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폰 슈페르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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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노버군 보병대 장성.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하노버군을 이끌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슈페르켄은 1698년 8월 28일 하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하르부르크 지사였고, 어머니는 베네치아군 야전 원수 마티아스 폰 슐렌부르크의 누이였다. 슈페르켄은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포함한 좋은 교육을 받았다. 1715년, 그는 고뱅 경이 지휘하는 보병 연대의 소위로 부임했고 1716년 하노버 근위대 중위로 전출되었다. 1729년엔 카엘만세그 백작 부인과 결혼했지만 2년 후인 1731년 아내가 아들을 낳던 도중에 사망하면서 홀아비가 되었다. 이후 1733년, 그는 인맥의 도움으로 중령 계급에 도달했고 이무렵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하노버리안 파견대에 배속되어 1734년과 1735년에 라인강 전역에 참여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슈페르켄은 대령으로서 1742년 가을 동안 브라반트로 진군하여 그곳에서 집결한 연합군에 합세해 자신만의 보병 연대를 지휘했다. 1743년 6월 27일, 그는 데팅겐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에 기여했고, 뒤이어 네덜란드로 파견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플랑드르 전선에 참여했다. 1745년 5월 1일, 그는 보병 연대를 이끌고 퐁트누아 전투에 참가했다가 탄환이 가슴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고, 이후 9개월 동안 요양 생활을 했다. 1746년 10월 11일, 그는 로쿠스 전투에 참가했다가 탄환이 목을 꿰뚫는 중상을 입었고 1747년 7월 2일 라우펠트 전투에 참가했으며 같은 해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1748년 전쟁이 종식된 후, 슈페르켄은 그의 연대와 함께 민덴으로 돌아가 수비에 전념했고 1754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2.3. 7년 전쟁
1756년, 슈페르켄은 프랑스의 잠재적인 침략으로부터 영국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영국으로 파견된 하노버리아 원정대와 동행했다. 그러다가 1757년 봄 프랑스가 하노버를 침입하자 본국으로 귀환했고 7월 26일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의 지휘하에 하스텐벡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브레멘 쪽으로 후퇴했다. 9월 9일 컴벌랜드 공작이 클로스터르제벤 협약을 체결해 연합군을 해산시키고 하노버가 전쟁에서 이탈하기로 약조함에 따라, 슈페르켄은 잠시 군직을 떠났다. 그러나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궤멸시킨 후, 조지 2세는 협약을 거부하고 연합군을 재결성하기로 했다. 11월 23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연합군의 새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슈페르켄은 여기에 가담하여 제2 군단의 지휘를 맡아 12월 중순 첼레 지역을 향한 공세를 이끌었다.
1758년 2월, 연합군이 독일 서부를 향한 겨울 공세를 개시했을 때, 슈페르켄은 우측 군단을 이끌어 베이저 강을 건넜다. 이후 페르디난트는 군대를 재편성해 슈페르켄에게 13개 보병대대와 16개 기병 대대로 구성된 좌측 군단을 맡겼다. 6월 8일, 페르디난트가 라인강을 도하했을 때, 슈페르켄은 그의 군단과 함께 리스에서 라인강을 도하했다. 이후 6월 23일, 그는 크레펠트 전투에서 좌익을 지휘했으나 프랑스군을 상대로 지나치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고도 프랑스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여름 동안 보병대 대장으로 진급했다.
1759년 초, 페르디난트는 연합군 주력군과 함께 헤센으로 진군하면서 슈페르켄에게 베스트팔렌을 공략하기 위한 별도의 군단을 맡겼다. 하지만 그는 임무를 채 완수하지 못한 채 베르겐 전투에서 패퇴한 본군과합세한 뒤 8월 1일 민덴 전투에 참가해 프랑스군 기병대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내 승리에 일조했다. 그 후 그는 헤센에서 연합군의 반격에 참여했고 겨울이 다가오자 그의 군단은 뮌스터의 겨울 숙영지로 데려갔다.
1760년, 슈페르켄은 2만 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베스트팔렌에서 연합군의 위치를 사수하고 베이저강 하류로부터 영국군과의 연락망을 보호하는 임무를 밭았다.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참모인 뷔로우 중령을 보내 슈페르켄을보좌하게 했다. 뷔로우는 페르디난트가 헤센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수비에 전념하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는 생제르망 후작 루이 끌로드 호베흐가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와 합류했을 때인 7월 13일 란다우 근처로 이동해 연합군 본대와 합세했고 7월 31일 바르부르크 전투에 참가해 아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페르디난트가 일부 군대와 함께 괴팅겐을 향해 진군했을 때, 슈페르켄은 디에멜 수비를 맡았고 1761년 초 솜머펠트 장군이 사망하자 그를 대신해 하노버 보병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1761년 초 헤센에서 그의 군단을 이끌고 동계 공세에 가담한 슈페르켄은 2월 15일 랑엔잘차 전투에 참가해 작센 분견대를 습격했다. 그러나 헤센에서의 연합군의 동계 공세가 실패하자, 슈페르켄은 디에멜과 베이저 강을 따라 형성된 방어선으로 복귀했다. 1761년 페르디난트가 베스트팔렌으로 진군했을 때 슈페르켄은 1만 3천 명의 군단을 이끌고 베이저 강 방어선을 지켰다. 9월 13일에서 14일 밤, 슈페르켄 밑에서 복무하고 있던 만스베르크 장군은 노이하우스 근처에서 프랑스군의 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페르디난트는 슈페르켄이 자신의 명령을 너무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바람에 노이하우스에서 고전하는 아군을 구원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슈페르켄은 이에 분노해 조지 2세에게 지휘관 직임을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페르디난트는 슈페르켐에게 최고의 경례를 전함으로써 분쟁을 해결했다.
1762년, 슈페르켄은 하노버 보병대를 이끌고 페르디난트의 지휘를 받으면서 프랑스군과 맞섰고 6월 24일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극비리에 적의 진영을 우회해 포위 섬멸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길을 잘못 가는 실책을 저지르는 바람에 프랑스군이 포위망이 형성되기 전에 도주하는 걸 허용하고 말았다. 이후 12월 24일 페르디난트가 프랑스군과 휴전협정을 체결한 뒤 지휘관 직에서 물러나자, 그는 임시로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몇달간 군대를 이끌었다.
2.4. 이후의 경력
전쟁이 끝난 후, 슈페르켄은 하노버군을 이끌고 하노버로 귀환했고 1764년 야전군 원수 및 모든 독일군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슈페르켄은 정규 하노버 군 규모를 평시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대신 민병대를 증강시켜 전력을 유지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그는 보병용 새 훈련서를 발간했으며 1766년 기병대를 위한 훈련서를 출판했고 포병 훈련에 특히 신경을 섰다. 그 후 십여 년간 하노버에서 군대 훈련을 담당하던 슈페르켄은 1776년 6월 12일 밤에서 13일 새벽 숨을 거두었다. 향년 7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