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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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교향악단'''
'''영어: KBS Symphony Orchestra'''
'''독일어: KBS Symphoniker'''
'''프랑스어: Orchestre symphonique de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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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연혁
3. 조직 구성
3.1. 역대 상임 지휘자
3.2. 단원
4. 특징
5. 연주


1. 개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거점으로 하는 관현악단. 명칭대로 한국방송공사 소속이었지만, 2012년 11월을 기점으로 재단법인이 되었다.

2. 연혁


1956년 12월에 한국방송공사(이하 KBS) 소속 악단으로 창단되었는데, 단원 대부분은 같은 해 6월 해단된 육군 소속의 육군교향악단 단원들이었고 초대 상임 지휘자로는 임원식이 영입되었다. 초기에는 단원 수가 30여 명 정도의 실내 관현악단 체급이었지만, 이듬해 단원을 대폭 보강해 60여 명의 2관편성[1] 악단으로 몸집을 불렸다.
1969년에는 정부의 결정에 따라 국립극장으로 악단 운영권이 넘어갔고, 자동적으로 국립화되어 명칭도 ''''국립교향악단'''(National Symphony Orchestra of Korea)' 으로 바뀌었다. 줄여서 '국향'이라고 불리었다. 동시에 단원 수도 3관편성 급인 90여 명으로 보강되었다. 임원식은 명칭 변경 후에도 1971년까지 직위를 유지했고, 이후 홍연택이 제2대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다.
홍연택 부임 초기에는 운영권을 둘러싸고 KBS와 국립극장 측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1971년에 KBS로 다시 넘어갔다가 1972년에 다시 국립극장이 가져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국립극장이 운영권을 재인수한 그 해에 10월 유신으로 국가와 정부의 힘이 막강해지자 관련 문제는 쏙 들어갔다.
1981년 제5공화국이 시작된 후 운영권이 다시 KBS로 넘어왔고, 동시에 이름도 창단 때와 같은 KBS 교향악단으로 바뀌었다. KBS에서는 조직 개편을 단행하면서 총감독과 전임지휘자, 수석 객원 지휘자 등의 직책을 새로이 도입하여 전임지휘자로 금난새가, 수석 객원 지휘자로 독일 출신의 발터 길레센이 영입되었다. 하지만 상임지휘자는 두지 않았다. 당시 상임지휘자를 두지 않고 전임지휘자로 금난새를 둔 것은 금난새의 나이가 너무 어렸고 지휘 경력도 너무 짧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KBS 교향악단에는 금난새의 스승이었던 사람도 몇몇 있었고, 때문에 약간은 미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고 한다. 때문에 전임지휘자라는 직책을 신설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실제로 전임지휘자의 의미는 상임지휘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임지휘자는 추후에 적임자를 선출할 예정이었는데, 금난새가 경력이 쌓이면 상임지휘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어쨌든 금난새는 KBS 교향악단에서 역할이 조금 작은 사실상의 상임지휘자로서의 롤을 수행했다.
1986년 원경수가 그동안 공석이었던 상임지휘자로 취임했고 1988년까지 재임한 후 사임했다. 이후 상임지휘자 자리는 다시 공석으로 4년 정도 지속되었다. 이후 이스라엘 출신의 모셰 아츠몬과 조지아 출신의 박탕 조르다니아가 차례로 수석 객원 지휘자로 영입되어 악단을 정기적으로 지휘했다. 금난새는 1992년까지 전임지휘자 직책을 계속 유지했으나 끝내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지 않았고, 결국 1992년 KBS 전임지휘자를 그만두고 수원시향 상임지휘자로 떠났다.
1992년 체코 출신의 독일 지휘자 오트마 마가가 창단 이래 최초의 외국인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여 1996년까지 재임했다. 오트마 마가는 창단 이래 최초의 외국인 지휘자이며, 기존 국내 중견지휘자들에 비해 한층 정교한 해석으로 국내 음악팬들에게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오트마 마가 재임기간 동안 독일 후기 낭만주의 정통 레퍼토리를 다루었고, 아울러 그동안 잘 다뤄지지 않던 브루크너, 말러 등의 대작도 본격적으로 연주되기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 KBS 교향악단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급성정하여 국내 최고 오케스트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1996년 마가 사임 후 후임이 없어 1년여 동안 객원 지휘자 체제로 운영되었다.
1998년 정명훈이 제5대 상임 지휘자에 부임해 음악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정명훈은 취임 직후 자존심 강한 악단 단원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결정적으로 교향악단 사무처와의 이런저런 문제로 인해 결국 취임한지 석달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2][3]
정명훈이 사임한 후 같은 해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던 러시아의 드미트리 키타옌코가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키타옌코는 자신의 장기인 러시아/소련 음악의 빈도를 높였다. 특히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칼리니코프 등 그동안 한국에서 별로 공연되지 않던 러시아의 중견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키타옌코 지휘의 공연을 보기 위해 일본의 극성 팬들이 특별 패키지 투어를 조직해 한국으로 오기도 했다고 한다. 키타옌코는 2004년까지 재임했다.
2004년 키타옌코의 임기가 끝나고 한동안 상임지휘자 없이 객원 지휘자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 시기부터 KBS가 예산상의 문제로 KBS 교향악단을 재단법인화해 독립시키려 하면서 단원들과 커다란 갈등이 시작되게 된다. 상임지휘자 인선 문제 등이 겹쳐 단원들과 KBS의 대립은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관현악단을 넘어 아시아 정상급 오케스트라 자리에 도전했던 KBS 교향악단은 이 때를 기점으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2005년 단원들의 격렬한 반발 끝에 KBS가 교향악단을 재단법인화해 독립시키겠다는 계획은 일단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문제로 악단과 KBS의 갈증은 계속되었다. KBS는 2008년에 다시 교향악단의 재단법인화를 시도했으나 단원들의 격렬한 반발 끝에 다시 한번 무산되었다. 악단에서는 KBS가 예산을 엉망으로 쓰고 있고 단원들은 임금 체불로 고통받고 있다고 주장했고, 2008년 상반기에는 단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편성 작품의 연주 스케줄을 연기하거나 변경하는 일이 잦아졌다. 정년 퇴임이나 이직 등으로 지속적으로 결원이 발생하고 있었음에도 이때 거의 5년간 신규 단원을 거의 충원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KBS 교향악단이 2000년대 초반 한때 풀 4관 편성에 도달했기 때문에 당시 결원을 충원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국내 다른 오케스트라에 비해서는 여전히 가장 정단원 숫자가 많은 편이긴 했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음악팬들 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서로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악단과 KBS 양 쪽을 신나게 까면서 운영 정상화를 촉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4] 이렇게 2008년을 기점으로 KBS 교향악단은 급격한 쇠락에 빠진다.
KBS의 재단법인화 시도가 다시 한번 무산된 후 파행 사태가 그럭저럭 잠잠해져가고 있었으나, 2010년 KBS 측에서 2012년까지 2년 임기로 신임 상임지휘자로 함신익을 내정했다고 발표하면서 다시 갈등이 증폭되었다. 단원들이 KBS의 독단적인 결정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지휘자 경력으로는 예일대 학생 교향악단 지휘자 경력에 불과한 사람이 KBS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결정된 것은 MB정권 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볼때 상식적으로 납득되기 어렵다. 하지만 함신익은 계약대로 취임하여 7월부터 상임지휘자로서 공식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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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신익
하지만 상황은 계속 악화 일로에 있었다. 2011년 10월에는 오디션을 둘러싸고 함신익과 단원들이 또 충돌했다.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단원들이 '''공연 보이콧'''을 의논할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제2바이올린 단원들에게 제1바이올린 파트 연주를 연습시키려고 했다 근데 애초에 제2바이올린 파트에게 제1바이올린 파트 연습을 시키는 것 자체가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함신익이라는 지휘자의 진면목을 드러낸 사건으로 학생 교향악단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제1바이얼린은 기병부대로 전선을 휘저으며 싸우는 역할이고, 제2바이얼린은 포병이다. 공통점은 바이얼린일 뿐 애초에 역할이 극명하게 다르다. 게다가 십여년 이상 각각의 역할을 하던 단원들에게 파트를 바꾸라는 말은 수십년간 단련된 기병과 포병을 전쟁터에서 임무 교대하라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포병한테 갑자기 칼과 말을 주고 싸우라면 싸울 수 있겠는가.
단원들은 함신익이 수준미달의 음악적 수준과 일방적, 독선적인 낙하산 지휘자라서 갈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함신익 측에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단원들의 음해라고 맞서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함신익의 모교인 예일대까지 함신익의 자질을 둘러싼 논란에 휘말렸고 음악계에서도 이를 두고 단원을 옹호하는 측과 함신익을 옹호하는 측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결국 함신익과 악단 측은 서로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해 법정 공방으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KBS를 둘러싼 정치적인 논쟁까지 얽혀서 상황은 말 그대로 혼돈의 카오스로 치달았다. KBS 경영진 측에서도 지휘자와 악단 양측에 대한 중재 노력이 실패했거나 노력 자체를 하지 않았는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불거졌다. 결국 악단 연주회도 2012년 3월 초순 이래 줄줄이 취소 사태를 빚었는데, 제666회 이래 예정되었던 정기연주회들 뿐 아니라 한국 관현악단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연주하는 최대 규모의 음악제인 교향악축제 참가까지 취소되는 등 창단 이래 최악의 길을 걷고 말았다. 심지어 영국의 유명 음악 평론가인 노먼 레브레히트도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 사태와 관련된 포스팅을 연이어 올리는 등, 국제적인 망신 사례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였다.[5][6] 누가 법정에서 이기든 지든 망했어요...
이렇게 단원들의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KBS 이사회는 4월 25일에 악단의 법인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련 기사 하지만 단원들은 사측의 방침을 계속 거부하면서 파업을 풀지 않아서, 악단의 존속은 둘째 치고 2012년 한 해가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9월 7일에 KBS와 단원들은 분쟁을 마무리 짓고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KBS가 추진하는 법인화를 단원들이 수용하는 대신, 단원들은 대부분 법인으로 이적하거나 파견되는 형식으로 오케스트라에 복귀하기로 했다. 또한 KBS는 교향악단 정원 95% 이상의 상시 유지, 교향악단 지원금의 안정적 지원, 소외계층 및 지역 시청자를 위한 음악회와 프로그램 수행, '''세계 정상급의 상임지휘자 영입'''등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9월 중에 신규 단원 모집공고를 내는 한편 빠른 시일내에 법인화 전환후 첫 연주회를 개최할 예정라고 발표했다.
함신익을 비방한 단원에게 벌금형이 선고됐다.
이번 합의의 결과로 KBS 교향악단의 정상화가 이뤄질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는가 하면, 클래식 팬덤에서는 세계 정상급의 상임 지휘자 영입 만으로는 수준 이하로 떨어진 악단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건 무리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이왕 영입할 거면 전성기에 단원들을 마구 갈구기로 악명 높았던 첼리비다케토스카니니 같은 카리스마 강한 지휘자의 영입이 악단의 미래를 위해 나을거라는 지적도 있었다.
악단과 KBS의 발표에 따르면 영입하려고 했다는 세계 정상급 상임 지휘자 후보로는 스위스 출신으로 몬트리올 교향악단과 NHK 교향악단을 이끌었고 2012년 현재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예술 감독 겸 수석 지휘자를 맡고 있는 샤를 뒤투아, 2010년까지 쾰른 서부독일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았던 러시아의 세묜 비치코프, 마찬가지로 2010년까지 빈 방송 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재임했던 프랑스 지휘자 베르트랑 드 비이 등이 거론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세 지휘자 모두 악단의 영입 제안에 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 와중에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이자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예술 감독을 맡고 있는 미하일 플레트뇨프가 유력 후보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플레트뇨프의 영입 가능성이 점쳐지자 이번에는 갑자기 KBS 노동조합 측이 그가 2010년에 태국에서 청소년 성매매 혐의로 고발당한 전력을 들어 반대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이 성매매 혐의가 무혐의로 판명되었고 플레트뇨프의 활동에도 그다지 큰 오점으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 노조 측의 반발도 그다지 쉽게 먹히지는 않았다. 사실 당시 국내 음악계에서는 플레트뇨프의 취임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혐의로 끝난 성매매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당시 혼란과 파행을 거듭하고 있던 KBS 교향악단이 플레트뇨프를 영입할 만한 자금이 충분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함신익과 갈등을 벌이고 있던 KBS 교향악단 측에서 힘겨루기 와중에 뻥카로 던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레트뇨프는 한 차례 객원 지휘에 그쳤을 뿐 상임지휘자 취임은 불발되었으며, 구체적인 계약이 오간다는 뉴스도 없었다.
활동 중단 기간 동안 법인화와 단원들의 직위 유지와 처우 문제, 신규 단원 선발 등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는지, 11월 중순 KBS와 한국전력공사가 공동 주최하는 음악콩쿠르의 입상자 기념 연주회를 워밍업 식으로 가졌고, 30일에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재단법인으로 공식 출범했음을 알리는 첫 특별연주회를 열어 공식적인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이 연주회는 앞서 상임지휘자 후보로 거론된 플레트뇨프가 지휘했지만, 아직 상임직함은 달지 않은 상태여서 악단 측 발표대로 2013년 상반기가 되어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이어 연말 공연의 단골 레퍼토리인 베토벤교향곡 9번이 메인 레퍼토리로 오른 두 번째 특별연주회가 12월 14일에 곽승의 지휘로 개최되었다. 이외에도 크리스마스 이틀 전이었던 12월 23일에는 최수열의 지휘로 KBS홀에서 특별 음악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악단 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정기연주회도 이듬해(2013년) 2월 22일에 체코 지휘자 레오스 스바로프스키의 지휘로 재개되었고, 같은 해 8월 말 요엘 레비가 2014년 1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2년 임기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는 것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남은 2013년 공연들은 모두 객원 지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레비는 계약 대로 2014년 1월에 공식 취임 연주회를 열어 임기를 시작했다.
법인화 당시 공사 소속이었던 기존 단원들은 교향악단 법인으로 파견 형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들 단원들이 2016년 봄에 파견 기간이 끝나면서 다시 갈등이 생겼다. 한때 갈등봉합에 실패해 단원 70%를 줄일 뻔 하였으나 결국은 최종적으로 타협이 되어서 대규모 감축은 피했고 개인 의사에 따라 전적을 거부한 약 20명의 단원은 KBS의 일반직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자리(+정년퇴임, 사직 등으로 인한 공석)만 신규 단원으로 채용해서 메우는 방식으로 최종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명단을 통해 짐작컨대 악장, 수석급 핵심 단원들은 그대로 넘어온 것으로 보아 연주력도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의도하지 않은 이런 인적쇄신으로 말미암아 젊고 테크닉이 좋은 신입단원들의 충원으로 사운드가 좋아진 면도 있다.
요엘 레비의 취임과 법인화 문제 해결 이후 KBS 교향악단은 크게 안정되어 예전의 위상을 회복해 나가고 있다. 그는 혼란일색이었던 교향악단의 분위기를 다잡는 리더십도 출중함은 물론, 폭넓은 레퍼토리로 다양한 시도를 하는 성실한 지휘자로서 교향악단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요엘 레비 취임 이후 교향악단은 파행 사태가 일단락되고 정상적인 정기연주회 스케줄을 소화하게 되었다. 단원들의 이동도 안정화되었으며 꾸준한 단원 충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요엘 레비는 2015년 계약 만료 이후에 2년을 더 재계약 한데 이어 2017년 다시 2년 더 재계약해 2019년까지 KBS 교향악단을 이끌었다. 이 기간동안 요엘 레비의 가장 큰 공은 교과서적인 비트와 곡해석으로 젊은 신입 단원들과 기존 단원들의 기반을 재정립하여 하나로 묶은 점이다. 다만, 너무나 교과서적인 지휘로인해 음악적인 유려함은 다소 부족했다. 그래도 대다수는 요엘레비 재임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레퀴엠,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 등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대작들을 무대에 올리는 한편 말러 전곡 시리즈와, 쇼스타코비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안톤 브루크너 등 대편성 관현악을 꾸준히 무대에 올렸으며, 무엇보다 함신익 재임기부터 말 그대로 혼돈의 카오스를 겪고 있던 악단의 상황을 나름대로 안정화시킨 것이 긍정적 평가의 큰 요인.
요엘 레비가 떠난후 2020년 시즌은 객원지휘 체제로 꾸려질 예정이다. 특기할 사항은 예전 상임지휘자였던 정명훈과 드미트리 키타옌코가 객원지휘자로 무대에 선다는것.
롯데콘서트홀 개관에 즈음해서는 안방을 예술의전당에서 옮기기도 하였다.

3. 조직 구성



3.1. 역대 상임 지휘자


  • 임원식 (재임 기간 1956-1971. 1998년에 명예 지휘자 호칭 수여)
  • 홍연택 (재임 기간 1971-1981)
  • 원경수 (재임 기간 1986-1988)
  • 오트마 마가 (Othmar Mága, 재임 기간 1992-1996)
  • 정명훈 (재임 기간 1998)
  • 드미트리 키타옌코 (Дмитрий Китаенко, Dmitri Kitayenko, 재임 기간 1999-2004)
  • 함신익 (재임 기간 2010-2012)
  • 요엘 레비(Yoel Levi, 재임기간 2014-2019)[7]
이외에 수석 객원 지휘자로 발터 길레센(1982-1984)과 모셰 아츠몬(1990-1992), 박탕 조르다니아(1990-1996), 박은성(2000-2002), 곽승(2004-2006)이, 전임 지휘자로 금난새(1981-1992)가 활동했다.

3.2. 단원


'''제1바이올린'''
악장: 공석
부악장: 최병호
수석: 반선경
부수석: 김대훈, 유신혜
단원: 김혜은, 황미령, 권혁진, 최혜진, 김희진, 강내윤, 오지은, 유지인, 이소윤, 설현선, 김지현, 김선우, 선승미
'''제2바이올린'''
수석: -
부수석: 임정연
단원: 방영호, 채은주, 노명희, 이혜영, 유주현, 김진아, 이윤경, 박소현, 박정원, 김은근, 이조해, 황선민
'''비올라'''
수석: 진덕
부수석: 한넬리
단원: 고은숙, 박세란, 최진미, 김지우, 유민형, 임나유, 석지영, 박새롬, 변은혜, 유우정
'''첼로'''
수석: 김우진
부수석: 윤여훈
단원: 양윤정, 김현정, 김소영, 김희연, 정세은, 장현경, 김신애, 유소향
'''더블베이스'''
수석: 이창형
부수석: 김남균, 안수현
단원: 김상훈, 이도용, 양현주, 유주연, 장한별
'''플루트'''
수석: -
부수석: 김태경
단원: 이철호, 전서영
'''오보에'''
수석: 이지민
부수석: 김종아
단원: 윤혜원, 조성호
'''클라리넷'''
수석: -
부수석: 손한요
단원: 유형직, 박한
'''바순'''
수석: 박준태
부수석: 고주환
단원: 김소연, 정순민
'''호른'''
수석: -
부수석: 정종진
단원: 정희찬, 조세영, 조현우
'''트럼펫'''
수석: -
부수석: 정용균, 김주원
단원: 김승헌
'''트롬본'''
수석: -
부수석: 박홍배
단원: 정다운
'''튜바'''
수석: -
단원: 노리토 우수이
'''팀파니'''
수석: 이영완
단원: -
'''퍼커션'''
수석: -
단원: 장세나, 오지예, 매튜 에른스터
'''하프'''
수석: -
단원: 김서원

4. 특징


한국에서 유이하게 완편된 방송 교향악단이고,[8] 2000년대 중반까지는 일반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한국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혀왔다. 6.25 이후 오랫동안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양대 산맥을 이루어 왔지만, 아무리도 '''국립'''이었던 '''국향'''이 '''시립'''이었던 '''시향'''보다 반 걸음 앞서 있는 형국이었다. 70년대말 각각 KBS와 세종문화회관으로 이관된 후 두 악단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아무래도 방송국의 지원이 보다 탄탄한 것은 당연지사. 90년대 이후 그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지면서 한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인정받았다. 특히 그 시절 국내에서 유일하게 정규단원으로 4관편성이 가능했'''었'''다.[9][10] 다른 오케스트라에 비해 단원들의 연령대가 높고 남자 단원 수도 훨씬 많았다. 특히 그간 국내 오케스트라의 가장 큰 단점으로 꼽혀온 금관 파트도 국내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연주자들을 연이어 영입해서 막강한 진용을 구축했'''었'''다. 월등한 기량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다른 오케스트라와 달리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내지르는 파워풀한 사운드를 냈'''었'''다. 하지만 연혁 란에 쓴 것처럼 2000년대 중후반부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잇단 파행 사태로 인해 악단 이미지가 심하게 구겨졌고, 실력 있는 단원들이 오케스트라를 떠나는 등 악단의 기량이 저하되고 있다. 심지어 안좋게 헤어진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 뿐 아니라 예산이 훨씬 부족한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같은 악단에도 발린다고 까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 사태의 뒷편에는 KBS와 악단 사이의 수많은 갈등과 의혹,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단순히 철밥통 쟁탈전으로 치부할 순 없다고 하지만, 일단 가장 피해를 본 축에는 음악을 즐기러 공연장을 찾던 청중들도 분명히 들어있다는 점에서 결국 병림픽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함신익의 상임 지휘자 취임 과정에서도 수많은 구설수가 나온 만큼, 악단의 미래도 어떻게 될지는 쉽게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방송 교향악단 답게 수많은 방송 출연 경험을 갖고 있지만, 정작 녹음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 음반으로 제작된 것도 그리 많지 않은데, 시판된 것들 조차 너무 빨리 폐반/절판되어 중고음반점을 뒤져야 몇 개가 나오는 수준이다. 그나마 가장 많은 종류는 KBS가 해동물산과 합작해 제작한 음반 시리즈인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구하기 힘든 편이다.
일단 본격적인 녹음은 홍연택 재임기였던 국립교향악단 시절에 시작되었는데, 바그너와 강석희의 관현악곡 연주 실황을 담은 LP가 1980년에 당시 상주 공연장이었던 국립극장의 설립 30주년을 맞아 성음에서 출반되었다. 이 전인 1977년에는 애국가, 삼일절 노래, 광복절 노래등이 실린 "의식음악 선집"을 녹음한 바 있다.[11] 또한 1980년대 말에는 전임 지휘자였던 금난새가 서울음반(현 로엔 엔터테인먼트)에서 프로코피에프의 '피터와 늑대' 와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 를 커플링한 것[12]과 소련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의 '카르멘 발레' 를 수록한 CD 두 장을 취입하기도 했다.[13] 금난새 외에도 박탕 조르다니아가 1992년에 역시 서울음반에 취입한 베를리오즈환상교향곡도 화제가 되었고, 이외에 금난새의 지휘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개최된 1991년 신년음악회와 외국에서 활동하던 한국계 성악가들을 초빙해 개최한 세계한민족초청음악회의 실황, 김만복의 지휘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최된 안익태 기념음악회의 실황이 마찬가지로 서울음반에서 발매되기도 했다.
다만 이들 음반은 한국에서만 유통되었고, 세계 시장에 선보여진 첫 음반은 아르메니아미국 작곡가인 앨런 호바네스[14]의 교향곡 두 곡과 밀양 아리랑을 박탕 조르다니아의 지휘로 녹음한 코흐(Koch)의 CD였다. 1995년 발매된 저 CD는 그래미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고, 이후 코흐와 사운드세트 등의 음반사에서 쇼스타코비치와 이삭 슈바르츠, 호바네스의 작품을 담은 CD들을 추가로 제작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으며 오랫동안 익숙하고, 정부 표준으로써 활용하고 있는 애국가의 음원도 역시 이 악단이 녹음한 것이며, 1995년에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YBM 서울음반의 '의식의 노래' 음반에 들어있는 애국가를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애국가 이외에도 삼일절 노래, 광복절 노래, 개천절 노래 등 여러 음반이 담긴 음악은, 공공기관에 배포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후 터진 IMF 크리로 인해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음반 녹음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고, 이후에도 상임을 맡았던 키타옌코를 비롯해 곽승과 정치용, 오트마 마가, 김봉, 장윤성 등 여러 지휘자들의 실황이나 스튜디오 녹음이 음반화 되었지만 대부분 국내 유통에만 그치고 세계 시장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악단 안팎으로 내분이 심하게 일어났던 2005년 이후로는 녹음 계획이 없었으나, 2011년에 벨기에 음반사 푸가 리베라에서 첼리스트 디디에르 포스캥의 협연과 파트릭 다뱅의 지휘로 프랑수아 세르베의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담은 CD를 발매했다.
음반 외에도 방송국 소속인 만큼 알게 모르게 여러 방면에서 연주를 들을 수 있는데, KBS에서 방영되는 사극OST 대부분은 이 악단이 녹음한 것이다. 다만 여기엔 뒷이야기가 존재하는데, KBS 교향악단은 "드라마 OST '''따위'''를 연주하긴 '''격이 맞지 않는다.'''" 란 이유로 '''용의 눈물 OST'''[15] 연주를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 결국 저 OST는 우크라이나까지 가서 연주를 받아왔는데, 드라마 뿐만 아니라 OST까지 대박을 치자 그 이후로는 모든 KBS 대하드라마 시리즈의 OST를 연주해주고 있다. 또한 2014년 10월부터 방송되는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에도 상임지휘자인 요엘 레비가 비에라 역으로 특별 출연하며, 교향악단도 출연한다. 덕분에 2014년 9월 정기연주회는 평상시와 달리 연주 실황을 드라마 제작팀에서 촬영하였다.
KBS 1FM에서는 아예 모든 정기 연주회를 생중계하고 있으며, KBS의 2013년 가을 프로그램 개편 때 금요일 오후 1TV에서 KBS교향악단 연주회 녹화방송을 정규 편성으로 집어 넣어 방송중이다. (단, 정기연주회 자체가 한 달에 2번 정도이기 때문에, 방송할 새 연주회가 없는 경우에는 다른 연주회나 공연 등으로 자주 대체되곤 한다.) 프로그램 소개
주요 공연장은 재단 법인화 이전 까지는 KBS홀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었고, 정기연주회도 대부분 이틀 일정으로 두 공연장에서 연달아 진행되었다. 그런데 법인화가 된 2013년 이후에는 이틀 일정의 정기연주회 중 예술의 전당 연주회만 그대로 열리고, 상대적으로 사운드나 접근성이 떨어져서 청중이 적었던 KBS홀 정기연주회는 없어졌다. 대신 1년에 한번 정도를 제외하면 요즘들어 전국 여기저기에 생겨난 공연장에서 예술의전당 연주회 전날 또는 다음날에 같은 프로그램으로 한번 더 연주하기 때문에[16], 정기연주회를 이틀 연속으로 공연하는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KBS홀의 대관은 가끔 특별연주회를 개최하거나 다른 지방 연주가 안잡혔을 때 연주하는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 때문에 KBS홀과 교향악단의 관계는 교향악단의 사무국과 연습실이 위치하고 있지만 정기 연주회는 개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종문화회관서울시립교향악단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게 바뀌었다.
2017년 정기연주회 때부터는 롯데문화재단과 업무협약을 맺어서,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에서 정기연주회를 연다고 밝혔다. 2015~6년의 경우 지방 연주까지 잡혀서 3번 연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2017년 이후 일부 정기연주회는 예당, 롯데홀, 지방 이렇게 세 번씩 연주할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재단 법인화 이후 아시아나항공과 제휴를 맺었는데, 그 결과 아시아나클럽 멤버십 회원에게 마일리지에 상관없이 회원카드만 제시하면 정기연주회 20% 할인 혜택을 주고 있으므로 정기연주회를 관람하려고 할 때 이를 이용하면 좋다.
해외 공연은 국립교향악단 시절이었던 1979년에 미국에서 처음 개최했고, 이어 1980~90년대 동안 동남아시아와 일본에서도 공연했다. 1995년 10월에는 한국 관현악단으로서는 최초로 뉴욕유엔 본부 회의장에서 정명훈의 지휘로 공연하기도 했고, 2005년 3월에는 곽승의 지휘로 독일의 비스바덴과 루트비히스하펜, 에서 소규모 순회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남북 예술 교류에 있어서도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는데, 2000년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서울을 방문해 공연한 조선국립교향악단과 합동 연주회를 개최했다. 이어 2002년에는 답례 형식으로 평양을 방문해 공연했고, 마찬가지로 조선국향과 합동 공연도 개최했다. 다만 그 뒤로는 남북 관계 경색 때문에 더 이상의 교류는 없는 실정이다.

5. 연주



근래 KBS 교향악단의 역사적 호연이었다고 평가받는 브람스 교향곡 4번. 2017 교향악축제 마지막 레퍼토리였던 이 곡이 끝나자 매진된 전 객석에서 엄청난 환호가 터져나왔다. 일부에서는 이날 요엘 레비가 매년 한번씩 올까 말까 하는 '''신이 들렸다'''고 평했다.
위의 2017년 교향악 축제 못지 않은 2019년의 열연은 6월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의 743회 정기연주회여서 였는데 이날의 자세한 평은 다음과 같다: https://blog.naver.com/composer_syw/221573420599


[1] 목관악기를 종류 별로 두 대씩 편성하는 편성법[2] 이 때문에 정명훈은 이후 KBS 교향악단 연주회를 지휘하지 않고 있다. 몇몇 인터뷰에서도 당시 상황에 대해 대단히 섭섭하다는 견해를 밝힐 정도로 앙금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실정.[3] 2018년 8월 23-24일 733회 정기연주회로 20년만에 KBS교향악단을 지휘했다.[4] 당시 상황이 꽤 막장이었는지, 심지어 매일경제 같은 보수적인 경제지 뿐 아니라 한경오에 속하는 경향신문까지도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실을 정도였다.[5] 다만 저 레브레히트 칼럼의 논조는 지나치게 악단 입장에 치우쳐 있고, 정치적 방향성이 너무 뚜렷한 사람의 글을 논거로 계속 가져오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6] 노먼 레브레히트가 유명하긴 하지만 그의 칼럼이 객관적이고 공정한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7] 한국 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의 남주 차유진의 은인으로 특별 출연.[8] 2012년 2월 이전까지는 유일했으나, 대구에서 아트애비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대구 MBC 소속의 대구MBC교향악단으로 재창단되면서 두 개 단체가 되었다.[9] 2000년대 중반 이후 단원이 줄면서 현재는 객원 단원 없이는 4관 편성이 안나온다.[10] 정규단원으로 풀 4관 편성이 되는 오케스트라는 해외에서도 의외도 드물다.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제외하면 세계 탑 10 오케스트라 중에도 정규단원으로 4관 편성이 되는 오케스트라는 별로 없다.[11] 당시 국립교향악단이란 점을 살려서 공식음원을 녹음한 것으로 보인다.[12] 참고로 메텔 역으로 유명한 송도영이 나레이션을 맡았다. 성우덕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자.[13] 그런데 CD 말고 LP 포맷의 경우 악단 명칭을 영어로 'Korea Philharmonic Orchestra' 라고 기입하고 있다. 1981년 KBS 이관 후에도 국립교향악단으로 통용되던 영어 명칭을 혼용하고 있었던 증거로, 해외에서도 아직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14] 교향곡을 무려 76곡이나 작곡해 9번 교향곡의 저주역관광시킨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이다. 저 숫자도 단지 추정치여서 몇 곡이 더 발견될 지는 모르는 상황.[15] 그 전설의 사극 맞다.[16] 예를 들어 2014년 정기연주회 일정만 보면, 안양, 용인, 부산, 광주(경기), 오산, 천안, 구리, 대전, 강동, 하남에서 각각 정기연주회가 잡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