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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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제3대 황제. 묘호는 처음에는 태종(太宗), 나중에는 성조(成祖), 시호는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휘는 주체(朱棣). 태조 주원장의 4남. '''중화 역사에서 손꼽히는 정복 군주'''이자 명 왕조의 전성기를 연 황제이지만 신료들에 대한 지나치게 “불필요”하고 “잔혹한” 숙청 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는 인물이다. 환관들을 이용한 측근 정치를 과도하게 하였다는 비판도 있다.
2. 연왕 주체
1370년 11세 때 연왕(燕王, Prince 또는 King of Yan)[4] 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으나 바로 이때 북쪽으로 간 것은 아니었고, 진짜로 북경 지역으로 간 것은 1380년, 21세 때였다. 이후로 그 지역의 정치와 군사를 총괄했다. 당시로써는 명나라의 최북방 지역으로[5] 주원장의 북진으로 인해 북방으로 물러간 몽골족의 침입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를 막아냈다.[6] 그런 만큼 무골로 성장했고 성품도 대단히 호방하고 목표 의식이 뚜렷했다. 이런 능력 때문에 주원장은 그를 내심 후계자로 염두에 두기도 했으나 장자 우선 원칙에 따라 장남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고, 주표가 일찍 죽자 그 아들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삼았다. 참고로 연(燕)은 춘추시대부터 오늘날의 허베이, 산시, 랴오닝 성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을 부르는 이름이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에서 비롯되어 남북조시대 미천왕 시절부터 광개토대왕까지 고구려와 다투었던 전연, 후연의 국호이기도 했다. 삼국지에서 장비가 "연인(燕人) 장비가 왔다!" 하고 언급하는 부분이 이 지역을 의미한다.
3. 정난의 변
1398년, 홍무제가 죽고, 건문제가 즉위했는데, 건문제와 그 측근들은 숙부 주체를 비롯한 다른 숙부들이 막강한 군권을 지니고 있는 것을 황제권을 유린할 수 있는 것으로 우려하여 다섯 번왕을 없애는 등 각지의 번왕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치자 주체는 조카와 그 측근들이 자신을 노리는 것을 알아채고 북경에서 거병, 건문제와 내전을 벌였다. 비록 주체의 전력은 건문제에 비해 훨씬 열세였으나 주체 본인의 기량과 건문제의 우유부단함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승기를 잡은 정난군은 파죽지세로 수도 남경까지 몰아쳤고 건문제는 궁에 불을 지른 후 행방불명. 결국 남경은 함락되었고 주체는 황제에 등극했다(정난의 변).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 영락제의 개성적인 점은 '''일신의 무용과 관련한 기록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기록들이 야사나 설화가 아니라 명나라 정사에 기록이 되어 있다. 정난의 변 때 스스로 난전에서 말을 갈아타고 화살이 떨어지면 직접 칼을 휘두르며 처절하게 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름 아닌 연왕의 신분이었는데도 직접 진두에 서서 시석이 쏟아지는 중에도 앞장서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가히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무인 황제 중 한 명. 특히 정난의 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때 영락제의 무인적 기질과 군사적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4. 내정에서의 업적
황제로서의 업적은 '''명나라를 세계 제국으로 성장시킨 정복군주'''로 평가받는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수도를 남경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옮겼다. 본래 남경은 건문제의 세력 기반이었는데 북방에서 들어온 영락제로서는 찜찜했고, 아직 북방에서 몽골족의 침입이 계속되던 상황이다 보니 중간쯤에 위치한 곳으로 수도를 옮긴 것. 그리고 원나라가 버리고 간 도성 위에 아예 새로운 궁성을 축조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자금성이다. 이후 북경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고 있다.
또한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아 <영락대전>을 대표로 하는 많은 학술 서적을 편찬했으며, 이를 통해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왕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에 어사를 파견해 지방까지도 효과적으로 황제의 권한이 미치도록 했다. 경제 발전에도 힘을 쏟아 효과적인 농사를 위해 수리 시설도 보완했으며 대운하를 개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5. 대외적 업적
이런 내정적인 면도 뛰어났지만, 외정적인 업적은 정말 화려하다. 연왕 시절부터 전장을 누빈 무인이었던 만큼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쳐 1410년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이후 재위 기간 동안 무려 5차례나 몽골을 친정하였다. 역대 중국 황제 중 고비 사막을 넘어 친정한 황제는 북위의 태무제, 명의 영락제, 청나라의 강희제 세 명뿐인데 그나마도 태무제는 북방 선비족[7] 출신이었고 강희제는 만주족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영락제는 막북 친정을 감행한 유일한 한족(漢族) 황제라고 할 수 있다.[8] 영락제가 이렇게 몽골 공략에 힘을 쏟았던 이유는, 영락제의 롤모델이 역대 중국의 황제들이 아니라 원 세조 쿠빌라이 칸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영락제의 목표는 몽골 제국의 위엄과 영토를 재건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몽고 초원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야 했으므로 5번에 걸친 몽골 친정을 벌인 것이었다.
이외에도 영락제는 베트남을 영토화시키기 위해 베트남에도 원정군을 파견하기도 했으며 명나라 해안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구를 엄중히 단속하기 위해 조선의 태종[9] 과 협력하여 대마도 정벌[10] 을 추진하였다. 또한 왜구 관리를 위해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와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건문제 시절 일본 국왕에 봉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감합 무역을 실시했으며, 요시미츠가 죽자 그에게 '공헌'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외정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정화의 원정'''이다.[11] 1405년에 첫 함대가 파견된 이후 1433년 선덕제 치세까지 무려 6회나 대함대를 파견하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심지어 동아프리카의 케냐 해안까지 명의 함대가 진출, 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치고 많은 나라의 조공을 받았다.[12] 정화의 원정 역시 몽고 제국의 위엄과 영토를 재건하려던 영락제의 시도 중 하나로 볼 수 있으나, 구체적인 목표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이 원정으로 실제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이후의 해금 정책으로 인해 교역로도 닫혀버리고 만다.
내정과 외정 양면으로 명나라를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그의 치세는 영락성세(永樂盛世)라 불리며 후임 군주들인 홍희제와 선덕제의 인선지치(仁宣之治)와 더불어 나라의 전성기로 불린다. 이런 일세의 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1424년 5번째 몽골 원정에 직접 나섰다가 병을 얻었고 결국 진중에서 죽음을 맞았다. 향년 65세. 영락제가 죽자 국정의 혼란을 우려한 신하들은 마치 황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식사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홍희제가 워낙 순한 나머지 영락제의 죽음이 홍희제의 동생들에게 알려지면[13] 국정에 혼란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영락제 본인의 원정은 아니지만, 서쪽에서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가 그가 다스리던 명나라 침공을 시도한 적이 있다.[14] 다만 명으로 오던 도중에 죽어 무산된다.
6. 비판
대체적으로는 훌륭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만, 비판점도 많이 존재한다.
숙청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지나치게 잔혹했다.[15] 게다가 그 대부분이 아버지 주원장과 달리 안 해도 되는 불필요한 숙청을 한 것이라 더욱 문제다.[16] 특히 방효유 일족에 대한 처형은 ('''이게 사실이었다는 전제하에서''')[17] 악명이 높은데 물론 방효유 본인이 대놓고 연적 찬위[18] 등의 글을 쓰는 등 대놓고 도전한 이상 죽이는 것까지야 전제 군주제인 명나라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일가족, 친척, 친구, 마지막에는 거주하던 마을 전체 주민들을 끌어와 방효유 앞에서 차례대로 죽인 것은 명백한 잔혹행위에다 학살이라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물론 중국에서는 황제에게 거역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연좌하는 일이 흔했지만 진짜 반역이 아니면 당사자만 처벌하는 게 보통이고 가족은 기껏해야 추방만 했으며, 반역을 했다고 쳐도 영락제 수준으로 마구잡이로 잡아죽이는 경우만큼은 거의 없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잔혹했을 지가 답이 나온다. 물론 이런 짓을 통해 저항 세력을 억누르고 통치를 안정적으로 하긴 했지만 그건 영락제가 능력이 있으니까 가능했던 거고 그 밑으로 즉위하는 황제들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19] 어쨌건 목숨을 걸고 바른말하면 진짜로 목숨을 거두어가는 바람에 명나라에는 충언하는 사람이 잘 나오지 않게 되었고, '''그 대가는 명나라와 주씨 황족들이 치를 뿐이었다.'''
또한 영락제의 지나친 대외 활동으로 인하여 국가의 재정이 악화되었고 이는 후대 황제들의 부담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주요한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한평생 몽골 원정에 매진했고 정화의 대항해 또한 그의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대외 활동은 일견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엔 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즉, 영락제 시대의 발전된 것처럼 보인 모습은 빛좋은 개살구였다는 것. 이러한 모순의 심화가 정강의 변과 함께 '''한족 왕조의 2대 치욕'''으로 평가받는 토목의 변이 일어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20]
또한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위하여 환관들에게 지나치게 큰 권한을 주어 후대의 환관들의 전횡의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 또한 강하다. 이는 '정난의 변'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영락제에 대한 사대부들의 비판과 저항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때 명의 많은 사대부들이 영락제에 협력하기를 거부했고, 방효유와 같이 끝까지 영락제를 비판하다가 십족이 처형된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 영락제는 이러한 사대부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하여 사대부(=못 믿을 놈)들이 장악한 조정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는 대신 자신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환관들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명 왕조는 환관들의 전횡이 가장 심했던 왕조 중 하나였는데, 명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유근, 왕진, 위충현 등은 모두 환관 출신이다. 환관의 권한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고 그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자국에서만 욕심을 채우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으로 가서 은 내놓으라며 깽판을 쳤고, 조선에서는 명나라 환관이라면 이를 갈았다.
태조 주원장은 환관들이 권력을 가지거나 요직을 맡지 못하게 환관들이 글을 알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미 글을 아는 환관들도 가차없이 내치거나 죽였다. 이는 잔혹하지만 그래도 환관들을 글자 그대로의 손발로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건문제 때까지의 환관들의 업무는 황제를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를 따라다니면서 이런저런 잡다한 일이나 해주는 심부름꾼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영락제는 건문제 축출과 정적들의 감시와 제거, 사대부와 군부, 관리 등의 신하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환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 소련의 KGB 비슷한 성격의 동창이라는 비밀경찰 제도를 활용하였다.[21] 이는 환관들이 명 왕조 멸망 때까지 권력을 전횡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주었고, 결국에는 황제마저도 환관들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해졌다.[22]
또한 명 제국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진 것도 비판이 있다. 이유야 당연히 영락제 본인의 본거지로 세력을 옮기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자주 했던 영락제의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도 북경이 남경보다 훨씬 나은 곳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최전방에 수도를 두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고, 중국이 강력할때는 몰라도 쇠약해지고 북방의 몽골과 여진족 등이 세력을 떨치면서 수도가 무방비로 노출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한마디로 훗날 명나라의 멸망을 부른 무능한 황제들의 막장 행태로 대표되는 국가 막장 테크의 발단이 이미 영락제 시절부터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명나라판 세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세조에 비유하는 건 과도한 처사일 수도 있는데 일단 영락제의 외정 업적은 중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크다. 거기다가 '''세조는 형제들 중에서 친형인 문종은 물론 동생인 안평대군에게조차 능력 면에서 확실하게 밀렸던 것과 달리 영락제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23] 또한 영락제는 환관에게 힘을 실어주었을망정 세조처럼 자신의 정치력만 믿고 유력한 공신들을 방조하지는 않았다.[24] 물론 집권 과정의 부당함과 무자비함은 세조랑 닮아서 욕을 먹는다.
7. 조선과의 관계
그의 치세는 조선의 태종[25] (1400년 ~ 1418년) 시대와 거의 겹치며 세종(1418년 ~ 1450년)의 재위 초반과 겹친다. 영락제는 개인적으로는 조선 여인을 좋아했는지 총 8명의 공녀가 그의 후궁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실 영락제는 홍무제의 정처인 마씨의 소생이 아니라 고려-조선의 여인 소생이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영락제가 태어날 1360년은 아버지 주원장은 황제도 아닌 강남의 유력 군벌 중 하나였을 뿐이고 또한 영락제에게 제위를 찬탈당한 건문제를 추종한 세력들이 지어낸 루머일 수도 있다. 그 외에 실록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음식과 술도 입맛에 맞았던지 그 재능이 있는 궁인도 보내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명나라로 건너간 공녀들은 각각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현인비 권씨[26] , 여미인[27] , 강혜장숙여비 한씨[28] , 임 순비, 이 소의, 최 미인, 정비, 송비, 황비. 그중 한 명인 권씨가 현인비로 봉해졌고, 한확의 누나인 한씨는 여비로 봉해서 총애를 받았다. 이 중 현인비 권씨는 상당히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당시 영락제의 황후 서씨가 죽고 없어서 후궁의 관할을 조선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권씨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권씨는 얼마 안 되어 병사했는데, 독살로 밝혀지자 한바탕 난리가 난 끝에 같이 조선에서 온 여 강비(여 미인, 이후 여 첩여로 추존)가 범인으로 몰려 고문 끝에 사망했다. 헌데 나중에 실은 한족 출신인 여 장비가 독살범이고 그 죄를 여미인에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밝혀졌으며 여기에서 그치지 잃고 여장비가 다른 궁녀인 어씨랑 공모한 것도 모자라서 함께 환관과 간통까지 했다는 사실도 드러나서 분노한 영락제가 폭발, 관련자 2800여 명이 죽었다. 여기에 얽힌 조선인 후궁 황씨와 이씨는 참형, 임씨와 정씨는 고문을 못 견뎌 결국 자살. 관련자를 처형하던 도중 어떤 이가 이왕 죽는 거 이판사판 격으로 영락제에게 일갈했는데, 그 내용이 '''"네 양기가 쇠해서 환관과 간통을 한 것인데 누굴 혼내"'''냐는 엄청난 독설이었다. 이야기의 출처는 엉뚱하게도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 실록 26권, 세종 6년 10월 17일 무오 2번째 기사로, 같이 갔던 공녀가 용케도 살아남아 영락제 사후 조선으로 귀환해 증언한 것. 이 일화는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기도 했다.
한편 여비 한씨의 경우, 같이 갔던 황하신의 딸 황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국을 우습게 본 거냐고 노발대발하는 영락제를 한씨가 여염의 일을 국왕이 어떻게 알았겠냐고 말렸다.[29] 그 말에 감동한 영락제가 황씨에 대한 처벌을 그녀에게 맡기자 한씨는 황씨의 뺨을 때리는 처벌을 내렸다고 한다. 이 한씨는 영락제 사후 궁인 30명과 함께 순장당하고 말았다. 죽기 전 한씨는 유언으로 공녀로서 같이 왔던 자신의 유모인 김흑(金黑)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명 인종(홍희제)에게 부탁했다. 홍희제는 이를 들어주려 했으나 궁녀들이 위에 언급한 독살 사건 이야기를 조선에 알릴 수 있다며 반대해서 결국 들어주지 않았다. 김흑은 이후 홍희제에게 공인(恭人)이란 작호를 받고 태황태후를 모시는 일을 하다가 세종 17년에 홍희제의 황후 장씨가 김흑을 비롯한 공녀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위에 언급한 독살 사건을 증언한 공녀가 이 김흑이다.
넘어간 조선 여인들이 하나같이 고초를 겪어 조선에서 말이 많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태종이 겉으로라도 명나라에 대해 저자세로 나온 대가로 조선에 엄청난 무역 특혜를 제공했다.''' 황제국은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들에게 조공의 물량보다 더 많은 회사(回賜)를 내리는데, 태종은 이를 철저히 이용해 실리를 챙겼다. 본래 명나라는 조선과 대월(베트남), 시암(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류큐 왕국과는 2년에 1회 조공 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아직 몽골 세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태종 이방원이 친명 노선을 천명하자 명 측이 1년에 3회씩이나 조공 무역을 허용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 줬다. 이후 명나라는 손해가 컸는지 수시로 조공 무역을 줄이자는 얘기를 꺼냈지만 조선은 강하게 거부.[30] 태종이 명나라에 호의적인 정권이기도 했지만 태종이나 영락제나 모두 머리가 비상한 명군들이었고 무엇이 두 나라 관계에 도움이 되는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조명 관계는 정도전이 버티고 있고 매우 꼬장꼬장했던 태조 이성계 시기에 비해 매우 우호적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태종과는 위의 일화처럼 연왕 시절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있었고, 태종이 정도전을 숙청하면서 조명 관계가 개선되었기 때문에 개인적 친분과 정치적 이해를 같이 한다는 점도 꽤나 작용했을 것이다. 여하튼 두 나라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명나라의 멸망까지 지속되어서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음에도 지속적으로 명을 찾는 목소리가 많았을 정도였다.태종이 연부(燕府)를 지날 때는 연왕(燕王) 【즉 성조 황제.】 이 친히 대해 보았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우대를 받고 돌아오다. #
그리고 태종은 영토만큼은 지킨다는 방침을 세워 재위 내내 이 방침을 고수했다. 명나라가 조선의 동북 지역에까지 살고 있던 여진족을 직할로 통치하겠다는 소식을 듣자 태종은 즉시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명나라의 주장을 반박했으며 심지어는 마지막에 '''"폐하 아버지께서도 이건 인정하신 거니까 태클 걸지 마셈."'''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결국 동북 지역 여진족을 계속 조선이 관리하라는 말을 받아냈다. 물론 입만 살진 않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북방 경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저 저자세로만 나가지는 않은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영락제 치세를 살았던 세종대왕 대에도 더욱 강력한 대 여진 정책과 함께 그대로 유지된다.
이런 태종도 영락제가 베트남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는 '사대의 예'를 게을리하다간 조선도 베트남처럼 명나라에게 침공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말하며 100여명이 넘는 문신들을 모아놓고 영락제의 베트남 정벌을 축하함을 주제로 글을 쓰게 하고 태종이 직접 심사를 하였다고 한다. #
하지만 한편으로는 태종은 신료들이 영락제가 침공하면 대적 할 자가 없다고 두려워하자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라고 반박하며 명의 침공에 대비해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주장하면서 명과의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기도 하였다.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무과(武科)에 합격한 자는 항상 스스로 병서(兵書)를 숙독(熟讀)하는가? 숙독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들으니, '''황제(皇帝)가 안남(安南)을 정벌할 때에 안남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고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다'''." 하니,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내(李來)가 대답하기를, "'''천하(天下)의 군사로 이 조그마한 나라를 정벌하니, 누가 감히 대적할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안남 국왕(安南國王)이 황제에게 달려가서 고(告)하였으니, 황제의 거사(擧事)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황제가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 나라가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는다면,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죄(罪)를 물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편으로는 지성(至誠)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여긴다'''."
편전에서 병조 판서 윤저 등과 궁방 대책에 관해 의논하다. #
실제로 태종은 여진족 관련 문제로 영락제의 명과 충돌한적도 있었다. 조선 초기엔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조선과 명나라의 대립이 있었는데 당시 두만강 인근 변경 지역의 여진 부족은 조선의 지배를 받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사신 '왕교화적'을 보내 여진족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그곳 여진족들은 조선을 섬기기로 회맹하며 맹약을 맺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들 여진 부족에 대한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힘이 없는 약소한 여진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의 질서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초유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 태종은 곧바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길주도찰리사 조연이 이끈 1천여 명의 조선군 기병 부대는 올량합 부족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가옥과 논밭을 불태웠고, 수백여 명의 부족민을 참수, 이어 무기로 무장한 여진족 군사 1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또 참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조선군의 일방적인 토벌이었고, 태종도 이를 의식했는지 신하들과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태종은 자신의 상국인 '''명나라 황제를 속이기로 작정했고''', 태종의 계책은 성공해서 외교적 문제로까지는 비화되지는 않았다.
영락제의 조선 여인 선호는 딱히 이상하게 볼 것이 없는게 당시 명나라는 아직 원나라가 망한지 얼마 안 돼 원의 사고방식이 아직 잔존해있었고 영락제의 롤모델은 아이러니하게도 쿠빌라이였다. 즉 원대의 황제들이 고려인 공녀를 받던 관습을 이어나간 셈. 또 그는 쿠빌라이가 대도를 수도로 정한 것처럼 북경을 수도로 삼는데, 이는 현재까지 한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된다. 중심부에 가장 가까이 자리한 외국이 한반도가 됨에 따라 한반도가 중국 안보의 핵심지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괜히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하고 그 뒤를 이은 청나라가 청일전쟁 때 조공국인 조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겠는가?
영락제가 고려 시대에 세워진 거대 사찰인 흥왕사의 금탑을 탐내어 사신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에서 논쟁 끝에 결국 주었다는 이야기가 한국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는데, 정작 조선왕조실록이나[31] 명사 조선열전에서는 아무리 검색을 해도 전혀 찾을 수 없는 내용이라 신빙성이 의심된다.
8. 인물됨과 일화
혈족과의 권력 다툼과 그 끝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번영시킨 명군의 반열에 올랐고, 숙청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마침 동시기의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32] 태종과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태종이 왕자 시절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연왕으로 있던 영락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조선에 돌아와서 태종은 "연왕은 왕에만 머무를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태종이 간파한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태종도 정변으로 즉위했고 영락제 본인도 정변으로 즉위해서 그랬는지, 태종을 완전한 조선 국왕으로 인정해 준 것도 영락제였다.[33]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둘은 참 궁합이 잘 맞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는 태종이 직접 영락제에게 보낼 말을 골랐는데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평범해보이는 말을 골라서 바치라고 하니 영문을 모른채 영락제 앞에 보냈더니 영락제가 매우 기뻐하면서 조선 왕이 최고의 명마를 바쳤다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카를 폐위한 부분은 세조와도 비슷해 보인다. 환관들의 도움으로 황제가 됐다는 이유로 환관들의 세력을 키워 나라의 국운을 약화시킨 것도 세조가 계유정난의 공신들을 토사구팽하지 않고 우대해 나라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한 것과 비슷하다. 영락제의 차남인 주고후도 비만이었던 형 주고치에 비해 부황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훗날 조카 선덕제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려다 발각되어 본인과 그 가족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된다.
베이징에서 약 44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인 명십삼릉(밍스싼링: 明十三陵)이라고 부르는데, 그중 영락제의 능인 장릉이 가장 규모가 크며 유명하다. 장릉보다 더 큰 능을 만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장릉의 전각인 능은전(裬恩殿)은 자금성의 태화전에 맞먹는 규모이며, 태화전과 함께 중국 최대의 목조 건축이다. 만력제의 정릉 발굴을 주도했던 베이징 부시장 우한은 장릉 발굴을 추가적으로 준비하며 40만 위안의 예산을 국무원에 요청했으나 저우언라이 총리는 "나는 죽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라고 이를 거절했다. 이는 돈이 너무 드는 것도 문제였지만 당시 중국의 고고학 기술이 미비해서 유물 보전이 어렵기 때문에 추가적인 발굴을 하면 안된다는 고고학계의 탄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린(Giraffe)이 동양권에 알려지게 된 시기 또한 영락제 때. 그 기린 덕분에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효과도 있었다.[34]
'''십족을 멸한다'''는 말을 만든 장본인으로 정난의 변 과정에서 방효유의 십족을 멸족시킨 적이 있다. 원래 구족[35] 이라는 개념은 있어도 십족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런데 건문제의 측근으로서 연왕(즉 영락제)를 제거하려 한 방효유를 회유하여 즉위 조서를 쓰라고 했을 때 방효유가 이를 거부하며 오히려 연적찬위(燕賊纂位 : 연나라의 역적이 제위를 찬탈하다)라고 쓰자 화가 난 영락제가 "너의 죄가 구족에 미치더라도 계속 고집을 부리겠는가?"라고 했고, 이에 방효유가 "구족이 아닌 십족을 멸족시킨다고 해도 내 뜻을 꺾을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전무후무한 십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이는 구족에 친구와 문하생을 포함시킨 것. 방효유의 '십족'으로서 총 847명이 처형되었다고 하며, 이들은 모두 방효유의 눈앞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서쪽을 정복한 티무르가 명과의 결전을 준비한 것이 1404년의 일로 영락제는 1402년에 찬탈하고 황제로 즉위했으니 막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영락제와 정복의 막바지에 이른 티무르의 군세가 격돌할 위험이었으나 티무르는 1405년 병사, 당대 최강을 다투는 양 제국의 대결전은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잔혹도를 보면 티무르가 영락제보다 더 심하다.
9. 여담
영락제는 출생의 비밀에 있어서 의혹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사(正史)에서는 그가 주원장의 황후인 마 황후의 소생이라고 기재가 되어있지만, 야사 중에서는 그의 생모가 따로 있다는 의혹이 제기 되는데, 그 중에서도 몽골의 한 여인이 그의 생모라는 가설이 제기가 되지만, 정사에서는 전혀 그 여인이 설명되어 있지 않다.
10. 현대 매체에서
코에이의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4에서 명나라 세력에 포진. 전투치가 무려 '''96'''이며 다른 능력치도 준수한 동아시아 문화권 전무장중 최강의 먼치킨이다. 더욱이 기병 적성치도 S에다가 혈연 무장이라는 메리트가 있어서 병사를 더 많이 이끌 수 있으니 가히 야전에서는 적수가 없다. 특히 등장 시점에서 연령 '''10세'''[36] 라 10대 초반부터 세계정복에 나설 수 있다. 명을 컴퓨터에게 맡겨놓으면 시간이 지난 후 정난의 변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걸 보고 나면 이름이 본명인 '주체'에서 '영락제'로 개명된다.
허영만의 꼴에서는 황제가 되기 전에는 풍채가 별로 였는데 크고 아름다운 수염을 기른 후부터는 관상이 바뀌어 저 초상화처럼 상당히 후덕하고 호방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무협지에 가장 많이 배경으로 쓰이는 시간대가 바로 영락제 때이며 영락제 자신도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보통 무공이 강하고 매우 호전적이며 유능한 군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인지 한백무림서에서는 영락제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한백무림서에서 무림의 균형은 사패, 팔황, 구파와 황실이 지키는데 이 황실의 수장이 바로 영락제. 한백 무림서의 핵심 인물인 진천의 장인이기도 하고 무당마검에선 친정을 하여 챠이와 맞대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전작들에선 어째서인지 평범 이하의 스탯을 받았지만, 평가가 일신된 Europa Universalis IV 에서의 영락제는 군주 능력치 5 6 6으로, 최고 능력치가 6 6 6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보통 도합 능력치가 14를 넘어야 최고급 군주라고 불러주는데, 명나라에서는 14를 넘는 군주가 영락제와 6 4 6인 홍무제뿐이다. 동시기 왕조인 조선은 유일하게 4대 군주가 6 5 5로 이 기준을 만족한다.
어쌔신 크리드의 페이스북 판인 Assassin's Creed: Discover Your Legacy 에서는 성전기사단의 일원으로 등장. 방효유와 리 통의 부모를 비롯한 암살단 용의자들을 잡아다 모조리 처형[37] 하지만 결국은 1424년 리 통에게 암살당한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연왕일 때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온 이방원을 만나는 역할로 나온다. 문종원 씨가 연기했다. 쩌렁쩌렁한 발성과 남성적 포스가 넘치는 영락제 상을 연출해 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사를 한국어로 한다. 다만 첫 등장 당시에는 명나라 말로 말하고, 이방원의 조선말은 하륜이 통역해주다가 사실 연왕이 조선말을 할 수 있었기에 조선말로 대화하는 것으로 연출된다. 그래서인지 조선말을 쓰는 건 대부분 이방원과 대화할 때이다.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이라는 야사가 있는데, 드라마에선 이를 조금 차용해서 유모가 고려 출신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마지막 등장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이방원을 배웅할 때인데, 이때 서로의 무운을 빌어줬다. 이후 두 사람은 각각 옥좌에 오르게 된다.
용의 눈물에서도 등장해서 양녕대군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유명한 십족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태조 왕건에서 전이갑 역으로 유명한 중견배우 강만희 씨가 연기하여 짧은 시간이었지만 과연 황제다운 위엄 있는 모습을 선보였다.
중국 드라마 정화하서양 (국내명 정화의 대항해)에서 정화의 영원한 주군이자 절대 권력과 부를 지닌 스폰서로 콜럼버스나 마젤란 그리고 다가마와 비교하면 후임 탐험가들이 부러워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을정도 황제 즉위 후 엄청난 재정을 사용하여 지속적으로 정화를 믿고 아끼면서 지원한다.
그러나 홍무제의 유지(해상 무역 금지)와 대항해 정책을 반대하는 보수 관료 세력과 타협하면서 싸우고 아들들의 권력 투쟁과 문헌 편찬, 전국 각지의 천재지변, 티무르의 준동, 대운하 보수, 베이징 건설, 자금성 건설, 장성 축조, 황릉 건설, 몽골 원정[38] , 정화의 항해 비용, 항해 때 팔아야할 물건 구입, 외국 사신의 선물 비용, 부선장(정난의 변 때 영락제 편을 들고 이후 항해하면서 한족 해적과 같이 정화를 죽여 함대를 장악하려고 했고 조난 당할때 정화 제독은 죽었다 내가 관할한다고 하다 정화가 살아 돌아오자 그대로 항복하는등 지속적으로 찌질하게 하극상을 하다 죽는다.)의 정화의 모함 등을 해결하느라 고생고생하며 자금성과 베이징 공역이 끝나고 항해를 멈추고 민간에게 맡기고 해외에서 자체적으로 오게 하려하자 정화가 겁을 먹으나[39] 머잖아 정화가 프랑스 이탈리아 사람을 데려오는데 극진히 대접하지만 대화를 하면서 중국와 달리 유럽이 해상 진출에 적극적이면서도 무력적이고 욕심이 끝이 없으면서 무기도 성능이 뛰어난 것도 있는등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경계하고 내심 항해에 대해 생각을 하다 결국 몽골 원정길에 죽는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정화와 대항해를 지원한다.
배우는 마오쩌둥, 청 태종, 당 태종, 진 시황을 맡은 제왕 역의 원로 배우 당국강(국내로치면 제왕 배우로 유명한 유동근, 최수종 급 배우로 중국 공산당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한류에 대해서 안 좋게 말해서 국내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다.)이 맡았다.
2020년에 방영하는 중국 드라마 산하월명(山河月明)에서는 배우 풍소봉(영화 초한지-천하대전에서 항우를 연기했다.)이 주체역을 맡았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영락제의 꽃병이 유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