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제

 


'''
毅宗
의종 숭정제
'''
[image]
'''묘호'''
남명
사종(思宗) → 의종#s-2(毅宗) → '''위종(威宗)'''[1]

'''회종(懷宗)'''[2]
'''시호'''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
(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
'''연호'''
숭정(崇禎)
'''성'''
주(朱)
'''휘'''
유검(由檢)
'''황후'''
장렬민황후(莊烈愍皇后)[3]
'''생몰 기간'''
1611년 2월 6일 ~ 1644년 4월 25일
(33세, 총 12133일)
'''재위 기간'''
1627년 10월 2일 ~ 1644년 4월 25일
(16년 206일)
1. 개요
2. 생애
2.1. 인간상
2.2. 최후
3. 평가
3.1. 종합
3.2. 원숭환의 처형 논란
3.2.1. 옹호
3.2.2. 비판
3.3. 숭정제의 자린고비 논란
3.3.1. 비판
3.3.2. 반론
4. 미디어에서
5.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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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16대 황제이자 사실상 '''명의 마지막 황제.'''[4] 망국의 군주임에도 비교적 평이 좋은 특이한 사례이다. 휘는 유검(由檢). 태창제의 5남으로 천계제의 이복동생이다.
할아버지의 막장행각으로 말 그대로 막장이 된 명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애썼다. 부패한 환관들과 관료들을 대거 숙청하고 여진족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명나라는 북방민족의 침략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고 숭정제는 자금성에서 자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를 살리기 위한 고군분투만큼은 후대에 널리 인정받아서 망국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호평받곤 한다.
명 멸망 이후 청나라는 '''회종'''이라는 묘호를, 남명 정권은 '''사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가 이후 '''의종#s-2''', '''위종'''이라는 묘호를 올려 묘호 총 4개를 받았다. 이중 남명 정권에서는 의종이라는 묘호를 최종적으로 승인했고, 현재에도 청나라에서 추숭한 회종보다도 의종이라는 묘호가 널리 쓰인다.
다만 중국 대륙에서는 명사종이라고 부르고, 베트남에서도 그렇게 부른다. 의종이라는 표기는 주로 일본에서 쓰였으며 한국에서도 따라 했다. 그래서 역사학계에서는 혼돈을 피하기 위해 숭정제라고 통일해 부르는 경향이 있다.

2. 생애


명나라 최후의 황제 주유검은 만력 38년(1610)[5]에 신종의 장남 주상락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모는 숙녀 유씨이다. 숙녀란 태자의 소실들 가운데 품계가 가장 낮은 호칭이다. 부친이 모친을 총애하지 않았고 주유검 역시 소실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사랑하지 않았다. 게다가 만력 42년(1614) 주유검이 5세 때 생모 유씨가 갑자기 사망했다. 명사에서는 유씨가 광종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쫒겨나 죽었다고 기록했다.
당시 정귀비의 끊임없는 살해위협에 시달린 주상락은 일종의 정신질환을 앓았다. 가끔 빌작 증세가 나타나면 평소에 미워하는 유씨에게 미치광이처럼 달려들어 횡포를 부렸다. 유씨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곧 주상락의 발작증세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신종과 정귀비가 유씨의 사망원인을 알았다면 태자 주상락은 당장 폐위를 당하고 쫒겨났을 것이다. 신종과 정귀비가 틈만 나면 신종의 셋째 아들이자 정귀비의 소생인 주상순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기 때문이다. 주상락은 신변의 내시와 궁녀들을 뇌물로 매수하여 유씨가 병사했다고 꾸미고 입단속을 철저하게 시켰다.
유씨의 시신은 궁녀의 신분으로 서산에 매장되었다. 서산은 환관이나 궁녀가 죽으면 매장하는 곳이었다. 생모를 잃은 주유검은 서리와 동리의 손에 맡겨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유검은 이복형 주유교가 황제로 등극하고 천계 2년(1622), 13세 나이로 신왕에 책봉되었다. 주유검은 제대로 만나본 적 없는 생모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생모의 죽음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주유검이 욱근궁에 거주할 때 시종과 나눈 이야기는 이랬다.
"서산에 신의왕의 무덤이 있는가?"
"있사옵니다."
"그 옆에 유귀비의 무덤도 있는가?"
"있사옵니다."
신의왕은 명나라 8대 황제 헌종의 14번째 아들 주우해를 말한다. 누구도 감히 공개적으로 주유검에게 생모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자나 깨나 생모를 그리워하는 그를 가엽게 생각한 어떤 이가 신의왕 무덤 옆에 생모의 무덤이 있다고 몰래 알려주었을 것이다. 주유검은 시종에게 은자를 내어주면서 무덤을 새롭게 단장하고 제사를 지내달라고 부탁했다. 직접 달려가 제사를 성대히 지내고 어머니의 원한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무슨 오해를 살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였기 때문에 나설 수 없었다.
천계 7년(1627) 8월 희종이 붕어한 직후에 황위를 계승한 숭정제 주유검은 생모 유씨를 효순황태후로 추증하고 시신을 광종의 경릉에 합장했다. 원한을 품고 죽은 유씨가 아들이 황제가 된 덕분에 사후에라도 태후 자리에 오른 것이다. 숭정제는 외조모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모시고 와서 영국태부인의 작위를 하사했다. 그 동안 핍박을 당한 외척들을 우대하여 생모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숭정제는 생모가 너무 그리웠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이별한 까닭에 생모의 얼굴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모와 함께 지낸 사람들의 기억을 더듬어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6] 초상화가 장엄한 의식 속에서 정양문을 통해 황궁으로 들어올 때 숭정제는 오문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채로 초상화를 맞이했다.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신하들도 따라서 울었다.
숭정제는 이복형 희종과는 많이 달랐다. 강학에 열중하고 경전을 즐겨 읽었으며 역대 성군과 현신들의 어진 정치와 가르침을 진정으로 배우고자 했다. 문화전, 무영전 등 궁궐 곳곳에 그들의 초상화와 잠언을 걸어놓고 귀감으로 삼았다. 또 치국의 도를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는 '''의심이 많고 독단적이라는 결점이 있었다.'''

2.1. 인간상


통찰력이 있고, 신중하며, 주도면밀해서 부지런했다는 장점을 가져 만약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명군으로 칭송받는 군주가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성질이 급하고 의심이 많으며 독단적이었다는 단점으로 인해 결국에는 여러 큰 실책들을 범해 명나라의 멸망에 그가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가장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가 있으면 바로 목을 베는 등 신하들에게 결코 기회를 주지 않아 숭정제 시절의 신하들은 실패하면 바로 모가지가 날아가는게 다반사였다. 사실 명나라 자체가 이미 막장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고, 그렇게 해야 관리의 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이 세상 어느 나라든 만력제나 천계제 같은 무능한 황제들이 연속으로 지나간 이 시대와 비슷한 상황을 거쳤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7][8] 숭정제 자신의 업무 능력과 근면함은 명 역사상 비슷한 황제를 찾아보기가 힘들었을 정도이고, 그만큼 부지런한 황제는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도 별로 많지 않다. 오죽했으면 황제의 소매가 다 닳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이 정도로 개판이면 이미 수습은 포기하고 현실부정과 폭력으로 연명하려 할 법도 한데 나름 현실 감각있게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숭정 10년(1637)에 발표한 <죄기조>에서 그는 자신이 다스린 나라의 부패한 현실을 남김없이 솔직하게 지적했다.

지금 벼슬하는 자들은 오로지 제 몸을 가지고 일을 꾀하는데, 관직을 장사처럼 생각하여 한껏 차지하고도 더 욕심을 부린다. 심지어는 파면을 당하고도 명령을 어기고 마구 긁어모으고 기회만 생기면 배를 채운다. 또 공신이나 척족들도 만족을 모르고 수도와 지역 땅을 탐욕스럽게 사 모은다. 지방관들은 지역 방어의 본분을 잊고 마을을 침탈하는데, 무뢰배들을 수족으로 삼고 간악한 자들을 받아들인다. 못난 관리들은 세력가들이 두려워 꼬리를 치며 아부한다. 악이 쌓여 관아를 좀먹으니 빌미만 생기면 낚아챈다. 오호라! 연약한 백성들이 어찌 편히 발을 뻗고 쉬겠는가!

숭정제는 불쌍하고도 암울한 말제였을 뿐이었지 능력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이복형 천계제가 동생 교육에 꽤 신경을 썼는데, 이제 막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11세에 형 천계제가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위 초에는 위충현 일파를 제거하기도 했고, 황제 자신이 상업적 수완을 발휘해 수만냥을 국고에 보태기도 했으며, '죄기조'에 따르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내 백성들에게 잠시 1년만 폐를 끼치겠다.'며 세금을 올리겠다고 호소하면 모두들 허리띠를 졸라매고 불평 불만없이 묵묵히 받아들였을 정도로 백성들이 숭정제를 믿고 따랐다고 한다. 또, 후금의 침략에 맞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데 힘을 쏟았다.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양식 화기 공장을 설치하기도 했으며, 황제 자신이 직접 아담 샬과 함께 명의 과학 기술을 이끌던 서광계에게 서양학 수업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간 명이 사용해온 역법이 오래 되어 실제 천문과 맞지 않음을 알고는 예수회 성직자들을 동원하여 서양식 천문지식을 도입한 '숭정력'을 만들었으나 결국 명이 멸망하여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역법은 청대에 '시헌력'으로 완성되었으므로 아주 헛수고는 아니었다.

2.2.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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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결국 이자성의 난으로 수도 북경이 포위되면서 무너질대로 무너진 명나라의 운명을 실감하게 된 숭정제는 조회를 열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자기 살 길을 궁리하거나 도망치는 바람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결국 자신의 최후를 각오한 숭정제는 자신을 수행하는 환관 왕승은 한 명만을 뒤따르게 하고[9], 자신의 도포에 '''짐이 등극한 지 17년, 역적이 경성을 핍박하니 짐의 보잘것없음과 박덕함을 하늘조차 꾸짖는구나. 선조들이 이룩한 나라를 내가 부덕하여 이런 지경으로 이끌었으니 죽어 지하에서 조상을 뵐 면목이 없으니 짐의 의관을 벗겨 얼굴을 가려라. 명나라의 백성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명나라에 대한 그대들의 분노는 나의 시체에만 풀어주길 바란다'''는 글을 남기고 회나무에 목을 매 자진하는 비운을 맞았다.[10] 이때 자신을 따르던 환관 왕승은도 같은 방식으로 그 뒤의 나무에 목을 매달고 주군의 뒤를 따랐다. 이때 황후 주씨도 자결했는데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은 숭정제와 주씨의 합장묘를 만들고 왕승은의 무덤도 만들어 주었다.
숭정제는 자결하기 전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태자 주자랑을 포함한 세 아들들을 여장을 하고 외갓집 전씨에게 가서 숨어 있도록 탈출시켰다.[11] 숭정제의 태자 주자랑은 동생들과 함께 이자성에게 붙잡혀 있다가 전란 중에 모두 살해되었다. 주자량은 나중에 남명 정권에서 홍광제에 의해 순종 도황제로 추존되었고 그의 부인 태자비 영씨는 살아남아 청나라 예친왕 도르곤에게 바쳐졌으나 수절했고 오래지 않아 병사했다.

3. 평가



3.1. 종합


황제는 신종희종의 뒤를 이어 씩씩하게 일을 해 나갔다. 즉위 초 침착하게 기회를 엿보다 과감하게 홀로 간신배를 제거했고 천하는 평화롭게 다스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세가 기울고, 만회하기 힘들 정도로 폐단이 쌓여 있었다. 조정에서는 서로 싸웠고, 변방의 장수는 교만하고 병졸들은 게을러 사방에서 문제가 터지고 도적이 만연했다. 그리하여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썩고 무너졌으니 불행이라고 할 수밖에!

명사 장렬제

숭정제에게 망국의 군주라 욕해서는 안 된다. 그 책임은 만력, 태창, 천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이들에게는 제사도 지내지 말아야 한다.[12]

[13]

강희제

명나라 의종(숭정제)은 말하였다.

"짐이 나라를 망치는 군주가 아니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라를 망치는 신하이다."

이것이 실로 나라를 망친 말이다. 말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되거니와 더구나 여러 신하들이 어찌 모두 용렬한 자들이겠는가. 숭정의 신하 중에 주연유(周延儒), 온체인(溫體仁), 양사창(楊嗣昌) 등은 모두 어리석어 거론할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로서 나라를 망친 신하라고 해도 될 사람들인데, 의종은 그들에게 정권을 맡기고 함께 나라를 부흥시킬 만한 신하들이라고 하였다. 노상승(盧象昇), 손승종(孫承宗), 부종룡(傅宗龍), 손부정(孫傅庭) 등은 모두 세상을 진작시킬 수 있는 인재로서 도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도, 평화로울 때에는 감옥에 감금하여 거의 사지(死地)에 내버려 두었다가 혼란할 때에는 등용해 놓고 또 견제하였으니, 저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재주를 펼 수 있었겠는가. 싸우면 죽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살육에 있어 의종의 과감함은 객씨(客氏)와 위충현(魏忠賢)을 직접 죽인 것에서 시작되어 그러한 잔인함을 마침내 변방의 장수에게 사용하여 안계조(顔繼祖) 등 34인을 같은 날 사형시켰는데, 이들은 모두 능력 있는 신하들이었다. 하늘이 재주 있는 이를 내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데 그렇게 쉽게 죽이니 국사를 담당한 자가 누군들 맥이 풀리지 않았겠는가.

원숭환이 대장을 마음대로 죽인 것은 정말 죄가 있다. 그러나 왕을 호위한 공로가 충분히 죄를 보상하고도 남는데도 마침내 이간질하는 말을 믿고 죽여서 요동의 일이 마침내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었다. 재주와 지략이 있는 홍승주(洪承疇)와 조대수(祖大壽)를 몰아내어 적진으로 가게 하여 청나라의 개국공신이 되게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고도 신하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한마디 말로 나라를 망친다는 옛말이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의종이 국가와 함께 죽은 강한 절의는 천고에 뛰어나서, 나라가 망할 적에 절의를 지킨 빛이 나라를 부흥시킨 것보다 나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의종이 한 말에 대하여 흠잡지 못하였고, 범경문(范景文)과 이방화(李邦華) 등 여러 신하들이 기쁜 마음으로 따라 죽었다. 이 점이 옛사람들이 선종(善終)을 소중하게 여긴 까닭이다.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

간단하게 말해서 중국에서 사랑받는 황제 중에서 유일한[14] 망국의 황제. 일반적으로 망국 군주들이 대차게 까이는[15] 중국에서 이례적으로 숭정제는 까이지 않고 광범위하게 동정을 받는다.
이는 당대의 반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먼저 명을 멸망시킨 장본인인 이자성은 북경 입성 이후 숭정제와 주씨의 무덤을 개장하여 역대 명 황제들의 묘역에 이장했으며 장례까지 황제의 예로 치뤄주고 장렬 황제라는 존호까지 내렸다.[16] 정치적 목적에서의 민심 수습책이기도 했지만 '''명이 망해야 할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 황제들이 문제지 숭정제는 잘못 없다'''고 명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이자성군을 몰아내고 북경에 입성한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오삼계의 투항 후 일편석 전투에서 승리하고 북경에 입성한 청군은 '''숭정제의 복수를 하고 중원을 안정시키겠다''', 오삼계군은 '''반란군에 의해 해를 당하신 황제 폐하의 원수를 갚겠다'''는 것을 각각 대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숭정제의 재위 17년은 분명 실책도 있지만, 재위 기간 동안 제대로 된 정치를 했기에 만일 국가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명군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숭정제의 앞에 깔린 전임 황제들이 암군들인지라 나라를 철저하게 망쳐놓았던 탓에 불운한 마지막 황제가 되고 말았다. '''시대를 완전 잘못 탔다. ''' 이것이 일반적인 평가. 안습.
다만 성격이 지나치게 의심 많고 독단적이며 너그럽지 않았다는 게 큰 문제였다. 숭정제의 재위기간인 17년 동안 나라가 막장 상황인데도 관리의 실책을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물어 지방 관리 뿐만이 아니라 중앙 정부의 신하들 역시 수시로 갈아 치우거나 죽였다.[17] 이러다보니 신하들이 황제를 두려워하여 따를리가 없었고 아예 청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많았다.[18]
김용의 <원숭환 평전>에서는 숭정제가 죽인 총독이 11명이라고 나왔지만 숭정 연간에 사망한 총독은 정숭검, 원숭환, 유책, 양일붕, 웅문찬, 범지완, 조광변까지 모두 7명이다. 또한 재상 50명을 갈아치웠다고 하지만 명대 내각에 있던 대학사를 모두 재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며 명대에 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수보(首輔) 뿐이다. 숭정 연간의 수보는 숭정 원년에 임명된 이국부터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사망한 마지막 수보 위조덕까지 해서 모두 18명이다. 또한 온체인[19]이 8년이나 재임한 재상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온체인이 수보로 있던 기간은 1633년부터 1637년까지 모두 4년이다. 그러나 이렇게 수정된 수치를 받아들이더라도 사람을 자주 갈아치우고 많이 죽이는 와중에도 정작 무능한 간신인 온체인이 오랫동안 중용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여전히 환관을 신임하여 숭정제가 중용한 환관들의 감시와 횡포로 신하들이 업무를 똑바로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숭정제는 환관을 잘 다루거나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나중에 그가 믿었던 환관들도 숭정제를 배신하고 이자성 편이 되었다.
또한 마지막까지 남경으로 천도하지 않고 북경을 지킨 것에 대해서도, 원래 황태자를 남쪽으로 보내 대비하게 할 생각이 있었지만 당현종처럼 권력을 빼앗길 것을 염려하여 그만두었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가면 어차피 남명도 망했으니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남명이 무기력하게 무너진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황제가 무능한데다 여러 황제가 병립하며 서로 싸우는 막장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정통성 있고 유능한 황태자가 남명에 합류해서 즉위했을 경우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황태자가 딱히 유능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평균적으로 보더라도 주유숭보다는 나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게다가 멸망을 앞둔 나라의 군주로서 본인이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나거나,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난 장군을 믿는 안목을 보여주어야 했음에도 이런 부분에서는 만력제만도 못한 막장 면모를 보여주었다.[20] 원숭환 숙청은 정치적인 이유가 컸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원숭환 숙청 후 만계나 홍승주 같은 장군들에게 무리한 속전속결을 강요하여[21] 결국 치명적인 패전을 이어나간 부분은 좋게 평가하기 어렵다.

3.2. 원숭환의 처형 논란



3.2.1. 옹호


숭정제는 요동 지역을 지키는 장군으로 간 원숭환과 모문룡 둘에게 황제의 보검인 상방보검을 내려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사실 상하관계가 없는 황제의 직속 장수로 동급인 관계였다. 그런데 원숭환은 자기 독단적으로 모문룡을 불러들이고 결국 그를 '''죽여 버렸다.''' 그러나 자기 부하도 아닌 다른 일군의 장수를 황제의 허락도 없이 죽였다는 것은 숭정제 입장에선 황제를 무시한 처사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2] 더욱이 숭정제도 청 태종의 반간계에 넘어갔다고는 해도 원숭환을 바로 처단한 것도 아니었고 몇 개월 지켜보다가 참형에 처했다. 이런 이유로 원숭환 처형 건은 숭정제의 잘못 이전에 원숭환이 먼저 화를 자초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원숭환청태종의 반간계에 의한 것인지 그 근거 역시 분명하지 않다. 원숭환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모문룡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지 그 뒤에 청태종이 있다는 주장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에서야 나온 것이다. 그리고 원숭환이 죽은 다음에 14년이나 지난 뒤에 명나라가 멸망했는데, 원숭환이 죽어서 명나라가 멸망당했다고 한다면 원숭환이 2년 수비한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23] 그 뒤에 멀쩡히 잘 버틴 14년의 무게는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숭정제 혼자에게 잘못을 묻는 것 보다는 당대 명나라의 문화를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데 명나라는 정말 극단적인 '''군사 실무자 견제 국가'''였다.[24] 여러가지 예가 있는데. 예를 들어 전쟁을 한다면 총병은 당연히 무관, 부총병도 무관 하는 식으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게 보통일텐데 언제나 주요직에 문관을 참여시켜서 서로 견제시켰다. 즉 총병이 무관이면 부총병은 문관. 심지어 사르후 전투 같은 경우에는 총사령관이면서 패전에 지대한 책임이 있는 양호가 문관이었다. 더구나 보통 장군의 경우 승진 또한 문관보다 느렸으며. 중앙직이 아닌 변방직에 앉혔고.
무엇보다 군사 담당자가 '''정말 조금만 실수해도 벌을 주거나 사형에 처했다.''' 즉 총병 이여송 같은 경우 열심히 싸우지 않는다며 탄핵당했고, 누르하치의 발호에 군사 요청을 하고 상급자인 장승음이 패배하고 전사 하니까 막상 원군을 요청한 이유한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 처형. 누르하치에게 요동을 빼앗긴 왕화정과 웅정필도 처형. 양호도 사르후 전투에서 졌다고 처형... 승패는 병가지상사인데 한번 졌다고 삭탈 관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면 고마운 수준이고, 걸핏하면 사형에 처하고 가족들까지 연좌시켜 버리니까. 명 / 청 교체기에는 이영방 / 손득공 / 홍승주 / 모문룡의 의형제였던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 / 심지어 원숭환이 잡히자 원숭환의 부하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장수들이 명을 배반하거나 청나라로 항복해버렸다... 즉 명나라의 문화 자체가 장군들을 극도로 견제하는 문화였다는 것.
이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부터 이랬다. 시조부터가 유능한 신하, 그 중에서도 장수들이 반란을 벌일까 두려워 견제라고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거나 작은 실수로 처벌을 가했으니. 더군다나 주원장의 아들인 영락제는 본인부터가 무력을 이용한 쿠데타로 황위에 올랐기 때문에 더더욱 쿠데타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으며,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는 숙부 주고후가 제2의 정난의 변이 될 뻔한 쿠데타를 일으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그나마 건문제와 달리 쿠데타를 완전히 진압하고 주고후를 처형했지만). 이런 역사가 있으니 명나라는 유능한 장수들을 극도로 경계하게 된 것이다.
특히 명나라는 산해관이 뚫려서 멸망한 게 아니라 농민 반란으로 망한 것이며,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순간까지도 청군은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25] 숭정제가 명나라 멸망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농민 반란을 막지 못한 쪽이지, 산해관 방어를 잘못한 쪽은 아닐 것이다.

3.2.2. 비판


숭정제가 원숭환을 처형한 것은 대표적인 실책으로 손꼽히며 숭정제가 청나라 도광제와 함께 '''청렴하지만 무능한''' 군주의 대표 케이스로 까이기도 한다. 혹자는 숭정제가 원숭환을 처형했기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했다고 하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한다. 또는 원숭환의 처형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더라도 요동 지역에서 명나라가 힘을 못쓰고 결국은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들어올 수 있게 만든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자. 후금(청)이 강성하다고 한들 원숭환이 지휘하는 영원성의 명나라 정예병력이 여전히 청나라를 잘 막고 있었다. 그런데 홍타이지가 몽골쪽으로 돌아서 명을 약탈하니까 이 의심병 황제는 원숭환을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죽여버렸는데 사실 원숭환을 의심해서 죽인거 부터가 멍청한 짓이다. 특히 원숭환이 죽었어도 청군이 산해관을 못넘었으니 숭정제가 스스로의 실책을 별 거 아닌 것으로 감싸는것 자체가 진짜 어리석은 생각이다.
원숭환이 영원성과 금주성에서 청나라 군을 잘 막았기에 휘하의 명나라 군대가 원숭환에 대한 충성심과 신임이 대단했을테고 원숭환 본인도 청나라 군을 상대하는 경험을 누구보다 많이한 베테랑 장군이며 산해관 전선쪽에 대한 지형 파악도 그 누구보다 빠삭했을텐데 이는 후임 장군을 유능한 사람으로 임명해도 메꾸기 힘든 부분이다. 특히 원숭환의 죽음 후 청은 1631년 대릉하성을 함락시키고 1641년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의 정예 병력을 궤멸시켰고[26] 송산-금주를 함락시키는 등 명의 북방 방어선을 차근차근 붕괴시키고 있었다. 산해관이 함락되지 않았다고 14년 동안 멀쩡히 잘 버텼다고 하는 것은 당시 명나라의 북방 방어선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소리이며 그저 산해관 하나에만 방어를 집중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송산 전투 후 홍타이지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산해관 역시 함락되었을 가능성 또한 없지 않은데 이를 고려하지 않고 잘 버텼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게다가 원숭환을 능지처참이라는 끔찍한 형벌로 처형하니 원숭환의 부하들이 분노하여 명을 배신하고 청에 투항했다. 원숭환은 명나라와 황제를 위해 청군으로부터 필사적으로 산해관을 방어했지만 돌아온 것은 황제한테 끔찍하게 처형당한 것이니 평소에 원숭환을 따르던 부하들이 이런 황제를 좋아할 턱이 없었다. 그리고 이때 청나라로 넘어간 원숭환의 부장이었던 경정충[27], 상가희는 후에 번왕이 되어 명나라 잔존 세력을 때려잡는 사냥개로 쓰였다. 더군다나 이들이 맨몸으로 넘어간 것도 아니고 누르하치를 좌절시키는데 기여한 홍이포를 비롯한 군사 기밀까지 갖고 투항했으니 이는 청의 군사력을 강화시켜주어 산해관을 보호하는 중요한 요새 중 하나인 영원성까지 청나라에게 넘어가는데 기여해 명의 전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28]
이 때문에 당시 명나라에서는 그 누구를 임명해도 원숭환 만큼 청나라를 잘 막을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특히 원숭환이 지휘한 명군은 토목보의 변, 사르후 전투, 송산 전투 같은 대참패를 한 적이 없는 것만 봐도 원숭환이 왜 당대 최고의 명장중 하나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오히려 원숭환의 처형전에는 원숭환의 명군이 금주-영원 방어선에서 청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는데 원숭환의 처형 후에 홍타이지의 청군이 차근차근 요서 방어선을 붕괴시킨 것을 보면 원숭환을 처형시킨 숭정제의 행동이 큰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 어리석은 황제는 원숭환을 죽인 다음 장수들의 합리적인 의견까지 무시하며 장수들에게 속전속결하라는 지시를 내려서 장수들한테 큰 부담을 주었고 결국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 정예군을 다 말아먹었다.
당시 원숭환은 누르하치 때부터 청나라 군을 격퇴한 당대 최고의 명장인데 이런 명장 한명이 있으면 대청전선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드니 명나라로서는 공세적으로 후방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기가 더 쉬워진다. 숭정제가 원숭환에게 대청전선을 전담하게 하고 홍승주 같이 유능한 장군에게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라고 했으면 반군에게 북경이 함락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1639년까지 홍승주, 손전정, 양사창 같은 명장들이 지휘하는 명나라 군대가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건 청나라의 금주 포위로 인해 홍승주의 홍군 같은 정예병을 반란 진압 대신 요서 방어선 쪽으로 파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자성의 난이 성공할 수 있었던건 청나라로 인해 홍승주, 오삼계 등이 지휘하는 명나라의 정예병이 산해관, 송산, 금주성 등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자성의 군대가 청나라의 덕을 봐서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이지 이자성의 난 하나 때문에 명나라가 멸망한게 아니다.
숭정제의 산해관 방어 역시 잘했다고 보기 힘든데 상황의 불리함을 들어 장기전을 주장한 장수들인 만계, 홍승주 등의 의견을 묵살하고 속전속결을 강요해서 송산 전투 등의 대참사를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을 보면 숭정제는 반란 진압은커녕 산해관 방어도 낙제점이다. 또한 송산 전투 후에 청군이 홍타이지의 급사로 인한 내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미 요서 방어선이 붕괴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산해관 또한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이것을 단순히 청군이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라는 것은 당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인 해석에 불가하다.
결론적으로 숭정제가 원숭환을 능지형으로 숙청한것은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조른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굳이 원숭환의 행적이 황제를 무시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숙청을 하고 싶으면 청나라를 물리치고 나라를 안정시킨 다음에 숙청하는 것이 좋았다는 것.

3.3. 숭정제의 자린고비 논란



3.3.1. 비판


숭정제에게도 비판적인 시각 중 가장 큰 것은 지나치게 자린고비였다는 것. 이자성의 군대가 처들어오는데도 군대에 내탕금을 풀지 않고 돈이 없다고 버텼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숭정제는 즉위한 날로부터 거의 매년 돈 없다고 죽는 소리를 했는데, 때문에 궁중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는 것도 금지시키고 부녀들이 금관을 쓰는 것도 불허했다. 실제 당시 경제는 불경기였고, 국고도 비어있긴 했다. 조정의 1년 수입은 수백만냥에 불과했는데 지불은 천만냥을 해야 했다는 말도 있으니... 때문인지 이자성이 북경을 포위할때는 국고에는 겨우 40만냥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자성이 태원을 함락시키자 숭정제는 긴급히 오삼계를 북경으로 불러 근왕하게 하려고 했는데 호부에는 100만냥의 군자금도 없었다. 그리하여 북경성은 오삼계의 근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는 한면만 본 것으로, 국고 말고 내탕금은 '''아주 많았다'''는 설도 있다.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후 궁내에서 긁어모은 백은만 3700만냥, 황금이 150만냥, 남은 보석은 부지기수였다는 것. 숭정제는 그만큼 축재에 열심이였다. 숭정 2년 대신들이 숭정제에게 내탕금을 동원해 재민구호에 쓰자고 했는데 숭정제는 내탕금이 바닥났다고 우기면서 즙을 짰다. 북경이 포위된 후 숭정제는 병사들이 배를 굶고 있는데도 은자를 꺼내서 그들을 구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들이 개인재산을 군자금으로 하자고 했지만 숭정제는 항상 자신도 어렵다고 내탕금은 이미 다 써버렸다고 말할 뿐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숭정제가 문무백관 등에게 무상으로 재산을 국고에 기부하도록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가장 부유한 황제나 황족들부터가 돈을 내놓지 않는데 누가 돈을 내려 하겠는가? 결국 달랑 20만냥만 모였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좌도어사 이방화(李邦華)는 숭정제에게 "사직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황상이 이렇게 신외지물에 인색하는가? 가죽이 없으면 털이 어디에 붙어 있겠는가?" 라고 마지막으로 간언했다.

3.3.2. 반론


하지만 숭정제의 내탕금이 3천만 냥이었다는 기록은 야사에나 나오는 것이지 그런 돈이 실제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황실의 내고는 황제를 제외하면 극히 제한된 사람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돈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진짜 '''까봐야''' 알 수 있을 뿐이다. 물론 할아버지 만력제가 재위 기간 동안 축재에 열심이라서 내탕금이 국고금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숭정제의 내탕금이 정말로 텅 비었다는 가장 큰 증거는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한 이후를 보면 찾을 수 있다. 이자성은 "숭정제가 갖고 있다는 3천만 은량을 내가 너희들에게 나누어 줘서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 라며 부하들을 설득해 북경까지 진군했다. 하지만 북경에 도착했는데도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고, 때문에 북경 성내를 약탈하고 고관 대작의 집을 습격해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 이자성의 군대는 '''약탈을 하지 않고 재물을 나누어준다'''는 명성을 얻었다. 이자성이 이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부하들이 대놓고 민중들까지 약탈하는 것은 통제하는 대신, 주로 민중들에게 증오받던 탐관오리들의 재산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쓰고 민중들에게 나눠주는 전략을 썼고, 이게 주효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양왕 주익명을 참살했을 때 은 15만 냥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명나라 1년 전체 예산의 1%가 넘는 금액이다. 당시 탐관오리들의 탐학이 어마어마하여 이들을 털면 군비를 댐은 물론 대규모 구휼까지도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북경에 도착한 다음의 이자성은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숭정제가 내탕금을 모두 군비로 써서 '''정말로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숭정제에게 돈이 남아 있었다면 이자성이 이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거품론이 끊이지 않는 이자성이지만, 민심의 중요성을 알고 그를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던 이자성이 내탕금 3천만 냥을 털고 그걸 독식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내탕금을 풀어서 선심쓰듯 부하들에게 나누어줬을 것이고, 이러면 북경을 약탈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은 3천만 냥은 명나라 3년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니 부하들의 약탈을 통제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을 테고, 이후 북경의 구 명나라 관리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았을 것이며, 오삼계와 싸울 때 신사들에게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자성은 그전까지 쌓았던 명성을 모조리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오삼계와 청나라 연합군과의 싸움 한방에 무너진 것이다. 숭정제가 자린고비여서 내탕금을 내놓지 않고 3천만 냥을 쌓아두었다는 낭설을 반박하는 가장 큰 증거이다. 말년에는 신하들 보고 국고에 돈 좀 기부하라며 닥달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정말 돈이 그만큼 있었다면 대신들이 조회에 안 나오거나 그럴 리도 없고. 하다못해 이자성 부하들이며 청군에게 직접 돈을 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4.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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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풍우정>의 주요 인물들. 맨 앞 가운데 백발을 휘날리는 사람이 숭정제다.)
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의 주인공으로 명나라의 재건을 위해 분투하나 결국 좌절하는 모습이 잘 나타난다. 중국 배우 이강이 열연. 마지막에 백발을 휘날리며 자살하는 모습은 정말 인상 깊다. 그외에 숭정제가 등장하는 중국 드라마에서는 대다수 열심히 노력했지만 좌절해서 망가지는 모습이 많다. 다만 본인의 큰 단점인 의심많고 독단적이며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않는 포용력 없는 성격이 큰 문제라 이로 인해 화를 자초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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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하려는 숭정제
야사에 따르면 망국의 때가 다가오자 그 번민으로 하루밤새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다 하는데 그걸 차용한듯 하다.
그런데 중국 드라마 '천하'에 등장하는 숭정제는 아주 매력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젊은 황족이다. 제위에 등극하기 이전에 위충현, 동창과 맞서 명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상당히 계략도 잘 짜고 정치판에도 익숙한 것을 보면 툭하면 신하들 의심하고 적의 속임수에 넘어서 엄한 장수나 죽일 것 같지도 않다. '천하'에서는 주유검이 황위에 등극하는 것으로 끝난다. 제위에 등극할 때 손수 동창 건물을 폭파시키며 군왕의 포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 숭정제와 같이 의심많고 너무 주도면밀해서 주변인들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마침내는 그간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던 전가의마저 암살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등 참 입체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여담이지만 '천하'의 주유검을 다른 명 말기의 드라마 배경에 투입한다면 반정부군도 만주족도 다 쓸어버리고 몇 년만에 명나라의 안정과 전성기를 되찾을 것 같다. 지금까지의 중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숭정제 캐릭터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다.
주성치 주연의 구품지마관에서 포용성의 어머니가 상방보검을 누구한테 받았는지 말하는데 명의 숭정제가 하사한 보검이라고 말한다.
2013년 영화 대명겁에서는 잇다른 농민반란군에 멘탈이 완전히 붕괴된 황제로 잠시 나온다.
2016년 작 드라마 도깨비의 고려 왕 왕여의 모티브가 숭정제라는 설이 있다. 극의 전개가 숭정제가 원숭환을 처형한 사건과 유사하게 돌아간다.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마지막 황제, 칼끝에 서다'에서 주인공이 바로 이 주유검, 숭정제이다. 정확히는 21세기 한국의 대학생이 주유검의 몸에 빙의되어 회귀한 주유검의 영혼과 함께 명나라의 멸망을 막고 오히려 명나라의 전성기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여기선 원역사와 다르게 장렬민황후와 혼인하지 않는다.

5.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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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의 역대 황제'''
16대 희종 천계제 주유교

'''17대 의종 숭정제 주유검'''

(남명)18대 안종 홍광제 주유숭
[1] 의종, 사종, 위종 3개는 남명에서 추숭했다. 남명에서 최종적으로 인정한 묘호는 의종이고, 현재에도 청나라가 추숭한 회종보다 의종이 주로 쓰인다.[2] 청나라에서 추숭했다.[3] 혹은 효절열황후 주씨(孝節烈皇后 周氏)라고도 한다.[4] 이후 사촌동생 주유숭이 추대되어 남명 정권이 들어서고 이후 대만의 정씨 왕국과 연합하여 명나라 부흥운동을 이어갔지만, 조직력이 약하여 서로 중구난방으로 황제를 옹립한 데다 남명의 수뇌부가 하나같이 무능한 관계로(...) 남송처럼 오랫동안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 때문에 남명 정권은 후세에도 정통 왕조로 인정받지는 못해서 숭정제가 사실상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통한다.[5] 만력 38년 음력 12월 24일에 태어났는데, 양력으로 환산하면 1611년 2월 6일이다.[6] 이 때문에 현재 남은 유씨의 초상화도 생전이 아닌 사후에 그린 것이다.[7] 명나라를 멸망시킨 주요원인에는 농민반란이 있다. 하지만 농민반란의 초기 형태는 이미 만력제 후반기에 본격적으로 터져나왔다. 관중 지방(현 섬서성)은 중국 역사 내내 경제적, 군사적으로 요충지였으나 송과 원을 지나면서 생산력이 급감했다. 명나라 중기 이후로 관중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식량을 보급해주는 행정 체계가 붕괴하고 군대뿐만 아니라 농민들도 굶어 죽을 판이 되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였던 탈영병들과 농민들이 유민이 되어 무장을 갖춘 뒤 명나라 조정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8] 농민반란도 명 관군이 적극적으로 진압하여 1637년에는 거의 사그라들었지만, 하필이면 그때 청나라가 대규모 병력으로 북방 방어선을 공격하자 명나라는 농민반란군을 완전 진압하기 직전에 정부 진압군을 북방방어선으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계속된 전쟁으로 가뜩이나 좋지 않던 재정이 파탄났고 1639년부터 자연재해가 겹쳐 기근이 일어나자 사정이 더욱 악화되어 농민 반란 대폭발. 실로 절묘한 시점에서 역사적 요소들이 결합하여 명나라는 멸망했다.[9] 그런데 다른 기록에는 마지막으로 혈전을 벌이고자 궁궐 내 싸울 수 있는 이들은 따르라고 했지만 죄다 달아나고 왕승은 홀로 남아있자 주저앉으며 '이대로는 싸울 수도 없구나.' 탄식하고는 자결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 베이징에는 규료왕승은(叫了王承恩)이란 속담이 있다. 직역하면 '왕승은을 불러라.'는 뜻인데,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숭정제가 왕승은과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한 일에서 유래되었다. 물론 이 말이 반드시 죽음을 앞에 둘 정도로 심각한 경우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고, 일반 사람들이 어쩔 도리가 없다거나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고 할 때도 쓰인다.[10] 북경을 함락한 농민 봉기의 수령 이자성도 이 유서를 읽고서 감탄했다고 하며, 숭정제가 자살한 그 나무는 청나라도 건드리지 않고 되려 작게나마 제사를 지내 넋을 위로하게 하여 명나라 잔존세력을 회유하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는 전제 봉건왕조의 우상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잘려나갔다. 현재 있는 나무#는 1983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한다.[11] 태자가 16세였고 그의 동생들도 모두 10대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자성의 군대에 의해 잡혔다. 딸은 2명이 있었는데 장평공주와 소인공주 모두 "너는 황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외치면서 자살 직전에 숭정제가 직접 죽이려 했지만, 큰딸 장평공주는 팔 한 쪽만 잃고 운 좋게 살아남았다. (이 때문에 금용은 녹정기에 장평공주를 구난이라는 여승으로 등장시켰다.) 장평공주는 탈출해서 숨어 살다가 순치 2년(1645) 순치제에게 글을 올려 용서를 빌고, 이대로 비구니로 살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순치제는 큰 위협이 될 것 없다고 판단하여 관대히 대하였으나 비구니로 살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대신 생전의 숭정제가 장평공주의 약혼자로 정한 주현(周顯)과 혼인케 하였다. 그러나 결혼하고 1년밖에 되지 않은 1646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향년이 (한국식 나이로) 16세 또는 17세에 불과했다. 황족으로 태어나 평민이 되었다가 결혼한 지 1년만에 요절한,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이었다. 청나라 조정이 내린 시호가 장평(長平)이라 '장평공주'로 알려졌지만, 숭정제에게 공주로서 받은 봉호는 곤흥(坤興)이었다.[12] 다만 태창제는 재직기간이 고작 4주였다. 즉, 앞뒤 황제들이 막장이라 동급으로 몰린 측면이 있다. 하지만 군주의 가장 큰 의무가 장수와 후계자 생산임을 생각한다면 오래 살지 못해 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의미로 말했을 수도 있다.[13] 실제로 이들은 청대 역대제왕묘에 배향되지 못했다.[14] 진나라의 자영 역시 망국의 군주로서 사랑받는 인물이지만 어디까지나 진왕으로서 즉위하고 죽었기 때문에 황제로만 한정지어 보면 숭정제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군주로 확장해서 보면 자영까지 포함해서 2명이다.[15] 예외가 진나라 자영이나 금나라 애종 정도. 이 둘도 선대에 망가진 나라를 살리려고 본인들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전자는 본인이 뭘 하려야 할 수가 없었는데다가 재위 기간이 짧았고 후자는 통일 왕조의 군주가 아니라서 인지도가 떨어지는데다 이민족 출신이기에 나름대로 동정은 받아도 인기는 없다. 한나라 헌제 역시 30년에 육박하는 긴 임기 동안에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무했기에 동정을 많이 받는 편이다.[16] 다만 부장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묘의 규모가 상당히 작다. 이 무덤은 원래 몇년 먼저 사망한 전 귀비의 무덤으로 쓰려고 만든 것이다. 이자성이나 청나라에서 새로 만들어주지는 않고 그냥 여기에 숭정제와 주 황후를 합장시킨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대 황제들은 재위 기간에 자기 무덤을 만들었지만 숭정제는 공사다망한 통치에 신경 쓰느라 미처 만들지 못했다.[17] 상서(尙書) 17명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고, 총독(總督) 7명과 순무(巡撫) 11명을 처형했다.[18] 주로 명 - 청(후금) 전쟁에서 대치했던 명나라 장수, 관리 중 적지 않은 수가 귀순, 전투 중 항복을 했는데 이는 명나라의 내부 사정과 숭정제의 실책으로 인한 상황이 막장이었다는 반증이다.[19]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간신이다.[20] 만력제는 죽을 때까지 웅정필을 믿고 그가 장기전 전략을 펼치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21] 만계도 홍승주도 장기전을 주장했지만 숭정제에게 씹혔다. 이 때문에 만계는 북경 근방에서 전사, 홍승주는 송산 전투라는 최악의 대패를 당하고 청에 투항한다. 당시 명나라 재정이 막장이라 장기전을 펼치는 게 쉽지 않기는 했지만 무리한 속전속결로 인한 패배가 여러 번이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22] 비유하자면, 오늘날의 지상작전사령관이 자기 멋대로 제2작전사령관을 사형시켜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신이 그 소식을 들은 대통령의 입장이라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그리고 지상작전사령관을 잡아들여서 바로 처형한 것이 아니라 원숭환을 체포해서 구금, 조사, 죄목을 발표할 때까지 1년이 걸렸다. 원숭환이 죄를 지은 단계부터 따지면 기간은 훨씬 길다.[23] 원숭환의 영원 전투는 1626년의 일이다. 원숭환이 방어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계요독사에 임명된 1628년 이후의 일이며, 원숭환이 모문룡을 죽인 일 등의 이유로 하옥된 것은 1629년이다. 때문에 원숭환의 재임 기간은 2년으로 봐야 한다.[24] 이는 일단 창업주인 주원장 부터 군벌 출신인데다 영락제의 케이스 처럼 황제가 내전으로 바뀐적도 있어 당연한 결과였다. 명의 역사를 보면 영락제 주체가 건문제를 무력으로 몰아냈고 또 영락제의 아들인 한왕 주고후가 조카인 선덕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처망한걸 제외하면 내부의 군벌로 인해 내전이 있던 적이 없었다. 만력제 이후 명나라 말기를 제외한다면.[25] 물론 홍타이지가 뇌출혈로 급사하면서 황위를 둘러싼 내전이 일어난 원인도 있다.[26] 특히 송산 전투는 토목보의 변, 사르후 전투만큼 명나라에 큰 타격을 준 최악의 패배였다.[27] 정확히는 경정충의 아들인 경중명이 복건을 지배하는 정동왕이 된다. 공유덕은 청나라가 북경에 입관하기 전 죽었다.[28] 영원성 자체는 나중에 함락된다. 청나라는 원숭환 사후 영원성 공략 전에 조선에 출병해서 후방을 안정시켰으며 몽골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또 만리장성을 돌아서 중국 내부를 조져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