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 파리 올림픽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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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날짜: 1924년 5월 4일 ~ 1924년 7월 27일
개최장소: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8회 하계올림픽. 이것으로 파리는 최초로 두번의 올림픽을 연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세 번째 올림픽이 열리기까지는 무려 한 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2회 대회의 오명을 씻고 근대 올림픽 창설 30주년과 쿠베르탱의 명예로은 은퇴를 기리기 위해 의욕적으로 준비한 파리 대회는 사상 최대의 5대륙 44개국 2956명이 참여 전 종목에서 미국의 독주가 여전한 가운데 제반 경기규정의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대회이다.
2. 특징
올림픽 역사에 있어 뚜렷한 변화를 보여준 대회다.
북유럽 국가들이 끈질기게 주장했으나 '고대 올림픽에는 동계 스포츠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던 동계 올림픽이 '올림픽 동계 대회'라는 이름으로 승인을 얻은 것이다. 이 대회에서부터 하계올림픽과 동계올림픽이 분리되었다.
빙상 경기를 중심으로 여성 선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하지만 여성 참가를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교황은 이탈리아 선수단에 여성의 참가를 끝내 반대했다.
또한 30년 동안 헌신해온 쿠베르탱이 은퇴하게 되었다. 1925년 프라하 총회에서 쿠베르탱은 그토록 수호하고자 했던 '아마추어리즘'의 세부 조항을 완성한 후 벨기에의 앙리 드바이예라투르 백작(Henri, Count de Baillet-Latour, 1876~1942)에게 위원장직을 넘겨 주었다.
올림픽 엠블렘이 처음으로 도입된 올림픽이다. 이전까지는 글자만 붙여졌으나 전용 로고가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다.
비록 판자로 지은 조잡한 건물이었지만, 올림픽 이상의 실현을 위한 각국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선수촌이 사상 최초로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내었다. 1925년에 제정된 올림픽 헌장의 기초가 된 각종 원칙과 규정들이 출전 선수와 임원에게 배포되었으며 프랑스의 교육자 디통 신부에 의해 최초로 올림픽 표어인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가 이때 나왔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이 초대받지 못한 올림픽으로,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때가 되어서야 겨우 초대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사실 독일도 초대를 받기는 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완강히 거부하여 선수단이 프랑스에 입국하지 못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올림픽 때와 비슷하게 1937 파리 엑스포에서 독일 아돌프 히틀러의 방문을 거부했고, 당연히 히틀러는 분노했다.
스코틀랜드의 육상선수인 에릭 리델은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참가한 이유가 스포츠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신념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100m달리기에 출전하기로 했으나 100m 경기가 주일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대신 400m경기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다. 이것이 나중에 영화 불의 전차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 부분은 2017년 7월 3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추가된 종목은 없지만, 시범종목으로 카누라든가 스쿼시, 배구 등의 종목들이 추가되었다. 최초로 라디오 중계가 도입된 올림픽이기도 하다.
당시 미국 대표팀 럭비 선수들이 프랑스 럭비 선수들과 시합에서 승리했는데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던진 지팡이를 미국 선수가 맞았다. 프랑스 측이 때린 것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집단으로 패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미국팀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면서 빠져나왔고 럭비가 정식종목에서 제외되는 사건도 있었다.
5일간 4개의 금메달을 따낸 누르미의 질주 앞에 많은 선수들은 한숨을 쉬었다. 특히 그는 주종목도 아닌 1500m 중거리에 우승하자 마자 휴게실에서 한시간을 쉰뒤 다시 5000m결승에 나서 우승하는 괴력을 보이며 관중에게는 환호를 동료들에게는 절망을 유발한다. 이 5000m를 포함해 누르미와 겨룬 세개의 종목에서 모조리 패배해 은메달에 머문 빌레 리톨라는 누르미와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능히 역사적인 주자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다. 리톨라는 이 대회에서 예선과 결승 모두 39km를 달렸다. 하지만 그는 100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한 것과 3000m 장애물에서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 두개의 금메달을 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늘은 누르미를 낳고 리톨라를 낳았다.
나중에 1932년 할리우드 MGM이 만든 영화 <타잔>의 주인공으로 돈방석에 올라 앉게되는 조니 와이즈뮬러는 이대회에 출전해 올림픽 3연패를 노린 스웨덴의 듀크 카하나모크를 물리치고 59F의 기록으로 100m 자유형을 석권하고 400m와 800m 계영까지 휩쓸어 수영 사상 최초의 3관왕에 오른다. 파리 대회는 와이즈뮬러의 선풍과 최초로 만들어진 50m 풀과 다이빙대로 말미암아 수영이 올림픽 기본 종목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1908년 4회 런던대회 부터 채택된 축구에서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유럽 이외의 국가가 우승 했다.주인공은 최초로 참가한 남미의 우루과이이며 월등한 기량으로 우승 해 장차 세계축구가 유럽과 남미의 2대 산맥으로 펼쳐져 갈 것임을 예고했다. 우루과이의 우승은 또한 6년 뒤의 첫 월드컵 우승의 한 신호탄이 되었다.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흑인 금메달리스트가 나왔는데, 멀리뛰기에서 우승한 미국의 윌리엄 드하트 휴바드가 그 주인공이다.
이 대회의 주 경기장은 스타드 이브-뒤-마누아르(Stade Yves-du-Manoir)였다.[1]
오스만 제국을 해체시키고 1923년에 공화국을 선포한 터키가 최초로 이 대회부터 터키 공화국 국가대표팀으로 올림픽에 참가했다. 폴란드, 아일랜드, 우루과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도 처음 참가했으며, 중화민국/북양정부도 개막식에는 참석했으나 네 명의 선수(모두 테니스)가 정작 경기에는 불참하였다.
[1] 현재 파리 생제르맹 FC의 홈구장인 파르크 데 프랭스(Parc des Prince)는 주경기장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