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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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us Munatius Plancus)
(기원전 87년 ~ 기원전 15년)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
플란쿠스의 초기 경력은 불분명하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의 이름이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이름)이라는 것 정도이다. 플란쿠스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참모로서 그를 따라 갈리아 전쟁과 카이사르의 내전에 참전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 플란쿠스는 갈리아 코마타[1] 의 총독으로 재직중이었으나 카이사르파와 암살자들 사이에서 줄을 타며 정세를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무티나에서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를 포위하자 키케로는 플란쿠스에게 브루투스 지원을 요구하지만 플란쿠스는 자신이 공화국 충성파임을 주장하면서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후방을 위협한다는 핑계를 대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관망했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투리누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자 플란쿠스는 공화파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안토니우스에게 합류하였고, 이로서 서방의 모든 군단을 삼두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기원전 42년에는 레피두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고, 기원전 40년에는 아시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기원전 36년에 안토니우스가 카르헤 전투의 설욕을 위해 파르티아를 침공했을 당시에는 시리아의 총독을 맡는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그러다가 안토니우스가 소득 없이 퇴각하자 곧 안토니우스를 떠나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도 중용되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제안한 사람이라고 한다. 기원전 22년에 그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와 함께 로마 역사상 최후의 감찰관에 임명되었지만 그들의 임기는 재앙 수준이었다고 한다. 파울루스가 능력 부족이었다면 플란쿠스는 소심해서 감찰관의 직무인 규탄과 처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의견이 자주 충돌했기에 임기가 대실패로 끝나고 명예가 떨어졌다고 한다. 기원전 15년에 생을 마감한다.
카이사르-공화파-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로 여러 번 줄을 바꿔 타면서도 매번 요직을 맡아 실익을 챙기고 생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대 로마의 인물들 중 매우 드물게 무덤이 현존하며 그 주인이 밝혀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Lucius Munatius Plancus)
(기원전 87년 ~ 기원전 15년)
1. 소개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
2. 생애
플란쿠스의 초기 경력은 불분명하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의 이름이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이름)이라는 것 정도이다. 플란쿠스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참모로서 그를 따라 갈리아 전쟁과 카이사르의 내전에 참전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 플란쿠스는 갈리아 코마타[1] 의 총독으로 재직중이었으나 카이사르파와 암살자들 사이에서 줄을 타며 정세를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무티나에서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를 포위하자 키케로는 플란쿠스에게 브루투스 지원을 요구하지만 플란쿠스는 자신이 공화국 충성파임을 주장하면서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후방을 위협한다는 핑계를 대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관망했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투리누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자 플란쿠스는 공화파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안토니우스에게 합류하였고, 이로서 서방의 모든 군단을 삼두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 대가로 기원전 42년에는 레피두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고, 기원전 40년에는 아시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기원전 36년에 안토니우스가 카르헤 전투의 설욕을 위해 파르티아를 침공했을 당시에는 시리아의 총독을 맡는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그러다가 안토니우스가 소득 없이 퇴각하자 곧 안토니우스를 떠나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도 중용되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제안한 사람이라고 한다. 기원전 22년에 그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와 함께 로마 역사상 최후의 감찰관에 임명되었지만 그들의 임기는 재앙 수준이었다고 한다. 파울루스가 능력 부족이었다면 플란쿠스는 소심해서 감찰관의 직무인 규탄과 처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의견이 자주 충돌했기에 임기가 대실패로 끝나고 명예가 떨어졌다고 한다. 기원전 15년에 생을 마감한다.
카이사르-공화파-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로 여러 번 줄을 바꿔 타면서도 매번 요직을 맡아 실익을 챙기고 생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대 로마의 인물들 중 매우 드물게 무덤이 현존하며 그 주인이 밝혀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1] 일명 장발의 갈리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끝내면서 설치된 임시 속주로 후에 아퀴타니아, 벨기카, 나르보넨시스로 분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