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
[image]
1. 개요
프로이센의 육군 원수이자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작. 7년 전쟁 시기 프랑스군의 침공으로부터 서부 독일을 사수한 인물이다.
2. 생애
2.1. 7년 전쟁 이전
페르디난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의 넷째 아들로 볼펜뷔텔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군 경력을 위해 군사 교육을 받았다. 1740년 6월 29일, 그는 처남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발탁된 신편 제39 보병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741년 4월 10일, 페르디난트는 몰비츠 전투에 참가해 프리드리히 대왕의 참모진으로 활동했다. 또한 1742년 5월 17일에는 코투지츠 전투에 참가했고 오스트리아와 평화협약이 체결된 뒤에는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았다.
1745년 5월 27일 소장으로 진급한 페르디난트는 그해 6월 4일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때 보병 여단을 지휘했으며 9월 30일 조르 전투 때 고지에 설치된 오스트리아군 대포 5문을 탈취하는 등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 드레스덴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된 뒤, 페르디난트는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함께 승전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 페르디난트는 대왕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되었으며 1750년 5월 19일에는 중장이 되었고 1752년에는 피츠 주지사가 되었으며, 1755년에는 마그데부르크 주지사, 1755년 6월 7일에는 브라운슈바이크 보병 대령이 되었다.
2.2. 7년 전쟁
1756년, 페르디난트는 7년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프로이센군의 작센 침공 작전에 가담해 드레스덴으로 진격한 프로이센 3개 군단 중 최우측 군단을 이끌었다. 이후 9월 13일 놀렌도르프 전투에서 프로이센 선봉대를 이끌고 작센군을 격퇴했으며, 10월 1일 로보지츠 전투에선 프로이센 우익 보병대를 지휘했다. 그 후 페르디난트는 1756-57년 겨울을 프리드리히 대왕과 함께 드레스덴에서 보내며 보헤미아를 향한 군사 작전을 준비했다.
1757년 봄 보헤미아 침공 작전에 참가한 페르디난트는 5월 6일 프라하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으며 이후 벌어진 프로이센군의 일련의 전투에 가담했지만 로스바흐 전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로스바흐 전투 직후인 그해 11월, 영국의 국왕이자 하노버 선제후인 조지 2세는 하노버가 전쟁에서 이탈하는 조건하에 체결된 클로스터르제벤 협약을 거부하고 이 협약이 체결된 계기가 된 하스텐벡 전투 패배를 초래한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를 경질하고 페르디난트를 연합군 지휘관으로 초빙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를 승낙했고, 페르디난트는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그의 처지는 매우 난감했다. 하노버군은 하스텐벡 전투 패배와 클로스터르제벤 협약 체결 후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고 연합군 간 이해관계가 상이한 데다 훈련 상태도 제각기 달랐고 지휘체계가 제대로 잡혀지지 않아서 이들을 제대로 통솔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이러한 난국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배운 '공세 위주 전략'에 따라 지휘관이 된 지 6주만에 공세를 개시해 연합군이 겨울에 공세를 펼칠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프랑스군이 점거했던 하노버 영토를 단숨에 탈환했다.
페르디난트는 1758년 3월 말까지 독일 서부 일대에서 겨울 공세를 감행해 프랑스군을 라인 강 너머로 몰아냈고, 이 전공으로 3월 25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6월 23일엔 크레펠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프랑스군은 이 패배로 인해 오스트리아군과 합세하는 계획을 중단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프랑스 국내로 쳐들어갔다가 잔더스하우젠 전투와 미어 전투 이후 프랑스군이 아군의 보급로를 노골적으로 노리는 것에 대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하노버로 귀환했다.
1759년 3월, 페르디난트는 공세를 재개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이번엔 대비가 되어 있었고 4월 13일 베르겐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했다. 페르디난트는 이 패배 이후 실의에 빠졌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격려가 담긴 편지를 받아본 후 전의를 끌어올려 8월 1일 민덴 전투에서 독일 서부 일대를 침공하던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프랑스군은 이 패배 이후 본국으로 퇴각해야 했고, 페르디난트는 조지 2세로부터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영국 의회로부터 "민덴 전투의 승리자"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1760년 7월 31일, 페르디난트는 바르부르크 전투에서 또다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지속된 공세에 연합군의 전력은 약화되었고, 페르디난트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독일 서부 일대를 사수하는 데 애를 먹었다. 급기야 1761년에는 6만 가량의 전력으로 10만이 넘는 프랑스군과 대치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적과 대치하다가 빌링하우젠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해 본국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1762년 6월 24일에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역시나 수적으로 우세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과감한 공세를 감행해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디난트의 이같은 활약상은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활약상에 주목하는 국내에서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페르디난트가 프랑스군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호된 고생을 하고 있던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의 서쪽에서의 공세에 직면해 패망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물론 페르디난트가 거둔 승전은 상당부분 프랑스군 수뇌부의 지리멸렬한 지휘력에 힘입었던 건 사실이지만, 프로이센의 승리에 그가 큰 기여를 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2.3. 7년 전쟁 이후
7년 전쟁이 종결된 후인 1763년 초, 페르디난트는 포츠담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했다. 그해 6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페르디난트와 함께 민덴, 바르부르크, 빌링하우젠 전장을 둘러보았다. 이후 페르디난트는 마그데부르크 주지사로 복직했다. 그러나 1766년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프로이센을 떠났고 그해 11월에 오스트리아군의 야전 지휘관으로 부임해 보헤미안 연대 대령이 되었다.
1767년 페르디난트는 베첼데 성의 영주가 되었다. 이후 1768년에 프리드리히 대왕과 페르디난트는 마침내 화해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1772년, 1777년, 1782년에 베첼데를 방문해 페르디난트와 7년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시기 미국 독립 전쟁을 치르고 있던 영국은 페르디난트를 영국군 지휘관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고 베첼데 성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792년 7월 3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아서 후계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