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리누스
카라칼라를 암살하고 제위에 오른 황제.마크리누스는 카이사레아 출신의 무어인으로 아주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따라서 그를 정신력으로 궁정까지 올라간 나귀에 비유하는 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특히 그는 무어인들의 관습에 따라 한쪽 귀를 뚫었다. 출신 등에서 오는 이러한 약점은 그의 강직한 성품에 가려졌다. 그러나 법과 판례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면 법조문 등을 충실하게 따르기는 했지만 이에 대한 지식은 정확하지 않았다.
ㅡ 디오 카시우스 79. 11
1. 생애
164년에 마우레타니아 해안의 항구 도시 카이사레아에서 태어난 그는 고대의 역사가들이 제시하듯이 그렇게 비천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부모는 노동 빈민이 아니라 중산층에 속하는 에퀴테스[2] 였다. 마크리누스는 변호사 수업을 받았지만, 그가 처음 출세의 기회를 잡은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 근위대장을 지낸 막강한 플라우티아누스의 재산 관리인이 되었을 때였다. 212년에 마크리누스 자신이 근위대장이 되어 있었고, 동부에서 카라칼라를 받들면서 원정을 벌이고 있을 때 권력을 잡을 기회가 찾아왔다.
2. 제위에 오르다
그 당시 파르티아와의 전쟁 중에 잦은 실책을 저질러 병사들로부터 불만이 많았던 카라칼라를 암살하고 제위에 올랐다.[3] 217년 4월 8일 카라칼라가 살해되었을 때 제국에는 제위를 계승할 만한 명백한 후계자가 없는 상태였다. 카라칼라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데다 공개적으로 후계자를 지목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암살의 주역들에게는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을 제위에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 카라칼라를 살해한 목적 자체가 이미 마크리누스를 황제로 올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계승 문제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지만, 암살 공모자들은 아주 신중한 행보를 보였다. 마크리누스는 3일을 기다린 후 217년 4월 11일에 휘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마크리누스가 식민지 출신으로 처음 황제가 된 인물은 아니지만 원로원 의원이 아니면서 제위에 오른 최초의 황제라는 점은 꽤나 주목할 만하다.
마크리누스는 꼭 필요한 몇몇 사람만을 처형하는 것으로 치세를 시작했고[4] 몇몇 속주 총독을 자신의 출신 계층 측근과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로 바꿨다. 그는 곧 카라칼라의 모후 율리아 돔나와 사이가 틀어졌는데, 그녀는 처음에는 안티오키아에서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군사들과 공모하는 유혹을 버텨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유방암이 진전된 상태였던 그녀는 마크리누스가 안티오키아를 떠나라고 하자, 스스로 굶어 죽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관건은 파르티아인들이었다. 그들은 1년 전 카라칼라의 뒤통수 공격에는 대비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217년 가을까지 강력한 군대를 규합한 뒤 많은 병력을 이끌고 로마의 기지로 진군해왔다. 두 진영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니시비스에서 충돌해 치열한 전투를 치렀지만 어느 쪽도 우세를 차지하지 못했고 그는 아르타바누스 4세에게 카라칼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2억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점령한 영토들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마크리누스가 맺은 굴욕적인 강화 협상 내용이 알려지자 귀족들과 시민들이 반발하였고 그의 인기, 특히 군인들 사이에서의 인기가 급락했다. 게다가 카라칼라가 군에 부여한 특권들을 일부 없애기 시작하면서 군인들의 반발을 더 사고 말았고 스스로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그렇게 마크리누스는 자신의 제위를 확실히 다지기 위하여 파르티아와 굴욕적인 강화 교섭[5] 을 맺고는 전쟁을 끝내버림으로써 오히려 병사들의 눈 밖에 나고 그들이 다시 카라칼라를 그리워하게 만드는 일을 저질렀다. 추가적인 내용은 니시비스 전투 항목을 참고.
3. 반란, 그리고 죽음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짜 안토니누스'가 나타났다. 그는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Juila Maesa)의 외손자인,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진 14살의 바리우스 아비투스였다. 218년 5월 15일 밤에 소규모의 추종자 무리가 그를 에메사 근처의 라파나이아(Raphanaea)에 있는 제3군단 '갈라카' 병영으로 몰래 데리고 갔다. 다음 날 아침 군인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고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비투스가 정말로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소문에 특히 열광적이었는데, 왜냐하면 카라칼라는 이전의 콤모두스와 마찬가지로 군대 내에서 인기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마크리누스는 아홉살 난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Diadumenianus)를 아우구스투스 직위에 올림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이를 기회로 병사들에게 하사금을 나눠주며 그들의 신임을 다시 얻어보려 했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결국 그는 안티오키아로 달아나야 했다.
218년 6월 8일, 마크리누스는 안티오키아 외곽에서 반란군들에게 패한 후 로마에서 지원군을 규합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는 발각되지 않으려고 수염과 머리를 다 밀었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났고 보스포루스를 건너려고 기다리던 중에 칼케돈(Chalcedon)[6] 에서 체포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그의 아들 역시 시리아 국경에 있는 제우그마에서 파르티아로 달아나려다가 체포되었다. 마크리누스는 감시를 받으며 남으로 이송되다가, 카파도키아(Cappadocia)[7] 에 있는 아르켈라이스(Archelais)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결국 그는 황제로서 로마는 고사하고 유럽 대륙에 발조차 못들인채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그렇게 세베루스 왕조는 지속되게 된다.
그가 몰락하게 된 이유는 파르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도, 엘라가발루스 지지 세력들과의 싸움에서도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그의 입지가 손상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군대의 급료와 특권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그가 몰락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1] 마크리누스가 무어인이라는 것은 외모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절에 유행한 수염 기르는 것까지 선황을 생각나게 하는 독특한 특징들을 지니려고 노력했다. 그는 또한 3세기 초에 고위층 로마인들이 일반적으로 착용하는 것 이상의 보석이나 장신구를 몸에 지녔고, 황제의 흉상은 지금까지 4개가 남아 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의 동상은 1969년 당시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발견된 동상 하나뿐이다.[2] 고대 로마의 기사 계급.[3] 하지만 뒤의 내용을 보면 마크리누스는 카라칼라를 능가하는 실책을 저질렀다.[4] 이때 그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카라칼라를 암살한 사람도 사형 크리를 먹었다.[5] 금관을 바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6] 터키 이스탄불 맞은 편 보스포루스 해협 동부 해안에 있던 고대의 해상도시.[7]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 지명.