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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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초상화가 아닌 이 초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1. 개요
명나라 때의 문신. 자는 숙대(叔大), 호는 태악(太岳). 중국사, 최소한 명나라에서는 손꼽히는 재상이다. 그러나 능력은 매우 뛰어난 명신이었지만 인간성은 좋지 못한데 특히 부패척결을 단행하고 만력제를 엄격하게 교육시키면서도 재물에 대한 탐욕이 심해 뇌물을 받아챙기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만력제를 삐뚤어지게 만드는데 한 몫했다고 추측된다. 만력제를 그나마 구원한 제갈량 급 명신이란 평과 그를 흑화시킨 근원이란 평이 갈린다.
2. 출생 및 정계 진출
1525년 5월 24일 형주(荊州)[1] 출신으로, 외모가 잘생기고 수려했다.[2] 형주의 천재로 손꼽히며 주목받던 가운데, 1547년 23살 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처음에는 가정제 치하에서 한림원 서길사가 되었는데, 서계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문하생이 된다.
엄숭이 전횡을 부릴 동안은 은거하기도 하는 등 굴곡을 겪었으나, 서계가 엄숭을 탄핵해 실각시키고 재상이 되면서 그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예부우시랑, 이부좌시랑, 예부 서경 등을 역임했다., 융경 원년(1567)에 입각하여, 서계가 가정제의 유언에 따라, 가정제가 중용한 도교 도사를 배제할 때 그 한쪽 역할을 맡았다. 요절한 융경제가 물려준 명신 중에 장거정 또한 있었다.
3. 권력 다툼
문제는 이 명신들 간에서 일어났다. 서계의 정적이었던 고공은 이 모의로부터 배척당했다고 앙심을 품어, 서계의 아들의 죄를 들어 서계를 탄핵하지만, '''반격을 당해 파면되었다.''' 하야한 고공은 태감 이방 등과 연결해 서계의 실각을 노리게 된다. 서계는 이듬해(1568) 관직을 사퇴하고, 그 후임으로서 예부서경 조정길이 선택되었다. 고공은 복권을 위해 이방을 통해 장거정에게 협력하게 하고 고공은 복권하여 조정길을 대신해 재상이 되었다.
장거정은 고공과 결탁해 권력을 기반을 다지고, 알력이 일어난데다, 본인이 더욱 강력한 권력을 얻기 위해 고공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내시 풍보와 연합해, 고공을 실각시키려 했다. 융경제가 1572년에 사망하고, 장거정이 지지하던 '''만력제가 즉위했다.''' 이 때에 융경제의 유언 등을 이용해 고공을 실각시키고, 스스로 수보의 지위에 올랐다.
고공은 당시 재능이 뛰어나 정국을 주도했지만 독선적이라 다른 신료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미워했다. 이 덕(?)에 장거정은 환관 풍보와 협력함까지 묵인받아 고공을 실각시킬 수 있었다. 이후 고공은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강제당하던 중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것이 장거정 사후 장거정 탄핵의 한 사유가 되었다.
4. 정점 등극, 개혁과 부정
만력제를 등에 업고 장거정은 독재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차례로 개혁을 실행해 나갔다. 우선 관리의 탄핵을 담당하는 언관이나 각지의 서원 등의 입을 봉해 독재권을 확립하고, 낭비의 철폐, 강기숙정(綱紀肅正), (장거정의 최대 공적으로 손꼽히는) 전국적인 토지측량과 '''일조편법'''(一條鞭法) 등등을 실행하면서도 만력제를 철저하게 공부시켰다.
당시 지방에는 힘이 강한 향신세력(鄕紳勢力)이 소유한 땅을 속여 보고하고 탈세하는 일이 많았지만, 장거정은 단호히 대처하여 관청 몰래 경작하는 땅을 대량으로 적발하였다. 당시의 세제인 양세법은 항목이 너무 많고 복잡하여 불공정한 점이 많았다. 일조편법은 잡다한 항목을 일관화하여 과세대상을 토지로 옮기고, 당시 보급이 진행 중이던 은으로 납세하게 했다.
이러한 개혁으로 명나라의 재정이 크게 호전되어 국고에 식료 10년 분과 잉여금 4백만 냥을 축적하는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한편으로 언론 탄압, 기득권의 침해 등으로 조정과 재야에는 장거정에 불만을 품을 세력이 가득했다. 또한 황제와 다른 신료들에게는 준법과 청렴을 강요하면서도, 정작 장거정 본인과 측근들은 뇌물을 받아 부정축재를 하며 호화사치를 즐기고 일가는 강릉에 있던 요왕부를 차지하는 등 부정과 위세가 지나쳐 공분을 샀다. 이때문에 장거정 사후 이런 불만이 폭발하여 일족이 몰락했다. 특히 장거정의 아들들이 진사에 급제한 것에 대해서도 부정 논란이 일었으나 넘어갔는데, 이 또한 후에 문제가 되어 장거정의 아들들은 유배를 당했다. 이미 본인이 수보로서 권력을 누릴 동안, 선배 격이던 서계 일가는 고리대와 토지 겸병이 논란이 되어 결국 재산이 몰수당하는 와중이었음에도, 끝내 자제하지 못했다.
장거정은 또한 매번 범람하는 황하 하류의 치수사업에도 업적을 남겼다. 여기에는 반계순이라는 관료가 특히 큰 공을 세웠지만, 장거정 사후 결국 탄핵 크리. 또 외치로는 명장 척계광(戚繼光), 이성량(李成梁)을 요동과 몽골에 파견하여 북로(北虜, 몽골족)를 막고, 또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의 해안 방어에도 주력하여 남왜(南倭, 왜구)의 움직임도 봉쇄했다.
척계광은 그 과정에서 군사 전법을 개선하고 정예병을 육성, 훗날 임진왜란이나 명의 방비에 활약하는 남병을 남겼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남병의 정예화와 지원 편중 등으로 북병과의 갈등과 알력이 나타나게 된다. 풍보는 궁 내부에서 환관조직을 통제하고 태후들과 친밀감을 유지하고 장거정과의 관계를 중재하는 등, 장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577년에 장거정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당시의 유교적 예법대로라면 장거정은 당연히 삼년상을 치르고자 사직 요청해야 했지만, 상중에 탄핵될까 걱정하여 사직을 요청하지 않았다. 장거정같은 재상급 신하라면 삼년상에도 불구하고 탈정기복(奪情起復)이라는 제도가 있어서[3] 상을 치르러 낙향하면, 몇 달 후 임금이 탈정을 제안하고 의례적으로 몇 번 사양하여 당시로서 군신간의 사양하고 양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 다음, "군부(君父)에 대한 충과 효는 근본이 같다"는 식의 명분으로 사대부들에게 보여주고, 몇 달후에 상복을 입은채로 상경하여 상복을 입고 다시 관직에 복무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장거정은 단지 확율 100%의 의례적인 절차도 신청하지 않고, 단 몇 달 동안의 공백기간 권력 유지가 걱정되어서 사직 요청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만력제의 혼인 당시 탈정 기복의 예법에 따라 집에서 근신하든지 하여 자리를 피해야 마땅한데도, 비판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화려한 예복을 입고 앞장서서 참가하자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짐승같은 짓이라며 친 장거정파 신하들에게도 크게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장거정은 비판자들을 크게 탄압하고 권력을 유지한 채 토지조사계획을 밀고 나갔다.
5. 최후, 그리고...
하지만 장거정을 무너뜨린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으니, 1581년에 태사 직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쓰러져 다음 해인 1582년 7월 9일에 사망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장거정이 과로로 병이 나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치스럽고 여색을 좋아하던 장거정이 회춘약을 잘못 먹었다가 탈이 나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망했을 때 향년 58세. 사후에 상주국(上柱國)의 봉호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장거정 사후 일어나는데... 만력제 문서로.
[1] 구체적으로는 오늘날 후베이성 장링현(江陵縣)[2] 과하게 쭈글쭈글거리게 그려진 위 초상화와 달리 풍채당당하게 나온 초상화도 있다.[3] 조선에서도 세종 시기 황희 정승, 임진왜란 시기 충무공 이순신의 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