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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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한국 토종 성씨이다. 더 자세한 것은 문화류씨대종회# 홈페이지에 가면 더 다양하게 알 수 있다.
2. 역사
문화류씨의 시조는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로 남북국시대 때의 유주(儒州)[1] 출신이다. 호는 아사 였으며 차달이라는 이름은 "수레로 곡식을 실어 백성들을 먹여 살렸다."하여 왕건이 붙여준 이름이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방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보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대승(大丞)에 제수되었고 아울러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독자인 좌윤공(佐尹公) 류효금(柳孝金)이 일찍이 구월산을 지나다가 큰 범을 만나 그 입 속에 걸려 있던 비녀를 빼내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범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산신령인데 무슨 물건이 목에 걸려 심히 괴롭던 중 공이 나를 구해 주었으니 그 음덕으로 공의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7세손인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이 고려 명종(明宗)때 정당문학(正堂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류언침(柳彦琛)과 류택(柳澤)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그 후손들이 현재 문화류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그 후 문정공(文正公) 류경(柳璥)[2] , 정신공(貞愼公) 류승(柳陞), 장경공(章敬公) 류돈(柳墩) 등 수 대를 연이어 증시(贈諡)를 받아 문화류씨는 고려조에 소위 사세오공(四世五公)의 벌족(閥族)으로서 일찍부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다.
문화류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134인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음사(蔭仕)를 포함 실직당상관이 90여인에 이르렀다. 그 중에 상신(相臣) 9인, 호당(湖堂) 5인, 청백리(淸白吏) 4인, 공신(功臣) 11인 등이 배출되었다. 시호(諡號)는 22장이 내렸는데, 그 중에 문시(文諡)는 7장이다.
유명하신 분들로는 조선초에 청렴한 재상으로 유명한 하정(夏亭) 류관(柳寬), 사육신 낭간(琅玕) 류성원(柳誠源), 을사사화 때 강직한 대신이었던 송암(松菴) 류관(柳灌), 임진왜란 때 선무공신 문흥군(文興君) 류사원(柳思瑗), 실학자 반계(磻溪) 류형원(柳馨遠), 발해고를 쓴 영재(泠齋) 류득공(柳得恭) 등이 있다.. 그리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한 유현(儒賢)과 충의효렬(忠義孝烈)로 정려(旌閭)와 복호(復戶)의 은전을 받은 분이 80여인에 이르고 무과 및 소과에 급제한 분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문화류씨는 고려 때 4대명족[3] , 조선 때 8대성으로 일컬어져 왔다. 문화류씨의 족보인 영락보(永樂譜, 1423년)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지만, 실존하지 않아서 안동권씨 성화보(1477)가 가장 오래된 족보. 영락보 다음으로 편찬된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 1562년)는 현재 실존하는 족보 중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었으며, 그 기록의 정확성이 여타 족보보다 꽤 정확성이 높다고 한다. 문화 류씨에서 선산 류씨가 갈라져 나왔는데 선산 류씨도 문화 류씨랑 같은 족보 쓴다 카더라.
문화류씨의 관향인 황해도의 문화(文化) 고을은 남북국시대의 발해와 고려 초 · 중기에는 유주(儒州)로 불렸고,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던 지역인데, 고종 46년(1259년) 위사공신(衛社功臣) 류경(柳璥)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개칭함과 동시에 현(縣)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문화현으로 존속시켜 오다가 고종 32년(1895년)에 군(郡)으로 되었고, 그 이후 신천군(信川郡)에 병합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3. 대동항렬
- 홀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앞 글자에, 짝수 세손은 항렬자가 이름의 뒷 글자에 들어간다.
- 각 세손마다 두 자씩 정해져 있는데, 이는 기휘[4] 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4. 파(派)
문화류씨의 파(派)는 14개로, 그 중 충경공파, 좌상공파, 하정공파, 검한성공파, 중문지후사공파가 인구수 탑5.
다음은 2008년 문화류씨세보에 기재된 317,845명의 파별 인구 비율. 세계도 순으로 배열.
시랑공파 2.94% 9,348명
문숙공파 1.94% 6,163명
'''하정공파''' '''18.42%''' 58,560명
장령공파 0.77% 2,461명
곤산군파 5.34% 16,962명
문평군파 2.79% 8,874명
'''(중문)지후사공파''' '''7.03%''' 22,360명
'''좌상공파''' '''15.75%''' 50,059명 현재 20대~40대 중에 재(在)자 항렬이 많다.
'''검한성공파''' '''10.28%''' 32,662명 항렬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현재 20대인 애들 중에 렬(烈)자 항렬이 많다
정숙공파 2.63%. 8,366명
판사공파 1.37% 4,357명
수사공파 0.05% 163명
부윤공파 0.94% 2,983명
'''충경공파''' '''29.69%''' 94,355명 문화 류가인 사람 아무나 물어보면 대부분 충경공파인 걸 확인할 수 있다.
5. 차(車)씨와의 논란
6. 여담
문화 류씨 자체적으로 붉은 글씨로 부적 같은 것을 만드는 가풍이 있었다고 한다. 계몽사문고 120권중 원로 한글학자 정재도 선생이 쓴 91권 '우리말글 이야기'에 실려 있는 내용.
7.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
- 류근지 - 31세손 "根"자 항렬.
- 류근찬 - 31세손 "根"자 항렬.
- 유기현 - 충경공파 24대손.
- 유상철
- 유승우 - 충경공파 22대손.
- 류덕환
- 유두열 - 32세손 "烈"자 항렬.
- 유득공
- 유명환
- 류병현
- 유성엽
- 류인범
- 류인학
- 유재건
- 유재규
- 유재중
- 유인태
- 유재신 - 유두열의 아들. 33세손 "在"자 항렬.
- 류재현 - 34세손 "鉉"자 항렬.
- 류제국 - 35세손 "濟"자 항렬.
- 류제홍 - 35세손 "濟"자 항렬. 주민등록상으로는 '유제홍'으로 등록되어 있으나, 본인이 대외적으로는 '류'로 쓰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 류준열 - 32세손 "烈"자 항렬.
- 류중일
- 류지현(야구)
- 류지원
- 유진산
- 유필우
- 류현진
- 류혜영 - 35세손.
- 유희열 - 32세손 "烈"자 항렬.
- 유열 - 32세손 "烈"자 항렬. 본명은 유종열
- 류효영
- 류화영
[1] 훗날 문화현(文化縣)[2] 고종(高宗)45년 (1258) 3월에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으로 재직 중에 김준 등과 함께 최의를 축출하여 무신정권을 종식시켰다.[3] 영조(英祖) 때 홍봉한(洪鳳漢) 등이 지은 증보문헌비고에는 『 고려 사인(士人)에 명망 있는 씨족과 높은 재상으로는 류 · 최 · 김 · 이 4성이 귀종(貴種)이라.』하여 고려 4대 명족 중에 류씨를 으뜸으로 꼽았다.[4] 忌諱. 조상의 이름에 들어간 글자를 후손이 쓰지 않는 것. 넓은 범위에서 보면 발음이 같은 글자를 쓰지 않는 것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