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전투(1574년)

 

1. 개요
2. 발단
3. 전개
4. 그후


1. 개요


마닐라 전투는 1574년 11월 29일, 마닐라에서 벌어진 중국 출신의 중국-일본 해적단의 우두머리 리마홍스페인콩키스타도르 후안 데 살세도 사이의 싸움이다.

2. 발단


리마홍은 중국 남부 해안의 항구들을 약탈하던 해적단의 우두머리 중 하나로 또한 군벌이기도 했다.(리마홍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문서를 참고.) 리마홍은 특히 남부를 약탈하다가 명나라 정부의 토벌로 인해 남부에서의 활동이 제한되자, 필리핀의 루손 섬 북부로 정착하게 된다. 그렇게 루손 섬 북부에서 남부 해안의 중국을 약탈을 일삼던 리마홍은 어느해, 한 중국 무역선을 붙잡게 되었는데, 그 배는 남부에 위치하던 스페인에 후송하려던 물품으로 금은보화를 싣고 있었다. 이를 본 리마홍은 굳이 먼 바다를 건너 중국 남부를 터느니 차라리 가까운 루손 섬 남부의 땅을 통해 금은보화를 약탈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스페인의 마닐라로 눈길을 돌리게 된다.

3. 전개


리마홍은 62척 이상에 달하는 선박과 3천의 해적과 4백의 왜구 용병들을 거느린 함대를 이끌고 마닐라로 출발한다.
마닐라로 향하던 도중 리마홍의 해적들은 비건에 정박한 스페인갤리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 후안 데 살세도가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보낸 배로 100명의 스페인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중국의 함대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던 스페인 선원들은 재빨리 제압되었고, 배에 타고 있던 스페인 선원 중 22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선원들의 소식을 들은 살세도는 이에 놀라 리마홍의 행동에 경고문을 날린 다음, 마닐라로 방어군을 보내는데, 되려 리마홍은 이에 살세도가 겁을 먹은 것이라며 경고를 무시한 채로 마닐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마닐라 남쪽 항구에 위치한 세인트 앤드류(Saint Andrew)에 도착한 리마홍은 다음날 바로 700명의 부하들을 시켜 마닐라에 상륙시킨다. 이때 리마홍의 해적들의 장비로는 대나무 투구를 쓴 면사포를 입고, 아쿼버스 총[1], 파이크, 전투도끼, 커틀러, 단검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마닐라를 재빠르게 점령하던 리마홍은 하지만 외곽과 내부에서 샤콘 대위와 벨라스케즈 대위의 지휘 하의 저항군에 부딪혀 크게 밀리게 되는데, 이에 해적들은 해안에 정박된 배에 남아있던 스페인군 80명을 사살하고 리마홍의 배로 후퇴한다.해적들이 마닐라에서 철수 한 틈을 타 스페인은 마닐라에 방어용 팔레사드를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는데, 이때 살세도가 추가적인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착했다.
이틀 뒤, 아침이 되자 리마홍은 전 함대를 이끌며 해안을 향해 세 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마닐라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오직 80여 명의 해적이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들은 즉시 사살되었고 사기가 꺾기기 시작하면서 해적들은 마닐라에서 후퇴하게 된다.
마닐라에서 패배한 리마홍은 임시방편으로 루손 섬 중부 해안에 위치한 팡가시난[2]으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요새를 건설하여 한동안 머무르기로 판단한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살세도는 이를 가만히 둘 세라, 즉시 마닐라에 방비를 강화했으며 리마홍을 토벌하기 위해 원정대를 보낼 계획을 세운다.
살세도는 병사 256명과 원주민 동맹군 2천5명을 거느리고 1572년 3월 23일 샤콘, 채브스, 리베라, 라미레즈, 차콘 대위가 지휘하는 59척의 함정으로 출항했다. 그리고 이어 하루 뒤 살세도는 팡가시난에 도달했는데, 리마홍의 바다 도주로와 연결되는 아그노 강을 봉쇄하고 차브스, 차콘 대위에게 각각 8명의 병사들을 하사하여 9척의 작은 배를 통해 강 상류의 해적 배를 모두 가져오게 했다. 이에 리마홍의 해적단은 도망칠 곳 없이 스페인군의 공세를 직접 맞닥뜨릴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살세도는 대장 리베르와 28명의 군사를 보내어 육지 쪽에서 리마홍의 요새를 습격했는데, 하지만 때가 밤이라서 시야가 보이질 않아 스페인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국 해적들은 다시 뭉칠 수 있었고, 4개월 간의 긴 포위 공방이 이어졌다. 리마홍은 포위당한 틈을 타 부하들과 함께 요새 안에서 30척의 배를 만들었고, 8월 4일, 리마홍의 일당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4. 그후


팡가시난을 탈출한 리마홍은 대만으로 돌아와 다시 해적질을 시작하였으나 결국 호수인(湖守仁)이 이끄는 명군에게 궤멸당한다.[3]
한편, 마닐라 전투의 영웅 살세도는 마닐라 전투의 이듬해인 1576년, 말라리아때문에 사망하게된다. 때문에 당시 살세도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마닐라를 방문한 명나라 사신은 하릴없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1] 구형 전장식 화기[2] 15세기에 명나라의 영락제정화가 방문하고 난 후, 특히 이 지역에는 중국인들이 이주해 있었다.[3] 호수인은 리마홍이 명나라에서 해적질을 할때부터 그를 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