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Augustus | 아우구스투스
'''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Augustus of Prima Porta). 바티칸 미술관 소장.[1]
'''IMPERATOR CAESAR DIVI FILIVS AVGVSTVS'''[2]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Julio-Claudian Dynasty)
'''전임'''
율리우스 카이사르
'''후임'''
티베리우스
'''신상 정보'''
'''제호'''
Augustus
아우구스투스
'''휘'''
CAIVS OCTAVIVS THVRINVS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CAIVS IVLIVS CAESAR OCTAVIANVS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3]
'''출생'''
기원전 63년 9월 23일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
기원후 14년 8월 19일 (만 75세)
로마 제국 이탈리아 속주 놀라[4]
'''재위 기간'''
기원전 27년 1월 16일 ~ 기원후 14년 8월 19일(40년 7개월 3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1.1. 고향
2.1.2. 친부모와 카이사르와의 혈연
2.1.3. 어린 시절
2.2. 내전기
2.2.1.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3. 제2차 삼두정치와 원로원파 숙청
4. 황제
4.1. 아우구스투스, 프린켑스, 제정의 성립
4.2. 프린켑스 제정(원수정)의 속사정
4.3. 행정적 재편성, 대외 관계
4.3.1. 원로원 위원회 편성
4.3.2. 속주 통치 개편
4.3.3. 군 감축
4.3.4. 근위대 창설
4.3.5. 항구적인 해군 창설
4.3.6. 재정 및 세금 체제
4.3.7. 영토 확장
4.4. 화폐 개혁
4.5. 재위 후기
5. 단명한 후계자들
6. 평가
6.1. 공적인 부분
6.1.1. 제정 확립
6.2. 사적인 부분
7. 대중 문화에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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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armoream relinquo, quam latericiam accepi.

'''"나는 벽돌로 지어진 로마를 발견해 대리석의 로마로 남겨 두었다."'''[5]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정의 초대 황제(임페라토르)이자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The Julio-Claudian dynasty)"의 개창자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유럽 최초의 황제'''로 평가받는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종신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 · 후계자로 지명 후 개명한 정식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다.
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6]로, '3월 15일'(이두스 마르티아이) 이후 카이사르 유언장에 따라 그의 양자이자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연합해 제2차 삼두정치 시대를 열었고, 이후 최후의 경쟁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오랜 내전은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사실상 끝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때 로마 세계의 권력을 거머쥐었는데, 안토니우스와 연합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멸망시킨 뒤 이집트를 로마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공화정 로마는 사실상 제정으로 변하게 된다. 기원전 27년, 내전이 종결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면서 로마를 형식상 공화정 체제로 되돌리는 선언을 했고, 이에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부여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본명 대신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있던 시절, 전임자였던 카이사르처럼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보다는 자신을 단지 '''"제1의 시민(Princeps, 프린켑스)"'''[7]으로 자칭했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이며, 죽은 뒤, 원로원과 민회에 의해 신격화되었다. 이후 모든 로마 황제들은 황제명에 아우구스투스가 사용한 존칭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개인성씨 ‘카이사르’를 제호에 넣어 사용했다[8]. 또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의 "여섯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로 바꿔 불렀다.[9] 그의 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았다.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유능한 군사적 조력자였던 장군 아그리파도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2.1.1. 고향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 고향에 대해서는 그가 로마 출신이지만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로 가서 자랐다는 이야기와 본래 벨리트라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훗날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로부터 증조부가 빵집을 운영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또한 안토니우스처럼 옥타비아누스의 정적인 카시우스 파르멘시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빵집의 손자이며, 그의 할머니는 더러운 손으로 거칠고 추접스러운 밀가루를 반죽했다고 조롱했다.[10] #
그가 태어난 해는 정확하다.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이던 해인 기원전 63년 9월 23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어머니는 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11]와 율리아(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이)의 딸 아티아였다. 친모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딸이니,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조카 손자(종손)가 된다.
로마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벨리트라이'''는 조그마한 이탈리아 소도시다. 이곳은 훗날 아우구스투스의 회고록에 나와있듯이 그의 집안[12]이 대대로 살았던 동네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로마에서 '소의 머리'라 불리는 곳[13]이 태어난 장소라고 한다. 이때 그의 아버지였던 옥타비우스에게 점성가는 "아이를 들에 버려야 하오."라고 경고를 했다고 한다.[14] 그러나 옥타비우스는 이런 경고를 무시하고 아들을 키우기로 했다고 한다.
로마 시내가 북적거려 사람들로 넘쳐나자 그의 가족들은 어린 옥타비아누스를 데리고 로마를 떠나 아버지의 고향인 벨리트라이로 옮겼고, 어린 옥타비아누스는 거기서 자랐다.

2.1.2. 친부모와 카이사르와의 혈연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다. 정적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내전 당시, 옥타비아누스를 경멸조로 "그의 증조부는 투리움에서 밧줄을 만들어 팔던 해방 노예, 조부는 환전상, 아버지도 환전상."이라고 문구를 쓰고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지만 이는 로마 시대 관보를 통해 완벽한 거짓 선동임을 확인할 수 있다.[15]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친아버지에 대해 "내 친부는 벨리트라이 태생의 오래되고 부유한 기사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옥타비우스 가문에서 최초로 원로원에 진출했다."라고 기록했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부유한 기사 가문 태생이었지만,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의 후손들과 달리 본인 대에 와서야 뒤늦게 원로원에 편입된 신참자였다. 그는 법무관을 지낸 뒤 마케도니아 총독을 지냈으며, 스파르타쿠스의 옛 잔당들이 점령했던 투리움 지역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 총독을 지내면서도 성공적으로 통치를 했다. 속주민 통치에 대해 단호하고 공정하게 통치를 했고, 트라키아의 베시아인들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으며, 동맹 부족과의 외교 문제에 대해서도 잘 대처했다. 이 증거는 키케로가 자신의 동생 퀸투스의 무능함을 질책하면서 쓴 편지에 나타나있다. 편지에는 "제발 마케도니아 총독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동맹 부족들을 외교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배워라."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16] 하지만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집정관 직에 출마해보지도 못하고 40세가 되기 전에 로마 귀환 중 횡사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고 세 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앙카리아와의 사이에서 대 옥타비아를, 두 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아내 아티아와의 사이에서는 소 옥타비아와 아우구스투스를 얻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친모인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조카 딸이기도 하지만, 명문가인 발부스 가문 출신이다. 이 가문은 아리키아 출신이고, 많은 원로원을 배출한 집안인데 그녀의 아버지 발부스[17]는 법무관을 거쳐, 율리우스 법에 따라 캄파니아 토지를 평민들에게 분배해 주는 20인 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또한 아티아의 외가는 율리우스 씨족 중 하나인 카이사르 집안이며, 외삼촌이 바로 그 유명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카이사르는 외외종조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카이사르 암살 후 그의 유언에 의해 율리우스 씨족의 일원이 되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되었지만, 카이사르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보통 옥타비아누스라고 불렸다.[18]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격파하고 로마로 귀환한 이후에 그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뒤에는 그냥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렸다.[19]
성경에서는 '아구스도'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라틴어 탈격을 적용한 것이라고 한다.[20]

2.1.3. 어린 시절


친가 자체가 아버지 대에 와서야 원로원 의석을 갖게 된 것을 보면 그는 평민 출신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만큼이나 옥타비아누스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인 아티아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21]와 재혼하자 의부(義父)인 필리푸스 밑에서 양육되었다. 12세 때 외할머니이자 카이사르의 누이인 율리아의 장례식 때 추도 연설을 했다. 그 이후, 로마에서 성년으로 보는 16세가 되던 해에는 외외종조부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전쟁 개선식에서 나이가 어려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훈장을 받았다. 이어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우기 위해 히스파니아[22]로 떠날 때, 동행하여 원정에 참전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중병을 앓고 있다가 반절쯤 회복된 상태에서 소규모의 호위대만 이끌고 종조부 카이사르를 쫓아가 합류했는데, 카이사르는 이때 옥타비아누스가 보여준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이들의 원정길은 바다에서 배가 난파되어 적들이 둘러싸고 있는 육로를 따라가는 험한 코스였는데, 약골에다 병에서 완쾌되지 않은 소년이 올바른 성품에 말을 타고 적들과 대치하는 원정길에서 군말없이 견디고 놀라운 투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의 조카 손자를 히스파니아 속주를 탈환하고 다키아인에 맞서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일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일리리아 지방의 아폴로니아로 보냈다. 거기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 문학을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2.2. 내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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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옥타비아누스의 등장


옥타비아누스가 아폴로니아로 유학을 가기 전, 카이사르는 군사적인 재능이 결여된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재능 있는 18살의 동갑내기 군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23]를 붙여줘 그리스로 보냈다. 이들은 이곳에서 함께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카이사르가 암살되었고 그가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자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조직해뒀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귀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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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리온(Caesarion, 위)과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사진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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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암살
카이사르의 사망 당시 겨우 18세였던 옥타비아누스를 그가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사망 당시 (정치인으로서 젊은 나이인) 50대였던 카이사르의 나이를 감안해볼 때 카이사르가 은퇴를 염두해두고 후계자를 골랐다기보다는 10년~20년 앞을 내다 보고 후계자를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이 없었던[24] 카이사르는 유언장을 통해 누이의 손자인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을 해결해줬다. 평민 가문에서 로마에서 손꼽히는 귀족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고, 그에게 카이사르 가문의 상속자이자 아들로 삼은 것이다(즉 풀 네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동시에 그의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도록[25] 유언했다. 이를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파의 새로운 결집점이 되었고, 가장 충성심이 많은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지지를 단번에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26] 한편 카이사르는 사후 원로원에 의해 신으로 추존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하루 아침에 원로원 의원의 아들 내지 평민의 아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신의 아들이 되었다.[27]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은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공개되었는데, 내심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크게 실망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전쟁 당시 군단장으로 복무했고, 내전 때부터 독재관 시절까지 카이사르 다음의 2인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으며 18세의 옥타비아누스와는 쌓아온 커리어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당시의 안토니우스는 "웬 애송이가 끼어들어서 내 자리를 채가냐?"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드러나듯이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정치가로서는 근본적으로 재능의 격이 달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카이사르의 안목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비록 죽음을 막지는 못했지만, '''후계자 하나만큼은 정말 제대로 골랐다.'''[28]
당시 집정관이던 안토니우스는 혈연적으로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외삼촌이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기 때문이다. 하여튼 충격을 먹은 안토니우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카이사르의 유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주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을 등돌리게 했고, 로마 민중들의 비난을 받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는 이 행동으로 카이사르파의 지지를 상당 부분 잃어버리게 되었다. 한편 숨을 죽이고 있던 키케로와 원로원파도 18세 소년이 나타나자 그를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려 했다. 당시 안토니우스와 키케로의 관계는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보내어 키케로를 납치해와라든가, 키케로의 집을 불태우라고 명령하기까지 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만류하여 중지시켰다. 그런 증오 관계와 카이사르라는 상징의 지지 기반을 통한 정치적 야심 때문에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와 결합한다.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어 신랄한 비판과 훌륭한 라틴어 문법을 동원하며 '''당대 최고의 라틴어 교과서 정석'''답게 안토니우스 탄핵 연설을 했고,[29] 18세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답게 키케로를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 하며 존중을 했는데, 후에 키케로를 배신해버린다.[30] 옥타비아누스는 유산을 받아 양부 카이사르의 유언을 집행하게 된다. 한편 옥타비아누스가 군대를 이용해 압박해오자, 안토니우스는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갈리아 키살피나[31]로 도망친다.

3. 제2차 삼두정치와 원로원파 숙청


원로원은 집정관 히르티우스와 판사를 보내고, 거기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최고 지휘권'''을 주어[32]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패배했지만, 히르티우스와 판사는 전사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단독으로 군대의 최고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두 집정관이 하필 둘 다 전사하는 것은 불확실한데, 대표적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안티"'''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저서에서 "이 집정관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등에 칼맞아 죽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즉, 지휘권을 독점하기 위한 물밑 작업이라고 수에토니우스는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수에토니우스의 이러한 주장을[33] 현실성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는데, 타키투스를 비롯한 좀 제대로 된 로마 시대 역사가들은 이에 관해 전혀 기술하지 않아 교차 검증이 안되고 있다. 또, 판사와 히르티우스는 심지어 옥타비아누스가 귀국했을 당시 제일 먼저 그를 만나기 위해 뛰어간 카이사르의 절친들이자 동지들이었고,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방해하려고 할 때마다 조언을 해주었던 인물들이 바로 이들과 다른 카이사르의 측근들, 그리고 저 유명한 카이사르 군단의 군단장들과 백인대장들이었다. 그러한 조언자이자 자신의 정치적 후원자를 단순히 지휘권을 이유로 살해한다는 것은 카이사르에 심취해서 나이도 어린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는 카이사르파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어찌되었던 안토니우스가 패배하자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넘기려 했는데 당시 원로원에게 있어서 당면 과제는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파의 적에 가까웠는데도 원로원이 그를 지지했던 것은 순전히 그를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몰아내는 데 이용하기 위해서였고,[34] 키케로가 원래 지지하려 했던 것은 당연히 브루투스를 비롯한 반 카이사르파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군대 지휘권을 이용해 거꾸로 원로원을 압박해 집정관[35] 자리를 얻어낸다.
결정적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화해해 다시 원로원의 뒤통수를 친다.[36]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역시 카이사르파였고 히스파니아 총독이었던 레피두스와 연합해 제2차 삼두정치를 성립시킨다. 성립 즉시 '삼두'는 '''원로원파 척결''' 명령을 내린다.[37] 수백의 사람이 희생당했으며, 그중에는 '''키케로'''도 포함되어 있었다.[38]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명부를 작성하는 비밀 회의에서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의 숙청을 이틀간은 맹렬히 반대했으나, 꼭 죽여야 한다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의 주장에 밀려 3일째에 양보하고 말았다.[39] 특히 탄핵 연설을 쓴 키케로의 손은 따로 잘려 안토니우스의 분풀이 대상이 된다.[40]
2차 삼두정치를 시작한 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병력을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가 공화파였던 브루투스 일파회전을 치르게 된다. 첫 교전에서 옥타비아누스는 대패하였으나 두 번째 싸움에서 안토니우스가 대승하여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그 결과 브루투스는 자결을 하고 삼두정치 일파들은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 뒤 삼두정치파들은 영토를 나누어 가졌는데 안토니우스는 부유한 동방을 선택했고 필리피 이전부터 자신의 세력권이었던 갈리아에 대한 권리도 인정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로부터 히스파니아를 가져왔고 필리피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본국을 지켰던 레피두스는 북아프리카에 대한 권리만이 인정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시칠리아 섬은 폼페이우스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동방에 있는 틈에 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슬쩍 가져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영토를 휘하에 두었다.[41] 이탈리아는 명목상 공동 관리 구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실권을 잡았다. 하지만 코앞의 시칠리아를 장악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숙청을 피한 공화파, 안토니우스파 등이 옥타비아누스를 심하게 견제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옥타비아누스는 삼두정 성립에 큰 공을 세운 카이사르파 군단병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골치아픈 일도 떠맡았다. 이탈리아의 토지가 이미 소유주가 있어 옥타비아누스는 군단병의 불만을 감수하거나 로마 시민의 토지를 빼앗고 민간인의 불만을 사느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결국 후자를 선택하여 시민과 원로원의 여론이 급격히 악화된다.
이렇듯 옥타비아누스가 맡은 지역은 상황이 안 좋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안토니우스의 아내였던 풀비아가 로마에 남아 안토니우스의 추종자들의 리더 역할을 하며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였다. 사실상 공화파의 숨통을 끊은 주역도 안토니우스였으며, 반대로 옥타비아누스는 대패하는 등 아무런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42]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가 동방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내에서 여전히 강력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풀비아의 방해 공작을 참지 못했고, 결국 그는 정략 결혼했던 풀비아의 딸 클로디아와[43] 이혼한 뒤 풀비아가 로마의 지도자가 되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풀비아는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로마를 빠져나와 이탈리아 내의 안토니우스 추종자들과 연합해 옥타비아누스와 이탈리아 내에서 전쟁을 하려 들었다. 이때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의 동생이었던 집정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연합하여 대항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을 상대하면서 꽤 고전했지만[44] 시민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지지를 얻은 군단병들의 도움으로 풀비아와 루키우스를 이탈리아 북부 페루자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풀비아와 루키우스는 포위된 상황에서도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기다리며 저항했지만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미적대며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45]. 기원전 40년 초, 옥타비아누스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여 루키우스를 사면했지만 풀비아는 결국 그리스로 쫓겨난 뒤 의문사했다.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일시 귀국해 브린디시를 포위했지만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양측의 부하들이 싸우는 것을 거부, 결국 40년 9월 브린디시 협정을 통해 두 사람은 화해했다. 이 때 옥타비아누스의 갈리아 지배가 공인되었고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가 이끌던 6개 군단을 받아 북아프리카로 쫓겨났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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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투스 폼페이우스(Sextus Pompeius Magnus Pius, BCE 67년 – BCE 35년)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의 지배를 공고히 했으나 아직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시칠리아에서 건재한 상태였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제해권을 완전히 지배하여 이탈리아 내의 곡물 수송을 끊으며, 옥타비아누스를 위협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상대하기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세력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인정하고 대신 폼페이우스의 처제인 스크리보니아[46]와 결혼을 함으로써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크리보니아는 딸인 율리아를 낳았는데 율리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혈육이었으며 훗날 아그리파와 결혼해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대 아그리피나를 낳았고, 대 아그리피나게르마니쿠스의 아내가 되어 칼리굴라소 아그리피나를 낳았으며, 소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낳았다.
하지만 이러한 결혼은 단지 옥타비아누스가 폼페이우스에 대항할 세력을 모으기 위한 시간 벌기용이었으며 결국 어느 정도 힘이 생기자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폼페이우스와 전쟁을 선포한다. 전쟁 초기에는 폼페이우스의 우월한 해군력에 휘둘리며 옥타비아누스 본인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여기서 안토니우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는데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120척이나 되는 선단을 보내온 것이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에게 2만 명의 군단병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믿은 것이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이 종료되자 고작 약속한 병력의 10분의 1인 단 2천 명만 보냈다. 안토니우스의 지원 덕에 아그리파가 이끄는 옥타비아누스 해군은 나울로쿠스에서 폼페이우스를 격파하였고 이로써 시칠리아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이때 삼두정치의 한 명이었던 레피두스는 예전에 했던 약속대로 자신이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치하겠다고 하였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시칠리아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이때 레피두스도 상당한 양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고 폼페이우스와의 대결 때도 같이 싸웠다. 이에 대응하여 옥타비아누스는 대담하게도 '''레피두스의 캠프에 직접 들어가''' 장교와 병사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권유한다. 그러자 이들은 모두 레피두스를 배반하였으며, 이에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그가 맡았던 최고 제사장이라는 직위를 유지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그 길로 레피두스는 은퇴하였고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서쪽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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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한편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이 커질 때까지 방관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를 방해하는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를 물밑에서 지원하는 한편, 브루투스 일파가 장악했던 동방의 행정을 개편하고 마케도니아, 아시아, 비티니아, 시리아 등 핵심 속주를 제외한 영토들을 로마에 충성하는 현지 유력자들에게 다스리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으로 인해 많은 수의 동방 유력자들이 안토니우스의 클리엔테스가 되어 그의 편에 섰으며, 이후 아우구스투스도 안토니우스의 동방 정책을 계승했을 정도였다. 삼두에 반대하여 동방으로 망명한 로마 귀족들 중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제외한 전원을 사면하여 지지층을 늘리기도 했다. 그는 이집트에 머물며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로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옥타비아누스와 폼페이우스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기 위해 직접 이탈리아 본토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사실 동방을 맡기 전까진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은 안토니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안토니우스가 마음만 먹었으면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부하들 중 대부분은 카이사르파 출신이었기에 카이사르의 오른팔과 카이사르의 양자가 직접 적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오히려 폼페이우스와 공화파 잔당을 상대로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하길 원했다. 안토니우스가 폼페이우스와 손잡고 옥타비아누스를 처리하는 것은 그의 지지 기반 상당 부분을 이탈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2만의 군단병의 약속을 받았는데 곧 정치 9단 옥타비아누스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기원전 38년 삼두정이 5년 연장된 이후 안토니우스는 동방에서 파르티아 원정을 시작하였다. 옥타비아누스가 군단병을 보내주지 않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재력의 도움으로 거대한 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먼저 친파르티아파의 아르메니아 왕을 항복시킨 후 파르티아로 남하하였으나 파르티아군은 정면승부를 받아주지 않았고, 보급선이 길게 늘어난 로마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2개 군단을 전멸시켰다. 이 때 기병 전력을 맡은 아르메니아 왕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후퇴했다. 안토니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파르티아 요새의 포위를 시도했으나 파르티아 기병대에 시달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후퇴 과정에서도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 그 뒤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왕이 도망간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였고 그 결과 여기서 승리하게 된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의 안토니우스의 행각은 눈을 의심케 하였는데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현 이집트 소재)에서 로마식의 개선식을 거행한 것이었다. 개선식은 반드시 로마 시내에서 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이 개선식 자체가 로마에 거주하는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바치는 행사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다른 도시에서 거행하는 것은 다른 도시의 신들에게 영광을 바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는 로마의 수호신에 대한 배신 행위였으므로 이는 당시 다신교를 믿었던 로마 시민들에게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는 제멋대로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시리아의 영토를 떼어주고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서 낳은 자신의 쌍둥이에게 동방을 분할해 물려주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왕중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카이사르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왕중왕이며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적자이자 정당한 후계자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로마인들은 당연하게도 매우 분노하였으며 이에 대해 옥타비아누스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안토니우스를 맹비난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주장은 원로원의 인가를 받지 않았으므로 무효라고 선언하고 또한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였는데, 일방적으로 옥타비아와 이혼을 선언한다. 이에 자신의 혈육을 끔찍히 생각했던 옥타비아누스는 분노하여 불법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것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압수해서 공개하는 것이었다.[47] 이는 법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승부수였고, 적절한 수였다. 이 사건을 통해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에게 로마의 전통과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는 대신 안토니우스에게 그나마 남아있던 로마 시민과 지지자들의 지지를 단박에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공개된 유언장에서 '''자신이 죽거든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적혀 있었고, 이는 설마하던 로마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로마에서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사회적 매장을 확정짓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48]
하지만 그래도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그해의 집정관들과 원로원의 1/3은 옥타비아누스보다는 안토니우스가 믿을 만하다는 판단을 했는지 로마를 떠났고, 안토니우스가 머물던 동방으로 간다.[49]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향해 이탈리아를 상륙하려고 하였고, 이에 맞서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보내 이를 그리스에서 저지하려고 한다. 그 결과 이 둘은 아드리아 해의 그리스 서쪽에 있는 악티움에서 맞붙게 된다.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를 데리고 왔는데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안토니우스에게 그리스를 버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안토니우스의 병력이 그다지 열세가 아니었으므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주장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싸우지도 않았는데 본거지로 철수해버리는 것은 상대의 기세를 올려줄 뿐 아니라 그리스를 몽땅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모든 정황을 보건데 악티움에서 그대로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며 물량 싸움으로 나갔으면 풍부한 동방의 자원에 클레오파트라의 돈까지 쓸 수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유리했을 것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의 장군들은 모두 격렬하게 반대하였는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악티움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의 철수를 저지하려고 하였고 따라서 악티움 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전선에서 이탈하고 안토니우스도 군대를 그대로 뒤로 남긴 채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이탈함으로써 안토니우스의 해군은 괴멸된다.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의 결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그와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에서의 패배가 자신들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악티움 이후, 안토니우스는 육지에서 군대를 모아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면 된다라고 판단했고, 클레오파트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둘은 악티움의 싸움은 그냥 지라고 내버려두고 애초 생각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싸우겠다고 생각하고 몸만 빠져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파급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로마 세력권의 동방 도시들과 주둔 군대, 장교와 시민, 동맹국들은 전혀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이들은 눈치를 보며 두 세력이 붙는 것을 계속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대결은 자신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해야 할 척도였던 것이다. 특히 이들에겐 과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대결에서 얻은 교훈이 있어서 더욱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에, 안토니우스의 계획은 '''최악의 판단 미스'''였던 것이다.[50] 따라서 이들은 악티움의 결말을 듣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붙는다. 이는 지상전에서 승부를 결정짓겠다고 계획을 세운 안토니우스에게 치명타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부하들을 통제하려고 하였으나, 로마군이던 동맹군이던 상관없이 안토니우스를 계속 배신하고 탈영하였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안토니우스는 맨 처음 탈영병들과 배신자들을 강하게 처벌했으나, 이는 구멍 뚫린 물풍선에 송곳으로 더 큰 구멍을 내듯 더 큰 탈영과 배신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1년 만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 이후, 모아온 세력들 중 극소수의 병력만 제외하고 모든 기반을 잃어버린다.
한편 승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서둘지 않고 승자로서 행보를 가졌다. 그는 동방의 그리스에 머물며 헬레니즘 세계의 동향을 파악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자신에게 귀순한 도시의 사절들을 환대하고 그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얻기 위해 1년 가까이를 보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거의 모든 도시들을 수중에 넣은 옥타비아누스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가 이집트에 상륙했다. 그는 즉각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이자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도시''' '''알렉산드리아'''[51]를 점령한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이는 아주 중요한 행동이었다. 그는 동족인 로마인과 안토니우스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클레오파트라 7세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만행'''을 끝내고 지중해 세계의 평화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그때까지도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자해한다. 안토니우스에게 절망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유일한 동맹인 클레오파트라마저 죽게 된다면 안토니우스는 '''완벽하게 재기할 수 없다는 사망 통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렸고,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은 죽어가는 안토니우스를 데리고 오게 된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품에서 죽는다. 안토니우스마저 잃은 클레오파트라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안토니우스마저 죽은 마당에 "안토니우스를 유혹해서 로마를 내전에 몰아붙인 이집트"를 내세운 옥타비아누스의 다음 행보는 뻔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편지를 보내 자신의 왕조이자 마지막 남은 헬레니즘 세계의 열강을 살리기 위해 "카이사리온을 살려달라"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묵묵무답으로 일관한다. 옥타비아누스의 목표는 명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생존하기를 바랐는데, 그 이유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데려가 정치적인 상징성을 위해 개선식에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52] 이런 여론을 의식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있어서 클레오파트라는 반드시 로마로 동행해 개선식 때 로마 시민들에게 보여야 했던 카드이자 전리품인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리온은 살려둘 필요가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를 보내 카이사리온을 즉각 죽이도록 지시했다. 명령에는 "생포하지 마라. 그냥 죽여라."라고 내려져 있을 뿐이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카이사르의 아들은 오직 본인뿐'''이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살려둘 필요도 없었다.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가 된다면 로마인들이 끊임없이 걱정해온 밀 공급 문제는 단박에 해결될 최고의 카드였기 때문이다. 또한 카이사리온을 살려둬서 희망을 만들어 줄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카이사르의 양아들이 카이사르의 친아들을 죽이면서 카이사르의 생물학적 계통은 끊어지게 되었다.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철저히 감시케 했다. 자신의 최대 프로젝트를 장식할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생각은 달랐다. 로마와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개선식에 데리고 가서 로마 시민들에게 선보인 뒤에 연금을 줘서 살려준다고 해도, 이는 치욕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서의 체면도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시녀들을 시켜 몰래 바구니에 독사를 넣어오도록 했다. 그리고 독사가 든 바구니에 손을 집어 넣어 자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옥타비아누스는 매우 실망하여 자신의 시종으로 하여금 클레오파트라의 물린 곳에서 엄청나게 많은 독액을 빨아내게 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옥타비아누스에게는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문을 닫았고, 이집트에서 일어날 반란거리를 또 하나 제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대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같이 묻어준 것이다.

4. 황제



4.1. 아우구스투스, 프린켑스, 제정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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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 해전 승전 기념 주화. 악어는 이집트와 나일 강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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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석상들을 기초로 AI 딥러닝으로 복원한 아우구스투스 얼굴이다.출처
마침내 모든 정적을 물리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이자 '''진정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겐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내전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는 로마가 분열되지 않기 위해, 카이사르의 생각처럼 강력한 정치 권력이 있어야함을 깨닫고 있었다. 18세부터 정계에 등장했을 때부터 30세가 된 순간까지 충분히 경험을 한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사르처럼 노골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면서 군림할 수는 없었다. 공화정 지지 세력과 원로원이 힘에 눌리긴 했지만 언제라도 이들이 '제 2의 브루투스, 카시우스'가 안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큰 발표를 했다. "모든 것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넘기겠다!"라는 것이었다. 양부 카이사르처럼 할 줄 알았던 원로원은 당황했고 옥타비아누스의 발표에 진심으로 환호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35세의 최고 권력자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이를 해석하면 '존엄한 자', 혹은 실제로 북한에서 쓰이는 그 유명한 '최고 존엄이 된다. 그러나 정치 9단의 속셈은 달랐다. 그는 명예와 존경을 얻으면서도 알맹이들은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공화파와 안토니우스와의 내전때문에 가지고 있던 임시로 부여된 권한만 포기한다. 예를들어 삼두정치권과 임시로 군대의 총사령관직을 부여하는 특권과 세금을 부여할 권한등이 있었다. 문제는 처음부터 위헌적인 요소가 다분해서 암살을 피하고 원로원과 시민들을 속이고 제정으로 이행하려면 불필요한 비상설 특권을 포기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는 공화정의 뼈대를 유지하면서 나라를 '제1시민(프린켑스)'이자 '총사령관(임페라토르)'으로서 죽을 때까지 통치하는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을 실시했다.[53]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제정 로마 시대의 사실상 시작이었다.'''[54] 아우구스투스가 자기 이름 앞뒤에 덧붙이고 다녔던 이 타이틀들은 그대로 로마 황제의 칭호가 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후대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선례를 따라 앞뒤로 타이틀을 붙여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본명)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원래 성씨로 붙였는데, 결국 황제 타이틀이 된 케이스. 후일 이 정식 타이틀의 각 단어들, 즉 임페라토르와 카이사르는 그대로 황제라는 의미로 다른 유럽 언어들에 이식된다. 영어 단어 Emperor의 어원이 Imperator라는 것은 유명한 상식. 또한 독일의 카이저와 러시아의 차르도 카이사르에서 따온 단어다.
아우구스투스는 제정 실시를 기정 사실화하기 위해 악티움 해전이 끝나자마자 영묘 건설에 착수해 기원전 28년에 완성시켰다. 이것이 바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들이 매장된 아우구스투스 영묘이다. 이는 동시에 그가 안토니우스 유언장 공개 당시 약속한 "저는 죽어서 로마에 묻힐 겁니다."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원로원은 기꺼이 이를 환호했다.

4.2. 프린켑스 제정(원수정)의 속사정


정치 천재가 만든 독특한 로마 제정은 근대 유럽이나 페르시아, 중앙 아메리카, 동아시아의 황제들과는 그 양상이 약간 달랐다. 심지어 3세기 이후 등장한 로마 후기 제정과도 달랐다. 황제는 "프린켑스(제 1시민) 이자 임페라토르(최고 사령관)였고, 굳이 집정관에 오르지 않아도 호민관 특권인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본국 이탈리아에 주둔 중인 군대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직할 영지로 부유한 이집트 속주에 장관을 직접 임명할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공화정기의 권한들이였으며 다른 물적 힘은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곡물과 현지에서 거둬들여지는 막대한 세금,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유지되는 임페라토르로 상징되는 군 지휘권이었다.
사실상 아우구스투스가 제시한 프린켑스 제정이라는 것은 강력한 군사력을 사병화한 개인이 호민관 특권으로 '''공화정이라는 시스템 위에 올라탄''' 형세였다고 볼 수 있다. 5현제는 물론이거니와 군인 황제 시대까지도 황제에 도전할 만한 인재들은 모두 공화정의 시스템이었던 '''명예로운 경력'''[55]을 통해서 능력을 검증받은 이들이었다. 국가의 제도를 완전히 쇄신하였다고는 볼 수 없었고 아우구스투스의 말처럼 공화정이 복구되었다. 다만 그 공화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국가 행정의 생동성과 풍부한 인재들은 모두 황제의 통치권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56]
이처럼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는 공화정을 되살린다고 안심시킨 후, 뒤로는 야금야금 권력을 집어삼켜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연 '''능구렁이 같은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생전에 원로원과 타협하고 속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57]
한편 달력에는 카이사르의 이름인 율리우스가 7월을 뜻하는 'July'로, 아우구스투스가 8월을 뜻하는 'August'로써 등록되었다.

4.3. 행정적 재편성, 대외 관계



4.3.1. 원로원 위원회 편성


기원전 27년 ~ 18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도와 원로원 의사 일정을 준비할 '''사실상의 내각'''인 '''원로원 위원회'''를 조직했다. 종종 원로원 의원들에게 '''콘킬리움 프린키피스(프린켑스 자문 위원회)'''라고 불린 이 위원회는 15명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그해의 집정관 2명과 정무관들이 각각 파견한 대표와 제비 뽑기로 선출된 원로원 의원들이었고 6개월마다 인원을 교체케했다. 서기 13년, 아우구스투스는 위원회의 기능과 구성을 수정했다. 여기에는 황제의 가문 사람들인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들이 새로이 들어가고 기사 신분들이 보강되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결코 오늘날의 내각이 아니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여 활동했지만, 절대 제국의 각종 정책들을 황제와 토론하고 결정하지 않았다.[58]
하지만 여전히 실권은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 등 친한 원로원 의원들, 전문 입법가와 행정 각료, 황제 가문의 친구들과 일원들이 쥐고 있었다. 이들은 비공식적이고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며 정부의 정책, 원로원과 민회에 상정할 법률, 속주 총독 인선, 선거 때 아우구스투스 입맛에 맞는 후보자 천거 등을 결정하고 제국의 재정, 외교, 법, 종교, 행정을 결정했다.

4.3.2. 속주 통치 개편


당시 로마는 총독이 되려면 집정관이나 법무관이어야 했다. 즉 원로원만이 속주 총독이 될 수 있었다. 앞서 27년 공화정 복귀선언 당시에 아우구스투스가 손에 쥐고 놓지 않은 권한이 있는데 바로 총독의 임면권이다. 이건 속주에 주둔한 군대를 계속 지휘할 권한을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받을 때에 법적으로 부여받는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기사나 평민을 총독으로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행정을 개편하면서 로마의 속주는 크게 4부분으로 나뉘게 된다.
먼저, 본국인 이탈리아 지역과 두번째로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공석이된 파라오를 아우구스투스가 승계받으면서 편입된 이집트, 세번째로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아온 식민지인 원로원령 속주,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통치하는 황제령 속주가 있다.
원로원령 속주는 기존과 같은 1년짜리 임기의 법무관이나 집정관 출신 총독을 계속 원로원이 임명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민병대를 제외한 상설군단이 주둔하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 시칠리아사르데냐, 나르보네시스 속주[59], 베티카 속주[60], 마케도니아 속주[61], 아카이아 속주[62], 현재의 터키 서부지역인 아시아 속주, 비티니아 속주 , 지중해의 크레타, 키프로스 그리고 카레나이카 속주, 아프리카 속주, 누미디아 속주에 해당한다.
황제령 속주는 이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역이며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는 속주를 포함한다. 여기에는 1개 이상의 군단이나 적어도 1개 대대 이상이 주둔하는 속주들이다. 임기는 보통 5년이었지만 황제가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조금 특이한데 당시 임페라토르이자 프린캡스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의 파라오를 겸직하게 되었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계자가 공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맡은 것이다. 주로 군인들이 임명되었기에 아우구스투스에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군통수권)'''라는 호칭을 부여해서 황제의 군통수권을 합법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카이사르가 정복한 이후 자치령으로 남아있던 갈리아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63], 아퀴타니아 속주[64],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65], 벨키카 속주[66], 게르마니아 속주[67]로 나뉘었고 히스파니아는 당시에 가까운 히스파니아 먼 히스파니아로만 되어있었으나 이를 타라코넨시스 속주[68], 루시타니아 속주[69], 베티카 속주[70]로 개편했다.

4.3.3. 군 감축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이 끝난 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60개 군단, 50만 명 이상이던 병력을 25개 군단, 30만 명(군단병 15만 + 보조병 @)으로 감축했다. 또한 군인들의 복무 기간을 군단병 20년, 보조병 25년으로 설정하는 작업을 수행했다.[71][72] 또한 세계 최초로 군 복무를 마친 퇴역병들(VETERANUS, 베테랑)에게 로마 시민권 및 퇴직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73][74]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약 2세기 가량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에 사는 5,000만명의 사람들을 15만명의 병력으로 지킬 수 있었다. 또한 항구적인 직업 군인 제도가 마련되어 중앙에서는 확실한 계산 아래 제국의 국방과 군 행정 업무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4.3.4. 근위대 창설


아우구스투스는 본국 이탈리아에 합법적으로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를 만들어 주둔시켰다. 이들은 9개 보병대로 구성되었고 로마 시민들로만 충원되고 구성된 집단이었다. 이들은 즉시 황제의 명령을 직접 받고 수행하였으며 로마와 본국에서 근무하면서 많은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들의 복무 기간은 16년 밖에 안되었고, 375데나리우스의 연봉+ 보너스, 퇴직금 5천 데나리우스를 받았다. 또한 많은 수가 일반 군단의 백인대장 또는 대대장으로 진급했다. 원로원이 있는 로마에 자신의 사병을 만들어놓고 무언의 정치적 협박과 압력을 가한 것.

4.3.5. 항구적인 해군 창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대결과 악티움 해전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항구적인 해군 창설을 필요케 했다. 이제 지중해는 국제 해역이 아닌 "로마의 호수"였고, 이곳의 해적은 곡물 수송선과 무역선을 위협하는 존재로써 반드시 씨를 말려야 했다. 따라서 그는 1개의 주력 함대를 나폴리 만에 자리잡은 미세눔에 주둔시켜 서(西) 지중해를, 아드리아 해의 라벤나에 1개를 주둔시켜 동쪽의 안전을 지키게 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와 갈리아 속주의 포룸 율리(오늘날의 프랑스 프레쥐스)에 해군 기지를 추가로 건설했다. 더불어서 라인 강, 도나우 강, 갈리아 전역의 강들, 나일 강에 보조 소함대들을 만들어 순찰케 했다.

4.3.6. 재정 및 세금 체제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으로 원로원이 관장하는 '''아이라리움 사투르니'''의 기금이 고갈되고 세입이 탕진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 로마의 200,000명 가량의 빈민 계층에 대해 무상 곡물을 제공하고 공공 오락 자금, 도로 및 거리 건설, 행정, 국방 등에 들어갈 자금이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따라서 그는 더디고 신중하게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기원전 28년, 국고 관할권을 경험없는 콰이스토르들에게서 프라이토르(법무관) 경험자들로 바꿨다. 더해서 기원전 23년 이후에는 매년 추가 선출된 2명의 프라이토르들에게 국고 관할권을 이관케 해서 황제가 직접 국고를 장악하도록 만들었다. 더해서 각 속주에 '''피스쿠스(무화과 광주리)라고 불린 기금'''을 설치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군단 병사들의 월급을 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추가로 서기 6년에는 참전 전역병들의 연금 지급을 원활케 하기 위해 아이라리움 밀리타레라는 군대 기금을 만들어 국고 부담을 줄였고, 새로이 막대한 황제 개인 재산을 담당하는 기금을 두었다.
그리고 의외로 잘 안알려진 것 중에 독신세를 걷은 첫 황제였는데 저출산대책으로 제정된 주로 2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을 가진 여성에게만 부여되는 세금이었다. 만 50세미만의 부유층 여성에게 수입의 1/100 즉 1%를 직접세로 부과하였다.

4.3.7. 영토 확장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는 비교적 내정 위주의 황제인 이미지가 있으나 아우구스투스 역시 실제로는 매우 공격적인 확장 위주의 정책을 폈다.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황제라는 입지의 불안정한 점 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래서 그는 로마 시민들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군사적 업적을 보여주길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군 사령관(임페라토르)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로마는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선전하였다. 팍스 로마나라는 단어도 이때 만들어진다. 그는 그러한 선전을 함과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의 사후 공석이 된 이집트의 넓은 영토를 모두 로마에 편입시켰고, 그 후 유다 왕국이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일대와 소아시아의 구 폰토스 영토, 스페인 북부의 미점령지, 그리고 알프스 지역을 모두 점령, 로마의 행정구역으로 편성한다. 그 작업이 끝난 뒤 그는 곧바로 파르티아와 조약을 맺어 시리아 일대의 국경을 확정 짓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리리아와 도나우 강 사이에서 살고 있던 달마티아 부족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는데, 그들을 공격한 이유는 그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도나우 강을 로마의 북동쪽 국경선으로 확정짓기 위해서였다. 로마인들의 침입에 달마티아 족은 강경하게 반발하였으나 아우구스투스는 단호하게 공격하였고 마침내 이들을 격파한다. 이후 그 일대를 두개의 속주로 개편, 로마의 영토에 편입시킨다.
그 지역을 정복하는 동안 게르마니아의 정복 사업 역시 추진한다. 이는 라인 강 건너에 있는 엘베 강을 로마의 국경선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존의 라인 강은 도나우 강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았다. 라인 강과 도나우 강 방벽은 길이도 길지만 두 강의 사이에 위치한 알프스로 인해 하나의 통합된 국경선으로서의 관리가 불가능하였다. 만일 엘베 강과 도나우 강으로 국경을 확정짓는다면 국경선의 길이는 수백킬로미터 가까이 좁혀질 것이며, 두 강 사이에는 알프스와 같은 지형적 장애물이 없으므로 편리한 교통을 통한 보급로의 확보로 인해 한 명의 총사령관이 하나의 국경처럼 통합 관리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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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엘베 강과 라인 강 사이의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그의 일족들인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를 파견하였는데, 이는 그 지역을 정복하는 것이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드루수스는 로마 선단을 이끌고 북해를 통과해 북상, 지금의 덴마크 일대인 엘베 강 근처에 내려 공격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낙마 사고로 죽게 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상당한 영토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미 노년이 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후계 구도를 구축하기 위해 그를 로마로 소환한다. 그 뒤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잠적해버리는 등의 소동을 겪게 되고 아우구스투스는 그 와중 우선은 점령한 지역의 안정화를 시도해보려 하였다.
지역 안정화에 적합한 인재로는 유능한 행정가가 적임으로 보였고,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이에 재능을 보인 바루스를 총독으로 부임시켰는데 이는 인사상의 큰 실책이었다. 바루스는 그 지역의 통치를 맡아 동방에서 하던 대로 했으나 이러한 로마식 행정은 게르만족에게는 압제로 받아들여졌기에 헤르만(아르미니우스)이 대반란을 일으켰고 바루스는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매복해있던 게르만 군대에게 공격을 받아 3개 군단과 함께 운명을 달리하였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라인 강 동쪽의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비보를 접하고는 밤에 혼자 집에 틀어박혀서 "바루스! 내 3개군단을 돌려줘!"하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3개 군단은 대군이라 보기는 어려운 병력으로 해당 군단이 소멸했다고 점령지를 모두 상실하게 된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 군대에는 바루스를 비롯해 그 지역을 통치하는 관료들이 대거 동원되었는데 군대가 소멸하면서 점령지의 통치 집단이 증발해 버렸다. 둘째로 해당 전과에 고무된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봉기하여 군단 기지를 공격하였고, 3개 군단이 소멸된 직후의 공백으로 인해 그 기지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여 그곳이 모두 점령당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효율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점령지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주둔시켜 놓은 것에 기인한다. 셋째로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지나친 팽창 정책으로 인해 병력들이 지리적으로 멀리 배치된 데에 최소한으로 감축한 군단 수, 또한 임페리움을 황제가 독점하는 새로운 관료 시스템으로 인해 3개 군단의 소멸을 메울 수 있는 병력이 즉시 동원될 수가 없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그 지역은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아우구스투스는 심하게 자책하긴 하였으나 엘베 - 도나우 리메스의 구축은 반드시 해야한다고 보았는지 복귀한 티베리우스를 다시 그 지역에 파견하여 재정복을 꾀한다. 그러나 고령이었던 아우구스투스는 곧 노환으로 인해 죽게 되고 뒤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그의 후임인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에게 그 지역의 정복을 맡긴다. 게르마니쿠스는 군사적 재능을 보여 연승을 거두나 티베리우스는 그를 로마로 소환하고 병력을 모두 철수시킴으로써 엘베 강을 국경선으로 삼고자 한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을 백지화한다.
결국 엘베 강과 도나우 강에 이르는 리메스의 구축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역대 황제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황제였으며, 그가 확립한 시리아와 도나우 강의 국경선은 수백년에 걸쳐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4.4. 화폐 개혁


기원전 23년경부터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잠깐 시행하다가 암살로 중단된 화폐제도를 개혁한다. 카이사르가 생전에 기념용으로 소량만 발행하던 금화인 아우레우스를 정식 화폐로 인정하며 화폐제도를 손을 보려했으나 암살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아우구스투스가 정식적으로 화폐제도를 대대적으로 손을 보게 된다. 이제 초강대국인 로마의 화폐는 지금의 미국 달러와 같은 기축통화가 되었으나 문제는 아직 가치가 안정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화폐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정하게 된다.
  • 금화 : 아우레우스 무게 : 7.80g, 재질 : 100%, 가치 : 25 데나리우스, 퀴리날리우스 무게 : 3.89g, 재질 : 100%, 가치 : 1/2 아우레우스
  • 은화 : 데나리우스 무게 : 3.90g, 재질 : 100%, 가치 : 100 세스테르티우스, 퀴리날리우스 무게 : 1.95g, 재질 : 100%, 가치 : 1/2 데나리우스
  • 황동화 : 세스테르티우스 무게 : 27g, 재질 : 황동, 가치 : 1/4 데나리우스, 디폰디우스 무게 : 13.65g, 재질 : 황동, 가치 : 2아시스
  • 동화 : 아시스 무게 : 10.90g, 재질 : 구리 100%, 가치 : 1/4 세스테르티우스, 콰드란스 무게 : 3.24g, 재질 : 구리 100%, 가치 : 1/4 아이스 '
이 화폐체계는 거의 300여년간 로마의 화폐시스템의 근간이 된다.

4.5. 재위 후기


서기 14년 8월 19일,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유람을 떠났던 늙은 황제는 놀라에서 갑자기 용태가 악화되었다. 임종 직전에 티베리우스를 불러 은밀한 대화를 나눈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품에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75] 향년 76세. 그가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Acta est fabula, plaudite(이야기는 끝났다. 박수를 쳐라).

그러나 이 에피소드의 근거는 수에토니우스인데, 정작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이 유언을 그리스어로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의 유언은 위 라틴어 번역보다 훨씬 더 길었다. 우선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인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배역을 잘 연기한 것 같더냐?"라고 묻고는 그리스어로 이렇게 말했다.

εἰ δὲ πᾶν ἔχει καλῶς, τῷ παιθνίῳ, δότε κρότον, καὶ πάντες ὑμεῖς μετὰ χαρᾶς κτυπήσατε(그렇다면 기쁜 목소리와 박수로 이 배우에게 찬사를 보내다오).

혹은, 야사에 따르면 죽기 직전까지도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나 주변 사람들에게 '''"게르마니아에서의 일은 내 탓이 아니지?"'''라고 물으면서 그 일을 끝까지 후회했다고...
로마로 운구된 황제의 유해는 화장되어 자신이 지은 아우구스투스 영묘 중앙에 안장되었다.

5. 단명한 후계자들


거의 반세기 동안 성공적으로 재위기간을 지켰고, 성공했음에도 긴 재위기간을 가져간 휼륭한 통치자들이 대개 그렇듯 후계자들이 단명했다. 특히, 그의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정한 친혈육과 양자까지 모조리 요절하면서 끝내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물려줬다고 평가받는다. 또 그가 살아생전 정한 후계자들은 양자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약속받은 두 혈육까지 티베리우스 대에 모두 요절하는 비극을 경험했다[76]. 그래서 티베리우스 사후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 남성 중 모든 음모 끝에 생존한 사람은 겨우 3명이었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외종조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양자가 됨으로써, 외할머니 가문인 율리우스 씨족 일원이자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됐다. 하지만 4번의 결혼 생활 중 친아들은 얻지 못했고, 딸도 단 한 명뿐이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결혼과 입양을 통해 이런 약점을 보완코자 했다. 따라서 아내의 본가, 누나의 시댁, 두 양자의 본가인 클라우디우스 가문들과의 결합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가문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즉 카이사르 가문을 완성했다. 아우구스투스 일가라고도 불린 이 가문은 마르켈루스와 네로 가문이라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 유력 가문들, 10대부터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친구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그 혈육이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결합으로 완성된 황실을 형성해 직계를 이었는데, 그 직계는 브리타니쿠스네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로마인들에게 아우구스투스 부부의 직계손이라고 불린 이는 브리타니쿠스가 마지막이었다.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조카, 사위) : 기원전 23년 말 전염병에 걸려 요절
  • 대 드루수스(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누나의 사위)[77] : 기원전 9년 게르마니아 전쟁 개선식을 앞두고 낙마사고 후유증으로 요절[78]
  • 루키우스 카이사르(외손자, 양자): 서기 2년 마실리아에서 질병으로 요절
  • 티베리우스(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장남,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황제(서기14년 ~ 37년)
  •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외손자, 양자) :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파양된 이후 유배지에서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 살해
  • 게르마니쿠스(누나의 외손자, 드루수스의 아들) : 19년 안티오키아에서 요절
  •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양자 티베리우스의 아들, 누나의 외손녀사위, 아내의 친손자) : 23년 자택에서 갑자기 요절[79]

6. 평가




6.1. 공적인 부분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황제이면서 오랫동안 재위한 몇 안되는 황제였으며 뛰어난 정치력으로 유능한 내정을 펼쳤고, 이 덕분에 로마의 제정은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시민들의 질서와 생활 환경을 정리하고 내실을 튼튼히 하여 로마 제국을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장수 국가로 만든 원동력을 키웠고 그가 통치하는 기간엔 물레방아를 발명한 비트루비우스, 위대한 역사가인 리비우스와 라틴 문학에 중대한 진보를 가져온 베르길리우스[80]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도 황제가 되기 이전의 달마티아 원정부터 시작해 칸타브리아 전쟁, 도나우 및 유프라테스 방어선 확립, 파르티아와의 평화 등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면서도 제국의 안전을 보장하였으며, 보조군 제도 등 원수정 시기 로마군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의 치세는 매우 안정적이었으나, 말년의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군단 3개 말아먹은 것이 흠으로 평가받는다. 정규 군단병에 기타 보조 병력까지 합치면 2만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실 카이사르로부터 군사적인 재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은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사망한 이후 카이사르의 판단을 거스르고 게르만 정벌에 나선 것에서 비극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실수가 곧 제국의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6.1.1. 제정 확립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확립된 것이 궁극적으로 로마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는지 아닌지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가령 로마의 공화정은 당시 넓은 땅을 통치하는데 뚜렷한 한계를 보였다. 예를 들어 당시 로마를 통치하였던 원로원은 자신들의 이익 수호를 최우선시하여 국익에 반하는 정책을 여러 차례 가결하였고 또한 과거 효과적으로 민심을 반영했던 시민 집회들은 몇몇 정치가들에게 의해 통제되어 이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가령 로마의 공화정 말기엔 로마의 영토가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민 집회는 로마 공화국의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당시 평민 집회는 많아봐야 1만~2만 정도만 참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고작 이 정도의 숫자로 지중해를 거의 다 통치할 수 있는 거대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마리우스나 폼페이우스의 경우 자신의 퇴역병들 몇천명을 로마로 부르는 것만으로 평민 집회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공화정으로는 거대 로마 국가를 통치하는데의 한계가 분명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잡은 뒤 제정으로 탈바꿈시킨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제정은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로마인들이 을 바라지 않는 정치적 상황을 우회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투스는 기존 로마 공화정에 존재하던 합법적인 직책 및 제도를 조합하여 로마 "황제"라는 지위를 만들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종신) 호민관 특권, 군 통수권자(임페라토르)의 권위와 권한, 원로원의 1인자(프린켑스), 대제사장(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지위. 그리고 비공식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권위, 마지막으로 황제가 가지는 막대한 양의 부(富).[81]
그러나 제1인자 혹은 아우구스투스란 직책은 당시로서는 편법에 가까웠다. 황제의 지위는 이러한 여러가지 "특권"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취약점이 많았다.[82] 최고 지휘관이었던 황제가 그저 세습에 의해 권력을 손에 넣었다곤 하나 사실 세습이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원로원과 군대의 지지가 있어야 했고, 또 최고 지휘관이 반드시 국가 원수여야만 한다는 관념만큼은 여전히 로마에서 불식되기 어려웠다. 황제로서의 직위가 이런 편법에 기대야했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정체가 어느 일면은 도시국가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시민들이기도 한 군인들에게 옹립되면 누구든 '임페라토르'가 될 수 있었다. "무장을 한 자유민"인 로마 병사에게 자신의 지휘관 = 임페라토르를 선출하는 것은 그들 고유의 권리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권위가 흔들리면 곧 각지에서 임페라토르가 선출되어 잦은 내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들의 목표는 "로마"가 되었는데, 그것은 원로원의 추인을 받아 호민관 특권을 얻어 자신의 지위를 정치적으로 반석에 올리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린켑스"로서 시민들에게 존경과 지지를 받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황제들은 빵과 서커스를 풀어서 서민들에게 선심을 베풀었다. 결국 제정 체계는 처음부터 내재적인 문제를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제위가 세습됨으로써 엘리트 간의 경쟁엔 분명한 한계선이 그어졌는데 그 이유는 공화정 시절의 명예로운 경력은[83] 명백히 로마 정부의 전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황제의 출현으로 인해 황제의 정부가 새로 생김으로써 원로원의 정부 내에서만 권한을 행사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는 계속 공화정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로마의 정부를 그대로 남겨둔 채 황제 고유의 정부를 따로 출현시킨다. 따라서 집정관, 안찰관, 재무관 등 과거 로마 정부의 관리직은 예전처럼 시민에 의해 선출되나 따로 황제 정부를 구성하고 이 자리엔 자신의 측근들을 임용했다. 중근세 일본에서 교토에 덴노의 정부를 남겨두고 쇼군의 정부를 따로 꾸린 것과 유사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명예로운 경력은 말 그대로 명예직처럼 돼버리고 점점 황제 정부로 힘이 쏠리게 된다. 하지만 황제 정부의 경우 명예로운 경력을 통해 시민들에게 인정받아야 되는 것이 아닌 황제가 알아서 임명하는 것이었으므로 황제와의 연줄이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황제와 혈연이나 인맥을 통해 인연이 닿아야 했고 능력 혹은 군사적 업적으로 시민들에게 어필하여 출세하는[84] 상황은 불가능하였다.[85] 황제와 특권이 중복되는 호민관은 아예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황제는 원로원 계급으로 구성된 엘리트의 견제를 위해 기사 계급[86]이나 지방, 속주 출신 유력자들을 중용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중용되는 기사 계급들은 모두 황제와 친한 사람들이었고, 점점 줄어드는 공화정 시대의 명문 귀족들을 대신해 원로원에 입성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지방 유력자 정도인 플라비우스 왕조나 속주 출신의 트라야누스 이후 황제들이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우구스투스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들은 제위 계승권자로 여겨져 숙청되기도 했고, 때문에 더욱 정치적 움직임을 제한당하게 되었다[87].
제정으로 바뀌고 나서 단 200년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200년은 꽤 긴 세월이고, 그 세월 동안 로마는 외부 문제가 거의 없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리고 이후 쇠퇴기에 들어섰어도 제국이 공화정으로 회귀하지 않은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 체제는 사실 적어도 카이사르가 살해당한 시기에서는 일종의 금권 정치적 요소가 너무 강하게 부각된 과두정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정 시대의 몇 가지 요소의 미비로 나중 시대의 쇠퇴가 시작되기는 어렵다. 카라칼라, 도미티아누스를 죽인 후 원로원의 공화정 회복 시도를 근위대가 무산시킨 것, 베스파시아누스가 법적으로 황제정을 공식화함과 동시에 공화정을 부인한 것,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동양의 그것과 동일한 전제정 체제를 수립한 것은 당시 로마에 어울리는 정치 체제는 공화정보다는 제정이라는 인식이 강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지식인들은 공화정 로마가 제정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공화정은 카이사르 이전 시기부터 제국을 통치하기엔 여러모로 부적합한 모순을 노출하긴 하였으나 인류 역사에서 몇 가지 획기적인 장치를 발명한 정치 제도인 것이 분명하며, 이는 로마 공화정을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법들이 훗날 근대 법 체계의 기본이 된 것에서 입증된다. 때문에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는 노골적으로 공화정을 옹호하고 제정을 비하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들의 서술에서 나오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거리낌 없이 모략을 사용하고 공화정 인사들이 피해자인 것으로 서술된다.
당시의 로마 공화정을 현대의 공화정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로마의 영토가 넓어지고 수많은 속주가 생기는 상황에서는 로마 공화정이 분명히 한계를 드러냈고 개혁이 확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제시한 원수정의 대안이 다소 불안정했던 것도 사실이며, 이런 지속적인 불안감 때문에 제정이 확립된지 오랜 시간이 흐른 머나먼 뒷날에도 기존의 공화정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없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로마식 공화정에 대한 이 환상은 현대 사회에서도 없어진 게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보편 제국"이라 불렸던 고대 로마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 공화정 로마의 행정적 한계는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제정 로마 때 늘어난 체제 불안만을 강조하는 사관을 통해 현대 보수주의 정당들의 가장 큰 이론적 기반들 중 하나가 형성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견인이었던 카이사르도 당시 제시되어온 대중주의적 정책을 일부 수용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얻었고 이것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정치적 기반이 되어줬기 때문에 대중주의에 비판적인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이론적으로 좋은 예시가 된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원로원의 전횡으로 인해 그라쿠스 형제가 암살당했을 때에 이미 그 정치적, 현실적인 정당성을 거의 상실했다.[88]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제정은 분명 문제점이 있었으나 그게 공화정을 무너뜨려서 그렇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아우구스투스가 주목받을 때에는 이미 공화정은 실제 사례처럼 서서히 다른 제도가 되던지 그냥 완전히 망해서 오랜 기간 동안 금기시되던지 둘 중 하나로 갈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바로 오랫동안 개혁을 거부한 부패한 공화주의자들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카이사르와 그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젊은 시절부터 마지막까지 민중파였다. 원수정을 확립한 사람들이지만 정책적으로는 언제나 귀족 vs 민중파의 로마사에서 민중파의 입장이었고 지금으로 따진다면 우파보다는 좌파적인, 그라쿠스 형제를 이은 정책들을 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원수정의 특성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에 신경을 많이 썼고, 실제로 그의 치세에 백성들의 삶의 질이 크게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아우구스투스가 말년에 나폴리를 들렀을 때 황제를 알아본 어부들이 "우리가 이렇게 잘 사는 것은 모두 당신 덕분이다"라는 식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6.2. 사적인 부분


아우구스투스는 밀짚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이었다. 수에토니우스가 한 묘사를 보면, 아우구스투스는 보기 드물게 잘생겼는데 반짝이는 맑은 눈, 금발 곱슬머리, 불규칙적인 치아, 갈매기 눈썹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키가 작아 키높이 신발로 단점을 숨겼다고 한다. 하지만 당대의 기록 담당자였던 마리우스는 그의 키를 지금의 기준으로 약 170cm ~ 175cm 정도로 기록하였는데 당시 로마인의 평균 키를 생각하면 결코 작은 키가 아니다. 수에토니우스가 후대의 사람인데다가 그의 저서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점, 마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해방 노예 출신이라는 점을 참고하여 각자가 판단하면 되겠다. 그리스 조각가들도 그의 외모를 보고 예찬했다고 한다.
다만 그는 이성적인 능력은 무척 뛰어났지만, 양부 카이사르와 달리 상대방의 감정을 전혀 배려할 줄 몰랐다. 즉, 신체적인 매력은 카이사르 이상이었을지 몰라도, 인간적인 매력과 호소력은 카이사르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전체적으로 그는 감정이 없는 차가운 괴물에 가까웠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정이 없었고,[89] 가족조차도 마치 그의 신민들을 다루는 것처럼 '''통치'''했다.[90] 그는 그의 주변 사람들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정략과 논리에 의해서만 일을 처리했다. 주위 사람들의 사생활은 무시되었고, 주변 사람들의 거의 모든 이혼과 혼인은 아우구스투스의 뜻대로 처리되었다.
그가 생전에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혈연으로 탄생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는 혈연 관계에 대한 집착과 철저하게 효율만을 중시한 아우구스투스의 행동 및 아우구스투스의 장수로 인한 부작용으로 끊임없이 잡음이 일었다. 먼저 정치적 판단 아래 복잡하게 꼬인 혈연 관계 탓에 후계 문제가 복잡해졌다. 생전에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가 41년이나 제위에 머무르는 바람에 아그리파처럼 아우구스투스보다 먼저 죽어버리거나, 문제를 일으켜 객사(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해 버렸다.[91] 또 리비아가 첫 결혼에서 얻은 양아들 중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과 주변에게 ‘두 손자[92]와 함께 공식 후계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 ‘내 후계자이다’라고 솔직한 의중을 말해왔던 조카 딸의 남편 대 드루수스(네로 드루수스)[93][94][95]처럼 불의의 사고로 요절해버렸다.
이런 까닭에 그의 제위를 이어받은 것은 그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결혼으로 혈육을 낳아주지 않았던 양아들 티베리우스였다. 하지만 그의 ‘일방적이고 지나치게 차가우며 상대의 감정을 고려치 않은 행동들’은 자신과 여러모로 비슷한 성향을 가진 양아들 티베리우스조차도 지치게 만들었다. 따라서 유아기 때부터 그의 손에서 40여 년간 아들로 자라온 티베리우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시적으로 은퇴하기도 했다.[96]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혈통이 아니란 이유로 죽은 이후 유언장에서도 진정한 후계자로 여기기보다는 한낱 대행 내지 징검다리로서 자신의 혈육들이 자리에 오를 때까지 기반을 잡고 자리에 앉아있는 존재로 치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은 뒤 로마 시민들에게 공개된 유언장에다가 대놓고 '불행하게 두 손자가 일찍 죽어서 계승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이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공식 후계자이자 아들’ 티베리우스는 처음엔 제위를 거부했다. 9살 때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집에서 아들로 자랐고 젊은 시절 험한 게르마니아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자신의 능력을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게 바친 티베리우스가 단지 양부의 외손자라는 타이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가 일찍 죽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보다 못한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즉, 제위를 물려받을 무렵 모든 것을 갖춘 율리우스 가문의 공식 후계자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사람의 모든 것이 유언장 문구 하나로 우습게 된 것이다.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고, 생전에 논리와 판단대로 제단하고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꼬아 놓은 정략혼들은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이 단명할 단초를 제공했다.[97]
위에서 언급했듯 혈육에 지나치게 집착한 그는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두 의붓 아들과 친누나 옥타비아의 자녀들, 외동딸 율리아를 ‘문자 그대로’ 정략 결혼과 후계자 양성의 도구로 이용했다.[98] 특히 유일한 혈육 율리아는 말 그대로 후계자 양성 도구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99] 그녀는 부모가 일찍 이혼해 어머니 손에서 크다가 이후 관심도 크게 주지 않던 아버지에 의해 처음 고종 사촌인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누나 옥타비아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에 시집가서 낳은 아들)에게 시집갔다. 하지만 남편이 일찍 요절하자 그녀는 다시 아버지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아버지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오른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결혼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사위 아그리파가 죽자 율리아를 아내 리비아의 친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티베리우스의 가정 생활까지 파괴해버렸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멀쩡히 아그라파의 전처 소생인 빕사니아와 결혼해 아들 소 드루수스를 낳고 금슬도 좋았는데, 아그리파 죽음 후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판단대로’ 율리아의 재혼 상대로 정해져 최대 피해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100] 그렇다고 그 결혼이 행복했으면 다행인데, 아무리 티베리우스가 노력해도 율리아의 난잡한 사생활과 두 사람의 성격차,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죽음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끝내 파탄나고 만다. 이후 지쳐버린 티베리우스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로도스 섬으로 떠나버렸고, 율리아는 신전에서 공개 섹스를 하는 등 문란한 생활을 일삼다가 아버지가 만든 간통죄로 고발당해 유배당하게 되고, 티베리우스 황제 때 죽게 된다(티베리우스가 굶겨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 이 유배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의 아들[101])와 율리아의 간통이 표면적 이유였고, 율리우스 안토니우스는 사형당했다. 이에 대해서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와 율리아가 반역을 도모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거나 어린 동생들을 황제로 삼고 섭정을 하려고 했으며, 딸을 죽일 수 없었던(부정에서든, 율리아의 자손들의 제위 계승을 위해서든) 아우구스투스가 간통죄를 적용해 처벌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102]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와 같은 생동감 넘치고 열정적인 서술에 비해서[103] 아우구스투스는 매우 무미건조하게 그의 업적을 나열한 <업적록>만을 남겼다.
전반적으로 절제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소 식사량이 매우 적었다고 한다. 음식이 생각날 때마다 먹었지만, 빵, 대추야자 약간, 물 정도를 조금씩 먹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며,[104] 아마 이 자주 먹는 소식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77세까지 살았는데,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꽤나 장수한 것.[105] 그리고 궁전 역시 카이사르가 머물던 최고 제사장 저택으로 검소했다.[106]
아우구스투스의 친구 중에 푸블리우스 베디우스 폴리오(Publius Vedius Pollio, ? ~ 15년)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 노예를 곰치[107]에게 먹이로 주는 자였다. 그리고 가이우스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날 아우구스투스가 베디우스 폴리오의 집에 방문하였을 때 한 노예가 비싼 유리잔을 깨트렸고, 평소대로 곰치의 밥으로 던져질 위기에 처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우구스투스는 그 집안의 모든 유리잔을 가져오게 해서 자기 손으로 모두 깨트렸다고 한다.[108] 이에 아우구스투스의 의중을 알아챈 폴리오는 사색이 되었고, 노예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고 한다(출처: Publius Vedius Pollio, Naturalis Historia, 9장 29절).
이 외에도 자신의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의 아이들 중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죽이지 않고 신분을 유지해주고 돌봐준 점 등을 보면, 정치적으로 냉정하긴 해도 사적인 인품이 잔인무도한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전남편 소생이자 양아들이었던 티베리우스나 드루수스도 비록 정략 결혼에 이용하긴 했어도 오히려 친딸인 율리아보다 더 친자식처럼 총애했다. 다만 문란한 사생활로 온갖 문제를 일으킨 친딸 율리아에 비해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는 유능하고 총명했기에 그 역시 특유의 정치적 냉정함으로 쓸모에 따라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의외의 모습으로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가 도박이었다. 당시 로마는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열리는 12월에만 도박을 허용해주는 등 도박에 부정적인 국가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기간에 상관없이 도박을 매우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인이 양자 티베리우스에게 쓴 편지에서도 확인되는데 주로 주사위나 홀짝 도박을 즐겨했다고 쓰고 있다. 돈을 따려고 도박을 했다기 보다는 정치적인 면모도 강해서 일부러 돈을 잃어주거나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109]
태양력에서 2월이 짧아진 이유가 아우구스투스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로마 달력에서도 현재 1월과 2월에 해당하는 Ianuarius와 Februarius는 각각 29일과 28일이었단걸 모른 오해다.[110]

7. 대중 문화에서


  • 미국 드라마인 '로마(ROME)'에서 주요 등장인물로 묘사된다. 어린 나이에 권모술수를 부릴 줄 알고 타고난 두뇌와 비범한 명석함의 소유자이다. 그 덕분에 작중에서 이루어지는 계략이나 정치인들의 속셈을 해설하는 역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결벽증과 지나친 냉혹함 같은 인성적 결함도 지니고 있다.[111]
유년 시절이 매우 불행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늘 어머니인 아티아에게 모지리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도 그래서 가족에 대한 정이 없고, 어머니에 대한 원한이 깊다. 단, 이는 실제 역사와는 판이한 드라마의 창작이다. 사료에서 아티아는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 카이사르의 어머니인 아우렐리아와 함께 로마사의 대표적인 현모양처로 기록되어 있다. 드라마에서 악독했던 아티아가 더 악독하고 냉혈한이 된 옥타비아누스의 황제 개선식에서 기죽은 표정을 짓는 마지막화의 모습이 백미. 훌륭한 로마인이길 원하는 어머니의 등쌀에 떠밀려서 본인이 제일 하기 싫다는 검술훈련을 하고[112] 강제로 전쟁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시절에도 확실히 비범한 모습도 보이는데 티투스 풀로가 루키우스 보레누스의 아내 니오베의 불륜 사실을 조사할 때에 동행하여 불륜 상대남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귀신처럼 꿰뚫어보았고 고문 지시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린다.[113] 이 사실은 자신들이 묻은 것으로 루키우스가 이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하게 하라는 등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줬다. 또 똑같이 어머니 때문에 늘상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누나 옥타비아의 멘토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냥 이 때는 똑똑하지만 덜 성숙하고 인간적인 어린 시절의 옥타비아누스를 표현했다고 보면 되겠다. 시즌 1에서 배우는 마스터 앤드 커맨더에서 영국 해병 생도 블랭크니 역을 맡은 맥스 퍼킨스. 더빙판 성우는 김영선.
시즌 2에서는 카이사르가 죽으면서 자신을 후계자로 세운다는 유언장을 확인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아티아 때문에 바지사장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다 결국 어머니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모욕하고 한바탕 싸움질을 벌인 끝에[114] 집을 뛰쳐나온다. 그리고선 돌아올 땐 강력한 군대와 유능한 친구들을 끌고,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냉혈한에 새디즘, 마조히즘[115]까지 있는 카리스마형 캐릭터로 재등장. 이 캐릭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꾸짖을 때와 클레오파트라 대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116] 여기서 이 인간이 얼마나 냉철한 인간인지 보여준다. 특히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망 뒤에 클레오파트라와 대면 때 클레오파트라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결국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키고 강요하는 모습은 일부 시청자들에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117]
다만 시즌 2라고 마냥 유능하게만 나온건 아니고 오히려 실제 역사보다 너프된 편이다. 키케로에게서 집정관 자리를 얻었지만 섣불리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 가진 병력이 적어 위기를 맞았고, 삼두정치 때는 전쟁을 노리고 노골적으로 곡물 수출을 거부하는 안토니우스 때문에 또 한번 위기를 맞기도 했다. 둘다 결정적인 한 방으로 위기를 타개하는데는 성공하지만,[118] 스스로의 힘이라기보다는 조력자의 역할이 컸음을 생각하면 실제 역사만큼의 유능함은 보여주지 못한 셈.
시즌 2에서 배우는 사이먼 우즈. 더빙판 성우는 김일.
  •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3번째 아내이자 초대 황후인 리비아에게 쉽게 조종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리비아가 자신을 독살할 것을 두려워해 음식을 거절하고 직접 딴 무화과로 연명하나 리비아가 그 무화과에 독을 발라두어 결국 독살당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 2003년에 제작된, 로마사를 주제로 한 임페리움 시리즈의 <임페리움: 아우구스투스>에서 주인공으로 나온다. 젊은 날의 활약(?)을 회상하는 노년의 아우구스투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보통의 매체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는 아우구스투스의 불행한 가족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즉 로마를 위해서 딸의 인생을 망칠 수 밖에 없는[119] 아버지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최종 보스는 아우구스투스를 암살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율리우스 안토니우스. 마지막에 임종 장면에서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후계자 티베리우스[120]와 신하들 사이에서 유배지를 탈출한 율리아가 나타나서 화해를 하는 장면은 명장면. 피터 오툴이 아우구스투스 역을 맡았다.
  • 샌드맨 시리즈에서는 말년의 모습으로 등장. 16세 때, 종조부에게 강간당한 뒤에 후계자로 낙점되었고 로마의 미래를 위한 모든 예언과 계획들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서 로마의 지배자가 된 후에는 다른 계획을 품게 되고, 종조부를 포함한 로마의 신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킬 것을 두려워하다가 영원 일족이 들려준 충고를 받아들여서 하루 동안 거지로 분장하고 거리로 나가서 자신의 계획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다. 그의 사후, 계획대로 로마의 정복은 정체되고 우리가 아는 역사대로의 길을 걷게 된다.
  • 토탈 워: 로마 2의 역사적 전투에서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이때 대사는 그 유명한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 그리고 토탈 워: 로마 2에 드디어 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캠페인인 황제 아우구스투스에서 등장한다. 이때는 시대가 BCE 41년도라서 아직 황제는 아니고 레피두스와 안토니우스와 대립 구도로 나온다.

8. 둘러보기


'''로마의 종신독재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율리우스 카이사르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2대 황제 티베리우스

[1] 인류사에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조각 작품이다. 이 작품 전까지 인간을 묘사할 때는 신에 대한 겸손의 의미로 고개가 약간 숙여져 있다. 저 위풍당당한 포즈는 신들의 조각상을 만들 때 쓰던 구도로, 처음으로 한 인간을 신격화한 작품이다.[2] 순서대로 태어났을 때 받은 첫 이름,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의 이름, 황제로 즉위한 후의 이름이다.[3] 보통 로마인 이름 중 입양의 경우는 반드시 출생 가문의 끝부분에 -anus 를 붙인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로 바뀌었다. 즉, 본가 옥타비우스(Octavius) 끝부분에 ‘anus’가 붙어지면서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라고 이름이 붙여지고 불리게 된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는 본래 아이밀리우스 가문 출신이지만 스키피오 가문의 양자가 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가 있다.[4] 나폴리 광역시에 속한 시이다.[5] 영어로는 "I found Rome a City of bricks and left it a City of marble". 세간에는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발견해, 대리석의 로마로 남겨 두었다"는 식으로 벽돌이 아닌 진흙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는데, 로마 시대에도 벽돌은 진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온 오역으로 보인다.[6] 외할아버지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종사촌동생이므로, 폼페이우스와도 혈연상 친척이었다.[7] 본래 '프린켑스'는 로마 공화정 당시 원로원으로부터 큰 공적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쓰이던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선례를 알고 있어 군림하는 자로 여겨지기를 경계해, 비교적 겸양의 표현으로 '프린켑스'를 칭했다고 해석된다. '아우구스투스' 역시 '존엄한 자'의 의미이긴 하지만, 프린켑스보다는 높은 어감을 지녔기 때문이다.[8] 단, 티베리우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는 개인성씨가 카이사르이므로, 제호에 굳이 넣어 사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두 사람에게 카이사르라는 이름 자체는 원로원에서 개인 성씨로 사용된 것일 뿐, 황제 제호에 넣어 사용한 황제 명사형 칭호가 아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 클라우디우스 1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입양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개인 성씨는 '클라우디우스'였다. 따라서 그는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같은 카이사르 가문 사람임에도, 즉위 후 정통성을 위한 이름으로 '카이사르'를 제호로 취했다. [9] 로마력 기준으로 6번째 달이다. 카이사르의 율리우스력 기준으로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8월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8월을 의미하는 영단어 August의 어원이 된다.[10] 고대 서양에서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가져오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구워서 빵으로 만들어 파는 빵집이 하나씩 있었다. 그런데 빵집 주인들 중에서는 주민들로부터 받은 밀가루 중 일부를 몰래 빼돌려서 숨겨놓고 밀가루 상인들한테 팔아넘기는 식으로 돈을 버는 악덕 업자들도 많았다. 따라서 빵집 주인이나 혹은 빵장수라고 하면 도둑이나 사기꾼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있었고, 그런 이유로 로마에서 상대방을 비난할 때 빵집 주인이라는 말이 쓰였던 것이다.[11]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종 사촌 동생이다. 아티우스의 어머니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모이다[12] 옥타비우스 가문.[13] 이곳은 포룸 로마눔과 매우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에 있던 곳이다.[14]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모든 생살 여탈권과 가문 편입 여부는 전적으로 가장에 달려 있었다. 태어났을 때뿐 아니라 사유만 정당하면 아버지는 아이들을 개인적으로 죽일 수 있었는데, 범죄나 간통이나 전쟁 중 도망쳤다거나 하는 식으로 명예를 더럽혔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죽일 수 있었다. 이를 가장권 행사라고 했는데 게르만법과의 큰 차이 중 하나로 게르만법에서 한 인간은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개념이 우선이지만 로마에서는 가족 공동체가 우선했다. 법은 가정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라는 유명한 법언이 로마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게르만족도 서서히 로마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가 아이들을 마음대로 죽이는 게 낭만적이고 합법적인 일로 바뀌게 된다.[15] 안토니우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로마 시대 기사 계급은 평민들 중 재산의 규모로만 정해졌으며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본토의 부유한 자영농 계급이 몰락한 뒤로 금융업자, 상인, 운송업자, 공장 경영자를 뜻했다. 그중에 금융업자는 세금 징수, 환전, 고리대금업 등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모든 일을 겸했는데 전통적으로 로마 농민들이 경멸하는 존재이기도 했다.[16] 수에토니우스의 <황제 열전>[17]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고종 사촌 동생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종손이기도 하지만, 폼페이우스의 재종손이기도 하다. 카이사르 쪽의 촌수가 더 가깝다.[18] 옥타비우스 가문 출신이란 뜻이다. 로마인은 입양되면 입양된 집안의 성과 씨족을 부여받았고 자신의 출생 가문 이름을 약간 변형시켜 뒤에 붙였다.[19] 카이사르, 프린켑스, 임페라토르 등 로마 황제들이 물려밨던 칭호들이 대부분 전제 군주의 호칭으로 남았듯, '아우구스투스' 또한 로마 황제의 칭호로 남았다.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에까지 덧붙으며 명맥을 유지했다.[20] 성경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명 대부분이 그렇다. '티베리우스'를 '디베료'로, '클라우디우스'를 '글라우디오'로,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본디오 빌라도'로, ''코르넬리우스'를 '고넬료' 등등. 전부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알고 있는 라틴어 인명의 '-us'를 '-o'로 바꾸고, 'ㅋ, ㅌ, ㅍ' 등의 격음을 'ㄱ, ㄷ, ㅂ' 등의 평음으로 바꾸면 대충 개신교 성경에서의 표기가 나온다.[21] 전 부인에게서 얻은 딸 마르키아가 소 카토의 아내이기 때문에 소 카토의 장인이기도 하다.[22] 오늘날의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23] 미술 시간에 석고상으로 자주 나오는 그분.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의 먼치킨스러운 능력을 보여줬지만, 군사적인 재능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뤄낸 군사적인 성취는 많은 부분이 아그리파의 공이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아그리파는 훗날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 커플과 대결할 때 돕는다.[24] 공식적으로는 없었다. 카이사리온은 정식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도 아니고 카이사르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한 적도 없었기에 공식적이고 법적인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 즉 혼외 아들 내지 스캔들로 친아들로 의심받는 아이로 취급. 또한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아울러 유일한 혈육이자 외동딸인 율리아는 폼페이우스의 아이를 낳던 도중 사망했다.[25] 카이사르의 유산을 옥타비아누스의 이름으로 나누어준다는 말은 곧 그가 바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것을 공언한 거나 다름없으므로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해질 수 밖에 없다.[26] 즉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총사령관에 충성하던 사병들이 공적 직위가 없는 그의 아들에게까지 대를 이어 충성하는 일종의 개인 재산화된 것으로 나라에 망조가 든 심각한 문제에 해당된다. 사실 이 문제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동맹시 전쟁의 지휘관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이끌던 부대를 세습한 뒤 술라의 내전에 참가한 것으로 충분한 조짐이 보이던 상황이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내전이 평정된 이후에는 제대로 제도를 개혁하여 군대가 사병화되는 것을 방지하였다.[27] 황제로 즉위한 후의 이름 중 DIVI FILIVS가 신의 아들이라는 뜻이다.[28] 당시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이나 전력을 봐도 안토니우스에 비하면 밀리는 편이었고 심지어 전쟁 관련 능력치 역시 안토니우스 쪽이 한참 앞섰다(최소한 카이사르는 장수로서 능력은 폼페이우스에 뒤지지 않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장수로서 능력은 없느니만도 못했다). 그걸 순전히 정치력만으로 뒤엎은 것이니 이런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29] 이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오판''' 중 하나일 것이다. 키케로는 지인과의 편지에서 ''''푸에르(애송이)''' 정도는 갖고 놀 수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고, 원로원 연설에서도 "이 '''애송이'''를 적당하게 이용해먹고 구실을 붙여 내쫓자!"라고 얘기했지만 정작 조종당한 것은 '''옥타비아누스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던 키케로였다.'''[30] 애시당초 키케로는 원로원파였고, 카이사르를 계승한 옥타비아누스는 민중파의 추대를 받았으니 이 배신은 사실상 예고된 것일 수 밖에 없다.[31] 현재의 북이탈리아.[32] 당시 로마군은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하고 있어서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가 아니라면 군대를 움직이기 힘들었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어떻게든 이를 회수했어야 했지만 이미 로마군은 카이사르의 사병이나 다름없는 상태라 말처럼 그렇게 쉬울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공화파는 군대에게 줄 농지를 자기들이 쥐고 놓지 않았던 터라 이들이 말을 듣게 할 명분도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죽은 카이사르의 군대 대부분을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식 지휘권을 부여한 것이다.[33] 수에토니우스는 그냥 제정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제정에 관한 저술은 제정에 부정적이지만 그 근거가 빈약하거나 찾기 힘든 경우가 많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34] 당시 군대는 카이사르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를 임명하지 않았으면 오히려 병사들이 안토니우스에게 투항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은 안 봐도 비디오로 옥타비아누스에게서 군권을 뺏은 뒤 지위는 높지만 실권은 없는 그런 자리에 앉혀서 꼭두각시 노릇이나 시킬 것이 뻔했다.[35] 그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공식 경력이라고는 없는 19세의 어린애였다. 집정관의 제한 연령은 42세에 수많은 전공이 있어야 했다.[36] 안토니우스가 전투에서 지긴 했어도 영향력과 힘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이 선택은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는 게, 원로원 입장에서 정치적 노선이 달라 눈에 가시 같이 여기지만 필요악 같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집정관 임기가 끝난 후에 해산시켜버리기라도 하면 그의 입지가 굉장히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도 쿠데타를 일으킨 결정적 계기가 군대 해산 논란 때문이었다.[37] 1차 삼두정치의 주역들은 원로원을 무시했을지언정 대놓고 숙청은 안했다. 이는 1차와 2차 삼두정치 간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인데 기본적으로 1차 삼두정치 시절에는 돈의 크라수스, 무력의 폼페이우스, 민중파의 거두 카이사르 세 사람은 사실상 당시 로마 그 자체나 다름없을 정도였고 명분(당시 삼두정치의 가장 큰 명분은 원정 갔다 돌아온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에 대한 봉급 미지급 문제였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문제는 제대병들에게 가야 할 공공 재산을 원로원에서 자기들 멋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으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원로원파 입장에서는 상대도 안되었다. 또, 원로원을 결집하여 삼두정치에 반대할 만한 거물급 정치가가 존재하지도 않았다(근본적으로 원로원파 정치가들은 필연적으로 인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2차 삼두정치의 일원들은 1차에 비해 무게감도 떨어졌고 비록 원로원파가 카이사르 암살을 통해 민중들에게 인기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공화제로 돌아가자는 명분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거물 정치가인 키케로가 뒤에서 버티고 있었으므로 삼두파 입장에서는 숙청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38] 무고한 사람도 희생되었는데, 희생자 재산 역시 '삼두'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즉 숙청은 반대파 척결용이기도 했지만 재산 약탈용이기도 했다. 사실 이런 식의 숙청은 술라 및 그의 추종자들이 먼저 실컷 써먹었던 방법이니 누가 누굴 원망할 처지도 아니었다.[39]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를 희생하기로 양보하는 대신 레피두스는 친형을, 안토니우스는 외삼촌을 제물로 바치기로 협의했다. 권력욕 앞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드물지 않는 사례 중 하나를 보여준다...만 실제로 죽은 사람은 키케로 뿐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조용히 처박혀 사는 것만으로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았다.[40] 비슷한 사례가 앞서 있었는데, 바로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대결 때였다. 장인-사위 관계로 둘을 묶고 있던 율리아가 죽은 직후였는데,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밀어줘서 카이사르를 내쫓으려 했다.[41] 재미있게도 앞서 제1차 삼두정치에서도 비슷한 구도가 성립되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버지이자 역시 서방을 선택한 카이사르, 빠르게 몰락한 크라수스 & 레피두스, 함대를 거느린 폼페이우스 & 안토니우스.[42] 옥타비아누스는 정치가로서는 끝판왕급 능력을 지녔지만 군략가로서의 재능은 형편없었다. 오죽했으면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그리파를 붙여줬을 정도였다.[43] 풀비아와 첫 번째 남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사이의 딸[44]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방위를 맡겼던 레피두스가 이들에 의해 로마에서 쫓겨났다.[45] 안토니우스는 풀비아가 쫓겨난 후 풀비아를 만나 쓸데없이 일을 벌렸다고 질책했다고 하며, 안토니우스의 부하들은 대부분 옛 카이사르군이어서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적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46]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코르넬리아 술라의 딸이다. 코르넬리아 술라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딸인 폼페이아 마그나와 독재관 술라의 유일한 아들인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딸이다.[47]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군주론의 리더 스타일이다.[48] 로마에 남아있던 안토니우스의 추종 세력은 옥타비아누스의 주장에 반신반의 하였다. 이들은 "설마 안토니우스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라고 생각하거나 "조작된 거야"라고 여기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옥타비아누스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었고 그 결과, 많은 수의 안토니우스파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붙게 된다.[49] 사정이야 어찌 됐든 전쟁을 벌인다면 당연히 안토니우스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판단이었다. 실제로 전쟁 수행 능력은 안토니우스 쪽이 압도적이었기도 하고.[50]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마리우스, 술라의 내전이나 2차 삼두 정치가들이 또다시 피의 숙청을 벌인 선례가 있었기에 정치가들은 한쪽이 조금만 약해진 조짐이 보이면 즉시 갈아탈 준비를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그의 정치력, 인간적 매력, 아니면 파트리아로 보는 인간적 유대감과는 동떨어진, 그냥 단순히 군사력과 뛰어난 군사적 능력만 보고 안토니우스의 승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고 지지하던 상태였다. 그래서 안토니우스의 한번의 패배는 그를 지지할 이유를 없애 놓은 것이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3명의 자식들에게 로마를 삼분해서 유증해주겠다라는 굉장히 이상한 방침을 발표했는데, 그로 인해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enemy of state)이자 모든 공적에서 추방된 반역자로 규정된 상태였다.[51] 알렉산드리아는 사실 여러 개가 있었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도시들에게는 알렉산드리아라고 붙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도시는 바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다.[52]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서 매우 유명했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라는 두 거물들과 염문을 뿌리고 안토니우스를 정신 못 차리게 한 클레오파트라의 악명은 로마 시민들에게 있어 상당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로마 시민들은 "그 유명한 이집트 여왕 좀 보자"라고 했을까...[53] 참고로 공화정 파괴자라는 비판을 피하려고 이런 칭호들만 보유하고 실질적 군주정을 펼치는 수법은 2000년 정도가 흐르고 나서 북한이 그대로 따라한다. 다만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로마의 프린켑스는 적어도 빵과 서커스를 통해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것 정도는 염두에 두었던 것에 비해, 북한의 경우는 대국민 감시 체계를 고도화하는 폭압적인 방식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54]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로마 제국의 시작은 기원전 27년으로 잡는 일이 많다.[55] 모든 관직을 두루 경험한 후 집정관으로 정점을 찍는 로마 지도층의 경력[56] 그런데 이러면 현대의 발전된 민주주의 체제와는 달리 수도 로마의 여론을 제압할 수 있는 개인의 군사력과 경제력만 있으면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황제 자리에 도전이 가능했다.''' 여기에는 물론 권위가 뒷받침되어줘야 했지만 그 권위라는 것 자체도 지극히 아우구스투스적으로 모호한 것이었다. 로마나 타국이나 누구나 자기 힘과 명분으로 자리에 오르는 것은 똑같다. 지배 계층의 엘리트와 일반 대중의 지지 없이 마음대로 정치 못하는 것도 역시 같다.[57] 물론 이런 황제의 모습도 제정이 점차 중앙 집권적 전제화되면서 점점 사라지고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관료제가 강화되고 전제 군주정이 도입되어 사실상 전제 군주정화된다.[58] 아우구스투스의 후임자였던 티베리우스는 필요없는 이 위원회를 해산시켰다.[59] 현재의 남프랑스[60]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61] 현재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북부[62] 현재의 그리스 남부[63] 주도 나르보(현재의 나르본)[64] 주도 부르디갈라(보르도)[65] 주도 루그두눔(리옹)[66] 주도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트리어)[67] 주도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현재의 쾰른)[68] 주도 타라코(현재의 타라고나)[69] 주도 아우구스타 에메리타{현재의 메리다)[70] 주도 코르두바(현재의 코르도바)[71] 빠른 시간에 이 작업을 수행한 이유로는 군인이 너무 많아 월급 주기 힘들고, 쿠데타 가능성을 염려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게다가 제국 전체 예산의 반이 군비로 쓰였던지라 재정 압박 또한 상당하다보니 빨리 군 감축을 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72] 보조병의 근무연수를 25년으로 정한게 아우구스투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73] 이를 위해서 로마 시민들에게 12.5%에 달하는 상속세를 부과하였는데, 로마 시민에 대한 유일한 직접세다.[74] 보조병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정책을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학자들은 보조병에게 주는 전역증서의 발견을 근거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에 시민권 수여가 시작 또는 정착화되었다고 보고있다.[75] 하지만 자기 친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빨리 물려주려던 리비아에게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76] 본래 티베리우스 입양당시,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에게 모두 제위를 약속했고 그에 따라 입양절차를 완성했다. 하지만 외손자 포스투무스는 학습부진과 난폭성으로 외할아버지에게 직접 이 문제가 원로원에 상정돼 파양되고 추방됐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임종 직전까지 그의 지시와 교육 아래 제왕교육을 공식적으로 받은 이는 게르마니쿠스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소 드루수스) 둘 뿐이었다.[77] 아우구스투스가 리비아와 재혼할 당시,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고 태어난 이후에도 걸음마를 뗄 때까지 아우구스투스가 친아들로 여겨 키우면서 친부의 집에 돌려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풍자작가들이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이라고 조롱하고, 세간에서도 안 좋게 보자 돌려보낸 일화가 있다.[78] 정황상 개선식 이후 정식양자로 삼아 외손자들이 장성할때까지 제위를 맡기고, 누나의 외손자들인 드루수스의 아이들을 손이 많지 않은 율리우스 가의 자녀들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개선식 통과 직전부터 측근들과 원로원에게 "내가 죽으면 내 후계자는 드루수스", "두 외손자 못지 않게 드루수스를 진지하게 후계자로 생각한다"고 떡밥을 던졌다.[79] 세야누스와 공모한 아내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밝혀짐[80] 라틴 서사시 중 가장 유명한 아이네이스(Aeneid)를 집필한 시인, 문학가.[81] 에드워드 기번은 이를 "'''교묘한 권력 배합'''"(국내 번역본 기준)이라고 표현하고 있다.[82] 사실 뒤에 나오듯 이것은 명목상이나마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도시 국가 로마를 제정으로 바꾸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공화정을 대놓고 폐지해 버리면 아무리 내전 종식 직후의 옥타비아누스라고 해도 엄청난 국력 손실, 나아가서는 황제로서 새 정치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마저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험을 감수해도 원수정을 만드는 것보다 성공하기 몇십배는 힘들었을 것이다.[83] 호민관, 안찰관, 법무관, 집정관 등.[84] 가령 마리우스, 술라와 같은 케이스.[85] 하지만 예시로 든 마리우스, 술라 등은 모두 사실상의 독재자들이었고 그들의 사병으로 민회를 완전히 좌지우지하였다. 이것은 민회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 이것은 공화정 체제가 허울만 남은 사실상의 과두정(원로원은 일단 돌아가니까)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86] 에퀴테스라 불렸으며 귀족은 아니나 자력으로 무장을 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다.[87] 단, 아우구스투스 본인은 위협이 되지만 않으면 오래된 전통 귀족 가문을 존중하고 지지자로 끌어들이려는 성향이 강했다. 본격적인 원로원 귀족 숙청이 시작되는 것은 티베리우스 치세 중기 이후부터이다.[88] 술라가 원로원을 강화시키는 개혁을 했으나 그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앞장서서 그것을 폐지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89] 자기 딸 율리아가 부정을 저지르자 로마 밖으로 내쫓아 섬으로 귀양보냈으며, 자기가 죽은 후에도 딸이 로마에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유언으로 못박아버렸다.[90] 사실 보수적인 동시대 로마인들은 가정 내에서 가족들의 생사 여탈 여부를 행사할 때 대부분 그러했다.[91]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집착 수준의 혈통주의자였던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로 인해 선정된 후계자로 갖은 노력과 교육에도 불구하고 결코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고 인망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이 둘이 줄줄이 죽어버림에도 불구하고 정작 로마 사회에선 별다른 반향도 없이 시큰둥했다.[92]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93]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의 첫 결혼 상대만 보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게 드루수스를 진지하게 후계자로 생각했다는 말은 결코 ‘립서비스’가 아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살 위의 티베리우스의 혼처와 드루수스의 혼처 모두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결정으로 진행된 것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러하다.[94]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형제를 모두 아들로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여러모로 비슷한 성향인 티베리우스보다는 개방적이고 활발한 드루수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그 유해가 이탈리아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말을 타고 달려가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죽은 양아들 추도사를 직접 읽었고, 자신에게 드루수스와 같은 죽음이 선사되길 원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혈육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앞으로 대 드루수스 같이 자랐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말하기도 했다. 또 그는 드루수스의 묘비에 자신이 손수 지은 시문을 새기고도 만족 못해서 전기까지 산문으로 만들었다.[95]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결혼식 후 3개월만에 태어났다. 그래서 이 당시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진짜 친아버지는 아우구스투스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를 가지고 ‘아이 부모는 참으로 운이 좋다네. 아들을 3개월 만에 얻었으니’라는 내용의 풍자시와 노래까지 나왔다.[96]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딸인 부인 빕사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런데 마르켈루스, 아그리파, 동생 대 드루수스가 연달아 죽고 난 뒤, 양부의 정치적 판단과 혈통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아내였던 빕사니아와 강제로 이혼당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그토록 혐오하던 율리아와 강제로 결혼을 했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얼마 안가 죽은데다 율리아의 사생활도 문제가 되자 로도스 섬으로 은거해버렸다.[97] 그 후계자이자 아들 티베리우스는 말년에 정치에 질린 나머지 아에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서 원격 통치를 했다. 그래서 세야누스가 섭정을 하며 사람들을 고발하고 마구 죽였는데 이때 율리우스 혈족 남성들 중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제외한 제위 계승자들이 모두 제거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소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다. 먼저 그 후계자로 손색없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소 드루수스는 세야누스와 자신의 아내가 간통을 벌이다 공모하여 독살당했고, 증손자 네로 카이사르는 역모죄로 유배형, 또 다른 증손자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아내와 함께 누명을 쓰고 난 뒤 아내는 간통죄로 자살, 본인은 황궁 지하실에 유폐되어 방석을 뜯어먹으며 버티다가 굶어죽었다. 더해서 수에토니우스의 표현처럼 ‘그보다 더 충실한 노예는 없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가까스로 살아남아서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역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만다. 칼리굴라는 인격 형성기 동안 어머니와 두 형이 할아버지의 무관심과 세야누스 음모로 숙청되고, 성년식도 또래들보다 늦게 치루게 된 상황에다가 은둔 정치를 하던 티베리우스와 함께 제왕 교육을 받기 위해 같이 살면서 안 좋은 영향은 죄다 받았다. 그리고 칼리굴라의 사촌 동생이자 양자이면서 티베리우스의 유일한 친손자였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칼리굴라가 중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된 직후 칼리굴라에게 살해당해버린다. 이후 칼리굴라마저 짦은 제위 기간 이후 암살당하면서,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은 완전히 끊겨 버렸다.[98] 이중 정상적인 결혼 관계를 유지했고 서로를 사랑했던 대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부부, 이들의 장남이자 아우구스투스에게 차차기 황제로 지명된 게르마니쿠스와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 부부를 제외하고는 아우구스투스의 바램처럼 되지 못했다.[99]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는 이를 두고 아예 아우구스투스는 딸 율리아를 돌렸다고 써버렸다(...).[100] 이 결정이 내려지자, 애처가였던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와 강제로 이혼하는게 정말로 싫었기에 양부의 결정에 반대하고 어미니 리비아를 찾아가 양부의 결정을 제발 물려달라고 사정까지 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결심이 워낙 확고했고, 어머니 리비아가 계속 설득한데다가 계속 고집을 피우면 빕사니아와 어린 아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자 티베리우스는 그 결정에 굴복했다. 훗날 로마의 거리에서 빕사니아와 우연히 만난 티베리우스는 아무 말 없이 빕사니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안타까운 일화도 전해진다.[101] 전처 풀비아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나 아우구스투스는 풀비아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장남만 처형했을 뿐 나머지는 살려주었다.[102] 다만 진상은 영원히 밝혀질 수 없는게, 율리우스 안토니우스가 기소되어 재판받기 전에 자살해버렸다.[103] 아우구스투스는 이 두 저술을 제외한 '''카이사르의 모든 저술들을 없애버렸다.''' 카이사르는 신이었고, 그의 신성성을 모독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없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연애 편지, 지인들과 주고받은 귀중한 기록들은 전부 없어졌다. 후대인들에게는 정말 애석한 일이다.[104] 소화 불량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씩 먹은 것이겠지만.[105]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일반인이 아니었고. 격무에 시달리는 로마 제국 황제였다. 끊임없이 사방에서 보고가 밀려들었고, 결재해야 할 서류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40년 넘게 대 제국을 다스리며 영토까지 확장하고 법률까지 제정하며 그 당시에 77세까지 장수했다. 그는 오히려 병약했고 특별히 강한 신체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누구 하나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본인 역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더 오래 살 것이라 생각해 그에게 제위를 넘겨주려 했다.[106] 물론 황제의 권위 등을 위해서 외곽에 호화 별장들을 보유하기도 했다.[107] 칠성장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역이다.[108] "어디 나도 한 번 곰치에게 던져봐라."라는 뜻. 그리고 벌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유리는 상당히 고가품이었기 때문.[109] 출처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아우구스투스전, 71장[110] 고대 로마에서는 연초를 Martius로 두고 1주일에 8일, 1년에 38주(총 10개월, 304일)를 두는 달력을 쓰고 있었고 나머지를 겨울로 부르며 딱히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정규 해의 한달은 관습적으로 보통 달의 주기와 비슷한 30일 또는 31일이었다. 이후 겨울에 해당하는 두 달(연초인 Ianuarius와 연말인 Februarius)을 도입하고 매달 홀수인 29일과 또는 그 다음 홀수인 31일을 부여해 1년 356일을 만들고 다시 1년을 홀수로 맞추기 당시 달력에서 마지막 달에 해당하는 Februarius에서 하루를 뺐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2년~3년마다 Februarius 23일부터 한달을 27일로 하는 일종의 윤달인 Mercedinus을 시행했으니 일반적으로 Februarius는 28일을 채우지 못하는 보조적인 달로 취급받았다. 28일로 정하는 건 수백년 간 지켜온 로마의 전통인 셈. 실제로 아우구스투스가 시행한 달력 개혁은 율리우스력에서 확립된 윤년 제도를 재조정하기 위해 당분간 윤년을 미루는 제도를 도입한게 전부였다.[111] 자신과 살짝 몸이 닿은 여노예의 따귀를 때리는 모습이 나온다.[112] 이 때 불러들인 무술사범이 티투스 풀로이다.[113] 덤으로 너는 어차피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는 없으니, 고통스럽지 않게 죽고 싶다면 사실을 고하라는 협박을 한다.[114] 물론 안토니우스에게 일방적으로 맞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반항했지만.[115] 리비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때 리비아에게 자신은 성적 쾌락을 위해 상대방을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서 S임을 인정했고,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실제로는 M 취향임을 알고 관계 중에 옥타비아누스의 뺨을 때리고 질식시키기도 한다.[116]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의 입장도 1부와는 확연히 달라진다. 아티아는 세르빌리아가 죽으면서 한 저주와 안토니우스와의 결별로 야망이 흐트러지면서 1부에서의 독함도 사라졌고, 옥타비아는 안토니우스와 정략결혼하면서 안토니우스의 입장을 어느정도 대변하게 된데다 어린 시절의 비교적 순수했던 동생이 냉혹함만 남은 인간으로 돌아오자 크게 실망해 돌아선 상태.[117] 클레오파트라가 로마로 끌려가지 않도록 이런저런 핑계를 대 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그 핑계를 가볍게 논파하고 클레오파트라를 굴복시키는 무지막지한 카리스마를 과시한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할 것을 정확하게 예상한 아그리파와는 달리 그럴 리 없다며 오판하기도 했다. 여기서 자신의 냉정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팩폭을 날리는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가 은근 개그 포인트.[118] 브루투스와의 싸움은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으로, 안토니우스와의 싸움은 포스카가 유언장을 빼돌린 덕이 컸다.[119] 작중 율리아의 실제 대사이기도 하다.[120] 실제로 아우구스투스의 강요로 진심으로 사랑했던 본처 빕사니아와 이혼한 것 때문에 분노했고, 그 분노를 표출코자 새로 결혼한 율리아를 강간하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