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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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몽골 제국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시기를 말한다. 수도는 대도#s-4(칸발릭).
2. 상세
'''아시아의 역대 국가 중 가장 넓다.'''청나라의 영토보다 더 넓다고 보기도 한다. 참조 하지만 넓이와는 달리 왕조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애초에 군사력만으로 세워진 나라여서 과거 고대 로마나 중화 제국과는 달리 소프트파워가 부족했고 황제들이 대부분 문맹이었으며,[2]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애시당초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러고도 97년을 버틴 게 대단한 거다.[3]
다른 왕조들과 달리 이 왕조는 현재도 후신을 자칭하는 민족이 독립 국가를 유지하는 데다[4] 요나라 및 금나라나청나라와는 달리 한족을 노골적으로 노예 취급했기 때문에 외몽골의 할하 몽골인들은 이 시기의 중국을 몽골의 식민지로 평가한다.
그에 반해 정부가 중심이 되어 '''막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은 칭기즈 칸을 세계를 지배한 중화 몽골의 대영웅이라고 보고 있다. [5] 한편 중국 내몽골 지역의 차하르 몽골족은 원나라를 몽골족이 중심이 된 중국 왕조로 본다.[6]
몽골 제국의 제5대 쿠빌라이 칸이 국명을 중국식인 '''대원'''(大元)으로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국호는 주역의 건원(乾元)을 설명하는 '''대재건원 만물질시(大哉乾元 萬物質始,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의 시작이로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7]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중원 왕조로서의 전환은 아니었고, '''서역의 4대 칸국[8] 을 포함한 몽골 제국의 명목상 대칸으로서의 정체성도 계속 유지했다.'''
중세 몽골어로 '''다이운 여커 몽골 울루스'''라고 불렀으며, 이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이라는 뜻이었다. 황성은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남송 등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고, 고려를 침공해 부마국으로 만들었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지로 쳐들어갔다가 카미카제와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후퇴하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을 정복하려다가 쩐흥다오의 전략에 말려들어 물러났으며 잘 안 알려졌지만 인도네시아, 미얀마에 이어 아이누가 살던 사할린 땅을 침공하기도 했다.
명나라에 의해 중원에서 추방된 이후 만주 북부와 내몽골에서 '''북원'''으로 이어졌다. 북원은 겨우 3대에 천원제가 대칸위를 조리그투 칸에게 찬탈당하였는데, 이때 실질적으로 "원나라"로서는 멸망한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몽골"로서는 이후 한참 더 존속하다가 청나라에게 내•외몽골이 차례로 복속되었다.
한족을 정복 왕조 내의 다른 백성들처럼 대하지 않고 하층 계급[9]
종교는 티베트 불교였는데 라마교라고도 불리웠다 티베트 불교는 동아시아 국가들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성행한 밀교와는 전혀 다른 후기 밀교였고, 탄트라 좌도 밀교였다. 티베트 불교(후기 탄트라 좌도 밀교)는 한국, 중국, 일본에는 전파된 적이 없는 종교였는데 딱 원나라 시기에만 중국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원나라의 경우 중국 대륙에 존재한 몽골계 국가였기 때문에 당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좌도 밀교)가 성행하였고 원나라가 사라지자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도 사라졌다가, 나중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몽골인과 티베트인이 중요한 대접을 받았보니 다시 중국에 티베트 불교가 활성화되었다.
2.1. 사회
정복활동 초기, 몽골은 한때 실제로 중국인들을 모두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아 논밭을 목장으로 바꿀 계획이 있었다. 그러자 야율초재의 "근데 얘들 죽이면 세금은 어디서 걷어요?" 이 한마디에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중국 쪽에 있긴 한데, 스기야마 마사아키 같은 학자들은 거짓말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몽골인들도 세금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도시 한두 개도 아니고 화북의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는데 그런 계획을 했을 리가 없었다.[11] 목초지 발언은 몰라도, 일단 야율초재에게 거란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들을 모두 죽여주겠다고 한 말은 진심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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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통치는 '''영주분봉제'''로 기본적으로 봉건적 신분제 사회였다. 원나라는 '''몽골인 → 색목인 → 한인 → 남인''' 이렇게 계급순으로 구성된 신분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때 한족들은 3~4 등급의 피지배층으로 분류되어 생활하였다.[12] 그리고 원나라에서는 호적상 이들의 신분층을 계관호와 투하호로 나누었는데, 투하호는 귀족에 사적으로 배속된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양민층이었으며 노예층은 '구구'라고 따로 불리었다. 원나라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노예들을 해방시켜 양민층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외에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원나라의 법률은 "'노예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했는데, 주인은 임의로 노예를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다.
- 20가구를 1갑(甲)으로 편성하였다. 각 갑마다 한 명의 갑주(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으로,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13]
-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열더라도 대부분 어용 집회.
-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15] .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 노예는 사유물로 그 재산은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
- 전부는 아니지만 노예인 한족에 한해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 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주중팔.
- 과거제도에 있어서도 계급별로 할당량을 정해두어 최하계급인 남인의 경우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 《몽올아사기》에서도 4등인제가 언급되고, 서방 수도사 오도릭의 글에도 한족을 차별하는 정책적인 도구인 보갑제가 등장한다.
《진여록》(燼餘錄)에 의하면, '원나라가 개국한 뒤에 20가구를 ‘갑’으로 개편하고, 젊고 튼튼한 사람을 ‘갑주’로 하였으며 의복, 음식을 하고자 하는 대로 다 하였다. 동자나 소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칠경록》에 의하면 '몽골인과 색목인의 포로 중 남자는 '노'라 하였고 여자는 '비'라 하였다. 이들을 통칭하여 구구라 하였다.' 왕서노의 《중국창기사》에 의하면 원나라때 거의 모든 한인이 노예였고 외족(몽골/색목인등)에 의한 한족 여성 수탈은 전 중국에 두루 퍼졌다고 한다.
홍익희 세종대 교수의 책에서 초야권에 대한 글이 나온다. 홍익희의 유대인경제사 중국학자 신력건도 초야권을 말하고 있다. 신력건의 원조에 대한 글
일부 중국 학자들에 의하면 초야권이라는 법령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원나라 통치 기간 동안 카안들은 오히려 순결을 강력하게 장려했다고 한다. 당시 중원 지역에 온 몽골인은 겨우 30만 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주로 군인인지라 편제 유지에 집중해야만 했으며 나머지 지역으로 흩어진 몽골인들의 숫자도 매우 적었다는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 초야권에 대한 중국측 논의1 초야권에 대한 중국측 논의2
강남 지역에서는 남송대부터 터를 잡은 일부 지주층들이 원대에 그 기득권을 인정받아 자치를 행했다는 설도 있다. 이들은 관할 구역 내에서 봉건 영주처럼 군림하면서 몽골 정부에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주민을 농업 생산이나 산업 일꾼으로 부리는 한편 향촌 사회를 유지하며 과거제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나중에 원말 한족 군웅으로 궐기하여 원나라 붕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중국 역사의 영어권 권위자인 미카엘 딜런 교수에 의하면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한족들이 얼마나 치를 떨었는지 몽골 문화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해 수백만명의 몽골인 남성들과 색목인 남성들을(Israeli, Raphael (2002). Islam in China.) 한족 여성과 강제결혼을 시켰을 정도라고 한다. https://books.google.co.kr/books?id=BwuSpFiOFfYC&pg=PA31&redir_esc=y&hl=ko#v=onepage&q=Han%20wives&f=false 반대로 몽골인 여성들과 색목인 여성들 또한 한족 남성과 강제결혼을 당했다.
서울대학교 김호동 교수의 논문 《팍스 몽골리카와 중국》에 의하면 일본학자 舩田善之가 '색목인'이라는 명칭을 연구하면서 색목인이라는 명칭은 한족을 차별하기 위한 구분이 아닌 구별을 하기 위함이라 하면서 나아가 4등인제에 오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호동 교수는 이 설에 호의를 보이면서도 '이러한 견해는 이제까지 색목인에 대한 이해가 몽골 지배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의 영향을 받은 것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이라는 구분이 처음부터 민족 차별을 위해서 도입된 분류는 아니었지만, 현실적으로 한인이나 남인에 비해 색목인들에 대해 우대정책을 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며 한족이 차별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원말, 주원장을 비롯한 여러 실력자들이 강남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원나라를 칠 여력을 확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유복형이나 조양필 등 한족 간부들도 원나라 황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곤 했다. 특히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다.
또한 당시 원나라의 인구비를 살펴보면 몽골인 100만, 색목인 수백만, 한인 1000만, 남인 6000만 가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몽골군이 강하다고는 해도 몽골인과 색목인으로 6000만명을 지배한다는건 너무 힘든 일이라 제 3계급인 한인을 활용했다. 고려인은 3계급에서 우대받은 편이라(처음부터 우대받은 건 아니었고, 고려가 부마국이 되고난 뒤 세월이 지날수록 지위가 나아졌다) 고려인만을 대상으로 뽑는 과거제도(괴과-魁科)를 시행하기도 했고, 여기서 장원급제한 전원발[18] 같은 경우는 병부상서까지 오르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 이곡, 최해 같은 이들이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는 등 고려인 관리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사서를 보면 몽골인들이 군사 부문 외엔 행정에서 별로 한 것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점령지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 상당히 위태로웠다. 비유하면 군대는 있으나 경찰이 없어서 몽골인이 적대적인 점령지에 소수로 여행을 다니기에는 매우 위험했다. 조공을 바치면서도 자기들끼리는 대놓고 몽골인을 '타타르'라고 부르며 경멸한 러시아 같은 지역들은 몽골인을 죽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안전책도 없이 갔다가는 사망 확정이었다. 유목민이 선조인 나라들을 봐도 특이한 케이스다. 물론 농경국가적 성격이 있는 경우다. 몽골의 경우도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만주족과 몽골인을 비교하면 몽골인 쪽이 밀리는데 사실 묶어서 분류하기에 원나라는 너무 특이한 나라다.
명목상으로는 몽골인이 중요한 행정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몽골 제국에서 여러모로 우대를 받던 색목인들의 기록에서는 잉여다. 물론 페르시아인처럼 몽골인들에게 털린 사람들도 있어서 폄하로 볼 수도 있으나 거란족인 야율초재의 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반론을 하려고 해도 몽골 출신의 학자나 심지어는 글을 제대로 알던 사람도 극히 적기 때문에 반론도 거의 불가능하다. 학문적 스펙이 뛰어나지 않았던 사람들도 좋은 결과를 낸 적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나, 일단 학문을 알아서 학문적 능력을 기른 사람들이나 그렇고 몽골인들은 학문 자체를 모르니 답이 없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수학적 업적을 남기려면 일단 학벌이 좋지는 않아도 수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몽골인은 자기가 직접 학문하는 것보다 다른 민족들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통수를 맞을 위험이 항상 있었다. 이런 문제점 때문이라도 메이저 민족들 중에서 유목민 출신 선조들을 가진 경우를 살피면 유목민들도 본인들이 어느 정도 학문에 관심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는데,[19] 특이하게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자기가 직접 공부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이 운영하던 국가였다. 그러나 각 지역에 동화된 이후에는 지역문화에 능통해진 몽골인들도 많으니 일반화는 다소 위험하다.
한편 유복형은 고려인인 홍다구와 함께 원나라의 일본 원정에 선봉장으로 섰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중세사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프린스턴대의 Frederick W. Mote 교수에 의하면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몽골인들이 존재한 반면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더 많은 몽골인들이 존재했다고 한다.[20]
2.2.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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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중국 통일 왕조들 중 가장 영토가 넓었지만 행정력이 가장 취약했다.''' 그야말로 '''군현제를 1,000년전 봉건제로, 근세기 중앙집권국가를 중세 봉건제도로 되돌린 수준이었다.''' 사실 이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지방 행정 제도는 중서성이 승상부 역할을 맡아 전 지역을 총괄하고[21] , 그 아래에 11개 행성을 하남, 강남, 섬서, 사천, 요양, 감숙, 운남, 영북, 정동[22] 에 두어 지방을 통치했다.
그 지역의 3분의 1이 정복 활동 도중에 분봉된 왕공제후들 및 정복전쟁 당시 원나라에 붙은 군벌들의 영지가 되어 곳곳에 왕부가 설치되었다. 이들 지역에 대해 원 황실은 간섭은 할 수 있었어도 통치는 사실상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징세, 징병, 행정력 행사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하기 힘들어 중앙집권보다 봉건제에 가까웠다.''' 이건 현대의 기준에서 봐도 자치국이나 마찬가지다. 거기다 중서성 관할 지역에서도 왕공제후들 및 귀족들의 영지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거기다 정규군으로 화북에는 4개 몽골 도만호부,[23] 강남에는 22익, 후광 및 쓰촨 지역에 각각 6익의 한군 만호부[24] 들을 배치했는데, 영지까지 분봉시켜놓고 지휘관은 세습이었다. 거기다 이들은 지방행정체계인 행성 밖에서 존재했다. 따라서 얼마 못 가 죄다 군벌화되었다.
황실 직할군은 시위 군단과 케식 합쳐서 1개 도만호부 수준이었다. 여기에 유목민 특유의 문화와 관료제의 미비 등으로 인하여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특히 더 낮았고, 이 때문에 다른 왕조들처럼 지방 세력의 발호를 억제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은 쿠빌라이 칸이 남송 원정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것저것 이권을 막 퍼줘서 가능했다. 쿠빌라이 칸은 왕공제후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케식을 인질삼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원 황실은 이걸 통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회를 열어 달랬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심심하면 반란과 쿠데타가 일어났다.
다만 행정이 미비했다고 하더라도 나름의 정보 연결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강남의 한족 부호층은 천자만 열 수 있는 과거 시험을 감히 열고 여기에 서생들이 많이 참여하는 걸 알고 있었으나 몽골 지배층은 이걸 그냥 일종의 유치한 코스프레쯤으로 인식했기에 너그럽게 웃으며 넘어가주는 대범함도 있었다. 걍퍅한 훗날의 청나라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진정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이런 과감한 관용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보는 엉뚱한 시각도 있으나, 청말[25] 과는 달리 원말 때는 유학적 사고로 무장하여 원나라에 충성하다가 죽어간 한족 지식인들도 생각보다 많았음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26]
2.3. 문화
근본적으로 '''몽골 지상주의'''였으나 청나라처럼 한족의 문화를 탄압하지 않았기에 이 나라도 한족화는 피하지 못해 후대로 갈수록 몽골 귀족들이 중국식 문화에 젖어 몽골식 성명을 중국어로 치환했다. 물론 변발과 호복은 이 시기부터 북중국에 한해서만 강제했다는 말이 있으나 명목상에 불과했으며, 남중국은 사실상 한족 신사층을 중심으로 자치제를 유지해 터치도 안 하고 내버려 뒀다.[27]
이름만 중국식으로 바꾼 게 아니라 중국의 제도 등을 도입하고, 후대로 갈수록 중국색이 강해지게 되지만 다른 이민족 국가들에 비하면 그 강도가 약했다. 중국 특색을 지양하며, 몽골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골인의 숫자가 너무 적다보니 유지하기가 매우 까다로웠고 그 성격도 매우 이질적이라 오래가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그들의 문화는 그 시대를 지탱하는 데만 유효했다. 그나마 청나라의 만주족과 달리 그 정책 때문인지, 아니면 북방에 근거지가 건재해서인지 나라 자체는 망하지 않고 몽골 공화국으로 계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28] 물론 그전에 할하, 차하르, 부랴트, 오이라트 등 부족별로 분열되었고 외몽골은 청대에도 반 독립지역으로 놀았기 때문에 독립이 가능했으나 내몽골은 만주족과 일체화되어 현재까지 중국의 일부로 남아있고 부랴트 역시 일찍이 러시아인들에게 점령당해 자연스레 러시아화되었다.
물론 원나라가 남긴 문화적 영향도 있긴 하다. 아니, 꽤 많다. 대표적으로 매우 인기있는 중국인들의 간식인 북경 양꼬치가 바로 원나라와 명나라 때 북경에 잔류한 몽골인들에게서 유래한 것. 그리고 명나라 초•중기의 복식도 한동안 몽골식 복장의 영향을 받은 형태였고[29] 베이징의 지역색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줬으며 베이징의 여러 지명도 몽골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작곡가 가오샤오숭(高晓松)이 방송에서 베이징의 명칭이 촌스럽다는 말에 몽골인이 글을 몰라서 그랬다는 무개념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변발과 모자는 청나라대에 널리 퍼졌지만 기원은 원대다. 소소하지만 휴지 문화 또한 원나라 때에 생겼다. 원나라 이전에는 일을 본 뒤 얇게 가공한 나무 조각으로 닦았다고... 또한 북방 중국인(북부 한족)의 혈통에는 적잖이 북방계(몽골) 혈통이 섞여있는데 몽골 통치하에 혼혈되어 태어난 것이다.
또한 원은 훗날의 명, 청과는 달리 기록 문화 자체에 관심이 적었기에 적어도 문자옥 같은 무시무시한 일은 자행한 바 없었다.[30]
3. 황실
3.1. 역대 황제
원나라 건국(1270년) 후의 군주들만 다뤘다. 그 이전과 이후의 칸들은 몽골 제국이나 북원 항목을 참고. 국성은 보르지긴(孛兒只斤)이다.
아래의 역대 황제란을 보면 알겠지만, 국가가 존속했던 97년(1271-1368) 중 첫 번째 쿠빌라이(25년)와 마지막 토곤 테무르(36년)를 빼고 나면 39년(1294-1333)에 황제가 9명이 있었던, 여러 가지 의미로 대단했던 막장 나라다. '''평균 약 4년.''' 그마저도 13년 동안 재위한 2대 테무르를 제외하면 26년간 8명에 '''1대에 3년.'''
3.2. 계보도
3.3. 추존 황제
4. 미디어에서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이 나올 때 후일담으로 잠깐 언급되거나, 전성기인 쿠빌라이 칸 시대에 활발한 해외원정에 딸려서 언급되거나, 말기에 개판오분전이 되어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상황이 나오거나다. 한국의 경우 대몽항쟁기의 사건이 사극 등에 자주 나온다.
신의(드라마)에서는 공민왕 때까지의 고려왕들이 전부 줄줄이 무능했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고려를 합병하려고 했다.
기황후(드라마)에서는 기황후, 고려의 가상왕 왕유, 토곤 테무르(혜종)의 관계를 초반에 가상적으로 설정한 스토리로 시작하여 이후 원나라에서의 스토리를 다룬다.
중국 드라마인 건원풍운(국내명은 칭기즈 칸의 후예)에서 쿠빌라이 칸에 대해 다루었다.
김용의 문학작품인 의천도룡기에서 원나라의 말기의 주원장을 비롯한 대대적인 한족들의 대몽 항쟁이 그려진다.
미국 드라마 마르코 폴로(드라마)도 이 시대가 배경. 다만, 실제 역사와 안 맞는 부분이 많으니 드라마 내용을 사실로 판단하지는 말자.
5. 여담
- 원나라의 법전 중 하나인 지정조격 유일본이 대한민국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도 라면 박스 안에서.세계 유일 몽골 최후의 법전 '라면박스'서 찾았다 몽골 전 대통령이 이를 보기 위해 한국을 방한했을 정도.
6. 둘러보기
[1] 대도는 겨울 수도, 상도는 여름 수도로 기능하였다[2] 물론 중국의 한족 기준에서. 당연히 그들의 모어인 몽골어는 읽고 쓸 줄 알았다.[3] 원나라보다 단명한 세 왕조는 존속시간이 고작 10여년~30여년 수준으로 급이 다르다. 게다가 측천무후의 무주나 왕망의 신나라는 너무 단명해서 아예 왕조로 쳐주지도 않는다.[4] 외몽골의 할하 몽골족 한정. 내몽골은 중국, 부랴티아는 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 잔존하고 있는 형편이며 내몽골인의 경우 내몽골 내에서조차 소수다. 단 내몽골인 역시 국적이 중국인일 뿐, 만주족처럼 언어와 풍습을 완전히 잃는 정도로 동화되지는 않았다.[5]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우면서 몽골 제국이 본격적으로 중국화되긴 했지만, 쿠빌라이 칸 본인은 비록 자신을 중화 황제라 자칭한 적은 있어도 정작 한족 문화에는 전혀 익숙해지지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중국어 한마디 할 줄도 몰랐으므로 이 역시 영 아스트랄한 건 마찬가지.[6] 내몽골의 몽골족인 차하르인은 몽골국의 할하인 및 러시아의 부랴트인, 오이라트인과 원래 사이가 나빴다. 유목민에게 부족이 다르단 건 그냥 다른 나라라는 것이다. 현재도 내몽골인과 외몽골인의 키배는 살벌하다.[7] 비슷한 이유로 북위를 세운 탁발씨도 한화 개혁을 추진할 때 황족의 성을 원씨로 선택했다.[8] 일 칸국, 킵차크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9] 다만 의외로 원명 교체기에 원나라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한 한인 사족들이 굉장히 많았다. 중앙의 조정이 몽골인과 색목인 위주로 구성되었던 것과 달리 사실 원나라의 지배체제는 기본적으로 향촌 자치적 성격이 매우 강했다. 즉, 자신들에게 바칠 것을 바치면 향촌 세력가들이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향촌을 어찌 다스리든지 방관하는 자유방임적인 통치체제였던 것이다. 향촌의 사족들이 사실상 동네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원나라가 대도를 버리고 초원으로 후퇴한 시점에서도 끝까지 따라가서 충절을 지킨 한인 관료들이 많았고 원나라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족들이 많았다.[10] 다만 그것보다는 의외로 몽골인들이 자기들 마음에 든 사람들에겐 대우를 해줘서 그렇다. 그래서 뭔가를 받은 인간들은 의외로(?) 충성했다.
【고려사 세가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