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아 C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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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아 CFC'''
'''Genoa C. F. C. '''
'''정식명칭'''
Genoa Cricket and Football Club SpA
'''애칭'''
Rossoblu(적-청), Grifone(그리핀들)
'''창단년도'''
1893년 (클럽) 1897년 (축구단)
'''소속리그'''
이탈리아 세리에 A(Serie A)
'''연고지'''
제노바(Genova)
'''홈구장'''
스타디오 루이지 페라리스(Stadio Luigi Ferraris)
36,536명 수용 가능
'''라이벌'''
'''UC 삼프도리아 ''' - '''데르비 델라 란테르나'''
'''구단주'''
엔리코 프레치오시(Enrico Preziosi)
'''감독'''
다비데 발라르디니(Davide Ballardini)[1]
'''주장'''
도메니코 크리시토(Domenico Criscito)
'''공식 웹 사이트'''

'''우승 기록 '''
'''세리에 A'''
(9회)

1897-98, 1898-99, 1899-1900, 1901-02, 1902-03, 1903-04, 1914-15, 1922-23, 1923-24
'''코파 이탈리아'''
(1회)

1936-37
1. 개요
2. 1군 스쿼드


1. 개요


'''세리에 A 원년 우승팀이자 현재는 세리에 A의 생존왕'''
이탈리아 제노바에 연구를 둔 축구 클럽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구단이다. 유베밀란에 이어 4번째로 많은 세리에 우승을 차지한 명문 클럽. 한 번만 더 스쿠데토를 차지하면 엠블렘에 10회 우승을 상징하는 별을 달 수 있다.
세리에 A의 초대 시즌은 단 네팀이 참가하여 하루에 토너먼트를 몰아하는 방식인 등 틀이 잡히기 전 선두주자로서 이득을 톡톡히 누렸다고 볼 수 있다. 1920년대까지 전설적인 수비수 렌초 데베키 등을 앞세워 강자의 지위를 누리다가 그 후로는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는 별볼일 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다 2000년대 중엽 현 구단주 엔리코 프레치오시[2]가 인수한 후 공격적인 투자로 2007-08 시즌부터 세리에 A에 안착하였다.
경영진의 협상력이 대단해 선수를 곳곳에서 싸게 사와 터뜨리고 빅클럽에 팔아치우는 기술이 가히 신의 경지. 현금을 받기보다 유망주 공동소유를 최대한 활용하고 그것도 터뜨린다. 스카우팅 능력도 대단한 듯 프레치오시는 16세의 리오넬 메시를 데려올 기회가 있었지만 포기했다고 한다. 밀라노의 두 클럽과 특히 우애가 돈독해 그 팀 팬들은 제노아를 '형제의 클럽'이라 부른다. 다만 너무 선수를 갈아치우는 통에 조직력을 맞출 시간이 부족해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는다. 다만 AC 밀란과는 이탈리아와 거리가 먼 국내에서나 형제노아라고 불러주는 것이지, 실제 현지 사정은 한 밀라니스타가 제노아 팬을 살해함으로써 밀란이 제노아로 원정가는 순간 최루탄까지 터뜨리는 전쟁통이 되었다.[3]
이들의 이적 매커니즘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한 선수가 이적 직후 시즌을
1. 매우 잘 보냈다 → 관심있는 빅클럽에 현금 + 유망주를 받고 판다
2. 괜찮은 활약 → 한시즌 더 주전으로 써보고 1을 기대한다
3. 보통 → 다음시즌 영입된 기대주에 의해 벤치로 밀려난다
4. 생각보다 부진 → 유망주 영입에 교환카드로 제시된다
5. 많이 못했다 → 하위 클럽으로 팔리거나 임대된다
당장 승격 시즌과 비교하여 2011년 현재까지 남아있는 선수가 각주를 단 세명. 이들을 빼면 언제나 팔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면 된다. 항상 세리에 A의 이적시장에서 가장 많은 선수를 파고사는 클럽.
축구왕 슛돌이의 배경이 된 클럽으로 여러모로 일본과 관련이 깊다. 세리에 B이던 시절 일본의 축구스타 미우라 카즈요시를 영입하고 2009-10 시즌까지 아식스 유니폼을 입기도.
팀 명칭이 제노바가 아닌 제노아인데, 이것은 이탈리아 거주 잉글랜드인들의 클럽으로서 창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클럽 초창기 한동안은 이탈리아인들은 클럽에 가입할 수 없었다. 파시스트 정권 시기에는 한때 강제로 제노바로 개명당하기도 했으나 2차 대전 이후 다시 제노아로 복귀했다.
지안 피에로 가스페리니가 2006년에 감독을 맡은 뒤 2006-07 시즌 세리에 A 승격에 성공했고 2007-08 시즌 마르코 보리엘로가 세리에 득점 3위에 오르며 팀을 안정적으로 중위권으로 안착시켰다. 2008-09 시즌 이적생 티아고 모타디에고 밀리토의 활약으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노렸으나 아쉽게도 4위 ACF 피오렌티나에 상대전적에서 밀린 5위로 유로파리그로 갔다. 그리고 모타와 밀리토는 인테르행... 2009-10 시즌에는 에르난 크레스포로드리고 팔라시오가 왔으나 결국 앞서 떠난 두 선수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초반 3연승 이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며 유로파리그 조별예선 탈락[4], 리그는 9위로 유로파리그조차 가지 못했다.
2010-11 시즌을 앞두고 루카 토니, 미구엘 벨로수, 치코 플로레스, 카카베르 칼라제, 에두아르두 카르발류 등을 영입하며 의욕적인 이적시장을 보냈다. 하지만 의외로 조직력이 맞지 않는 보습을 보이며 중위권에서 맴돌다가 10위로 마쳤다. 팀을 오래 이끌었던 가스페리니 감독은 시즌 중 경질되고 다비데 발라르디니가 선임되기도 했다.
2011-12 시즌은 감독이 두 번 교체되는 진퉁 끝에 후반기 최악의 부진을 겪으며 최종전 전까지 잔류를 확정짓지 못하다가 최종전에서 팔레르모를 홈에서 2:0으로 꺾고 간신히 17위로 잔류했다. 23라운드에서 35라운드까지 13경기 연속 무승을 기록했으며 이 와중에 시에나와의 홈경기에서는 후반 5분까지 4:0으로 끌려가며 빡친 홈팬들의 난동으로 경기가 중단되어 홈경기 무관중 징계를 받기도 했다.
2012-13 시즌은 팔라시오와 벨로수가 떠나고 페스카라의 승격 주역 치로 임모빌레가 다소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이며 강등 위기를 겪었다. 이로 인해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데 카니오-델 네리-발라르디니로 시즌 중 감독을 두 번 교체했다. 다행히 로마에서 임대로 친정팀에 1시즌 복귀한 보리엘로가 12골을 득점해주며 두 시즌 연속 17위로 마감했다.
2013-14 시즌을 앞두고 제노아를 중상위권으로 이끌었던 지안 피에로 가스페리니 감독이 3시즌 만에 컴백했고 이번에는 강등걱정 없이 무난하게 14위로 마무리했다.
2014-15 시즌에는 유벤투스에 전반기 유일한 패배를 안기며 14라운드까지 3위에 오르는 등 선전했다. 그러나 DTD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며 잠시 중위권인 9위까지 내려가기도 했으나 반등에 성공하며 승점 59점으로 리그 6위를 기록해 유로파리그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지난 시즌 파르마 FC가 그랬던 것처럼 UEFA 라이센스를 획득하지 못해 7위인 하필이면 라이벌인 삼프도리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토트넘에서 데려온 이아고 팔케가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고 전반기에는 와싯의 양아들 알레산드로 마트리가 7골을[5], 후반기에는 사수올로에서 임대로 데려온 레오나르도 파볼레티[6]가 10경기 7골을 기록해주었다.
2015-16 시즌은 승점 46점, 11위로 마감했다.
2016-17 시즌은 승점 36점, 16위로 마감했다.
2017-18 시즌은 초반부터 2무 5패로 19위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반등에 성공하여 최종 12위를 기록하였다.
2018-19 시즌 초반에는 폴란드의 신성 크시슈토프 피옹테크를 영입하여 그의 활약으로 중상위권에 위치하였으나 겨울 이적시장에 AC 밀란에 팔았다. 최종 승점은 38점, 18위 엠폴리와 동일한 승점이었으나 득실차 단 한점 차이로 17위를 기록하며 가까스로 잔류를 성공했다.
2019-20 시즌에도 극적으로 17위 잔류를 성공한 뒤, 2020-21 시즌에는 강등권에 머물다가 치고 올라가 11위를 기록 중.

2. 1군 스쿼드




3. 영구결번


'''제노아 CFC 영구결번'''
No.6 잔루카 시뇨리니
No.12 서포터즈
제노아에서 8시즌 활약한 스위퍼 잔루카 시뇨리니의 번호인 6번과, 구단의 12번째 선수인 서포터즈를 위해 구단에서 12번의 영구결번 처리를 결정했다.
[1] 이 팀에서만 네번째 감독직을 맏고있다.[2] 유럽내에서 레고 다음가는 장난감 회사의 회장이다.[3] 이거 때문에 2007년 제노아의 세리에 A 승격이후 한동안 제노아 팬들의 산시로 원정이 금지된다. 제노아 팬들은 1995년때 밀라니스타에게 살해당한걸 잊지않고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고있었고 일부 밀라니스타들도 몇놈 더 칼빵놓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원정금지 덕택에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후 2007년 11월 11일, 가브리엘레 산드리 사건(라치오 서포터인 산드리라는 당시 26세 남성이 유벤투스 원정당시 라치오 서포터의 난동에 휩쓸리면서 -산드리는 라치오 울트라스 멤버긴 했지만 이때는 울트라스와는 따로 이동하고 있었다.었다.- 경찰의 발포에 총을 맞고 사망한다.)이 터지면서...[4] 발렌시아와 릴과 한 조가 되며 운이 없었다.[5] 후반기에는 유베로 갔다.[6] 시즌 후 완전영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