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차 논란
1. 개요
류(柳)씨와 차(車)씨가 동조동본(同祖同本)이라고 주장한 '''《차원부설원기》'''에서 비롯한 문제이다. 문화 류씨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연안 차씨에서는 '''《차원부설원기》'''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2. 문화 류씨의 입장
하지만 《차원부설원기》의 기록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무하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등 어느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이 어명으로 박팽년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것도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해서 어느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문화 류씨 초기족보에서도 차씨와의 연관성은 어디에도 저술해놓지 않았다[1]
그런데 처음으로 류씨와 차씨가 같은 조상에서 내려왔다는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에 대해서 언급된 건 1689년에 발간한 문화 류씨 족보인 기사보(己巳譜)로, '''"망매(茫昧: 흐리터분하고 밝지 못함)하지만 실어서 훗날 연구하게 한다."'''라고 기술하였다. 아마 이 때부터 차원부설원기가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마디로, 차씨 문중에서 《차원부설원기》라는 위서[2] 가 퍼진 것은 조선 중후기이고, 이 때 처음에 문화 류씨 문중에서는 '''"이건 뭐지?"'''라는 반응이었다.
문화류씨대종회에서는 '''"2008 문화류씨세보(世譜): 류씨와 차씨는 관계없음을 천명함'''"을 올렸다.[3]
3. 연안 차씨의 입장
그러나 《차원부설원기》의 대표적인 근거인 대동운부군옥의 경우 그 당시 현존했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무수한 책들을 참고로 했다. 이에 대한 평가를 보자.
권문해가 참고한 우리나라 서적은 무려 172종이다. 그가 어떻게 이 자료들을 다 수집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인데, 그 중 현재 전해지지 않는 책만 해도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과 '은대문집(銀臺文集)' 등 40종이 넘는다. 한 마디로 한국학의 보고(寶庫)인 셈이다.링크. 그러나 차원부의 객관적 존재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특히나 정종이 차원부에게 사제를 했다는 내용이다.
류차 문제와 관련하여 류씨가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을 부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근거는 결국 류씨의 족보인 가정보(1562)에 차원부와 관련된 원파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래 류씨가 가지고 있던 기사보(1689)에는 원파록이 있었는데 나중에 가정보가 새로이 발견되었을 때는 그곳에 차원부에 관한 원파록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몇가지 언급을 하면 가정보(1562)에 차원부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은 단종의 지위가 복권된 것이 숙종 24년(1698) 때 복위되어 묘호가 단종으로 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따라서 가정보(1562)를 쓸 당시에는 단종이 아직 복권되지 않은 관계로 류씨입장에서는 차씨와 연결되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참고로 문화류씨의 유성원은 사육신이었고 그도 숙종때 복권된다.[4]
무엇보다도 가정보에는 안나오던 것이 송시열에 의해 단종 복위가 논의(1680)되기 시작한 이후인 기사보(1689)에는 차원부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 원파록이 실리게 되었다. 그리고 단종이 복위되었다(1698). 기사보에는 그제야 원파록을 실었고 그걸 연구해보라고 하였다.
근 200년 가까이 금기시 된 단종 복위와 관련된 차원부설원기는 사실 200년간 역사적으로 문언적으로 그게 정확히 전승될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정치적 탄압을 받을 수 있는 문헌이 그리고 200년 이후에야 비로서 정치적으로 차원부 설원기나 원파록을 당당히 언급할 수 있는 시점에 많은 부분에서 고증적 차원의 한계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대동운부군옥》현재 전하지 않는 많은 고대문서를 참조한 것으로 나온다. 《해동잡록》 등을 필두로 하여 많은 문헌에 차원부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다. 《해동잡록》을 예로 들면, 차원부의 죽음에 대하여 황보인(1387~1453)은 관모를 거꾸로 쓰고 임금에게 억울함을 하소연하였고, 정갑손(1402~1497)은 애도시를 남겼으며, 성삼문(1418~1456)은 두 편의 시를 남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차원부설원기에서 조선의 주요 건국세력이 서얼출신이라는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리학적 관점에서 볼때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기는게 정말 차씨 측에서 그런 내용을 위조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차씨가문의 출사나 기타 주요 관직승진에 스스로를 불리하게 하는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나아가 차씨의 집성촌을 보면 대부분 깊은 산골에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이 그걸 위조했다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게 앞뒤가 좀 맞지 않다.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은 비록 차원부를 충절의 인물로 묘사하므로 잠시 기분이야 좋겠지만 정작 그 후손들의 출세에는 심히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데 굳이 이걸 위조한다는 게 말이 안되는다는 것이다. 조선의 주요 건국세력 자체와 척을 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조선 건국의 주요세력이 성리학적 기본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차문절공유사(1791, 규장각본)의 고증은 다음과 같다.링크
정조의 명에 의해 양성지의 눌재집 발문을 쓴 이복원이 차문절공유사의 후문을 지었다. 눌재집에는 눌재가 쓴 차원부 추모시가 있다. 눌재집은 그 목차까지 정조의 재가를 받으며 편찬한 문집이니 정조 또한 눌재집이 간행된 1791년에는 차원부의 설원과정을 확정적 사실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여진다. 만약 처음부터 사실로 받아 들였다면 위작에 눈이 멀었던 것이 아닌가를 고려해 볼 수 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신뢰를 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그간에 고증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차문절공유사(1791)는 기실(紀實)편에서 동국여지승람과 정인지의 문집을 인용하였다.
물론 동국여지승람의 대부분과 정인지의 문집은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다. 이 또한 위작의 과정이라고 말 할 수는 있을 것이나 수 많은 관료가 참여한 문집에서 당대의 고증을 위작할 수는 없는 것이라 판단한다. 만약 1790년 당대에 동국여지승람과 정인지의 문집 및 양성지의 문집 속에서 차원부의 행적과 설원과정의 글을 찾게 된다면 누구라도 차원부의 설원 과정에 대한 역사만큼은 사실의 역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눌재집은 정조의 명에 의해 규장각에서 간행하였고 눌재집 서문을 정조가 내려주었고 목차까지 직접 재가하였다. 이러한 눌재집에 차원부의 추모시가 눌재의 작품이라고 등재되어 있다. 정조의 명에 의해 이복원이 찬한 눌재집의 발문에 의하면 눌재가 남긴 글은 열 두어 가지의 주의(奏議)가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차원부 추모시는 위작인 설원기를 인용한 오류라는 견해도 있다. 근거로는 이복원은 발문에서 김안국의 글을 인용하여 눌재는 열권의 주의(奏議)를 남겼는데 열 두어 가지의 주의(奏議)가 남아 있을 뿐이라고 했다. 즉 주의만 남아있을 뿐이므로 차원부 추모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눌재의 주의(奏議)는 조선의 부국강병과 백성의 안녕을 지키는 방안에 대한 제안이 전부이다.이러한 눌재의 나라 사랑과 백성 사랑이 상서를 통해 올려간 것이 책으로 엮어서 열권이라고 하였다. 정조께서 눌재를 정신적 스승으로 여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복원은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남아 있는 주의(奏議)는 여나무 가지뿐이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내용이 광활하고 인용한 사례가 자상해서 이미 다 준비된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이복원의 발문에 의하면 남겨진 글이 없어서 눌재집을 편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주의(奏議)를 남겼는데 전해지지 못한 아쉬움과 몇 안 남겨진 주의(奏議)만으로도 이미 다 준비된 것 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서거정이 찬한 눌재의 가승기에 의하면 눌재는 주의(奏議) 10권을 남겼고 가집(家集) 6권을 남겼다. 주의는 비록 안타깝게 지켜내지 못 했지만 가집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인조 때 김휴가 해동문헌총록을 찬했는데 눌재의 가집(家集)이 6권이라고 기록하였다. 김휴는 임진란과 병자란이 지난후 병화(兵火)를 면한 모든 서적을 조사하여 저술하였다. 눌재가 남긴 가집(家集)은 임진란과 병자란이 지난 후까지 6권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차원부설원기에 통일신라시대 승상이라는 표현이 쓰인다는 것을 가지고 위작이라는 시비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재상급 고위관료들에 승상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차원부설원기의 위작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차천로가 위작을 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차식 차천로 차운로 3부자를 든다. 그러면 실록에 있는 몇몇 안좋은 기록과 신분상승의 욕구를 강조한다. 문제는 차천로가 서경덕의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선조당시는 이조전랑 문제로 동인(이황계열)과 서인(이이계열)이 갈리는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서경덕 문하가 신분상승의 욕구가 강했다고 보는 건 좀 의아스럽다. 특히나 앞에서 언급했드시 차원부설원기 내용은 출세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적을 더 많이 만들 가능성이 높다.서경덕이나 조식은 주자학만을 절대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차문은 숙종에 의한 단종복권이후에 관직에 많이 등장하고 그 전에는 가끔 등장할 뿐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도 서경덕을 옹호하던 허엽의 논변에 이황과 이이가 까는 글이 나온다. 주자는 둘째치고 정몽주 장재보다 낮다는 것이다.三國遺事 卷 第四 제5 의해(義解第五) 의상전교(義湘傳敎) 의상이 귀국하여 국난을 면하게 하다(670년 (음)) 이미 본국의 승상(承相) 김흠순(金欽純)
三國遺事 卷 第五 제6 신주(神呪第六) 밀본최사(密本摧邪) 밀본이 귀신을 쫓아 김양도의 병을 고치다 승상(承相) 김양도(金良圖)가 어린 아이일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허엽이 경덕을 대단히 높이어 기자(箕子)의 학통을 이을 만하다고 하였는데, 이이가 그의 학문을 횡거에게서 나왔다고 논하는 것을 듣고 이이를 꾸짖어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학문은 소옹(邵雍)·장재(張載)·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학문을 겸하였는데 어찌 함부로 논하는가.’ 하였다. 허엽이 일찍이 그의 학문은 횡거에 비길 만하다고 논하였는데, 이황(李滉)이 ‘서공(徐公)의 저술을 내가 모두 보았으나 정몽(正蒙)에 비길 만한 글이 어느 글이며, 서명(西銘)에 비길 만한 글이 어느 글인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허엽이 힐난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소옹·장재·정자·주자를 겸할 만하다 하여 그의 의논이 더욱 집요하였는데, 상의 하교에 이른바 칭찬이 공평을 잃었다는 것이 지당하다." 링크
육신전의 내용을 보면 그 당시 선조나 그 전 명종대에 왕들이 사육신 생육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왕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차천로는 바로 선조때 인물이다. 그런데 차천로가 육신전을 보고 위작을 했다고 하는데 선조의 육신전에 반응은 싸늘 그 자체이다. 링크의 표현을 빌자면 선조의 반응은 더도 덜도 아니고 '역적을 두둔하고 왕실을 모욕하는 불온서적'으로 보는 것이었다. 차천로가 자기 가문을 높이고 나아가 출세를 위해 육신전을 보고 위작했다는 건 그것이야말로 한참 잘못되어도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중종 명종 때부터 나아가 선조까지 여전히 사육신[5] 생육신 등은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원본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문서의 진실성은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근 200년 가량 정치적 문서로써 조선왕조의 임금들에게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던 사안이었고 또 내용이었다. 이 경우 후대의 사람들이 원본 자체를 진실성을 위해 현재 자신이 가진 사본의 내용이 자신의 알고 있는 지식과 다르면 그에 맞게 고치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성경이나 기타 여러 고문서에서 일반적인 현상에 속한다. 특히나 육신전이라는 소설이 그 당시 유행하고 있었다는 점은 더욱 더 그러한 가능성을 높혀주고 여러 이본의 유통을 가능하게 한다. 성경도 원본이 없는 관계로 여러 이본이 유통되었고 비로 예수의 존재자체는 사실이라 하더라고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가필이 존재해왔다. 그걸 나중에 카톨릭 교회에서 다시 하나로 묶는 작업이 있었음에도 현대에서 그 문제는 여전히 골치거리에 속한다[6] . 나아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려와 신라에 관한 그 당시에는 존재했던 문서가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쉬운 예로 문화 류씨의 가장 오래된 족보인 영락보는 부전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것은 명종때의 문화 류씨의 가정보와 성종때 안동권씨 성화보가 있을 뿐이다. 영락보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른 상태에서 가정보만을 기초로 한 논의 자체가 역시나 역사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