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엔잘차 전투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1년 2월 15일 프로이센-하노버 연합군과 프랑스-작센 동맹군이 헤센의 랑엔잘차(Langensalza)에서 맞붙은 전투. 프로이센-하노버 연합군이 승리했다.
2. 배경
1761년 2월 9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프랑스군이 겨울 숙영을 위해 사방에 흩어져 있는 틈을 타 헤센에서 적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하노버의 슈페르켄 장군이 랑엔잘차 일대에 주둔한 작센군을 향해 진격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쥐부르크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그를 지원했다. 2월 14일, 프로이센군과 하노버군은 랑엔잘차 근처에 진영을 새우고 밤중에 운스트루트 강의 부서진 다리를 수리한 후 작센 군단에 대한 연합 공격을 개시하기로 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하노버 연합군
- 프로이센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쥐부르크
- 보병 6개 대대, 기병 25대대, 야전대포 20문
- 하노버군 사령관: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폰 슈페르켄
- 병력: 병력: 보병 17대대, 기병 18대대
3.2. 프랑스-작센 동맹군
- 프랑스군 사령관: 스탱빌 공작 자크 필립 드 슈아쇨
- 작센군 사령관: 솜즈-뷜덴펠스 백작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 병력: 보병 35개 대대, 기병 12개 대대
4. 전투 경과
2월 15일 새벽, 쥐부르크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선봉대는 탬즈브뤼크와 숀스테트 사이의 도로를 통해 진군하여 랑엔잘차 일대의 좌측 고지로 이동했다. 이때 이 고지에는 작센 보병대 1개 대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프란츠 크사버(일명 크사버 왕자)가 파견한 보병대가 이들을 지원했다. 오전 7시, 모든 프로이센군과 하노버군이 운스투르트 강둑으로 향했지만 해빙으로 인해 뮐루센에서 랑엔잘차까지 둑이 침수되어서 건너는 게 어려웠다. 이에 프로이센 기병대는 포병대가 랑엔잘차 마을을 포격하고 있는 동안 단독으로 멕슬벤 여울을 건넜다. 한편 슈페르켄 장군은 자신의 제1 전선에 배치된 8개 기병 대대를 탬스브뤼크에서 운스투르트 강을 건너게 했지만 하루 종일 물살이 심했기 때문에 건너지 못했다.
오전 7시 30분, 프린츠 조세프 보병대와 프린츠 막시밀리안 보병대는 랑엔잘차 근처 고지에 있는 솜즈 백작 휘하 작센 부대와 합류했다. 프로이센군은 이와 거의 동시에 나타나 4개 대열로 편성된 채 멕슬벤 고지에 도착한 뒤 2개 대열로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이후 후속부대가 하나둘씩 도착했지만 운스투르트 강을 건너는 데 애를 먹어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야 전 부대가 배치되었다. 오전 8시 15분, 프로이센 우익 부대가 수리를 완료한 막슬벤 다리를 건넜다. 여기에 프로이센 좌익 부대는 네겔스테트 근처에 배치되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멕슬벤 근처에 주둔한 스탱빌 공작의 프랑스군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오전 8시 45분, 적의 포격에 견디지 못한 스탱빌 공작 휘하의 프랑스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프로이센군은 즉시 그들을 추격하여 랑엔잘차로 향진했고, 연합군 기병대는 적 좌익을 향해 빠르게 추격했다. 이때 솜즈 백작은 고지를 벗어나 후퇴를 개시했다. 그들을 지원해야 할 나세우 후사르 부대의 지휘관 슈발리에 오르브 대위는 해빙과 계속된 비로 인해 후방에 있는 계곡으로 피신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군을 돕지 못했다. 작센 보병대는 적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무릎 높이의 물살을 무릅쓰고 개울을 건너야 했지만 포병대는 개울을 통과할 수 없어서 포대를 모조리 폐기처분해야 했다.
얼마 후, 프로이센 기병대가 랑엔잘차로 후퇴하고 있던 척 척탄병들을 후미와 전방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 작센 척탄병들은 이들의 공격을 처음에는 격퇴했지만 얼마 후 치텐 후사르 분견대가 후방에서 작센 척탄병들을 공격하고 뒤이어 프로이센군 기병대들이 에워싸자, 작센 척탄병들은 마침내 항복했다. 다만 작센 척탄병들이 적 기병대를 붙잡는 동안 작센군 선두부대는 협곡을 건너 프로이센군의 포위망에서 탈출해 적 기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잇는 숲으로 피신했다.
이후 연합군 기병대는 작센 군단의 양익에 배치된 프린츠 조세프 보병대와 프린츠 막시밀리안 보병대를 공격했다. 두 보병대는 곧 고립되었고 이들에게 소속된 많은 병사들이 적에게 투항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포위망은 완전하지 않아 적 후방에 단지 2개 분대만 배치되었고, 그들은 곧 아군을 구하고자 달려온 라 페론나예 드래곤 부대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작센군은 아이젠바흐에 도착해 전투대형을 형성했고 하노버군과 프로이센군은 더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본래의 진지로 돌아갔다. 이렇게 랑엔잘차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약 100명을 잃었고 작센군은 3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2,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렇게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프랑스군을 라인강 너머로 몰아내려 하지만 3월 21일 그륀베르크 전투에서 일격을 허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