, 반준은 각각 후방에서 물자를 지원하는 일을 맡거나 치중종사임에도 관우가 만족할만한 보급을 해준바가 없다. 물론 이건 관우의 행정적 보급능력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단순히 치고 넘어갈수도 있다. 그러나 위나라의 장수들과 비교해보자. 예컨대 장료가 창희를 토벌할때 시간이 지체되자 우금은 군량을 계속 보내주어 마침내 함락시킨다. 양번 당시에도 조인이 수세에 몰리자 조조는 정예 7군과 우금, 방덕, 서황을 보내고 이들이 격파되거나 구원에 실패하자 조조 본인도 증원을 간데다 장료와 하후돈마저 부르기에 이르고 관우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서황에게도 계속 지원병력을 보내고 손권까지 동원해 관우의 뒤를 치려는 계획까지 짠다. 단 한명을 상대하기 위해서 위나라가 이렇게 동원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하는 사례는 후일 촉의 제갈량과 강유, 오의 제갈각 정도를 제외하면 없으며 이들도 관우가 받은 지원보다는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위나라를 상대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비가 미리 상용에 진수시켜둔 유봉과 맹달은 서로 군악대 가지고 싸우기만할 뿐 관우의 지원 타이밍을 아예 씹어버린것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상황이다. 보급과 지원에 있어서 관우군과는 완전히 천지차이인 것이다.[109]
조조군의 자잘한 전투성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증원에 힘입어 얻은 승리가 꽤 되며 조조군은 조조의 지휘하에서 지속적으로 물량의 지원을 통한 승리를 거둔바가 꽤나 많다. 번성공방전도 이와 비슷한 예라고 할 것이다. 당장 위나라 최고위 상장 하후연의 예를 보더라도 단독 전투로는 마초에게 대파당한 적이 있고 조조가 장안에서 밍기적 거리면서 지원이 끊기자 한중공방전에서 필사적인 저항을 해보았으나 결국 살해당한다. 조조는 그런 그의 군재를 폄하하면서 자신의 책임문제를 은폐하려 했지만 실제로 무도방면을 유비가 차지하지 못한건 전쟁 초기, 한중군 총사령관 하후연의 신속한 전술적 조치 덕분이었고 장합이 수많은 병력을 장비에게 날려먹어 한중군 전력이 약화된 와중에도 유비의 총력전에 수개월 이상 버티며 조조가 그나마 한중에서 유비와 싸울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이런 마당에 관우가 결국 번성을 얻지못하고 서황에게 뚫린걸 단순히 장수의 역량문제로 국한 될 수 있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동맹과의 마찰이 예상되는, 상관의 쌀을 털어야 할 정도의 상황이었는데 더 말할게 없을 것이다.
특이 사항으로는 관우는 하북 사람이면서도 수군에 일가견이 있어 형주에서 적벽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수군을 이끌고 있었고, 번성공방전때도 수군을 능숙하게 이용하였다. 정사 삼국지가 알려지면서 갈수록 위나라 제일의 장수라면서 조인에 대한 평가는 올라가는데 그 조인을 시기와 때를 잘 맞추어 번성에 몰아넣은 관우의 전투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저평가 되는 경우가 있다. 장군으로서 조인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 장마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사 온회전에도 나오고 위나라 군사들은 장마에 맞추어 총공세를 펼친 관우의 수군을 당하지 못했다. 당시 위와 촉의 국력을 생각하면 조인의 병력이 관우보다 적었을리도 없고 위나라 군대가 장마에 당했다고는 하지만 장마가 조인, 우금, 방덕, 만총에게만 영향을 주고 거기서 싸우던 관우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리는 없는 것이다. 단독으로 관우와 맞섰을때 조인은 관우를 상대하지 못했고 결국 우금, 방덕, 서황의 지원을 받아서야 관우를 상대할 수 있었다.
관우는 홍수 이전에도 위나라 최고 명장인 조인과 맹장 방덕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오자양장우금과 정예 7군 군세와 대등하게 맞서 싸웠고 홍수가 발생하자 조인을 번성에 몰아놓고 우금을 격파하여 사로잡았고 포로로만 무려 3만명을 잡았으며, 방덕을 참살했다. 상대편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홍수를 이용해 적을 격몰시켰는데 이런 연이은 명장들 상대로 원정에서의 대전공은 삼국이 정립된 삼국시대 전체로도 그렇게 흔하지 않다.[110] 앞서 언급했듯이 정사 온회전에 조자효(조인)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 (자치통감에 따르면 큰비, 장맛비에 따라) 강물이 불어나는 것을 대비하지 못하고 있고 관우가 날래고 예리하니(驍銳)[111] 큰 위험이라고 온회가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즉, 당시 홍수는 위나라 참모진 측에서도 걱정하고 있는 바였고 조인은 방덕을 배치하면서 관우의 적진 깊숙히서 이에 대비없이 싸우고 있다는 증좌로 볼 수 있다. 우금전에는 우금이 홍수가 온 다음에야 고지로 올랐으나 이미 피할 길 자체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고 방덕전에 보면 방덕이 홍수가 나자 그제서야 제방위로 올라가서 저항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말인 즉슨 위나라군이 진작에 강물이 불어날 타이밍을 계산에 넣었다면 다른 고지로 후퇴해 수몰까지는 피할 수 있었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결과는 관우의 육군은 수몰 타이밍에 맞추어 그곳을 피했고 위나라 군대는 그냥 수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관우가 진격할때부터 이를 염두에 두거나 적어도 어느 타이밍에 육군을 빼야하는지는 위나라 장수들보단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양번을 공략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와야한다, 후일 몽골과 송나라가 그랬듯이. 그런데 논자들이 간과하는 지점은 '그럼 대체 관우가 수군을 끌고 올 때 위나라 번성의 수군은 어디로 증발했느냐? 관우가 육상에서 싸울때는 나름대로 대응을 해놓고서는 정작 홍수에서 배를 타고 관우가 전장을 휘저었는데 위나라는 뭘했기에 7군과 번성 주둔군이 수몰될 동안 아무런 대비도 안했느냐?'느냐에 대한 대답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위나라 수군이 있었다면 7군이 그렇게 큰 피해로 수몰되진 않았을텐데 말이다. 기껏해야 방덕이 번성으로 후퇴할때 조각배를 탔다는 기록 정도가 위나라 수군에 대한 기록의 전부고 양번 공방전이 끝날때까지 면수는 관우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는 두 가지로 밖에 해석이 안 되는데 조인과 방덕 등이 홍수나 면수 방어를 위한 수군 방비에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즉 수군 같은걸 준비 안했다'''-나 '''관우의 수군에 면수가 장악 당할 정도로 완전히 밀리거나 격파되었다'''는 두가지 결론 밖에 나오지 않는다. 조인과 방덕같은 명장들이 양번을 방어하기 위해선 수군을 준비해야 했다는 사실을 모를리가 없으니[112] 이미 육상에서는 관우가 방덕 등과 치열하게 맞서는 동안 위나라의 수군은 그 두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격멸되었거나 그 자리에 없었거나 그냥 처음부터 없다는 결론뿐이다. 이는 홍수 이전부터도 관우는 육상에서는 화살을 맞고도 태연히 병력을 지휘하면서 용맹을 펼치고 있었고 수상에서는 면수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얘기가 된다. 심지어 온회는 조인이 '적진 깊숙히 들어가서 현군(고립된 군대)이 되고 있다'는 표현까지 썼는데 이는 당시 조인이 이끄는 병력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미 홍수 이전부터 관우의 병력이 우세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결론인 것이다. [113]
관우를 격파하고 번성의 포위를 푼 서황 역시 처음에는 구원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주개, 은서의 군사를 지원받고 12영의 군세를 지원 받아서야 관우의 포위망을 번성 내부의 만총과 함께 격파했는데 이때 관우가 급히 이끌던 보기는 겨우 5천으로, 적어도 수만의 병력을 계획하고 계속 지원해준 위나라의 동원력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오나라의 그 명장이라는 육손이나 주연도 후일, 관우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가지고 양번 공략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독으로 위나라 전체의 명장들을 상대해낸 관우의 역량이 장수로서는 폄하될 이유가 없다, 그것도 홈그라운드가 아닌 원정병력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심지어 서황의 번성 포위망 격파 이후에도 양양의 포위는 풀리지 않았고 관우는 여전히 양번을 흐르는 면수를 장악하고 있었다. 후세의 일이지만 이 면수 수로를 완전히 장악당한 송나라몽골 제국과의 양양공방전때 얼마나 힘든 싸움을 했어야 했는지를 생각해보면 관우는 열세의 전력에서도 이런 위협적인 판도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서황전에 따르면 조조는 (관우의) 번성 포위는 거, 즉묵의 포위보다 더했다면서 서황을 주아부의 풍격이 있다고 칭찬했는데 거, 즉묵의 포위라는 것은 과거 전국시대, 연나라의 악의가 제나라의 모든 성을 다 떨어뜨리고 거와 즉묵만 제나라에 남은 상황을 뜻한다, 즉 조조는 관우를 제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은 악의에 비했을 정도로 상황을 매우 중차로운 위기로 위태롭게 본것이다.
따지고 보면 남군 공방전은 결국 손유 연합군이 이겼고 익양 대치는 입촉하느라 관우는 이런 전력이 분산된 어려운 상황에서 버텨낸것이었다. 번성 공방전은 외교에 문제가 있었지 위나라가 자랑하는 조인을 성에 몰아넣고 우금을 때려잡고 방덕을 참살하고 양양에 공성 걸어놓고 위나라에서 최고 실적을 자랑하는 서황과 대치했고 서황 역시 조조가 각지에서 병력을 끌어다가 지원하고 12진영의 지원병을 끌어다 주기전까지 번성구원에 실패하고 싸울 생각을 못했다. 남양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서 양번 방어선이 크게 흔들렸었고 북벌의 최대호기에서 여몽 이후 다시 온건 유화책으로 가는척했던 오나라가 동맹을 깨고 뒷통수를 칠줄은 몰랐을터, 더군다나 미방의 배신, 유봉과 맹달의 의뭉스러운 움직임까지...
관우의 몰락은 용맹이 부족해서도, 지략이 부족해서도 아닌 정치력 부재와 조직관리 문제였으니 전선을 맡은 장군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전역을 책임지는 사령관의 역할은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립은 관우의 용병 능력에 대해 개인의 용맹만 믿으며 군사를 부리는 법도가 없다고 평했다. 그러나 해당 발언은 관우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기 보다는 요립의 신세한탄 속 한 구절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과해서 판단해야 한다. 그는 관우와 동시대 사람이자 형주에서 근무하던 사람으로 방통의 추천으로 임관하였고 제갈량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이엄 등 보다 직위가 낮게 됨에 불만을 가졌고 촉나라와 관우의 전략에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가 자신을 요직에 배치하지 않았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상황에서 이소장완이 찾아오자 작심하고 유비를 포함한 여러 인재들을 다 까고 있을때 나온 평가였던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제갈량이 작정하고 요립을 '형주 장사군을 지킬 때 성문을 열어 적을 맞이하였으며 파군을 다스릴 때는 어리석어 그 일을 저열하게 처리했으며 황제를 비방하고 관료들을 모욕했다'고 지탄하며 좌천시켰지만, 뉘우치기보다 '자신의 재능과 명성이 제갈량 다음이라고 자부해서 복직시킬거라는'라는 근자감을 내세웠다. 결국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그를 복직시키지 않아 요립은 내가 이렇게 쫓겨난 상태로 말년을 보낸다며 한탄했다

5.3. 무력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중략)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유전

'''관우는 실로 곰과 범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 여몽전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중략)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 육손전

(전략) 관우와 장비는 모두 1만 명을 상대할 수 있으니 (후략) - 정욱전

장비와 관우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유비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웁니다. - 곽가전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으니 모두 만인지적으로 장수로 삼을 만합니다. -부간, 선주전

당초 장비의 웅장위맹(雄壯威猛)은 관우에 버금갔으므로 위의 모신 정욱 등이 모두 관우와 장비를 칭하길 만인지적이라 했다. - 장비전

관우와 장비는 무용이 뛰어나며 (중략)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 계한보신찬

하동의 관우운장, 동군의 장비익덕은 두 사람 모두 영웅장사로, 선주의 무장이 되었다. - 화양국지, 유선주지

장비와 관우는 용맹이 삼국의 수위에 섰으니, 만인의 적이라고 칭해졌다. - 화양국지, 유선주지

한나라 이후로 용맹하다고 칭하는 자는 반드시 관우와 장비를 든다...[114]

이는 모두 각 사서에 보이는 것이다. 관우와 장비 두사람의 이름은 단지 같은 시대 사람들만 보고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후 수백년 동안에도 역시 두려워하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음을 볼 수 있다. 위세와 명성이 드리워진 바가 지금에 이르러도 변하지 않으니, 하늘이 낳은 신묘한 용맹이 진실로 헛되지 않다. - 조익, 이십이사차기 제 96

'''정사에서도 관우의 무예는 최강이었다 '''고 볼 수 있다. 위에 보듯이 삼국지 정사에서도 무력과 용맹에 관해서는 관우 만한 평가를 받은 장수가 없다. 연의에 수 많은 일기토가 쓰여 있는 것과는 달리, 정사에서 일기토에 대한 기록은 모든 장수들을 통틀어도 10 건이 안된다. 그런데 그 얼마 안되는 일기토 중에 관우가 안량을 벤 기록이 있다. 이는 정사 뿐만 아니라 소설인 연의까지 포함해도 압도적인 무용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러한 이유로 관우의 개인 무력은 연의보다 정사에서 더 높이 평가 받는다.
다음은 연의와 정사에 표현된 관우의 무예를 교차 검증한 것이다.
  • 연의에서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베는 장면은 창작이다.
  • 연의에서 여포가 유비 삼형제와 일기토를 벌인다는 삼영전여포 대목이 있는데, 이 역시 여포를 무력 최강으로 만듬과 동시에 무명이었던 유관장 의형제가 비록 3:1이지만 그런 여포를 밀어붙여 퇴각하게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계기를 만들기 위한 후대의 창작이다.
  • 연의에서 관우는 황건적 관해를 상대로 일기토를 벌여 수십합의 경합 끝에 승리하는데 이것도 창작이다.
  • 연의에서 관우는 기령을 상대로 한 일기토에서 30여 합이 넘어가면서부터 우세함을 보이나 이것도 창작이다.
  • 정사에서 관우는 장료와 함께 선봉에 서서 타고 있던 말을 채찍질한 후 적진 한가운데 있는 상장 안량을 찔러 참했다. 이후 원소의 수많은 장수들 가운데 아무도 관우를 당할 자가 없어 백마의 포위가 풀렸다는 대목을 보면 관우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무공을 지녔던 장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정사에서 일기토 장면은 몇 개 되지 않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관우가 안량을 베는 장면이다. 게다가 당시엔 제대로 된 등자도 없었던 시절이다. 관우 본인이 얼마나 수준 높은 기병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연의에서 관우가 문추를 죽인 것은 허구다.
  • 연의에서 오관육참 후 관우와 하후돈이 경합으로 일기토를 겨루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도 창작이다. 오히려 연의를 통해 제대로 무예 버프를 받은 것은 하후돈이다. 왼쪽 눈을 다쳤는데도 원근감의 문제 없이 장수급의 인물과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연의에서 관우가 장사성을 공격했을 때 황충과 일기토를 벌였다고 하지만 이 역시 창작이다.
  • 연의에서 번성 공방전에서 방덕, 서황과의 일기토가 경합으로 묘사되는데 정사에는 없는 창작 장면이다.
  • 정사에서 방덕이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맞혔는데 어찌된 일인지 관우는 죽지 않았다. 또 정사에 따르면 관우는 화살에 맞은 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피가 넘쳐 흐름에도 불구하고 태연자약 했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관우의 강인함을 증명한다.[115]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삼국지 연의에서 창작된 몇몇 일기토 장면 덕분에 관우의 무예가 오히려 저평가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기토란 것이 정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싸움 방식인데 연의에서는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여러 장면들을 창작해서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관우의 일기토 활약 역시 많이 늘어났긴 했지만, 사실상 위의 사례들 같은 경합으로 묘사된 창작이 대부분이고, 또한 다른 용맹한 장수들의 활약도 늘어나, 직간접적으로 무력 면에서 저평가를 받게 되는 피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행적과 성품의 묘사에선 연의의 최대 수혜를 받았지만, 정작 본업인 무예에서는 정사에도 안 나오는 일기토 경합 장면들이 창작되어 연의에 등장하는 바람에 피해를 봤다는 점은 아이러니.
혹자는 촉 진영 인물들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특히 초기 거병 시의 정보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점을 지적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우가 항상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을 보면 알려지지 않은 초창기 시절 활약상들이 제법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5.4. 지력


관우는 워낙 출중하기도 하거니와 학문을 좋아해, 춘추좌씨전을 읽어, 거의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운다는데 (중략) 강직하고 웅대한 기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후략) - 강표전

관우의 전체적인 모습은 문무를 겸비한 걸출한 명장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관우는 당시에 난립하던 자기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문맹 장수는 아니었다. 물론 지장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였지만, 각종 기록에 관우가 학문을 좋아하고 옛 경전을 즐겨 읽어 출중하다는 기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정사에서 관우가 학문을 좋아하고 춘추좌씨전을 외운다고 나와있다. 관우는 옛일의 사례들을 참고할 목적으로 춘추를 읽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연의에서 관우가 단도부회에서 지략을 쓰고 빠져 나온 것은 허구다.
  • 정사에서 여몽이 병을 핑계로 건업으로 돌아가고 대타로 온 육손이 편지를 보내자 이에 속아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했다. 단 여몽, 육손은 오에서 손꼽히는 지략가다.[116]
  • 연의에서 관우가 번성에서 수공을 쓰는 지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그냥 수재(水災)였고 관우의 수공인지는 나와있지 않다. 다만 정사 방덕전에 따르면 관우가 배를 타고 공격했었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가만히 있다가 이득을 본 것 같지는 않고, 나름대로 예상을 하고 준비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솔 단락에 온회전에는 관우는 교활함을 갖췄다며 경계하는 언급이 있는데 이는 관우가 용맹만 내세우는 장수가 아니라 지략을 분명 갖췄다는 걸 알 수 있다.

5.5. 정치


(전략)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후략) - 육손전

군사 지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정치인으로서의 관우를 본다면 어떨까? 여러 가지 면을 볼 때 관우는 고대의 정치인으로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렵다.
  • 유비가 인정한 능력있는 인재 반준과 화목하지 못했다. 이게 중요한데 한자단어 상으로 반준의 경우에는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단지 둘 사이가 친하지 않은 것으로 정리된다. 공무상으로 일을 같이 할 뿐이다. 때문에 반준의 경우 항복에 있어서도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
  • 노숙과의 회담에서는 오히려 노숙의 말빨에 밀렸다.
  • 외교 관계를 다루는 것은 그다지 뛰어난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상대국의 군주인 손권을 대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보였다. 다만, 손권 역시 지원군을 고의로 늦게 보내거나 느닷없이 관우 본인에게 혼담을 제의하며 딸을 사실상 인질로 내놓으라고 하는 등 어그로를 끈 것도 있다.
  • 미방과 사인 등 다른 부하들과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
  • 병사들에게 잘 대해주거나 봉수대나 성채를 쌓으며 대비한 것을 보면 군정의 사령관으로써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것 같다.
  • 번성 전투에서 물자 부족 현상을 겪었다. 단 이 문제는 군수물자를 대는 미방과 사인 두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 처음엔 미방을 제외한 남군사람들은 항복의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여몽을 역습하려다가 우번의 간파로 인해 실패, 이후 여몽이 점령군의 군기를 엄정히 단속하여 고향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후히 베푸는 정치를 하자 여몽의 통치에 백성들이 관우로부터 이탈했다.
민정과 행정에선 인심과 신의를 대대적으로 베풀었다고 쓰여진 기록으로 보아 어느 정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다. 특히 오의 형주 침공 초반에 미방의 배신을 제외하면 큰 민심이반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여몽을 공격하여 관우를 지원하려던 낌새마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민생 관련 내정 측면에선 최선을 다한 것 같다. 오히려 형주에서는 호족이나 관리들을 중심으로 한 저항이 거셌다. 흔히 말하는 무릉만이들도 관우에게 호감을 더 가졌던 것으로 보이고 이후 그로부터 18개월이 지난 이릉전투에서도 호족 습진 등이 유비에게 가세한다. 관우가 패한 후에도 부하들 중 저항했던 이들이 등보, 곽목, 문포, 등개, 첨안, 진봉 등 여럿이다. 요화도 관우 사후 서쪽으로 도망쳤고, 18개월이나 오나라에 저항했던 습진의 사례도 있다. 그러니 형주 호족들이 등을 돌렸다는 건 애초에 사실이 아니다.
또 관우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꾸준히 익주로 병력이 차출되는 가운데 익양대치 이후 고작 형주의 1/3 가량에 지나지 않는 영토를 기반으로 모은 병력으로, 심지어 후방에 충분한 예비 병력까지 남겨둔 채, 천하의 삼분지 이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조조를, 그것도 형주방면 총사령관이자 자타공인 조조군의 에이스로 꼽히는 조인을 상대로 해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군사를 모으고 조련하는 일에 있어서든, 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적과 싸우는 일에서든 간에 관우가 군정, 전투 모두 뛰어났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생을 제외한 나머지 정치 분야에선 아쉬운 모습이 많았다. 외교에서 그러한 면이 두드러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우방국 최고 수장이었던 손권을 모욕한 예다. 이는 위나라에 맞서 결속을 다져도 모자를 판에 악감정만 증폭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물론 손권이 먼저 지원군을 보낸다고 해놓고선 고의로 늦게 보냈다는 점, 혼인 제의 역시 그 꿍꿍이를 알 수 없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정이야 어찌됐든 최고 책임자로서 악감정은 접어두고 영리한 대처를 했어야 했는데 본인 성질을 못 이기고 거칠게 행동한 셈. 다만 이 기록 자체는 좀 조심히 봐야 한다. 기록 자체는 전략의 기록인데 주석자인 배송지부터가 '손권과 여몽이 겉으로는 화목했으나 안으로는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니이 때문에 손권이 관우를 습격할 때 은밀한 군사를 몰래 일으켰다. 이 말대로라면 관우는 손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손권은 필시 응당 갈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서로 원조하기로 했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거동을 숨겼겠는가?'[117] 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충분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자치통감도 이 지적에 공감했는지 이 기록을 수록하지 않았다.
내부 조직 관리 역시 물음표가 남는다. 특히 미방과 사인 처벌 사건에서 그러한 의문점이 두드러진다. 두 사람에게 군수물자를 날려먹고 보급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실책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상급자인 관우가 그에 대해 처벌을 논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후방에서 수비와 보급의 중책을 맡고 있는 두 사람에게 처벌에 대한 불안감으로 딴 마음을 품을 시간적 여유를 줬다는 점에서 용인술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당시 위와 오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관우의 입장에선 절대로 후방에 근심을 남겨두지 말았어야 했다. 따라서 미방과 사인을 처벌하려는 의도를 잠시 감추고 꺼내지 말던가, 아니면 신속히 처벌하여서 두 사람에게 딴 생각을 할 시간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최소한 그 처벌에 있어서 공과 과의 명확한 선을 정해놓아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불안을 최대한 억제하는게 필요했다.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입법이 정확한 양을 딱 정해놓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기준치를 제시해두며 유연히 적용하도록 하는 것은, 법이 지향하는 목적, 안정되고 예측 가능하며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의나 정감에 맞는 생활을 위함이다. 또한 공을 세운 자에게 면책의 특권을 부과하거나 죄를 가벼이 주거나, 죄가 중하지만 전날의 공을 생각해 문책하지 않겠다는 판결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인간적인 정도 물론 있겠지만 용인술의 기본이다.
특히 미방은 유비를 서주부터 따른 창업 공신이자 당시 형주의 2인자로서 주요 거점을 지키던 핵심 인사였다. 관우 정도 위치의 책임자라면 고위 인사를 함부로 처벌하려 했을 때 일어날 반발과 파장 정도는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배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내부 조직의 불안만 더 가중될 위험성을 간과한 것이다. 즉, 이른바 '조직 내부의 정치역학'을 다루는 영역에서 관우의 실책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제갈량에게 처벌 받았던 마속, 이엄, 요립 등은 결국 자신의 저지른 죄를 순순히 받아들였고 제갈량 사후 요립과 이엄은 두번 다시는 자기를 써줄 사람이 없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관우의 일화를 종합해보면 관우는 일반 민중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한 사회의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상류층, 지식인층과는 척을 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관우에 대한 평가 중 하나인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다'라는 글귀와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정치인으로서의 관우는 자신의 성격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118]

5.6. 충의


관우와 유비는 도의상으로는 군신(君臣) 관계지만, 은혜는 마치 부자(父子)의 관계입니다. - 유엽전

관우는 조조에게 힘써 보답하고 (중략)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 진수

인의지사 유비를 제치고 관우가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된 데에는 그의 용맹 뿐만 아니라 충의와 신의로 대표되는 그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관우가 신격화된 것이 따지고 보면 그의 충의지사의 모습 때문이다.
  • 관우는 유비와 같은 침상을 쓰고 은혜가 형제와 같을 정도로 군신의 관계를 뛰어넘어 평생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 조조 밑에서 원소군의 대표적인 장수 안량을 베는 엄청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관직, 보화를 모두 내놓은 채, 유비를 찾아 길을 나섰다. 당시 유비는 근거지로 삼았던 서주를 잃고 원소의 객장 신분으로 잔여 세력을 추스리고 있을 뿐, 헌제의 밀서를 받았다는 정치적 입지를 제외하면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유비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주군의 부하가 된다는 것이었으나 관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옛 주인에게 돌아갔다.현대로 치면 잘 나가는 경쟁사 사장님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정중히 거절하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창업동지이자 원래 모시는 사장님에게 다시 돌아간거다. 사실 뿌리깊은 관우신격화 (말 그대로 신격화. 중국민간신앙에서 관우는 신이다)에 반발해 중국이나 한국에서 관우를 객관적으로 보자며 오히려 관우를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종종 보인다. 이러한 해석 중 하나가 "대기업(조조)에서 부장직 하나 하느니 중소기업 (유비)에서 부사장하는게 훨씬 나은거라 돌아간 것"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 시점에서 유비는 중소기업이 아니라 망한 기업이었다. 중소군벌도 아니고 원소의 객장 수준이었던 유비는 이 시점에서 사장이 아니라 그냥 대기업의 컨설턴트, 그것도 원래 대립하던 기업이라 자리도 불안정한 임시직에 비유하는게 가깝다. 언제 길바닥에 나앉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경쟁기업이라고 하지만 원래 자기회사의 전성기에조차 비교도 안되던 초거대기업, 그것도 회장의 총애를 듬뿍 받는 상황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사표 쓰고 나간 것이다. 그것도 그동안 받은 엄청난 보너스나 선물같은 건 고스란히 두고. 관우와 같은 상황에서 주인을 바꾼 사람들이 삼국지에 얼마나 많은지 살펴보자. 애초에 새 세력에서 대접이 맘에 안 든다고 다시 박차고 나간 사람은 있어도 이렇게까지 좋은 대접 받는데 오직 충성심 때문에 다 포기한 사람은 역사상 거의 없다. 관우가 신격화되기 때문에 그 충성심이 과대평가받는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그 충성심과 의리 때문에 그가 천년 넘는 세월동안 충의의 상징으로 칭송받으며 신격화된 것이다. 관우같은 사람은 중국역사를 통틀어봐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 연의에서 유비와 떨어져 있는 동안 형수님들을 잘 돌봐준 것은 창작이다. 정사에서는 선주전에 유비의 처자가 관우와 함께 잡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형수들의 행방에 대한 언급이 없어 유비에게 같이 데려갔는지조차 불분명하다[119].
  • 연의에서 여섯 장수를 베며 오관을 돌파하며 천리길을 달려 유비에게 향하는 장면도 창작이다.
  • 연의에서 화용도에서 조조를 보내주는 장면은 관우의 의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나관중의 창작이다.
  • 정사에서도 유비는 관우의 충의에 보답하고자 관우가 죽은 일로 인하여 위에 대한 북벌을 미루고, 그 병력으로 오히려 오를 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

5.6.1. 유비와 관우와의 관계


관우가 황충과 같은 반열로 공적을 받았을 때 나온 반응에 대해서는 관우의 굳센 자부심으로 인한 오만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고 실제로 그러하다. '그래도 관직을 거부하지 않고 비시의 말을 듣고 깨우쳐서 관직을 즉시 받았으니 뭐 반발이랄 것도 없지 않나? 살짝 툴툴거렸다가 비시가 잘 타이르자 어험~ 하면서 넘어간 건데 그냥 일종의 헤프닝 정도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관우가 이치에 맞는 말은 알아듣는 사람이라며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조금만 찾아보면 흥미로운 지점은 이 당시 제갈량이 보였던 걱정이나 그에 대한 유비의 반응이다. 제갈량은 관우의 반응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간언했고, 유비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곧바로 비시를 보내서 관우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내(유비)가 직접 관우에게 이 상황을 이해시키겠다'''면서 비시를 보낸 것이다.

"무릇 왕업을 세우는 데 있어 사람들을 쓰는 일에 한 가지 기준만 적용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옛날 소하조참한고조와 젊은 시절 친구였으나, 진평한신은 망명하여 늦게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열에 있어서는 한신이 가장 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하와 조참이 이러한 일로 원망을 품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중왕께서 한때의 공로를 가지고 한승을 높이고 계십니다만, 속으로 경중을 생각하는 바가 어찌 그대 군후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한중왕과 군후께서는 말하자면 한몸과 같은 관계시니, 기쁨과 슬픔이 같고 재난과 복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리석게 생각건데, 군후께서 관호의 높낮이나 작록의 양을 따져서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일개 심부름꾼으로 명을 전하러 왔을 뿐이니 군후께서 절하고 받지 않으신다면 곧 돌아갈 뿐입니다만, 이러한 행동을 애석하게 여기며 후회하는 바가 있을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정사 삼국지에서 비시가 한 말

즉 비시의 입을 빌려 유비가 관우에게 하는 말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내가 한승(황충)을 너와 같은 반열에 올려서 네가 화낸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한고조한신을 최고 반열로 올렸다고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있던 소하조참이 화냈다는 이야기는 없지 않은가? 나는 네가 그런 면에서 그렇게 화내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한승이 일시적으로 큰 공을 세워 관호를 높이 올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너를 한승과 같이 취급하는 건 아니야. '''운장이 나한테 있어서는 더 소중한 존재야.''' 우리 사이가 그런 군호와 봉록의 차이로 이제와서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한다. 그러니까 부탁이다. 이 관직을 받아줘라. 그렇지 않으면 너 역시도 마음 속으로는 후회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살펴줬으면 한다.'
관우는 이 말을 듣자 언제 반발했냐는 듯 즉시 관호를 받는다.
흥미로운 건 비시(의 입을 빌린 유비)의 말에선 황충이 충분히 높이 올릴 만한 큰 공로를 세웠지만 관우 자신과 대등한 공을 세웠으니 인정해달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다른 누구보다도 유비(나)한테 있어선 관우(네)가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단순한 이익같은 것으로 서로를 재단할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관우가 화가 풀린 이유는 물론 그 말이 이치에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항상 관우 자신만을 가장 최고라고 생각하던 유비'가 '어느새인가 자기보다는 덜 신경 쓰고 있던 급이 낮은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보고 있는게 아니냐'(장비는 자신보다 급이 낮다고 할 수는 없고 자신과 함께 처음부터 유비를 섬겼으니 제외)는 불만과 서운함, 질투를 풀어주는 말이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관우는 제갈량이 처음 들어왔을 때도 유비제갈량이 가까운 걸 보고 장비와 함께 질투했지만 유비의 말로 풀어진 적이 있었다. 명망이 높은 마초 상대로도 그가 들어오자 '마초는 어떤 사람이냐?'라고 제갈량에게 물었을 때 제갈량이 '관우 당신보다는 못할 것.'이라는 말에 기뻐했다. 이건 제갈량이 관우의 눈치를 본 것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당대 관우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거짓말한 건 아니었다.
즉, 그가 평생 보여준 자부심과 오만은 '''"그가 평생을 두고 사모하고 충성을 바친 유비의 세력에서 내가 가장 그에게 총애받는 사람이며, 천하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그 사람(유비)에게 있어서 언제나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갈량은 그 질투를 직접 겪어서 그런지, 관우 상대로 별명을 부를 정도로 친분을 가지면서도 늘 조심했다. 곱빼기 삼국지에서는 이런 관우의 성격을 '''하여간 잘 삐진다니까'''로 요약했다.
유비의 숙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자신과 대등한 영웅으로 인정하고 두텁게 대했던 조조 밑에서의 관우는 오만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항상 장료서황같은 같은 항복한 장수들하고만 교분을 가지며 몸가짐을 삼갔다. 조조가 곧바로 눈치를 챘을 정도로 유비를 그리워한 탓에 조조의 사주를 받은 장료에게 추궁당한 적이 있지만 조조에게 무례히 군 적은 없다. 관우는 조조의 은혜를 부담스러워해서 한숨을 쉬었지만 '언젠가 은혜를 갚고 함께 죽기로 약속한 유 장군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장료를 통해 조조에게 전했고, 백마에서 안량의 목을 베어 은혜에 보답하고 떠나며 약속을 지켰다.
이렇게 보면 손권에 대한 그의 적대감이나 대놓고 무시같은 것도 손오동맹 과정에서 손권 측이 보여줬던 '감히 내가 최고라고 인정하고 충성을 바치는 사람(유비)을 홀대한 것'에 대한 앙심에 가까운 것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익양대치에서도 나와 있지만 양측의 동맹을 중요하게 여기고 주장하던 노숙조차도 은근히 유비를 디스하는 발언을 해서 대담 분위기를 험하게 만들었는데, 이를 눈앞에서 바로 본 관우로서는 주화파인 노숙도 저런데 다른 오나라 강경파들이야 오죽하겠냐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와 관우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유비와 관우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번성 공방전 시점에서는 벌어져 있었으리라는 주장이다. 이는 관우가 조조 세력과 전쟁을 벌이는데도 유비가 전혀 지원하지 않았고, 관우가 죽은 후에 슬퍼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관우가 죽은 후에 작위를 내리지도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참고 번성 공방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북벌 초기에는 압도적인 전과를 올렸으니 지원이 필요하지 않았고 관우가 죽은 것은 결과론일 뿐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설명 쪽이 결과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거대 세력인 조조와의 전쟁을 시작한다면 북벌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원군을 보내서 전력을 보강하거나 한중 방면 등에서 협공하는 식으로 지원하는 편이 자연스럽고, 초기에 대승을 거둔 시점에서 보더라도 조조가 대군을 동원해서 다시 반격해올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연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사에서도 뛰어난 제갈량의 혜안이 한 두 줄의 주석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이 번성전이기도 하다.[120]
정사 삼국지에서 유비는 관우의 죽음을 전해듣자 대노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중공방전 직후 상용을 점령하였고 관우에게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는 기록을 보면 유비가 지원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거기에 후계자 문제도 있지만 정사의 기록 상 유비는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유봉과 맹달을 원망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관우가 죽은 후에 관우의 죽음에 분노해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켰으며 타국에서조차 유비와 관우는 부자의 관계와 같으므로 복수를 하지 않을리가 없다고 할 정도였으므로 그가 관우와의 관계가 벌어졌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한 다른 근거들로 따져도 유비가 관우를 추봉하지 않았고 관우가 장목후(혹은 장무후)로 추존된 것은 유선의 재위 말기의 일이라는 점은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이 시호를 받은 것도 같은 시점이라는 점에서 유비와의 관계를 의심할 이유로 보기는 어렵다. 유비 생전에 유비보다 먼저 죽은 신하들 중 시호를 받은 것은 오로지 법정뿐으로 익주평정에 많은 공을 세워 그토록 유비가 죽음을 애석해했던 방통도 시호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유비가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면서도 왜 공신들에게 작위를 내리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번성 공방전 시점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수수께끼이다. 다만 상용에 있던 유봉이 관우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유봉이 죽음에 이르는 한 원인이었기 때문에 여차하면 상용의 유봉, 맹달이 지원할 것이라 여겼을 수도 있고 관우는 한 지역에 진수하는 도독으로서 그런 지원을 요청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또 유비는 황제에 즉위한 이후 이릉대전을 치루고 성도로 귀환하지 않고 백제성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난 걸 생각한다면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121]

5.7. 성품


그 한편으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 강표전

관우는 자신의 용기에 기대어 다른 사람을 능멸합니다. 시작하자마자 큰공을 세워[122]

마음은 교만해지고 의지는 안일해졌으며 오직 북진에만 힘쓰고 우리에게는 경계의 마음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 육손전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 장비전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 계한보신찬

관우는 굳세고 자부심이 강하고 장비는 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아서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도리와 이치의 상례로다. - 진수

동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관우를 굳세고 자부심이 강한 오만한 성격이라고 평가했다. 그를 형처럼 따랐던 장비와 가장 대비되는 점인데 장비가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어 군자는 예우하고 소인에겐 가혹했다면 관우는 아랫사람들에겐 관용을 베풀었지만 기득권층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트러블을 일으킨다.[123]
  • 제갈량으로부터 마초보다 관우가 낫다는 답장을 읽어보고는 아주 기뻐하여 주변의 빈객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 황충이 자신과 동렬에 놓이자 황충을 노병이라며 자신과 동렬로 두지 않으려 했다. 물론 비시가 지적하자 곧바로 반성하는 대인배 기질을 보이기도 했다.
  • 손권이 정략혼을 하러 권하러 오자 그 사신을 모욕하며 쫓아냈다. 아무리 손권에게 악감정이 있다고 하더라고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한 지역을 진수하는 사령관으로써 외교적 자질이 떨어진다.[124]
  • 관우가 평소 미방을 업신여겼다는 서술이 분명히 있다. 단 미방의 경우는 명백하게 자기 자신이 군법에 연루될 죄를 지었다.
  • 동맹국 군주 손권에게 오소리 새끼라고 비방하는 등 함부로 대했다. 단, 당시 손권이 관우에게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언질을 준 후, 고의로 지원군을 천천히 보낸 것이기 때문에 욕이 튀어나올 만한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욕이 튀어나올만한 상황에서도 허허거려야 하는게 정치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역시 아쉬울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일화 자체가 배송지는 믿을 수 없는 일화이며 비록 이들이 겉으로는 화목했으나 안으로는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니 이 때문에 손권이 관우를 습격할 때 은밀한 군사를 몰래 일으켰다. 만약 서로 원조하기로 했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 거동을 숨겼겠는가라며 의문을 표했다. 자치통감에도 이 일화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 소인에게는 온화했던지라 관우는 우금과 3만의 포로들을 살려두었고 이들도 먹여살리려고 했다. 이는 군량과 포로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포로들을 집단 학살했던 다른 역사적 인물들의 사례에 비춰보면 확실히 관용적인 태도였긴 했지만, 그 해결책이 동맹국이었던 오나라의 군량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여몽이 언급했듯, 백성에게 너그러운 정치를 펼쳤다고 볼 수 있다 지방 호족과 화목하지 못했고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반준이라는 주장도 있긴 한데 한자단어 상으로 반준의 경우에는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는 것이므로 단지 둘 사이가 친하지 않은 것으로 정리된다. 공무상으로 일을 같이 할 뿐이다. 때문에 반준의 경우 항복에 있어서도 능동적인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다.
  • 관우의 성격적 특징으로 보통 오만함을 주로 손꼽는 경우가 많지만 관우가 보여주는 중요한 일관적인 특성중에 하나가 바로 언행이 완전하게 일치되어 희노애락의 속마음이 겉으로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이다. 몇번이나 두씨를 준다 약조한 조조가 약속을 깨자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했고 조조를 죽이지 않아 화를 당한 주군 유비를 상대로 대놓고 '제 말을 그때 들었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겠습니까?'라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조조 밑에 있을때도 조조가 눈치 챌 정도로 불편한 심기가 있어 장료에게 속을 떠보라고 시켰을때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조조를 떠나 유비 곁으로 어떻게든 가겠다는 속을 드러내 장료조차 이걸 말하면 혹시라도 관우가 죽지 않을까 걱정했을 정도였으며 이후 조조가 더 무겁게 은상을 베풀어도 그걸 봉인하고 애당초 약속대로 홀연히 떠난다. 형주에선 대놓고 유비에게 총애받는 제갈량을 질투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또 제갈량에게 마초보다 그대가 낫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황충과 같은 대우라는 점에서 화를 내기도 하지만 비시가 깨우쳐주자 바로 화를 풀기도 한다. 여기에 정치 문제에서도 나오는 얘기지만 사인과 미방의 실책에 대해서도 직설적으로 질책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고, 직설적으로 손권세력과 마찰을 빚고 아랫사람에겐 관대했기에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3만포로를 먹여살려야 한다는 입장에 처하자 주저없이 상관의 쌀을 가져오기도 한다. 번성공방전 당시 서황과의 대화에서도 서로 친했기에 사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서황이 이것은 나랏일이라며 태도를 싹 바꾸자 당황하려 두려워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담대한 영웅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관우는 무쇠처럼 굳은 사나이기도 했지만 항상 생각과 마음, 신념이 몸과 하나가 되어 있어 감정과 생각이 직설적으로 나가는 사나이였다. 사실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관우지만, 동시대엔 관우보다 더하게 오만하거나 성격이 나쁜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125] 유난히 관우의 오만한 성정이 돋보인 건 나쁘게 말하면 감정을 숨기거나 추스리는 걸 하지 못하거나 안 해서이고, 좋게 말하면 가식과는 거리가 멀어서일지도 모른다. 따지고본다면 관우만 유독 성격적 단점을 부각당하며 집중포화를 당하는 경우가 많으니 관우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다.[126] 이는 그만큼 관우라는 인물이 당대는 물론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름값이 강할만큼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도 존재한다 볼 수 있겠다.
  • 의외로 자신이 인정한 자들에게는 진중하거나 친근한 태도를 보였고 잘못된 것을 듣고 시정할줄 아는 풍모가 있었다, 장료와 서황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장료에겐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인 유비에 대한 충정을 토로했고 비록 섬길 마음은 없었으나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그가 베푼 재물, 벼슬도 받지 않은채 홀연히 떠났다. 서황과 적으로 만나서도 흉금을 터놓고 얘기하다가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황한 기록도 있다. 처음엔 제갈량을 못마땅히 여겼지만 나중에 형주에 진수했을때 제갈량과 딱히 갈등이 있지 않았고 오히려 사람을 보는 제갈량의 안목을 믿고 마초를 평가해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그의 칭찬에 기뻐했다. 황충을 노병이라며 못마땅히 했지만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비시의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는 면도 있었다. 적의 장수 방덕을 잡고 그를 높게 평가해 회유하고 장수로 삼으려는 태도도 보여주었다. 이런 면모가 그가 국사의 풍모가 있었다는 평가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127]
오늘날에 등장하는 삼국지 관련 창작물이나 관련 논의에서 관우의 부정적인 면모를 드러낼 때는 주로 관우의 오만함을 강조한다.

5.7.1. 손권 관련 옹호


손권은 유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단으로 손부인을 데려가고 유선을 납치하려 했으며 더 깊게 생각하자면 손가와 유가는 원래부터 원수지간이다. 촉한의 유비는 유표#s-1와 형 동생하며 지낸 적이 있었고 유비는 유표의 후사 문제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유표와 어느 정도 의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문제는 유표가 동오의 손권에게는 뭘로도 갚을 수 없는 커다란 원한이 있다는 점. 유표가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을 죽게 했기 때문이다. 형주의 점유는 이미 선대인 손견, 손책 때부터 손권 자신이 부친의 원수인 유표를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적벽 이후 바로 형주를 공격했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손가의 오래된 염원이기도 했다.한마디로 손권에게 형주 쟁탈은 단순한 땅따먹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인 손견의 넋을 달래줘야 한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었다. 유비는 친한 형님이 물려준 땅을 함부로 남에게 내줄 수 없는 노릇이고 손권으로서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줘야만 했다. 굳이 관우가 아니어도 형주 문제로 인한 촉한과 동오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그 자리에는 삼국지에서 가장 욕을 안먹기로 소문난 조운을 앉혀놔도 결과는 다를 게 없는 상황이였다.[128] 다만 유비로서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영토였기 때문에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앉힌 것일 뿐이였다.
손권의 형주 침략 전, 이미 형주 분쟁으로 유비와의 동맹이 거의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 손권의 혼인 제안은 꿍꿍이가 어떻든 겉으로나마 동맹 강화에 목적이 있었긴하다. 앞서 유비의 뒷통수와 손권의 손부인을 통한 납치 시도 그리고 익양대치를 통해 험악해질 때로 험악해진 두 가문 사이의 화친을 위한 목적일 수도 있지만 위의 손씨와 유씨 집안 사이의 문제도 있었고 관우를 손권이 동맹으로서 손부인이 유비 옆에서 군사와 관리를 거느리고 위협을 가하고 오라버니의 위세를 믿고 행패를 봤던걸 똑똑히 봤던 사람이라 혼인동맹이랍시고 손권이 무슨짓을 할 지 모르는데 결혼동맹을 마뜩치 않게 봤을 공산이 크다. 당장 손오동맹을 이끈 제갈량마저 법정과의 자리에서 손부인의 패악이 크다고 한마디 했을 정도였고.[129] 거기에 어쨌든 이런 혼사를 얘기할거면 관우의 주군 유비에게 먼저 얘기해야지 관우에게만 통보식으로 얘기하는건 안 그래도 형주에서 독자적인 군권을 지닌 관우를 떠보는 것과 동시에 주군 유비를 무시하는 행위인데 관우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 무리밖에 되질 않는다.
형주 침탈은 멸망 때까지 오라는 국가의 방향을 결정지었던 사건으로 어제의 적도 오늘의 아군이 되는 난세에 이같이 중대한 결정을 단순히 손권이 관우에 대한 개인 감정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건 지나치게 단편적인 생각이다. 손권이 관우를 배신한 이유는 관우가 손권을 업신여겼던 탓도 있겠지만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노숙의 대를 이어 군권을 잡은 여몽 또한 서주 라인보다는 장강을 포함하는 강릉 지역을 차지하는 것을 손권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손권은 여몽이 처음 노숙의 뒤를 이어 부임하자마자 손권에게 말한 것을 받아들인 것에서 볼 수 있 듯 형주를 공격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손권 세력은 관우를 잠재적 위험 세력으로 보고 있었고, 손권이 합비에서 패배한 이후론 관우를 치자는 여론이 팽배해 있었다.

5.7.2. 미방 관련 옹호


정사에서 관우가 평소 미방 등에 대해 업신여겼다는 서술이 분명히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방의 경우는 명백하게 자기 자신이 군법에 연루될 죄를 지었던 것이고, 미축전에서도 미방이 평소 사적인 원인으로 관우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언급할 만큼 처신이 좋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를 관우가 이를 질책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미방이 오와 내통한 시점은 관우의 북정 당시 관우가 '돌아와 죄를 묻겠다'고 하기 전에 남군의 물자를 태워먹은 중죄가 있어 관우가 크게 질책한 시점이다. 즉 관우가 적과 대치하기 이전 시점부터 미방은 배신할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상급자로서의 관우가 그에 대해 처벌을 논하는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후방에 놔둔 두 사람에 대해서 군수물자를 제대로 대지 않은 것에 대해 죄를 물을것이라고 언급한 면이 존재한다.[130] 그렇기 때문에 미방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질책하여 불안감을 키웠다며 관우의 용인술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형주와 익주를 손에 넣은 이후 유비군은 법률인 촉과(蜀科)를 만들었으며, 이에 따른 명확한 일처리와 법률로서 행정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처벌을 확실히 제시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더불어 미방은 형인 미축과 함께 과거 서주 호족 출신으로 벼슬을 버리고 유비를 따른 사람이며 한때 유비의 인척이기도 하였으니 오래 같이 지낸 동지였다. 비록 '공신 미축의 동생'이라는 것 외엔 유비군내에서도 존재감이 부족하고[131] 큰 실수를 여러번 했더라도 배려심을 가지고 좀 더 다독이고 정신적으로 위로할수도 있는 면이 분명 존재했다. 이는 인사상 관우의 실책인 부분이고, 높은 직책에 있던 이들에게는 냉정하고 오만하게 굴었던 관우의 성격적 결함으로 보는 것이 맞을것이다. 본디 관우는 원래 힘있고 빽있다고 그런거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사에도 나오지만 성정 자체가 일단 자기보다 아랫사람엔 너그럽고 온화한 사람이지만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강하게 나오는걸 서슴지 않은 사람이고 미방 입장에선 그래도 '내가 그래도 누군데 그렇게 법대로 처리해버리면...'하면서 불만이 있을수 있다. 관우는 애초에 그런 사정봐주고 하는거랑 거리가 먼 인물인 만큼 ('처벌을 받고 싶지 않다면 똑바로 하라'는 경고성 멘트의 성격도 있었겠지만) 이 부분에서 관우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132] 미방은 유비가 서주서 인생극장 찍던 시절에도 굳게 믿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당양 장판의 그 험난한 여정 마친 사람과 동일인이다. 출사년도 최소 20+@년이고 조조 마다하고 굳이 목숨걸고 유비 따라서 유비 대성 이후 형주 최고 요충지를 세력 3인자로부터 이어받아 지키게 된, 창업자로부터도 신용받던 사람이 왜 세력이 다 잡히고 자기가 창업멤버 지위에 오른 그때에 배신자로 전락했을까. 관우의 상사로서의 면모가 괜히 까이는게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안에서 처음부터 수비하려하고 오군의 항복 사자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다가 내통자 미방으로 인해 미리 대비하기도 전에 오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눈물을 흘리며 마음에도 없는 항복을 하고 항복하고서도 미방과는 달리 '억지로 항복한 것이니 사인은 남군으로 끌고 가야한다.'라는 소리를 듣고 후에도 귀한 대접 같은 일을 받은바 없는 사인[133]의 예도 있다. 정말 신변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질책했다면 미방과 달리 사인이 본인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오와 내통하지 않고 자기 한계내에서 소임을 다하려고 했다는게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에 미방이 남군성을 들어 바쳤을때 이 당시 유비세력이 과거와 달리 명확한 법처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사람들이 관우의 처리가 사리에 맞지 않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시 그 휘하 관원들도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두려워했을것이고, 미방이 남군태수인 만큼 미방 휘하 남군성 중요 인원들이 미방의 편을 들 수도 있었거나 미방이 그들의 협조를 구하며 포섭할 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정작 항복 과정에선 미방 혼자 배신하여 누구도 미방의 배신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오히려 남군측에서 여몽에게 역습을 가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134] 당시 강릉의 전황을 보면 미방빼곤 아무도 항복할 생각이나 오나라가 처들어 온다는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거의 미방의 독단적인 배신이었고, 여몽 상대로 반격을 준비하다가 우번의 진언으로 진압되기도 했다. 상황이 이 지경인건 미방빼고 다른 남군성 관리들이나 사람들이 미방이 관우가 관수물자를 태운 죄과를 처벌한다고 설마하니 오나라로 배신할 정도로 신변을 위협당할 처벌은 아니었다 생각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합비 공방전 당시 서로 사이가 나빴던 장료, 악진, 이전은 손권이 처들어오자 불편한 감정은 일단 뒤로 미루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물며 자신의 잘못한 일이 있음에도 관우가 질책한다며 내통을 계획한 미방의 일과 비교가 안 될 수가 없다.
관우가 부하들에게 친절하고 사대부에게 엄했다는 말이 있는데 막상 여몽이 형주를 먹고나서도 반란가능성 높으니 바로 장악하라는 우번의 말과 엮어보면 형주호족들이 관우랑 사이가 나빴다고 보기는 좀 모호하고 눈물흘리며 나왔다는 사인은 그냥 일때문에 욕먹은감이 있고 사실상 사이가 나빴던건 반준과 미방이 전부인데 이 둘은 물자담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관우가 형주공방전으로 전선을 늘인감이 있긴하지만 롬멜처럼 위오에서 보급로를 끊었다는 말도 없는데 고질적 보급부족이였던건 애초에 일을 안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특히 미방의 경우엔 사전에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기에 (상관 쌀 탈취도 그렇고) 고의적으로 보급에 소홀했을 가능성이 높다.[135][136]
사실 형주의 한나라 소속 태수들 가운데 손권이 공격해오자 항복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 모든 사람들이 관우와 사이가 안 좋아서 손권에게 항복한 것은 아닐 것이며 오히려 손권에게 저항하거나 협력하지 않으려 하거나 촉으로 탈출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미방은 유비의 인척이고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숙장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손권과 내통하고 촉에 모반하여 항복한것에 의아해하며 분노했고, 또한 그 이유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정사는 미방#s-1의 항복을 당대 관우의 관계에 주목해서 설명한 것이다. 정사 관우전만 보면 미방/부사인 간에 불화가 있었고 관우의 업신여김에 원한이 있던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한 기록[137]이 남아 있고 오서쪽 기록을 보면 미방이 항복한 이유가 더 분명해지면서 단순히 관우의 오만한 성격을 견디지 못해서로만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비슷한 불화를 겪은 사인이 처음엔 항복하지 않으려다가 항복한 이유도 공안이 고립되었으니 덧없는 저항은 그만두고 항복하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사를 종합해보자면 미방은 관우와 분명 사이가 별로였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본인이 잘못을 저질러 관우에게 처벌을 받게 되자 두려워하면서 오의 손권과 내통했다고 되어 있다. 사실 큰 처벌이 두려워서 항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도의적으로는 비난을 받겠지만 말이다.
되레 연의 이미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적어도 정사 기록만 보면 관우가 딱히 더 강하게 처벌하려고 했다고 보기 어렵다. 추측으로 재단하는거 보다는 기록을 보면 그렇다. 오죽하면 투항한 오나라에서도 미방은 두고두고 까였을 정도였는데 관우가 그 정도로 가혹하게 대했다면 미방을 두둔하기 위해 그에 대한 말이 있어야겠지만 그런건 정사에는 없다. 같이 보급에 소홀한 사인의 경우엔 적어도 항복에 대한 당위성은 미방보다 있었던 편이었고 최소한 이후 조롱을 당한 기록은 없다. 적어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이가 틀어졌다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내통해 형주 방어선을 무력화시킨 미방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어찌보면 사인의 항복이 미방의 내통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인만큼 동급으로 보는거 자체가 사인에게는 억울한 일일 것이다.
차라리 제갈량 사후 위연처럼 양의#s-2가 싫어서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움직인 사례를 개인 감정에 기인한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언정, 미방의 경우는 관우에게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보다는 당시 전황 상 처벌을 피하기 위해 본인의 살 길을 찾아갔다고 보는 게 좀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6. 말말말


천추의기(千秋義氣) 만고충심(萬古忠心)

서울 동관왕묘 현판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범 같은 신하)이었다. 관우는 조공(曹公)에게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하고 장비는 의(義)로써 엄안(嚴顔)을 놓아주었으니 아울러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진수

관우(關)와 장비(張)는 무용이 뛰어나며,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주상을 봉대하였으며,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주상의 좌우를 지키며, 전쟁터로 번개처럼 달려나가 격투하여 주상의 곤란함을 구하고 대업을 도왔다. 한신(韓)ㆍ경감(耿)과 공적을 비교하면 그들과 명성과 덕을 나란히 말할 만하다. 그렇지만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들의 얕은 생각과 몸을 훼손시키며 나라를 구한 태도를 애도한다.

양희, 계한보신찬. 관운장과 장익덕을 찬함(贊關雲長張益德)

관우가 국사가 된 까닭은, 그가 다만 왕실을 생각해서 일뿐이다. 만약 그가 말을 채찍질 해 안량(顔良)을 많은 무리 안에서 찌름이, 관우가 국사가 된 까닭이라면, 어찌 특별히 여기에 있겠는가! 또한 그가 조조에게 보답하고, 유비의 땅에 돌아감을 바르게 여기는 것이지, 만약 단지 조조에게 보답함을 관우의 의가 드러남이라 여기는 것은, 미처 관우의 뜻을 알지 못한 것으로, 이러한 찬사는 자못 불만족스러우며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즉 장환후(張桓侯, 장비)의 찬미도, 또한 엄안을 풀어준 한 가지 일로 이에 해당됨은 적당하지 않다.

왕명성(王鳴盛, 십칠사상각의 저자)


7. 인기



7.1. 중국


[image]
형주(후베이성 징저우시)의 초거대 군신 관우 동상[138]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관우를 존경하여 관공(關公), 관노야(關老爺)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139] 원나라 시대 초기 판본인 삼국지통속연의에서는 아예 도원결의 때부터 유비는 현덕, 관우는 관공, 장비는 그냥 이름으로 불린다. 이런식의 삼형제의 호칭은 황제로 즉위한 유비의 호칭이 선주로 바뀌는 것만 제외하면 세 명이 죽을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여러 시대를 거치며 관우는 급이 승격된다.
  • 북송 상부(祥符)[140] 연간에 칙령으로 관성묘(關聖廟)를 수축했다.
  • 송철종 소성(紹聖) 3년(1096년)에 옥천사(玉泉祠)의 현판을 하사하면서 현열왕(顯烈王)이라 했다.
  • 송휘종 숭녕(崇寧) 원년(1102년)에 충혜공(忠惠公)으로 추봉하고, 대관(大觀) 2년(1108년)에 무안왕(武安王)으로 가봉(加封)했다.
  • 송휘종 선화(宣和) 5년(1123년)에 칙령으로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으로 봉하여 무성왕묘(武成王廟)에 종사(從祀)하게 했다.
  • 남송 송고종 건염(建炎) 3년(1129년)에 장목의용왕(壯繆義勇王)이라 가봉하였고, 송효종 순희(淳熙) 3년(1176년)에 영제왕(英濟王)으로 가봉했다.
  • 원문종 천력(天曆) 연간(1328년 ~ 1329년)에 현령(顯靈)이라고 가호(加號)하였다.
  • 명나라 홍무제 초년에 본래의 봉호대로 전장군수정후(前將軍壽亭侯)라 하였고, 20년에 순천부(順天府) 정양문(正陽門) 밖에 묘(廟)를 세웠다.
  • 정덕제 4년(1509년)에 유도묘(留都廟)의 현판을 충무(忠武)라 하사했다.
  • 가정제 10년(1531년)에 한관제수정후(漢關帝壽亭侯) 라 하였다.
  • 만력제 6년(1578년)에 협천호국충의대제(協天護国忠義關聖大帝) 42년(1614년)에 삼계복마대제 신위원진천존 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 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이라 했다.
  • 천계제 4년(1624년)에 칙명으로 봉사(封祀)하는 축문에 '제(帝)'라고 하라 했다.
  • 숭정제 3년(1630년)에 진원현응소명익한천존(眞元顯應昭明翼漢天尊)라 했다.
  • 순치제 9년(1652년)에 칙령으로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라 했다.
  • 옹정제 3년(1725년)에 증조부는 광소공(光昭公)으로, 조부는 유창공(裕昌公)으로, 부친은 성충공(成忠公)으로 추존.[141]
  • 건륭제 원년(1736년)에 산서관부자(山西關夫子), 건륭 31년(1767년) 존호 영우(靈佑) 추가.
  • 가경제 18년(1813년)에 존호 인용(仁勇) 추가.
  • 도광제 8년(1828년)에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라 했다.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북송 : 현열왕(顯烈王), 충혜공(忠惠公), 무안왕(武安王),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 남송 : 장목의용무안왕(壯繆義勇武安王), 장목의용무안영제왕(壯繆義勇武安英濟王)
  • 원나라 : 현령의용무안영제왕(顯靈義勇武安英濟王)
  • 명나라 1 : 전장군수정후(前將軍壽亭侯)
  • 명나라 2 : 협천호국충의관성대제(協天護国忠義關聖大帝)
  • 명나라 3 :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
  • 명나라 4 : 진원현응소명익한천존(眞元顯應昭明翼漢天尊)
  • 청나라 1 :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
  • 청나라 2 : 충의신무령우인용위현관성대제(忠義神武霊佑仁勇威顕關聖大帝)
'충성스럽고 의로우며 신과 같이 엄청난 무예에 신령이 돕고 인자하며 용맹스럽고 위엄이 당당하신 관씨 성을 가지신 성스러운 대황제 폐하'이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거창한 칭호. 칭호가 너무 길어서 줄여서는 관성대제(關聖大帝), 관제(關帝)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칭호를 올린다는 것이 관우에 대한 옛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저것도 완성본이 아니고 최종 호칭은 광서제 5년(1879년)에 추봉된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護國保民精誠綏靖翊讚宣德關聖大帝)이다.

위진남북조 시대 일개 장군으로 묘사되던 관우가 수당 시대를 거치며 무성왕묘 종사를 통해 국가사전에 편입되었고, 다시 송원 시대에는 후에서 공으로, 다시 공에서 왕으로 신분의 급상승을 이루었다. 관우 신격화가 절정에 이른 명청 시대에 이르면 왕을 넘에 제로 등극하면서 삼계를 통섭하는 최고의 권능을 부여받게 된다. 이렇듯 관우의 이미지는 역사에서 생활로, 영웅에서 신으로 변화되었다. 자연신에서 가정으로 들어옴으로써 백성에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생활 신앙과 도덕정신에 영향을 미쳤고, 그는 정신적 수호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역사상 통지자가 관우에게 내린 봉호는 다향했지만, 결국 국가의 재난 해소와 봉건 통치의 유지와 보호라는 정치적 필요성이 깔려 있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본 관우 신격화의 역사적 변모양상 고찰[142]

본래 관우는 조익이 지적했듯이 장비와 함께 남북조 시대에는 관장지용이라고 해서 용맹한 장수의 이름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주로 쓰였고 사후에 지역의 수호신이라 할 수 있는 성황신으로서, 형주에서 지역신으로 숭배되었던 기간이 상당히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남조 양나라 말기 후경의 난(548~552)때 난을 진압하던 육법화가 후경의 부장 임약을 대파한 일이 있었는데 많은 강릉의 신들이 육법화를 도왔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때 관우의 신령도 그를 도왔다고 한다.

촉나라(蜀)의 전장군(前將軍) 관우(關羽)는 형주를 지키다가 돼지가 발을 무는 꿈을 꿨는데, 스스로 상서롭지 못하다 여기며 말하자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도 노쇠하였구나! 만약 오나라를 정벌한다면 나는 필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과연 관우는 오나라 장수 여몽의 휘하에게 처형되고 촉나라는 형주를 잃고 말았다. 천하 사람들이 옥천사(玉泉祠)를 일컫기를 사방이 끊어지는 곳(四絕之境)이라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사당을 일으켜 세운 공은 귀신의 것이라 했는데, 귀신의 이름은 "삼랑신(三郎神)"이다. 삼랑이란 곧 관삼랑(關三郎)이다.[원문]

운계우의(雲溪友議)

당나라 시대 『형남절도사강릉윤배공중수옥천관묘기(荊南節度使江陵尹裴公重修玉泉関廟記)』에 따르면, 수나라 때 지의(智顗) 선사에게 관우가 나타나, 승방의 수호신으로 하였다고 기록이 되어 있으며, 남송시대에 쓰여진 불조통기(佛祖統紀)에도 지의선사에게 관우가 나타나 불법에 귀의하였고, 관제보살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43] 지의선사는 수나라 시기의 승려로서, 천태종의 개조로 여겨지며, 형주 출신으로서 금릉에서 활동하였고, 말년에는 고향 형주로 돌아가 옥천사를 건립하였다. 당 고종 의봉 원년(676년)에 관우를 옥천사의 가람 수호신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관우 혼령이 옥천사 아래에 머물면서 이 지역의 흥망과 농사의 풍작을 좌우했다는 전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144]
이후 북송에 들어서 민간과 관에서 관우에 대한 신앙이 급속도록 퍼진것으로 보여지는데 우선 관우의 고향이었던 산시는 소금이 많이 나는 지역이었고 이 지역 상인들은 소금으로 부를 얻었다. 중국의 상인 집단 가운데서도 으뜸인 관우의 출신지인 진상(晉商), 산시 상인들은 신용을 으뜸으로 여겼고 관우가 가진 신의, 의리와 충실함을 대변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관우를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삼았고 이후 이들이 전 중국에 퍼지면서 관우는 상인들의 재물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한다. 정작 실제 관우의 생애 자체는 부귀영화를 마다하는 등 장사꾼이랑은 별 관련 없어보이는 듯 해서 한국인들은 관우가 중국에서 재물신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는데, 관우를 숭상한 관우 고향지역 출신 상인들이 중국 전국에서 활동하면서 그렇게 퍼진 것이다.[145]
또 송나라 시기 서민 문화의 발전으로 삼국지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각지에서 꽃을 피웠고 관우의 이야기 역시 중요 인기 소재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시기 삼국지 이야기엔 파천황적 서민 이미지인 장비의 인기가 높았지만 관우의 이야기도 퍼져나갔고 상인들이 재물신으로 여기는 풍조로 인해 일종의 신성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관에서도 이런 분위기에 맞추어 관우를 국가의 수호신으로 삼기 시작했는데 1096년 송철종은 관우를 현열왕으로 봉하고 뒤를 이은 송휘종은 충혜공으로 봉하였다. 이후 숭녕지도진군, 무안왕 등으로 높여 국가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어느덧 민간에서는 관우의 혼령이 치우를 물리쳤다는 전설, 연극도 나타났다. 이를 '관운장대파치우(關雲長大破蚩尤, 관우가 치우를 박살내다)'라고 한다.

[치우蚩尤] : 너는 무슨 신이냐?

[관우關羽] : 나는 관장군이다. 너는 무슨 신이냐?

[치우] : 나는 치우다. 내가 헌원(軒轅)과 원수지간이기에 이 염지(鹽池)를 마르게 하였노라. 너와는 상관없는 일일진데 무엇 때문에 군사를 거느리고 왔느냐?

[관우] : 나는 송 천자의 명을 받들어 너같이 제멋대로 구는 사신(邪神)을 붙잡기 위해 특별히 왔노라.

[치우] : 나는 하늘과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삼계(三界)의 신들조차도 감히 나와 가까이하지 못하거늘, 너같은 붉은 낯짝 놈이 감히 헤아릴 수나 있느냐? 토지 신에게 어떤 신통한 법력이 있으리오만, 감히 나와 싸운다면 내가 이기리라.

[관우] : 제멋대로 구는 사신인 네놈도 들었을터. 내가 비록 옥천산(玉泉山)의 토지 신이나 한 평생 정충보국하였기에 하늘도 감동하여 오늘날 송 천자께서 조서를 내려 숭녕진군(崇寧眞君)에 봉해졌다. 또한 옥제(玉帝)의 조서가 있어 오악사독(五嶽四瀆)의 병사를 이끌고 중군(中軍)에 앉아 소탕하러 특별히 왔노니, 일찌감치 항복하라.

-관운장대파치우(關雲長大破蚩尤)-

이 연극은 북송 인종 때에 생겨난 관우 전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연극인데, 이 연극에서 관우는 겨우 조막만한 산의 토지 신 주제에 옥황상제와 7일에 한 번씩 직접 대면할 정도로 위상이 높은 신으로 나온다. 황제 때 치우를 물리쳐 해주 염지에 장사지냈는데 치우 혼령의 행패가 심하니 장천사[146]를 불러 관우의 혼령을 불러 치우를 격파하면 된다 하여 대신 여이간을 옥천산에 보냈고 관우는 옥황상제에게 신묘한 군사를 통솔하여 해주로 가서 치우를 격파했다는 것이다. 관우가 숭녕진군이 된것은 이 공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연극이다.
치우와 관우가 전쟁을 했다는 전설은 윈청 지역에서 매우 유명한 이야기로 원나라 서적인 <대송선화유사>에 전하고 있다. 저자 미상인 이 책은 송나라시대 필기소설로 원나라인이 편집했다고 한다. 관우와 치우의 전쟁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긴 이는 원나라 사람 호기로 그가 편찬한 <관왕사적>의 내용에 따르면 송나라 대중 연간에 염지의 물이 말랐다. 사신을 보내어 알아보니 치우가 염지의 재난을 일으켰다고 했다. 황제는 여이간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 날 저녁에 치우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염지의 주인으로 헌원은 나의 적인데 염지에 헌원사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물을 끊어버렸으니 헌원사를 부셔버린다면 나도 행동을 멈출 것이다."
여이간은 돌아와 이 일을 송나라 황제에게 알렸다. 왕흠이라는 신하가 장천사가 귀신을 잡을 수 있으니 그에게 일을 맡기자고 했다. 궁궐로 들어온 장천사는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것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고대로부터 충성스럽고 절개가 굳은 신하는 죽어 신이 됩니다. 촉한의 장군 관우는 충성스럽고 용감합니다. 폐하께서 그를 불러 치우를 토벌하게 하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장천사는 부적을 이용하여 관우를 불러왔다. 관우는 "신이 어찌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신에게 세상의 신병(神兵)을 모을 수 있게 한다면 황제를 위하여 치우를 제거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후에 홀연히 사라졌다.
어느 날 갑자기 염지 상공에 검은 구름이 일고 큰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고 날이 흐려져 사람들이 두려워했으며 공중의 황금창과 철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구름과 안개가 약해지고 하늘색이 맑아졌으며 염지의 물은 옛날과 같아졌고 둘레가 백 리에 이르렀다. 해주를 관리하는 신하신 왕충은 조정에 이 일을 알렸고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사람을 파견하여 제사를 올렸다. 또 관우의 사당을 수리하고 계절마다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147] 위에서도 나왔지만 해주는 관우의 고향이며 염지는 소금호수를 뜻한다. 치우 관련으로 언급되는 관우에 대한 이 지역 민간전승도 그렇거니와 이는 관우가 이 지역 소금상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들의 신으로 숭배받았던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관우의 고향 하동군 해현(河東郡 解縣, 현재의 산시성 윈청시) 시내에 있는 소금 호수인 해지(解池)에서는 예부터 소금이 생산되어 이곳의 소금은 당나라 때 장안으로 보내졌다. 산서성 윈청 시 염호 지역에 있는"제저우(解州)의 염지"는 옛날부터 중국의 혼란기에 각 정권이 쟁취하고자 했던 요지로 알려져 있다.
원래 중국에서는 궁중에서 군신(軍神)을 제사하는 습관이 있었다. 한나라는 치우를 군신으로 섬겼고 당나라는 강태공을 군신으로 섬겼다. 원나라에서는 마침내 관우가 치우와 강태공을 앞질러 군신의 자리에 올랐다.
재밌는것은 이미 송나라 시기부터 민간에 떠돌던 관우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인 주창이 이 시기에 관우를 보필하였다 하여 벼슬을 추숭받았다는 것이다. 이 시기 그려진 관우의 그림[148]에도 주창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하는 등 연의에 나오는 관우의 일화들은 이미 북송 시기에 그 원형이 완성되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있고 이런 민간의 분위기에 맞추고 유교적 충의에도 맞는 관우를 나라의 수호신, 군신으로 모신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관우를 재물신, 군사 관련 직종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풍조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생긴 것이다. 이후 명, 청에서도 관우를 황제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높게 추숭해 오늘날의 관우신앙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근세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관우는 나라의 공적인 차원에서 강조한 호국신의 이미지와 민간에서 소금과 관련된 재물신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재물과 복을 수호하는 수호신의 의미가 컸다. 현대에는 중국에서 군인으로부터 경찰 등 무(武)와 관련된 직종은 물론, 상인,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거의 만능 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민간층에서 폭넓게 사랑받는 신이다.
덤으로 함께 처형된 맏아들 관평도 '알충왕(謁忠王)'이었다가 청나라 시대에는 '영후태자(靈侯太子)'라는 호칭으로 덩달아 신격화가 되었으며, 가공인물인 심복 주창도 항상 관평과 함께 좌우를 시위하는 형태로 '위령우용공(威靈愚勇公)'이라 불리고 있다.
명나라의 서책인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에 따르면 관우의 전생은 해량노룡(解梁老龍)[149]이다. 후한 환제(132~168) 시절, 하동(관우의 고향 사례 하동군)은 큰 가뭄에 시달렸다. 노룡은 민중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어 밤마다 황하의 물을 길어다 비를 내려주었다. 옥황상제는 노룡이 천명을 거스른 것을 알게 되자, 물을 멋대로 취한 죄를 물어 천조(벼슬명)로 하여금 법검으로 노룡의 머리를 참수토록 하고, 그 수급을 지상에 던졌다. 해현(하동군 해현)의 스님 보정은 강변에 노룡의 머리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주워 항아리 안에 두고 9일간 경전을 읊었다. 그러자 항아리 안에서 소리가 났는데, 열어보자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 하동군 양평촌에 살던 관씨 가족은 절의 연못 안에서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아이의 아명은 수(壽)이고, 학문을 배운 뒤 장생(長生)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후에 스스로 이름을 우(羽)라고 고치니, 자는 운장(雲長)이다.[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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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무덤 관림
중국은 성인의 무덤을 일컬어 림(林)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 무덤에 수풀 림(林)을 붙이는 경우는 딱 두 사람에게 한정된다. 하나는 공자의 묘인 공림이고, 또 하나가 바로 관우의 묘인 관림이다.
베이징에 위치한 역대제왕묘에는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공신의 위패가 모셔졌는데, 관우의 경우 신하의 신분이지만 황제의 칭호를 받은지라 지위가 애매했던 모양인지 공신 위패 중에서 관우만 따로 건물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한수정후 관운장은 유장(儒將)이자 의사(義士)다. 일생의 사업이 공명정대하고 굽히는 것이 없어 사책(史冊)에 널리퍼져 만고에 빛난다. 아래로는 부녀자와 어린아이에게까지 이르러 그 이름은 진동하고 덕을 흠모하니, 오늘날 향을 피워 제사를 지내고 오래토록 사당에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관우극(關公戱)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한 파로서 다른 극과는 매우 다르다. 배우(演者)는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반드시 숙독(熟讀)하고 정신과 예술 양쪽을 평정해야한다. 이른바 정신이란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악착같은 태도는 버려야하며, 극중의 인물을 굳게 믿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잊은채 경건하고 정성스레 그 신이 옛날과 만나기를 구해야 한다. 마음을 바로 잡았다면 곧장 나아가 예술을 연구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첫째로는 분장한 모습이 영민하고 무위(武威)가 있어야 한다. 분장한 모습이 멋있길 원한다면 특히 얼굴 분장이 닮아야 한다. 관공의 모습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르며 눈과 눈썹의 색이 특이한 점이 있기에 스스로 깨달아야지 말로 전하기는 어렵다. 두번째로 동작과 표정이 경건하고 엄숙해야한다. 좋아지길 원한다면 특히나 거동이 차분해야 한다. 관공의 무예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것과는 다르며, 유장으로서의 풍모는 태산(泰山)과 같이 무겁고 지용을 겸비하여 그 신이한 위용은 헤아릴 수가 없다. 용력이 너무 사나우면 조야함이 흐르고, 손과 발에 힘이 없으면 원기가 없어 보인다. 이 때문에 검무를 추며 말 달리는 것을 매우 쉽게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익혀야지만 능히 해낼 수 있다.

국부총간(菊部叢刊)

청나라 때 관우를 연기했던 연극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삼국지연의를 정독해야 하고 관우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하며, 분장을 관우처럼 보이게 멋지게 꾸밀 줄 알아야하고 관우처럼 보이게 연기 동작에 신경써야하며, 칼춤에 능숙해야하고 말을 잘 타야한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당시 관우 역할 배우들은 집에 관우의 위패나 조그마한 사당을 모셔놓고 아침, 저녁으로 향도 피워주고 꼬박꼬박 제사도 지내줬다.
당시 관우 역할 배우들이 관우를 존경한다는건 "아, 천하의 의인이신 관공!" 이러면서 마음으로 경건함과 존경심을 표하는 것도 있지만, 집에 위패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향도 피우고 정기적으로 제사도 지내주는걸 말한다. 좀 특이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관우로 분장하면 공연 시작 전까지는 말 한 마디 하지않는 배우도 있었으며, 집에서 제사 지내고 향 피우는건 물론이고 관묘에 정기적으로 나가기도 했다고.
요재지이에 등장하는 설화가 하나 있다. 요괴가 매우 날뛰는데 관성제군은 대체 뭐한다고 안 도와주냐고 욕하던 한 서생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검은 얼굴의 무시무시한 신장이 내려와 요괴를 해치우고는 자신이 주창이라는 것을 밝힌 뒤 관성제군은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라며 관성제군을 욕했던 서생을 혼냈다. 그 서생은 이후로 다시는 관성제군을 욕하지 않고 열렬히 제사를 지냈다. 이 외에도 관우의 인기에 힘입어 나온 설화도 무지막지하게 많다. 주판을 관우가 발명했다는 민간 설화도 있다.
박지원열하일기에서 청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마을이 변방이든, 마을이 궁핍하든 지나가는 모든 마을에 관제묘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관우 신앙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작게는 가게 안이나 마을에, 크게는 각 도시별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제묘(關帝廟)가 존재한다. 또한 관우의 무덤도 중국 내에 다섯 개 이상된다. 참수되어 조조에게 보내진 관우의 수급이 묻힌 낙양 관림(關林)과 머리없는 관우의 몸을 묻은 당양의 관릉(關陵)은 물론이고 관우 옷 무덤, 관우 공적 무덤 등등 확장판이 널려 있다.
중국 연합 준비은행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한 10원 짜리 지폐에 관우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게다가 문화대혁명의 물결 속에서도 관우 신앙만큼은 다른 문화 파괴 행위에 비하자면 멀쩡하게 살아남았단 걸로도 그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최근의 관우라는 인물의 캐릭터 해석에 있어서 창작물에서 관우가 이렇게 저렇게 표현되니 그걸보고 중국에서 관우의 신성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나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군신(軍神)이자, 재물신인 관우의 위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중국드라마 삼국에서 해석된 '오만한 관우'상을 보고 한국인들이 단편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우의 오만에 대해선 이미 300년전 삼국지연의를 재정립한 모종강부터가 관우가 손권 혼인 거부건으로 '호랑이 자식을 개새끼에게 줄 수 있는가?'[151]라는 모욕을 주어 욕한 발언을 가지고 ''''그럼 니 의형은 개새끼와 결혼한 셈이냐?''''라고 협평으로 깠고 나관중본에서 관우가 신으로 승천하는 장면을 참수당하는 장면으로 바꾸어 놓는등 신으로서 표현되던 관우의 위상을 다시 재창작했다. 그러나 모종강본이 삼국지 독서계를 장악한 청나라 시기였음에도 '''관우 신앙은 오히려 더 성행하였다.'''
또 중화권의 유명 삼국지 만화 화봉요원에서 관우는 적장과 일기토를 함과 동시에 군대를 자유자제로 지휘하는 궁극의 신인으로 묘사되고 정사에서 관우가 황충에게 했던 노병 발언을 가지고 "이 우는 노졸 따위와는 같은 열에 서고 싶지 않소. 허나 마지막 남은 촛불이,대지를 불태우며(燎原) 태양과 같이 찬란히 빛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소! 지금 우리 눈 앞에는,천년의 기회가 펼쳐져 있으니까! 이 마지막 한 걸음,관 모는 그대를 위해 남겨두겠소!"라고 삼국과는 다른 방향성으로 관우라는 인물을 어레인지 하고 있다. 굳이 하나의 창작물에서 나오는 관우 캐릭터로만 그 사람들이 '관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편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것이다.[152]
한국인인 우리야 중국인이 아니고 그렇기에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정사 삼국지삼국지연의 정도만 보고 관우를 판단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관우야말로 '''자신들의 영웅이며 신이자 전설이며 역사이다.''' 당장 관우가 지켰던 강릉(오늘날의 후베이성 징저우시)을 보자, 오늘날 위에 보이는 거대 관우동상까지 지은 그곳에서는 예전부터 옛 관우의 관저에 관제묘를 지어 그를 기렸으며 연의는 뺨칠 관우에 대한 전설들이 널리 전승되고 있는데 한 예로 '''당시 관우의 고함소리에 이곳에 있던 바위들이 모두 놀라 북쪽을 향해 솟았고''' 백성들이 ‘관우의 고함소리에 놀라 산속의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솟았네, 마치 제갈량의 팔괘진을 보는 것 같으니 이에 놀란 여몽의 병사 수만명이 퇴각했네’라고 민요를 지어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조의 본거지 한단에서조차 관우가 조조와 지혜 대결을 벌여 간교한 조조의 속임수를 바로 통찰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으며 산시성 난중탸오산(南中條山)에선 80m에 달하는 관우 동상을 세우고 이를 제작하는데만 1억위안, 우리돈으로 180억원 가량을 들이고 정부 지원 없이 현지 민영기업이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실제 중국인인 장위안조차 '관우는 중국에서 위인이며 제사를 지낼 정도로 좋아한다.'라고 하는 마당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물론 장위안은 다른 예능인 '영웅 삼국지'에선 관우보다도 악비가 더 영웅적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악비 역시 불멸의 영웅으로서 중국에선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그런 그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특이한 일이 아니다.
관우가 유비와 떨어져 조조 수하로 있을 무렵에 관우가 유비가 원소 휘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나무 그림과 시를 지어 유비에게 보냈다고 전해지는 시죽도(詩竹圖)가 있다. 이를 조조가 알았으나 별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해당 내용의 출처는 명확하지 않은듯 하나. 청 성조(강희제)조인 1716년에 한재림(韓宰臨)이 해당 그림과 시를 비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서안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館)에 소장 중이라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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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謝東君意 동군(東君/조조)의 호의(意)에는 불사(不謝/감사하지 않음)하며,

丹青獨立名 (대나무와 같은) 단청(丹青/진한 청색)으로 홀로 입명(立名/이름을 세움)하겠습니다.

莫嫌孤葉淡 고엽(孤葉/홀로 남은 마지막 잎새)의 담(淡/색이 엷어짐)을 혐(嫌/의심)하지 마시오며,

終久不凋零 종구(終久/끝내 변하지 않음)하여 조령(凋零/말라서 떨어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창에는 '관공사조처'라고 해서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듣고 조조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하러 찾아간 곳도 있다. 하지만 조조는 아프다는 핑계로, 때로는 출타 중이라는 이유로 관우를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관우는 한 통의 서신을 남기고 떠나게 되는데 바로 '관공사조승상서'다. 이곳의 정문을 들어서면 관우와 조조가 이별하는 장면이 담긴 거대한 석상이 나온다. 이 석상 앞에는 관우가 조조에게 보낸 편지 '관공사조승상서'가 적힌 비석 모양의 석상이 있다. 왼쪽 길로 빙 돌아 들어가면 정자가 있고 연못이 파인 작은 정원이 나오는데 바로 '청매정'으로 논영회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관우와 조조가 이별했던 다리의 본래 이름은 허창과 팔리 떨어져 있다고 '팔리교'였다. 하지만 당나라 때 장안의 '파릉교'가 '버들가지를 꺾어서 먼 길을 떠나는 연인이나 벗에게 보내는 이별의 장소'로 유명해지자 <삼국지연의>에서 팔리교를 파릉교로 개명해 가져다 썼다. 팔리교가 있던 장소는 허창시에서 서쪽으로 8리 정도 떨어진 '석양하'라는 마을이었다. 다리는 당시로서는 꽤 컸던 것으로 길이가 90미터에 이르고 다리 위로는 마차 두 대가 서로 교행할 수 있었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하천은 '청니하'라 불렸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간 시점은, 유비가 원소의 명을 받들어 허도의 남쪽 여남군을 공략하고 있을 때였다. 여남군은 허도(허창)로부터 불과 300여 리 정도 떨어진 거리였기에 3일이면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7.2. 한국



7.2.1. 역사


한국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관제묘가 들어서는 등 명나라 군이 관우 신앙을 전파했다. 이 당시에 관우가 전장에서 나타나 왜군을 베었다...는 이야기도 꽤 퍼졌는데, 아무래도 언월도 들고 설친 명군을 보고 설레발을 친 듯하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유격 진운홍이 울산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숭례문 밖에 머물렀는데 후원(後園) 위에 있던 오래된 집을 관왕묘로 바꾸고 소상(小像)을 설치하고자 조선 조정에 장인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건물이 남묘가 되었는데 1598년이었다. 1599년에는 조선 조정에서도 공식적으로 관왕묘의 건립이 논의되었고 1601년 8월에 가서야 일단락되었다.

명군이 지은 대표적인 관왕묘가 임란 중 진린전남 완도군 고금면 묘당도에 세운 관왕묘인데, 1666년 현종 때 관왕의 양 옆에 이순신 장군과 진린 장군의 초상을 모셨다. 일제강점기 때 관왕묘는 폐허가 되었고, 이후 사당은 이순신의 사당으로 변해 관왕묘비만 남았다. 이외에도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이 함께 싸운 남해안 일대에 이순신의 사당과 관묘 등이 들어섰다.
선조 때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나라 지원군이 조선에 와 있었는데, 명군은 관우 신앙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명나라 장군 양호가 선조에게 ''''관우의 생일(음력 5월 13일) 관왕묘에 왕께서 직접 오셔서 술 따르고 사배례를 하시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관우랑 하등 관련도 없는 이 땅에 명나라 군이 와서 이김은 관우가 직접 오셔서 싸우신 덕이니, 조선 왕은 마땅히 관왕께 감사의 예를 표하라.'는 이유였다. 당시 조선에서도 물론 관우의 인기가 만만치 않았지만, 이런 붕 뜬 이유로 일개 장군이 타국의 왕에게 사배를 강요하는 것은 마땅히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허나 거부하자니 명군의 심기를 거슬러 명군이 철군해버릴까 두려워 선조는 결국 울분을 참고 관왕묘에서 삼작[153]에 사배를 올려야 했다. 별 것 아닌 듯 느껴져도 충분히 삼전도의 굴욕에 버금갈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수많은 명군 장수들이 너도나도 선조에게 요구하여 조선 여기저기에 관왕묘가 들어섰다.
임진록에서는 관우 신령이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꿈에 나타나 '만력제는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의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니,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라,'고 말한다. 전란 중 관우의 음덕(陰德)으로 임진왜란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믿음이 명나라 병사들과 같이 싸우던 조선의 병사들에게도 퍼져나가 민간신앙으로 정착한 듯 보인다. 그리고 이런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당시 만력제는 조선에 병력과 물자를 파격적으로 지원하여 심지어 '고려천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해당 문서 참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기담서로 임방(1640~1724년)이 지은 <천예록>에도 관우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강을 건너던 한 선비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서 "잠시 후면 어떤 나무 상자를 들고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들에게 내가 그대 손에 그려준 문양을 보여주면 알아서 정리될 것이다. 그리고 궤짝을 쌓아두되 절대 열어보지는 말고 신속히 조정에 보고하여 속히 태워 없애 버려야 한다. 이는 나라의 대사이니 결코 처리가 잘못 되어선 안된다"라고 말했는데, 놀라서 깨어난 선비가 자기 손을 보니 과연 관우가 써준 문양이 있었다. 이후 정말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무 상자를 나루터에 내리려 들 때, 선비가 그들에게 문양을 보여주니 놀라서 혼비백산하다가 전부 물에 달려가서 빠져 죽었다. 이후 선비는 주변사람들에게 "상자를 절대 열지 말고, 대기하면서 지키라"고 명한 후 근처 관청에 자기 얘기를 들려주고, 놀라 달려온 병조의 관헌들과 함께 불에 상자를 태워 없앴는데, 타면서 드러난 상자의 안에는 나무로 된 군사와 군마의 모형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모형들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로서 요사한 자들이 환술을 부려 도성을 혼란하게 하려는 수작이 드러났다." 하는 기술로 보아 모종의 사악한 주술을 걸려는 세력이 있었던 모양.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관우 신앙은 더욱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숙종은 본격 관우 빠돌이로 신하들에게 관우 신앙을 강요했다. 관왕묘에 지내는 제사를 정례화하여 국가 차원으로 관우를 섬겼고, 자신의 뜻대로 모든 지방의 관왕묘에 정기적으로 향축을 올리라 명령했다. 당시 좌의정 서종태는 숙종에게 '과도한 관우 신앙을 자제하라.'고 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았다. 숙종은 1692년에 시 2수를 지은 후 어필 목판을 내려 동묘와 남묘에 걸어 두도록 했고, 1701년에는 모든 지방의 관왕묘의 제식을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하였으며, 매년 경칩상강일에 향축하도록 하였다. 경칩과 상강은 조선의 공식제례법에서 병조판서를 포함하여 무관들이 둑기(纛旗)에 제사를 드리는 날이다. 관우를 그날에 제사지내도록 함은, 관우를 군신(軍神)으로서 조선의 제례에 집어넣으려는 의도일 공산이 크다.
영조는 1746년에 '현령소덕왕묘(顯靈昭德王廟)'라는 현판을 써서 두 관왕묘에 걸도록 했다. 정조도 관왕묘에 관심을 기울여, 1786년에 친히 관묘악장(關廟樂章)을 지어 처음으로 관왕묘의 행례(行禮)에 쓰게 하였다. 1832년에는 순조가 남관왕묘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이후 고종 황제도 관우 신앙에 마음이 많이 기울었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 관우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로 추존했다. 고종대에는 북묘와 숭의묘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북묘는 1883년(고종 20)에, 숭의묘는 1903년에 완성되었다.
대한제국기인 1908년에는 칙령 제50호 향사이정에 관한 건(享祀釐正件)이 통과되어 관왕묘는 국가의 관리대상에서 제외된다. '기존의 조선 예절은 너무 번잡하여 근본을 잃게 되었으니, 이른바 유신(維新)을 지향하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제실(帝室)에 관계되지 않는 제사는 궁내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 칙령의 요지였다. 이 칙령에 따라 숭의묘ㆍ동묘ㆍ남묘ㆍ북묘 및 지방 관왕묘의 제사가 폐지되었고, 숭의묘와 북묘는 국유로, 동묘, 남묘 및 지방 관왕묘는 해당 지방 관청으로 넘겨 백성들의 신앙에 따라 따로 관리하도록 했다. 이 시기 대한제국은 말이 제국이지 사실상 통감부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일제가 조선의 법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같이 폐지된 것 같다. 이후 서묘는 1909년 동묘에 합사(合祀)되었고, 북묘는 1910년에 헐어버려 흥인지문 밖에 위치한 동묘만 남게았다.
관우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무당 진령군명성황후의 앞일을 몇 개 기똥차게 맞추자, 명성황후는 진령군을 거의 숭배자 수준으로 믿게 되어 황실의 돈을 엄청나게 탕진했다. 해방 전후 정치인 여운형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당시 명성황후가 아꼈던 무당 진령군이 여씨 집안을 '관우를 죽인 여몽과 같은 성씨 쓰는 집안'이라고 저주하는 일이 있었는데, 안 그래도 정계에서 멀어진 여씨 집안은 출세길이 아주 막혀버려 정치 문제에 신경이 곤두섰다. 이 때부터 여운형은 본격적으로 구습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여운형은 어려서부터 미신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성이 여씨인 사람이 관우 사당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미신이 있었는데도 예전부터 관우를 모시는 사당에 들락날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을미사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당 진령군도 죽었다고 한다.
강일순이 독자적으로 작성한 주문 운장주에서는 관우를 정의로운 신으로 인정하여 '요사한 것들을 쫓아주십시오.' 하고 청하는데, 운장주 때문에 증산교 측에서는 관우는 중요한 신으로 취급된다. 관우 신앙이 사그라든 현재 국내에서 전해지는 관우 신앙은 대부분이 증산계나 무속 신앙에서 비롯된다.
사실 본격적으로 관우를 신으로 모신 한국의 신흥종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20년 박기홍, 김용식 등이 창시한 관성교(關聖敎)라는 종교인데 관우를 숭배하던 종래의 숭신단체(崇神團體)와 무당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동묘가 관성교의 본부였다. 이후 동묘가 서울특별시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동묘 안에 세워졌던 관성교의 건물이 철거되자, 현재에는 제도로서의 관성교는 소멸되고, 다만 신봉자들이 개별적으로 동묘에 참배하고 있다. 이 종교는 19세기에 등장한 이른바 명성경이라는 서적을 경전으로 삼았는데 1960년대에는 종로, 동대문, 청량리 등지의 포목상인들이 중심을 이루어 포교활동이 활발했으나 신앙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조직기구가 미약하기 때문에 종교로서의 체제는 거의 소멸되었다. 또 해방 직전인 1945년에 계룡산에서 수행하던 김진하가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던 중 '경문'을 받고 관우의 높은 덕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조직했다는 무량천도가 있는데 1990년대부터 자체적인 신격을 모시며 관제에 대한 신앙은 하지 않는다.
사실 한국의 무속계 신흥종교의 경우 이들이 신으로 삼는 주 대상이 부처님, 단군, 관우인 경우가 상당수 있다.

7.2.2.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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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왕묘 정전 내부[154]
지금도 관우를 모시는 관제묘가 다른 곳도 아닌 서울특별시 한복판에 있다. 서울 지하철 역인 동묘앞역 인근에 있는 동묘가 바로 관제묘. 임진왜란을 거친 뒤에 만들었으며 선조 34년(1601) 도성 내 동서남북에 각각 관왕묘가 세워졌는데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가 소요 비용과 친필 현판을 보내줬다고 한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크고 화려한 동관왕묘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한 채 남아 있다. 동묘에는 고종이 추증한 관우의 시호인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가 현판에 적혀 있다. 동관왕묘는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전쟁 이후에 명나라와 조선에서 우호를 다지면서 굉장히 공을 들여서 지어졌기 떄문에 상당히 수준 높은 문화재다.
원래 동대문 밖에 동관묘, 남대문 밖 도동에 남관묘, 명륜동에 북관묘, 서대문 밖 천연동에 서관묘, 종로네거리 보신각 뒤에 중관묘의 다섯 곳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동관묘만 그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고 남관묘는 일제가 목멱산(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헐어버린 것을 지금의 사당동으로 옮겨지어 지금에 이르고, 다른 세 곳은 전하지 않는다.
동관묘는 특히 성균관의 문묘와 나란히 무묘(武廟)라 불릴 만큼 격이 높았는데, 춘추로 치러지는 대제(大祭) 때에는 임금이 손수 무복(武服)을 입고 참례를 할 정도였으며 지방에도 성주, 안동, 남원, 강진의 네 곳에 조선 조정이 공식적으로 세운 관왕묘가 있었다.
동관왕묘는 크게 5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중심건물은 관우상이 있는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6칸 크기이며 지붕은 조선시대 전통 양식과 달리 정(丁)자와 일(一)자가 합쳐진 공(工)자 모양을 띠고 있다. 한국 양식이 아니라 중국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관우상은 정전 중앙에 있으며 앞쪽 좌우로는 형주에서 관우를 모신 관평, 조루, 주창, 왕보가 관우상을 호위하듯이 서 있다. 특히 동관왕묘에서 모셔지는 금동관우좌상은 구리 4천여 근(약 2.4 t)을 들여 만든 높이 2.5 m 미터짜리 거대한 황금색 금동신상으로, 조선시대 관우상 중 가장 크다. 1601년에 제작되었는데, 영조통기(營造通記)에 따르면 명나라 장수 10명이 풍로 10개에 구리 3800근을 녹이려다가 한 번 실패하고, 감관 한빈(韓斌)이 조선의 구리장인을 모아 300근을 더 넣고 녹여서 제조했다고 한다. 즉, 한중합작으로 만들어진 명작인 셈이다.
금동관우좌상 뒤에 세우는 일월오봉도는 병풍 일고 폭에 490×259 (cm) 크기로 그렸는데 일월오봉도 중 가장 크다. 전례와는 달리 병풍의 폭이 홀수이고 붉은 해가 왼쪽, 흰 달이 오른쪽에 배치된 특이한 작품이다. 일월오룡도 외에 황적청백흑의 다섯 오조룡을 묘사한 구룡도 등의 회화, 석조, 편액 등도 조화롭게 만들어져 있고, 신상에 입히기 위한 면류관, 조복, 옥대 등의 희귀한 의복 유물도 함께 소장했다.
정전 좌우에는 위패가 있는 동무와 서무가 들어서 있는데 이는 문묘의 건물 배치와 같다. 동, 서무에는 삼국지와 관련한 대형 그림인 '삼국지연의도'가 있는데 유관장이 도원결의하는 모습, 장비가 장판교에서 조조의 대군을 막는 장면 등이 묘사돼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삼국지연의도 5점을 2년간의 보존 처리를 통해 복원, 전시한 바 있다. 동묘의 출입문인 외삼문과 안쪽의 내삼문으로 구성된다.
서울 남산에도 관우를 모신 곳이 있다. 남산공원길 북측 순환로를 걷다 보면 와룡묘(臥龍廟)란 곳이 있다. 서울 지방 문화재 5호로 지정된 곳인데 그 이름대로 제갈량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신격을 모신 사당이다. 안에 들어가보면 처음 눈에 띄는 건물이 역시 '와룡묘'인데, 와룡묘 안에는 제갈공명 소상이 오른쪽, 관우의 소상이 왼쪽에 안치됐다. 일제 강점기에 동묘의 지부를 자처하며 관우의 소상을 모셨다 하니,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관우에 대한 민간 신앙이 꽤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와룡묘를 기도처로 삼아 찾아오는 무당들이 제법 있다.
종교로서의 체제는 이제 한국 일반에는 잘 남아있지 않지만 일종의 풍수지리와 길흉화복을 다스리기 위해 관우나 삼국지 인물들의 동상을 구입하는 경우가 지금도 종종 있다. 물론 주된 판매 대상은 관우. 네이버에 '관우상'이라고 치면 최고 50만원대의 관우상도 판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 사이트에서는 관우를 아냐 모르냐가 유무식의 척도가 된다고 한다.


7.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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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 소장 네쓰케
에도 시대에 삼국지가 인기가 있었는데 각종 전통 예술 작품의 소재로 인기가 많았다.
일본 전국시대의 츠가루번 다이묘 츠가루 타메노부가 관우를 좋아했다. 특히 관우의 길고도 아름다운 수염을 좋아했다고 한다.
가부키의 여러 공연 중에서도 관우극이 있다.
일본에서는 요코하마 중화가의 관제묘와 고베(神戸) 난킨마치(南京町)의 관제묘가 저명하다.
오키나와에도 관우 전설이 있는데, 힘쎈 와샤오(돼지치기)가 돼지고기를 솥에 찌며 180킬로짜리 누름돌로 뚜껑을 덮어놓고 자리를 비웠는데, 지나가던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로 그 돌을 스윽 밀쳐내고 돼지고기를 먹으며 적토마에게도 먹였다. 와샤오는 그 위력에 놀라 관우의 부하로 들어갔다고 한다.

8. 미디어 믹스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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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간신앙에서 악귀를 쫒는 신장으로서 추존된 명칭, 줄여서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불린다. 신선조를 다룬 박앵귀라는 작품에서 콘도 이사미가 이 명칭을 언급한다.[2] 본래는 장생(長生)이다.[3] 생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유비가 161년생, 장비가 165년생이라 밝혀진 것으로 보아 160년~165년 전후에 출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체로 장비보다는 먼저 태어난 것으로 보는데, 유비와의 나이 차이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비보다 연장자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기 때문.[4] 현대의 산서성(山西省) 남부 운성(運城)시이다[5] 관우의 고향은 중국 최대의 염호인 해지(解池) 근처이기 때문에 소금의 밀매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 관우의 고향에서 전승되는 관우 관련 일화엔 소금에 관련된 일화가 많다.[6] 조조가 관우를 처음 본 것은 영웅기 기록에 따르면 영제 말년이었을 공산이(대략 180년대 중후반) 크다. 유비가 그때 조조와 함께 패국으로 갔었기 때문이다. 조조 역시 관우를 꽤 오랜기간 본 사람이란 뜻이다.[7] 관(管)씨였다는 전승도 있다.[8] 유비는 161년생이니 이 기록대로면 관우는 유비보다 1살 더 많았던 것이다.[9] 그러나 관후조묘비기는 너무 후세의 책이라서 신빙성이 낮다.[10] 삼국지집해의 저자 노필은 조운이 번씨를 취하지 않은 예를 두고 남의 여자를 탐내는 관우보다 도리가 맞았다며 관우를 디스하는데 후한말에는 아내가 있으면서도 새 아내를 들이는 경우가 많았고 전란 중 멸망한 세력의 아내를 전리품으로 취하는 경우가 흔했기에 관우 역시 그 시대의 한계로 봐야 할 듯 싶다. 그만큼 조운이 당대에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는 얘기도 되고.[11] 진의록은 두씨를 버린 것을 후회했는지, 처를 빼앗아간 자를 섬기느냐는 장비의 말에 유비네를 따라갔다 중간에 마음을 돌려 도망하다가 장비에게 죽었다. 진의록의 기록을 보면 조조와 두씨와의 관계를 애매하게 끊으려다가 갈팡질팡하게 되어 살해당한 케이스로 보인다.[12] 이때 무제기에서는 관우의 투항에 대해서 降(항복)이란 글자를 쓰고 있으나 관우전과 선주전에서는 禽(생포)을 강조하고 있다. 관우는 고립된 상태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패배하여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자치통감에서도 '進拔下邳,禽關羽'라고 기록해 조조가 하비를 공략하고 관우를 사로잡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하비에서 공성전 끝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인다.[13] 사실 양익은 전쟁의 핵심인고로 양익 기병의 지휘관으로서 훌륭하다는 것은 대단한 찬사다. 이 시기 특정 방면을 이끌 수 있었고 실제로 성과를 낸 지휘관은 삼국을 모두 합쳐도 대단히 희귀하다.[14] 한편 이에 대해서, 후한말 별부사마의 운용을 보면 본래 유연성을 위해 독립적인 작전권을 얼마간 인정해주던 별부사마라는 직위를 세력 내 자신의 핵심 라인에게 수여하여 다른 인물들과 급을 나누고, 이들에게 '별부', 즉 지속되는 군사적 기반을 부여함으로써 수여자 자신의 안정적 입지를 도모하는 인사로 보는 견해가 있다.[15] 여포는 조조에게 사로잡혔을 때 '명공이 보병을 이끌며 내게 기병을 이끌게 한다면 어찌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겠소이까?' 소리를 했고 조조는 이에 솔깃한 기색을 보일 정도로 이름난 기병 지휘관이었다.[16] 복숭아 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은 후대의 창작이지만 장비가 관우를 형님처럼 모셨다는 기록과 더불어 세 사람이 적어도 같이 죽기로 맹세했음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기록이다. 즉 관우의 목숨은 관우만의 것이 아니며 자유의 몸도 아니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만약 유비를 꾸준히 보좌하지 못하고 관우 혼자 일찍 죽어버린다면 이는 오히려 유비에게 불충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우는 잠시 조조에게 의탁하지만 그 조조에게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피력한다. '자신은 조조가 아닌 유비의 사람이며 당신이 내게 준 은혜를 갚는 대로 떠날 것'이라고. 그럼에도 조조가 그런 관우를 참수하지 않고 대접해준 것이지 관우가 진정 조조를 섬겼던 게 아니다.[17] 무제기의 서술은 2월에 백마가 포위된 사실을 서술한 이후 4월로 갑자기 널뛰기한다. 다른 어떤 기전에도 2월과 4월 사이의 백마 포위망을 다룬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18]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를 보고는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서) 수많은 무리 가운데서 안량을 찌르고서 그 머리를 베어 돌아왔다. 이 휘개를 파성넷의 번역문에서 “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라고 해놨는데, 호삼성이 휘개는 융거(병거)의 덮개라고 주석에서 해석해 놔서 그렇다. 휘(麾)는 군진(軍陣)에서 사용하는 대장기이고, 개(蓋)는 그 대장기의 꼭대기 장식을 가리키는 말이니, 즉, 휘개라 하면 높다란 대장기 꼭대기이다. 삼국지사전 (산동교육출판사),고대한어사전 (상무인서관)[19] 보통 형주 무릉군의 속현 중에 한수(漢壽)현이 있으므로 이 한수(漢壽)현의 한 정(亭)을 식읍으로 받은 것으로 보는 설이 많은데, 정후(亭侯)의 명칭에 현 이름을 붙이는 것은 통례에 어긋나므로 한수정(漢壽亭)이라는 별개의 정(亭)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20] 자치통감은 한술 더 떠서 '羽望見良麾蓋,策馬刺良於萬眾之中,斬其首而還,紹軍莫能當者。遂解白馬之圍,徒其民,循河而西。'라고 적고 있다. 즉, 당시 '멀리서 안량의 휘개를 보다가 말을 채찍질해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의 목을 벤 관우가 돌아오는데, (장수들 뿐만 아니라 백마의) 원소군들 누구도 능히 당해낼자가 없었다.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고, (조조는) 그 백성들을 황하 서쪽으로 옮겼다'며 기록하고 있다.[21] 물론 일부러 버린 것은 아니다. 유비의 세력이 완전히 공중분해된 상황이라,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의형제와 부하들과 소식도 모른 채로 생이별한 상황이다. 만일 그가 제장들을 일부러 버렸다면, 그 '버림받았다'는 부하들이 '''알아서 다시 모여서''' 유비의 세력이 부활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비가 도망가는 동안 하비성을 맡아 버티다 항복한 관우 입장에서는 버림받았다고 느껴도 할 말 없기는 하긴 하지만, 관우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은 듯 하다.[22] 연의에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를 소재로 하여 아예 제갈량이 박망파 전투를 자기가 주도하는 모습으로 실력을 보여줘 둘의 불만을 직접 가라앉히는 걸로 각색한다. 실제로는 유비가 몇 마디로 타이른다고 금방 불평을 거둘만큼 이 셋이 쌓아온 관계가 결코 가볍지 않았을 테니 제갈량이 조심스럽게 관우와 장비를 대했다. 이후 같이 활동하면서 유비가 왜 제갈량에게 극진히 대우를 해주는지 납득하지만.[23] 이각, 곽사의 난 때 헌제가 조조에게 구출되고 나서 벌인 사냥 연회에서 황제가 쓰는 금 화살을 조조가 대신 받아 사슴을 쏘아 죽였었는데 이때 황제가 사슴을 쏜 걸로 착각하고 환호하는 군사들을 향해 '''조조가 손을 들어 군사들에게 답례하는''' 대놓고 황제를 개무시하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당시 조조 휘하에 있던 유관장 삼형제도 이걸 봤는데 관우가 조조를 베어버리려하자 유비가 몰래 뜯어말렸던 일화를 뜻한다.[여기서] 서황전에서는 관우를 쳤다(討)라고 하는데 '칠 토' 자의 의미는 '정벌하다' 외에 '치다', '공격하다'의 뜻이 있는 만큼 여기서는 단순히 공격했다는 의미로 보인다. 토벌의 뜻으로 봐도 서황전에서는 관우를 치고(討) 주유를 공격(擊)했다고 하는데 결국 주유를 치고 관우를 토벌하였다가 기록의 끝이고 오히려 이통전에 보면 관우가 주둔하며 끊은 북쪽길은 이통의 도움을 받아 조인이 도주할때까지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이므로 서황의 관우 토벌은 단순한 공격일 가능성이 높다.[24] 엄연(嚴衍, 명말청초 때 강남(江南) 가정(嘉定, 上海市) 출신 학자)이 이르길: 단복은, 표리(表裏)를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옷을 입음을 비유한 것으로, 국가가 비록 서촉(西蜀)과 연합해 화목하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워, 밖을 믿어 안을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 그가 타인을 방비하며 자신을 위해 대비해, 모름지기 두 마음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니, 옷을 입었을 때, 겉감이 있으면 반드시 안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25] 이미 형남 3군이 넘어간 상황에서 수전에 능한 맹장 감녕과 오나라 군대가 대놓고 도하를 대비하는데, 정직하게 도하 작전을 밀어붙이는 건 자살행위다. 손자병법에서는 도하 상황은 기습이 벌어지기 딱 좋은 상황임을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현대에도 강이나 바다를 건너는 군사작전은 적의 공격에 신경을 잔뜩 기울이게 된다.[26] 정작 여몽이 죽고나서 손오는 이전과 같이 합비를 공략해 서주, 예주를 지속적으로 노렸다.[27]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민간 전승에선 관은병이라고 한다.[28] 이때 손권의 아들중 최연장자인 손등의 나이는 10~11세에 가까웠다.[29] 조조가 위공이 된 213년에 조인의 관직이 효기장군으로 되어 있으니 행(行) 정남장군이 된것은 이 이후일 것이다.[30] 다만 조인은 이미 봄 정월에 후음을 참하고 번성에 돌아와있던걸, 관우가 여름/가을에 북진을 했으므로 후음과 연계되었다기 보단 그런 반란을 기회로 독자적으로 북진했을 가능성이 높다.[31] 두습 문서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32] 다른 한편으로는 한중에 집중된 조조의 압력을 풀어 내기 위해 유비가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33] 또 7군지원 보낼 때 본래는 조식이 지휘관이 될뻔했던걸 보면 우금이 이끌던 군세라기보다는 새로 편성해서 지휘권을 내준 것으로 보인다.[34] 자치통감과 온회전에서는 이 당시 219년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였다고 한다.[35] 물론 이 홍수 이용은 양번 함락까지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고 칠군이 3만이나 살아나 항복하는 사태는 관우도 상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복하겠다는데 익사하게 놔둬도 안 되고 항복 받아주면 보급이 문제고, 칠군이 날라가버리면 원군은 또 올 테고 말이다.[36] 관우가 처음 공격을 시작했을때 '羽率衆攻曹仁於樊'라고 했는데 이는 자치통감의 기록이다, 관우전 본전에서도 '羽率衆攻曹仁於樊'이라고 동일하게 적고 있다.[37] 조인은 방덕에게 장수와 군사를 이끌고 번성 북쪽 10리에 주둔하게 했다.[38] 자세한 지도1, 자세한 지도2, 더 자세한 지도1,더 자세한 지도2[39] 양양 남쪽에 보면 현산이라고 고지대가 있는데 관우는 미리 이곳을 선점하고 군사들을 뺐을 가능성이 있다. 아예 처음부터 양양-번성의 고지감제가 가능한 현산에 진을 쳤을 가능성도 있다. 즉, 지형문제라기 보단 우금군은 대부분 전력을 일단 보존했다는 점에서 그냥 '관우보다 준비와 대응이 부족했다'로 끝날 문제다.[40] 물에 빠져 죽거나 관우의 공격에 죽은 위군은 제외한 수치다. 원래 7군의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자치통감을 번역한 권중달 교수는 중국의 고대병제를 적용해 10만 1500명 정도의 대병으로 추측했으나 이는 좀 높게 잡은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편 화양국지에 따르면 7군의 규모가 3만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거의 전군이 사로잡힌것이 된다. 한편 중국어 위키백과 번성지전(樊城之戰) 문서에선 1군의 규모를 12,500명으로 보는데 이는 조조가 직접 펴낸 손자병법의 주석 손자략해(孫子略解) 4권에서 조조 스스로 말하길 《사마법(司馬法)》에 이르길 12,500명을 군이라 할 수 있다(曹操曰:《司馬法》曰:「萬二千五百人為軍。」)이라고 적었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면 7군은 8만 7천 500명이다. 즉 아주 보수적으로 봐도 7군은 3만명이고 많이 보면 10만이 넘는 대군이다.[41] 당시 관우의 지원요청 시점은 한창 관우가 승승장구 하던 시기였으니 천도 운운하던 조위 입장에서 양번 수복이 일차적인 목표였을 것이고, 조위가 뜬금없이 상용 점령이라던지 하는 부가적인 요소에 힘을 양분할 만한 합리적인 연유가 없었을 것이다. 사서상으로 어느 정도 드러나는 상용군의 병력을 생각하면 절대 무시못하는 숫자고 조기에 지원을 갔다면 형주공방전 판도를 바꿀수 있을 정도다.[42] 조인전 기록의 경우 성안에 수천명으로 수비했다고 나오는데, 방덕이 얼마만큼의 병력을 들고 갔는지 확언할 수 없는 부분이다. 까놓고 방덕에겐 수만명의 병력을 들고 가게하고 조인이 본진 수천을 들고 수비할 수도 있는것이고. 확실한 것은 자치통감에 따르면 방덕이 하루종일 싸우다가 그가 이끄는 관리와 무사들 역시 항복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방덕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조인이 상당한 병력을 지니게 했다고 보인다. 애시당초 조인이 방덕을 의심했다면 선봉으로 삼아 성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았을 터이다.[43] 연의에선 주창에게 자맥질 싸움 끝에 사로잡힌다.[44] 218년 1월 경기, 위황의 난에서 관우가 강성해 이들이 관우와 손을 잡으려 한 것처럼 허도의 반조조 세력과 관우가 연대할 수 있다는 점이 조조가 관우를 위협으로 본 한 요인이 되었을것이다.[45] 게다가 조비의 남정 당시 오나라의 수군은 관우의 수군에 못지 않게 많았다.[46] 조인이 강릉의 관우를 토벌하기 위해선 수군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걸 위나라 수뇌부도 알았을 것이다. 후일 정남장군(征南將軍), 가절도독형예제군사(假節都督荊豫諸軍事)로 부임한 왕창이 승리와 수비를 위해서 주둔하던 완에서 신야로 관서로 옮기고 배가 선지(宣池)에 있어 급한 일이 있어도 달려가기에 충분하지 못하니 형주와 예주에서 수군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했듯이 말이다. 오나라와의 마찰이 없었을 당시에 부임한 왕창이 북형주에 수비를 위해 달려가기 위해 쓰이는 배가 있다고 증언한 것도 그렇거니와 왕기 역시 수군이 있다는 증언을 하며 육군과 나란히 농사를 지어 군대의 자제와 식량 조달을 해야한다고 했다.조인이 번성에 있을 당시엔 관우를 토벌하기 위한 공격을 위해서든 수비를 위해서든 위나라 소속 북형주에 수군이 왕창 때보다도 더욱 더 필요했을 텐데 이 당시 위나라 수군 관련 기록이 없는건 미스터리다.[47] 이 특성은 남송대에도 여전해 양양은 남송의 대 몽골 방어선 최중요 전략거점이었다. 쿠빌라이 칸의 몽골군은 양양을 함락시키기 위해 10만이 넘는 병사와 수백척의 전선을 동원해 방대한 포위망을 구축했으나 양양성 안에 비축된 물자는 넉넉했고 수비군의 사기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쿠빌라이 칸은 번성을 함락시키고 나서야 양양성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공성전을 시작한 지 무려 6년이나 지나서 말이다.[48] 만총전에서 만총의 언급에 따르면 관우가 파견한 별장(別將)이 이미 겹현 아래에 있어, 허도로부터 이남의 백성이 어수선했다는 것이라고 한다. 관우의 장수와 군사들이 허도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던것, 이 말인 즉슨 완성과 그 일대 고을들이 관우가 예주로 진출하던 말건 방관할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번성 이북은 관우의 무리에게 무주공산이나 다를게 없었다는 말이다. 원소에에게 의탁하고 있을때 허도 주변에서 엄청난 호응을 이끌어냈던 주군 유비 이래로 조조의 근거지 예주와 황제가 있는 허도 근처에서 깽판(?) 친 인물은 관우밖에 없다.[49] 육혼현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손랑이 관우에게 귀속되어 관우의 관인을 받았으며 관우는 그에게 병사들까지 주어 위와 대적하게 했다.[50] 참고로 현대에 와서는 번성(샹양 시)에서 허창(쉬창 시)까지는 중간에 (난양 시)를 거쳐서 차타고 3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 그러니까 서울-대구 거리 정도다.[51] 아직 한나라의 명맥은 남아 있었고 여기서 말하는 도읍은 어디까지나 '한나라의 수도 허창'을 뜻한다.[52] 삼보결록주에선 경기, 위황의 난 당시 아예 관우가 강성하여 조조는 업에 가 있고 왕필에게 허도의 사무를 맡겼다는 기록까지 있다.[53] 관우는 배를 타고 공격하였다고 한다.[54] 상용을 점령한지 얼마 안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면 상용 내부를 정리할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유봉이든 맹달이든 둘 중 하나가 지원을 오고 나머지 한명이 내부 단속을 해도 상관이 없다. 애당초 유비가 유봉과 맹달을 동시에 파견한 것, 관우를 지원하지 않아 죽게 한 죄를 물은 건 애당초 여차하면 상용에서 이런 형태로 관우를 지원하라는 전제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 정사상의 유비의 군재와 통찰력을 생각하면 유비는 충분히 상용에서 지원이 가능했다고 봤기에 이런 인선을 한 것이겠고.[55] 다만 맹달의 경우 건안 24년(219년) 11월 방릉태수 등보, 남향태수 곽목을 육손이 공격해 대파했다는 육손전 기록이 있다. 방릉은 임저와 가까운 곳이고 남향군은 관우가 태수를 잡아 복속시킨 지역으로 상용의 동쪽이다. 게다가 방릉은 유봉과 맹달 소유의 상용군 일대이니 상용에서 군사를 내 관우를 구원하려고 했다는 정황증거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맹달이 유비를 저버리고 위나라에 항복하면서 했던 '형주가 패배하여 괴멸되자, 대신은 통제하지 못해 백의 하나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신만이 일을 찾아 스스로 방릉(房陵), 상용(上庸)에 이르러 몸을 구걸해 밖에서 자방(自放)했습니다.'라는 말은 맹달은 유봉과 불화하면서 여의치 않은 상황에도 뒤늦게나마 따로 최대한 여력을 내어 등보와 곽목을 보내 관우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변명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맹달의 잘못은 경감될 여지가 생긴다.[56] 단순히 군 부대를 빼앗은게 아니라 군악대는 당시엔 명령이나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지휘를 위한 군대라 이걸 빼앗는 것은 사실상 유봉이 맹달의 지휘권을 강제로 빼앗는 것으로 볼 수 있다.[57] 계획대로 지원군이 이뤄졌으면 한창 기세가 강한 시점에 원군이 합류해서 결과가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유봉의 원군은 관우군을 구원하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공격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군 개념으로 서황에게 맞설때 관우가 겨우 5천의 군사로 맞섰는데, 그만큼 관우에게는 군사력 보충이 절실한 순간이었다. 오히려 상용에서 지원을 오지 않았기 때문에 관우가 보급문제와 더불어서 속전으로 끝내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보는 게 합당하다. 당시 상용은 후에 맹달이 부곡 4천여 가(家)를 이끌고 이탈했어도 수비할 병력이 있을 정도였다.[58] 당연하지만 번성에 있던 관우가 직접 털었을 가능성은 낮다. 관우 휘하의 부하들이 했던지 후방의 미방이 했던지 였을것인데 최훈의 삼국전투기에서는 당시 보급담당자인 미방이 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약탈의 시점에 이미 오나라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지만 그건 아래에서 얘기하자.[59] 삼국지집해에서는 이 꿈의 의미를 여몽의 이름자 몽(蒙)이 돼지(豕)를 포함하기 때문에, 여몽이 뒤를 습격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60] 결과적으로 흉몽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 꿈의 해석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답이 없으며, 연의가 아닌 정사인 이상, 관우가 죽었다는 결과로 이 꿈이 어떠한 메시지를 담았다고 역추정 하는 것은 신비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61] 10중으로 된 녹각을 모두 부쉈다는 서황전 기록을 보면 관우는 포위망을 뚫으려는 원군을 진영에 설치한 녹각과 연계하여 섬멸시키기 위한 준비를 해놓았음을 알 수 있다. 서황이 자기가 거느린 병사만으로 성급히 돌파를 시도했거나 12영 군세를 지원받은 후라도 진작부터 요청하던 상용의 원군만 제때 와줬다면 병력적 불리함이 없거나 최소화한 상황이었다면 의도대로 됐겠지만 트롤이 문제였다.[62] 서황측이 몇번 화살로 편지를 보내 지원군이 온 사실을 알렸다.[63] 양양과 번성이 천혜의 요새인 이유는 면수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도 있다. 실제로 쿠빌라이의 몽골군이 양양과 번성을 쳤을때 면수를 장악하고 번성이 먼저 함락되자 양양도 뒤이어 항복한 사례가 있다, 관우의 사례와는 좀 다를지 몰라도 면수를 장악하고 양양을 고립시켰다는건 생각보다 크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구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니까.[64] 강이야말로 최적의 방어요소로 방어군에게 엄청난 방어적 이점을 주는데, 관우는 비록 번성에서 서황만총의 협공으로 격퇴되어 물러났으나 이 시점에서 이미 수군을 동원한 면수 완전장악과 양양 완전 포위 함락직전이라는 성과를 달성한 상태였다. 즉 면수를 끼고 관우 본인이 양양에 도착해 완전 포위된 양양을 기어이 함락시키고 추가적인 북진을 시도하지 않더라도 버티기에 돌입할 경우 촉군이 완전히 수군으로 장악한 강을 끼고 결사적으로 버티면 위군은 대체 어떻게 공세를 해야 할 지부터가 난감한 상황이 오고야 만다. 흔히 아무리 밀약을 맺었다 한들 하후돈장료를 회남에서 완전히 뺀게 조조의 노망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관우는 조조로서도 최대한 물량을 모으게 하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인 손권이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야 한다는 도박수를 내걸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손권은 그토록 원한 '''회남의 공백'''이라는 결정적 기회에도 불구하고, 그 도박수에 조조의 의도대로 충실히 따랐다.[65]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결국 손권이 꿈에도 그리던 합비성을 포함하여 수춘을, 선전한다면 서주 일대까지 점령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국력 차이가 크게 줄어든다는 말.[66] 본디 육손이 소속된 육씨 가문의 가문의 가장이었던 육강이 손책에게 죽었으므로 관우는 육손이 손씨가에 별 달리 협력하는 입장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67] 만약 유봉이 원군을 보냈다면 설령 유봉의 원군이 늦었다해도, 관우의 혈로가 형주 남부쪽이 아니라, 상용쪽으로 열렸을수도 있었다. 타이밍이 늦었다고 해도 관우의 번성 포위가 풀리고 면수까지 내주고 양양도 포위를 빼앗겼다면 모르겠는데 면수와 양양지역을 아직 장악하고 있었고 이때 지원군이 상용에서 왔다면 그 틈을 이용해 관우가 상용쪽으로 내빼는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형주자사와 남향군 태수가 지원을 왔다가 관우에게 잡혔다 죽었기 때문에 상용 동쪽은 공백지 상태였고 상용군은 관우의 형주군과는 달리 형주 남군에 처자가 없었기 때문에 관우가 강릉을 빼앗겼다고 군세가 와해 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68] 田福生 著 《關羽傳》 中国文史出版社 2007年出版 ISBN 978-7-5034-2022-1 第十二章 孤立無援,飲恨千古 第三節 兵敗麥城,章鄉之難 之 困守麥城.[69] 이렇게 될 경우 상용에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유봉의 죄가 더해진다. 관우를 단순 돕지 않은것 외에도 그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70] 촉의 장수였던 마충과는 동명이인이다. 관우를 사로잡은 공으로 역사서에 쓰여졌는데 그 이전과 이후의 행적은 보이지 않아 하급 장수로 추측된다.[71] 이런 기록을 보면 나관중 가정본 삼국지연의신삼국을 비롯한 몇몇 매체에서처럼 관우가 저항을 포기하고 신선같이 태연하게 죽었다기 보단 창천항로나 삼국지 13 같은 매체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끝까지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고 주군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군세를 몇기의 기병만으로 돌파하려다가 오군에 둘러싸여 처절하게 난투전으로 끝까지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잡혀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72] 다만 유비는 서쪽 자귀에서 남쪽으로 이동해 의도군 이도로 이동했으므로 당양에 가진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세에 와전된 듯.[73] 사기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는데 정목공과 진목공의 싸움을 적을 때 두 사람 모두 '穆'을 '繆'로 표기했다.사기 원문[74] 桓- 辟土服遠:땅을 넓히고 멀리 있는 자들을 굴복시킴, 克敬動民:능히 공경하여 백성을 움직임, 辟土兼國:땅을 넓히고 나라를 겸병함.[75] 다만 판본에 따라선 장비와는 이미 면식관계인 것으로도 나온다. 장비가 산적들을 혼내던 걸 관우가 끼어들어서 도왔는데 성격이 맞아 친해졌다는 식. 이희재 만화 삼국지에선 '''두 사람이 저잣거리에서 일기토를 벌이던 것을''' 유비가 황급히 끼어들어 화해시킨 것으로 묘사되었다.[76] 다만 역사적으로 중국 삼국시대에는 월도라는 무기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는 것은 연의의 창작이다. 참고로 실제 월도는 당나라 때 등장한 무기이다.[77] 판본에 따라 다른데 원소라고도 한다.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총대장 원소가 "안량문추라도 데려왔으면 이러지도 않았다!"라며 신나게 폭언을 일삼자 원술이 형님 덕에 나팔 부는 격으로 언성을 높이는 것으로 나온다.[78] 참고로 판본에 따라서는 관우가 화웅의 목을 베었다고는 언급하지만, 정작 장면 묘사는 막사에서 숨을 죽이고 승전보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경우도 있다. 즉각즉각 무대를 바꿀 수 없었던 경극이나 연극의 흔적으로 짐작된다.[79] 다만 후술하듯 유비의 두 부인을 위해 잠시 조조군에 의탁할 때 조조가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것저것 선묾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10명의 미녀를 보내자 싫지는 않은 듯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으나 술이 깬 뒤엔 두 부인의 시중을 들게 했다고 한다.[80] 황제가 전용으로 사용하는 금제 궁과 화살이 있는데, 헌제가 몇 번 쏴도 맞지 않자 조조에게 넘겨주니 조조는 단번에 사냥감을 맞췄다. 대신들은 금제 화살만 보고 헌제가 맞췄다고 생각해 환호한 건데, 조조가 금제 궁과 화살을 들고 얼른 헌제 앞에 나서서 인기를 싹쓸이한 것.[81] 주로 조조군의 공격에 의해 유비군이 박살날 때.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역시 장판파 전투 당시 미부인아두를 구하기 위해 자결한 일을 들었을 때이다.[82] 도원결의를 저버리는 것이 첫째, 유비가 자기의 가솔들을 부탁했는데 이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 둘째, 유용한 능력을 버리게 되는 것이 셋째라고 했다.[83] 첫째는 한나라에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둘째는 유비의 두 부인을 잘 보호하여 범하지 않게 함으로서 두 사람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것, 셋째는 유비의 거처가 알려지면 지체없이 자신과 유비의 식솔들을 풀어줄 것이었다.[84] 관우가 장료를 역으로 회유하진 않았지만, 장료는 조조에게 보고하러 돌아가던 중에 '관우는 친구와 같지만 승상(조조)은 어버이와 같다'며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85] 이 수염 주머니 설정은 연의가 진행될수록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지만 딱 한 번 부각되는 적이 있는데, 이후 미 부인을 데리고 조조군을 떠나다 배원소 일당을 만나자 누구냐는 물음에 묵묵히 주머니를 풀고 수염을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86] 대장기 옆에서 쉬고 있다가 관우가 나타나자 맞서 싸우려고 했는데, 관우가 더 빨리 다가와서 반응하기도 전에 베어버렸다.[87] 대담하게도 '관우만 수염이 길고 얼굴이 붉은 장수란 법은 없다. 세상은 넓으니 그와 비슷한 장수를 찾아내 소문을 퍼트렸을지도 모른다'라고 주장했는데, 연의를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작중에서 수염이 길고 얼굴이 붉은 장수는 관우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폭소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물론 정보의 유통 속도가 느린 시대인데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은 중국이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원소였다는 게 문제. 연의에서는 관도대전 중에는 물론 그 앞뒤에도 조조와 원소 간의 '결단력의 차이'를 두고두고 비교하며 깐다.[88] 여기가 고향인 사람이 대표적으로 반준이 있다.[89] 후는 등급에 따라 현후, 향후, 정후가 있었는데 정후가 그 중에서 최하 등급이다. 참고로 나중에 원소가 죽은 후 형제싸움으로 자멸해가던 원담이 여광&여상 형제의 간언을 듣고 잠시 조조에게 의탁했다가, 조조의 애매한 태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테니 내응해 달라며 여광&여상 형제에게 수정후 직인을 보낸다. 하지만 여광&여상은 이미 조조를 진심으로 섬기고 있었기에 오히려 그 직인을 조조에게 바치고 그 사실을 불어버린다.[90] 피객패(避客牌)는 한자 그대로 '손님의 문 두드림을 거절한다'는 뜻으로, 의미나 용도가 오늘날 문 앞에 내거는 '방문사절'이나 'Do not disturb(방해하지 마시오)'와 정확히 일치한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손님은 조용히 돌아가는 것이 예의다.[91] 특히 채양이 가장 심했는데, 판본에 따라서는 장료서황 등 학식과 덕망이 풍부한 장수들이 관우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고깝게 여겼다고 나온다. 그 때문에 관우가 후술하듯 여섯 장수를 베고 하북 인근에 다다르자 이를 빌미삼아 관우를 추격한다. 그 최후야 당연히...[92] 재미있게도 시간상 한참 뒤인 장판파 전투에서도 의제인 장비가 똑같이 혼자 장판교 위에 서서 쫓아오는 조조군을 맞이한다. 나관중이 이걸 노리고 의도적으로 같은 장면을 연출했는지는 불명이지만.[93] 이희재 만화 삼국지에서는 장비가 이 말을 하면서 양 손에 북채를 들고 이미 몇 번을 치고 있는 걸로 나오는 페이크(?)가 있다. 관우의 움직임을 고려하더라도 이 북은 양손으로 북채를 힘껏 휘둘러 칠 만큼 거대할 것이다.[94] 일단 유비는 간옹의 계책대로 '유표에게 원소와의 동맹을 권하러 간다'면서 몸을 빼냈고, 원소가 그새 마음이 변해 관우를 죽이려 하자 이제 와서 말을 바꾸냐며 일축하고는 손건은 '관우를 데리러 간다'며 보냈다. 간옹 본인은 야심을 품은 유표가 도리어 유비를 설득하려 들테니 '유비를 감시하겠다'며 따라간다. 곽도가 뒤늦게 이를 알고 막으러 가지만, 원소는 간옹을 감시역으로 붙인 것에 안심했는지 단번에 무시한다. 물론 유표는 야심 따위 없었고 오히려 유비는 유표 휘하에서 서서히 힘을 쌓아나간다.[95] 정사, 즉 실제로는 관우의 친아들이었다.[96] 매체에 따라서는 병사들은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병사들이 살려달라고 빌자 결국 그들도 보내준다는 묘사가 나온다. 이 경우에는 훗날 관우가 우금과 수만 명의 포로를 붙잡고도 음식까지 배급해주며 살려준 것에 대한 복선이라고 할 수도 있다.[97] 몇 몇 학자들은 아예 오나라가 형주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형주를 대여했다고 조작했다는 의견도 존재하는 등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유비가 일방적으로 형주를 먹튀한 건 아니다.[98] 일단 후술하듯이 관우는 이후 형주를 맡아서 한중 공방전에는 가지도 못한지라, 제갈량은 '관우라도 불러야지 안 되겠다'는 식으로 일부러 엄살을 떨어 황충의 의기를 돋운다. 마찬가지로 마초 역시 투항하기 전에도 후에도 북방에만 있다보니 관우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마초를 깐다고 각색을 하더라도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99] 여담으로 현대 중국어에서는 '손권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權子와 '개의 아들'이라는 의미인 犬子의 발음이 같다. 두 한자는 단독으로 읽으면 성조가 다르지만 해당 단어에서는 성조의 변화 법칙 때문에 똑같게 발음된다. 하여 일부에서는 반쯤 농담으로 해당 사건이 발음과 억양 차이로 인한 오해였다고 주장한다. 실제 해당 문구에서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글자 셋만 바꾸면 관우가 오히려 이 혼인을 기뻐했다는 의미로 고칠 수도 있다.[100] 이문열은 평역 삼국지에서 관우가 팔에 부상을 입자 큰 수술을 무사히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고 장담했지만 정사에 버젓이 나와있어서 걸핏하면 정사 타령하던 이문열을 데꿀멍하게 만들기 좋은 부분이다.[101] 하비성에서 투항한 이래 화용도에서 인연을 정리하기까지 이런저런 관계가 깊었음에도 관우가 죽었다며 기뻐하는 묘사를 보고, '역시 조조가 노망이 나긴 났나 보다'(…)라고 해석하는 독자도 있다. 하기야 이전에 순욱, 순유, 최염이 죽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만.[102] 고대 중국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것을 전시(全尸)라고 한다. 조조가 관우의 수급을 받은 뒤 나무 몸을 조각해 붙인 것도, 완전한 상태의 시신을 찾지 못하더라도 의관묘는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당대의 관념에서 행해진 것이다.[103] 보통 추존은 군주가 자신의 직계 조상에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문이 왕성이 아님에도 이렇게 후대에 격상된 경우는 굉장히 예외적인데, 비슷한 케이스로 문성제로 추존된 공자나, 한국사에서는 후대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김유신이 있다.[104] 관우의 주군인 유비도 수습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이 있는 걸 보아 유비의 수습력에는 관우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추측이 가능하다.[105] 다만 이 발언 자체는 관우를 고평가함과 동시에 촉나라 전체를 저평가하는 발언임은 감안해야 한다. 아래에도 나오듯 오히려 위나라 책사들은 관우와 촉을 둘 다 고평가하는데 유독 유엽만 저평가다. 게다가 그런 작은 나라에게 조조가 한중에서 어떤 굴욕을 당했는지 생각해보면 이 발언이 합당한지는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다.[106] 요립은 익양대치 당시 장사태수로서 싸우지도 않고 성문을 열고 도망가 장사를 어이없게 잃게 만든 원흉으로 오히려 관우가 그를 책망해야 하는 위치였다. 그러나 요립은 적반하장격으로 상관이던 관우는 물론이고, 자기가 아니꼽게 여긴 사람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서 씹었다. 이를 보다못한 제갈량이 작정하고 요립을 지탄하며 좌천시켰지만, 뉘우치기보다 '나처럼 대단한 사람은 결국 복직시킬거다'라는 근자감을 내세웠다. 하지만 제갈량은 죽을 때까지 그를 복직시키지 않아 요립은 내가 이렇게 쫓겨난 상태로 말년을 보낸다며 한탄했다.[107] 악진은 이미 고인이었고, 장합은 한중 방면에서 혹시 모를 유비의 북진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형주 쪽으로 빼낼수가 없었다.[108] 중국 역사를 보면 군량문제 때문에 항복병들 그냥 생매장하거나 죽이는일이 발생하는데 그래도 관우는 인성은 좋은 사람이어서 우금의 항복병들을 받아줘서 군량 압박을 받았다. 어찌보면 관우가 인정이 많아서 일을 망친거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109] 물론 3만명의 포로를 잡아 그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미방의 경우 전쟁 이전에도 본인이 관리하는 남군성의 군수물자를 태운 화재에 책임이 있었고 손권, 여몽과 내통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관우전에도 남군의 미방과 공안의 사인이 애당초 관우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나온다.[110] 굳이 찾아보면 2년 연속으로 대촉 전선용으로 준비된 정예 기병대가 포함된 정촉호군을 경보병으로 개박살내고 연이어 옹주군의 씨를 말려 죽인자만 수만명이 넘고 옹양주를 함락 직전까지 몰고갔다는 강유나 노성전투에까지 이르기까지 연전연승으로 미친듯이 위군의 대촉 에이스들과 최고 사령관 사마의까지 연이어 격파한 3~4차 북벌의 제갈량 정도밖에 없다.[111] 자치통감에서는 효활(驍猾), 즉 용맹하고 교활하다고 했다.[112] 만약 정말로 그 사실을 이들이 몰랐다면 관우가 조인과 방덕보다 훨씬 군재면에서 우위에 있었다는 결론만 나올뿐이다. 차라리 준비를 해놓고 격파되었다고 한다면 할 말이라도 있지. 자치통감에서 온회의 장맛비로 강물이 불어나는데 아무것도 대비한게 없다고 말하는것 봐선 원래 없었을 가능성도 있어보이긴 한다.(...)[113] 또 무제기에 언급되듯이 조인은 당초 관우를 먼저 토벌하기 위해 번성에 주둔했는데 조인전과 다른 기전을 살피면 조조가 마초를 처음 토벌할때 조인이 소백(蘇伯), 전은(田銀)을 행(行) 효기장군으로서 토벌한 다음에 조인이 행(行) 정남장군으로 임명되어 후음의 반란을 진압하기 전까지 번성에 지속적으로 주둔했고 후음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도 정남장군으로서 번성에 주둔했으므로 조인이 효기장군이었던 213년(조조 위공 즉위)이후 어느시점부터 219년까지 계속 번성에 주둔하면서 관우를 토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인것이다. 후일 조비의 남정때 강릉을 공격하면서 수군을 동원했듯, 조인이 강릉의 관우를 토벌하기 위해선 수군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걸 위나라 수뇌부도 알았을 것이다. 후일 정남장군(征南將軍), 가절도독형예제군사(假節都督荊豫諸軍事)로 부임한 왕창이 승리와 수비를 위해서 주둔하던 완에서 신야로 관서로 옮기고 배가 선지(宣池)에 있어 급한 일이 있어도 달려가기에 충분하지 못하니 형주와 예주에서 수군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했듯이 말이다. 후일의 일이지만 오나라와의 마찰이 없었을 당시에 부임한 왕창이 북형주에 수비를 위해 달려가기 위해 쓰이는 배가 있다고 증언한 것도 그렇거니와 조인이 번성에 있을 당시엔 관우를 토벌하기 위한 공격을 위해서든 수비를 위해서든 위나라 소속 북형주에 수군이 왕창 때보다도 더욱 더 필요했을 텐데 이 당시 위나라 수군 관련 기록이 없는건 미스터리다.[114] 이후 조익은 남북조 시대의 용맹한 장수들이 관장지용이라고 불렸던 사례를 든다.[115] 이 일화를 적극적으로 묘사한 것은 최훈의 삼국전투기창천항로가 있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방덕이 이마를 향해 날린 화살을 반사적으로 쳐내, 이마가 찢어지는 수준으로 끝났지만, 창천항로에서는 정말 화살이 이마에 맞았는데 그 상태에서 방덕을 베었다. 다행히 깊숙히 박히지는 않아 화살을 뽑고 술로 이마를 씻어내며 요화에게 상처를 꿰매라고 명한다.[116] 그리고 이릉대전 이전 육손은 어느 정도 이름이 덜 알려졌므로 관우로서는 대촉 강경파인 여몽이 물러나고 육손이 나서서 공손한 태도로 편지를 썼다는 것은 오가 형주를 호시탐탐 노리는 것을 어느 정도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최소한 자기가 형주에 있고 조조에게 어느정도 타격을 줄 때까지는)포기했다고 생각할 만하다.[117] 관우가 오군의 지원을 요청했다면 형주에 들여보낸다는데 그냥 원조군 입장에서 형주에 들어가면 되는데 굳이 몰래 숨어서 은밀히 들어와 기습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냐는 뜻.[118] 비유하자면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성격인데, 이런 성격이 융통성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지만 관우는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세서 자신이 싫어하는 인물들에게 어그로를 끄는 일이 잦았다. 그런데 본인 성격상 어그로를 끄는 이들이 하필 지배계급이 많으니 힘들어질수밖에...다만 이런 성격 때문에 민중들 사이에서 더욱 인기를 끄는 면도 있었을것이다.[119] 정황 상 못 데려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신의 의형제들의 생사도 모르는 상황에서 형수들을 데려갈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120] 당시 제갈량은 한중을 지원하기 위해서 성도에서 계속 지원을 보내고 있었고 유비와 관우 생전에는 이 둘의 위치를 넘볼수 없었다. 관우의 생전에 관우는 제갈량조차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명백한 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121] 이릉대전이 복수의 성격이 강했다는 걸 생각하면, 평생 전쟁을 치르며 싸워온 호걸인 유비가 의형제에게 작위를 내리는 것보다도 그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안긴 적들을 섬멸하는 걸 우선시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이릉대전 당시 유비는 친정을 할 정도로 고령에도 별다른 건강상 이상은 없었으니,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122] 始有大功, 나무위키의 '시작하자마자' 해석에 대해선 다음글들 참고. 삼국지 도원결의(로그인 필요), 파성넷 해석[123] 관우가 처음부터 기득권층을 싫어했는지 불분명하나 유비가 평원령일 때 기득권층 중에 유비를 달갑지 않게 여겨 암살을 시도한 적이 있고, 서주 시절에는 여포와 내통해 유비의 뒤통수를 친 조표를 비롯한 호족들 때문에 고생했던 일들이 있으니 관우에게 있어 높으신 분들은 직속 상관 유비를 제외하면 못 믿을 놈들이라고 선을 그었을 가능성이 높다.[124] 물론 당시 상황에서는 거절하는게 정답에 가깝긴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방법이라는게 있는 법이다. 그냥 주군인 유비한테 허락받지 않는 결혼은 곤란하다며 유비에게 결정을 미루거나 하는 등의 유연성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길 수 밖에 없는 대응이다.[125] 대표적으로 관우를 어떻게든 포섭하려던 조조 역시 점점 오만해졌으며, 관우 토벌에 종군했던 반장도 능력은 있지만 인성이 더러워서 손권은 그를 중용하면서도 일정 이상의 관직은 주지 않았다.[126] 함께 사방장군에 임명된 마초도 패륜 논란으로 집중 포화를 받지만 마초의 원수인 조조와 마초의 가족을 속이고 죽여버린 조앙과 왕이 부부 역시 패륜을 저질렀음에도(마초가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면 조조는 아들과 조카, 조앙과 왕이 부부는 자식을 죽게 내버렸다.) 지적받는 일이 별로 없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127] 관우의 성격은 위연의 상위호환에 속한다. 위연은 유비 시절 기대주 위치에 올랐고, 제갈량의 북벌 시절 촉군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핵심 인재였다. 그리고 관우와 마찬가지로 성품이 오만하다는 비판을 들었는데, 차이라면 관우는 유비와 장비는 물론 수십년 후 들어온 20년 이상의 나이차를 가진 제갈량과 시간이 지나자 친하게 지냈고, 비시가 자기의 태도에 대해 지적하자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는 등 말귀를 알아먹는 사람이었지만 위연은 말귀를 알아먹으려고 하지 않는 건 기본에 나 혼자 잘났다면서 진상을 부리다보니 왕따인지라 제갈량은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감싸주느라 고생했다.[128] 조운은 손부인이 손권의 권세를 믿고 행패를 부리는 것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129] 주유 사후 대도독이자 비둘기파인 노숙이 양측의 동맹의 중요성을 알고 행동했지만 익양 대치 때 유비쪽을 깔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강경파들은 어떨지 뻔한 거 아닌가.[130] 물론 그렇다고 죽인다, 극형에 처하겠다는 식으로 말한바는 없다,[131] 조조가 유비의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유비의 신하들에게 벼슬을 주며 중앙에 미축 형제를 천거했을때도 형 미축의 능력과 덕행만을 내세우지 미방 개인은 언급하지 않았다. 또 형 미축은 유비에게 여러가지로 물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유비가 여남에 있을때 손건과 함께 외교를 담당했으며 좌장군 종사중랑으로 두고 계속 그 능력을 중히 썼으나 이 사이 유비가 미방에게 맡긴 직책은 없다. 유비가 익주로 떠난 이후에도 관우가 청니, 익양에서 위군, 오군과 대치했을때도 형주의 일은 거의 관우가 혼자 처리하는 모습이 보인다.[132] 굳이 따지면 관우의 실수는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런 정치적인 세심함의 문제지 책임을 묻는거 자체는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제갈량 역시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는 공신이자 같은 탁고대신인 이엄을 참고 용인해주면서 대우해줬지만 4차 북벌 당시 보급의 군령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문제를 일으켜놓고 사실왜곡까지 하는걸 보고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돌아오자마자 온갖 증거와 대신들의 지지를 받아서 사정없이 책임을 묻고 아주 그동안 참았던것 까지 합쳐서 (제갈량이 더 정치적으로 세련되게 처리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개박살낸 적이 있다.[133] 심지어 사인은 유주 출신으로 서주 출신인 미방보다 더 오래 유비를 섬겼을 가능성이 있다.[134] 결국 미방은 오군에 항복하고 나서도 떳떳한 항복이 아니라는 식으로 계속 조롱을 당하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피해 다녀야 했다. 그것도 여몽 옆에서 종군하면서 그 사정을 훤히 알고 있던 우번에게 말이다.[135] 반준의 경우 관우랑 화목하지 못했단걸로 업무태만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나마 미방은 남군태수였으니 실질적으로 실무엔 이 사람이 더 가까웠을텐데 보급은 어디갔는지 모를정도고 형주 함락되자 손권이랑 말 한마디하고 바로 태세전환한 사람이다.[136] 다만 갑자기 생긴 포로 수만명에 대해선 이들도 할 말이 있다. 지금처럼 먹고 살 식량이 풍족한 시대도 아닌데,갑자기 밥먹일 사람이 두배로 뻥튀겨졌다, 거기다 얘들은 딱히 밥준다고 우리편 될 애들도 아니다. 느닷없이 포로 3만명을 감시할 인원도 짜내야 하고 위랑 싸우기 전에 오나라에 3군을 준만큼 주변에 공출할 상황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137] 근본적으로 미방의 경우엔 단순 보급차질을 떠내서 남군성 군수물자를 홀라당 태워서 전쟁에 지장 생기게 만들고 그걸 질책하니 개인적 감정으로 보급에 소홀했는데 관우가 참다 못해서 돌아가면 처벌하겠다라고 하는게 한도인 수준이었다. 한국에 정사가 처음 국역되어 퍼졌던 2000년대 당시 일부에선 관우가 미방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핍박했다는 소리까지 왜곡되어 퍼지기도 했다.[138] 2016년에 완성했으며 이곳에선 중국 최대의 관우상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이 동상의 디자인을 맡은 사람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마스코트 디자인을 맡은 한메이린(韓美林)이다.[139] 일부러 공식석상에서만 그렇게 부르는게 아니라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부른 것이다. 명대에 쓰여진 수호전에서 노지심이 100근짜리 수마선장을 주문할때 대장장이가 이를 만류하며 "관왕도 82근짜리를 썼지요"라며 극구반대해 결국 62근짜리로 맞춘다.[140] 송진종의 연호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년[141] 이후 이들은 각각 왕으로 추봉된다.[142]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배규범, 민관동, 2016년[원문] 蜀前將軍關羽守荊州,夢豬齧足,自知不祥,語其子曰:“吾衰暮矣!是若征吳,必不還爾。” 果為吳將呂蒙麾下所殛,蜀遂亡荊州。玉泉祠,天下謂四絕之境。或言此祠鬼興土木之功而樹,祠曰“三郎神”。三郎,即關三郎也。[143] 당나라 시대 설화를 보면 관우가 불교에 귀의해 보살이 되었다는 기록외에도 관우가 나무를 얻지 못하자 대홍수를 불렀다던가, 관우의 귀병이 거리를 지나가니 병을 앓던 사람들이 오한에 시달렸다던가 하는 원한신, 역신의 이미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44] 연의의 관우 훈령이 옥천사에 나타났다는 얘기도 여기서 기인 한 것으로 보인다.[145] 중국 현지의 관우상을 보면 오른손에는 청룡언월도, 왼손에는 을 흔히 들고 있다.[146] 천사도의 조사 장릉의 계승자들을 이르는 말이다.[147] '치우,오래된 역사병'(김인희)[148]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이라고 되어 있으니 북송 무렵 그림이다.[149] 역대신선통감에는 제갈량의 스승이라는 풍구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때 제갈량에게 관우를 해량노룡이라고 언급한다.[150] 원문: 徐道在《歷代神仙通鑑》中說,關公的前生本是「解梁老龍」,漢桓帝時,河東連年大旱,老龍憫民心切,是夜汲黃河水興雲施雨。玉帝見老龍公然違反天命,擅取封水,令天曹以法劍斬之,擲頭於地。解縣僧普靜,在溪邊發現龍首,即提到廬中置合缸內,為誦經咒九日,聞缸中有聲,啟視空無一物,而溪東解梁平村寶池裡關毅家已有嬰兒落地,乳名壽,幼從師學,取名長生,後自名羽,字雲長。[151] 그나마도 이건 순수 연의 창작 발언이다.[152] 애당초 2010년판 삼국은 조조, 유비, 제갈량, 사마의 이 네 사람이 주인공인 삼국지 드라마라 이들에게 중요하게 포커스가 가는 바람에 대부분의 주변 인물들이 너프된 감이 없잖아 있는 드라마이다. 저들에게 중요 포커스가 가다보니 오나라는 손견, 손책 비중 다 죽었고 그나마 노숙을 정사에 가깝게 재해석했지만 그게 끝일 정도로 비중을 안줬다.[153] 술을 세 잔 따르는 의례.[154] 오른편에 보이는 건물(?)은 다른 묘에서 가져온 관우상이다. 사실 관우상 앞의 관평, 조루, 주창, 왕보의 상도 다른 묘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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