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림당

 

東林黨
1. 소개
2. 역사


1. 소개


명나라 후반 17세기의 당파. 궁중에서 환관의 힘이 강해져서 관료들 가운데 나타난 반 환관 세력이다. 동림서원(東林書院)을 거점으로 삼아 동림당 혹은 동림파라고 불렸다. 이에 반하여 위충현과 친환관 세력은 동림당 측에서 비하하는 '엄당'이라고 불렸다.
동림서원은 본래 송나라 때, 양시(揚時)가 개창한 서원인데, 명나라 때는 고헌성(顧憲成)이 귀향한 뒤 고향 마을의 유지들의 지원을 받아 재건하였다. 고헌성은 명나라 후기에 인기를 끌었던 왕양명양명학을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양명학에서는 인간의 양심인 '양지'를 강조하였으나 명나라 후기로 접어들면서 실천적이고 수양적인 부분은 사라진 채 인간의 욕망이나 본능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면서 사회 기강이 흐트러지는 풍조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헌성은 주자학을 새롭게 연구하게 되었다.

2. 역사


고헌성이 정부 쇄신을 강조하며 수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당시 명나라의 황제는 정무 거부로 유명한 만력제였다. 결국 누차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헌성은 귀향을 선택하고 송 대에 매우 유명했던 동림서원을 복구하고 유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이렇게 되자 많은 유학자들이 동림서원을 찾아와 학문을 공부를 하면서 말기 증상을 보이던 명의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림서원이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게 되어 당대에 이들을 '동림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무려 30여 년간 정무를 거부하며 국가를 쇠약하게 만든 만력제가 1620년 붕어하고 천계제가 즉위하자[1] 동림당이 정치 일선에 잠시 복귀했으나[2], 천계제 역시 정무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권력을 환관 위충현에게 몰아줬다. 위충현은 주자학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동림당을 눈에 가시로 여기고 반 동림당 세력을 결집해 동림당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고 아예 1625년에는 학문적 근거지였던 동림서원도 파괴해 권력 일선에서 다시 몰아냈다. 숭정제가 즉위하여 위충헌이 몰락하자 동림당은 다시 재건되었다.

[1] 중간 태창제가 즉위했으나 한달만에 사망했다.[2] 장거정의 복권이 이 시기 동림당 손에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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