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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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Marcus Aemilius Lepidus
생몰년도
?~기원전 13년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여담
5.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다.

2. 생애


자신의 이름과 같은 정치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아내는 세르빌리아의 둘째딸 유니아 세쿤다이며,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는 처남-매제지간이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는 동서지간[1]이다.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적으나 기원전 62~58년에 조폐 관련 관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은 가장 유서깊고 영향력 있는 귀족가문 중 하나였다. 그러니 레피두스의 아버지 역시 원로원의 권위를 옹호하는 옵티마테스의 일원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원로원파에 가담해 술라 밑에서 싸웠고 술라의 독재관 시절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대표적인 포풀라레스 호민관이었던 사투르니누스의 딸과 결혼하는 등 반술라파 성향을 숨겨오고 있었고, 결국 술라가 죽자마자 술라 정권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지역을 제압하라는 원로원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시도는 실패하고 그는 폼페이우스에게 패해서 사르디니아로 유배를 가서 죽었다. 레피두스의 아들들은 가혹한 처분을 받지는 않고 재산과 지위를 지키며 원로원에 남을 수 있었지만 가세는 기울었다. 그리고 원로원에 반기를 들었던 가문이라는 낙인이 찍혀 당시 지배적 파벌이었던 옵티마테스의 지지를 받기도 어려웠다.
이런 탓에 레피두스는 야심이 큰 인물이었지만 그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지중해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제국이 된 로마에서는 이제 가문의 이름만으로는 성공을 담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임기를 마친 집정관과 법무관은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는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는 엄청난 이권이 걸려있었다. 그러니 고위 정무관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원로원내 대규모 파벌들과 연대해야 했고, 거기에 더해 유권자들에게 뇌물을 뿌리고, 공공사업에 대한 투자를 해 이름을 알려야 했다. 당연히 이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드는 일이었고 카이사르의 돈으로 그의 형이 집정관에 올랐던 것을 보면 레피두스 가문에는 그만한 돈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결국 레피두스는 출세를 위해 형 파울루스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하게 되었다. 레피두스는 사투르니누스의 손자이자 원로원에 반기를 든 인물의 아들이었고, 카이사르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였으니 선대의 협력관계가 다시 재현된 셈이었다. 또한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가문은 첫손에 꼽히는 명문대가였고 이런 명문대가의 지지는 카이사르에게 큰 힘이 되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이들을 중용했다. 갈리아 전쟁에서 군사적 성공과 함께 전리품과 노예를 팔아 부자가 된 카이사르는 레피두스 형제가 출세할 수 있도록 큰 돈을 내주었다. 그 돈으로 형 파울루스는 조상이 지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회당을 재건하고, 유권자들을 매수해 집정관 자리에 올랐다.[2] 또한 레피두스 자신은 내전을 치르는 동안 카이사르의 측근이 되어 카이사르 파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원래 레피두스 가문은 카이사르 가문에 비해 훨씬 영향력이 크고 강력한 연줄을 갖춘 가문이었다. 아버지 레피두스가 원로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가문이 군단을 편성할 수 있을 만큼의 피호민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 가문이 마리우스와의 연대를 통해 공화정 말기의 유력 가문으로 발돋움하기는 했지만, 그 전에 카이사르 가문은 겨우 원로원 의석만을 유지해왔던 반면 레피두스 가문은 집정관을 줄줄이 배출하던 공화정의 핵심 가문이었다. 그러니 카이사르 편을 든 레피두스의 선택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로마의 명문대가들은 어떤 가문이나 개인이든간에 동료 정무관들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보았고, 명문대가의 인사들이 돌아가면서 고위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속주 총독직은 집정관이나 법무관 역임자들이 1년 아니면 부득이한 경우 2년씩만 돌아가면서 맡는 자리였고, 임기를 채운 총독은 당연히 물러나 원로원의 일원으로 남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3개의 속주와 6만명의 병력에 대한 지휘권을 10년씩이나 보유했다. 단순히 계산해 봐도 전직 정무관 30명이 1년씩 돌아가면서 맡을 수 있던 자리를 카이사르 혼자 차지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역시 마찬가지로 공화정 정무관에게 허락될 수 없는 거대한 지휘권을 보유했다. 당연히 그만큼 기존 명문귀족들의 자리는 줄어들었고, 북이탈리아나 히스파니아 같은 수익성 좋은 속주에서 재산을 모을 기회도 사라졌으니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전통적 귀족들에게는 최악의 적이었다.
카이사르 이전에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등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는 지휘권을 오랫동안 보유하면서 역사에 남을 군사적 업적을 세운 인물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이 수행한 것은 위기에 처한 로마를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갈리아 전쟁처럼 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위한 대규모의 침략전쟁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경제적, 정치적 원조를 통해 자신의 피호민들을 공직에 진출시켰다. 처음에는 호민관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가비니우스, 아프라니우스 같은 폼페이우스의 피호민들이 집정관 자리까지 진출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종속된 인물이 공화정 정치경력의 정점인 집정관까지 오르는 일을 옵티마테스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정무관들은 동등해야 한다는 로마 공화정의 오랜 전통에 반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포르키우스 카토,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등 대다수의 명문대가들은 카이사르를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의 두번째 집정관 당선을 지켜보느니 내전이 낫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러니 레피두스의 선택은 상당히 이례적이고 사실은 굴욕적인 것이었다. 첫손에 꼽히는 명문대가 아이밀리우스 가문 사람들이 카이사르와 동맹도 아닌 종속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당시 공화정 명문대가의 통념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피두스 형제는 카이사르의 도움을 받고서야 고위 정무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으며, 이는 레피두스 형제가 고대 로마의 피호민 관계[3]로 카이사르에게 종속되었다는 뜻과 같았다. 다만 출신 가문 때문에 레피두스는 카이사르파에 늦게 합류했지만 갈리아 전쟁 초기부터 활약했던 트레보니우스나 데키무스 브루투스에 비해 더 중요한 인물로 대접받았으며, 카이사르 사후에 출신가문이 뒤쳐지는 히르티우스, 판사, 발부스 등의 인사들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레피두스와 견줄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한 것은 카이사르의 혈족이고 마찬가지로 명문대가 출신인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유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뿐이었다.
두 집정관과 원로원 의원 다수가 카이사르에 대항해 로마를 비운 상태에서, 로마에 남은 최상위 공직자였던 법무관 레피두스는 민회를 소집해 카이사르를 독재관으로 추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48년 카이사르가 동부로 폼페이우스 세력과 전쟁을 하러 떠날 때 폼페이우스 세력의 주요 거점이었던 가까운 스페인(Nearer spain) 총독으로 임명되어 스페인을 안정화시켰다. 이 전공으로 로마에서 개선식을 열었고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와 함께 콘술직에 선출되고 기병대장을 역임했다. 카이사르가 로마를 비울 때 키케로를 위시한 반대 세력의 공세를 약화시키는 역할도 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던 기원전 44년 3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가까운 스페인 총독으로 선임되었으나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 레피두스는 수완을 발휘하여 포룸을 장악해 시민들의 소요를 막고 안토니우스와 제휴하여 공화정 지지자들과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후임으로 종신 대신관이 되었다. 이후 로마를 안토니우스에게 맡기고 스페인으로 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협상해 내전으로의 확대를 막았다. 이때 폼페이우스와 어느 정도 친분이 생겼는데 이는 훗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레피두스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흔히 2차 삼두정치의 들러리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의외로 카이사르 암살 직후에는 가장 세력이 강했다. 레피두스의 임지인 갈리아와 스페인에 속한 현역/퇴역병 군단이 7개 군단에 달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력은 캄파니아에서 사재를 털어 긁어모은 퇴역병 2개 군단(7, 8군단)에 역시 돈으로 안토니우스에게서 낚아온 2개 군단(제3 마르스 군단, 제4 양 군단)이었고 안토니우스의 경우 친위부대 종달새 군단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빼앗길 뻔 했다가 겨우 지켜낸 2개 군단이었던데다 그나마 무티나 전투 참패로 세가 줄었으니 차이가 꽤 많이 났다. 하지만 레피두스가 임지에 머물러 있는 동안 옥타비아누스가 무티나 전투를 거쳐 북 이탈리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병력까지 흡수해 힘을 키워 원로원을 압박하고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복수와 막대한 보상을 미끼로 레피두스 휘하 군단의 지지를 얻어[4] 무티나 전투 이후의 열세를 뒤집은데 반해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와의 제휴 이전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후세인들에게 수동적이고 끌려다닌다는 인상을 주었다.[5]
기원전 43년 레피두스의 주선 아래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까지 3명이 모였고 이들은 보노니아 협정을 통해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회'를 출범시키고 키케로를 위시한 공화정 지지자들을 대거 숙청했다. 삼두정치 결성 직후의 세력권 배분에서 레피두스는 갈리아와 스페인을 차지하여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사르데냐가 고작이었던 옥타비아누스를 크게 앞섰고 안토니우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필리피 전투를 기점으로 상황이 변했다. 기원전 42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마르쿠스 브루투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공격하러 떠난 사이 레피두스는 집정관으로서 로마에 남아 내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레피두스의 몰락을 불렀다.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전리품과 토지를 미끼로 레피두스 휘하의 군단들을 포섭해버리고 레피두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군단과 영역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기원전 41년 페르지아 전쟁이 발생하자 옥타비아누스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로 있던 레피두스를 포섭해 로마를 맡기고 자신은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투항해온 안토니우스계 6개 군단을 레피두스에게 넘겨주고 북아프리카로 보냈다. 이는 충성심을 담보할 수 없는 안토니우스의 군단 관리를 떠넘기는 한편, 레피두스가 안토니우스의 힘을 빼앗은 모양새를 만들어 둘의 제휴를 막고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삼두와의 합의로 분배받은 영역임에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장악하고 있던 시칠리아 정벌에 이용하려는 포석이었다.
기원전 40년에 브룬디시움 협정으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상호우호를 재다짐할 때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양해하에 북아프리카를 인도받는 것에 그쳤다. 기원전 37년 타렌툼에서의 협정으로 3인 위원의 지위는 5년 연장되었으나, 레피두스는 여기에 끼지도 못했다.
기원전 36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점령한 시칠리아에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출진한 레피두스는 이를 세력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의욕적으로 참여하여[6] 옥타비아누스가 고전하는 사이 공을 세우고 폼페이우스의 최후 거점인 메사나에서 항복을 받고 8개 군단을 접수했다. 이때 아그리파가 레피두스가 아닌 옥타비아누스가 항복을 받아야 한다며 대립했다. 레피두스는 삼두의 일원이고 아그리파는 삼두중 한명의 부하장군이니 정상적이라면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그만큼 이때 레피두스가 약해져 있었음을 뜻했다.
공을 세운 레피두스는 자신의 몫이라고 여긴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의 통치권을 주장하며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안토니우스에게서 투항해온 6개 군단에 방금 투항한 폼페이우스의 8개 군단이 주력인 레피두스군은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포섭되었고 레피두스는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채 팽당했다. 3인 위원의 지위를 비롯한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지위만을 겨우 보전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키르케이(Circeii)로 유배보냈으나, 그래도 원로원 의원 자격으로 로마를 방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 레피두스는 기원전 12년(혹은 13년)에 사망했고 사후 대신관 직위는 아우구스투스가 가져갔다.
사후, 아우구스투스의 배려에 의해 그의 일족은 아우구스투스의 자손들과 혼맥관계를 맺게 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편입되었다. 마르쿠스 레피두스의 조카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의 아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소 율리아(빕사니아 율리아)와 결혼하고, 또한 일족이었던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의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결혼했다.

3. 평가


삼두정치에서 머릿수만 채워놓기 위해 나온 인물이라느니, 카이사르 꼬붕이 얼떨결에 감투 하나 차지하고 있다가 상황 정리되어 3인 중 대빵이 나가라고 하니까 데꿀멍하고 나갔다느니 하는 별 희한한 악평이 돌아다니는데 절대로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명문가들이 다 쓸려나가는 와중에 카이사르 편을 선택해서, 세력 내 2인자격 위치까지 오른 것은 보통 안목으로는 이뤄내기 어려운 성과였다. 또한 카이사르 생전 측근으로 중임을 맡아 잘 수행했고 카이사르 사후 정국을 일시 수습하고 스페인을 안정화시킨 역량은 원로원도 인정했다. 삼두 사이를 주선해 삼두정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도 레피두스였다. 레피두스가 삼두의 일원이 된 것은 그만큼 실력과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전투에서의 모습을 보면 장군으로서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였던 반면, 레피두스는 유서깊은 귀족이자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서 카이사르의 충실한 지지자이기는 했어도 혈연이 아니었다. 이는 카이사르파 내의 지지를 포섭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갈리아와 그리스에서 카이사르와 함께 싸웠고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카이사르 휘하 군단병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피두스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병력을 이끈 적이 없고 외부 속주를 통치하거나 로마에 머물러 카이사르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역할을 맡았으니 군단병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 레피두스가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레피두스의 역량이 모자라거나 레피두스가 비겁했다기보다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에게 이미 세력과 명분에서 밀린 상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레피두스의 불운은 그 상대가 그 '''먼치킨''' 옥타비아누스였다는 데 있었다. 키케로, 안토니우스같은 로마 공화정 말기 거물들이 모두 옥타비아누스에게는 부처님 손바닥안 손오공이었고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레피두스만 유독 낮춰볼 이유는 없다. 오히려 레피두스는 그 와중에도 천수를 누렸으니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7]

4. 여담


레피두스는 라틴어로 '멋있는', '말쑥한'이란 뜻이다. 그런데 학습만화 세계사 같은 매체에선 어째서인지 젊은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달리 후덕한 외모의 인물로 그려지기도 했다.

5. 대중 매체에서


대부분의 매체에서 그야말로 운 좋게 한자리 꿰어찬 병풍+무능의 화신으로 나온다.
특히 ROME에서는 절정에 달하는데, 옥타비아누스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친 안토니우스를 토벌하기 위한 토벌군 사령관으로 첫등장. 그러나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 병사들이 죄다 탈영하여 안토니우스의 군단에 합류한다(...). 할 수 없이 항복하고 안토니우스에게 합류.[8] 그 이후로는 삼두정의 일원이 되지만 필리피 전투때는 '남아서 로마나 지키고 있으라', 삼두정의 일원들이 각자 다스릴 지역을 정할 때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동쪽,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를 포함한 그 외, 레피두스는 꼴랑 아프리카[9] 하나(...) 등 그저 안습한 취급.
토탈 워: 로마 2 아우구스투스 캠페인에서 플레이어블 세력으로 등장한다.

[1] 카시우스의 부인은 세르빌리아의 셋째딸 유니아 테르티아이다[2] 파울루스에게는 내전을 막고 카이사르가 두번째 집정관 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대단히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정치적으로 유능하지 못해 카이사르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고, 결국 내전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3] 레피두스는 카이사르의 후원을 받아 정무관직에 올랐고, 이는 정치적 이득을 주고받는 동맹관계와는 다른 것이었다. 로마 관습에서 보호자-피호민 관계는 매우 강력하고 신성시되는 것이었다. 레피두스처럼 한번 보호자에게 은혜를 입어 피호민이 되면, 피호민은 사실상 평생토록 보호자를 위해 봉사해야 할 의무를 졌으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강제되었기 때문에 이 의무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카이사르의 참모로서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했던 트레보니우스나 데키무스 브루투스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매우 나빴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이사르의 후원에 의해 출세한 피호민이 카이사르에게 칼을 겨눴으니 이는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4] 특히 퇴역병들로 이뤄진 6, 10군단의 호응이 컸다. 6군단은 자신들의 토지가 속해있고, 내전때 폼페이우스 편을 든 죄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마실리아에 원로원이 권한을 돌려줬기 때문에, 10군단은 6군단 다음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을 제지하려 했다가는 병사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지휘관으로 낙인 찍혀 다른 군단들의 지지까지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고 결국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와 제휴했다.[5] 이런 평가를 받게 된 원인제공자 중 한명은 키케로다. 왜냐하면 레피두스는 자신들의 편을 안들어주고 공화정을 무너뜨리는데 한몫했기 때문이다. 좋은 소리를 할 리가 없다.[6] 폼페이우스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기원전 39년 미세눔 협약을 통해 삼두와 폼페이우스 간에 일시적인 화친이 이뤄졌을 때 폼페이우스는 레피두스를 제외하고 자신을 삼두의 일원으로 받아달라고 요구했던 적이 있었다.[7] 압도적인 술수와 정치력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권력을 꿰찬 옥타비아누스의 집권과정에서 걸림돌이라면 처음부터 명분 다 내주고 자멸한 안토니우스나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공화정 지지자들보다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더 큰 걸림돌이었다. 폼페이우스를 잡겠다고 정략혼도 실시하고 선공 날렸다 패하기도 하고 안토니우스를 꾀어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빌려오는 등 상당히 손을 많이 썼다.[8] 이때 '자네같이 미천한 신분의 사람에게 왜 그리 병사들이 열광하는지 모르겠네'라며 푸념하자 '병사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사령관은 침 좀 뱉을줄 알고 적당히 더러운 면도 있어야 친근하게 느껴지는 법이지'라고 능글맞게 대답한다.[9] 당시의 아프리카는 포에니 전쟁 이후 철저하게 파괴되고 100년 넘게 관리가 되지 않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부터 라티푼디움 위주로 재건을 시작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