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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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Lorenzo di Pierfrancesco de' Medici)
'''출생'''
1463년 8월 4일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사망'''
1503년 5월 20일 (39세)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배우자'''
세미라미데 아피아노 (1482년 결혼)
'''자녀'''
피에르프란체스코, 아베라르도, 라우도미아, 지네브라, 빈첸초
'''아버지'''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
'''어머니'''
라우도미아 아차이올리
'''형제'''
조반니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상인.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육촌으로 선량하지만 자기 중심적이라 돈 문제에 대해서는 도덕적이지 못해 양심적이지 못하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산드로 보티첼리 등의 예술가들을 후원해 1468년에 보티첼리에게 카스텔로 별장의 장식을 의뢰해 비너스의 탄생, 프리마베라 등이 제작되었다. 또한 신곡의 제작에도 보티첼리에게 의뢰했다. 또한 미켈란젤로에게는 큐피드라는 나상을 의뢰했는데, 현재에는 남아있지 않다.
원래 로렌초의 넷째 딸인 루이자와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루이자가 일찍 죽어 결혼하지 못했다고 하며, 육촌인 로렌초의 독재 정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 로렌초의 사후에는 1494년 9월에 프랑스샤를 8세가 나폴리의 왕위를 요구하면서 이탈리아를 침공해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나자 로렌초의 아들 피에로 디 로렌초 메디치에게 반기를 들기로 한다. 동생인 조반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와 함께 프랑스군에게 동조한다는 서신을 보냈다가 발각되었으며, 메디치 별장에 구금되었다가 탈출해 비제타노에서 샤를 8세를 만나 피에로만 처치하면 피렌체인들이 프랑스의 나폴리 공격에 동의할 것이라 주장했다.
피렌체의 지지를 잃은 피에로가 항복한 후에 추방되어 실각하면서 프랑스군이 무혈입성하자 자신과 동생인 조반니 등이 속한 포폴라니라 부르는 인문 공화주의자들이 실권을 잡게 되었으며, 1497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에게 신대륙 항해를 떠나도록 명령하여 베스푸치의 이름이 이후 아메리카의 어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1]
사망할 때 사람들의 얘기로는 매독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가 있다.

[1] 아메리카 항목의 설명과 심각하게 모순되는 서술이므로 바로잡을 필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