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고대 로마'''
라틴어: Roma antiqua
그리스어: Αρχαία Ρώμη

'''시대사'''
로마 왕국 기원전 753년~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국 기원전 509년 ~ 기원전 27년
로마 제국 기원전 27년 ~ 기원후 1453년
'''정무관'''

'''비상임 정무관'''
'''입법부'''
독재관
원로원[A]
'''로마의 문화'''
12도법 · 로마법 · 로마 시민권 · 로마의 기반시설 · 로마군단
'''주요 인물'''
로물루스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아우구스투스 ·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 디오클레티아누스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 그라쿠스 형제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가이우스 마리우스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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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강역의 변천사
고대 로마의 군기(Vexillo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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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영토 [1]
'''최대 면적'''
5,000,000 km²
지중해 면적을 포함하면 10,000,000km²을 넘는다. 현재의 국가들 중에 로마 제국 안에 일부라도 속해있는 국가만 해도 '''50여 개''' 이상이다.[2]
'''최대 인구'''
추정치 56,800,000명
제국을 세운 아우구스투스 시기 이전에 이미 수천만 명에 달했다고 본다.
1. 개요
2. 영향력
3. 역사
4. 통치 체계
5. 군사 체계
6. 기술과 제도
6.1. 놀라운 건축기술
6.2. 시대를 앞서간 식민 정책
7. 문화
7.1. 문학
7.2. 미술
7.3. 조각
8.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
9. 로마의 이것저것
9.1. 로마 속담
9.2. 납 중독
9.3. 로마는 어느 나라의 역사인가?
9.4. 국내에서의 인식
10. 대중문화 작품
10.1. 소설
10.2. 드라마
10.3. 영화
10.4. 만화
10.5. 게임
11. 고대 로마를 모티브로 한 세력들
12. 관련 문서
13. 역사보기 틀


1. 개요


고대 로마는 '''기원전 753년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한 도시 로마에서 시작되어 기원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할 때까지의 로마 문명'''을 말한다.
이 시기는 로마 왕국, 로마 공화정,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의 로마 제국으로 나뉜다.
처음에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한 이탈리아어계 세력의 정착지로 시작해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그들의 근원지인 로마가 그대로 국가의 이름이 되었다.
고대 로마의 역사 전체를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한때 왕정이나 공화정 체제인 적도 있어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 그냥 '로마' 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서유럽에 대한 로마 제국의 통제력이 유의미하게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기준으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고대의 끝으로 보는 시각이 현재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고대' 로마라고 하면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를 기준으로 한다. 이후 중세에는 로마의 동부 지역은 동로마 제국으로 살아남아 1453년까지 이어진다.

2. 영향력


로마는 유럽 문명을 실질적으로 정의(定義)한 역사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황제의 계보와 라틴어, 판테온으로 대표되는 건축물, 법, 종교 등 수없이 많은 면에서 이후의 유럽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유럽 당대 제국들의 이상향은 항상 로마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황제(Imperator)를 뜻하는 유럽 각국의 언어도 거의 대부분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북유럽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대서양 연안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체와 북아프리카 상당 지역이 직·간접적으로 로마의 영향권 아래 놓였었다. 서구 사회 전체가 직계든 방계든 결국 로마 제국의 후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심지어 로마 제국의 분열이 있고 나서 서로마 제국서유럽을, 동로마 제국동유럽을 형성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3] 북유럽 일부 국가라고 해도 북유럽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발트해 연안도 제대로 된 국가 형태는 없었다고 보지만 로마와 담비, 모피 교역 등으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로마의 영향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이슬람 제국에게도 페르시아와 함께 문화적,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는 고대에만 있다 사라진 국가가 아니다. 현재는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하는 당시의 동로마는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었다. 국가의 공식 명칭도 'Imperium Romanum' 으로 로마 제국이었다. 그 외에도 신성로마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로마의 계통을 주장했다.[4]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는 후대의 공화주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아테네가 가지는 위상을 비슷하게 공화주의 이데올로기에서는 로마가 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고대 로마의 심장부인 로마는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로서 강력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3. 역사


이탈리아 반도의 소수 이주 왕국으로 시작하여 에트루리아인의 휘하 아래에서 있다가, 힘을 길러 주변 국가들을 무너뜨리고 헬레니즘 제국, 켈트 등을 정복해 결국 유럽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체계화되고 조직화된 전술과 무기 연구, 개발 등을 추진하고 군복무를 시민의 명예로운 의무로 삼아 군 조직을 강화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막강했다.[5] 공학 분야에서도 로마는 월등했다. 무엇보다도 로마의 진정한 힘은 현재의 유럽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인 역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현재의 서양 법률은 그 기본을 로마법에 두고 있고, 그 법의 영향을 받아 법률을 만든 동양의 중국, 한국, 일본, 대만에 이르기까지 로마법이 뿌리내리지 않은 곳은 없다. 라틴어도 비록 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이들이 없지만, 여전히 각종 학술 용어로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학술, 종교적 사용 이외에도 흔히 알파벳으로 부르는 라틴 문자, 혹은 그 변형을 사용하는 유럽 언어는 라틴어의 영향을 받았다. 일상용어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곳도 많지만, 조금만 학술적 용어로 깊이 들어가보면 라틴어가 뿌리깊이 정착해있다.[6] 현재 이탈리아남유럽, 동유럽 일부 국가들의 유서깊은 도로 중 돌바닥이 깔려 있다면 그것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로마군은 주변 소국에 비해 절대 작은 군대가 아니었지만, 영토 크기가 크기인지라 여러 곳에 상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사시 발빠른 파견과 물류수송을 위해 도로가 필요했다. 로마의 도로는 현대의 모래-자갈-콘크리트-아스팔트로 두텁게 짓는 도로에 견주어도 그 강도가 뒤지지 않으며, 이 시기에 만들어진 도로의 규격인 마차규격은 현재 전세계 도로 차선폭의 기준이 되었다.

3.1. 로마 왕국




3.2. 로마 공화국




3.3. 로마 제국




4. 통치 체계


처음에는 왕정으로 시작하였으나 왕을 축출하고 공화정이 되었고,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의 등장 이후 사실상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 체제로 변모하게 된다. 황제의 후계자가 실제 피로 이어진 경우도 많았지만, 대개는 황제가 후계자를 양자로 삼고 계승하는 형식을 많이 취했다. 기본적으로 로마의 황제권은 '가문'에 귀속되는 '자산'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또한 양자도 가문을 계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일부일처제에서 친자로만 부자 상속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확률적으로 보아 상당히 어렵다.
동양에서 장자 상속 등으로 원칙이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던 것과 달리 로마에서는 누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인지에 대해 마지막까지 분명한 원칙을 세우지 않았다. 대체로 황제가 다음 황제를 지명하는 식이었다.[7] 이러한 방식은 아들보다 현명한 사람을 지명함으로써[8] 오현제 시대의 번영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현명한 사람' 이 아닌 '힘이 있는 사람' 이 제위를 계승하는 폐단을 낳았다. 여기에 황제의 '정통성'을 뒷받침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므로 제위가 제대로 계승되지 않거나 계승한 황제가 함량미달인 경우 군 지휘관들이 제각기 황제를 자칭하는 혼란과 내전도 가져올 수 있는 양날의 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혼란의 시대가 훨씬 길었다. 이러한 제도상의 허점과 그에 따른 혼란을 생각하면 로마 제국이 오랫동안 건실하게 유지된 것이 놀라울 정도라고 할 수도 있다.[9]
반대로 보면 이런 것들을 보완할 정도의 법 제도나 시스템이 그만큼 발달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실제로 로마는 함량 미달의 황제가 제위에 올라도 제국의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민생에 상당한 관계가 있는 조세 제도도, 로마는 지방 조세 행정에 국가가 거의 개입하지 못해서 황제의 역량에 따라 민생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작용하지 못했다고 보기도 한다.[10]
이후 황제(imperator)를 뜻하는 서양 각국의 단어가 로마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말의 변형이었는데 '엠퍼러(emperor)', '카이저(Kaiser)', '차르(Царь)' 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엠퍼러는 개선 장군의 의미를 가진 임페라토르(IMPERATOR)에서 유래하였고, 카이저나 차르는 관직명이 아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이름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에 카이사르를 꼭 집어넣었다. 원래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정당성 부여의 형식으로 쓰였는데 나중에는 거의 황제라는 뜻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황제를 내세울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로마의 후계를 자처한 국가들인 만큼 로마는 제국의 상징이었다.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자기주체적으로 관습을 탈피하고 칭제하기 전까지 로마와 관계없는 그 누구도 황제를 내세우지 못했고, 19세기에 유럽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왕도 유럽 바깥에서 '인도 제국의 황제' 자리를 얻어오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황제로 칭하지 않았다. 황제를 넷씩이나 둔 시대도 있었다고 하지만, '선임 황제'는 결국 어쨌든 어느 시기에서도 단 하나만 있을 수 있었다. 제국(imperium)의 개념은 이렇게 로마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로마도 언제나 제국으로 여겨졌다.

5. 군사 체계




초기 로마 군대는 규모가 작은 민병대였다. 이 당시에는 5개의 부대로 이루어졌었는데, 3개 부대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호플리테스 부대, 2개 부대는 경보병 부대였다. 왕정 초기 로마 사회는 30개의 씨족 사회(쿠리아; Curia)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쿠리아를 3개로 분할한 트리부스(Tribus)를 징집 단위로 삼았다. 왕정 말기에는 세르비우스 왕의 군제 개혁으로 기존 씨족 사회에 기반한 트리부스를 없애고 지리적 행정 구역을 구획으로 트리부스를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트리부스에서 징집된 병사들을 백 명 단위로 나누어 부대를 편성했다. 이를 백인대(켄투리아; Centuria)라고 불렀으며, 이 부대의 지휘관을 백인대장(Centurio; 켄투리오)이라 불렀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 삼니움족과의 전쟁에서 120명의 병사들을 40명씩 3열로 정렬시키는 마니풀루스 전술이 고안되어 로마 군단은 기원전 3세기부터 이 전술을 채택한다. 이 전술을 채택한 로마 군단은 한 부대에 120명씩 10개 부대로 이루어졌으며, 분대를 나누어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
공화정 시대의 군단은 초기 시절보다 규모가 성장하였으며, 왕이 군 통수권을 가지던 왕정 시대와 달리 집정관이 군 통수권을 가졌다. 그리고 3개의 중보병 부대(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알리)와 1개의 경보병 부대(벨리테스), 기병 부대(에퀴테스)로 구성되었다. 이 시기의 군대는 재산을 소유한 시민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징집된 이들은 전쟁에 필요한 장비를 자금으로 충당하곤 했다.[11] 하지만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 자유민, 노예는 웬만해서는 징집되지 않았다.
기원전 2세기 이후 로마의 시민 계층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로마 군단은 인력소요가 증가하여 예전보다 더욱 약화되었는데, 기원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의해 군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개혁에 따라 로마 군단은 병사들에게 최초로 급료를 주게 되었고, 재산 하한선을 낮춰 '프롤레타리' 라 불리는 재산이 별로 없는 시민들과 도시 거주민들까지 징집 대상을 넓혔으며 이들의 장비를 국가에서 충당해주고 이들이 제대한 후에는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기존 마니플레스 전술에서 대대(코호르스) 전술로 개편하여 한 부대에 120명이 아닌 480명으로 10개 대대를 편성했으며 한 대대는 80명으로 이루어진 센추리아 6개 중대로 조직되었다. 이 개혁은 군대를 보충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지휘관이 돈을 주고 병사를 고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지휘관이 돈을 통해 군 통제권을 과도하게 가지게 되었다. 이런 방식의 개혁은 군사적 역량을 갖춘 정치인들 사이의 내전이 일어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통치자로 집권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에 오르고 제정이 성립된 후 로마 군단은 기존 민병대 체계에서 상비군 체계로 개편되었으며 황제 직속 친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가 편성되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영토가 계속 확대됨에 따라 속주를 관리할 병사가 필요해지자 속주 시민들로 이루어진 보조군(아욱실리아)이 편성되었다. 갈리에누스의 개혁으로 인해 로마군은 국경에서 떨어진 지점에서 전략적 임무를 수행하는 전략 예비라는 개념이 생겼다. 제정 시대의 군단은 전반적으로 황제가 통수권을 가졌으며, 군단장(레가투스)을 통해 권한을 행사했다.

6. 기술과 제도


비록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와 동방 국가들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건축과 정치 시스템, 법학 등의 분야에서 대단한 영향을 후대에 주었다.

6.1. 놀라운 건축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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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유명한 도시들은 대부분 로마에 의하여 만들어진 곳이다. 대개 군사 기지나 로마 이주민들이 세운 마을이었는데 군단병이 곧 시민이었던 로마 군제의 특성상, 식민지에 정착하는 로마인들은 현지인과 결혼한 로마 군인인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영국과 프랑스의 수도가 된 런던(최초에는 론디니움이라는 이름이었다)과 파리(최초에는 루테티움이라는 이름이었다)도 로마가 건설하거나 도시화한 곳이다.
유럽 각지에다가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규모의 건물들을 짓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북방 민족들이 로마의 건축물을 보고 거인과 난쟁이에 대한 신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에스파냐에는 로마 제국이 건설한 다리가 아직도 있다. 에스파냐 카스티야이레온 자치지역 세고비아주의 주도 세고비아에 있다. 조금 풍화되긴 했어도 멀쩡하게 생겼다. '''심지어 지금까지 고쳐서 쓴다.''' 당장 버스나 기차 내려 시내 중심가 시야를 압도하는 크기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세고비아뿐만 아니라 스페인 전체의 랜드마크로 쓰인다. 로마제국에는 400,000 km의 도로가 있었으며, 그중 80,000 km가 포장도로였다. 비슷한 시대의 중국 한나라에는 비포장도로만 35,000 km가 있었고, 포장 도로는 전무했다.
로마의 콘크리트는 "포졸리나"라고 해서, 금이 가거나 훼손되면 그 부분에 규산칼슘이 생성돼서 틈이 매워지는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천연시멘트의 특성으로 기술개발이라고 할 수 없기는 하다.) 그 기술은 동로마(비잔티움) 시대까지는 유지되었으나 동로마 멸망 이후로 실전되었다가[12] 1800년대에 인공 포촐란 시멘트로 복원되었다. 콘크리트의 원형은 이집트인들이 가장 먼저 개발하여 사용했으나, 콘크리트 건축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문명은 로마였다.

그리고 로마의 수로 기술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아프리카의 사막화가 로마의 관개수로들 때문에 지연되었을 정도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사하라를 틀어막을 정도다.물론 로마 이전에도 아직 북아프리카에는 숲이 남아 있었고, 로마도 그걸 물려받은 것이지만, 적극적인 수로 건설로 사하라의 북아프리카 확장을 엄청나게 늦추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밀어냈다.''' 아랍 제국이 동로마를 박살내면서 아프리카를 동로마가 상실한 이후에도 사막 농업에 익숙했던 아랍에 의해 북아프리카는 번영을 누렸으나, 이후 아랍 세력 간의 싸움으로 북아프리카의 관개 시설이 박살나면서 급속히 사막화가 진행되었고, 지금 북아프리카는 죄다 사막이다. 이후로 수로 건설이 다시 시작된 것은 현대에 이르러 중동 지역이 오일달러를 이용해 국내 인프라 건설을 시작하면서부터이고 이 와중에 뜬금없이 대한민국리비아 지역의 수로 공사를 담당하게 되면서 로마 제국의 위업을 계승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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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가도들은 진짜로 '''틈 따윈 존재하지 않는'''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했으며, 중세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돌을 빼갔음에도 아직도 상당히 그럴싸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기나긴 세월을 거처 남은 돌덩이도 풍화되었을 터임에도 비교적 돌 도둑이 적었던 가도들은 지금 모습이 '''옛날 모습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꽤 멀쩡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이탈리아의 간선 국도는 물론 예전 로마 제국 땅이던 곳 역시 로마의 가도에 아스팔트나 철도만 깔고 쓸 정도이다.'''
고대에도 그렇고 중세에도 '''숲만 가득했던''' 옛 갈리아, 게르마니아 지역에 로마는 '''도시를 건설했다.''' 로마에서 시민들에게 인정받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정복 성과를 내고 개선식의 영광을 받는 것인데, 이걸 위해 정복한 땅들은 죄다 숲만 가득한 미개척지였다. 하지만 로마는 거기다가 그냥 도시를 건설해 해결한다. 나무만 있던 많은 곳들을 지금의 도시로 바꿔놓는 기반을 로마가 만들었다. 로마가 저 땅들에 도시를 건설한 덕분에 중세로 이어지는 문명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물론 엄밀히 말해서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도시화하고 개간지로 만든 것은 중세인들의 힘이다. 지중해권과는 달리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지방의 도시의 역할은 지역 거점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로마인들이 건설한 도시의 영향력도 한정적이었다. 결국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서 로마의 유산인 대농장들은 로마가 쇠락하면서 이에 따라 쇠퇴하고, 그에 의존하던 로마의 도시도 쇠퇴를 면치 못했다. 중세 농업 체제의 발전은 북부 유럽에 걸맞는 농경 방식 도입과 발전, 지속적인 기술 개량,[13] 소규모 촌락 공동체에 의한 적극적인 숲 개간이 본질적인 이유였다.
로마의 과학적 수학적 성과도 괄목할 만한 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로마인들의 근시안성으로 그들은 단면적이며 모방적인 이류의 문화를 낳았다. 수세기 동안 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의존함으로써 영감과 독창적 사고의 결함을 보충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의 토지 측량을 착수할 때에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전문가들을 불러들였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달력을 개혁하고자 할 때, 알렉산드리아인을 초빙하였다. 수학, 과학, 다른 예술 분야에서 로마인들이 이룩한 업적이 정말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은, 추상적 사고가 실용주의에 의하여 추동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 가치 없다고 비난하는 '실용적'인 사람들에게는 경종이 될 만한 본보기이다.

모리스 클라인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 中

위 글은 추상적인 분야에서의 그리스의 업적이 뒷받침되어 가시적인 분야에서의 로마의 업적이 나왔음을 얘기하고 있다.

6.2. 시대를 앞서간 식민 정책


공화정 시대의 로마의 식민 정책은 상대국을 노예화하거나 착취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이들이 점령한 도시와 속주에는 동맹국의 지위와 라틴 시민권[14]을 부여하고, 점령지의 귀족 가문의 통치를 그대로 인정하였다. 그 이후 그들에게 요구하는 조건은 단 하나, 동맹국으로서 로마의 전쟁에 같이 참여하라는 것이었다.[15]
기존 피점령 집단의 존재와 통치권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서 그들의 반발은 최소화 되었으며, 이후로도 로마는 스스로 그들의 자치 문제에 간섭을 자제함으로써 피정복민들의 지배층이 그들이 누리던 특권이 침해받는 일이 그다지 없게 하였다. 로마와 동맹하여 같이 싸우는 것이 그들의 안보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피정복민들은 로마의 패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안주하였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제국화되어 갔다.
이러한 관계는 로마에게도 유리했는데, 각지의 다양한 특색을 가진 보조병은 주로 중보병을 편성하는 로마군에게 다채로운 병과를 제공하여 군사력이 강화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에게 일괄적으로 제공받는 보조병은 독자적으로 최대 8만 남짓한 20개 군단의 동원력을 가진 로마가 이것의 1.5배에 달하는 병력을 추가로 동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결과 로마는 자비로 용병을 고용하는 카르타고나, 자비로 왕국의 시민병을 징집해야하는 동방국가를 능가하는 물량 동원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군사적 이점뿐만 아니라 정책상의 편리함 또한 제공해 주었는데 점령지를 직접 통치하기 위한 관료제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를 갖추기 위한 비용을 크게 절감시켜 주었으며 각 도시의 지배집단이 스스로 하는 통치는 지배의 효율을 높여 주었다.
결과적으로 로마는 그들의 영역을 빠르게 확장할 수 있었으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보존한 지중해의 문명권 모두를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넣는 데 성공하게 되면서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 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다. 정복하는 일보다 점령해 굳히는 게 더 어렵고 많은 물량이 소모되는 일임을 감안하면, 로마는 다양한 문화를 가진 피정복민들을 그들의 세력하에 빠르게 편입할 수 있었다. 이런 정책의 유리함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수행하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단기간에 넓은 갈리아 지역을 제패함으로써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이러한 공화정 로마의 정책은 당시에 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로마 주도의 평화'라 칭송받았다. 이런 정책은 로마가 지중해 문명권을 통합한 뒤 천천히 도시국가에서 영토 전체에 크게 기반을 두는 단일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버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제정 말기에는 여타 제국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공화정 당시 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른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지역을 정복하고 지배할 때 선택 가능한 대외 정책으로서는 유리한 면이 있었다.

6.3.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




7. 문화




7.1. 문학


키케로,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황금기, 그 이후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시기(14 ~ 138)를 은세기라고 부른다.
황금기 시절에 유명한 문학가로는 베르길리우스가 있다. 여러 내전을 종식시키고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를 찬양한 아이네아스가 유명하다. 로마 제국의 검소한 농경 문화와 현재를 즐기자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호라티우스의 서정시, '연애의 기술'을 창작한 오비디우스의 문학도 유명하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에 본질에 관하여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시 형식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은세기의 대표적인 문학가로는 세네카가 있다. 세네카는 그리스 비극을 모방하여 몇 편의 비극을 제작하였으며 로마 제국의 타락을 풍자한 유베날리스, 마르티알리스도 유명하다.
산문 문학으로는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고 일컬어진 사티리콘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내용이 많이 실전되었다. 사티리콘의 풍자성은 이후 스페인의 피카레스크 문학으로도 이어진다.

7.2. 미술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은 로마 제국답게 대체로 그리스 예술의 모방에 불과한 작품이 많지만 로마 제국의 독자적인 미술 양식으로는 모자이크가 있다.

7.3. 조각


이상미를 구현하려는 그리스와 격정미를 구현하려는 헬레니즘 시절의 조각상과는 다르게 사실미를 구현하려는 성향이 짙다. 황제의 조각상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8.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



[image]
Daniel Voshart가 800장이 넘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머신 러닝 기법을 통해 사진으로 복원한 로마의 황제들(아우구스투스~누메리아누스·카리누스)[16]

9. 로마의 이것저것


로마 시절에 너무 잘 나갔는지, 후손인 이탈리아인들은 세기말 막장 군대로서 새로운 전설들을 쌓고 있다. 오죽하면 로마인들 중 반은 국가 세우러 가다 죽고, 반은 국가 지키다 죽어서 이탈리아인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고 로마를 이탈리아인만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대한 오류이긴 하다.
그리고 로마의 모든 신민이 라틴어로 대화한 것은 아니다. 대개의 지역은 토착어를 그대로 활용하였고, 특히 그리스를 포함한 동부 지역은 라틴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여기에 로마인들이 공부한 문학의 대부분이 그리스어로 되어 있어서 적지 않은 상류층은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당장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만 하더라도, <명상록>을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썼을 정도. 그리고 카라칼라 황제가 로마의 심장부에 건설한 대형 욕장에 부설된 공공 도서관에는 같은 크기의 방 두 곳에 라틴어 서적과 그리스어 서적이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만 봐도 제국에서의 그리스어 위상이 대단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만 하더라도 그의 모국어는 당시 중동 지역 토착언어인 아람어였으며, <신약성경>과 초대 교부들의 다수 문헌이 학술 언어인 그리스어로 서술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라틴어가 완전히 학술적으로 찬밥이었던 건 아니고, 서로마 말기 사람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어로 저술 활동을 했으며 그리스어와는 친숙하지 못하였다(『고백록』1,13,20).
로마는 전기에는 잘 나갔으나 이후 국가가 혼란해지면서 종교관이 바뀌었다. 심지어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에는 신은 이전 세대의 영웅이나 자연현상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이전세대가 과장한 것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나 있었을 정도였다. 물론 3세기의 위기와 같이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리는 현상은 언제나 있었지만 나중에는 다른 종교를 제치고 기독교가 커지게 되었다. 전기 그리스도교의 부흥기에는 미트라교, 이시스교 등의 신흥 외래 종교 역시 유행했고, 그리스도교와 이런 신흥 종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기독교는 당대 로마 제국에 있던 수많은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고, 로마 제국의 쇠퇴 원인은 근본적으로 정치ㆍ사회적인 변화 등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융성은 백 번 양보해도 원인이 아닌 결과고, 그리스도교가 로마 멸망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국가가 쇠퇴한다고 종교가 발전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애초에 로마의 쇠퇴도 서로마 멸망=로마 멸망으로 바라봤을 때 성립된다[17]. 로마는 중심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1000년을 그리스도교 제국으로서 버텼다. 천도 이후의 로마, 다시 말해서 동로마 제국은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삼위일체, 성화상 논쟁, 동서 교회 분열 같은 기초 그리스도교 지식을 강제 학습하게 될 정도로 기독교를 신봉하는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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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으로도 그리스도교를 지지하는 것이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로마 황제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이 줄어든 상태라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이민족들과 직접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침략자인 게르만족도 종파는 달랐지만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18]
로마는 정복 사업의 정체, 노예 감소로 인한 노동력 감소, 경작지 황폐화, 은광 생산 감소가 겹쳐서 사회적으로 침체된 상태였는데, 3세기에 들어서 북방 게르만족의 남하가 거세졌고 국경선에 가해지는 압력이 1, 2세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져서, 기존의 군단병을 이용한 선 방어(Limes, 리메스)로 막아 보려다가 물량으로 한 군데 집중해서 우르르 밀고 들어오는 게르만족에게 털리게 되었다.(3세기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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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로마가 관리해야 하는 국경은 엄청나게 길었고 따라서 한 군단이 커버하는 길이는 어마어마했다. 군단 하나가 6천 명 정도였는데 이것으로 상당히 넓은 국경을 관리해야 하는 셈이었다. 아무리 무적의 로마 군단이라도 한 군단으로 최소한 10만에서 20만 단위로 남하하는 게르만족에 맞설 수 없었고, 황제가 직접 국경으로 와서 군단을 한데 모아 쳐부수는 방식을 쓰게 되었다. 문제는 로마는 전략 예비대를[19] 두지 않았기 때문에 군단을 소집하려면 각 군단 기지에서 빼내야 했다. 그쪽 국경을 텅텅 비워 놓아야 해서 이렇게 빈 곳으로 빈집털이를 들어올 경우 로마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병 전력을 늘려 기동력을 향상시켜서 게르만족이 중심부로 들어오기 전에 요격하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기존의 중보병 중심의 로마군 체계가 뒤바뀌었다. 잘 나갈 때는 기존의 로마식 체제로도 충분했지만, 사방에 적이 늘어나고 업무가 가중화되다 보니까 동방식 관료 체제와 4황제 체제로 바꿔서 정부 통제와 업무 능력을 향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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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렇게 내세운 4황제들이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황제가 넷이라는 건 동일한 계급에 군사 지휘권까지 가진 최고 권력자가 넷이라는 것이고[20] 다른 3명을 제거하면 자기 혼자 권력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한 건 다른 황제들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박 터지게 싸운 것이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어느 정도 진정시키지만, 공동 황제끼리의 대립은 완전히 해소할 수 없었다.[21]
로마의 동서 분열 시기쯤 되면, 서로마 제국 황제들은 로마가 아닌 라벤나에서 거주했으며 통치도 라벤나에서 했다. 이후 라벤나는 사실상 행정적으로는 서로마의 중심이 되었으며 서로마 멸망 이후 고트족도 라벤나를 수도로 썼다. 물론 원로원은 아직 로마에 있었다.

라벤나가 로마를 대신한 이유는 거의 순전히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라벤나는 라인, 도나우 국경에 훨씬 가까운 데다 아드리아 해를 끼고 있어 지중해 동쪽으로 가기도 수월했다.
제국이 된 이후에는 로마의 인구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농지는 전쟁 등으로 버려지거나 했기 때문에, 상당한 양의 곡물을 지중해의 뱃길을 통해 수입해야 했다. 이 시기에 로마로 오는 식량의 주요 생산지는 지중해를 통해 식량 공급을 하기에 용이했던 북아프리카이집트였다.[22] 그렇다고 이탈리아의 농사가 완전히 폐농한 건 아니고, 밀 농사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값싼 곡식과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밀 대신 포도나 올리브 등의 재배에 주력하게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밀 농사를 짓는 농장도 없지 않았고 기본적인 식량이었기 때문에 양으로 따지면 언제나 주류였다.
유럽 문화의 근간으로 여겨지는 로마지만 실제 독서 문화 자체는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로마 시대에는 프린터복사기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인쇄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일일이 필사해야 하였으며 당시에 책이라는 물건 자체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23] 로마 시대에 은 어디까지나 장식품으로 여겨졌으며, 독서보다는 연설 능력이 더 높게 평가되었고, 철학자들의 능력도 독서와 강연을 통해서가 아닌 연설과 대화를 통해 길러졌다. 심지어 일자무식인 장군들이 외부로 원정나가서 전리품으로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장식품으로 집안에 진열해 놓으면, 종이가 부족한 로마 본토에서는 이 위에 덧칠해서 새로운 책을 만들었을 정도. 그래서 로마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되는 책들 다수에는 뒷면에 고대 그리스, 중동권의 글이 쓰여져 있다. 현대에는 기술적으로 이 둘을 분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로마가 위치한 라티움 지방에서는 가장의 권위가 막강하였는데, 가장의 권한은 세습되기도 하였다. 가족 내의 가부장권은 사회로 확장되어 파트로네스(보호자)-클리엔테스(피호민) 관계로 확장되었다. 다만 파트로네스는 가부장권에서 확장된 피호민에 대한 권리보다 피호민에 대한 의무가 훨씬 더 무거웠고, 이는 로마 사회 특유의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9.1. 로마 속담


si fueris Romae, Romano vivito more.('''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로마에 가면, 로마 법에 따르라.''') [24]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

Roma uno die non est condita(Rome wasn't built in a day.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25]

Alea iacta est.(주사위는 던져졌다.)

덕이 있는 사람은 중용을 택한다.(Virtue takes the middle course.)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A sound mind in a sound body)

Si vis vitam, para mortem.(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Qui desiderat pacem, praeparet bellum.(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각자의 몫은 각자에게로

술 부대는 처음 담은 술의 향기를 기억한다

모든 생명은 알에서부터 나온다

아무리 나쁜 책이라도 도움이 안 되는 책은 없다

위대한 제국은 소심함으로 유지 되지 않는다.[26]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불안해 한다. [27]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받게 될 것이다. [28]


9.2. 납 중독


로마제국은 연간 80,000톤에 달하는 을 생산하였고, 이것은 산업혁명 시기의 유럽과 거의 맞먹는 규모다. 이로 인해 서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대기오염을 초래하기도 했다. 실제로 오늘날 그린란드빙하코어 샘플에는 2000년 전 로마에서 생산되었던 납물질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이런 많은 납 생산 덕에 로마는 실생활에도 납을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을 사용한 송수관이다. 그래서 로마가 멸망한 원인 중 하나가 납 중독이라고 보기도 한다.
로마인들도 납의 독성을 알고 있었고, 납 송수관의 경우는 송수관 내에 흐르는 물의 석회질이 코팅 효과를 내 납 중독을 막아주었다. 그런데도 납에 심하게 중독되어 사망한 유골들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납을 식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납 용기에 포도주를 담아 가열하면 둘 사이에 반응이 일어난다. 그러면 용기 아래쪽에 연당, 또는 아세트산납(II)(Pb(CH3COO)2)이 생성되는데, 이 물질에서는 단맛이 나서 로마인들은 그걸 조미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여러 로마 시대 요리책에도 연당이 요리 재료로 자주 언급된다.
'''납 중독으로''' 로마가 멸망했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골에 자주 나타나는 납 중독 흔적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로마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먹은''' 납으로 인해 건강에 해를 입었다는 것은 맞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계급이 높을수록 납 노출량도 높아졌다.[29]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납 중독설은 제국의 동쪽 절반이 서방으로부터 단절된 뒤에도 오래 살아남은 사실로써 부정된다.

프린츠 M.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


9.3. 로마는 어느 나라의 역사인가?


비록 이탈리아 내부의 도시국가로 출발했지만, 지중해 세계를 재패한 제국이라 서양사 곳곳에 발이 걸쳐있으며 '제3의 로마'라 하여 많은 국가들이 계승을 자처했기에 현대에도 "로마는 누구의 역사인가?"하는 떡밥이 존재한다.
학계에서는 이미 로마는 서양사 그 자체라는 것으로 결론이 나와 있으며 이는 서양의 일반 대중들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다. 과거에는 국가 및 왕조의 정통성, 민족주의와 얽혀 역사학계에서도 꾸준한 논란거리였으나, 21세기 역사학계는 민족주의 감정이나 개인의 기호에 좌우될 정도로 그렇게 만만한 분야는 아니다.
국내의 역덕후들 사이에서는 로마의 후계 국가가 어느 나라인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자들을 '롬스퍼거[30]'라고 멸칭하기도 한다. 아무튼 역덕후들이 주로 언급하는 로마의 후예 후보들은 다음과 같다.
  • 동로마 제국 관련
    • 그리스: 고대 그리스 문화는 로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동로마 제국공용어그리스어였으므로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
    • 터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현재 이스탄불을 지금도 통치하고 있고 오스만 제국이 로마의 후예를 자처한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 러시아: 동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정교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왔으며, 모스크바제3의 로마를 계승했음을 주장하여 국가 문양도 쌍두독수리를 쓰고 있다.
    • 루마니아: 루마니아인은 고대 로마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에 속하고, '로마인의 땅'을 뜻하는 명칭을 국호로 삼았으므로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
    • 불가리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고, 바실레우스 칭호의 사용을 동로마로부터 인정받았고[31], 불가리아 제2제국의 수도인 벨리코 터르노보제3의 로마라고 부른 것에서 후예임을 주장
    • 세르비아: 스테판 두샨 재위 기간 동안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한 것을 근거로 로마의 후예임을 주장
  • 그 외
    • 미국: 근대식 공화정 체제를 구축하고 로마의 보편 제국의 형태에 가장 가까우며 압도적인 국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패권 체제인 '팍스 아메리카나'를 확립한 형태가 로마 제국과 유사하다는 주장. 물론 미국은 로마의 역사적 계승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미국과 로마의 유사성은 학계에서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여기서 대다수는 롬스퍼거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조선중화주의 드립을 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학계에서 진지하게 연구할 때는 대체적으로 이탈리아그리스의 비중을 높게 둔다. 물론 알려진 바와는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은 나름대로 로마 제국 계승에 필요한 여러 조건은 갖추고 있었고 스스로도 그 본질을 자신있게 주장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중국사의 북위-북주- 제국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슬람 제국이 차지한 옛 로마의 고토를 회복하는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실패했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조차 로마인은 자신들과 다르다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혹시 트로이야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는 오래된 트로이야를 출항해 수많은 바다를 항해하다가 변덕스런

폭풍에 떠밀려 리뷔아의 해안으로 왔습니다. 나는 경건한 아이네아스로

가정의 수호신들인 페나테스 신들을 적군에게서 뺴앗아 함선들에

싣고 가는 중이며 내 명성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나는 '''내 조국 이탈리아'''와

최고신 유피테르에게서 태어난 나의 친족을 찾고 있습니다.

아이네이스》 제1권 375-380행, 천병희 역

하지만 지금 그뤼니움의

아폴로께서는 나더러 위대한 이탈리아를 차지하라고 명령하셨고,

그분의 리퀴아 신탁소에서 던져진 제비에도 이탈리아가 적혀 있었소.

그곳이 나의 사랑이고, 나의 조국이오.

아이네이스》 제4권 344-346행, 천병희 역

로마는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내부의 도시국가로 출발했으며, 로마의 건국 서사시인 《아이네이스》에서 이탈리아를 '조국'이라 표현하는 등 '''이탈리아가 로마의 장녀'''라는 데는 큰 이견은 없는 편이다.[32] 로마는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보편제국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대 카토는 '그리스산 외래 문화'를 꺼렸으며, 심지어 동로마 제국에서도 라틴적 뿌리의 흔적은 있었고[33], 로마법 대전은 거의 전부가 라틴어로 쓰였다. 물론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동로마를 이탈리아적 성격만으로 이해하는 건 꽤 극단적이지만, 로마의 시작은 이탈리아였고 그 흔적은 동로마때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다만 지중해의 거대 제국으로 확장된 로마는 이탈리아만의 역사가 아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그럼 한나라는 한국사냐"라고 동아시아나 다른 권역에 비유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한나라는 로마 제국처럼 한반도 제민족을 융화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나 로마 제국은 성공했기에 잘못된 비유이다. 로마가 민족적인 모습을 탈피하기 시작한 건 이미 공화정 말기에서부터 단초가 있었고, 3세기에 가면 로마는 이미 행정적인 기능을 거진 상실한 지경에까지 가는데 이후로도 로마 제국은 천 년 넘게 존속했다.
옥타비아누스 시대 때는 온 이탈리아의 충성 선서가 정치적 정당화이기까지 했고, 이탈리아는 단지 '제국의 옛날 수도가 있던 곳' 정도의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그야말로 고대 로마의 몸통이었으나, 불과 3세기만 되어도 상황이 바뀐다. 3세기경 로마시(市)와 이탈리아 전역을 차지한 막센티우스는 죽을 때까지 로마 전체에선 결국 불법 아우구스투스에 불과했다. 물론 다름아닌 로마시에서 아우구스투스로 추대받은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는 달리 재론의 여지가 없는 로마 세계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으나, 이는 콘스탄티누스가 그전에 합법 카이사르로 제국 전역에서 인정받은 실질에 로마의 권위가 더해져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즉 이미 그 시기에 로마시는 몸통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로마'라는 국가는, 이탈리아 도시 국가로 시작하였으나 '로마 제국'에 이르러서는 그 성격이 희석되었다. 그러므로 지중해의 거대 제국을 이탈리아적 성격만으로 단편적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이에 대한 반발로 극단적으로 이탈리아 지분을 낮추는 것 모두 비역사적 인식이다. 사실 이러한 이유에는 일반인 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역덕후들도 '로마사'하면 포에니 전쟁삼두정치, 제정의 성립, 군인 황제 시대 정도까지만 하면 끝나기 때문인 것도 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나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다보니 일반 대중들에게 로마 제국은 어디까지나 라틴 민족의 라틴어를 쓰는 이탈리아 반도의 나라 수준에 머물러 있어, 고대 로마의 헤게모니를 이탈리아로만 한정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제정기에 극적으로 변한 것은 누가 로마인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는가를 가르는 기준이었다. 공화정기에 로마 시민권은 동맹시 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비로소 이탈리아 반도의 여타 로마인들에게 부여되었고, 비(非)이탈리아인에게 허용된 경우는 예외적 특혜일 뿐이었다. 그러나 서기 1세기와 2세기에 로마 시민권은 전 지중해 세계로, 3세기에는 제국의 전체 주민에게 확산되었다. 이렇게 점점 더 로마화되는 세계에서, 공화정의 전통은 로마 본토 너머의 지역에서는 의미를 잃게 되었다. 갈리아와 스페인, 혹은 동부 그리스의 속주들에서 새로이 로마 시민이 된 사람들은 자신들을 격파한 로마 공화정 군대와 전쟁을 기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화정에 대한 지식은 점차 줄어들었다. 다만 귀족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요했다. 이들은 4세기에도 자신들이 위대한 공화정기 영웅들의 후손(허구적인 것일지라도)임을 주장하며 자부심을 품었다.

데이비드 M. 귄, 『로마 공화정』 中

그리스는 일단 이탈리아 다음으로 로마사에 지분이 있다고도 볼 수 있으나, 후기 로마사를 포함하여 비잔티움사가 온전히 그리스사에 귀속된다는 그리스인들의 주장은 이탈리아, 불가리아, 터키 등지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탈리아 또한 로마사에 대한 자부심이 크지만 그리스처럼 로마사의 배타적인 연고권을 주장하진 않는다. 그리스가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유 중 하나는 로마에게 통합된 이후론 19세기까지 스스로의 국가를 이루지 못한 민족이란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9.4. 국내에서의 인식


로마에 대한 한국에서의 인식은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현대적인 로마사를 따른 시각은 드물고, 이미 폐기된 학설이나 아예 역사학으로 볼 수 없는 시각에서 비롯된 왜곡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로마에 대한 한국에서의 대중적인 인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처럼 로마를 그저 폭압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고대 제국으로 보는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식하기는 하나 초중기 공화정 및 원수정 초기의 로마에 한정되며 기독교화가 진행되고 야만족 및 동방과의 교류를 통해 기존 로마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된 후기의 로마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시각이다. 역사학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지 못한 한국에선 아직까지 전자의 시각을 많이 찾아볼 수 있어서 로마에 대한 인식이 좋은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어느 정도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들이 주류인 후자의 인식도 바람직하진 않다.
전자의 인식은, 주로 역사학이 아닌 여타 문서나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반감이 근대 제국주의와는 거리가 먼 고대 국가인 로마에게까지 미치는 경우다. 역사적으로 로마의 위상은 언제나 높았고[34], 오히려 로마의 가장 큰 미덕은 그 특유의 다문화적 모습에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35] 최소한 근대의 제국주의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로마를 마치 고대 스파르타와 같은 군국주의 국가로 인식하고, 당대 로마의 이례적인 선진성이나 그에 기반한 통치 전략, 제도, 법률, 문화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점에서는 팍스 로마나와 같은 로마 시대의 태평성대를 이야기하거나 로마를 고평가하는 시각들을 거부하며 로마의 평화를 '거짓된 평화' 와 같은 식으로 많이 인식한다. 로마는 군사력을 토대로 주변 속국들을 강압적이고 잔인하게 찍어누르고 착취했으며, 로마의 평화는 말 그대로 극소수의 부유하고 나태한 귀족들에게 집중되었다는 인식도 강하다. 먼나라 이웃나라 등의 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치와 향락에 찌들어 자멸한 로마에 대한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 크고, 그런 시각에서 로마는 자체로 특별할 것은 없는 고대 제국 중 하나에 불과하고, 오히려 대체로 인지도가 낮은 다른 제국들에 비해서도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매우 큰 떡밥이었던 로마 VS 한나라와 같은 떡밥이 많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같은 아시아권 국가인 한나라에 동질감을 느끼고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로마를 무분별하게 폄하하며 한나라의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정도야 양반인 편이고, 심지어 고구려에 비견하며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보는 시각도 많았는데, 이는 동양사에는 약간의 소양이 있을지 모르나 서양사, 로마사에는 무지하며 그저 대중적 인식에 반제국주의적 신념까지 곁들여져 왜곡된 시각이 불과하다. 로마 vs 한나라 떡밥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에 대해선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고 흥미로운 주제일 수는 있으나, 일방적으로 로마가 발린다고 호언장담할 정도는 결코 아니다.
사실 이는 중국의 광활한 영토와 삼국지 등에서 종종 등장하는 "백만대군" 얘기 때문에 막연히 한나라가 더 크고 강하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한데, 실제 면적을 비교해보면 통일왕조인 전한 기준으론 600만 제곱킬로미터, 로마 제국은 500만 제곱킬로미터 정도이며, 인구수로 따지면 전한은 5700~5900만 정도로 추정되고 (후한은 5600만),로마제국은 5600만명대이다. 게다가 영토의 면적은 한나라가 더 넓지만 광활한 사막지대 및 당시로선 미개척지가 많은 강남지역을 포함한 영토이며, 반대로 로마제국은 (못 쓰는 땅이 없는건 아니지만) 대부분 기존 문명이 있는 지역까지를 영토로 치는지라 실제 통치구역은 별 차이가 없다. 즉, 사회 시스템이나 군대, 기술을 떠나 실질적인 고대 국가의 국력의 토대가 되는 영토나 인구 면에서 둘은 유의미한 차이가 있지 않다. 기술이나 문명 같은 것은 워낙 환경이 다르기에 우열을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강성한 거대제국인 한나라도 그럴진데 고구려와의 비교는 더더욱 무리수다. 고구려의 인구는 기록상에 남아있는 것은 수백만대로 추정이 되며, 아주 과대평가하는 측의 추측도 천만명을 넘지 않는다. 당시 고구려는 전한보다 국력이 쇠한 후한, 이 후한이 쪼개진 지역(삼국시대)의 대부분을 차지한 위나라도 상대하기 버거워했다.
후자의 인식은 90년대 중반 들어온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크게 전파된 시각으로, 현대에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사장된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고전적 역사학의 시각인, '고대의 로마에 대해서만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기독교가 전파된 후기 로마 및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해당 서적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중기 로마에 대해서는 찬양 일색이며 심지어 타 민족과의 관계에서 무조건적으로 로마를 옹호하고 타 민족을 비하하는 등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반면, 후기 로마에 대해서는 진정한 로마로 인식하지 않으며 이전의 로마에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열등했던 시기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이 유입되면서, 비슷한 인식이 로마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런 관점은 앞서 언급된 전자의 시각과 결합하며, 초중기 로마는 이상적인 국가가 맞으나 후기 로마는 말 그대로 사치와 향락에 찌들어 국방에는 무관심하여 용병에 의존하다가 멸망했다는 식의 인식도 잦은 편이다. 현재까지도 서양사가 전공으로서 개설된 대학이 거의 없다시피 한 국내 환경에서, 로마사를 정식으로 배운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따라서 인지도 높은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로마사를 접하게 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로마에 대해 이런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수도 있다.
다행히 근본적으로 역사학 서적이라고 볼 수 없고 그 시각부터가 이미 한참 전에 폐기된 학설을 그대로 따왔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자신만의 관점에 의해 왜곡된 시각들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러한 인식에 대한 반성과 배제가 나타나고 있으며, 로마사에 관심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런 관점은 대부분 배척되는 추세다. 심지어 이미 1962년에 초판이 나온 서적인 『하이켈하임 로마사』에서도 이런 시선을 비판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는 종교의 비합리주의에 반대하거나 고전 문화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서기 5세기까지 로마 문화를 주도하고 그리스도교를 배척한 이교 지식인들의 편견을 그대로 취한 여러 사상가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군사적 열의를 침체시킨 위험한 평화주의를 조장했고, 소중한 병력 자원을 수도원으로 빼냈고, 갈수록 위태로워지던 국가를 구하는 데 필요한 우수한 인재들을 교회의 성직자로 끌어들였으며, 타 종교들에 불관용하고 내부적인 교리 분쟁을 일삼으로써 위기 때에 국가를 지키는 데 필요한 내부의 통일을 파괴했다고 주장한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비판이 정당해 보일 수가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인들이 종교적 이유로 군 복무를 거부하는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황제들의 군사 정책은 다른 많은 황제들의 정책을 따랐으며, 심지어 그리스도교 주교들이 자기들의 도시들을 방어하는 데 앞장선 사례들도 있다. 많은 유능한 성직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를 거부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속사에 참여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률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세속을 등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과오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와 상관 없이 존재하던 삶의 압박에서 도피하고 있었고, 비록 수도원이 없었을지라도 다른 피난처를 찾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열을 초래한 그리스도교 교리 투쟁들이 제국에 해를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투쟁들은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투쟁들을 낳았을 좀더 깊은 사회·경제적 문제들의 징후들인 경우가 많았다.

프린츠 M.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

결과적으로 로마에 대한 크게 왜곡되어 있는 대중적 인식 중 후자는 차츰 폐기되고 있으며, 이미지와 인식에 기반한 것이 아닌 사실로서의 역사를 따라야 한다는 시각에서 볼 때 이런 움직임은 바람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0. 대중문화 작품



10.1. 소설



10.2. 드라마



10.3. 영화



10.4. 만화



10.5. 게임



11. 고대 로마를 모티브로 한 세력들


사실 판타지 장르에 나오는 거의 모든 '고대의 제국'은 로마를 모티브로 했다고 보면 된다.
  • 닐프가드 제국(더 위쳐 시리즈)[36]
  • 녹서스(리그 오브 레전드)[37]
  • 누메노르(레젠다리움)[38]
  • 루시스 왕국(파이널 판타지 XV)[39]
  • 고대 마레 제국(진격의 거인)
  • 발리리아 자유국(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 카이사르의 군단(폴아웃: 뉴 베가스)
  • 인류제국(Warhammer 40,000)
  • [40]
  • 제국(엘더스크롤 시리즈)
  • 티빈터 제국(드래곤 에이지 시리즈)[41]
  • 아마르 제국(EVE 온라인)
  • 은하제국(파운데이션 시리즈)
  • 은하 공화국(스타워즈)
  • 프로토스(스타크래프트)
  • 판엠(헝거 게임 시리즈)
  • 화성제국(덕 다저스)
  • 아바론 제국(로맨싱 사가 2)
  • 갈레말 제국(파이널 판타지 14)

12. 관련 문서



13. 역사보기 틀






































[3] 중세 초기의 서유럽은 서로마를 계승한 프랑크 왕국이 주도하고, 그 이후는 또다시 서로마의 계승을 자처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컸다.(신성 로마 제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인 18세기까지도 유럽 역사에 영향력을 남긴다.) 이렇게 로마 제국은 멸망 이후에도 유럽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4] 이 때문에 '로마의 계승국은 어디인가' 하는 역덕후계의 우스갯소리가 있다. 자세한건 아래 참조.[5] 공화정 말기까지 로마는 가히 최강의 병력 보충 능력을 갖춰 물량에서도 막강했는데, 그 와중에 여러 전술을 잘 받아들인 덕분에 병력의 품질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화정 말기부터 쌓인 문제 때문에 결국 무너진다.[6] 실질적으로 현실에서 사용하는 나라나 민족이 없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사실상 사어에 가깝다. 하지만 영국의 사립 학교 등에서는 아직도 버젓이 주요 과목으로 남아 있는 데다 13+ 시험 과목이기도 하다. 가톨릭트리엔트 미사 때 사용되는 언어고 서양 각국의 언어에 그대로 쓰이는 표현도 많으며 멋부릴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서민 라틴어에서 파생된 각각의 로망스 어군의 언어들 모두 라틴어 자체가 변형되어 형성된 언어들이라 볼 수도 있다.[7] 보통 어떤 식으로든 혈연 관계가 있는 사람을 고르기는 했다. 아들이 아니면 조카라거나 사위라거나 하는 식이었다.[8] 그러나 사실상 아들보다 현명한 사람을 지명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은 아들이 없는 경우였다.[9] 다만 이러한 체제의 미흡성이 명분보다 실력을 우선시하는 로마인의 사상과 만나 로마의 존속을 위협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천년의 시간을 연명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 오현제 이후의 제정 로마는 갈수록 악화되는 기상환경과 이민족의 침략, 로마 사회 특유의 고질적인 문제나 경제적 위기가 총체적으로 합쳐진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부패해가는 시체'였다는 것이 (당대 지식인들에게도, 후대 학자들에게도) 중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고대에 천년, 중세에 천년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무능한 황제로 인해 혼란기가 찾아와도 끝내 유능한 황제가 나타나서 혼란을 종식하고 반석 위에 체제를 정비했기 때문이다.[10] 세금 걷는 것을 직업으로 하던 세리들이 알아서 세금을 걷던 로마식 세금제도를 개혁해 보려던 도미티아누스는 문제있는 황제로 낙인찍히고 기록 말살형에 처해졌다. 이 문제는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가서야 개선되지만 적어도 3세기 초까지는 로마의 국가 유지 지속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식의 조세제도는 카이사르에 의해서 공화정 말기 때 개정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본인도 총독을 해봤고, 집정관 시절에 크라수스를 도와서 세리들이 걷어야 하는 세금을 낮춰주는 법안을 통과해서 세리제도의 폐해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경매에 붙여서 가장 많은 세금을 걷겠다고 약속한 세리에게 세금을 속주들에서 걷을 권리를 주는 형식이 아니라, 해당 속주에서 알아서 정해진 액수만큼 걷는 형식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이 법안이 통과되기 전에 암살당했다.[11] 부유한 시민들은 말을 자금으로 구해 기병에 나서기도 했다.[12] 시멘트 자체는 계속해서 사용되었다.[13] 전술했듯 로마 멸망 전에는 이런 농경 방식은 많이 한정적이었다.[14] 로마 시민권보다 한 단계 낮은 단계의 시민권으로, 공직 선거 및 피선거권이 없다. 다른 권리는 로마 시민권과 동일하다. Civitas sine suffragio(영어로는 Citizenship without suffrage. 영어 위키백과)[15] 나중에는 이런 동맹시들 및 속주들이 로마 시민권을 요구했는데, 이걸 들어줘서 켈트족들에게까지 시민권을 주고 원로원 자리까지 준 게 카이사르다.[16] 출처[17] 물론, 로마 제국 전체의 역사로 보면 쇠퇴가 맞긴 하다. 나라의 서쪽 지역이 뭉텅이로 날아가고 동쪽 부분만 남은 채로 근 1000년을 버텨야 했으니, 이걸 쇠퇴라고 안 부르는 게 외려 이상한 것이다.[18] 로마인들은 정통 교리인 아타나시오파(삼위일체파)를, 게르만족들은 대부분 이단아리우스파를 믿었다. 일례로 알라리크가 로마를 함락시킬 때 성당 안에 피신한 로마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약탈이나 살해 등을 금한 것을 들 수 있다. 이후 성당으로 피한 이들이 안전을 보장받는 선례가 되어 기사도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 4차 십자군이 까인 이유 중 하나로, 성당을 약탈했다는 게 들어간다. 그렇지만 훈족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성당으로 피하든 말든 모조리 죽여버리고 약탈했다. 이런 것 때문에도 훈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19] 특정 지역의 방어선이 뚫리거나 한 곳에 적이 집중해 올 경우 추가적으로 증원하는 부대로 예비군과는 다르다.[20]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처음 제도를 만들었을 때는 동일한 지위의 황제인 정제(正帝)는 2명뿐이고, 나머지 2명은 부제(副帝)로서 정제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자마자 이 시스템이 무너진다.[21]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란 직책을 공화국 시기의 집정관처럼 만들려고 할 수도 있었다. 애초에 임페라토르가 공화정 시절에는 병사들에게서 인정받은 개선 장군을 뜻하는 말이었고, 그것이 제정 시절 들어가서 군사적인 색채를 짙게 가진 '황제'를 가리키는 명사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키케로 시대를 기준으로 가르치는 고전 라틴어에서는, Imperator(임페라토르)가 '황제'라는 뜻이라고 '''하지 않는다.'''[22] 흔히 북아프리카 하면 사막을 떠올리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북아프리카 해안가는 올리브 생산으로 유명하다. 특히 고대 카르타고의 영역이었던 튀니스, 알제리 지역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도 풍부한 밀 생산량을 자랑했다. 고대부터 '제국의 바구니' 소리를 들었던 이집트도 마찬가지다.[23] 다만 제본 방식이 두루마리 형태에서 현재의 방식으로 바뀌었던 것은 로마시대에도 일어났다.[24] 성 암브로시오(340~397)가, 지방마다 단식일이 다른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밀라노에선 밀라노의 단식일을, 로마에선 로마의 단식일을 따른다는 의미. 원래는 이 구절 뒤에 '다른 데에 가면 다른 곳의 법을 따르라(si fueris alibī, vīvitō sicut ibi)'라는 구절이 따라온다.[25] 세르반테스[26] 타키투스 [27] 율리우스 카이사르 [28] 시라쿠사의 아테나고라스[29] 그래서 로마 역사상 건강하게 오래 산 사람들은 대부분 스토익 철학에 따라서 검소하게, 즉 소식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로마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토할 때까지' 먹었다.[30] 로마+아스퍼거 증후군. 일부 철덕이나 버덕들이 비상식적인 언행을 보여 철스퍼거, 버스퍼거 등의 멸칭을 얻었듯 같은 원리로 로마 얘기만 나왔다 치면 특정 국가 추종자들이 제3의 로마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탄생한 별명이다.[31] 단, 동로마는 '불가리아의 황제' 칭호만 인정하고 로마 황제까지 칭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32] 이와 관련해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사실 중 하나가 일부 롬스퍼거들이 로마는 이탈리아인 만의 나라가 아니었으며 현대 이탈리아 또한 라틴족 외 이민족 혈통이 유입되었으므로 로마의 후예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는 점인데, 후술하듯 고대 로마는 이탈리아적 특색만 존재한 국가가 아닌 보편 제국의 성격이 강했기에 아주 틀린 말 만은 아니다. 근데 로마의 구성원이었던 국가 중 '''어디는 안 그랬나?''' 저런 주장을 펼치는 경우 십중팔구 신성 로마 제국, 러시아, 오스만 튀르크에 주안점을 두는데 나름대로 로마의 후예를 자처할 근거는 있었으나 이탈리아에 비해 그 당위성이 크다고 할 수 있느냐면 글쎄올시다.[33] List of Byzantine Greek words of Latin origin(영어 위키백과) 참조.[34] 당장 서로마를 무너뜨리고 일어난 게르만족 국가들조차 로마의 후예를 자칭하며 로마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었고, 르네상스기에는 로마를 중세와 대비시켜 이상 사회로 보는 시각이 대두하였고, 이런 시각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중세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오늘날에조차 중세가 그나쁘지 않았다는 관점으로 전환한 것일 뿐이지, 고대 로마를 나쁘게 평가하는 시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애초에 특정 시기가 그냥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35] 제국주의라는 평가 자체는 분명히 있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켈리의 『로마 제국』과, 로마사 입문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프리츠 M. 하이켈하임의 『하이켈하임 로마사』에서도 로마를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한다.[36] 다만 이쪽은 고대 로마라기보다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에 가깝다.[37] 공화정 로마의 삼두정과 같은 정치 체계인 트리파락스 정치말고도 검투사 문화, 수도로 연결되는 관문, 다문화 정책, 능력주의 등 고대 로마의 특징이 많이 드러나있다.[38] 후계 국가라 할 수 있는 곤도르는 비잔티움 제국을 모티브로 했다.[39] 인명이 라틴어인 것과 초대왕 시대에 토가를 입었던 점을 통해 고대 로마에서 모티브를 딴 것을 알 수 있다.[40] 상대하는 적들이나 그 적들이 위치한 지명의 면면을 보면 고대 로마 제국이 싸워왔던 적들과 나라들로부터 이름을 딴 게 상당수다.[41] 이쪽은 제정 시대 로마가 아닌 공화정 시대 로마를 모티브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