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르지니오 로세타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47년부터 1948년까지 US 팔레르모 감독을 맡았다.
2. 생애
2.1. 선수 생활
2.1.1. 클럽
2.1.1.1. 프로 베르첼리
비르지니오 로세타는 베르첼리에서 태어났는데 5살 때부터 이미 공을 차고 놀았고, 10살 무렵에는 축구 클럽들이 탐을 내는 소년으로 자라있었다. 이 무렵 유벤투스와 대표팀에서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갈 움베르토 칼리가리스도 만났다. 나중에는 학업을 위해 밀라노로 이사했는데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소년팀에서 축구를 하기도 했다.
1919년에 고향팀인 프로 베르첼리에서 데뷔했다. 당시 로세타의 나이 17세. 로세타가 데뷔하던 당시 프로 베르첼리는 이탈리아 내에서도 실력을 인정받던 강팀이었고, 1920~21, 1921~22 시즌에 이탈리아 1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처음 데뷔할 때 로세타는 스트라이커로 뛰었고 25경기에 나서 7골을 넣기도 했다. 하지만 감독에 의해 로세타는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는데 정작 이것으로 재미를 본 팀은 프로 베르첼리가 아닌 유벤투스였다. 하지만 로세타는 유벤투스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로세타 이적 사건 참조.
2.1.1.2. 유벤투스
로세타는 이탈리아 축구 연맹은 물론 연방 협의회까지 참여한 엄청난 홍역 끝에 5만 리라의 이적료로 유벤투스로 이적할 수 있었다. 1926년에는 유벤투스 소속으로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1929년에는 유벤투스의 주장이 되어서 그를 중심으로 팀이 재편되었고 국가대표 골키퍼 잔피에로 콤비와 칼리가리스 등과 함께 유벤투스의 세리에 A 5연패를 차지한다. 이렇게 차지한 세리에 A 우승 횟수가 8회였으니 참으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이 아니라 할 수 없다.
2.1.2. 국가대표
프로 베르첼리에 데뷔하던 무렵, 로세타는 1920년 올림픽에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참가하여 이탈리아 대표팀 초기의 전설적인 수비수 렌초 데베키[1] 의 파트너가 되었다. 데뷔전의 상대는 노르웨이였고,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8세.
하지만 로세타가 잠시 부상으로 인해 대표팀에서 빠졌을 때 대표팀에 새로 들어온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에게 자리를 뺏기는 바람에 2년간 출전을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데베키가 은퇴하면서 칼리가리스가 데베키의 자리였던 레프트 풀백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2.1.2.1. 아쉬운 월드컵
하지만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을 잘 해갔지만 말년이 오스트리아에 의해 꼬여버렸다. 그래도 동료 칼리가리스보다는 사정이 나아서 1934년 월드컵의 개막전인 미국전에는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로세타 스스로 출전을 거부하였고 그가 없었지만 이탈리아는 결국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2.2. 은퇴 이후
1935년부터는 유벤투스에서 주장 자리를 내려놓고 선수 겸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그 시즌에 선수에서는 은퇴를 하고 1939년까지 유벤투스에서 감독 생활을 한 그는 감독으로는 큰 업적을 남기진 못했고 1975년에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하드워커적인 면이 있는 수비수로 수비 기술과 게임을 읽는 능력, 예측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최대 장점은 정확한 패스였고 강력한 한 방도 있는 선수였다.
4. 수상
4.1. 클럽
- 세리에 A 우승 8회: 1920-21, 1921-22(이상 프로 베르첼리), 1925-26, 1930-31, 1931-32, 1932-33, 1933-34, 1934-35(이상 유벤투스 FC)
4.2. 국가대표
4.3. 감독
[1] 렌초 데베키는 1894년생이니 대략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파울리노 알칸타라등과 비슷한 나이대의 선수이다. AC 밀란에서 데뷔했지만 제노아에서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보냈고, A매치에도 43경기에나 출전한 초기 이탈리아 대표팀의 간판 수비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