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원(남송)
馬遠
1160년/1165년?~1225년?
중국 남송의 화가, 대조(待詔). 호 흠산(欽山). 이당(李唐), 유송년(劉松年), 하규(夏珪)와 더불어 송실(宋室) 남도후(南渡後)의 4대가로 불렸고 하규와 같이 남송 후반기의 원체산수화(院體山水畵)를 대표한다. 7인의 화원화가를 배출한 화단의 명족(名族)출신이다. 가학을 전하는 한편, 스스로 한 기치(旗幟)를 세우고 산수 · 인물 · 화조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의 집안은 산서성(산시성/山西省) 운성현(원청현/運城縣)의 하중(허중/河中) 출신으로, 북송 말기의 마분(馬賁) 이래 마원(馬遠)의 아들 마인(馬麟)에 이르기까지 7인의 화원화가를 배출한 화단의 명족(名族)이다. 이당을 사사하였다고는 하나, 가학(家學)에 의한 화풍형성의 성과가 현저하여 원인(院人) 중 독보적인 존재였다.
가학을 전하는 한편, 스스로 한 기치를 세우고 산수 · 인물 · 화조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의 산수화의 붓 처리는 엄정(嚴整)했다. 초묵(焦墨)을 사용하여 수석(樹石)을 만들고, 지엽(枝葉)은 구륵(鉤勒)으로 그리고, 암석은 방경(方硬) · 대부벽준(大斧劈皴:산과 돌의 파리脈理, 음양의 향지(向背) 등을 표현하는 데 쓰는 화법)을 써서 널찍한 풍경을 그려내는 일은 드물었다.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의 정상과 절벽의 각부(脚部)를 나타내지 않고 가까운 곳의 산이 하늘까지 닿았으며 먼 곳의 산이 오히려 낮아서 '변각(邊角)의 경(景)', '잔산잉수(殘山剩水)'라고 말하여 '마일각(馬一角)'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산수의 자연을 묘사한 이당과는 달리 거기까지 도달한 사실(寫實)을 발판으로 산수의 작은 부분을 잡아 형식을 구성함으로써 정취를 빚어낼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구도는 긴밀하고 묘사수법은 간결하게 정리되어 윤곽선이 강조되었다.
그의 진필이라는 확증이 있는 작품은 없으나 정가당(靜嘉堂)의《우중산수도(雨中山水圖)》는 전마원화(傳馬遠畵) 중 일품(逸品)이다. 마원의 화풍은 원(元)의 손군택(孫君澤)을 위시하여 원나라 · 명나라대에 후계자가 많고 외국에까지 전해져 그곳 중국화형성에 기여했다.
아들 마인은 이종(理宗) 시대의 화원지후(畵院祗侯)로서 가학(家學)을 잘 전하였으나 부친인 마원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신마인(臣馬麟)'의 낙관이 있으며 1254년작으로 추정되는《석양산수도(夕陽山水圖)》, 그의 작품으로 전해오는《매화소금도(梅花小禽圖)》가 있다. 그러나 원대(元代)로 들어서면서 마씨(馬氏)의 화풍은 점차 형식화되었다.
[각주]
1160년/1165년?~1225년?
중국 남송의 화가, 대조(待詔). 호 흠산(欽山). 이당(李唐), 유송년(劉松年), 하규(夏珪)와 더불어 송실(宋室) 남도후(南渡後)의 4대가로 불렸고 하규와 같이 남송 후반기의 원체산수화(院體山水畵)를 대표한다. 7인의 화원화가를 배출한 화단의 명족(名族)출신이다. 가학을 전하는 한편, 스스로 한 기치(旗幟)를 세우고 산수 · 인물 · 화조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의 집안은 산서성(산시성/山西省) 운성현(원청현/運城縣)의 하중(허중/河中) 출신으로, 북송 말기의 마분(馬賁) 이래 마원(馬遠)의 아들 마인(馬麟)에 이르기까지 7인의 화원화가를 배출한 화단의 명족(名族)이다. 이당을 사사하였다고는 하나, 가학(家學)에 의한 화풍형성의 성과가 현저하여 원인(院人) 중 독보적인 존재였다.
가학을 전하는 한편, 스스로 한 기치를 세우고 산수 · 인물 · 화조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의 산수화의 붓 처리는 엄정(嚴整)했다. 초묵(焦墨)을 사용하여 수석(樹石)을 만들고, 지엽(枝葉)은 구륵(鉤勒)으로 그리고, 암석은 방경(方硬) · 대부벽준(大斧劈皴:산과 돌의 파리脈理, 음양의 향지(向背) 등을 표현하는 데 쓰는 화법)을 써서 널찍한 풍경을 그려내는 일은 드물었다.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의 정상과 절벽의 각부(脚部)를 나타내지 않고 가까운 곳의 산이 하늘까지 닿았으며 먼 곳의 산이 오히려 낮아서 '변각(邊角)의 경(景)', '잔산잉수(殘山剩水)'라고 말하여 '마일각(馬一角)'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산수의 자연을 묘사한 이당과는 달리 거기까지 도달한 사실(寫實)을 발판으로 산수의 작은 부분을 잡아 형식을 구성함으로써 정취를 빚어낼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래서 구도는 긴밀하고 묘사수법은 간결하게 정리되어 윤곽선이 강조되었다.
그의 진필이라는 확증이 있는 작품은 없으나 정가당(靜嘉堂)의《우중산수도(雨中山水圖)》는 전마원화(傳馬遠畵) 중 일품(逸品)이다. 마원의 화풍은 원(元)의 손군택(孫君澤)을 위시하여 원나라 · 명나라대에 후계자가 많고 외국에까지 전해져 그곳 중국화형성에 기여했다.
아들 마인은 이종(理宗) 시대의 화원지후(畵院祗侯)로서 가학(家學)을 잘 전하였으나 부친인 마원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신마인(臣馬麟)'의 낙관이 있으며 1254년작으로 추정되는《석양산수도(夕陽山水圖)》, 그의 작품으로 전해오는《매화소금도(梅花小禽圖)》가 있다. 그러나 원대(元代)로 들어서면서 마씨(馬氏)의 화풍은 점차 형식화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