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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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왕조가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편찬한 실록을 총칭하는 말.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조선왕조실록의 일부지만, 이들을 편찬할 때는 이미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전통 방식을 100% 따라서 작성하지 않았고, 일제의 정략적 의도가 들어가 있어 보통 별도로 취급한다.
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과 함께 국보명으론 '''기타산엽본'''이 유네스코 측에는 '''상편''' 21책으로 되었다.
북한도 적상산사고본의 대부분을[8] 보유했는데, 북한에서는 '조선봉건왕조실록'이라고 한다. 북한에 있는 적상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대한민국의 손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지도 못했고, 유네스코에 북한과 공동등재하지 않았으므로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빠졌다.
영어 명칭은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nals는 대략 '연대기' 정도의 의미로, 풀어 쓰면 '조선왕조 연대기' 정도 의미다.[9] 등재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아래 4가지를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유로 밝혔다.
-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 일본, 중국, 월남(베트남) 등 유교문화가 퍼진 곳에는 모두 실록이 있는데 편찬된 실록은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10]
- 이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 권수로 치면 중국 명 실록이 2900권으로 더 많으나, 실제 지면수로는 조선왕조실록이 이보다 훨씬 많아 분량면에서 세계 제일이다.
- 일본, 중국, 월남의 다른 실록들은 모두 당대 만들어진 원본이 소실되었고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
2. 편찬
실록 편찬은 고려 때 고려실록부터 있었고 건국 때부터 왕들은 춘추관을 만들고 기록자인 사관(史官)을 두었다. 그리고 사관들은 왕들을 따라 다니면서 왕과 주변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적은 기록물 '''사초'''(史草)를 만들었다. 그외에도 춘추관 사관들은 3년마다 자신들이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11] 을 모아 별도로 시정기(時政記)를 만들어 의정부와 사고에 보관한다.
사초와 시정기 모두 실록편찬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 따라서 조선 시대 왕중 자신의 사초를 읽어본 왕은 거의 없다. [12] 연산군이 자신의 사초를 보았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는 오해로 연산군 본인의 사초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초를, 그마저도 직접이 아니라 문제가 된 부분만 신하가 베껴온 것을 읽었다.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 사망하면[13] , 현직 왕은 사관 같은 춘추관의 구성원과 정승급 고위 인사를 넣은 임시기구인 실록청(實綠廳)을 설치하고, 위에서 언급한 사초,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같은 각 관청의 기록들을 모아서 죽은 왕의 실록을 편찬한다.
편찬과정은 3단계로 나누어지며 첫 단계는 실록청을 도청(都廳) 아래에 방(房) 1-3곳으로 나누고(세종, 성종 같이 분량이 많은 실록의 경우 방을 6개까지 늘렸다고 한다). 각 방에서 1차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려 초초(初草)를 작성하고, 다음으로 방에서 작성한 초초본을 도청에서 편집해 중초(中草)를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실록청의 수장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재차 수정하고 문장을 통일해 정초(正草)를 작성하면 실록이 완성된 것이었다.
이후 완성된 실록은 5개를 복사해서 춘추관에 1개를 두고 지방에 만들어 둔 사고(史庫)마다 1개씩 보관한다. 그리고 실록청은 마지막 작업으로 초초본과 중초본을 시냇물에 씻어 없애는 세초를 했는데, 그것은 하위 문단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2.1. 세초(洗草)
세초(洗草)란 초초와 중초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생김을 막고자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세초식은 실록 편찬의 '쫑파티'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세초식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남겨두기도 했다. 세초가 시행되는 곳은 현재도 남아있는 서울의 세검정. 세초 후에는 세초연이라는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실록 편찬 과정은 세계적인 역사기록의 편찬 과정이면서도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기록 말살의 과정인 셈이기도 한데, 광해군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중초본이 남아 있다. 그래서 정초본에 없는 광해군에 대한 기사가 있다. 이는 광해가 폐위되었고 그의 세력이 재기할 가능성이 아예 사라졌기 때문에 굳이 중초본을 없애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세초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 물자를 아끼기 위해서이다. 왕도정치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꽤 검소하게 정부를 운영했기 때문에 모든 물자를 귀하게 여겼다. 조선 조정에게 초조본과 중초본의 제작에 들어가는 종이는 무척 아까운 지출이었다. 굳이 검소를 표방하지 않았더라도, 당시 종이는 현대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물건이었다. 특히 한지는 제작공정이 까다로워서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고, 고급지는 더욱 귀했다. 여기에 두 가지 판본 외에도 사료 편찬을 위해 왕의 재위기간 동안 사관들이 열심히 여러가지 일을 기록한 원본사료인 사초에 쓰인 종이까지 합하면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 양을 한번 쓰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여 정초본이 완성되면 필요성이 줄어든 다른 사료들의 종이를 재활용하고 전부 세초하는 것. 한지는 물로 잘 씻어 먹물을 빼낸 뒤 잘 말리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
- 사초 기록에 있어 사관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정쟁의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다듬어서 완성된 형태로 만든 실록과는 달리 사초는 그야말로 어떤 상황에 대해 사관의 생각이 여과없이 기록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사관들이 화를 입거나 정쟁이 불거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연산군 때 김일손의 사초에서 비롯된 무오사화는 사초의 내용이 공개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무오사화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연산군이 사초를 열람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신하들을 처벌하였기 때문에 중종 때 대대적으로 세초를 하고, 아예 세초를 의무로 규정하여 이전에 세초하지 않고 남겨뒀던 사초까지 모두 씻어버렸다.[14]
과거에는 연산군 때부터 세초가 시작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성묘보전세초록이 발견되며, 조선 초기에도 세초가 행해져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3. 보관, 그리고 수난
컴퓨터도, 소규모 기억장치도 없던 시절에 백업을 정말 철저하게 했다. 고려실록은 궁궐에 1부, 소실을 대비해 해인사에 1부, 총 2부를 만들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항상 4~5부를 만들었다. 고려실록도 여요전쟁이다 홍건적이다 해서 소실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한 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해서 3년에 한 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포쇄'라는 작업으로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지방의 세 곳은 충주·전주·성주였는데, 겉보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았지만 대사헌 양성지는 보관 장소에 이의를 제기하며 세조 12년(1466) 11월 17일에 상소를 올렸다. '춘추관은 한양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하삼도(下三道)[17] 에 있는 사고는 '''관청 옆에 붙어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으며 장차 외적이 침입하면 소실될 수도 있으니''', 인적이 드문 궁벽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가령 전주 사고는 지리산으로, 성주 사고는 금오산으로, 충주 사고는 월악산으로 옮겨 그 고장의 절에 보관하고 땅을 지급해서 인근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72년이 지나 중종 33년(1538) 11월 6일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전소되자, 나머지 사고에서 인쇄·필사해서 성주로 보냈는데, 사고의 위치를 바꾸진 않았다. 그런데 54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주 사고본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18] 전주 사고본도 전주의 유생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사재를 털어 사고의 책들을 전부 내장산으로 옮겨놓고 이듬해 관청에 넘겨줄 때까지 번갈아서 지켜보며 간신히 지켜냈다(이때 안의가 남긴 기록이 수직상체일기). 결국 광해군 때 춘추관과 함께 '''마니산·오대산·태백산·묘향산'''에 사고를 마련하고, 전쟁 뒤의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재출판하여 실록 5부를 갖추었다. 그랬는데도 춘추관 사고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묘향산 사고본은 적상산으로, 마니산 사고본은 정족산으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에 각지의 사고를 철폐하면서 적상산 사고본은 창경원 장서각으로,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총독부로 옮겨졌으며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면서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어 근대적 장서학에 따라 관리를 받았다. 실록을 처음 학술적으로 연구한 곳도 경성제국대학이었다. 그리고 오대산 사고본[19] 은 일제가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반출했는데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대출본 47권을 제외하고 날려먹었다.[20]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에 살아남았다가 서울대학교 개교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있던 실록들은 임시수도 부산으로 수송되었는데, 서울대 도서관의 태백산사고본과 정족산사고본 등은 군용 트럭에 실려 부산으로 수송되어 경남대한부인회 창고, 경상남도청 창고 등에 보관되었다. 창경원의 적상산본은 제때 피난하지 못하고 6.25 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했을 때 월북한 사학자 김석형(金錫亨)의 건의를 김일성이 받아들여 평양으로 옮겼다. 이후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서 소장한 듯하다. 이는 북한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조실록 판본으로, 대한민국보다 먼저 번역된 《리조실록》의 원전이 되었다고 하는데, 북으로 이송되는 도중 수 차례 폭격 맞을 뻔한 기회를 넘기고 천운으로 살아남은 판본이다. 분명히 피난 갈 때 부산행 기차에 실어서 출발했음을 확인했는데 불구하고 통째로 사라져버린 6.25 전쟁의 미스터리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조선인민군이 기차를 통째로 노획했던 것[21] . 그렇게 북한으로 넘어가버렸다고 생각한 적상산본은 다는 아니지만 일부가 남한에 남아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권 그리고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서각에서 3권을 발견했다. 관련 기사
최종적으로 현재 남한에는 사고본 2종이, 북한에는 1종이 남아있다. 이 중 태백산본은 만일을 대비해 1985년부터 부산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보관하고 있다. 일제가 관리 똑바로 못하고 일부만 남은 오대산본은 2006년에야 한국에 반환되었다.[22] 반환 직후 국립고궁박물관에 임시 소장하고 있는데 소장 장소를 두고 논란이 있다. 본래 사고가 있던 월정사에선 사고본을 월정사의 조선왕조실록박물관으로 옮겨야 합당하다고 주장하고, 문화재청에서는 국보급 문화재를 민간 전시관에서 보관하기엔 곤란하다는 입장을 편다. 사고본의 복제품과 영인본을 월정사 측에게 기증해서 보관·전시 중이지만 월정사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계속 원본 소장을 주장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은 100%가 아니다. 전주 사고를 조성할 때 문종실록 '''11권 표지를 9권에다 입히는'''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이후 판본은 전주 사고본을 원본으로 삼아 복제한 것이기 때문에, 문종실록 11권은 소실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4. 내용
5. 평가
5.1. 내용의 방대함
권수나 책수로는 동시대 중국의 명청실록에 비해 적지만, 내용의 풍부함과 상세한 묘사 등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인 편년체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권수 자체는 적지만 '''글자 수'''는 조선왕조실록이 훨씬 더 많다. 대명실록은 2909권이지만 글자는 1600만 자 정도로, 4965만 자인 조선왕조실록의 1/3에 불과하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에 글자 수가 곧 내용의 양.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존속 기간이 조선에 비해 절반 정도에 지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명, 청은 중국을 통치하는 거대국가였음을 감안하면, 중국에 비하여 강역이 아주 작은 조선이 '''수십 배 큰 중국의 국찬사서의 몇 배나 되는 분량을 기록한 게 오히려 무서운 일'''이다.
국가의 정무뿐만 아니라,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와 군사 관계, 의례의 진행, 천문 관측 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 요역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 차자, 상소와 비답 등, 당시 조선 시대의 거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외교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분류가 역사서고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이지, 그 실체는 1400년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데이터베이스라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인정했듯이 이렇게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역사서는 세계에 흔치 않다. 실제 실록에 있는 기록들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경상도 동래현(東萊縣)에서 세 사람, 양주(梁州)·창원(昌原)·비옥(比屋)에서 각각 한 사람씩 벼락을 맞았다.
震慶尙道東萊縣三人梁州昌原比屋各一人。
태종 9년(1409) 6월 15일 병진 3번째 기사
평안도 삼화현(三和縣) 사람 박독동(朴禿同)과 강아지가 벼락을 맞았다.
震平安道三和縣人朴禿同及狗兒。
세종 5년(1423) 7월 21일 기해 2번째 기사
이것만 보아도 조선이 얼마나 체계가 확고하게 잡힌 관료제 사회였는지를 알 수 있다. 동네 개가 벼락을 맞았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다.충청도 회덕현(懷德縣)에서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
忠淸道懷德縣人物雷震。
현종 9년(1668) 6월 28일 을미 2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불길한 징조로 여겼던 일식이나 월식 뿐만 아니라 각종 천체활동에 대한 자료도 방대하게 기록해놓았다. 이중에는 1604년 요하네스 케플러가 관측하여 '케플러 초신성'이라고도 불리는 SN 1604에 대한 기록도 있다. 케플러는 이 초신성을 거의 1년 가까이 기록을 남겼는데, 당시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도 이에 못지 않게 7개월 가까이 이를 기록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같은 천체를 보고 각각 남긴 기록이 지금까지 남았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 아래는 7개월간 기록된 내용들 중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밤 1경에 객성(客星)이 천강성(天江星) 위에 나타났는데, 미수(尾宿)와는 11도(度)이고 북극성과는 1백 9도의 위치였다. 형체는 세성(歲星)보다 작고 황적색(黃赤色)이었는데, 동요하였다. 3경과 4경에 달무리가 졌다.
선조 37년(1604) 9월 22일 1번째 기사[23]
묘시와 진시에 안개 기운이 있었다. 진시에 태백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밤 1경에 객성이 천강성 위에 나타났는데, 형체의 크기는 금성(金星)만하였고 광망이 매우 성하였으며 황적색으로 동요하였다. 위치한 곳의 성수(星宿)의 도수(度數)와 북극성과의 도수는 달과 가까이 있는 데다가 유기(游氣)가 있어 측후할 수 없었다.
선조 37년(1604) 윤9월 7일 2번째 기사
특히 여진족(혹은 만주족)의 중흥을 연구하는 데 1차 사료로 꼽힌다. 청나라 건국 전에 여진족 스스로 남긴 사료가 거의 없는데, 조선에서는 북방을 항상 관심지역으로 여겨 국가 안보를 위해 여진족의 동태를 열심히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아래 기사를 보면 동태를 기록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록에 집착하는 광기가 느껴질 정도이다.1경에서 3경까지 달무리가 졌다. 5경에 객성(客星)이 구름 사이로 조금 보였다.
선조 38년(1605) 3월 15일 1번째 기사
현대뿐만 아니라 당대에도 큰 의의가 있었던 게, 만인지상의 존재인 임금조차 실록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될지를 모르니 몸가짐을 조심케 하는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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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3년(1455) 3월 24일 2번째 기사
5.2. 지우개를 쓰지 않는 역사
조선왕조실록의 또다른 의의로는 이전 편집의 주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수정본을 새로 내더라도, 원래 실록을 없애버리지 않고 온전히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 당대의 역사를 서술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승자에게 유리한 기록은 부풀려지고 패자에게는 다소 억울한 기록을 넣거나 곡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새롭게 쓰더라도 이전 내용과 바꾼 내용을 고스란히 남겨 '''그 평가를 후손들에게 맡겼다'''.삼가 살피건대 역대에서 역사를 수찬하는 자는 모두 당시의 기거주(起居注)를 근거하고 간혹 여러 사서(史書)의 기록을 간추려 채록하며 그가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을 덧붙였는데도 오히려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많았기 때문에 《강목(綱目)》에도 《고증(考證)》·《집람(集覽)》·《집람정오(集覽正誤)》의 설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중에 사사로이 좋아하고 미워하거나, 공변되지 못하게 시비한 것이거나, 심지어 굽은 것을 곧다고 하거나, 정(正)을 사(邪)라고 하거나, 제현(諸賢)을 무함하거나 일세를 더럽게 먹칠한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으니, 송(宋)나라 범충(范冲)의 사서(史書)가 바로 그것이다. (…) 무사(誣史) 중 특히 근거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유기(遺記) 및 이목(耳目)이 미치는 바의 사실만을 가지고 이를 증변(證辨)하면서 끝내는 ‘《실록》을 살펴보건대’로 예(例)를 삼았다. 그 나머지 제신들이 무고되고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하여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하였으나, 그 사람의 처음과 끝을 살피면 그의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니,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필 일이다'''.
《선조수정실록》, '선조실록' 수정에 참가한 채유후의 후기
이점은 역사학자들에게 최악의 적이 '기록말살형'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로 붕당정치가 격화되고 당색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가 크게 오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지면서 실록에도 이게 그대로 반영되곤 했다. 따라서 '수정실록'은 집권당이 바뀌면 그 인물에 대한 평가를 자기 당에 입맛에 맞게 고치는 수정 작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편찬한 사관들도 이전 실록 편집의 주체들은 '몹쓸 신하'니 '황당한 평가를 내렸다'느니 하면서 깠지만, 정작 그들이 남긴 실록 내용 그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이 새롭게 쓴 내용들도 어느 한쪽에 치우친 평가라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면서 두 내용 모두 남기니 후손들이 알아서 잘보고 판단해달라는 말까지 남겼다.
5.3. 옥에 티
조선은 철저한 수도집중 중앙집권국가였기에 지방 기록이 적다.[24] 다만 서술목적 자체가 중앙정부의 역사기록물이라 중앙정부 중심이지 지방관련 기록은 지역에서 올라온 주요 공문서를 모은 각사등록이라는 책이 따로있다.
''''사관은 논한다.(史臣曰)'''' 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사관이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논평한 부분이 있는데, 사관도 사람이니 만큼 가끔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당파에 치우친 생각을 적어 놓았다. 사관의 평을 읽으면 공감이 가거나 통쾌할 때도 있고,[25] 고개가 갸우뚱해질 때도 있다. 실록에 풍부하게 기록된 사실을 읽어보면 사관의 평이 옳은지, 그른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또 후대 왕이 모아서 집필하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실록의 내용이 사실관계가 왜곡되거나 빠진 경우도 있다[26] ,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의 최후나 영, 정조 때 사도세자 관련 기록, 계유정난 등이 대표적인 예. 비슷하게 같은 실록인데도 후대 사관들이 정리한 내용과 사건 당일의 기록이 모순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27] 대표적으로 연산군 일기에서 무오사화 때 이극돈의 행보를 들 수 있다.[28]
실록의 방대한 분량에 압도되어 '이것만 읽으면 조선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은 어디까지나 사초와 승정원일기, 각종 공문서 및 개인사료를 가져다 편집해 만든 요약본이다. 하루 종일 회의가 이어진 경우 발언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 핵심적인 부분이나 결과만 수록했다. '일일이 기록한 것'을 보려면 사초나 승정원일기 등을 찾아봐야 한다. 다만 요약을 했다고는 해도 마구 한 것은 아니라서 실록 편찬을 맡았던 실록청의 관련 사료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 분량을 적절히 줄이면서도 사실이 왜곡되지 않을지 고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치적 견해에 치중되었다는 비판을 수용하여 수정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한 실록은 어디까지나 한양 중앙정부의 시각이 강하다 보니 각 지역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고, 중앙정부에 반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치우친 견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어떤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면 실록은 그것을 '역적의 난'이라고 하지, 일으킨 쪽 입장을 대변하여 적어주진 않는단 이야기다. 물론 '왜 이것이 일어났는가, 뭐가 문제였는가.'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과 밝혀진 사실들은 적힐 수 있지만 결국 중앙정부의 입장이라는 한계가 있다. 정조 때 실록을 읽은 다음에 북학의 같은 책을 한 번 읽어보면 같은 시대를 다룬 기록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그리고 실록은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으로 적은 사료가 아니다. 한양 정치현장의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 사회의 미시적인 역사, 예를 들어 속옷의 변천사, 화폐의 유통범위 등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한 부분까지 알아내려면 가문 기록이나 야사집이나, 야담집을 비롯한 잡기류, 일기 등도 뒤져봐야 한다. 물론 이것들은 대부분이 한자라 대중적 접근도가 극히 떨어지거나 민감한 것들이 있기에 아직 연구자들만의 영역이다. 그나마 인조실록에 담배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등 어쩌다 한번 나오는 식이다.
또 하나의 한계라면 역시 사람이 쓰다보니 '''민수의 옥''' 같은 사건도 있었고[29] 조선 후기로 갈수록 당쟁이 격화됨에 따라서 실록도 당파 입맛에 맞게 내용이 바뀌었다. 이른바 '수정실록', '개수실록', '보궐정오'인데 물론 선조수정실록은 사초가 부족해서 그랬다는 실드라도 쳐줄수 있지만 현종개수실록이나 숙종보궐정오, 경종개수실록은 당연히 '''사초도 많은데''' '''"어 저거 우리 당파가 쓴 거 아니네? 거짓"''' 정도 논리로 나왔다. 그래도 나름 장점이 있다면 원 실록과 수정실록 두 개를 교차검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당시 당파가 관련 사건에서 어떤 입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대의 헛짓거리가 후대에는 더 도움이 될 수 있음이 얄궂은 일이다. 예시를 들자면 선조실록을 두고 서인들이 실록 내용이 부실하고 당파성 있다고 여겨 인조 때 수정실록을 편찬했는데, 수정실록 또한 당파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조실록 자체에 당파성이 없었다고 볼 순 없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기에 편찬되었고 당시 왕은 광해군이었기에 아무래도 북인 입맛에 맞게 저술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헌종실록, 철종실록은 아예 세도정치의 영향인지 사초도 줄어들어 실록 내용이 많지가 않다.
6. 사관들의 집념
이렇게 기록이 많이 남을 수 있었던 건 조선 사관들이 그만큼 근성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관들은 자세한 기록을 위해 왕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한 예로 사냥을 나간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자 부끄러웠는지 "사관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일이 있었는데, '''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왕이 알리기 싫어한 일조차 '''기어코 사관들이 알아내어 기록에 남겼고, 후대에도 그걸 없애지 않고 편찬까지 했다'''는 얘기. 특히 태종 때 민인생(閔麟生)이란 사관은 경연 때 왕이 말하는 걸 들으려고 병풍 뒤에서 숨어 있던 경우도 있었고, 평범한 연회 때도 기록하려고 초대도 안 받고 불쑥 나타나지 않나. 태종 때 이름모를 사관은 '''왕과 중전 등이 거주하는 내전에 들어가려고 했었다고'''. 이 정도면 거의 스토커나 파파라치 저리가라 수준.親御弓矢, 馳馬射獐, 因馬仆而墜, 不傷。 顧左右曰: "勿令史官知之"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니: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태종 4년(1404) 2월 8일 4번째 기사
다음은 위에 언급된 태종 대의 사관 민인생[30] 이 남긴 '근성'의 흔적이다.
- 근성의 시작, 연회의 불청객: 실컷 연회를 즐기고 궁으로 돌아가는 태종의 눈에 띈 사관 민인생. 태종 1년 3월 18일 기사
- 지칠 줄 모르는 근성의 징조: 기세좋게 편전(왕의 거처 겸 업무 공간)에 들어가려다가 제지당함. 태종 1년 4월 29일 기사
- 들이대기: "편전에서 정사 보실 때도 옆에서 '전하의 아름다운 말씀' 을 기록해도 될까요?" 태종 1년 5월 8일 기사
- 편전 엿보기: 민인생이라는 사관이 편전에 앉아 업무를 보는 태종을 바깥에서 엿보다가 걸림. 태종 1년 7월 8일 기사
- 슬픈 결말: 여러 번 몰래 엿보다 걸렸는데 심지어 휘장을 걷고 엿본 것까지 문제가 되어서 변방에 귀양 가는 진짜(…) 슬픈 결말. 태종 1년 7월 11일 기사
- 11년 후 아직도 찜찜한 태종: 민인생이 일으킨 사건 후 9년이 지나 사관의 편전 출입을 허용했지만, 뭔가 찜찜했는지 "사관이 언제부터 편전에 들어왔냐?" 하고 물어 지신사가 2년 전이라고 대답. 그러자 태종이 말이 없어서 불안해진 지신사. 태종 12년 7월 29일 기사
- 뒷담화: '아침마다 사관도 입시하게 해달라.'는 말이 나오자 민인생의 이야기를 하며 불쾌해 하는 태종. 태종 12년 11월 20일 기사
이 때문에 왕은 사관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왕이 벌을 내리는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무오사화.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어서 터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 외에도 세조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기사들을 많이 실었었다. 결과는 피바다…그리고 영조 1년 이천해의 공초에선 영조가 사관들에게 '죄인의 흉악한 말을 쓰지 말라'고 하자 사관이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쓸 수 없었습니다.' 하고 맞장구치며 설설 긴 모습도 있다. 이 대화를 굳이 써놨다는 건, 앞에서는 그렇게 말해두고 뒷구멍으로 '''응 결국 다른 데다가 적을 건데 뭔 소용임 ㅋㅋ''' 했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30년 후 신치운이 경종 독살설과 게장을 언급하여 영조가 '이거 쓰지 말라'고 명령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틈을 타, 당시 사관이 "지금 신치운이 치는 게장 드립이 지난번에 이천해가 했던 소리랑 똑같습니다. 참고해두세요 ㅎ"라고 재치있게 기록했다.[32] 조선시대 사관들의 30년 존버 메타
물론 사관들도 사람인 만큼, 편찬자나 사관의 당색에 따라서 평가가 왔다갔다하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늘 일부 편파적인 평가나 곡필의 의심이 가는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 하지만 실록은 그런 편파서술이나 곡필을 '''분량이 압도적인 팩트 서술'''로 극복해버리곤 한다. 즉, 일부 곡필된 부분이 있어도 면밀하게 기록된 전후사실들을 눈 똑바로 뜨고 분석만 잘 하면 진상이 떠오를 만큼 기록이 풍부하다!
그리고 조선 후기 당쟁으로 인해 집권당이 바뀌어도 이전 집권당에 유리하게 기록된 '''기존 실록을 없애버리지 않고''' 보존하면서 자신의 당에게 유리한 내용을 수정실록·개수실록·보궐정오 등으로 다시 편찬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새 집권자가 기존의 기록을 아예 없애버리는 기록말살형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가를 보면 실록의 공정성이 새삼 느껴진다.
7. 현대화 노력
7.1. 영인
영인(影印)이란 도서, 그림 등의 원본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요새 감각으로 말하면 스캔본.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사진판으로 영인한 적이 있었고, 해방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955년부터 4년 간에 걸쳐 태백산본을 영인해 A4 크기의 양장본 48책으로 간행하였다. 현재는 영인이 아닌 책을 그대로 복제하는 복본 제작과정이 진행중이다. 가쿠슈인에서도 영인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55년까진 이조실록이라고 불렀으나 이조가 멸칭이란 주장이 대두되어 1955년 10월 12일 조선왕조실록으로 공식적으로 개칭했다. 북한은 아직까지도 리조실록이라 부른다.
7.2. 번역과 전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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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번역본 조선왕조실록 400권 중 일부의 모습.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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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에 소장된 대한민국 번역본 조선왕조실록 일부.사진 출처
기록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북한에서는 적상산본을 바탕으로 1980년 모두 400권으로 번역이 되어 리조실록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남한에서 고유명사와 용어를 살린 것과 달리 북한은 대중서를 지향하여 공식용어나 표현을 모조리 현대어로 고쳐서 내놓았다. 가령 '주상이 종친을 거느리고'라는 표현은 '임금이 가족들 데리고'로 하는 식. 심지어 임금이 받은 시호도 거의 우리말로 풀이해, 가령 세종의 시호인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영특하고 문명하며 슬기롭고 용감하며 어질고 뛰여나며 명철하고 효성스러운''' 세종장헌대왕'으로 번역되었다. # 그 밖에 남한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포함시킨 것도 차이점.
한편 남한에서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주관하여 번역 작업에 들어가 1993년 말에야 번역이 완료되어 출판되었다. 1994년 4월 문화체육부, 교육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민족문화추진회, 서울시스템(주)의 합의로 '조선왕조실록 CD롬 간행위원회'가 발족되어 전산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95년 CD롬 초판이 간행되었고 이후 1997년에 1차 개정판, 1999년에 2차 개정판이자 보급판이 출시되었다. 뒤에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별도로 CD롬으로 제작했으며 원문 전산화도 뒤이어 이루어졌다.
현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유롭게 무료로 국역본과 원본을 열람할 수 있다.
또한 한국고전종합DB에서도 번역이 진행중인 승정원일기의 해석본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의 국역본을 열람할 수 있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는 주로 국역본 열람에 중점을 두고, 원문을 열람하고자 할 경우에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로 리다이렉트된다.
조선왕조실록 전산화는 전세계 지식인들은 물론 한국의 많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33] 전산화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가 수정되고 새로운 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 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도 전산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현재도 꾸준히 증역, 오역 수정 등으로 보완 중이다. 분량이 워낙 많아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과 더불어) 실록이 수많은 한문 학자들을 먹여살린다는 말도 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번역/수정 작업이 끝도 없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
7.3. 번역의 문제점
일반 명사와 고유 명사를 혼동하여, 고유 명사로 된 것을 일반 명사로 풀어서 번역하거나 고유 명사가 아닌데도 이름이겠거니 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동대문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걸 한자 하나하나 다 풀어서 '인(仁)을 일으키는 문' 이라고 하거나, 임진왜란 당시에 天將이라고 하면 명나라의 지휘관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걸 '하늘의 장수' 로 번역하는 식. 직역이나 비표준어 같은 건 시간과 예산의 문제로 인해 번역을 빨리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는 이유라도 댈 수 있지만, 이런 건 그냥 오역이다.
7.4. 실록 전산화의 영향
7.4.1. 사극
'''수많은 사극이 실록의 전산화 덕을 많이 봤다. 그리고 한국 사극작가들의 애증이 교차하는 공포의 책.''' 대략 1995년에 서울시스템이라는 회사에서 조선왕조실록 CD롬을 판매하자 상당수 사극에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 반영되기 시작했고,[34] 2005년에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자 젊은 작가층도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용의 눈물[35] 이나 왕과 비같은 사극도 조선왕조실록 CD롬을 참고해서 쓴 사극이다. [36]
쉽게 검색을 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인물들을 찾아내서 대입한다든가, 새로운 해석이 많아졌다. 진짜 '''검색만 해보면 다 나오는''' 수준이다.
조선시대 사극이 이전에는 연산군, 단종, 희빈 장씨 같은 몇몇 소재만 수십번은 우려먹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온갖 퓨전 사극이 나오는 바탕이 되었다. 뭐 꼭 이런 자료가 있어야 퓨전 사극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만.
다만 이렇게 풍부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덕에 아이러니하게도 사극 작가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실록의 데이터가 워낙 방대하고 상세하여서 약간의 고증오류만 내더라도 전국의 역덕들이 물어뜯기 때문. 실록이 존재하는 한 고증오류는 사극작가들이 피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뢰밭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딴에는 열심히 조사하고 '이쯤이면 완벽하겠지.' 싶다가도 역덕들은 실록을 통해 귀신같이 오류를 찾아낸다.
7.4.2. 교양서
서점가에는 조선시대 교양서가 범람하게 되었다.
대충 주제 하나를 잡고,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서 기사를 좀 복붙한 다음, 적당히 자신의 썰을 덧붙이면 그럴듯한 역사교양서가 하나 나온다.
책 쓰기 참 쉬워졌다. 실록이 공개된 후로 조선왕조를 다룬 책들은 거의 다 이런 상황이다. 덕분에, 실록만 대충 훑어보고 사료를 자기 주장에 들어맞는 것만 쥐어뜯어서 쓴 불쏘시개 수준의 역사교양서도 넘쳐나는게 문제. 대표적인 예가 '''원균명장설.''' 실록에서 선조가 원균에 대해 찬양한 발언만 적당히 짜맞추고, 다른 기록과 신하들의 의견과의 교차 대조는 전혀 하지 않고 조합한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은 실록 이외에 신뢰할 만한 사적 기록도 상당히 많은데, 원균명장설에서는 오직 '원균행장'만을 취사선택한다.
7.4.3. 그 외
- 자기 조상님의 업적을 찾아보려고 검색했더니 탐관오리였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견하기도 한다.[37]
- 사관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적은 문서이긴 하나 일단은 공문서다보니 왕이나 주변인물들이 하던 욕설은 '흉참한 말', '입에 담을 수 없는 말', '차마 듣지 못할 하교' 같은 식으로 돌려서 말하는데, 자기 손자들에게 한 패드립에 대한 기록이 인조실록에 있다.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왕의 몇 안 되는 욕설 기록이다. 실록 외의 기록에는 정조의 비밀 편지 등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 태종실록에도 태종의 욕설이 기록되었다. 요언을 퍼뜨린 문가학(文可學)이라는 자를 잡아 가두면서 미친놈(狂者)이라는 욕설을 했다고 한다.
>予謂可學爲顚狂者。 天兵神兵, 吾能召致, 此非狂者之言乎?
>
>태종 6년(1406) 11월 15일 기사
다만 이건 욕설로서 썼다고 보기 애매한 측면이 있는데, 문가학이라는 인간이 주술을 벌이면서 역모를 준비했는데, 역모로 다스려야 한다는 신하들에게 '문가학이라는 사람은 미쳐서 저런 거니 역모로 처벌해서는 안 되고, 같이 잡힌 문가학의 일당도 재조사해서 풀어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 외모평가를 거의 하지 않거나 해도 아주 박하게 평가를 한다. 만약 실록에서 외모평가가 나왔다면 아주 아름답거나 아주 특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특히 양녕세자의 애첩이던 어리나 희빈 장씨처럼 실록에서 대놓고 미인이라고 기록된 경우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드문 편. 헌종도 헌종실록 1권에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고 기록되어 있어 현대에 조선 임금 중 최고 미남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38]
- 지구과학 모의고사에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천문현상을 이용한 문제가 출제되기도 한다.
8. 목록과 분량
실록의 분량을 말할 때 쓰는 '권' 과 '책' 에서 '권'은 '내용상 구분하여 나눈 단위' 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종이를 묶은 단위' 를 뜻한다. 즉 오늘날 흔히 말하는 '장(챕터)' 이 당시의 '권' 이고, '권' 이 당시의 '책' 이다. 예를 들어 태조실록이 15권 3책이라고 하면, 15개 장이 3권 책에 나뉘어 수록되었다는 의미다.
8.1. 고종실록, 순종실록
일제강점기에는 실록이 쓰이지 않다가 순종이 죽은 뒤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구에서 1927년 4월 1일부터 1935년 3월 31일까지 고종과 순종의 기록을 실록이란 이름을 붙여서 써낸다.
비록 실록이라는 이름은 붙었고, 국가 공인의 최종 편집본이라 조약, 대외 공문서 등에 대한 기록은 잘 정리되어 있지만, 제대로 실록청을 열어서 쓴 실록이 아니고, 일제에 불리한 부분이 누락 혹은 왜곡되어 실록 목록, 유네스코 목록에 모두 빠졌다. 예를 들어 고종실록의 을미사변 내용을 보면 미우라 고로가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구절은 단 한 문장도 없고,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안타깝다고 하는 등.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등의 주요 관찬사료를 채택하여 쓰여졌고 주요 조서‧칙령‧법률‧조약문 등을 망라하고 있으므로 역사적 사실을 아예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일제의 정략적 의도가 많이 들어가 있기에 역사학자들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의 정부기록은 일본의 편집이 거의 없는 승정원 일기[40] 나 개인 문집들을 주로 사용한다.
일제의 왜곡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두 실록을 재편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지다가 2017년까지 신편 고종시대사를 편찬하기로 했다. 고종시대사는 1960년대에 편찬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으로 2017년까지 15억을 들여 여러 사료들과 전거를 들어 새로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향후 고종실록, 순종실록을 재편찬할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는 일단은 실록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고종실록, 순종실록, 순종실록부록 모두 번역하여 제공한다.
9. 기타
-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조선시대 분량 ≥ 그 이전의 모든 분량 현상이 나타나게 된 주요 원인. 조선시대 이전 역사가 쓰여진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은 모든 서적을 합쳐도 실록 하나보다 양이 적다. 그만큼 실록의 분량이 초월적으로 방대하고 자세하며, 조선시대 이전의 사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렇게 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선과 같이 역사서 집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은것도 원인이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반란이나 전쟁등의 이유로 보관되어있던 전대의 역사서가 소실되어 버렸단 것이다. 한국사에서 사서의 대규모 소실이 있던 대전쟁만 해도 최근 1천년간 4개나 있다. 여요전쟁, 여몽전쟁, 임진왜란, 한국전쟁. 조선왕조실록 또한 한 부만 찍어서 보관했었다면 대부분의 실록이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여러 부를 뽑아서 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당시 소실을 겨우 넘기고 단 1부만 남았을 정도.
- 몇몇 경우에는 중국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명나라 궁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명사에는 치부를 감추기 위해 기록을 없앴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당시 고문을 당했던 조선 출신 궁녀의 증언으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도 피해자도 둘 다 조선 출신 공녀였다. 중국인 여씨가 조선에서 온 여씨에게 성도 같으니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영락제의 총애를 받다가 마침 급사한 조선 공녀 출신 권씨를 여씨가 독살했다고 무고한 것. 여기서 조선 출신 후궁들이 여럿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몇몇은 조선으로 도로 방출당했는데, 그들의 증언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덕분에 명나라 궁중의 잔인한 고문법을 현대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연좌제로 얽혀서 고문받다 죽은 인물 중 하나가 영락제에게 "니 정력이 딸려서 궁녀가 내시랑 바람핀건데 누굴 탓하냐"고 일침을 날린 적이 있는데, 이게 실록에 실려 버리기까지 한다.
- 전술했듯이 원칙적으로 왕은 절대 읽을 수 없었으며, 책벌레 겸 지식덕후였던 세종대왕은 그 내용이 너무나 궁금했던 나머지 몇번이나 보려고 시도했지만 "태조실록"을 제외하곤 보지 못했다.
- 태조실록이 편찬된 후, 세종은 "지금 태조실록은 1책(冊)뿐이잖아? 나중에 잃어버리면 큰일인데. 그러니 복사본을 만들어서 한 책은 춘추관, 한 책은 내가 볼수있게 해놓자. 이건 다 나라를 위한거야."라고 하는데 세종의 속셈을 알아챈 변계량이 "그건 아니되옵니다!"라며 결사 반대해서 결국 세종이 포기했다. (1425년 12월 5일)
-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 기사를 보면 세종이 "이미 《태조실록》을 보았으니 《태종실록》도 또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니 여러 겸춘추(兼春秋)에게 상의하라"라고 말한다. 그러자 황희와 신개 등이 "역사서를 임금이 함부로 본다면 그 내용도 임금의 입맛에 맞을 것인데, 그렇다면 먼 후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라며 적극적으로 반발했다. (1438년 3월 2일)
- 혜성의 출몰, 일식, 월식, 신성 출몰, 신성 폭발 등 각종 천문현상들도 다수 기록되었다.기사 SN 1604 관측기록은 이 초신성을 연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SN 1604 관측 기록은 케플러를 비롯한 유럽의 천문학자들이 남긴 기록보다도 상세하며 특히 밝기 변화가 초신성 폭발 직후부터 상세히 기록되어 이 초신성이 I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줬다.
- 또한 지진 및 백두산, 한라산의 분화에 대한 기록도 있어서 한반도가 결코 지진, 화산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후대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10. 바깥 고리
10.1. 사이트
10.2. 영상
11. 같이 보기
- 겸춘추일기
- 경연일기
- 경오춘하강원도기사책
- 경종대왕수정실록의궤
- 광해군일기찬수청의궤
- 기사찬초
- 기재사초
- 단종대왕실록부록찬집청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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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후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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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학사 포쇄일기
- 석담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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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조실록악보
- 세종실록악보
- 세종실록오례
- 세종실록지리지
- 송준길 경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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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
- 순조대왕실록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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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록포쇄형지안
- 실록형지안
- 영조대왕실록청의궤
- 이담명 승정원사초
- 인조 무인년 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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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관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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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재당후일기
- 학봉일기초
- 헌종실록청의궤
- 현종대왕실록개수청의궤
- 현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
- 효종대왕실록찬수청의궤
11.1. 관련 역사서
조선왕조실록은 당대에 편찬된 여러 사료들, 심지어 개인이 남긴 일기까지 참조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2차 사료인 셈. 하지만 다행히 실록을 만들 때 참조했던 여러 사료들이 남아 있다. 어떤 면에서 실록보다 더 자세한 경우가 많고, 전공자들은 실록과 함께 아래 책들을 참조한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정도지만 이 밖의 다른 자료들도 관심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다.
- 승정원일기
- 비변사등록
- 동궁일기
- 내각일력
- 일성록
- 의궤
- 정사책
- 각사등록
- 군영등록
- 선청일기
- 전객사일기
- 감대청일기
- 사변일기
- 국청일기
- 추국일기
- 친국일기
- 포도청등록
- 추안급국안
- 충훈부등록
- 간의등록
- 간의상소등록
- 간의차자등록
- 통신사등록
- 변례집요
- 춘관통고
- 칙사일기
- 의정부등록
- 지구관청일기
- 외무아문일기
-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
- 계방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