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안토니우스
1. 소개
고대 로마의 군인이자 정치가. 영미권 명칭은 Marcus(Mark) Anthony(마커스(마크) 앤서니).[1]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카이사르 사후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와의 2차 삼두정치를 통해 로마의 대권에 도전했지만 이어진 내전에서 끝내 패배하고 사라진 인물.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
2. 초기 행적
평민 출신[2] 이지만, 그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나름 명성을 쌓아올린 바 있었다.[3] 어머니는 유서깊은 귀족 가문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사람이며 외삼촌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계 6촌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매우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젊은 시절 매우 방황했다고 전해진다. 계집질, 도박, 술먹고 패싸움은 기본이고 클로디우스[4] 의 정치 깡패로도, 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젖을 줬다는 암늑대를 섬기는 컬트의 사제로도 활동했다고 한다.[5] 하지만, 양아버지인 렌툴루스 수라가 카틸리나 탄핵에 휘말려서 키케로에게 목숨을 잃고 돈을 갚을 길이 없자 수사학 등 공부도 할겸 나이 20세에 그리스로 도망친다. 본인의 군대 경력은 혈연 관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훗날 적대하게 되는 폼페이우스의 막료였던 가비니우스 휘하에서 복무한 것으로 시작된다.[6] 유대 왕국과 이집트에서 기병 장교로 복무하여 여러 전투에 참가, 늘 선두에 서서 굉장한 용맹을 떨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시작하자 여기서 경력을 쌓으려고 했는지, 전출 신청을 내서 이후로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종군했다. 장교로서는 제법 훌륭한 경력을 쌓았고,[7] 카이사르와 인척 관계[8] 이기도 해서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여겨졌다. BC 52년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재무관에 선출됐고, BC 49년에 호민관으로 선출됐다.
갈리아 전쟁이 끝난 뒤에는 호민관으로서[9] 카이사르의 권익을 지키려 애썼지만, 원로원 세력의 강력한 대응에 밀려 본국에서 도망친 뒤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에 동참한 뒤 계속 카이사르 휘하에서 폼페이우스 군대와 싸웠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패하고 이집트에서 암살된 뒤, 안토니우스는 '기병 대장'으로서 카이사르 대신 이탈리아의 통치를 맡았다. 하지만 이때 실정을 하여[10] 카이사르의 실망을 샀고, 한동안 정치 경력에서 중용되지 않았다.
이후 카이사르와 2년간 전혀 왕래없이 지내다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다섯 번째 집정관 임기때 동료집정관직에 올랐다. 동료집정관 시절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루페르칼리아 축제가 열리던 시기를 이용해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바쳤다. 이때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지만,[11] 대부분은 놀라서 말이 안나온다는 표정이었다. 즉시 카이사르는 시민들의 여론을 알아차리고 왕관을 안토니우스에게 돌려줬다.
3. 카이사르 암살 이후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당시 카이사르와 공동으로 집정관 직에 있었기에 정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규모 숙청을 피하기 위해서 로마에서 도망갔다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이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피해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자기네들 집에 꽁꽁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자 안전을 확신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당시 부독재관[12] 이었던 레피두스가 군대를 이끌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숙청하기 위해서 로마로 진입하자, 레피두스를 말리고 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 암살자들간에 화친을 주선했다.[13] 화친의 주요 내용은 카이사르 암살자들이 카이사르의 개혁들을 인정하고, 카이사르파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는 대신에 안토니우스의 정적이었던 돌라벨라가 암살된 카이사르를 대신해서 대체 집정관으로 임명되는 걸 카이사르파가 인정하고, 카이사르 암살자들은 암살에 대한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고 현재 가지고 있거나 카이사르가 생전에 임명해 둔 관직을 인정받는 것이다.[14] 당시 돈도, 군대도, 시민들의 지지조차 부족했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 뒤에 열어본 유언장에 카이사르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이 아니라,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에 대해서 실망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브루투스와 카이사르의 장례식을 같이 치르게 된다. 이 장례식에서 안토니우스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겠다는 카이사르가 유언을 발표하고, 카이사르의 공적을 찬양하는 요지의 연설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의 죽음에 감정적이 된 시민들이 폭발해서 로마 시내에 폭동이 일어났고,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 및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에게 그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면서 총독 자리를 하나씩 주고 쫓아낸다. 이 뒤에 독재관을 법적으로 없애고, 카이사르 베테랑 군인들에게 약속한 토지를 나눠주는 등 원로원과 카이사르파 양쪽에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편 카이사르의 군대를 이끌고 있던 레피두스와 협력하여 사실상 레피두스와 함께 로마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15][16]
하지만 원로원은 자신들을 카이사르파에게서 보호해준 안토니우스에게 호감을 가지면서도 그가 공화정을 위협할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르는 것을 극히 경계했고, 이런 움직임 중심에 안토니우스의 정적인 키케로가 있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돌아와서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언대로 카이사르의 재산을 자신에게 상속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대중에게 어필하기 시작한다.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으로서 카이사르파와 원로원파의 화친을 주선하여 내전을 피했다는 점은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용서한 꼴이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카이사르파 내에서 법적인 후계자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에 밀려 점점 지지를 잃어가게 된다. 심지어 로마 정규 군단 2개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매수당해 현직 집정관인 안토니우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관직도 없는 애송이 옥타비아누스를 따를 정도였다. 이 때문에 집정관 임기가 점점 끝나가던 안토니우스는 전임 집정관(proconsul)으로서 카이사르파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으로 임명되는 것을 원로원에게 요구했지만, 원로원은 현직 총독이자 카이사르 암살자들 중 한 명인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보호하기 위해서 거절했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직접 쳐들어가서 브루투스를 포위했다. 이를 구실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법을 어긴 국가의 적으로 맹렬하게 비난하고, 원로원을 움직여서 안토니우스를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움직인다. 하지만 이 군대는 카이사르의 군대였고 이 때문에 키케로는 자기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한 카이사르의 후계자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다른 두 집정관들과 함께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원로원의 군대는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무티나 전투에서 물리쳤지만, 그 과정에서 두 집정관들이 전부 죽게 된다.[17]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남은 군대를 이끌고 도망친다.
이때 원로원은 당면한 위협인 안토니우스를 패퇴시켰으니 그 다음으로 위협이 될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파를 정리하기 위해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폼페이우스의 자식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군대를 배정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옥타비아누스 대신 집정관 군을 이끌도록 지시한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당연히 이 명령을 거부하고, 카이사르파가 대부분이었던 군대 또한 이 지시를 거부하며 옥타비아누스에게 붙는다. 한편,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도망갔던 안토니우스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레피두스와 합류했다. 입장이 유리해진 안토니우스는 레피두스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서 카이사르파와 원로원파 사이의 화친을 주선해 봤으나 원로원은 키케로의 주장대로 화친을 거부한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군의 정식 사령관이 되기 위해 집정관으로 임명해 줄 것을 로마에 요청했으나 이 역시 원로원이 거부한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비밀 협상에 임하며 휘하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고, 아직 준비가 덜 됐고 설마 앞에 적인 안토니우스를 두고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진격할 줄 몰랐던 원로원파는[19] 와해돼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이 총독으로 정권을 잡은 그리스 및 동방으로 도망간다. 옥타비아누스는 19세의 나이로 카이사르의 조카 페디우스와 함께 집정관 직을 힘으로 따낸다. 로마가 대충 정리되자, 북쪽에서 내려오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로마에서 올라온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오늘날의 볼로냐)에서 만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카이사르 군대를 하나로 뭉친다.
그 뒤에 로마에 남은 키케로와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포함한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뒤[20] 그리스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필리피 전투이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 서방(로마, 갈리아, 에스파니아)의, 레피두스는 아프리카의, 그리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흔히 제2차 삼두정치라고 하지만 사실상 이 시점이 ''''안토니우스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고 최대 경쟁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상대적인 전력으로는 이때 가장 큰 격차를 보였다.''' 필리피 전투에서 군사적 능력이 낮은 옥타비아누스가 격파당한 불리한 전세를 안토니우스가 역전시켜서 군략가로써의 우위를 점했고, 그로 인해 노른자인 동방의 부와 함대 또한 보유하게 됐다. 또한 옥타비아누스가 자리잡은 서방은 사실상 레피두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을 비롯한 정적들이 건재한 상태라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는 상당히 전략적으로 불리했고 또한 이탈리아가 비록 옥타비아누스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아내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필두로한 친 안토니우스 지지파들이 적지 않아서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기 딱 좋은 조건들이 많았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슬슬 성공에 취했는지 안주하기 시작했고 정적인 옥타비아누스를 강제할 완벽히 짜여진 판을 스스로 손을 놓아서 옥타비아누스의 성장을 방관했고 결국 전략적 마이너스를 허용하게 됐다. 필리피 전투에서 고전을 한 '애송이' 옥타비아누스 또한 안토니우스의 방심을 키웠기도 했다. 물론 현실은 옥타비아누스는 예상밖으로 꾸준히 성장을 했지만...
여기서 안토니우스의 부하들 중 대부분은 카이사르파 출신이었기에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우스가 직접 적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만약 안토니우스가 폼페이우스와 손잡고 옥타비아누스를 처리하는 것은 그의 지지 기반 상당 부분을 이탈하게 만들 정치적인 우려가 있었긴 했다.
동방에서 남은 공화파 세력을 정리하고 행정 체계를 개편하는 한편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입을 부하를 파견해 막아내기도 한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대립하자 이들의 평화 협정을 중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딱 빠진 것으로 추정되며,[21] 옥타비아누스가 서방에서 착착 세력권을 확대해 나가는 가운데 이집트의 세력과 자기 군대의 힘을 이용해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으나, 기병대를 제공하기로 했던 아르메니아 왕이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기병 전력의 부재로 패배한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유능했기에, 치명적인 병력 손실은 보지 않고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왕의 도주를 배신으로 여겨 아르메니아를 공격, 승리한다.
그 이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한다. 그런데 개선식은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는 행사였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한다는 것은 로마가 아니라 다른 나라나 도시의 신들에게 영광을 바친다는 의미였고, 이는 로마의 수호신들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이건 로마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결혼한 상태였는데 그녀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으며, 이 개선식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자신이 낳은 아이[22] 에게 동방을, 카이사리온에게 이탈리아와 서방의 통치권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한다. 즉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이 로마 전역을 지배해야 한다는 말. 이에 전 로마 시민들이 빡쳤다.[23] 거기다 유언장에는 사후 로마가 아니라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했는데, 옥타비아누스가 이걸 까발리자 그냥 매국노 겸 배신자로 확정.[24] 옥타비아누스는 이 행동들을 명분으로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따져보자면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결별을 선고하고 새로운 동맹으로 클레오파트라를 맞이한 것이다. 그가 옥타비아누스와 권력을 양분할 생각이 아니었던 이상 이는 예정된 수순이었을 텐데 다만 새로운 동맹의 대상이 클레오파트라였을 뿐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왕가를 신으로 모시는 이집트의 여왕이다. 당시 이집트는 본국 이탈리아에 곡물을 수출할 정도로 꽤나 비옥한 곡창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통해 이집트를 얻는다는 것은, 옥타비아누스와의 내전 도중 기대할 만한 군사력과 곡물 지원, 이탈리아에 대한 압박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된다. 클레오파트라에게도 이 동맹은 나쁘지 않았을 터인데, 안토니우스는 경험 많은 장군이며 로마 제국의 절반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는 이해가 맞아 떨어진 적절한 비즈니스 관계였지, 단순히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져 호구짓을 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관계 속에 실제 사랑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사랑이나 클레오파트라의 매력만이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안토니우스가 보유한 군사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하고 부를 빼앗는건 당시 이집트의 빈약한 군사력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이집트는 로마의 보호국이었으니 당연히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할 테고, 안토니우스의 행동은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는 짓이니 옥타비아누스가 군대를 보내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런 경우 강제 점령당한 이집트인들이 안토니우스에 좋게 협력할 리 없으니, 반발 저지를 위해서도, 물자 약탈을 위해서도 안토니우스는 상당한 병력을 빼두어야 한다. 이런 불리한 상황하에 옥타비아누스군과 싸우느니 이집트 여왕과 동맹을 맺고 든든한 후방 지원과 보급지를 확보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적대하고 동방의 지배자가 되려는 전제하에서는 이집트와의 동맹이 필요한 일이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너무 많은 것을 클레오파트라에게 퍼줬다는 것은 사실인지라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졌다는 점은 역사학자들이 통설로 인정하는 편이다.[25]
즉,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의 동맹에서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얻을 수 있었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강력한 군사력을 얻을 수 있었으며, 둘 다 공동 통치자로서 동지중해 전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이집트로서는 동지중해의 맹주가 되는 이점이 있었다. 이집트 왕가의 충분한 재정 지원과 20만에 달하는 안토니우스군의 병력으로 옥타비아누스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확실히 우위에 설 수 있었으니 안토니우스 입장에서는 충분히 얻을게 많았는지라 여기까지만 보면 이 둘의 동맹은 나름 합리적이긴 한데...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모두 로마의 대손해이다. 안토니우스군은 바로 로마군이고, 이집트와 동지중해는 물론 로마의 지배권이었다. 로마에 대한 매국, 또는 반역이나 마찬가지이니 로마 시민들이 안토니우스를 적대시하는건 당연하고 무엇보다 안토니우스 휘하 로마 병사들 역시 마뜩잖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안토니우스의 파멸을 가져온다.
안토니우스의 이런 행동들은 당시 로마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마 등에 있던 안토니우스의 지지자들은 처음에는 "미치거나 클레오파트라의 주술에 걸리지 않고서야 설마 그럴 리가?", "이건 조작이다"라며 믿지 않았으나, 모두 사실이었다. 어쨌든 안토니우스가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자 그의 지지자들, 그해의 집정관들과 원로원의 약 1/3 정도가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가 있는 동방으로 왔다. 또 사실 여부가 밝혀지자 안토니우스의 지지율은 상당히 떨어졌다. 그래도 강력한 군사력과 군사적 능력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26]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면서 '안토니우스의 군사력도 이제 별 거 없다'라는 이미지가 생기자마자 지지 세력, 중립을 지키고 있던 세력 대부분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어버린다.
4. 내전의 양상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원정 개선식에서 자신과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나은 첫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아르메니아와 메디아, 파르티아를, 딸인 셀레네에게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막내 아들인 필라델포스에게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준다는 발표를 한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에게 다스리던 이집트의 왕과 함께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를 바친다. 이를 지도로 보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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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동지중해 속국, 동맹국 할 것 없이 모조리 클레오파트라와 자기 자식들에게 준다는 말이었다. 당시 로마인이라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한 일임에 틀림없으나,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조작한 게 아니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개선식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이집트에서 교역하던 상인들을 통해 지중해 전 지역에 알려지게 된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우스는 로마를 동서로 분할하자는 제안을 옥타비아누스에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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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발표했으므로 사실상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한 서지중해도 카이사르의 유산으로 보아 상속권을 주장할 수도 있게 되는 셈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한 일은 안토니우스의 이 발표로 로마인들이 경악한 가운데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공개한 것 정도로, 이는 이미 안토니우스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감이 활활 타오르는 와중에 장작을 더한 정도일 뿐이다. 동지중해 영토 전체의 지배권과 안토니우스의 무덤 위치 중 어느 것이 국가 대사인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당장 원로원들을 모아서 2차 삼두정치를 백지화,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안토니우스가 발표한 사항이 전부 무효라고 공표한 뒤 로마 양분 제안도 단칼에 거절한다.
문제는 안토니우스의 병력은 로마 시민권을 지닌 로마군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뜬금없이 본 적도 없는 이집트 여왕을 위해 로마의 영토를 갖다 바치기 위해 조국을 상대로 칼을 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졸지에 아무 명분도 없는 전쟁에 끼어들어 반역자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사기가 오를래야 오를 수가 없었다. 이들을 묶어둘 수 있는 건 이집트 왕가의 재물 뿐이었는데 로마군이 원래부터 돈만 주면 누구하고도 싸우는 용병 집단도 아니고, 이래서야 목숨 걸고 싸울 맛이 날 리가 없었다. 그 결과 탈영병이 속출했고, 심지어 10년 넘게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장군인 퀸투스 델리우스는 악티움 해전 직전에 안토니우스의 전쟁 계획까지 홀랑 들고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사실 악티움 해전의 패배는 안토니우스군에게 치명적인 병력 손실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서, 비록 일패도지했더라도 안토니우스군의 주력은 건재했고 자금도 충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패배는 안토니우스군에 그나마 남아있던 사기마저 박살냈다는 것이 문제였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동방 헬레니즘 세계의 유력자들과 시민, 주둔군 대부분이 옥타비아누스 쪽에 붙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 휘하 19개 군단과 1만 2천이나 되는 기병이 단체로 탈영, 혹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병력만이 아니라 지휘관들조차 속속 투항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전쟁의 신이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똑같은 내전이라도 안토니우스군은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의 폼페이우스군과 비교되는데, 폼페이우스군에는 로마 공화정의 재건이라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고, 다수의 원로원마저 지지했던 상황이었다.[28] 그래서 폼페이우스군은 파르살루스 전투(BC 48년)에서 대참패를 당한 이후에도 쉽게 사기가 꺾이지 않아 북아프리카에서(탑수스 전투, BC 46년), 스페인에서(문다 전투, BC 45년) 다시 패배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시칠리아까지 건너가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들의 저항이 최종적으로 막을 내린 것은 파르살루스 전투 패배에서 12년이나 지난 기원전 36년(나우로쿠스 해전)의 일이었다.[29] 여기에 반해 안토니우스군은 악티움 해전을 겪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산산히 와해되고 만다. 안토니우스가 절망해 빠져 자살한 것은 악티움 해전 패배로부터 1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명분 없는 전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고, 안토니우스의 상황 오판이 심각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5. 몰락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진출을 시도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그리스에서 저지하려 하면서[30] 그리스에서 충돌했는데, 이것이 악티움 해전이다. '''전염병, 심복들의 배신으로 인한 전략 누출, 군사적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클레오파트라의 패착'''[31] 이라는 3가지의 악재가 겹치면서 안토니우스는 여기서 패배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비보(혹은 오보)를 듣고 자결을 시도했다. 허나 클레오파트라는 죽지 않았고, 빈사 상태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이송되어 사랑한 여인의 품 속에서 죽었으니 약간의 위안일지도.
이집트에 도착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까지 죽자, 안토니우스의 유언대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나란히 묻어줬다.
6. 평가 및 후일담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상당한 편이었다. 다만 간댕이를 전당포에 맡긴 듯한 대담함과 선두에 서서 무쌍을 찍는 용맹함이 '군단장'까지는 더할 나위 없는 인물이었지만, 모든 상황을 냉정히 아울러야 하는 '총사령관'으로서는 단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대한 지나친 평가 절하라고 할 수도 있다. 최후의 승자가 옥타비아누스인 만큼 해외 및 국내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혈질적인 군사광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기록 상으로 보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꽤나 절묘하다고 할 만한 정치적 수완을 여러 번 발휘했다. 물론 '황제의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안목은 정확했을지 모르지만.[32] 다음은 안토니우스가 싸움밖에 모르는 근육뇌스러운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 몇 가지.
-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다음 레피두스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진입했을 때, 오히려 레피두스를 말리고 카이사르파와 원로원파의 화친을 주선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카이사르 군대에 패배해서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퇴각한 다음 레피두스의 군대와 합류해서 전황이 유리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원로원과 화친을 맺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상황을 보면 안토니우스는 될 수 있으면 카이사르파 원로원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대화로 풀어나갈려고 했지 무력을 사용한 건 오로지 원로원이 그가 원했던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이 되는 걸 반대했을 때뿐이다. 그조차도 원로원을 상대로 직접 칼을 휘두른게 아니라, 총독 자리를 주는 것을 거부한 암살자 브루투스를 상대로 했다.
-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친구이자 보좌관으로 암살 직전까지 신뢰받았으며, 카이사르의 장례식에 참석한 로마인들을 연설 하나로 오열에 빠뜨리고[33] 암살자들을 도망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달변가이기도 했다.[34]
- 최후의 승자가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이기에 저평가되는 점이기도 하지만 2차 삼두정치 결성 역시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안목이 아주 허술했다고 볼 수는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카이사르 사망 당시 18세에 불과한 풋내기가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오랫동안 카이사르 밑에서 종군하면서 군사적 업적을 쌓은 안토니우스의 심사를 충분히 뒤틀 만한 일이었지만 그는 과감하게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음으로써 수도 로마에 앉아 국가 정통성이란 명분을 손에 쥐고 힘을 모으고 있던 원로원파들을 손쉽게 몰아낼 수 있었다. 이후 삼두의 영역 분할에서도 당대 헬레니즘 문화와 부의 중심지였던 동방 속주를 손에 넣어 훗날 옥타비아누스가 폼페이우스 섹스투스를 격파하고 레피두스 휘하의 군을 흡수하기 전까지 삼두 중 독보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 이탈리아 본토와 수도 로마에서의 지지 기반 확보에 지극히도 소홀했다. 삼두의 영토 나눠먹기 이후 안토니우스는 동방으로 떠났지만 원로원파를 절단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으며, 그의 아내 풀비아는 로마에 남아 안토니우스 지지 세력들을 결집하여 반 옥타비아누스 활동을 주도했고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었다. 결국 이는 옥타비아누스와 그에 대항하여 풀비아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36] 가 이끄는 이탈리아 내 안토니우스 지지 세력 간의 내전으로 번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토니우스는 이를 지원하지 않고 방관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반격으로 안토니우스 지지파들은 진압되고 풀비아는 자살한다.
- 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카이사르의 정당한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삼두의 영토 분할 이후 사실상 정적이 된 옥타비아누스의 세력 확대를 방관했다. 도리어 옥타비아누스가 지중해의 제해권과 그를 바탕으로 한 수도 로마의 식량 공급줄을 손에 쥐고 있던 폼페이우스 섹스투스와 대립할 때 120척에 달하는 선단을 지원하기까지 한다.[37] 전술한 풀비아와 옥타비아누스의 내전 역시 안토니우스가 휘하 병력과 함께 신속히 이탈리아로 움직일 마음만 먹었다면 옥타비아누스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로마 제정으로 가는 분수령이 된 악티움 해전에서조차 적전 도주를 한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라 백중세의 전황에 놓인 부하들을 외면하고 전장에서 이탈함으로써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를 방관한다.[38]
- 로마의 신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는 행사인 개선식을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치루는 것도 모자라서 그 영광의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여왕이 낳은 아이들에게 로마와 그 속주의 통치권을 나누어주겠다는 공개 선언을 한 것은 동시대의 로마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자살 행위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죽거든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내용이 적힌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손에 넣어 공개함으로써 불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당시 로마 법에 저촉되는 행위였고, 야비하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파렴치한 짓이었지만 당대 전쟁 영웅이자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이 심정적으로 나라에 등을 돌렸다는 충격적인 내용은 옥타비아누스의 불법적인 행동 따위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게 만들 정도의 파급력이 있었다.[39]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의 내전 동안 안토니우스를 애송이로 여기며 그 능력을 얕보았다고 전해진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를 상대로 지구전을 구사하며 싸우지 않고 있을 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공격하려고 했고, 카이사르는 번번이 이를 막으러 달려왔다. 당시 폼페이우스 입장에서 애송이가 아닌 장군이 몇이나 있었겠냐만.
이후 안토니우스 가문에서는 마르쿠스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 법안을 제정한 사람은 키케로의 아들이었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이를 통해 하늘은 키케로의 집안이 안토니우스에게 최후의 벌을 내리도록 하였다."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안토니우스 가문은 옥타비아누스가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 다음에도 멸문당하지 않았다. 풀비아 태생의 장남 안틸루스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내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살해당했지만, 풀비아 태생의 율루스와 옥타비아 태생의 두 안토니아는 옥타비아가 거둬들였고 황족의 일원으로 대접받았다.
율루스는 옥타비아의 딸인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하고 이후 집정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율루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와 불륜을 벌인 일 때문에 그를 관대하게 대하고 후원해줬던 아우구스투스의 분노를 샀고, 결국 처형당했다. 옥타비아 태생의 두 안토니아 중 큰 안토니아는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했고, 그의 손자 중 한 명이 바로 네로 황제이다. 작은 안토니아는 리비아의 작은 아들 드루수스와 결혼했고, 장남 게르마니쿠스와 이후 황제가 되는 차남 클라우디우스를 얻었다. 안토니우스의 직계 혈통에서 무려 황제가 둘이나 나왔던 셈이다.
또한 클레오파트라 태생의 두 아들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딸인 클레오파트라 헬레네는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었다 살해당한 유바의 아들인 유바 2세와 결혼하여 마우리타니아의 왕비가 되었다.
결론은 능력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옥타비아누스였다는 것이다.
7. 대중 매체에서
(1953년 영화에서 묘사된 안토니우스 연설 장면 - 13:16초부터 24분 51초까지)
1953년대 영화 율리우스 시저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하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열연한 1960년대 헐리웃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는 리처드 버튼이 안토니우스 역으로 출연했다, 두 사람은 이 작품에 함께 출연한 것을 계기로 결혼하게 되었다.
(1970년 영화에서 묘사된 안토니우스 연설 장면)
1970년대 영화 율리우스 시저에서 찰턴 헤스턴이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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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ROME에서는 영국인 배우 제임스 퓨어포이가 역을 맡았는데 정말 유들유들하면서 호탕한 인물로 나온다. 귀족답지 않게 행동거지가 약간 경박한 면이 있어[40] 이상주의적이고 금욕적인 브루투스와 사이가 나쁜 편. 그러나 능력은 나름 있고 특히 보레누스가 가정 파탄으로 폐인이 되어버리자 의무감을 심어주어 각성시킬 정도로 사람을 다루는 능력은 수준급이다.
여기서는 역사와는 다르게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와 연인 관계로, 옥타비아누스와도 이 덕분에 남남 이상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카이사르 사망 후에는 보호자와 같은 입장이 된다. 그러나 한 수 위의 정치적 식견으로 안토니우스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옥타비아누스와 감정의 골이 생기다 나중에는 폭력을 휘두르고 적으로 돌아서버린다.
드라마 상에서는 나름 유능한 군사 지휘관으로 나오지만[41] 상당히 무능한 정치인으로 묘사된다. 옥타비아누스와 사이가 틀어진 것도 아티아와의 관계도 관계지만, 나름 정치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어서 카이사르 사후, 법적으로 자신의 것이 된 재산을 이용해 정계에 진출하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핑계를 대면서 카이사르의 유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양도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크다. 거기다 카이사르가 죽고 자유를 주었던 노예인 포스카에게 정당한 자유도 재때 주지 않고 보상도 해주지 않아 결국 중요한 순간마다 포스카에게 배신당한다.[42][43] 결국 정치하는 군인이 아닌, 군인인 정치가의 한계를 못벗어난 인물이다.
이후 잠시 옥타비아누스와 동맹을 맺고 브루투스 일파를 박살낸 뒤 삼두정치의 일원이 되지만, 역사대로 악티움 해전에서 아그리파에게 발린 뒤 사망한다. 작중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전략을 대충 파악했지만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려서 미처 대비를 못하고 역사처럼 클레오파트라의 사망 소식을 듣자 보레누스에게 칼을 들게 한 후 스스로 몸에 꽂아넣어 자살한다.
[1] 제니퍼 로페즈 남편의 이름이기도 하다.[2] 정확히 말하자면, 그라쿠스 형제와 같은 평민 귀족(Nobiles) 출신이라 할 수 있다.[3] 안토니우스 가는 영향력은 없지만 유서는 깊은 가문으로 귀족집안은 머렌다라는 코그노멘을 썼다. 다만 현 문서에서 언급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평민 집안 출신이 맞는다. 이 집안 사람들은 초기 공화국 이후로 언급이 거의 사라진 귀족 집안 친척들과 달리 호민관 등으로 꾸준히 역사에서 언급이 되지만,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 건 집정관을 지낸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다. 참고로 이 사람은 키케로의 저작에서 메인 웅변가로 등장한다.[4]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키케로 및 따른 로마 정치인들 항목에서 이 사람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공화정의 실세 귀족 가문들 중 하나였던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에서도 가장 위세가 높았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출신으로, 본래는 키케로와 가까운 사이였으나 사이가 틀어지자, 키케로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평민만이 될 수 있는 호민관의 자리를 노리고 평민의 양자로 들어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된다.[5] 키케로는 여기에 동성애를 저질렀다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빈약하고 전형적인 정치적 공세에 가까워서 믿을 만하지 못하다.[6] 다만 가비니우스는 카이사르 내전 때 카이사르군에서 종군했다.[7] 다만 이때부터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에 대해 '군단장으로서는 차고 넘치지만 총사령관으로서는 부족하다'라 평했다.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의 삽질들을 보면 과연 천재답구나 싶은 안목.[8] 안토니우스의 외숙부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카이사르(통칭 카이사르)의 6촌 형이고, 공통 조상이 카이사르의 증조부모 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셈이니 그렇게 가까운 관계는 아니었다. 카이사르 누나의 손자인 옥타비우스가 사실은 카이사르와 훨씬 가까운 친척이었다.[9] 이때 원로원이 카이사르를 해임하려 하자, 호민관 자격으로 거부권을 사용하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해서 반복하다 빡친 원로원이 거부권이 안먹히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사용한다. 참고로 카이사르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예전부터 싫어했다. 자세한 내용은 카틸리나 탄핵 참고[10] 정확히는 뇌물과 여색을 굉장히 탐했다. 물론 고대에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당연시했던 시대에서조차 욕을 먹을 만큼 탐했다고 한다. ROME에서 이 점을 잘 표현했으니 꼭 보자.[11] 안토니우스가 매수한 사람들이라고 한다.[12] 정확히는 마스터 오브 호스, 기병 대장. 명칭은 기병 대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 부독재관의 역할을 수행했다.[13] 이것만 봐도 키케로나 옥타비아누스의 프로파간다와 다르게 안토니우스는 정치적 감각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14] 드라마 Rome에서 묘사되는 관련 에피소드는 역사적으로 아주 정확하지는 않으나 기본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기에 참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15] 이런 점만 봐도 안토니우스의 정치 감각이 완전히 꽝이라고는 볼 수 없다.[16] 하지만 결국은 문제를 잠시 덮어둔 것에 불과했다. 달리 보면 안토니우스의 우유부단함이라고 해야 할 지도. 무엇보다 민중들은 자기들 편을 들어줬던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는데 이 정도 조치로 만족할 리가 없고 반대로 원로원파는 어떻게든 모처럼 기둥이 꺾인 카이사르 일파를 숙청하고 싶을 게 뻔한데 역시나 이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17] 집정관들이 죽으면 옥타비아누스 한 명에게 군대 지휘권이 완전히 넘어오는 상황이었기에, 옥타비아누스가 전투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들을 암살했거나 혹은 죽음을 방관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옥타비아누스에게는 행운이었다.[18]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의 이런 생각을 잘 알고 있었고, 설령 몰랐다손 치더라도 군권은 자기 목숨을 지켜주는 보루나 다름없으므로 절대 원로원파에 넘겨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로마군은 카이사르를 지지하고 있가도 했거니와 자기들 봉급을 빼돌렸던 주제에 지금도 당연히 받아야 할 봉급을 또 깍으려 드는 원로원에 붙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을 테고.[19]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조종해서 카이사르의 군대로 안토니우스를 쳐부순 다음 옥타비아누스에게서 군권을 빼앗고 허수아비로 만들 계획이었는데, 이걸 대놓고(...) 밝히고 다녔고 당연히 새로운 카이사르인 옥타비아누스의 귀에도 들어갔다.[18] 여기에 더해서 안토니우스가 비록 무티나 전투에서 패하긴 했지만, 여전히 세력과 힘은 남아있었으니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연합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자기 휘하의 군대가 해산되면 정말 위험해지기 때문.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도 군대 해산 논란 때문이었다.[20] 술라의 숙청과 성격이 약간 다른데, 술라의 숙청은 민중파의 씨를 말리기 위함이었고 제2차 삼두의 숙청은 군자금 확보를 위함이었다. 그래서 카이사르파든 반대파든 돈만 있으면 숙청 대상에 이름을 올렸고, 돈만 순순히 바치면 다 살아남았다. 신랄한 탄핵 연설로 안토니우스를 실각시켜 원한을 산 키케로는 예외.[21] 안토니우스에게는 원래 풀비아라는 괄괄한 성격의 아내가 있었으나(키케로의 정적이었던 클로디우스의 아내였으나 클로디우스가 죽으면서 안토니우스와 재혼했다) 안토니우스가 동방에서 머무를 때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정치전을 걸었다가 패배해서 자살했다. 이때 안토니우스가 풀비아를 지원했다면 옥타비아누스도 위험했겠지만 안토니우스는 대놓고 옥타비아누스를 적대하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삼두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냈다.[22]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이 중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나중에 마우레타니아 왕 유바 2세의 왕비가 된다.[23] 일단 로마는 형식적이든 실질적으로든 당시엔 공화정이었고 안토니우스 하나만이 좌지우지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도 서방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있었다. 원로원이나 로마 시민들을 차치하고서, 동방은 확실히 자신이 지배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명백히 남이 지배하고 있는 서방 지배권까지 거론했으니 이쯤되면 제정신으로 한 언행인지 의심해봐야 할 지경이다. 하다못해 왕조 국가에서조차도 이 따위 짓을 하는 군주는 결코 끝이 좋지 않았다.[24] 남의 유언장을 미리 까발리는 건 로마의 상식, 전통, 법에 어긋나는 일인데, 안토니우스의 행동들이 워낙 대단한지라 묻혔다.[25] 이전의 클레오파트라의 동맹이었던 카이사르와 비교해 봐도, 카이사르 역시 클레오파트라와 동맹 관계긴 했지만 적어도 그는 로마의 지배권의 끝자락조차도 이집트에 허락하지 않았고 서로 철저하게 이득만을(카이사르는 동방의 안정을, 클레오파트라는 왕권을 얻었다) 위한 관계였다. 물론 거기에 사랑의 감정도 있긴 했지만 카이사르는 공사 구분은 확실히 해 두어서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절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26] 사실 정치가로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장군으로서는 정반대로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능력이 형편없어서 양부인 카이사르가 살아 생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아그리파라는 친구를 붙여줬을 정도였다. 이는 분명 카이사르의 신의 한 수긴 하지만 이 시점에서 아그리파는 아직 안토니우스의 적수가 되긴 부족했다.[27]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발행한 은화 - 안토니우스 쪽에 새겨진 "Antoni Armenia devicta"는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를 정복했다는 뜻이므로 그러려니 해도, 클레오파트라 쪽에 새겨진 "Cleopatra Reginae regum filiorumque regum"는 클레오파트라는 왕 중의 여왕이자 왕자들의 여왕이라는 뜻으로 이는 당시 로마, 그리스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모를리 없는 고대 페르시아 황제의 칭호다. 안토니우스는 이런 엄청난 칭호를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에게 바쳤다. 로마인들이 어이없다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28] 물론 카이사르 역시 나름대로 충분한 명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본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몇 번 폼페이우스군에 패했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29] 처음에는 옥타비아누스가 나섰으나 역시 군사적 재능은 없었던지 패하고, 아그리파가 나서서야 이길 수 있었다.[30] 라고는 하지만 사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군을 요격할 생각이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후퇴하는 안토니우스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옥타비아누스군의 전투였다.[31] 정확히는 지휘권 혼란. 로마군은 클레오파트라의 명령을, 이집트군은 안토니우스의 명령을 각각 무시했다. 거기에 상반된 명령을 내리는 일도 부지기수. 안 망할래야 안 망할 수가 없었다. 다만 악티움 해전에 나와 있듯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은 클레오파트라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도주였다. 또한 상반된 명령이라곤 하나 군사적 업적이 사실상 없었던 클레오파트라와 당시 지중해 최고의 군 지휘자 중 하나인 안토니우스의 명령이 상반됐다면, 누구의 잘못이 더 컸는지는 분명하다.[32] 사실상 카이사르 대에 시작되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실체화된 로마 제정의 황제 자리는 현대 한국인들이 익숙할 중국의 중앙 집권적 황제와 달리 시민 중 1인자라는 권위 위에 거부권이 포함된 호민관 특권과 군 지휘권 및 군의 지지, 비옥한 식량 창고인 이집트 속주의 지배권을 바탕으로 수도 로마의 여론을 좌지우지할 만한 경제력 등이 복합된 이질적인 최고 권력이었다.[33] 다만 안토니우스의 웅변으로 알려진 카이사르의 장례식 연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출전이다.[34] 정확히는 집정관인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죽음에 분노한 시민들로부터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로마에서 쫓아낸 것이다. 당시 로마 내에서 암살자들과 키케로는 그들의 신변을 보호해줄 사병화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35] 거기다 이 시점에서 그 아그리파마저도 군사적 능력으로는 안토니우스를 완전히 따라잡진 못했다.[36]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37] 이는 향후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날 때 2만의 로마 군단병을 지원하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약속을 믿고 보낸 지원이었지만, 정작 섹스투스를 제압하고 난 뒤 안토니우스가 약속의 이행을 요구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원래 약속의 10분의 1에 불과한 2천 명의 군단병을 보낸 뒤 입을 씻는 것으로 화답한다.[38] 사실 2차 삼두정치에서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면서 동방의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를 중재할 역할은 옥타비아누스와 같이 서방을 맡은 레피두스의 몫이었다. 하지만 레피두스 휘하의 군대가 어이없게도 자신을 따르라는 옥타비아누스의 한마디에 일제히 배반하여 옥타비아누스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레피두스 역시 너무도 간단히 항복했기에 이 견제 장치는 작동할 수 없었고 삼두는 붕괴된다. 레피두스가 이끌고 있던 군단이 카이사르 생전 카이사르 휘하에서 사실상 사병화된 군대였으며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이 카이사르의 정당한 유산 상속자임을 줄기차게 내세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군단의 배신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39] 이게 얼마나 당시 로마인들에게 충격적인 행동이었냐 하면, 약 100여 년 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가 유대 공주 베레니케와 혼인을 하려고 하자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생각하며 경기장에서 일제히 야유를 터뜨렸고, 그로 인해 티투스는 결혼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100년이 지나도 전혀 사그러들지 않았던 충격이었던 셈.[40] 평민 출신 귀족이다. 평민 출신이란 점 때문에 호민관을 역임할 수 있었다.[41] 아그리파의 지휘 아래의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게는 연패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위협적인 수의 군사가 그를 따르고 있었고, 브루투스와의 전투에서는 전황을 따라잡지 못하는 옥타비아누스에 비해 훨씬 여유롭게 전투에 대처하는 모습도 보였다.[42] 포스카는 아그리파와의 전투에서 패전할 때까지만 해도 안토니우스와 함께 했지만, 이후 2차 삼두정치때 헤롯 왕에게 받은 뇌물의 정보를 마이케나스에게 몰래 흘린다던가, 악티움 해전 이전 안토니우스의 몰락의 징조가 보이자 이집트를 탈출하는 등, 결국 안토니우스의 운명이 결정되어지는 순간에는 그를 변절한다.[43] 특히 마지막 이집트 탈출 당시에는 안토니우스의 (사망시 공개하게 되어있는) 유서를 빼돌려 옥타비아누스에게 바침으로써 옥타비아누스가 그에게 선전포고를 할 명분을 제공한다. 원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곡물 수출을 거부하는 등 노골적으로 전쟁을 유도하는데도 시민들이 안토니우스를 더 좋아하는 탓에 선전포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유서 한 방으로 안토니우스에 대한 여론을 적대적으로 돌리는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