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바렌보임

 

'''다니엘 바렌보임의 주요 수상 및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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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iel Barenboim'''
'''본명'''
다니엘 바렌보임
Daniel Barenboim (히브리어: דניאל ברנבוים)
'''출생'''
1942년 11월 15일 (81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적'''
'''이스라엘''' | 아르헨티나 | 스페인 | 팔레스타인 (복수국적)
'''직업'''
피아니스트, 지휘자
'''신체'''
168cm
'''홈페이지'''
http://www.danielbarenboim.com/
1. 개요
2. 생애
3. 수상 경력
4. 음악 성향
5. 사회 활동
6. 가족과 주변 관계


1. 개요


아르헨티나 태생의 이스라엘[1] 지휘자, 피아니스트.
파리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베를린 국립가극장,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지휘자다.
현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지휘자이다.

2. 생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러시아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이 모두 피아노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을 수 있었고, 1950년에 일곱 살의 나이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개최해 신동으로 불렸다. 2차대전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바렌보임은 1952년에 가족들과 함께 이주해 아르헨티나+이스라엘 복수국적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오스트리아이탈리아로마에서 피아노 리사이틀을 개최하며 유럽 무대에도 진출해 연주 활동을 계속 벌였다.
1952년에 이탈리아 시에나의 키지아나 음악원에서 처음으로 지휘 수업에 참가하면서 지휘에도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주빈 메타클라우디오 아바도 같이 훗날 마찬가지로 지휘자로 대성하는 이들과도 동기로 같이 배웠다. 1954년에는 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에서도 매 년 여름마다 열리는 음악제에 참가해 이고르 마르케비치가 주관하는 지휘 강좌 수업을 들었는데, 특히 이 때 당대 본좌로 꼽히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만나 그의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찬사를 받기도 했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바렌보임에게 자신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아직 나치홀로코스트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바렌보임의 아버지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푸르트벵글러는 음악제 종료 후 몇 달 뒤 사망했기 때문에 바렌보임이 그와 협연할 기회는 이후에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이 때의 경험이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인지 바렌보임은 지금도 자신의 멘토로 푸르트벵글러를 꼽고 있다.
1955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당시 명교사로 이름을 날리던 나디아 불랑제에게 화성법과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이어 런던뉴욕에서도 성공적인 공연을 이어가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등의 지휘자들과 협연하는 등, 10대 중반의 나이로 분주한 활동을 이어갔다. 1966년에는 지휘자로도 공식 데뷔해 투잡을 뛰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영국의 유명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와 이스라엘에서 유대교 의식에 따라 결혼한 뒤 곧바로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한 이스라엘군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가져 화제가 되었다.
1973년에는 에든버러 음악제에서 모차르트오페라 '돈 조반니' 를 지휘해 오페라 무대에도 데뷔했다. 1975년에는 게오르그 솔티의 뒤를 이어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해 처음으로 중요한 상임 직책을 맡게 되었다. 바렌보임은 이 악단과 협업으로 자신과 악단의 연주 곡목을 상당히 넓혔고, 또 피아니스트로서도 악단 단원들과 실내악 공연을 개최하는 등 강한 친화력을 보여주며 1989년까지 장기 재임했다. 재임 당시 프랑스에서 거의 연주되지 않던 브루크너 교향곡을 공연하기도 했는데,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연주하기 위해 무려 15회나 리허설을 갖기도 했다. 거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수준의 터무니 없이 많은 리허설 요구를 파리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수용하고 따른 것만 봐도 바렌보임과 이 악단의 신뢰 관계가 매우 굳건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정부의 간섭 등으로 지휘자들에게는 버텨내기 힘든 곳으로 알려진 파리 오케스트라에서 무탈하게 장기 재임한 점이 솔티에게 높이 평가 받아 나중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사생활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는데, 아내 자클린 뒤 프레가 1970년대 초반 무렵 부터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연주 활동에 큰 차질을 빚고 있었고, 결국 1973년 2월에 열린 뉴욕 공연을 끝으로 오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뒤 프레가 아직 세상을 뜨기 전이었던 1980년대 초반에 바렌보임은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슈키로바와 내연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뒤 프레가 아직 살아있는 상태에서 다비드와 미하엘 두 아들까지 봤다. 결국 뒤 프레가 1987년에 사망한 뒤 바렌보임은 이듬해 바슈키로바와 공식 재혼했는데, 이 일이 세간에는 불륜으로 비춰져 바렌보임이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1981년에는 바그너 오페라 공연으로 유명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처음 초빙되었다. 이후 1999년까지 계속 바이로이트 축제에 출연하면서 바그너 해석의 권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1988년부터 1992년까지 공연된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은 마지막해인 1992년에 실황 음반 및 영상물로 제작되어 큰 호평을 받았는데 이것은 바렌보임의 경력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간 유망주로 평가받던 바렌보임은 이 음반을 통해 정상급 바그너 지휘자로써 입지를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거장의 반열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2]
1980년대 중반에 베를린 필이 카라얀과 갈등을 겪으면서 카라얀이 아닌 다른 지휘자와 음반녹음을 시도한 바 있었다.[3] 그러나 여러 지휘자들이 카라얀의 눈치를 보느라 망설이고 있던 와중에 바렌보임이 선뜻 응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을 베를린 필과 녹음했다.[4] 이 음반은 연주 퀄리티도 좋았기 때문에 이후 베를린 필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1988년에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으로 유명한 옛 바스티유 감옥 부지에 신축 중이던 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악단이 창단식을 가지기도 전인 1989년 1월에 느닷없이 극장장 피에르 베르제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고 본격적인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불명예 퇴진을 당했다. 바렌보임의 대타로 들어온 지휘자가 바로 정명훈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한국 음악계에서도 상당히 자주 회자되었다. 물론 파리에서는 바렌보임 같은 네임드를 자르고 듣보잡 꼭두각시 지휘자를 앉혔다고 엄청 까였다. 이 사건 때문에 바렌보임은 프랑스 음악계와 사이가 틀어졌고, 오랫동안 파트너쉽을 유지했던 파리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 직책도 같은 해 사임했다.
1989년 카라인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를 사임한 후 차기 상임지휘자 후보로 로린 마젤과 더불어 최종 후보 2인이 되었지만 두 지휘자가 단원들에게 워낙 호불호가 강했기 때문에 각각을 지지하는 단원들이 의견을 좁히지 못하자 결국 절충안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선임되고 말았다. 바렌보임은 다소 섭섭하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베를린 필과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상임지휘자에서 낙마한지 불과 한달이 지나기도 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자 바렌보임은 상임지휘자가 부재 중인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동독인들을 위한 특별 콘서트를 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듬해에도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의 역사적인 첫 이스라엘 공연을 지휘했다. 이후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의 정기연주회는 물론이고 오이로파 연주회 등 비중있는 공연을 자주 이끌었다. 1992년 두번째 오이로파 연주회를 지휘하게 되면서 베를린 필에서 상임지휘자 다음 가는 입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줬으며, 같은해 베를린 필 창단 이후 최초의 명예 단원으로 위촉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한편 바렌보임과 함께 베를린 필 상임 지휘자를 놓고 경쟁했던 로린 마젤제임스 레바인의 경우 아바도가 선출되자 악단과 예정되어 있던 공연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는 트롤링을 벌이며 뒤끝을 보여주었고 이 두 지휘자의 경우 베를린 필 무대에 다시 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91년에 게오르그 솔티의 뒤를 이어 미국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여기서도 유럽 정통 레퍼토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존 코릴리아노의 교향곡 1번을 초연하는 등 현지 음악도 다루면서 10년 이상을 재임했다. 하지만 바렌보임은 임기 후반기에 악단 발전 기금을 모으러 다니는 행정 업무의 과중함을 호소하면서 2006년 6월에 사임했다.
1992년에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과 예하 관현악단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음악 감독에도 취임했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는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에리히 클라이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거장들이 거쳐가며 베를린 필과 경쟁하는 관계였으나, 2차 세계대전 후 동독에 속하면서 침체되어 있었다. 독일 통일 후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첫 음악 감독이 된 바렌보임은 오페라단이 과거 위상을 되찾는데 크게 공헌했다. 또한 바렌보임은 인근 베를린 필 공연에도 정기적으로 객원 출연했다. 2000년에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으로부터 종신 지휘자 직함을 받았다. 2006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사임한 이후에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9년 현재까지도 음악 감독직을 유지하고 있다.
바렌보임에게 베를린 필 상임 지휘자를 노릴 기회가 한 번 더 찾아오기는 했었다. 아바도가 2002년을 끝으로 상임 지휘자 직에서 물러난다고 1999년에 발표한 것. 이바도 선임 과정 때처럼 이번에도 두 파로 갈렸다. 소위 "4B"[5], 독일 고전/낭만주의 레퍼토리 중심으로 돌아가는 보수적인 성향의 연령대가 비교적 높은 단원들은 바렌보임을 지지한 반면에, 카라얀 시대와 접점이 덜했던 젊은 단원들은 과거의 영광보다는 악단을 좀 더 진보적으로 이끌 수 있는 사이먼 래틀을 지지하고 나선 것. 아바도 선임과정 도중에는 본인이 지지하지 않는 지휘자가 선임되면 베를린 필을 떠나겠다는 최후통첩까지 나올 정도로 파토나기 직전이었지만 이번엔 그런 일은 없었던 듯 하다. 최종적으로 2/3 이상의 지지를 받은 사이먼 래틀이 선임되면서 바렌보임은 한 번 더 고배를 마시게 된다. 기사 1기사 2
바렌보임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공존을 주장해서 이스라엘측의 팔레스타인 탄압과 인종차별이 평화와 공존을 해치는 원흉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팔레스타인인, 이스라엘 평화운동가들과 함께 평화 시위, 정착촌 건설 반대 시위에 많이 나가서 팔레스타인에서도 높게 평가받아 팔레스타인 시민권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정부와 극우측에선 배신자로 미움받는다. 1999년에는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긴장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취지로 팔레스타인 출신의 영문학자 겸 사회운동가인 에드워드 사이드와 공동으로 양 측의 청소년 연주자들을 모아 서동시집 관현악단을 결성해 청소년 음악 교육과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다.
2006년에는 극장 행정 당국과 크게 다투고 돌연 사임한 리카르도 무티를 대신해 이탈리아 밀라노라 스칼라 가극장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공백을 메꾸었고, 2011년에 공식적으로 음악 감독에 부임한 뒤 2015년에 리카르도 샤이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재임했다.
2000년대에는 빈에서의 활동도 늘려가고 있고, 2009년과 2014년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신년음악회 지휘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올림픽기 기수로서 입장했다.
2013년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시즌 개막작으로 리하르트 바그너로엔그린을 올렸다가 이탈리아 사람들한테 신나게 까였다. 2013년은 오페라의 두 거장 독일의 바그너와 이탈리아의 베르디 탄생 200주년인 매우 중요한 해인데, 하필 그 해에 베르디의 라이벌 바그너를 시즌 개막작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독일의 재정 긴축 요구로 경제난을 겪고 있었던 때인지라 반감은 더욱 커졌다.
2017년 현재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고, 이외에도 서동시집 관현악단의 상주지인 스페인세비야를 비롯해 거의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원로급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로 대접받고 있다.
2018년에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그만둔지 12년만에 시카고 심포니를 객원 지휘했다. 바렌보임의 귀환을 두고 시카고 지역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환영했다. 바렌보임 또한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지휘자 초년병 시절인 1970년 처음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했던 때부터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했던 행복했던 기억들을 회상하며 다소 감격에 찬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시카고에 왔냐는 질문에 일단 그만뒀으니 미련을 갖기 싫어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전 상임지휘자 무티가 시카고에서 객원지휘를 권하자 생각할 필요없이 승락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바렌보임은 시카고에 오는 김에 자신이 이끄는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를 함께 대동하고 시카고 심포니의 정기연주회에 이어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시카고에서 열기도 했다.
2019년에는 오랜 관계를 이어오고 있던 베를린 슈타츠오퍼/슈타츠카펠레와의 불화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바렌보임의 구시대적이고 독재적이며 때로는 괴팍한 통솔방식에 일부 단원들이 모욕감을 느끼고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도가 나가자 바렌보임은 불쾌감을 표했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예산을 담당하고 있는 클라우스 레더러 베를린시 부시장은 이와 관련해 진장 조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약 석달 후인 2019년 6월 4일 레더리 베를린시 부시장과 바렌보임은 기자회견을 갖고 바렌보임과 베를린 슈타츠오퍼가 2027년까지 5년간 계약을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레더리 부시장은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단원들을 면담한 결과 단원들의 절대 다수가 바렌보임을 지지하며 바렌보임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바렌보임과 슈타츠오퍼의 근무 분위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바렌보임은 슈타츠오퍼를 계속 지휘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쁘며,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슈타츠카펠레를 계속 지휘하고 싶다고 말했다.
히브리어를 포함해서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의 6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6]

3. 수상 경력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장 (1984)
  • 그래미상 클래식 실내악 연주 부문 (1991, 1995)
  • 그래미상 클래식 관현악 연주 부문 (1992)
  • 독일 공로훈장 대십자장 (2002)
  •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왕자상 (2002, 에드워드 사이드와 공동 수상)
  • 그래미상 클래식 독주와 관현악 협연 부문 (1977, 1983, 2002)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상 (2003,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과 공동 수상)
  • 그래미상 클래식 오페라 부문 (2003)
  • 기독교와 유대인 협력을 위한 독일 조정위원회 부버-로젠츠바이크 메달 (2004)
  • 독일 하나우 파울 힌데미트상 (2004)
  • 독일 츠비카우 로베르트 슈만상 (2005)
  •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2006)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3급) (2007)
  • 독일 괴테 인스티투트 괴테 메달 (2007)[7]
  • 일본 타카마츠노미야 전하기념 세계문화상 (2003)
  • 이스라엘 볼프 재단 볼프상 (2008)
  • 영국 로열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 (2008)
  • 덴마크 레오니 소닝 음악상 (2009)
  • 아르헨티나 코넥스 재단 코넥스상 음악 부문 (2009)
  • 이스탄불 국제음악제 평생공로상 (2009)
  • 국제연합 독일 위원회 오토 한 평화메달 (2010)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음악상 (2010)
  • 베스트팔렌 평화상 (2010)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2급) (2011)
  • 대영제국 훈장 명예 KBE(2등급) (2011)
  • 오스트리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2011)
  • 드레스덴 평화상 (2011)
  • 네덜란드 에디슨 음악상 평생공로 부문 (2011)
  • 미국 브루크너 협회 줄리오 킬레니 공로메달 (2017)

4. 음악 성향


정격연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동시대 연주자들이나 지휘자들과 달리, 음악 쪽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축에 속한다. 시대 고증 보다는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는 보편적 전통을 더 중시하는 스타일이고, 이는 피아니스트와 지휘 양 쪽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인지 고전 이전의 바로크 음악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나 골드베르크 변주곡 외에는 다소 다루는 빈도가 덜한 편이고, 주로 고전과 낭만, 현대 레퍼토리의 연주와 지휘에 주력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성과인데, 특히 후자는 도이체 그라모폰과 EMI에서 각기 한 종씩 제작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나중에 EMI에서 영상물로 전곡을 한번 더 녹음하였고, 이것이 또 데카에서 CD로 발매되어 총 3종이다. 이외에도 멘델스존의 무언가 전집, 쇼팽의 야상곡 전집, 브람스의 변주곡 등의 녹음이 유명하다. 협주곡으로는 자신이 독주와 지휘를 직접 맡아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EMI에서 녹음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집을 시작으로 존 바비롤리 지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전집, 오토 클렘페러 지휘로 같은 악단과 녹음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이 1960년대의 대표 녹음으로 손꼽힌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은 여러 차례 녹음했다. 오토클렘페러와의 협연에서는 연주자, 루빈슈타인과 협연에서는 지휘자로 전곡을 녹음했고, 본인이 연주와 지휘를 모두 맡아 베를린 필, 베를린 슈타츠카페펠레와 녹음했다. 그리고 5번은 여러번 지휘자 또는 연주자로 녹음된 실황음원이 발매 중이다.....
지휘 쪽도 레퍼토리가 비슷한 편인데, 특히 90년대 이후 주 레퍼토리가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독일계 대가들의 작품 위주로 자리잡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8] 명목상 독일 후기 낭만주의로 분류되지만 이질적인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들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1990년대 이후에 뒤늦게 말러를 가끔 지휘는 하고 있지만, 나도 말러를 지휘할 줄은 안다는 걸 보여 주기식 이상의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9][11]
특히 바그너와 브루크너 등 독일 후기낭만주의 거장들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요즘 시절에 보기 드문 거장 스타일의 해석을 보이고 있으며, 현재 활동 중인 지휘자들 가운데서는 독일 후기낭만주의 최고의 권위자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오케스트라나 오페라 극장의 상황에 따라 해석의 기복이 있긴 하지만 좋은 조건 하에서는 최상급의 해석을 들려주기도 한다. 관현악에서는 베를린 필, 오페라에서는 바이로이트에서 남긴 연주 녹음들이 뛰어나며 이들 중 일부는 명연주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역시 정통 독일 레퍼토리인 베토벤 교향곡 전곡도 주요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다. 90년대 말에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녹음했는데, 시대연주 붐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기 때문에 옛 거장 스타일로 연주된 바렌보임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큰 호평을 받았다. 2011년과 2012년에 서동시집 관현악단을 이끌고 세계 순회 공연을 했을 때도 기본 연주곡이 베토벤 교향곡 전곡이었고 이 실황은 각각 CDDVD로 묶여 발매되었다. 내한 공연 때도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완주하였고, 판문점에서도 연주회가 있었다.
물론 그 쪽에만 고착화되지는 않고 있고 아르헨티나 태생이라 그런지 2006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야외 탱고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대중적 감각도 갖고 있음을 어필한 바 있다. 또 피에르 불레즈엘리엇 카터 등 현대음악계의 노장 작곡가들이 남긴 작품들도 공연한 적이 있고, 2010년대 들어서는 서동시집 관현악단 활동의 일환으로 아랍계와 유대계 신진 작곡가들이 갓 선보인 관현악 작품들도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피아노 협주곡 전곡도 자신이 독주와 지휘를 겸해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아예 자신이 연주하고 지휘한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Beethoven for all' 이라는 부제의 염가 세트로 데카#s-2에서 출반하고 있을 정도다.

5. 사회 활동


레너드 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유대인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번스타인과 달리 이스라엘 국적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바렌보임은 세계시민으로서 이스라엘의 군사/정치적 행태에 철저히 반대하는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

2004년 ‘이스라엘의 노벨상’으로 울프상 시상식에서 용기있게 자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을 비난했다.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남의 땅을 점령하고 그 국민을 지배하는 것이 독립선언문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입니까? 독립이라는 미명 하에 다른 나라의 기본권을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요? 우리 유대 민족이 고난과 박해의 역사를 보냈다고 이웃 국가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모르는 척하는 것에 면죄부가 주어질까요?”'''

― 다니엘 바렌보임, 2004 울프상 시상식에서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청소년들을 최소한 음악에서라도 화합하게 해보자는 취지로 결성한 서동시집 관현악단에서 이런 경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데, 아예 이 악단의 활동상을 다룬 다큐멘터리까지 제작될 정도로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동시집 관현악단과 이룬 강 큰 성과는 2005년에 있었던 라말라 공연이었는데, 이 공연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추진했다가 숱한 군사 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스페인 정부의 유대인 단원들에 대한 신원 보증과 외교관 전용 여권 발급, 팔레스타인 현지의 해외 외교 당국들+국제연합 소속 상주 기구들과 협력해 가까스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공연은 이후 CD로, 또 상술한 서동시집 관현악단 다큐멘터리와 함께 DVD로 묶여 출시되었다.
2011년 5월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가장 심한 지역인 가자 지구의 고고학 박물관에서 '가자를 위한 관현악단' 이라는 공연을 개최했는데, 바렌보임과 뜻을 같이 하는 베를린 필과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 빈 필, 파리 오케스트라, 라 스칼라 오페라 관현악단의 단원들이 모여 결성한 일종의 올스타 악단이 출연했다. 이렇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 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8년에는 팔레스타인 명예 시민권을 받았는데, 이렇게 해서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이스라엘-팔레스타인-스페인의 4중 복수국적을 가진 전무후무한 음악인이 되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을 정치가가 아닌 음악가라고 하면서도 중요한 시사 문제에 대해서는 직설적인 발언을 날리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스라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극우 유대인들의 정착촌 증축을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든가 볼프상 수상 기념사로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를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군사 행동이 그릇된 것임을 주장하는 등의 행동으로 정통파 극우 유대인들과 하레디에게 되레 매국노 취급까지 당하고 있다. 하지만 정통파 극우 유대인들과 하레디들도 하마스 같은 팔레스타인 강경 단체 만큼이나 말이 안통하는 자들이라서, 오히려 바렌보임의 평화 운동을 홍보해주는 역효과만 내고 있다.
반유대주의에 이용되어[12] 이스라엘에서 금기시되어 오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을 이스라엘에서 공연하기 위해 노력했고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1980년대 이후 아이작 스턴 등을 비롯한 여타 유대인 연주자들이 이스라엘의 바그너 음악 터부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음악인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1981년 이스라엘 필의 상임지휘자 주빈 메타가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려 했지만 일부 청중의 항의로 연주를 포기한 바 있었다.
바렌보임은 2001년 7월 마침내 이스라엘에서 최초로 바그너를 연주했다. 바렌보임은 자신이 음악 감독으로 있던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이스라엘 투어 때 원래는 발퀴레를 정식 프로그램으로 공연하려 하였으나 반발로 결국 무산되었다. 그러나 바렌보임은 앵콜 때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연주하겠다고 청중들에게 말하며 듣기 원하지 않는 사람은 나가달라고 말했다. 이에 일부 청중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며 소동이 일어났다. 바렌보임과 청중들간에 논쟁이 오갔다. 30분만에 바렌보임은 마침내 바그너의 지휘를 시작했고 이에 수십명의 청중들이 자리를 박차고 공연장을 나왔으나 다수의 청중들은 자리에 앉아 바그너를 들었다. 이 사건은 직후 세계 각국의 토픽으로 보도되었고 이스라엘에서는 후폭풍이 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바렌보임의 이스라엘 공연을 금지했고, 이스라엘 교육부는 바렌보임의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바렌보임은 "내가 바그너를 엉터리로 지휘했다는 평이 있다면 사과하겠다."고 응수했다.

6. 가족과 주변 관계


뒤 프레와 함께 한 결혼 기간 동안 여러 협연작들을 녹음과 영상으로 남겼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아내와 협연한 흑백 영상물이 유명하고, 크리스토프 누펜이 감독한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 영상에서는 뒤 프레와 바렌보임의 절친들이었던 이츠하크 펄먼, 핀커스 주커먼, 주빈 메타가 즐거운 모습으로 협연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바렌보임은 두 아들을 자녀로 두고 있다. 뒤 프레가 너무 이른 나이에 불치병에 걸린 탓에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고, 두 아들은 뒤 프레가 아직 살아있던 1983년과 1985년에 바슈키로바와의 외도 기간에 태어났다. 장남 다비드는 KD-Supier라는 예명의 힙합 가수로 대중음악계에 들어선 이래 프로듀서와 작곡가로 일하고 있다. 차남 미하엘은 아버지처럼 피아노를 배우다가 바이올린으로 전향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고, 2003년부터 아버지가 창단한 서동시집 관현악단의 악장(콘서트마스터)으로 재직하고 있다.

[1] 물론 바렌보임이 몇 개의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건국 후 10세부터 이스라엘에서 자랐으며, 본인도 이스라엘을 고국으로 생각하고 있다. 해외 언론에서도 보통 Argentinian-born Israeli pianist and conductor라고 소개한다.[2] 그동안 80년대까지 대부분의 녹음을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파리 오케스트라와 남기면서, 포텐셜은 있지만 그것을 증명할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바이로이트라는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만나면서 드디어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펼쳐보이고 인정받은 계기가 된 것. 이후 90년대에는 베를린 필 등과 여러 음반을 남기며 브루크너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3] 다만 베를린 필이 카라얀 재임기에 다른 지휘자와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카를 뵘, 라파엘 쿠벨릭, 존 바비롤리, 오이겐 요훔 등의 지휘자가 1970년대 초반까지 카라얀의 배려로 베를린 필과 녹음, 공연등을 하였고, 1970년대 후반에도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등도 베를린 필을 지휘 하였다. 단, 위에 언급된 인물들은 카라얀과 우호적 관계에 있던 지휘자이다.[4] 하지만 이 음반은 녹음된 이후에도 카라얀과 척을 질것을 우려해 음반사들이 이 음원의 판권을 사려고 하지 않아 녹음하고도 한동안 발매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5] Beethoven, Brahms, Bruckner, big money[6]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7] 국내의 김민기와 시상을 함께 했다.[8] 잘하는 레퍼토리가 이쪽으로 쏠린 것은 맞지만 디스코그래피를 보면 알 수 있듯 만년에 위 레퍼토리들만 녹음한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본 윌리엄스, 생상, 딜리어스의 관현악곡 녹음도 했는데, 바쁜 아티스트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녹음의 수가 많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휘자들과 비교해 봐도 독일 낭만주의 쪽에 이렇게 치중하는 지휘자는 요즘 보기 드물다.[9] 9번이 그나마 그가 좀 관심을 가지고 주기적으로 연주하는 편.[10] 유니버설 에디션은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11] 그가 말러 중에서 처음으로 레코딩을 남긴 말러 5번의 경우 시대에 뒤떨어진 페터스판으로 지휘를 했는데, 본인이 이 판본에 매력을 느껴서 였는지 혹은 단지 도서관에서 쉽게 빌릴 수 있고, 공짜[10]라는 이유로 이 판본을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표준에서 벗어난 이러한 선택은 그가 처음으로 말러 녹음을 남겼지만 오히려 말러에 무심한 지휘자라는 인식을 부각시켜준 측면이 있다.[12] 나치에게 이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바그너 자신도 반유대주의자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