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세타 이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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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첫 스캔들.
1923년 7월 24일, 유벤투스의 회장이 된 에도아르도 아녤리는 유벤투스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 레이더망에 들어온 선수가 바로 비르지니오 로세타였다.
프로 베르첼리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꽤 알아주던 강팀이었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베르첼리는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에 의해 운영되던 팀이었고 이는 곧 선수들에게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선수들의 불만이 커져가자 프로 베르첼리의 임원단은 선수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무상으로 구단을 위해 뛰기를 원치 않는 선수들과는 함께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비르지니오 로세타와 구스타보 게이는 프로 베르첼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유벤투스와 베르첼리는 2차례에 걸쳐 친선 경기를 가졌는데 당시 유벤투스의 관리자 중 한 명이었던 피에로 모나테리는 게이와 로세타가 출전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에 관해 베르첼리에 물어본 결과 그들은 다른 팀을 알아보는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고, 로세타를 데려오기로 결심하였다.
게이는 AC 밀란과 연결이 되었지만 당시의 규정이 발목을 잡았다. 그 규정의 내용은 팀을 옮기려면 새로운 팀의 연고지에서 거주해야 된다는 것. 당시 게이는 밀라노가 아닌 베르첼리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적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밀라노에서 2년간 거주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밀란 측과 북부 리그간의 합의가 이뤄져 게이는 밀란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결국 1923년 10월 24일, 게이가 밀란으로 이적해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졌고 당시 프로 베르첼리의 회장 보지노는 이에 격분했다.
1923년 당시 이탈리아 리그의 향방은 유벤투스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게 돌아갔다. 제노아 CFC와 정상의 자리를 놓고 북부 리그에서 순위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유벤투스는 북부 리그 측에 로세타의 이적에 대해 압력을 넣었다. 물론 로세타를 자기네 팀으로 데려오려고 하는 유벤투스의 의도가 담겨 있었고 결국 11월 7일, 로세타는 북부 리그 측에 프로 베르첼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유벤투스로 옮길 수 있는지를 문의하였다. 하지만 북부 리그 회장은 로세타의 이적은 게이의 사례와는 다르다고 판단하여 12월 1일까지 결정을 연기해버린다고 발표해버렸다. 이에 로세타는 FIGC에 자신의 이적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것으로 응수했는데 그에는 자신의 계약이 해지되면 자동으로 이적 시장에 진출하여 더 쉽게 유벤투스로 이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유벤투스는 11월 25일 로세타를 자신들의 선수로서 첫 선을 보였고, 모데나를 상대로 2대0의 승리를 이끌었다. 모데나는 북부 리그 측에 로세타의 출전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제노아도 유벤투스에 패배 이후 똑같은 이의제기를 했지만 결과는 같았고, 유벤투스는 로세타의 출전 여부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12월 15일, 이 문제는 연방 협의회에까지 넘어갔고 연방 협의회는 북부 리그의 결정을 뒤엎어버렸다. 로세타가 유벤투스 소속으로 뛴 경기의 승리를 무효화한 것. 이에 북부 리그의 회장 울리세 바루피니는 사임의 뜻을 밝혔지만 리그 측에서 사표 수리를 거부했고, 리그는 이에 관한 회의를 개최할 계획을 밝혔다. 그 와중에도 로세타는 유벤투스에서 시합을 계속 뛰었고, 1월 6일에서야 로세타의 리그 참가가 막히게 되었다. 유벤투스측은 즉각 항소했고 결국 FIGC에서의 투표로 넘어가게 되었다. 투표의 결과는 압도적으로 유벤투스의 편을 들어주었는데[3] 올림픽에서의 전력 약화 문제도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1924년 2월 9일, 토리노에서 300명의 대표단이 참석한 총회가 열렸고, FIGC의 부회장 페레티의 주재 아래 회의가 시작되었다. 볼로냐측의 사바티니라는 사람은 총회가 시작되자마자 300명의 사람을 모두 바꿔서 새로운 총회를 열어야 한다는 강력한 거부 의사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총회 참석 인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후에 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로세타의 사례는 게이의 사례와 크게 다를 게 없으며 게이를 만약에 계약을 해지시켜 이적 시장에 내놓는다면 로세타 역시 그렇게 처리되어야할 것이라 판단했다. 여기에서 프로 베르첼리의 회장 보지노는 게이와 로세타의 사건은 팀의 운영에 심각한 해를 끼쳤고, 무려 8명의 선수가 1년 안에 빠져나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게이의 사건은 북부 리그에, 로세타의 사건은 연방 의회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과 함께 로세타는 이적 시장에 올려놓는 식의 사건의 평화로운 해결을 빠른 템포로 주장했다. 하지만 보지노의 주장은 오히려 베르첼리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평화롭게 이 사태가 해결되기는 힘들다고 보았고 연방 협의회의 불법과 규칙 미준수로 인해 문제가 커졌다는 주장을 했다. 이런 식의 지리멸렬한 회의가 계속되자 결국 또 통과를 놓고 투표로 넘어갔고 이번에는 87표의 찬성, 188표의 반대, 10표의 기권으로 부결되었다. 이번에는 연방 협의회 측에서 전원 사표를 던지는 등 난리가 났다.
2월 17일, 로세타는 프로 베르첼리 선수가 맞으며 이적 시장에 있어야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따라서 남은 시즌에는 뛸 수 없으며 로세타가 유벤투스 소속으로 뛰었던 3게임은 유벤투스가 패배한 것으로 기록이 바뀌었다. 그러나 3승 1무의 전적을 기록했던 이후 4경기의 전적이 바뀌지는 않았는데 이는 로세타가 이적 시장으로 다시 쫓겨난 이후의 성적이라 신의 성실의 원칙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로세타는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FIGC에 의해 1924년 올림픽의 이탈리아 대표팀 멤버로 선발되었고, 베르첼리에서는 나왔지만 소속은 1년간 베르첼리로 되어있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
결국 유벤투스는 1924년 6월 28일, 수많은 불안 요소를 뛰어넘고 5만 리라의 이적료로 로세타를 팀에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구에린 스포르티보는 55만 리라는 받았어야했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1. 개요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첫 스캔들.
2. 사건[2]
2.1. 배경
1923년 7월 24일, 유벤투스의 회장이 된 에도아르도 아녤리는 유벤투스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 레이더망에 들어온 선수가 바로 비르지니오 로세타였다.
프로 베르첼리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꽤 알아주던 강팀이었지만 재정적인 문제로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베르첼리는 순수한 아마추어리즘에 의해 운영되던 팀이었고 이는 곧 선수들에게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선수들의 불만이 커져가자 프로 베르첼리의 임원단은 선수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은 무상으로 구단을 위해 뛰기를 원치 않는 선수들과는 함께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비르지니오 로세타와 구스타보 게이는 프로 베르첼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유벤투스와 베르첼리는 2차례에 걸쳐 친선 경기를 가졌는데 당시 유벤투스의 관리자 중 한 명이었던 피에로 모나테리는 게이와 로세타가 출전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에 관해 베르첼리에 물어본 결과 그들은 다른 팀을 알아보는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고, 로세타를 데려오기로 결심하였다.
게이는 AC 밀란과 연결이 되었지만 당시의 규정이 발목을 잡았다. 그 규정의 내용은 팀을 옮기려면 새로운 팀의 연고지에서 거주해야 된다는 것. 당시 게이는 밀라노가 아닌 베르첼리에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적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밀라노에서 2년간 거주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밀란 측과 북부 리그간의 합의가 이뤄져 게이는 밀란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결국 1923년 10월 24일, 게이가 밀란으로 이적해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졌고 당시 프로 베르첼리의 회장 보지노는 이에 격분했다.
2.2. 진행
1923년 당시 이탈리아 리그의 향방은 유벤투스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게 돌아갔다. 제노아 CFC와 정상의 자리를 놓고 북부 리그에서 순위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유벤투스는 북부 리그 측에 로세타의 이적에 대해 압력을 넣었다. 물론 로세타를 자기네 팀으로 데려오려고 하는 유벤투스의 의도가 담겨 있었고 결국 11월 7일, 로세타는 북부 리그 측에 프로 베르첼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유벤투스로 옮길 수 있는지를 문의하였다. 하지만 북부 리그 회장은 로세타의 이적은 게이의 사례와는 다르다고 판단하여 12월 1일까지 결정을 연기해버린다고 발표해버렸다. 이에 로세타는 FIGC에 자신의 이적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것으로 응수했는데 그에는 자신의 계약이 해지되면 자동으로 이적 시장에 진출하여 더 쉽게 유벤투스로 이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유벤투스는 11월 25일 로세타를 자신들의 선수로서 첫 선을 보였고, 모데나를 상대로 2대0의 승리를 이끌었다. 모데나는 북부 리그 측에 로세타의 출전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제노아도 유벤투스에 패배 이후 똑같은 이의제기를 했지만 결과는 같았고, 유벤투스는 로세타의 출전 여부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12월 15일, 이 문제는 연방 협의회에까지 넘어갔고 연방 협의회는 북부 리그의 결정을 뒤엎어버렸다. 로세타가 유벤투스 소속으로 뛴 경기의 승리를 무효화한 것. 이에 북부 리그의 회장 울리세 바루피니는 사임의 뜻을 밝혔지만 리그 측에서 사표 수리를 거부했고, 리그는 이에 관한 회의를 개최할 계획을 밝혔다. 그 와중에도 로세타는 유벤투스에서 시합을 계속 뛰었고, 1월 6일에서야 로세타의 리그 참가가 막히게 되었다. 유벤투스측은 즉각 항소했고 결국 FIGC에서의 투표로 넘어가게 되었다. 투표의 결과는 압도적으로 유벤투스의 편을 들어주었는데[3] 올림픽에서의 전력 약화 문제도 걸려있기 때문이었다.
1924년 2월 9일, 토리노에서 300명의 대표단이 참석한 총회가 열렸고, FIGC의 부회장 페레티의 주재 아래 회의가 시작되었다. 볼로냐측의 사바티니라는 사람은 총회가 시작되자마자 300명의 사람을 모두 바꿔서 새로운 총회를 열어야 한다는 강력한 거부 의사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총회 참석 인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후에 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로세타의 사례는 게이의 사례와 크게 다를 게 없으며 게이를 만약에 계약을 해지시켜 이적 시장에 내놓는다면 로세타 역시 그렇게 처리되어야할 것이라 판단했다. 여기에서 프로 베르첼리의 회장 보지노는 게이와 로세타의 사건은 팀의 운영에 심각한 해를 끼쳤고, 무려 8명의 선수가 1년 안에 빠져나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게이의 사건은 북부 리그에, 로세타의 사건은 연방 의회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과 함께 로세타는 이적 시장에 올려놓는 식의 사건의 평화로운 해결을 빠른 템포로 주장했다. 하지만 보지노의 주장은 오히려 베르첼리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평화롭게 이 사태가 해결되기는 힘들다고 보았고 연방 협의회의 불법과 규칙 미준수로 인해 문제가 커졌다는 주장을 했다. 이런 식의 지리멸렬한 회의가 계속되자 결국 또 통과를 놓고 투표로 넘어갔고 이번에는 87표의 찬성, 188표의 반대, 10표의 기권으로 부결되었다. 이번에는 연방 협의회 측에서 전원 사표를 던지는 등 난리가 났다.
3. 결과
2월 17일, 로세타는 프로 베르첼리 선수가 맞으며 이적 시장에 있어야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따라서 남은 시즌에는 뛸 수 없으며 로세타가 유벤투스 소속으로 뛰었던 3게임은 유벤투스가 패배한 것으로 기록이 바뀌었다. 그러나 3승 1무의 전적을 기록했던 이후 4경기의 전적이 바뀌지는 않았는데 이는 로세타가 이적 시장으로 다시 쫓겨난 이후의 성적이라 신의 성실의 원칙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로세타는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FIGC에 의해 1924년 올림픽의 이탈리아 대표팀 멤버로 선발되었고, 베르첼리에서는 나왔지만 소속은 1년간 베르첼리로 되어있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
결국 유벤투스는 1924년 6월 28일, 수많은 불안 요소를 뛰어넘고 5만 리라의 이적료로 로세타를 팀에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구에린 스포르티보는 55만 리라는 받았어야했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