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 무티
Riccardo Muti (1941~ 현재)
1. 개요
이탈리아의 지휘자. 1941년 나폴리에서 태어나 안노니오 보토에게 지휘를, 브티넬리에게 작곡을 배우고 프랑크 페라라에게 레슨을 받음
2. 상세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서 수학하여 지휘와 작곡을 배웠으나 지휘자로서 뛰어난 기량을 보임. 음악원 졸업 전 지휘자로 데뷔했고 귀도 칸텔리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1969년 피렌체 5월 음악제의 음악감독 직을 맡았고, 이후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베르디의 '돈 파스콸레'로 데뷔하였다.[1]
1970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아이다가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고, 1973년 마침내 오토 클렘페러의 후임으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유진 오르만디의 눈에 띄어 1975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가 되었고, 1980년에는 유진 오먼디의 뒤를 이어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1986년에는 아바도의 후임으로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지휘자로 성장하였다.
90년대에는 세이지 오자와, 주빈 메타 등과 함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가 되었고, 빈 필의 명예 단원으로 추대되었다. 2010년부터는 하이팅크의 후임으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맡고 있다.
스칼라 좌의 음악감독을 맡은 만큼 이탈리아 오페라 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오페라에 탁월하고 교향악 음악도 오페라처럼 소리를 이끌어내고 극적인 효과를 내는데 탁월하다는 평이다.
2021년 빈 신년음악회의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1993년을 시작으로 1997년, 2000년, 2004년, 2018년에 이어 여섯번째로 오르는 무대이며 이는 현재 살아있는 지휘자 중 주빈 메타(1990, 1995, 1998, 2007, 2015)를 넘어선 최다 기록이다. 자잘한 이벤트를 즐겨했던 빌리 보스코프스키, 로린 마젤과는 달리 빈 신년음악회를 '이벤트'성 행사 보다는 하나의 '음악회'로 생각하는지 이벤트는 최소화하고 그동안 신년음악회에서 연주되지 않았던 곡들을 발굴하여 포함시키는 등 학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1부 시작은 왈츠(혹은 행진곡), 2부 시작은 서곡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것도 무티만의 특징. 오페라가 장기인 그답게 등장하는 해마다 서곡 연주는 빠뜨리지 않고 있으며, 1993년 '인디고와 40인의 도적 서곡', 1997년 주페의 '경기병 서곡', 2000년 '빈의 아침과 점심 저녁 서곡' 은 무티의 극적인 연주스타일이 잘 드러난 연주다.
늘상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시작 직전에 신년멘트를 날리는 신년음악회의 전통에 충실하다. 특히 새천년을 열었던 2000년과 2004년에는 다소 투박한 영어로 간단한 메세지를 전달한 후 전통의 멘트를 날렸다(다국어+끝장나는 말빨로 관객들을 홀렸던 로린 마젤을 떠올리지는 말자)
등장 초기인 1993, 1997년에는 젊은 시절의 그답게 왈츠, 폴카도 씩씩하고 호쾌한 스타일로 연주했으며 특히나 1997년에는 초연곡을 무려 11곡이나 집어넣어 생소하고 지루했다는 평도 들었다. 특히 이 두 해의 라데츠키 행진곡은 어쩜 이렇게 뻣뻣할 수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2000년 이후부터는 이전과는 달리 노련하게 빈 필을 리드하며 나름의 빈 왈츠 연주스타일을 확립한 듯 보인다. 2004년 신년음악회에서부터는 안경을 쓰고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빈 신년음악회에 지속적으로 초청받는 것을 보면 연주하기 까다롭다는 빈 왈츠 연주도 빈 필의 맘에 든 모양(빈 왈츠에 대한 빈 필의 자부심은 대단해서 아니다 싶으면 가차없다. 1988년 성공적으로 신년음악회에 데뷔한 아바도가 1991년 두번째 등장 이후 다시는 초청받지 못한 것도 신년음악회의 분위기를 이전과는 다르게 너무 뒤엎어서 그랬다는 썰이 유력하다).
빈 필과의 돈독한 관계(무티는 매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및 빈 필의 정기연주회에 초청받는 몇 안되는 지휘자 중 한명이다)가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빈 필은 단원들이 노(No)하면 지휘자 초청 자체가 불가한 단체니 단원들의 신임도 매우 두터운 듯 하다.
2021년은 무티가 80세가 되는 해인지라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3년만에 다시 초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21년 신년음악회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사상 처음으로 무관중으로 개최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도 신년음악회는 포기할 수 없었는지 예외적으로 특별히 무관중을 조건으로 공연 개최를 허가했다는 후문. 무티는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연주 직전에 직접 마이크를 잡고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의 혼이 살아 숨쉬는 역사적인 콘서트홀(뮤직페라인 황금홀)에서 무관중으로 연주할 수 밖에 없는 이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깊은 슬픔과 우려를 표하지만, 음악과 예술의 힘으로 극복하길 바란다는 요지의 메세지를 전달 후 전통의 멘트인 "Die Wiener Philharmoniker und ich wünschen Ihnen!! Prosit Neujahr!!" 그리고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짧고 굵은 한마디 "Grazie" 를 남긴 후 연주에 임했다. 라데츠기 행진곡 연주에서는 스네어드럼의 도입부 없이 바로 시작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박수없는 라데츠키란 정말.... (1993년 신년음악회 첫 등장에서도 스네어드럼 도입부는 생략했었다)
3. 음반
라 스칼라 극장 시기 이전부터 오페라 녹음을 하였다.
아이다,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를 위시한 베르디, 벨리니 녹음 들이 있다. 이외에도 모차르트, 바그너 등에서도 훌륭한 평을 받는다. 특히 베르디는 현존하는 지휘자 중에서는 최고 중 한명이라는 평이다.
베토벤, 브람스, 스크리야빈 교향곡 전곡(필라델피아) 등 교향악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사실 음반보다는 실제 연주회에서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전형적인 실황형 지휘자이다. 실제로 그의 음반은 베르디 외에 딱히 베스트라고 선택되는 것들이 없는데, 정작 실연에서의 무티는 악단을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놀라운 연주를 들려준다. 향후 무티가 내한하게 되면 꼭 한번 가보자. 특히나 예술의전당 합창석에서 보게 된다면 음악 뿐 아니라 그의 칼같은 바톤 테크닉을 코 앞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997년 신년음악회는 지금은 사라진 EMI에서 발매되었는데, 이는 EMI에서 처음으로 발매한 신년음악회 음반이다. EMI는 무티의 2000년 신년음악회도 발매한 바 있다. 무티는 오랜기간 EMI와의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90년대 중반 EMI에서 저가시리즈인 레드라인 시리즈를 통해 무티의 EMI녹음 대부분을 풀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바 있다(본의아니게 레드라인 시리즈를 대표하는 지휘자로 널리 인식되어버렸...) 최근에는 시카고 심포니의 자체 레이블인 'CSO-Resound'를 통해 시카고 심포니와의 녹음을 발매하고 있다.
4. 지휘의 특징
그의 지휘는 매우 정교하다는 평이 높다. 특히 지휘를 마치 야전군 사령관이 하듯이 매우 힘차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개성이자 메리트이다[2]
무티의 바톤테크닉은 현존 최고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정교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젊은 시절에는 그야말로 칼 같은 테크닉을 보여주었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은 시절에 비해 비교적 간결해졌다. 그래도 터질땐 가차없이 터진다. 전형적인 나폴리 출신 열혈남아.
그런 지휘적 특성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 생각보다 동안인데 비슷한 동년배인 다니엘 바렌보임[3] 과 비교하면 더 그러하다. 올해 한국나이로 80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
5. 한국에서
1985년에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1996년과 2004년에 라 스칼라 필하모닉과 내한하였고, 2016년에는 시카고 심포니와 내한하였다. 이전에도 2013년에 내한할 계획이었으나, 급성 독감에 걸려 대타로 로린 마젤(!)이 지휘하였다.
2004년 라 스칼라 필하모닉과는 9월 4일, 5일 이틀간 공연했다. 96년에 이은 8년만의 내한이었으며, 첫날 공연은 고양 어울림누리 개관공연으로 열렸다. 세계 탑클래스의 지휘자와 악단이 서울이 아닌 지방을 먼저 찾은 경우는 흔치 않은데 개관행사가 중요하긴 중요한 모양... 고양에서는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베르디의 '멕베스' 중 춤곡과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하였다.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5번과 브람스 교향곡 2번을 연주한 둘째날 예술의 전당 공연보다 고양에서의 공연이 더 무티스러운 레퍼토리로 채워졌고, 실제로 첫날 공연이 더 훌륭했다. 게다가 첫날의 앙코르로 무티의 최고 장기 중 하나인 베르디 오페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서곡을 깜짝 연주했는데, 안그래도 차이코프스키 5번으로 이미 흥분상태였던 객석을 확인사살해버리는 놀라운 연주였다. 공연 끝나고 로비에서는 '아니 불을 확 질러버리고 끝내버리면 어떡해!!' 등의 호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1년 후 이렇게 케미터지던 라 스칼라에서 절대 다수의 불신임투표 찬성으로 강제 사임(??) 사퇴(??) 해고(??) 된다....[4] )
2016년 시카고 심포니와의 내한에서도 둘째날 공연에서 베르디의 '나부코' 서곡을 앙코르로 연주해서 예당 콘서트홀을 뒤집어놨다(베르디 연주로 열광하는 객석을 보는 흐뭇하게 바라보는 취미가 있는 듯 하다... 내가 곧 베르디이니라... 뭐 이런식). 이때에도 첫날 베토벤 교향곡 5번과 말러 교향곡 1번 연주에서는 그 해석과 관련하여 많은 논쟁을 낳기도 했다. 프로코피예프, 힌데미트, 차이코프스키로 채워진 둘째날 공연이 오히려 무티와 시카고 심포니 조합의 케미를 잘 보여주는 연주로 호평받았다, 앞서 언급한대로 앙코르의 '나부코' 서곡은 차이코프스키 4번에서 시카고 금관에 취해있던 객석에 결정타를 날렸으며 수차례의 커튼콜 끝에 쏘쿨하게 손 한번 흔들어주고 퇴장했다.
이외에도 한국인 성악가들은 이탈리아 성악가들에 비해 실력과 열정이 뒤지지 않는다는 등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정경화와의 친분도 많이 작용한 것 같다. 내한 공연에 왔을 때 정경화가 무대 뒤로 찾아오면 기쁘겠다는 말도 하는 걸 보니...
2016년 5월에 경기 필하모닉[5] 과 협연을 가졌다. 오케스트라의 이름값에 비해 표값이 비싸서 말이 좀 있었지만 실제 공연 후에는 납득된 모양.
[1] 갑자기 이른 새벽 일면식도 없던 카라얀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출연 제의를 하여 깜짝 놀랐다고 한다.[2] 사실 리카르도 무티가 체격이 다부지다 보니 그런 면도 있다.[3] 사실 바렌보임은 탈모가 심해서 그러 한 것도 있다. 게다가 바렌보임이 동생이다.[4] 무티는 단상위의 독재자로 유명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단원들에게 '당신의 위대한 음악적 성취에도 그곳에 이르는 길은 인간에게 해롭다'라는 평가를 받게 되고 2005년 사임하게 된다.[5] 공히 한국 최고수준의 오케스트라라고 인정받는 서울시향이나 KBS 교향악단이 아닌 경기 필하모닉이란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경기도문화의전당 측에서 초청에 대단히 공을 들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